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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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예술가란 독창적이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에 항상 몸을 불사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정체 모를 욕망에 사로잡혀,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다. 돌파에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다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잘 살지 못하는 예술가한테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모범적'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사임 수틴(Chaim Soutine)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데, 시민적 도덕의 기분으로 보면 빈말로라도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수틴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  12p 

 
서경식의 삶의 배경은, 예술작품을 보는 시선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쫓겨야 했던 예술가들, 사회로부터 억압받아야 했던 예술가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었던 예술가들. 청춘의 사신(死神)에 소개된 작품과 화가들은 뾰족한 고통에 갇혀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기도 하고, 사회의 이념에 거부당한 채 도망 다니거나 숨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광기 어리고 반항하며 고통받고, 힘에 겨워 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화가에 대한 서경식의 집약된 설명은, 그 느낌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 작가들에 집중한 많은 칼럼, 미술 이야기들과 달리 그가 일본에 적(籍)을 두고 살았고, 마이니찌 신문에서 연재하던 글이었기 때문인지 일본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사에끼 유우조우의 <심바시 풍경>이나 이께다 요오손 <재화의 흔적>은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화조풍월(花鳥風月)만을 주제로 삼았던 시대에서 일본화의 울타리를 깨뜨리며 어두운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그들의 그림에서 매력을 느꼈다. 시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그렸던 일본 화가들의 의지와 고집이 나를 사로잡았다.

앞서나갔던 그림들, 현실을 반영했던 그림들은 20세기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나치즘이 판치던 시절, 많은 작가는 퇴폐화가로 분류되며 붓과 그림을 팔 수 있는 통로마저 빼앗겼다. 불행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던 예술가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경식이 소개하는 그림들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일곱 가지 대죄>는 진실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해직을 당하고 제명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맞섰고,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전선으로 보내지기까지 한다.

로비스 코린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에밀 놀데...
모두 동시대에서는 억압당하고 조롱당한다.
또 사임 수틴이나 샤갈 등 망명자, 디아스포라들의 그림을 설명하며 느껴지는 그의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동병상련, 동질감을 화가에게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많은 그림을 직접 보러 다녔다. 그의 눈 앞에 그림들은 그에게 많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던져준 듯 보인다. 그는 그림을 그린 '사람'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글로 전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뼈 아픈 역사적 진실과 독재, 식민지라는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상황을 이해하며 작가를 깊게 들여다 보았다.

대량학살, 세계대전, 난민의 시대인 20세기는 참혹했고 메말라 있었다.

청춘의 사신(死神). 언제나 죽음은 근접해 있었고, 언제든 죽을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고통과 악몽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급급했던 시기에 예술가들은 열정을 표현했고, 그 열정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 감정과 상황들은 그림의 형태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경식은 이 모든 예술가들이 그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어둡고 답답한 삶에 창(窓)이  되고 있다고. 예술가들의 창(窓)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이 지금 우리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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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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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란 무엇일까? 그 뿌리를 찾기 위해 역사를 뒤지고, 한 번도 밟지 못한 조국을 그리워하고, 끝은 꼭 뿌리의 끝이 있는 그곳에 묻히길 바란다. 외지에 나와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조차 고향을 그리워하고 산란기 연어들처럼 회귀하길 바라며, 늙고 힘이 없어졌을 때 고향에 뿌리를 두고 생을 마감하길 바란다. 인간에게 뿌리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며,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노스텔지아이다.

서경식, 그는 왜 디아스포라가 된 사람들의 흔적을 밟았는가? 자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동병상련을 느끼기 위해서?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소수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원해서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었고, 그를 위해 그의 뿌리인 조국은 힘써야 했다. 그의 정신적인 상처, 그것은 문화, 언어, 인종 모든 것이 뒤섞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언제나 의문을 가져야 하는 피로함이다. 그 피로함 뒤에는 처절함과 슬픔,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얽혀 뿌리에 관한 근원적일 질문을 다시 하게 되는 그로 돌아온다. 존재에 대한 의문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그것은 다수자들은 알 수 없는 그만의 짐이다.

