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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Mosfilm 홈페이지가 이제는 꽤 정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좋은 러시아 영화인데 막상 보려고 하면 영어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영화들에는 오직 러시아어 자막만 지원된다. 그럴 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막없이 그냥 영화를 본 다음에 나중에 자막을 따로 구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고맙게도 러시아어로 된 영상물의 자막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있다. 이 경우에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1. 러시아어 자막 사이트에서 영화 제목을 검색한다. 이것도 러시아어로만 검색이 가능하다.
2. 결과로 뜬 목록에서 정확한 제목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막을 다운받는다.
3. 자막을 다운받아서 메모장에서 열면 깨진 문자의 외계어만이 보인다. 그럴 땐 Microsoft word를 연결 프로그램으로 지정한다.
4. Microsoft word에서 키릴 문자로 변환시켜준다.
5.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는다.

  이렇게 쓰다 보니 뭔가 한숨이 나온다. 그동안 나름대로 러시아 영화를 열심히 보았지만, 내가 알아듣는 러시아어는 세 가지이다. 스파시바(고마워요 Thank you), 다(네 Yes), 가꼬이(무엇 what). 아무리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생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영화를 자막없이 보는 것은 고역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와 일어의 경우는 자막이 없더라도 심한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오래전에도 자막없이 러시아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홍콩 무협 영화를 열심히 보던 때가 있었다. Shaw Brothers사의 무협 영화들에는 종종 자막이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냥 영화를 보았다. 무협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는 나 혼자 대사를 만들어 읊어가면서(!) 영화를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처럼 자막 제공 사이트가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어제 '터닝 포인트(Поворот, Turning Point, 1978)'란 소련 시절 영화를 자막 없이 보았다. 나중에 자막을 구해서 대충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궁리 끝에 모스 필름 홈페이지를 뒤적거려서 대표 이메일 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메일을 보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영화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는 편지 글을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빌어서 작성했다. 번역된 러시아어 글을 다시 우리말로 변환해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모스 필름 영화사에 한국어 능통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한글 편지글도 함께 붙여서 썼다. 운이 좋다면, 모스 필름의 영어 자막 제작팀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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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2편 리뷰: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2021): 황금곰상(최우수 작품상), 루마니아의 라두 주드 감독
Wheel of Fortune and Fantasy(2021): 은곰상(심사위원 대상),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올해 3월에 열린 베를린 영화제는 COVID-19 전염병으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최우수 작품상은 루마니아의 라두 주드 감독의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이 차지했다. 라두 주드 감독은 2015년에 'Aferim!'으로 은곰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이 영화 리뷰글은 블로그에서 검색이 가능함). 역사극의 틀을 빌어 'Aferim!'에서 계급 갈등과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던 감독은 발빠르게 전염병 시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냈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이하 배드 럭으로 칭함)'은 전염병이 사람들의 일상과 삶에 미친 영향, 그리고 루마니아 사회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담고 있다. 관객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는 논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 대상에 해당하는 은곰상은 최근 세계 영화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져갔다.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은 3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영화로 탄탄한 대본과 밀도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홍상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엔 홍상수 영화의 짝퉁 아닌가, 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홍상수의 세계를 통과해서 자신만의 구부러진 길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품성에 비해서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아사코(Asako I & II, 2018)' 보다 내게는 한 열 배쯤 나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향후 몇 년 동안은 이 감독이 홍상수가 서구 비평가들에게 받았던 총애를 독차지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영화 '배드 럭'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사건의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부쿠레슈티의 중학교 역사 교사인 에미는 학교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해있다. 남편과의 성관계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퍼지게 된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들은 분노하고, 학교 측에서는 긴급히 학부모 간담회를 소집한다. 에미는 회의 참석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으로 오전 시간을 보낸다. 카메라는 에미가 들르는 상점과 거리, 사람들의 모습을 꽤 비중있게 담는다. 전염병 때문에 거의 대부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며, 입에서는 욕설이 끊이지 않는다. 번화한 상점가와 허물어진 폐건축물이 공존하는 수도 부쿠레슈티의 모습에서는 침체와 불안의 기운이 감지된다.

