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는 늘 언니인 '치즈코의 동생'으로 불린다. 언니는 못하는 것이 없다.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와 연기, 달리기까지 다 잘한다. 그런 언니와는 달리 미카는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인다. 무언가를 잘 빼먹고, 덤벙대는 미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언니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언니 치즈코가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다. 치즈코의 동생 미카는 그렇게 언니를 잃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1991년작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은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중학생 소녀의 내적인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온갖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인 미카의 방을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미카의 방은 미카의 내면과도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미카의 상태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미카의 엄마 또한 영 기운이 없어 보이고, 아파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집안의 가장인 아빠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회사 업무 때문에 자주 출장을 가야하는 아빠. 아빠는 미카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야한다는 당부를 하지만,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든 미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미카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 미카의 눈에만 보이는 언니의 혼령이 미카를 돕는다. 언니는 미카가 밤길에 치한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 그렇게 미카의 곁에 머물게 된 언니는 미카의 일상을 함께 한다.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고, 운동회에서는 느리게 뛰는 미카를 격려해서 1등으로 들어오게 한다. 연극의 주연을 맡았지만, 언니만큼 잘 해낼 수 없어 상심한 미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은 동생을 떠날 수 없는 언니 덕분에 미카는 서서히 충격과 상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무려 2시간 반이나 된다. 1989년에 아카가와 지로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원작을 충실하게 보여주느라 영화가 늘어진 감이 없지않아 있다. 당시로서는 꽤나 공들였을 특수 효과는 오늘날 관객들의 기대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한다. 운동회에서 미카와 함께 뛰는 치즈코의 허술한(!) 모습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다소 산만하고 지루한 내러티브를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연출력으로 극복한다. '두 사람'의 중심을 이루는 뼈대는 갑작스런 언니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미카의 내적인 여정이지만, 그 여정에는 미카의 부모, 미카의 성실한 친구 하세베, 언니의 남자 친구 토모야도 함께 한다.

  아마도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뜻밖의 사건은 미카의 아빠에게 생긴 일일 것이다. 딸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에 지친 것일까? 미카의 아빠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원작자 아카가와 지로는 슬픔을 극복하는 소녀의 이야기에 아버지의 불륜 이야기를 넣어야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의 삶에는 실제로 다양한 일이 생길 수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산자들의 삶에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두 사람'의 등장 인물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마주하고 견딘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회복탄력성(psychological resilience)'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삶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건과 마주했을 때, 이전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 정신적 대응능력을 일컫는다. 미카의 엄마가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보여주는 정서적인 붕괴는 기질적인 문제에 더해진 낮은 심리적 회복탄력성에 의한 것이다. 미카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상에 안착하지만, 미카의 아빠는 위기를 극복할 적절한 방식을 찾는 데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니를 데려간 것은 하늘의 뜻이야. 너에게는 그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야할 의무가 있는 거야."

  무엇이든지 잘 하고 영민한 언니 대신에 자신이 죽는 것이 맞지 않냐고 미카는 친구 하세베에게 말한다. 그 말에 화가 난 하세베는 미카에게 그렇게 일러준다. 미카는 항상 의지했던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을 해나간다. 그 여정의 끝에서 언니는 미카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언니가 세상을 떴을 때의 나이가 된 미카의 뒷모습은 언니 치즈코와 닮아있다. 미카는 언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미카가 사랑했던 언니의 삶은 기억되고, 미카를 통해 이어진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소녀 미카의 내적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항구도시 오노미치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낸다.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다소 과한 느낌이 있지만, 영화 속 치즈코의 테마라 할 수 있는 '풀의 마음(草の想い)'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blog.goo.ne.jp   미카 역의 이시다 아키라와 치즈코 역의 나카지마 토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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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테마(The Theme, 197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 소련 영화들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문구가 있다. 'stack on the shelf',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정도쯤 될까? 대개는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당국의 최종 시사에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이다. 소련의 예술 창작 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맞지 않는 영화들의 운명은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었다.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1979년작 '테마(Тема)'의 경우도 그러했다. 영화는 심한 검열로 누더기처럼 되었고, 결국은 상영이 금지되었다.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테마'는 그렇게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고르바초프 집권기인 1987년이 되어서야 소련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저명한 극작가인 킴 예세닌(미하일 울리야노프 분)은 자신의 애인, 동료 극작가와 함께 볼가강변의 수즈달을 찾는다. 새로 집필할 역사극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다. 예세닌 일행은 한적한 소도시 수즈달에서 은퇴한 여교사 마리아의 환대를 받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지역 박물관에서 가이드 샤샤를 보게 된 예세닌은 호기심을 느낀다. 마리아의 집 만찬에서 예세닌은 샤샤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샤샤는 마리아의 제자로 어릴적부터 예세닌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샤샤는 예세닌의 최근 작품들은 별로이며 형편없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글이 아닌, 정부 당국이 원하는 이야기만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써온 예세닌은 샤샤의 그런 말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 일로 샤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예세닌은 밤늦게 샤샤의 아파트로 찾아가는데...