이 책에서 그는 디아스포라의 행적을 따라다닌다.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에서 생각한 것들과 그 도시에 유영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흔적들. 그는 한시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는 못 살겠다는 사람처럼 망명자들, 추방당한 자들의 흔적을 찾고 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굴레가 그를 옭아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가 아니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사회적인 위치를, 마음의 상흔을, 고독함을, 외로움을, 한 민족이라는 우리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그리고 알려 하지 않는다. 관심 두지 않는다. 그건, 그들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디아스포라인 '재일조선인'은 외롭다. 민족이 외면하고 국가가 외면한다. '경계인' 그들은 경계인이 되어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뿌리를 뻗고 속 편하게 살 수 없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며 조선인이지만, 일본 국적이 없는 상태로 일본에서 살아가며 한국 국적을 갖고 모든 것이 감시 태세이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상태.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진 채 살아간다. 

조선이 분단되고 '북한', '남한'이 되면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재일조선인들은 '조선'이라는 민족은 하나인데 선택을 강요당해야 했다.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다수자들의 횡포는 소리없이 폭력적이었다. 소수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다수자들의 입장에서 결정을 내린다. '흑' 아니면 '백'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제11항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르크스가 말했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들의 삶은 얼마만큼 바뀌었을까?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 오는 것일까? 자꾸 그의 마음이 내게 전해진다.

식민지배와 전쟁이 많은 디아스포라를 만들었다. 그들은 세계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자신들의 존재와 뿌리 정체성에 관해 끊임없는 의문을 던졌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고도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 :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 프리모 레비와 독일에 적을 두고 있었던 유대인 장 아메리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존엄에 대한 모멸감, 폭력적인 강요를 잊을 수 없어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걷어낼 수 없어서 그들은 존재의 소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 수 없다. 디아스포라들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압박, 그 고독을. 그 누구도.

서경식은 그들의 행적을 밟으며, 고통과 아픔을 읽는다. 그도 디아스포라이기에 가능하다. 그도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의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하이드파크 위로 희미한 달이 걸려 있다. 지금 이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면...... 그런 생각이 깜빡거리며 점멸한다.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이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가족이라고 해야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부양해야 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형제나 친구들은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까. 그렇다고 해도 죽음은 늦고 이른 차이는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피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지금이면 안 되는가.
(......)
외국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 있기에 평소 막연히 느끼고 있던 생각들이 한층 뚜렷이 다가오는 것뿐이다. 그런 감정의 모습을 나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이유는 잘 생각해보면 결국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다.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걸 안다면 뛰어내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쓸쓸한 디아스포라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슬프다. 너무 슬프다. 그 혼자 짊어져야하는 모든 것이, 다른 디아스포라가 느꼈던 감정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중에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도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라는 것이 금세 죽음을 받아들이고 말 것 같은 위기와 표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 망명자는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하고 쾌할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다수의 '당연함'은 다수의 집단에 속하지 못한 '소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다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다수의 타인'에게 꿀리고 싶지 않은 서글픈 욕망이 된다. 진짜 일본인이 아니므로, 일본인처럼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재일조선인'은 껍데기는 '일본인'으로 살 수 있지만, 그 뿌리를 바꿀 수 없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선택을 하곤 한다.

서경식의 두 형은 정치범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한국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형들의 옥살이도 그의 존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나 민주화 항쟁이 있었던 광주를 찾은 그는 많은 것을 회상하게 된다. '동백림 사건'으로 연행되었다가 독일로 돌아가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의 쓸쓸한 죽음을 생각하며 정치권력의 비열함과 잔혹함을 다시 한 번 되씹는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났던 디아스포라들의 작품, 그들의 작품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서경식.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들의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TV 프로그램 촬영차 브뤼셀을 방문했던 그는 브렌동크 요새에 방문한다. 유대인들의 강금과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 총살하기 위한 말뚝과 무릎을 으스러뜨리기 위한 고문 도구, 희생자들이 '실존의 절멸'을 느꼈던 곳. 그곳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볼 수 있다. 난민이 된 유대인들, 핍박받고 고통받은 후, 떠돌아야 했던 그들의 모습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예술가, 지성인, 작가 누구 하나도 자신의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갈구했던 뿌리들은 그들에게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었지만, 모든 짐들은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답뿐이었다. 답답함, 누구도 주지 못하는 시원한 해답. 그것을 찾기 위해 떠돈다. 언제나 이방인. 언제나 소수자. 못 견디게 외로운 존재.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영하는 상태. 그의 시선은 언제쯤 자리를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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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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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 

우연히 만난 그의 산문집을 읽으며, 웃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그의 인생철학이 담긴 위트 있는 문장들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어린 시절 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던 투르니에는 푸코, 질 들뢰즈와 함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래서인지, 사물, 혹은 사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철학적이다.

