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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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가 누구에게 삼류인생이라고 하는가? 팍팍하고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방치하는 사람이야말로 삼류인생, 막장인생이 아닐까?

방송국에서 퇴출당하고, 극단에서도 뚜렷한 성과 없이 밀린 전직 개그맨 철이는 청년 백수다. 방구들 짊어지고 만화책이나 보고 비디오나 보면서 시간 보내기 일쑤. 그의 삶은 이렇다 할 전망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왕년의 여배우 조지아 킴 여사, 철이를 키운 할머니. 집에서 빈둥대는 철이를 보다 못해 지하철 잡상인계의 전설 미스터 리에게 보내버린다. 스승으로 삼고 지하철계에서 돈 좀 벌며 인생을 살아보라고.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다가 만나게 된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미혼모 수지, 그녀를 만난 철이의 인생은 살짝 바뀌기 시작한다. 수지의 동생 효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를 사랑하며 한집에서 복닥거리는 지효. 이들의 삶은 평탄해 보이지 않는다.

남들에게 갑갑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그들만의 법칙과 행복이 숨어 있다. 철이는 느리지만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유쾌한 변화 말이다.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스타 개그맨이 된다거나 얼토당토 않게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이 된 건 아니지만,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행로를 시작한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미혼모 수지와 소통하게 되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을 바꿔나간다.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철이 씨, 전에 나한테 물었지. 내가 효철 씨 사랑하는 거 맞느냐고, 혹시 동정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지."
"동정이 나쁜 거야?"
"그럼. 나쁜 거지."
"어째서?"
"동정은 내가 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거잖아. 너는 많이 아프구나, 나는 안 아픈데, 참 안됐다 얘. 그러니까 나쁜 거지. 아무리 같이 아파하는 척해도 고통은 공유할 수 없어. 고통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라고. 사실은, 얘는 정말 불쌍해, 그래도 나는 얘보다는 덜 불쌍해서 다행이야, 그러면서 자기 위안을 느낀다고. 그게 동정의 본질이야."
"사랑은?"
"사랑은 서로 동등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지. 너, 나 좋아해? 나도 너 좋아해, 이렇게 시작되는 게 사랑이잖아."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사랑이라는 것, 늘 동정과 연민에서 시작돼. 누구에게나 삶은 고달픈 거잖아. 상대방의 고달픔을 보고, 너도 힘들구나, 너도 나처럼 아프구나. 그렇게 생겨나는 감정이 동정이고 연민이야. 타인에 대한 배려든 사랑이든 희생이든 모두 동정과 연민의 바탕 위에 있어. 그러니까, 동정이든 연민이든 사랑이든 이름만 다를 뿐 결국 다 같은 거야. 철이 씨, 사람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 설 수 없어. 우리는 모두 다 아래에 있으니까.

 

효철을 사랑하는 것을 동정이라고 여겼던 철이는 지효의 말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수지를 사랑하게 되고, 수지의 아이를 자기가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이고 의문이 들지만, 결국 사랑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철이. 자신이 짊어져야할 그리고 책임지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서, 철이는 나태와 무력함을 벗어던지고 서서히 허물을 벗고 그의 삶을 위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등장 인물 모두가 자신만의 상처가 있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다. 그 상처 때문에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거나, 상처의 그늘에 묻혀 산다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조지아 킴 여사가 왜 부모도 버린 자신을 거두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온 철이는, 그녀가 수지를 보자마자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며 '탐스러운 달'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철이는 이해와 배려와 사랑을 느낀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는 수지의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것과 연결되고 그것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의 치유와 연결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없는 개그맨이었던 것은 그의 상처에도 관련이 있었던 듯싶다.

그는 이제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두었던 상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행복을 찾는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 속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분명하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누군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변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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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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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 

우연히 만난 그의 산문집을 읽으며, 웃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그의 인생철학이 담긴 위트 있는 문장들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어린 시절 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던 투르니에는 푸코, 질 들뢰즈와 함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래서인지, 사물, 혹은 사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철학적이다.

