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 아침


빨강 티셔츠에
빨강 바지의
중년 여자는
자신의 표심을
입증한다

팔순의 할머니는
투표소가 어디냐고
묻는다 가만가만
걸음을 떼며

라일락 꽃가지
방정맞게 흔들며
건너편에서 오는
여편네 꺾은
봄을 전시한다

까마귀 한 마리
넙데데한 날개를
휘두르며 머리위로

분노의 흉조
세상이 뒤바뀌지는
않겠지 그래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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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썰다


냉장고에서 한 달
묵은 당근을
꺼낸다 대가리에
조금 싹이 난 것
빼고는 당근은
아주 멀쩡하다

흰색 플라스틱
도마는 옅은
주홍 물이 드는데
어라,
얘 바람들었어

가운데 심지가
숭숭 뚫린 당근을
보며 생각한다
바람난 배우자와
산다면

내다 버릴까
아니야, 어차피
카레에 들어가면
당근은 그냥
당근일 뿐
가스불에 뭉근히
시간이 약이지

길고 반듯하게
썰어서 샐러드
통에 담아둔
바람든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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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에 대한 경외


화장실의 비누 받침 아래
곰팡이가 아주 가느다란
실뱀처럼 감겨 있었다
엊그제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노안이 온 눈은
그 푸른 뱀을 놓쳐버렸다

락스물에다 담그고
20분을 기다린다 그리고
거친 검은색 솔로 북북
문지른다 녀석의 보드라운
피부는 물크러지며
비명이 터진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

저녁에 손을 씻다가
조심스럽게 비누 받침을
뒤집어서 확인해 본다
살았니 죽었니

바늘귀 같은
검은 점 하나 가만히
숨을 내쉰다
후우,

눈에 보이는 너의
세계가 전부인 듯
살지 마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었고
영원의 시간을
살아갈 테니

천천히 미끄러지며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곰팡이에 대한
무한한 경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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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시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시를 쓰고 이해하려면
라캉을 알아야 한다고
그걸 모르면
유행에 뒤처진
시골 촌닭쯤 될까

너 같은 참새들
참 흔하고 흔하지
저 멀고 먼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2024년의 한국 시와
대체 무슨 상관이냐

라캉 원전은 읽어는
봤냐 하긴 라캉이
번역 안 되었을 때도
평론에 논문에
써먹고 울궈먹는
인간들이 쌔고 쌨었지
그런 웃기는 시절을
지나왔다고, 알아?

어디서 주워들어
아는 게 정신분석이고
라캉뿐인가 봐
그 거울이며 상징계
뭐 뭐 뭐

자, 그만 되었고
거울 보면서
창피한 눈물이나
닦아 외국 이론
수입해서 팔아먹는
오파상 노릇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잖아 네 삶의
깊이와 주관으로
말하고 쓰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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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나무


아파트 옆
온 가지 다 잘리고
그저 몸뚱이만
남은 커다란 나무

뿌리를 깊게 내리면
건물을 파먹는다
그래서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겠지

살아갈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은
미친듯이 꽃피우고
향기를 뿜어내며
봄바람을 흔드는데

살아야지
견뎌내야지
울지 말아야지

속으로
가만가만
말을 건네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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