  두 번째 부분은 루마니아어 단어와 그에 대한 해설을 무작위적으로 이어붙인 일종의 부록이다. 아주 다양한 단어들에 대한 감독 자신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 이야기에서부터 인종 차별과 종교에 대한 비판,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정의까지 콜라주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주인공 에미가 참석한 학부모 회의의 풍경이다. 에미는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며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온갖 지식으로 방어전을 펼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찬반 양론이 갈리는 가운데, 라두 주드는 친절하게 3개의 결말을 제공한다. 관객은 자신이 좋아하는 결말을 선택할 수 있다.

  솔직히 이 영화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 만한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영화의 아이디어 자체는 좋다. 그러나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성관계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라두 주드의 도발적인 질문은 관객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배드 럭'이 경계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와 포르노그래피의 경계, 사생활과 공적인 삶의 경계가 그것이다. 거기에 개인(에미)과 집단(학부모)의 대립과 갈등에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대한 공정성에 대한 질문도 들어간다. 루마니아 출신의 감독은 자신의 조국이 안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 문제도 통렬하게 비판한다. 영화가 가진 그러한 면모들에도 불구하고, '배드 럭'은 너무나 거칠고 잡스러워 품위가 없다.

  그와는 달리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우아한 솜씨를 뽐낸다. 3개의 이야기가 묶인 이 영화는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첫 이야기인 '마법'은 남녀간의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탐구한다. 모델 메이코는 친구 츠구미의 최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듣던 메이코는 친구의 새 남친 카즈가 자신의 전 애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2년 전에 헤어진 애인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 메이코는 카즈를 찾아간다. 카즈에게 자신과 츠구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 메이코. 기이한 우연의 삼각관계는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열려진 문', 사소한 악의에서 시작된 장난은 뜻하지 않게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프랑스어 교수인 세가와는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주부 대학생 나오는 사사키와 내연 관계에 있다. 세가와의 수업에서 낙제한 사사키는 앙심을 품고, 나오에게 교수를 유혹하도록 부추긴다. 교수실로 찾아간 나오는 세가와가 쓴 소설의 외설적 장면을 낭독하면서 둘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녹음한다. 비록 문이 열린 교수실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치명적 실수가 두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다.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 '다시 한 번'은 두 중년 여성의 만남을 그린다. 20년 만에 고향에서 열린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한 나츠코는 꼭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나츠코, 우연히 역 앞에서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둘은 서로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이며,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주인 아야는 성급히 가려는 나츠코를 붙잡는다. 그렇게 둘은 가슴에 묻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그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다시 한 번'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야기를 직조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을 찬찬히 풀어내는 연출의 힘이 잘 느껴졌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뭔가, 홍상수 짝퉁 같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살짝 반성하게 만들었다. 물론 '우연과 상상'이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각각의 이야기는 약간의 교훈과 감동을 주는 우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얄팍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덜어낸 영화는 딱 알맞게 현실과 허구 그 중간에 자리한다. 나는 이 영화가 가진 균형과 조화미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뻥튀기 같은 영화 '아사코'는 결코 좋아할 수 없지만, '우연과 상상'은 아직 안 본 이 감독의 5시간 17분짜리 영화 '해피 아워(Happy Hour, 2015)'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사진 출처: cineuropa.com


**사진 출처: otaqu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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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어요. 그건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흔에 가까운 예술가가 매일 작업하는 스튜디오 근처에는 정신 병동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정신 질환은 이 예술가를 자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 중년 이후로는 정신 병동에서 거주하면서 창작 작업을 해나갔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었다. 광기가 자신을 삼켜버리도록 만드는 대신에, 그것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창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가 그리는 무한한 점과 끝없이 이어진 세계는 마침내 자신을 구원했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검정색 점들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노란 호박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헤더 렌즈(Heather Lenz)의 2018년작 다큐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Kusama: Infinity)'는 일본 출신의 현대 미술 작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았다. 다큐는 작가 본인을 비롯해 미술사가와 큐레이터, 지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생애 전반을 다루면서,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들여다 본다. 

