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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평점 :
나는 사전 지식 없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아주 가끔, 미리 좀 찾아봤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無)에서 시작하는 책읽기가 훨씬 더 재미나다.
책을 덮을 때 제목과 맞아떨어짐을 확인하는 순간의 짜릿함도 좋고.
그러나 이번 책 '고도에서' 는 제목에 대한 팁을 조금 갖고 시작하면 더 재미나겠다.
제목과 내용을 연관짓는 작업이 예상보다 쉽지 않을테니까. ㅎㅎㅎㅎㅎ
네이버 어학사전을 빌려보자.
- 고도: 평균해수면따위를 0으로하여측정한대상물체의높이
영어 제목도 '고도' 라는 뜻을 가진 'Elevation' 이다.
인간이 발 딛고 사는 땅이 아닌 고도에서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사는 게 퍽퍽한 동네는 아니다.
주인공 스콧은 그곳에서 30여 년을 살았고 그럭저럭 이웃들과 잘 지낸다.
이혼을 해서 혼자 지내는 일에 적응하고 있지만 문제없이 잘 지내던 그의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저자의 상상력에 박수를)
왜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스콧의 기분은 나쁘지 않다.
꽤 괜찮은 기분 탓일까?
"그럭저럭" 살던 삶에 스스로 변화를 만든다.
이웃집 레즈비언 부부와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
레즈비언인데 공개적으로 부부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이웃이 있다.
주인공 스콧 역시 레즈비언 부부의 남편과 마찰이 있었지만
친구가 되어 그들을 지역사회 중심으로 이끌고 나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줄거리.
그러나 절대 평범하지 않다. (작가가 스티븐 킹이잖아?!?!)
옆집에 사는 레즈비언 부부가 동네를 떠나야 할 위기 앞에 서도록 모르고 지내다가,
주인공이 왜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스콧에게 나타난 신체의 변화도 왜 생겨났는지 모른다.
계속되는 변화 앞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뻔한 줄거리만 던져놓고 저자는 내내 불친절하다.
그래놓고 마지막에 허를 찔러 눈물을 빼낸다.
마음이 너무 뒤숭숭해서 새벽 3시까지 잠을 잘 수 없었을 정도. ㅠㅠ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라고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져 타인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생각 자체만으로 슬픔이 압도하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고도에서는 죽음을 '갑작스런 부재'가 아닌 매일매일의 "소멸" 로 접근한다.
하루하루가 소멸의 날이고 그래서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지
잘 살아야겠다, 남을 도와야겠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야겠다 따위의 다짐같은 건 필요없다.
그래서 저자는 주인공 스콧의 태도와 생각을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는 건 아니었을까?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아름답다.
그 안에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문제는 보고싶어도 볼 수 없다.
더 높은 고도로 올라가면 우리는 소멸하지만 소멸 직전에 보는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는 거.
우리네 인생도 최종 순간에 돌아보면 아름답다는 -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뻔하지 않게 써냈는지 감탄한다.
'스티븐 킹'이라는 유명 작가의 첫 책으로 읽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던, 고도에서.
불친절한 따뜻함, 일명 츤데레 소설의 최고봉이라 불러도 좋겠다. ㅎㅎㅎ
평범한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 이름값 하는 작가였구나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