메모하는 것을 즐겨한다는 그는, 내면이 아닌 외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메모해 책으로 묶었다. 그 외면의 일들은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결국 내면의 의식이 발현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과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들은 그의 생각이 덧입혀져 다른 사고로 발전한다.

병원에 갔더니 심장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미셸 투르니에는 심장이 좋지 않다) 이런 글을 남겼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  14p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긍정적인 그의 내면이 덧입혀지니 우울했던 외면이 유쾌하게 바뀐다. 외면일기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유쾌함이다.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 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19p

아마도 새해가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다가 느낀 그의 생각이리라.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도록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의복 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97p

그는 혹, 표정으로 말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빙산의 일각이고 몸이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라니. 어찌 보면 정확한 생각이지만, 우리는 쉽게 잊고 속는다. 결국, 빙산의 일각만 보고 홀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꼼이리라~

떠돌이냐 붙박이냐? 인간의 근본적인 구별.

붙박이 농사꾼 카인과 항상 갈등관계에 있는 떠돌이 목동 아벨 혹은 붙박이 나무와 떠돌이 카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카누를 만들자면 나무를 베어야 하니 말이다. - 238p

외면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글 만나게 된다. 생각하고 또 돌려 생각하고, 몇 번 생각해야 하는 글. 그의 머릿속에 들여다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 감동한다. 

이 외에도 그의 일기 속에서 유쾌한 유머와 재밌는 상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짧지만,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요점이 확실히 정리된 일기. 이런 일기를 훔쳐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이 나의 내면을 재구성할 힘을 준다. 아! 감동이다!

이제부터 나의 외면도 내면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미셸 투르니에의 발끝도 못 따라가겠지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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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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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관념론적인 소설이 싫어졌다. 필요없는 묘사와 쓸데없는 수식으로 지면을 채우는 이야기는 이제 지루하다. 그게 작가만의 의미를 담고 있을지라도 입 속에서 맴돌뿐 몸 속으로 체화되지는 않는다. 찌꺼기 같고 글자 속에서만 뱅뱅 맴돈다. 남들이 하는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이야기를 원한다. 문학도 흘러야 하지 않을까? 주제 넘는 생각이라고 해도, 주제 넘게 읽고 있다고 해도 요즘 내 생각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그런 소설들에 지쳐 소설에 흥미를 잃고 있었을 때쯤 광고를 빠방하게 때리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만났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게 다반사이지만 그래도 소문난 잔치를 구경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고 쪽수도 별로 안 되고 양장본에 '창비'라는 거대 출판사에 게다가 청소년 문학상까지 너무 화려하다 싶은 게 구미가 끌려서 읽게 되었다.

달콤한 케익에 끌려 결국 한 판을 다 먹고 어리둥절해져 버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읽다보니 뭔가 다른 맛이 있었다. 고통 받는 아이 앞에 나타난 빵집. 그 빵집의 주방장. 오전에는 빵집 아가씨로 밤에는 파랑새로 바뀌는 마음 착한 빵집 누나. 빵집에 숨겨진 비밀의 방. 비밀스러운 빵들.

고통받지 않는 사람들은 없겠지. 상처받는 사람도 없을 거야. 다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쯤은 이겨내고 사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라는 것이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보다 유혹에 약한지라, 좀 더 쉽게 가는 방법을 찾다보니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비밀스러운 빵과 과자들은 인간들이 애용하는 마법의 주술이 되어 버렸다. 분명, 빵을 파는 사람은 경고한다. 이 빵을 사용할 시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멍청한지 눈 앞의 달콤함에 미쳐 뒤에 남을 강력한 쓴맛을 생각지 못한다. 닥쳤을 때 다시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고, 그 원망이 빵을 만든 사람에게 미친다. 역시나 이기적. 이기적인 생각 앞에는 아무것도 들이댈 수 없다. 고집불통, 안하무인, 인면수심까지.