  예세닌은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당으로부터 받고 있다. 개인 별장, 자가용, 아파트, 그리고 작가로서의 명성까지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당의 노선에 부합하는 글만을 계속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닌 샤샤는 예세닌의 글이 가진 공허함을 알아챈다. 샤샤는 잊혀진 농민 시인 치지코프의 작품들에 매혹되어 있다. 소박한 농민의 언어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노래했던 시인에 대한 책을 쓰려고 준비중이기도 하다. 예세닌에게도 치지코프에 대해 열광적으로 소개하는 샤샤. 그러나 예세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샤샤를 꼬실 수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을 밴드 활동이나 하는 머저리로 잘못 키웠다며 전화로 광분하는 이 다혈질 작가는 달리 마음 둘 데가 없어 보인다. 아직은 마음만 먹으면 샤샤 정도는 넘어오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웬걸, 도도한 시골 아가씨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자의식 과잉의 예술가, 그의 음주벽과 여성 편력, 예술에 대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이야기다. 아니, 소련 영화에서 홍상수식 감성을 느끼다니... '테마'는 비정형적인 소련 영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간간이 터지는 웃음들은 과연 이 영화가 1979년에 소련에서 만들어질 법한가 싶은 의문을 남기기까지 한다.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확실히 삐딱선을 탔다. 구 소련 시절의 모든 영화는 국가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국영 영화'였다. 반체제 인사와 이민자에 대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라는 지시에 다른 감독들은 골치아픈 주제라며 고사했다. 그러나 판필로프 감독은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공산당의 노선에 충실한 어용작가의 내면적 갈등과 연애담을 내세우면서, 정부 비판의 메시지를 슬쩍 끼워넣는다.