  마츠모토 시의 부유한 종묘상의 딸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부모는 자식의 예술적 재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은 딸에게 남성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었고, 억압적인 모친은 늘 미술을 그만 둘 것을 종용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야심있는 여성 예술가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곳이었다. 27살, 마침내 쿠사마 야요이는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가기 전에 그때까지 그렸던 자신의 그림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그림들 보다 반드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뉴욕에 정착한 초창기의 쿠사마 야요이를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가 무척 '패기가 넘치는(aggressive)'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넘쳐나는 창작열로 그 시기에 많은 그림을 쏟아냈다. 그림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설치 예술 작품도 선보였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품으로 뉴욕 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쿠사마 야요이의 아이디어를 동료 남성 작가들은 거리낌없이 베끼기도 했다. 쿠사마 야요이가 천으로 제작한 소파 작품을 보고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섬유를 창작 소재로 쓰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은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 본 사진 작업을 곧바로 자신의 작품에 써먹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도 이 비주류의 외국 여성 예술가에게 현실은 버겁기 짝이 없었다.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너무나도 가난했어요."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예술가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린다. 백인 남성 작가들이 우대받는 1960년대의 미국 현대 미술계에서 쿠사마 야요이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용인들과 함께 하는 행위 예술과 영상물 제작,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누드 퍼포먼스 시위까지 이 여성 예술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은 고국 일본과 자신의 집안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특히 반전 시위에 참가한 쿠사마 야요이의 나체 사진은 자국 내에게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돈이 많았던 쿠사마의 집안에서는 마츠모토 시내의 서점과 가판대에서 모조리 신문과 잡지를 사들여서 감추기까지 했다. 작가는 일본에서 골칫덩이에 수치스런 인물로 여겨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먼 곳에 있었고, 가난은 발목을 잡았다. 급기야 2층 창문에서 몸을 내던지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73년, 결국 깊은 좌절감과 슬픔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중년의 예술가는 정신 병동을 집으로 삼았고, 그곳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쿠사마 야요이는 현대 미술계에서 잊혀진 이름이 된다.

  1989년, 뉴욕 국제 현대 미술 센터(CICA)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것은 쿠사마 야요이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1993년의 베니스 비엔날레는 예술 경력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다. 호박과 거울을 이용한 설치 예술 작품은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은 관람객으로 넘쳐났다. 특히 거울과 LED 조명을 사용한 설치 예술은 관람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작품의 일부분을 이룬다. 예술 작품과 감상자가 이렇게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신념이 투영되어 있다.

  "예술이 나에게 삶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내 작품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찾길 바랍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무수한 점들, 그리고 그것으로 연결된 무한의 그물은 생존을 위해 찾아낸 희망의 도구이다. 광기를 견뎌내며,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을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서 쏟아낸 점들은 빛의 세계를 이룬다. 그것은 그저 의미없는 반복과 단조로운 리듬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대한 찬가와 맞닿아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무한히 이어진 점들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생의 감각을 발견한다. 다큐의 끝부분에서 노작가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생의 끝자락에 서있는 쿠사마 야요이에게 그것은 이미 성취된 꿈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사진 출처: icamiam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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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하층민의 암울한 생존기, 붉은 부두(赤い波止場, Red Pier, 1958)와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The Sun's Burial, 1960)'


  "죽긴 왜 죽어. 분하다면 살아서 복수를 해야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하나코는 앙칼진 목소리로 유약한 타케시를 비웃는다. 타케시는 친구 갱단원이 데이트 커플을 습격할 때 옆에 있었다. 하나코는 그 모든 상황을 냉소적으로 방관한다. 여자 친구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남자가 자살한 것을 알게 된 타케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쩌다 오사카 뒷골목의 갱단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타케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그곳의 삶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 '태양의 묘지(The Sun's Burial, 1960)'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사카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하층민들의 모습을 통해 패전 후 일본이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면의 진실에 대해 탐구한다.

  오사카의 랜드마크인 츠텐카쿠(通天閣) 탑이 멀리 보이는 도야 거리(ドヤ街, 판자집이 이어진 빈민가를 일컫는 말), 작은 갱단의 리더 신은 매춘업과 갈취로 먹고 살아가고 있다. 갱단원 야스에게 얻어맞고 억지로 신입 단원이 된 타케시. 그는 곧 갱단이 저지르는 착취와 살인, 폭력을 목도하게 된다. 리더 신은 지역의 보스 오마하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편 야스의 여자 친구 하나코는 낮에는 매혈 사업을, 밤에는 매춘을 하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타케시는 조직을 벗어나려는 야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갱단 생활에 깊은 환멸과 혐오를 느낀다. 매혈 사업을 위해 신과 손을 잡은 하나코, 그러나 신이 자신을 밀어내자 지역의 보스 오마하에게 밀고를 하는데...