선택은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따른 고통과 불행은 외면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여실하게 들어나고 있다. 새엄마와의 관계, 오해, 아빠의 치졸한 행동까지 감당해야 했던 소년. 결국 위저드 베이커리가 궁지에 몰리고 억울한 누명 때문에 뛰쳐나온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날 소년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쥐게 된다. 새엄마가 주문한 자신의 부두인형과 선물로 받은 타인 리와인더를 든채 지옥같고 무서웠던 집으로 돌아간 그가 본 아빠의 만행. 그리고, 새엄마의 절규. 그 속에서 선택을 해야하는 시간이 왔을 때 그의 선택.

Y, N.

시간을 돌리느냐, 그 시간을 감내하고 이겨내느냐.
그것은 너의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N의 경우가 좋았다. 자신의 의지였던 아니였던 결국, 그는 평화를 찾을 수 있었고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얻을 수 있었고,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신데렐라처럼 구박받고 살았지만, 백마탄 왕자님이 짠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사실 현실 속의 백마탄 왕자님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겠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마법의 빵과 쿠키를 주문했던 사람들. 주방장의 삶과 이야기에서 그가 배운 것들. 그가 느낀 것들. 소년은 용기를 얻었겠지?

마법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했지만, 결국 현실이었다. 현실 속에서는 마법이 통할리 없다. 노력이 통할 뿐. 그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책 속의 상징들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희망을 말했지만, 식상한 희망은 아니었다는 게 좋다. 소년의 존재를 찾게 된 것도, 지긋지긋한 빵을 이해하게 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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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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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불균형하게 형태화 되어 있다. 다른 가족들도 그렇고, 더 상황이 나쁜 가족도 있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폭력적일 수 있을 수도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이 가족은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은 편은 아니다. 냉랭한 기운, 무관심한 상태, 말을 섞지 않으며 서로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가족. 가족은 그렇게 묶여 있다.
새엄마는 화교. 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 사람. 외로움에 치를 떨며 어리광부리는 누나. 의대에 입학하고도 대학에 다니지 않는 나. 배다른 동생. 사실 화자는 나가 아니다. 그들은 각각의 이름이 부여된다. 옥영, 상호, 은성, 혜성, 유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관심이 없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모인 가족은 이미 서로를 잘 모르는 가족일 뿐이다.

사건은 가족의 막내 유지가 사라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표면적으로 유지는 집 안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유지의 존재는 가족의 공간, 시간, 생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라지고 나서야 존재를 인식 당한 것처럼. 유지가 사라지면서 수면에 가려졌던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진동이 없었던 가족에게 진동이 시작된 것이다. 멈췄던 메트로놈이 작동을 시작한 것처럼.

친정을 다녀오겠다던 옥영은 친정에 간 것이 아니었다. 무역업을 하고 있던 상호는 제대로 된 무역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던 척하던 혜성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았고, 가끔 참을 수 없는 밤이 찾아오면 혼자만의 쾌락을 즐겼다. 남자에 집착하는 은성은 자신의 출생의 시작 속에서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유지도, 가족 안에서 느꼈던 외로움을 해소하려 잠시 외출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외출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상호가 아이를 찾기 위해 취했던 방법은 문영광이란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찾기 위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어쩐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은성 또한, 과거에 잠깐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밀담이 현실이 된 것이라고 자책했다. 혜성 또한, 그날 일찍 집에 돌아만 왔더라도, 쾌락을 제어한 채 집으로 돌아왔더라면 유지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옥영, 그녀는 대만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밍과의 질긴 인연을 끊고 이별을 고하러 갔던 여행은 그녀에게 전부인 딸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유지의 부재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긴장하고, 자책하고,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각자만의 방법으로 유지를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언제 이렇게 유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가족으로서의 유지를 말이다. 모두 무관심한 채 자기 삶 안에 갇혀 있던 가족들은 갑자기 유지가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본인들만 제대로 느끼고 있지 못하다.

이야기는 한 명 한 명을 따라가며, 그들이 했던 행동과 생각들을 조금씩 조금씩 드러낸다. 그들이 만났던 이야기, 그들의 삶이 흘러온 이야기, 유지가 사라진 날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 심지어 유지의 이야기도 함께 진행된다.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사건에서 '밍'은 자신의 존재를 '혜성'에게 잠깐 드러낸 채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유지를 위한 선택이었고, 유지를 찾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결국, 하나의 진실은 묻힌 채, 가족들은 어정쩡한 상태로 처음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로 조우한다.