  예세닌이 밤늦게 찾아간 샤샤의 아파트는 열려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을 둘러 보던 그는 샤샤와 애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부엌에 숨는다. 무려 20여분에 달하는 샤샤와 애인과의 대화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뼈대이기도 하다. 샤사는 결별을 통보하는 애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의 애인은 당국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서 반체제 인사로 찍혔다. 학자였던 그는 연구소에서 쫓겨나 묘지에서 무덤파는 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망명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샤샤는 붙잡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판필로프는 반체제 지식인이 무덤파는 일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소련의 현실을 에둘러 비판한다. 원래 당국의 뜻대로라면 이 영화는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테마'는 선로에서 이탈한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애인과의 결별에 혼절한 샤샤를 내버려두고, 예세닌은 모스크바로 급히 떠난다(문 앞에 쓰러진 샤샤를 넘어가는 예세닌의 모습은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2006)'에서 김승우가 문간에 취한 채 잠든 고현정을 넘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원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결말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결말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검열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밤, 정신없이 차를 몰던 예세닌은 갑자기 샤샤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가던 길을 돌아서려는 순간, 차가 뒤집힌다. 그는 겨우 빠져나와 근처 공중전화에서 샤샤에게 전화를 건다.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도로 순찰 경찰이 발견하고 차에 싣는 정지 화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래 판필로프 감독이 찍었던 장면은 예세닌이 사고로 죽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주인공의 '죽음'이 결코 바람직한 결말이 아니라며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타협한 결말에서는 예세닌의 생사를 알 수 없게 처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사 창고에 쌓이는 신세가 된 영화가 다시 빛을 본 것은 7년 후의 일이었다. 개혁 개방의 바람을 타고 관객과 드디어 만난 '테마'는 그 진가를 인정받았고,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영화의 초반부, 수즈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예세닌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틀어놓는다. 동행한 작가 친구는 슈베르트는 청승맞기 짝이 없다며 다른 걸 틀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세닌은 그럴 생각이 없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자신의 뜻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극작가,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샤샤의 애인, 그들은 모두 쓸쓸한 겨울 나그네 같다. 사랑했던 여인의 결별에 상심한 겨울 나그네는 추위와 고독 속에 헤매며 죽음을 예감한다. 가곡에 담긴 그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테마'는 소련의 현실에 빗대어 영화적으로 변주한다. 관객들은 검열의 칼날에 맞서 자신의 작가적 목소리를 낸 판필로프의 의지를 '테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영화 '테마'의 포스터. 뭔가 SF적인 느낌이 들지만, 권력에 영합하는 작가의 허상이 부서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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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묵주알(The Beads of One Rosary, 1979)'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 집에서 난 더이상 못살아!"

  여자는 이사를 못가겠다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인다. '쓰레기 집'이라는 말은 용납할 수 없다며 남편은 화를 낸다. 그들에게는 이사 갈 새집도 있고, 그저 짐 떠싣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남편은 이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아버지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자신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묵주알이 서로 이어진 것처럼, 이 효자 아들은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하겠다고 아내에게 공언한다. 그들이 사는 집은 새롭게 지어질 주택단지 때문에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 지방 정부와 건축 회사는 거주자들에게 새집을 주어서 이주를 진행시키는데, 오직 이 집의 주인 하브리카만이 이사를 거부하고 있다. 그에게 이 집은 50년 넘게 살아온 삶의 일부분으로 절대로 쉽게 떠날 수 없다. 효자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따른다. 며느리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묵주알'은 폴란드의 감독 카지미에시 쿠츠(Kazimierz Kutz)의 1979년도 작품이다. 그는 사회참여적인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철거 예정 단지에서 자신의 집을 지키려는 은퇴 광부의 외로운 투쟁을 그린다. 영화는 실제로 철거되는 광부 주택 단지에서 촬영되었다. 카지미에시 쿠츠는 새롭게 지어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과 철거되는 주택 단지의 모습을 다큐처럼 담아낸다. 영화는 사는 집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노인의 의지를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폴란드 사회의 모습을 펼쳐놓는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며 이사를 거부하는 하브리카와 그를 설득하려는 건축 회사 책임자는 설전을 벌인다. 오랫동안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하브리카가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무정부주의자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미 이웃집들은 이사를 갔고, 하브리카의 집은 마치 섬처럼 고립된다. 이 은퇴 광부의 집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브리카는 독불장군에 정신나간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