  전후 일본은 한국 전쟁의 군수 물자 생산 기지로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1950년대 후반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 국면에 진입하지만, 그럼에도 하층민의 삶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오사카의 인력 시장과 하층민 거주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태양의 묘지'가 보여주는 최하층 밑바닥의 삶은 부흥하는 일본 경제의 이면과도 같다. 비참한 처지의 매춘 여성들, 그들을 착취하며 기생하는 갱단, 가난한 이들의 피를 사들여 돈을 버는 하나코, 거기에 군국주의의 망령 같은 퇴역군인은 부랑자들에게 전쟁이 터질 거라며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영화가 펼쳐놓는 슬럼가의 지옥도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살인과 폭력, 사기와 착취가 일상인 그곳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타케시와는 달리 하나코는 뛰어난 생존자이다.

  이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갱단의 세력 다툼을 이용한다. 오시마 나기사는 갱단에게 학대당하는 매춘 여성들과 대비되는 하나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혈 사무소를 손에 넣으려는 퇴역 군인과 갱단 리더에 맞서고, 생존을 위한 폭력과 살인도 용인한다. 하나코는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과 두뇌로 치열하게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 물불 안가리는 밑바닥의 여성 전사는 그 무엇에도 지지 않는다. 결국 신의 갱단이 전멸하고, 빈민가의 폭동 속에 일어난 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하나코는 살아남는다.

  붉은 석양이 츠텐카쿠에 걸려 있는 풍경 속에 하나코는 화재로 스러지는 자신의 집을 떠난다. 오직 돈에 대한 욕망으로만 추동되는 하나코가 손을 붙잡고 같이 떠나는 사람은 채혈을 할 수 있는 늙은 사업 파트너이다. 하나코에게 같이 살던 아버지의 생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은 해체되었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은 자신의 유사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갱단을 이끌어가지만, 그것은 우세한 폭력 집단에 의해 와해된다. 리더 신과 하나코에게 인간적 유대를 갈구하는 타케시의 소망은 헛된 것으로 판명된다. 돈은 그 어떤 인간적 가치 보다 우선한다. '태양의 묘지'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삼켜진 일본의 현실을 조롱한다.

  마스다 토시오 감독의 1958년작 '붉은 부두(Red Pier)'에서도 전후 일본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감지된다. 고베 항구의 '왼손잡이 지로(이시하라 유지로 분)'는 살인을 비롯한 여러 범죄 혐의에도 증거가 없어서 노로 경관의 감시를 받고 있다. 갱단원으로 뒷골목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벼락같은 사랑의 감정이 찾아온다. 그 대상은 지로가 죽게 만든 마약상의 여동생 케이코이다. 영화는 지로와 케이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면서, 지로를 둘러싼 암흑 세계의 암투를 보여준다. 시원하게 트인 미항 고베의 풍광 속에 야쿠자들과 이국적 분위기의 나이트 클럽, 매춘 호텔이 등장한다.

  케이코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로는 케이코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더러운 세계에서 벗어나 손을 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스의 죽음을 둘러싼 내분으로 지로는 조직에서 제거되어야할 운명에 처한다. 지로에게 조직은 집과 같았고, 조직원들은 형과 동생들이었다. 그 조직의 배신은 지로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야쿠자들에게 신의(信義)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다 얄팍한 속임수인 게지. 정신차려라, 지로!"

  오히려 왼손잡이 지로에게 인간적 유대를 보여주는 이는 노로 경관이다. 그는 투철한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지만, 지로가 살아온 삶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다. 전쟁 고아로 외롭고 거친 삶을 살아온 지로는 일본 사회의 그림자 속에 서있다. 폭력 조직의 일원인 지로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희구는 잘못된 소망과도 같다. 그는 자신을 열렬히 원하는 화류계 여성인 클럽 댄서 마미 대신 도쿄 여대생 케이코(비록 마약상의 동생이지만)의 사랑을 갈구한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진정한 '집'과 '가족'에 대한 지로의 열망은 케이코에게 투사된다. 그러나 그 꿈은 결국 좌절된다.

  그렇게 영화 '붉은 부두'와 '태양의 묘지'는 전후 일본 하층민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거래의 대상으로 내놓는 것은 '몸'이다. 피를 팔고 매춘을 하며, 손으로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취한다. 무너진 가족, 폭력과 범죄에 대한 무감각, 물질에 대한 집요한 욕망, 배회하는 군국주의의 유령, 그 모든 것이 뒤엉켜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사진 출처: twitter.com   '붉은 부두'의 이시하라 유지로와 키타하라 미에. 부부인 두 사람은 함께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 '붉은 부두'와 '태양의 묘지', 두 영화는 모두 간사이 지방(고베, 오사카)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이 구사하는 간사이 사투리가 영화에 독특한 지방색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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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군 줄 알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구!"

