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아침 일찍 배달 음식을
시킨다

아래층에서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머리 아픈 향냄새가
화장실 환풍구로
고요히 올라온다

나,
떡국의 고기를 열심히
건져 먹었어

잔망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애는
잘못하면 낙상할 뻔했다
애비는
운이 좋았다며
킬킬거린다

떡국은 안 먹은 지 오래다
생일이 지났다
만 나이를 헤아려 본다
역류하는 기억 속에
청춘은 올라오지 않는다

화투장에 닳아져 버린
녹색 담요와
플리스 재킷은 한 형제였다
흰머리 하나가
화살표처럼
소매 끝에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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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너의 오랜 시원(始原)은
아마도 불운이었을 게다

날개를 펴면
하늘은 불온함으로 물든다

가끔은
매에게도 쓸데없이
달려드는
병신같은 패기
무법천지의 산적

아따, 저놈의 새 좀 보게
뭔 날개가 저리도 길어
시커먼 죽지는 저승사자 맨치로
목구녕에 피가 나도록 처우는구먼

아스팔트에 흐물흐물
스며드는
혐오와 찬탄

고압 송전선에
두려움 한 방울 없이
오도카니 앉아있는
까마귀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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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선 안쪽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이탈한 궤도
작고 볼품없는 협궤 열차는
자기만의 경로를 가지고 있다

저 멀리서
거대하게 울리는 기차의 출발음
하지만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나뒹굴어진 침목(枕木)
협궤 열차는 한참 동안 멈췄다

철로가 얼어붙을 무렵의
겨울 동지(冬至)
저절로 가속도가 붙어
일각고래의 뿔이 북극을 향할 때
너의 침침한 눈이
선 밖으로 내달리며
땅 밑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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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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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하려다 까먹고 가만히 서있곤 한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렇게 잠깐 있으면, 다시 생각이 난다.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실버타운 입주자들이 늙어감에 대해 성찰하고, 짧은 시를 써냈다. 읽다 보면 웃음이 피식, 눈물이 찔끔, 가슴이 뜨끔해진다.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산다'

  뭐가 건강에 좋다고 하면, 한번은 귀가 솔깃해진다. 몸이 안 좋아 먹는 약들에다 영양제가 더해진다. 알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이거 먹으면 정말 나아질까 싶다.

 '남은 날 있다며 줄 서는 복권 가게 앞'

  이제는 살아온 날들 보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집착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싶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자꾸만 사서 그러모으려고 한다. 다 쓰지도 입지도 못할 옷들과 신발. 그런 것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 노환입니다.'

  나이가 드니,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괴롭다. 노년에 접어드는 일은 아픔과 느려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노안이 오고 나니,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여서 자꾸만 안경을 벗었다 쓰곤 한다. 바느질하려고 바늘귀 찾는 일이 때론 고역이다. 늙어서 그래. 그냥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날들.

  몇 줄 되지 않는 시의 행간에는 인생의 진실이 켜켜이 숨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에 대해 노래하는 모든 이들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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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nychia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발톱이 겨우내 자라지 않았다
피부과 의사를 찾아갔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는 개뿔,
더 붓고 아파서 두 달 만에
다시 갔더니
어머니,
정 답답하면 대학병원
가시던가요

이봐, 난 당신 엄마가 아냐
돈벌이에 환장한 건 알겠는데
그럴 거면 돈 안되는 환자를
받지 말든지, 응?
돌, 팔, 이.

Retronychia
뿌리 쪽으로 자라는 발톱은
발가락을 먹어치운다
발가락을 자를 수 없으므로
발톱을 뽑아야한다
그 대신에 나는
3겹의 발톱을 갈아내고서
이제 1년이 지났다

그냥 뽑아버릴 걸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선택을 생각한다
시간의 지층이 꾸덕꾸덕하게 쌓이고
나는 그걸 걷어낼 수 없다
불가능한 Retro

부서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살아있다
작고 이상한
나의 왼쪽 엄지발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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