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


며칠 전부터 그 자개장은
쏟아지는 햇빛을 하릴없이
맞고 있었다 언제 적 자개장
이냐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던 자개장을 버린 게
언제더라 그 자개장하고
비슷하게 생긴 자개장
이제 그렇게 품이 많이
드는 자개장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는데 아니,
자개장을 찾는 사람들이
먼 시간 속으로 가버려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은색과 연보라색 회색이
섞인 자개 무늬 공작이
애처롭게 눈웃음을
짓지만 나는 공작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새의 깃털을 어루만져
주고 뒤돌아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가 시작되면 중년의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나름 숭고한 봉헌의 기도인데, 첫 장면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래요. 홍상수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삶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은 주인공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균열의 지점이 나에게는 늘 흥미롭습니다. 홍상수가 '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에서 보여줄 등장인물들의 삶 속 균열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영화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처럼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게 기부하겠다고 기도한 중년의 남자는 한의사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된 아들 영호가 있지요. 영호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영호는 여자 친구 주원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한의원에 왔습니다. 영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지요. 따로 떨어져 사는 아들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한의원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좀 이상합니다. 그는 급한 환자도 아닌 지인을 먼저 만나고 아들에게는 그냥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유명한 배우(기주봉 분)입니다. 아버지는 지인에게 침을 놓아주고는, 영호를 만나는 대신에 자신의 방으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1부는 영호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2부에서는 영호의 여자 친구 주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원은 패션 공부를 하겠다면서 이제 막 독일로 유학을 왔죠. 지원은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화가 친구(김민희 분)를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화가 친구가 당분간 딸의 숙소를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의 뜻인 '소개'에 걸맞는 부분이군요. 엄마와 딸, 엄마의 화가 친구가 한자리에서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여기에 영호가 등장합니다. 유학을 떠난 여자 친구가 보고 싶다며 갑작스럽게 독일로 찾아온 거죠. 엄마가 주원에게 그런 영호를 '황당하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어쨌든 주원은 영호를 잠깐 만납니다. 영호는 주원과 거리에서 기쁨의 포옹을 나누며, 자신도 주원처럼 유학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죠. 연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납니다. 둘 사이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여요.

  3부는 다시 영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호의 엄마는 지인과 강원도 바닷가의 음식점에 앉아있습니다. 그 지인은 1부에서 영호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았던 유명한 배우입니다. 영호의 엄마는 영호를 배우에게 소개시킬 생각이죠. 영호는 친구 정수와 함께 그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왜 영호의 엄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까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1부에서 영호는 한의원에서 그 배우를 만났고, 그걸 계기로 영호는 연기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지금 영호는 연기를 그만둔 상태에요. 엄마는 그런 아들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거죠. 이 어색한 만남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연령대가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아주 젊은 친구들이죠. 홍상수의 영화적 관심사가 이제 젊은 세대로 이동한 것일까요? 관객은 '인트로덕션'에서 소위 MZ 세대라고 하는 요즘의 청년 세대들에 대한 홍상수 나름의 관찰과 탐구를 볼 수 있어요. 홍상수는 그들을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2부에서 영호와 주원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죠.

  영호는 주원을 따라서 유학이나 올까, 하고 즉흥적으로 말하죠. 주원이 학비 이야기를 하자, 영호는 아버지에게 돈이 많다고 말합니다. 영호의 부모는 일찍 이혼했고, 영호는 엄마와 함께 살았죠. 그런 면에서 1부에서 영호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영호는 주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돈 욕심이 더럽게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식인 자기가 유학 가는데 아버지가 돈을 대주지 않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왜 영호는 아버지를 그렇게 경멸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돈을 받는 건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좀 웃기지 않나요? 청년 영호는 그렇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은 아닌듯 싶어요.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죠. 주원과 엄마의 사이는 따뜻한 모녀 사이 같지는 않아요. 주원은 엄마의 권위에 주눅든 어린 아이처럼 보여요. 주원이 유학을 온 이유도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고 온 것도 아니고요. 엄마의 화가 친구가 주원에게 왜 의상 공부를 하려고 물으니, 그냥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자 화가 친구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그쪽 일을 하고 있어서 잘 안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주원에게 '그거 너무 힘든데 할 수 있겠냐'고 묻죠.

  '너무 힘들다'는 이 문장은 영화에서 기이하게 반복됩니다. 3부에서 주원은 영호와 우연히 만나지요. 주원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병 때문에 공부도 그만 두었고, 독일인 남편과도 헤어졌죠. 과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서글픈 만남이로군요. 주원은 영호에게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원이 처한 상황이 힘든 것처럼 보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 힘듦을 표현하는 부사 '너무'는 과도한 주관적 해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MZ 세대의 어법에 어울린다고나 할까요?