메모하는 것을 즐겨한다는 그는, 내면이 아닌 외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메모해 책으로 묶었다. 그 외면의 일들은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결국 내면의 의식이 발현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과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들은 그의 생각이 덧입혀져 다른 사고로 발전한다.

병원에 갔더니 심장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미셸 투르니에는 심장이 좋지 않다) 이런 글을 남겼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  14p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긍정적인 그의 내면이 덧입혀지니 우울했던 외면이 유쾌하게 바뀐다. 외면일기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유쾌함이다.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 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19p

아마도 새해가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다가 느낀 그의 생각이리라.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도록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의복 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97p

그는 혹, 표정으로 말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빙산의 일각이고 몸이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라니. 어찌 보면 정확한 생각이지만, 우리는 쉽게 잊고 속는다. 결국, 빙산의 일각만 보고 홀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꼼이리라~

떠돌이냐 붙박이냐? 인간의 근본적인 구별.

붙박이 농사꾼 카인과 항상 갈등관계에 있는 떠돌이 목동 아벨 혹은 붙박이 나무와 떠돌이 카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카누를 만들자면 나무를 베어야 하니 말이다. - 238p

외면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글 만나게 된다. 생각하고 또 돌려 생각하고, 몇 번 생각해야 하는 글. 그의 머릿속에 들여다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 감동한다. 

이 외에도 그의 일기 속에서 유쾌한 유머와 재밌는 상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짧지만,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요점이 확실히 정리된 일기. 이런 일기를 훔쳐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이 나의 내면을 재구성할 힘을 준다. 아! 감동이다!

이제부터 나의 외면도 내면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미셸 투르니에의 발끝도 못 따라가겠지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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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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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적인 소설이 싫어졌다. 필요없는 묘사와 쓸데없는 수식으로 지면을 채우는 이야기는 이제 지루하다. 그게 작가만의 의미를 담고 있을지라도 입 속에서 맴돌뿐 몸 속으로 체화되지는 않는다. 찌꺼기 같고 글자 속에서만 뱅뱅 맴돈다. 남들이 하는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이야기를 원한다. 문학도 흘러야 하지 않을까? 주제 넘는 생각이라고 해도, 주제 넘게 읽고 있다고 해도 요즘 내 생각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그런 소설들에 지쳐 소설에 흥미를 잃고 있었을 때쯤 광고를 빠방하게 때리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만났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게 다반사이지만 그래도 소문난 잔치를 구경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고 쪽수도 별로 안 되고 양장본에 '창비'라는 거대 출판사에 게다가 청소년 문학상까지 너무 화려하다 싶은 게 구미가 끌려서 읽게 되었다.

달콤한 케익에 끌려 결국 한 판을 다 먹고 어리둥절해져 버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읽다보니 뭔가 다른 맛이 있었다. 고통 받는 아이 앞에 나타난 빵집. 그 빵집의 주방장. 오전에는 빵집 아가씨로 밤에는 파랑새로 바뀌는 마음 착한 빵집 누나. 빵집에 숨겨진 비밀의 방. 비밀스러운 빵들.

고통받지 않는 사람들은 없겠지. 상처받는 사람도 없을 거야. 다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쯤은 이겨내고 사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라는 것이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보다 유혹에 약한지라, 좀 더 쉽게 가는 방법을 찾다보니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비밀스러운 빵과 과자들은 인간들이 애용하는 마법의 주술이 되어 버렸다. 분명, 빵을 파는 사람은 경고한다. 이 빵을 사용할 시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멍청한지 눈 앞의 달콤함에 미쳐 뒤에 남을 강력한 쓴맛을 생각지 못한다. 닥쳤을 때 다시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고, 그 원망이 빵을 만든 사람에게 미친다. 역시나 이기적. 이기적인 생각 앞에는 아무것도 들이댈 수 없다. 고집불통, 안하무인, 인면수심까지.