  자신의 추종자와 함께 총을 들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늙은 남자는 그렇게 소리친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리스(Leith), 이곳에서는 소 방목업과 농장을 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2013년, 겨우 24명의 주민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 어느 날 흰머리에 긴 수염의 남자가 들어온다. 혼자 조용히 사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뜻밖의 사실과 마주한다. 남자의 이름은 크레이그 콥(Craig Cobb). 미국에서 잘 알려진 네오나치 운동의 열렬한 신봉자인 콥에게는 자신만의 꿈이 있다. 작은 마을 리스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동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땅을 계속 사들이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그곳에 불러모은다. 네오나치 주의자들에게 리스는 성지가 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마이클 니콜스와 크리스토퍼 워커의 2015년작 다큐 'Welcome to Leith'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리스 주민들의 고군분투를 그려낸다.

  마을 초입에 '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소박한 나무 간판이 있는 마을, 그곳에 콥은 폭풍을 몰고 온다. 콥의 집 마당에는 마을 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Village of the damned(저주받은 마을)'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그의 집 앞에는 온갖 종류의 나치 문양과 백인 우월 단체의 깃발이 내걸리고, 미국의 스킨 헤드족들이 리스에 집결한다. 콥은 마을 주민 회의를 장악하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지배하는 리스를 만들려고 한다.


  네오나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 사람들은 침입자들의 정착을 막고자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리스 주민들은 콥과 그 추종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극대화하며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콥의 패거리들이 저지르는 패악을 견디다 못한 일부 주민들은 이사를 간다. 고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웃 주민들은 투쟁을 선택한다.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총기로 무장한다. 그리고 주민들은 변호사와 함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제작자 마이클 니콜스와 크리스토퍼 워커는 'Welcome to Leith'를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만들지 않았다. 다큐는 콥의 입장도 나름 공평하게 담는다. 관객들은 히틀러를 흠모하는 백발의 늙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나름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음을 본다. 유색인종과 유대인 인권 단체가 있는 것처럼 자신들은 '백인 시민 단체'이며, '백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다. 콥과 추종자들에게 그것은 '정상적인 질서'로의 회복인 셈이다. 이 네오나치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 콥은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는 법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핍박받는 희생자로 부각시킨다.

  "나는 리스 마을 사람들이 개방적이지 못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를 내쫓지 못해 안달하고 있어요."

  결국 총기를 들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던 콥과 추종자는 체포된다. 지리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마을은 평화를 되찾는다. 주민들은 콥과 추종자들의 근거지를 부수고 불태우며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만, 나중에 콥의 석방 소식을 듣는다. 과연 리스 마을 사람들은 네오 나치주의자들로부터 마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큐는 콥과 마을 사람들의 대결을 서부 영화처럼 묘사한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리스 마을의 풍광, 그곳에 모여든 네오나치 주의자들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음울한 음악까지 더해진다. 그러나 'Welcome to Leith'가 보여주는 극적인 긴장감은 재판이 끝나면서 동력을 잃는다. 무엇보다 이 다큐는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탐구나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미국의 수정 헌법 1조는 네오나치와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어왔다. 1977년, 이른바 스코키 판례(National Socialist Party of America v. Village of Skokie)로 불리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다. 스와스티카(swastica, 卐)를 내건 시위를 허용하는 것을 두고 일어난 법적 다툼은 결국 네오나치 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Welcome to Leith'는 혐오 단체의 활동 근거가 되는 수정 헌법 1조의 문제점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으며, 공정성이라는 미명하에 콥의 이야기도 열심히 주워담는다.

  콥의 석방 소식을 들은 이웃 주민은 아내에게 사격 연습을 시킨다. 평범한 가정 주부는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쥔다. 그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관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의 자유가 총기 문제를 격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차별과 혐오의 발언,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의 대결 국면에서 총기는 효과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 된다. 'Welcome to Leith'는 다인종 국가로 오늘날 미국이 안고 있는 근원적 고민을 드러낸다. 그것을 해결하는 일은 단순히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종적 다양성을 분열이 아닌 성장의 동력으로 만드는 일은 어떤 면에서 미국의 미래와도 이어져 있다.


*사진 출처: v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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