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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책의 뒷 커버, 책 날개도 함께 보는 습관이 있다. 거기에 문학동에 세계문학 작품들이 여러개 소개 되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띄는 한 권을 빌려왔다. 같은 시리즈이니깐 나의 소설 리터러시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피아노 교사가 나의 취향에 안맞았던 것인지. 확인도 할 겸.
근데. 이 책. 정말 재미있었다. 아마도 컴퓨터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관계 맺고, 열정을 쏟아 붓고, 또 그 씁쓸함을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소재의 이야기였다. 책은 100% 이메일로만 이루어져 있다. You've got mail이라는 영화를 떠올려 보게도 했지만. 그 영화보다는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주기와 그 실체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시작은 이렇다. 에미 로트너라는 삼십대 유부녀가 i 앞에 a를 습관적으로 타이핑하는 습관 덕분에 잡지 정기 구독 해지 이메일을 레오 라이케라는 삼십대 중반의 언어학 조교수에게 잘못 보내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들은 이메일 펜팔로 발전하게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만남은 책임질 것이 많지 않다. 나의 내부 세계와 철저히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외모 치장도, 만나러 가는 수고도, 실제 나의 모습과 감정도 어느 정도는 필터링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히 실제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는 그냥 '나'와 '감정'이라는 주제로 이메일을 주고 받게 된다. 각자의 머리 속에는 환상의 에미라는 여인과, 환상의 레오라는 남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실제하지 않는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유지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실제에 다가서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그 욕망은 금단의 열매인 것이다. 일단 실제를 알고 나면, 환상이 깨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고 이상적이기만 했던 환상 속의 관계에는 금이 가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직접 보지 않고 머리 속으로 나름대로 상상하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다. 특히나도 여자는 유부녀라는 제약 조건이 있다. 결혼생활에도 만족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혼 관계를 깰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환상 속의 이 남자를 실제의 사람으로 만나고자 하는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리고 이 욕망은 철저히 동떨어져 있던 각각의 사이버스페이스는 에미의 친구인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 시켜 주면서 분출하게 된다. 실제의 세계에서 만나고 있는 미아와 레오. 가상일 뿐인 에미와 레오. 이들의 관계는 점차 동떨어진 집합 세계에서 실제의 교집합을 가진 상태로 변모하고 있다. 줄거리는 혹시라도 이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서 이쯤에서 접어두고..
서로 주고 받는 이메일. 나는 사실 그것을 요즘 조금 빠져 있는 한 까페에 대입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독일 시절. 일주일 내내 말할 대상이라고는 남편 밖에 없던 시절. 급박한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늘 일 생각 밖에 없던 남편이 나의 정서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의지할 실제 사람은 남편 밖에는 없는 셈이었지만 늘 모자랐다. 그러다가 독서 까페를 알게 되었다. 즉각적인 피드백. 1주, 또는 길이에 따라서 2-3주 이상 지속되는 북클럽 등에 참여하다 보면 소재는 늘 새로웠고,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또 같은 텍스트를 다르게 읽어내는 사람들의 의견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웠다. 그리고 그 공감과 즉각적인 피드백이 주는 충족감은 사실 많이 컸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흐르다 보면 어느새 주객이 전도 되고 만다. 가상의 세계에서만 교류하고자 하던 에미와 레오의 관계 처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살짝 변질 되기도 한다. 어느덧 나의 개인적인 시간은 줄어들고 거기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보고, 거기서 충분히 즐거워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볼 때면. 평생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는 후반부의 레오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니깐. 의도적인 거리두기. 그리고 다시 주체적인 독서와 연구에 눈을 돌리고 있기는 하다.여튼 이렇게 순수하게 가상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의 관계. 그 관계는 가상에 머물때는 끝도 없이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철저한 현실 인식. 그것이 사이버스페이스의 종착역. 나의 북클럽 활동에 적용되는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그 내용이 사실 마음에 들었다. 신비주의적인 전략. 얻고자 하는 것을 주지 않는 상태. 그것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어떠한 상황에 불구하고 관계는 유지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사람들은 이런 이메일 소통에, 까페 활동에, 트위터에 빨려 들게 되는 것일까? 그만큼 소통과 환상이 없는,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사실 즉각적인 피드백, 나의 능력보다 살짝 상위에 위치하는 난이도, 명확한 목표. 이 세가지 요인은 몰입의 3대 조건이다. 북클럽은 확실하게 이 3대 요소를 만족 시키고 있고(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는 그렇다 할 수 없지만), 에미와 레오의 관계에서는 즉각적 피드백 만을 충족 시키고, 가질 수 없고 완전히 소유할 수 없기에 계속 그것을 향해 간다는 암묵적 목표가 있다. 즉 3가지 중 2가지를 충족하고 있다. 창의성에서는 3요소 중에서 2가지 요소를 충족할 때 중독의 조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들은 방향성을 잃고 불나방이 불을 향해 가는 것 처럼 자제력을 읽고 여전히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서로를 소유하고 메이게 되는 관계로 치닫게 된다. (북클럽, 깨페 활동도 원서를 제대로 읽겠다는 명확한 조건이 흔들릴 때 그런 위험에 빠질 요소가 다분히 있다) 그리고 그 중독이라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은 쾌감을 주어서 그로부터 헤어나오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에미와 레오의 관계.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끝이 났을까. 그들을 둘러싼 적어도 에미의 남편은 어떠한 개입을 시도했나. 열린 결말로 결말을 남겨둔 이 작품은 여러가지 사이버스페이스를 둘러싼 생각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음에 분명하다.
누구나 미지의 여인 에미. 미지의 남성 레오. 또는 미지의 대상을 선망하고 있을 것이다. 삶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Fake Flow에 빠져들지는 말자. 그것은 나의 시간과 정신을 좀 먹을 뿐이다. 삶이, 또 감정이, 사람이 늘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콘트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잘못된, 나에게 해악을 가져올 요소들은 애초에 차단하는 것. 그 또한 좋은 방법이다.
주일 오후를 이 책을 읽으며 즐겁게 보낸 것 같다. 사이버스페이스에 한번이라도 빠져들어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분명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