선택은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따른 고통과 불행은 외면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여실하게 들어나고 있다. 새엄마와의 관계, 오해, 아빠의 치졸한 행동까지 감당해야 했던 소년. 결국 위저드 베이커리가 궁지에 몰리고 억울한 누명 때문에 뛰쳐나온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날 소년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쥐게 된다. 새엄마가 주문한 자신의 부두인형과 선물로 받은 타인 리와인더를 든채 지옥같고 무서웠던 집으로 돌아간 그가 본 아빠의 만행. 그리고, 새엄마의 절규. 그 속에서 선택을 해야하는 시간이 왔을 때 그의 선택.

Y, N.

시간을 돌리느냐, 그 시간을 감내하고 이겨내느냐.
그것은 너의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N의 경우가 좋았다. 자신의 의지였던 아니였던 결국, 그는 평화를 찾을 수 있었고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얻을 수 있었고,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신데렐라처럼 구박받고 살았지만, 백마탄 왕자님이 짠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사실 현실 속의 백마탄 왕자님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겠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마법의 빵과 쿠키를 주문했던 사람들. 주방장의 삶과 이야기에서 그가 배운 것들. 그가 느낀 것들. 소년은 용기를 얻었겠지?

마법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했지만, 결국 현실이었다. 현실 속에서는 마법이 통할리 없다. 노력이 통할 뿐. 그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책 속의 상징들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희망을 말했지만, 식상한 희망은 아니었다는 게 좋다. 소년의 존재를 찾게 된 것도, 지긋지긋한 빵을 이해하게 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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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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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진정 이성적인 것일까? 과학에 맹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뜨겁게 끓어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과학을 이벤트성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 어떤 사건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통찰력있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언론에 이끌려, 하나의 문제로, 단면적이고 단편적인 시선으로 보는 우리의 모습. '과학적'이라는 말에 홀려 '이성적'이 되지 못한 문명의 관객들은 바로 우리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다이어트 방식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광고에 열광하며, 값비싼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덜컥 홀려버리고도 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정상적'인 체중을 가진 이도, '비만'을 만들어버리는 모호한 그 '과학적 기준'이 진짜인 것처럼 비판적 사고 전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가 먼저 튀어나간다.

'성형'으로 이루어지는 정형화된 美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사고와 불합리한 시스템은 애써 외면한다. 나를 '성형'해주는 이는 '의사'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의사'는 신이 아닐 것인데, 그 '의사'가 행하는 의료행위는 모든 것이 완벽할 것이라는 믿음이 앞서나가는 것이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일반화 되어가고,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과학'이라고 믿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비판의식도, 아무런 성찰도 없이 말이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모두 이벤트였다. 물론, 조류독감과 광우병 공포까지도 말이다.줄기세포에 감춰진 이면, 우주인 이벤트에 숨겨진 정치적 효과, 봉사와 감동으로 본질이 흐려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는 결국 과학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철저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우리가 진정 원한 '과학'은 무엇일까? 되묻게 된다.

'과학적 열광'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집단적인 열광은 위험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조류 독감으로 죽는 사람보다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외면한채 다른 확률에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이익을 창출하는 이들의 배를 불려주는 게 옳은 일일까? '과학'이라는 명목하에 '인체의 신비전'에 아이들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남들이 하기에, 남들이 열광하기에, 남들이 좋다기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포장될라치면, 다른 것보다 100배 1000배쯤 더 열광한다.

비단, 과학뿐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 예술, 문학. 어떠한 사건. 그 이면에 감추려하는, 감추어진 것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내 다른 시선으로 봐야하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반성과 성찰없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 <문명의 관객>은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어도 제대로 믿으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학'이 '이성'으로 포장되어, 본질을 흐릴 수 있으니,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 본질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많은 정보를 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도 전에 흡수되고 만다. 그 '흡수'의 방식이 바뀔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말이다. 멈추어버린 뇌는 슬프다. 작동하는 뇌에서 우리는, 진정한 정보와 올바른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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