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飼養) 벌꿀의 사랑


그는 희고 마알간 얼굴에
가느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자는 한눈에 그에게
반했지요

여자의 남편은
사양 벌꿀을 만듭니다
여자는 그런 남편이
부끄러웠어요
가짜 꿀이잖아요
그건 진짜가 아닌데

고운 그의 얼굴을
보다가 벌에 부어터진
흠집투성이의
남편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요

왜 저런 남자가
내 남편일까요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요

사양 벌꿀은
여자의 젊음을
천천히 들이켰어요

진짜 사랑은
오지 않아요
가짜 꿀의
삶이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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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


거실과 베란다에는 열댓 명의 청소부들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계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저 사람들 차 대접이라도
해 주려무나 나는 더러운 그들이 싫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커피와 과자를 내왔다 걸신들린 것처럼
그들은 음식을 먹었고 내가 좋아하는 비싼 덴마크
쿠키를 엄마는 기꺼이 선물로 싸주었다 나는 엄마와
큰소리로 싸웠다 마침내 그들이 갔다

세 명의 늙은 여자들이 초인종을 눌렀다
집을 한번 봐야겠다고 하더니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왔다 나비 모양의 안경을 쓴 푸른 염색 머리 여편네가
내 방에 왔다 나는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현관까지
힘겹게 질질 끌어내었다

아픈 몸을 들쑤셔대는 불운은
입안의 모래처럼 굴러다니지만
도무지 뱉어낼 수가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기운 없는 자식을 대신해서 침입자들을
먹을 것으로 달래려고 아버지 아버지
마침내 독살스러운 늙은 년 셋을 쫓아냈답니다
이젠 병이 좀 나으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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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의 성무일도(聖務日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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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의 성무일도


* 성무일도(聖務日禱): 명사. 기독교.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公的)이고 공통적인 기도. 성직자ㆍ수도자의 의무로서 8개의 정시과(定時課)로 되어 있다(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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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겨우내 추운 날
베란다의 천리향을
못 본 체했다
추위를 견뎌야만
봄에 꽃을 피우므로

애면글면
보름도 넘게
꽃봉오리는
덜 익은 고기마냥
허여멀건하게

향기를 토해내는
미친 여자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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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시


트렌드를 읽으라구요
요즘 시들은 어떤지
그 시를 누가 읽고
어떻게 소비되는지
그걸 알구
시를 쓰라는 거예요
뭣도 모르면서
뭔 시를 쓴다고

그래서
전문가님의 침이
고이는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음, 이게 요즘의 시군요
조물딱조물딱
애들이 밀가루 반죽놀이하는
아니 솜사탕 먹다가 남겨놓은
침 묻은 덩어리인가

이렇게 따라 쓰지 않으면
그쪽 패거리에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죠
그렇죠

세상살이가 다
그렇죠
한번 해먹은 사람들이
울타리치고
징하게 울궈먹죠

억울하면 출세하면 되죠
그렇죠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라고 말하는 건
죄다 거짓말인 거
우린 다 알잖아요

어디다 내 걸 간판이
있어야지
벌어 먹고살죠
그렇죠

무딘 언어의 끝을
벼리며
뻐개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렇죠
그냥 쓰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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