시간이 흐르고, 부유해지고, 가질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외로워지는 사람들. 그것은 가족이란 울타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해지는 미세한 파장도 없다. 그냥 함께 그대로 사는 삶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과연 공존이고, 사랑이며, 위로일까? 서로에게 말이다. 말을 숨긴 채, 감정을 숨긴 채, 진실을 숨긴 채, 가족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타인에게 겉으로 보여지는 부유함, 화목함, 괜히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얕은 허세와 위세 정도로 가족은 가족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유지가 사라진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은 컴퓨터 비밀번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속속들이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시점에서는 절망감과 고통, 상처도 함께 따라왔다. 시간의 골은 그렇게 깊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두 모이는 순간을 기다리려면 또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리라. 그들이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데에도 몰랐던 시간만큼이 소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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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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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 두 개의 시간 속에서.

홍콩. 1941년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가 있고, 1952년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가 있다.
윌을 사랑한 여자 트루디와 윌을 사랑한 여자 클레어. 둘은 전혀 다른 성격,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았다. 그 가운데는 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전쟁이 놓여 있다.

클레어는 얼떨결에 결혼한 남편을 따라 홍콩에 온다. 홍콩은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이 가득하고 클레어는 상류층 아이의 피아노 교사가 된다. 클레어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질적인 세상. 사람이 사람을 노예 부리듯 하는 세상, 돈이 많은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사교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이 격상될 것 같은 세상이다. 윌은 피아노 교사로 있던 집의 운전사. 불현듯, 다가온 그가 싫지 않다. 점점 끌리는 클레어.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그에 대해 알고 싶다. 사람들은 클레어를 이용해 윌이 살았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전한다.

자유분방한 여자 트루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혼혈아이다. 그녀는 그 점을 이용해 많은 사람에게 환심을 얻는다. 그녀가 사랑한 윌. 윌에게만은 언제나 관대하며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전쟁이 터지고도 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영국으로 떠나지 않고 홍콩에 남는다. 윌이 수용소에 갇혔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윌을 돕는다. 그녀는 끝까지 그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윌은 조금씩 조금씩 거부하기 시작한다. 트루디는 그런 윌 때문에 슬프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를 위한 것인데 그는 자꾸 뒤로 물러난다. 결국, 트루디는 이용을 당한 채 일본 장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한 상처를 안은 채 윌은 클레어를 만난다.

시간의 교차 지점에 윌이 있다. 두 여자의 사랑 중심에도 윌이 있으며, 사건들 사이에 윌이 있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와 경험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전쟁, 전쟁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생존과 사투하며,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한 욕망, 배신, 죽음. 전쟁의 아픔은 사랑마저도 흔들리게 한다. 윌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상처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인 듯 무심하게 살아가는 윌. 그가 봐온 것, 들은 것, 느낀 것들은 그의 정신을, 마음의 여유를 가로막고 있다.

클레어가 모든 것을 알았을 때, 그녀도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혼자 일어설 힘을 얻는다. 남편에게 기대지 않고, 윌에게 바쳤던 사랑을 거두고 그녀 자체로 살아가야지 생각한다. 윌은 윌대로 희미한 기억 속에 갇힌 트루디의 환영을 만난다.

사랑하고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안타깝다. 무엇이든 변명이 될 수 있을 테지만. 트루디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끝까지 바랐다. 하지만, 윌은 전쟁이라는 상황과 책임감에 밀려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윤리적, 도덕적이라는 말로 트루디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클레어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일까?

전쟁과 전쟁 후, 단순히 10년 전, 10년 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전쟁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도 사연과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피아노 교사 클레어가 나타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와 죽은 자의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그들이 묻어둔 이야기들은 그들에게도 큰 상처였던 것이다. 상류층에 숨겨진 뻔뻔한 뒷이야기들은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재로 작용한다.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사랑이야기는 전쟁의 아픔과 인간의 내면, 고민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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