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자네는 꿈이 뭔가
평론가요

교수는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평론가가
평생 직업으로 딱
이라고 생각했다
너 늙어
요양원에 가서도
자판을 두들길 수 있다면

언제고 견고할 것만 같았던
언어의 집은 무너져 내리고
너의 몸과 정신은
시간의 풍화에 바스러지고
평생 백수의 기이한 자긍심은
심해의 열수구에서
아직도 보글거리며 끓고 있다

청춘의 글들이 너덜거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
비웃거나 침을 뱉지 말지어다
그래도 한때는
눈부신 미래를 품고 있었으니

작은 심해 상어는
자신의 동족만 알아볼 수 있는
형광 무늬를 반짝거린다

언젠가
평론가의 무덤 앞에서
너의 동족을 향해
푸른 신호를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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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히스타민제


등을 피가 나도록 긁다가
의사를 찾아갔다

잘 듣는 약이 있어요
항히스타민제
부작용이라면 좀 졸립죠

약을 먹은 지 사흘째
와,
우,

하나도 가렵지 않다
이것은 분명
기적의 약이로구나

곁다리로
알레르기성 결막염
만성 편도염까지
해결해 준다

편,
안,
하,
다.

하지만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 기적의 약을 어떻게 끊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은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약을 안 먹기로 결심한다

다시 등에는 딱쟁이가
눈은 벌겋게
목은 염증으로 미어진다

잠이 오지 않아
약병의 항히스타민제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흰색의 작은 다이아몬드
너의 이름은
씨잘(Xyzal)

살이 에이는 그리움으로
나지막이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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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선(未當選)


거지 같은 옷을 입은 계집애 하나가
죽어버리겠다고 질질 짜고 있더군
아이고 그럼 못써 어떻게든 살아야지
나는 아이를 잘 달래어 밥을 먹였다
그래그래 잘 살거라

오늘 받은 편지함에 꽂힌 메일 하나
평론상 응모 결과입니다
미당선(未當選)

심사위원 이름을 보니
아, 언제 적 고인 물이야
고이고 고이다 못해 썩은물
이 인간들 아직도 평론 쓰고 있어
그래 당신들 눈에 안 차니까 안 뽑았겠지
동종교배 열심히들 하셔

죽어가는 계집애를 겨우 살려놨더니
미당선이라는군
개꿈도 유분수지
다음에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거든
강물에 밀어 넣을 참이다

알아먹지도 못할 허섭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는 공터
바보들의 이어달리기
관중석에서 뛰쳐나온
나의 객기를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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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원에 갔었다


시장 후미진 골목길의 끝
점집과 횟집 가운데
그 미장원이 있다

뒷머리는 짧게 해주세요

바리깡이 지이징
울리는 소리를 듣는데
두 명의 일행이 들어온다

엄마와 딸
딸은 자꾸만
내 옆의 미용실 의자에 앉겠다고
성화다

허연 머리에 마흔은 넘은 딸
엄마는 아기처럼 어른다
자그맣고 늙은 어미 새

마침내 내가 일어난 자리에
여자가 앉는다
엄마는
미용실 원장에게
딸의 머리를 이렇게 해달라고
한참 설명한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구정물처럼 흐르는
시장통을 지나간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야채 가게의 남자는
미쳐버린 뇌수를 쏟아내듯
오만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시장 초입의 순댓국집에서는
늙은 영감이
젊은 베트남 여자에게
철 지난 수작을 걸고 있다

밖은 춥지 않다
비가 잦고 흐린
이상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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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習作)


정말로 시를 쓰고 싶은 거
맞아?
성의 없는 습작을 읽어줄
독자는 그 어디에도 없어
요새 나온 시집들 좀 읽어보구
치열하게 언어를 탐구하라고

습작을 어떻게 쓰면
성의가 있는 거니?

야, 내가 살아보니까 그래
인생은 그저 운이 8할이야
재능이 있지만
앓다가 굶어 죽은 사람을 알아
걔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지 아마

난 너무 오래 살은 것 같아
이토록 오랜 침묵과
잊혀짐
견뎌내는 것도
단단한 근육이 필요하지

늘어지고 찢어진
그리하여 너덜더덜해진

이명으로 멍해진 오른쪽 귀로
지나간 생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우우웅
우우울
우울음

속을 헤집으며
말이 마비된 얼굴 신경을 타고
왼쪽 뺨에 흘러내린다

습작이라고 쓰고
수치심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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