  영호에게도 삶은 '너무' 힘듭니다. 영호의 삶도 방향성이란 게 없어요. 영호가 연기를 시작한 건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만난 유명 배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어요. 그는 영호에게 얼굴이 잘생겼으니 배우 해도 좋겠다, 라고만 말했을 뿐이에요. 영호는 생판 모르는 남이 한 말 한마디에 기대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죠. 그렇게 들어선 연기자의 길에서 영호는 여배우와의 포옹 연기를 할 수 없다며 때려칩니다. 영호가 생각하기에 그건 진짜가 아닌 가짜의 감정으로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건 영호가 진실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정작 영호가 연기자가 되는 데에 일조한 유명 배우는 그런 영호를 한심하다며 크게 면박을 줍니다. 기성 세대가 보기에 영호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는 즉흥적이고 유약하며, 끈기라고는 없는 애송이죠.   
  
  하지만 영호와 친구 정수가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속물적이고 비합리적이에요. 영호의 엄마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배우는 영호와 친구 정수에게 술은 마시되 절대로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라며 다그치죠. 술을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그게 가능한 일도 아니구요. 영호와 정수의 눈에 유명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다지 존경할만하지 않습니다. 진정성도 없는 그냥 우스꽝스러운 술꼬장일 뿐이죠. 그렇게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는 소통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유리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영호는 갑자기 겨울 바다에 뛰어듭니다. 죽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구요. 차디찬 바닷물에 흠뻑 젖은 속옷 차림으로 '너무 춥다'고 계속 말하는 영호에게 청춘의 현실은, 진짜 춥기는 할 겁니다. 영호는 연인과는 진작에 헤어졌고, 직업도 없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홍상수의 영화 'Introduction'은 그가 바라본 MZ 세대에 대한 삐딱한 미소처럼 보여요.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의 과거 영화들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나아가고 있어요. 작가로서 현실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것을 영화적인 세계로 엮는 솜씨도 여전하고요.

  아,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있는 점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네요.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해외의 평론가들에게 홍상수의 영화는 흔히 '소주 영화(soju movie)'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소주'는 홍상수의 영화를 흘러가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담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 영호를 비롯해 주원의 엄마, 그 엄마의 친구 화가는 담배를 아주 길게, 맛깔나게 피웁니다. 물론 '소주'도 나옵니다. 홍상수는 여전히 '소주'를 사랑하니까요. 담배와 소주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영화 'Introduction'은 좁혀질 수 없는 세대 간의 간극을 흥미 있게 드러냅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

***담배가 주요한 내러티브적 요소로 나오는 중국 영화 리뷰
중국 현대 여성의 서사와 담배, The Cloud in Her Room(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cloud-in-her-room2021.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꿈의 누수(漏水)


원대한 꿈을 가진 이는
좌절하기 쉽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쉽게
예감하지 못한다
미리 알지 못하는 자의
비극은 그 꿈의 크기만큼
버려야 할 것들에 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봄조차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로 다가온다 누수는
소리 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꿈의 물탱크에서는 텅텅
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기괴한 메아리는 이명이
되어 쉴 새 없이 괴롭히며
현실의 비감함은 배고픔과
기나긴 침묵을 낳는다
두려움과 분노는 끼익끽
거리는 미닫이문 뒤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명 시인의 학익진(鶴翼陣)


내게는 30명의 독자가
있다 못 쓴 시나 잘 쓴 시나
어쨌든 읽는 독자들 나는
12척의 전함으로 적군에
맞섰던 이순신 장군님을
우러러 생각한다 충무공은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구해내셨다 하지만 쉬운 시를
쓰는 무명의 시인은 30명의
독자와 함께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른다 자신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월 1만 원의 구독료로 매일
글을 쓴 젊은 작가가 있었다
구독자들을 어찌어찌 모아
쥐어짜 내고 쥐어짜 내어 글을
써서 작가는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글로써 밥벌이를 해야하는
글쟁이의 자본주의적 생존기는
나에게 기묘한 이질감을 준다
내가 30명의 독자에게 매달
1만 원의 구독료를 받고 매일
시를 쓰겠다고 하면 어떠한가
피를 팔아서 빵을 사는 매혈의
심정으로 시를 팔아서 나는
무엇을 사 먹을 것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문학의
자본주의는 독자의 숫자를
돈으로 환산한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죽은 문학이며
무익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30명의 독자는 무명 시인이
닳아빠진 자본주의적 문학에
대항하는 비장한 학익진(鶴翼陣)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부부


횡단보도의 건너편
고개를 수그린
할머니는 침을
흘리고 영감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어
늙은 아내의 입을
닦아준다

느린 낙엽의 속도
잊혀지고
물크러지는
노년의 시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걷는다
그것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저 멀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그들의 아이는
쉴 새 없이
비눗방울을
불어 날린다

내 얼굴과 옷에서
벌레처럼 터지는
비눗방울들
지 애새끼의
즐거움만 보는
외눈박이의 등신들

시멘트 공원 바닥
홀로 구구구
이기지 못할 봄을
온몸으로 앓는
멧비둘기 하나
짝 찾아 날아가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