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밤


항히스타민제는
졸음이 오는 약이라
밤에 먹는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은 말똥가리
정신은 락스
냄새가 나는듯

가려움과 통증에
시달린 몸은
넝마 같다

낮을 지우기 위해
밤에 시를 쓴다

재능에는 절실함이
없다 재능만으로 쓴
시는 너무 매끄러워서
멀리 가지 못한다

좋은 시는
한 줌의 광기를
필요로 한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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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봄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봄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결코 주어지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조용한 집과
따뜻한 사람과
찬사와 위로 같은

당신은 아프고
외로웠으며
눈물을 흘렸고
홀로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봄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힘이 빠졌고
그리고 이제
늙어버렸다

내가 당신의 봄이
되어드리지요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실눈을
뜨고 경계하라
사기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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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웰의 죽음


그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많은 이들을 끌어모았다
그 궁전에는 커다란 괴물이
있었다 시뻘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괴물은 궁전을
찾아온 무수한 사람들을
삼켰다 더러는 괴물이
트림을 할 때 삼켰던
사람들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 궁전 근처를
배회하였다 가진 것을 다
내어팔면서 거지가 되어서도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 궁전의 외벽에는
'영화'라는 글귀가 아기머리만한
다이아몬드로 단단하게
박혀있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이 큰물이 되어 궁전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사람들은
떠밀려가면서도 그 말들을
주워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살아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오리 솜털같은 날들이 흘렀다
아, 그가 지은 궁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혹되어
인생을 망쳤던가 이제 그 궁전을
지은 이는 눈을 감았다 보드웰이여
편히 쉬시오 나는 아직도 그대의
궁전에서 주워온 글자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오


*David J. Bordwell(1947-2024): 미국의 영화학자. 영화사와 영화 이론의 뼈대를 구축한 선구적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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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8시

 
혼자 사는 윗집 남자는
토요일 저녁에 늘
배달 음식을 시킨다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라고 쓰면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함은 언제나
경멸의 대상이 된다
남의 습작 시에다
재능 없음,
이라고 써놓은 손가락은
진부하게 싸가지가 없다
네가 뭔데, 그런데
재능이 대체 뭔데,

오토바이 배기음과
초인종 소리는
일란성 쌍둥이
유령이 복도를
배회하는
토요일 저녁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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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바람이 오지게도
부는 봄밤
부엌 창문을 닫으며
기억에 스며든
한기를 느낀다

먼저 눈을 감은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어그러진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쓰린 속에 생강차를
들이킨다 더 속이
쓰리게

안방의 벽을 타고
옆 라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죽을 듯
토하는 중이다
그의 병증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나는 그의 쾌유를
빌지 않는다 아마
그도 나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하릴없이 앉아서
시를 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렇게 쓰려다가
그만둔다 이미
임자가 있다

봄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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