  급기야 집안으로 날아온 벽돌에 유리창이 깨지고,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한다. 며느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가버린다. 가부장제의 화신인 시아버지는 아들의 허락없이 나갈 수 없다며 며느리를 막으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브리카 노인을 둘러싼 세계는 그렇게 흔들리고 조각이 나고 있는 판국이다. 그럴수록 노인은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전직 광부인 그는 집에 위해를 가하려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집 둘레에 폭약을 설치한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와 그의 집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카지미에시 쿠츠는 하브리카의 고독한 투쟁을 통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정부 당국을 에둘러 비판한다. 당사자가 만족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일방적 관행에 하브리카는 저항한다. 참전 용사이며, 광부로서 쌓은 놀라운 업적으로 유공자 칭호를 받은 전형적인 구세대적인 인물이 집단의 가치에 순응하지 않고 개인적 투쟁을 벌이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면에서 하브리카의 외로운 싸움은 1980년에 일어난 폴란드의 자유노조 파업과도 맞닿아 있다. 오랜 경제적 침체를 야기한 폴란드 공산당 정부는 그 책임을 기습적인 물가인상으로 국민에게 전가하려 했다. 더이상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고, 억눌려 있던 정치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개인이 가진 권리와 자유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하브리카의 집은 결국 철거된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건설사는 교외의 고급 주택을 제공한다. 모든 것이 최신식인 그 집은 노부부가 살기에는 너무 넓어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 새로운 집에서 지독한 가부장주의자였던 하브리카는 아내의 설거지를 돕는가 하면,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남편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였을까? 그는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노동 영웅으로서 그의 장례식은 장중하게 치뤄진다. 마지막으로 철거된 하브리카의 집,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전통적 가부장제, 국가에 헌신하는 노동자의 신화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폴란드는 새로운 역사의 장에 들어선다. 때로 영화는 그렇게 시대를 앞서 예견하는 예언자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 출처: slaskiesiemianowice.pl   영화 '묵주알' 촬영현장의 카지미에시 쿠츠 감독(가운데)



*다음 글은 토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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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열대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류즈창에게 학교는 수용소 같다. 수용소장 같은 무서운 여자 담임은 툭하면 몽둥이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며, 공부 못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학업에 뜻이 없는 류즈창은 친구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틈나면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류즈창과 친한 동네 꼬마 다오난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마주친 다오난의 납치범들에게 류즈창도 잡히는 신세가 된다. 납치를 주도한 보스가 사고로 죽자, 부하 칭자이는 궁리 끝에 아이들을 자신의 고향 어촌 마을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칭자이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납치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궁핍한 살림의 칭자이의 가족들은 류즈창의 몸값을 받아내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과연 이 어리버리한 일가족 납치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열대어(熱帶魚)'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첸유순(陳玉勳) 감독의 1995년도 작품이다. 주로 상업용 광고 작업을 많이 했던 감독의 재치있고 기발한 감각은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돋보인다. 류즈창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상상 속 바다에서 잠수정을 타고 구해내는 장면이라든지, 칭자이 일가족의 우스꽝스러운 협박 전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정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류즈창은 고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그 시험은 마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문처럼 여겨진다. 방송에서는 납치된 류즈창의 안위 보다도, 류즈창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의 아버지와 시장 후보는 방송 인터뷰에서 납치범에게 류즈창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는데, 그 이유가 시험을 치루지 못해 '인생을 망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학 입학 시험이 아니라, 고교 입학 시험으로 온나라가 들썩거리는 이 입시 공화국에서 비록 납치된 처지에 있다고 해도 류즈창은 공부를 해야 한다. 칭자이는 류즈창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여동생이 썼던 참고서를 주고, 심지어 새책을 사다 나르기까지 한다. 납치범의 고향집은 졸지에 기숙 학원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살던 타이페이에서는 뜬구름 잡듯 시간을 낭비했던 중학생은 새삼 공부에 집중하며, 도시와는 다른 어촌 마을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인정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어촌 마을의 삶은 결코 한가롭고 낭만적이지 않다. 칭자이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팍팍하며 궁핍하기 짝이 없다. 칭자이의 이모는 임신한 며느리와 아들 내외를 부양하기 위해 서커스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바닷가에 면한 집 바닥에는 늘 물이 흥건히 들어차 있으며, 류즈창이 좋아하게된 칭자이의 여동생 아주안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굴까는 일로 돈을 번다. 고향을 떠나 타이페이에서 돈을 벌고자 했던 칭자이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는 아이들의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으로 전락해 버린다. 첸유순은 무언가 허술해 보이는 이 코미디 영화에서 대만의 지독한 입시 경쟁과 도농간의 소득 격차라는 사회 문제를 다룬다.

  공부 못한다고 받는 가혹한 체벌의 일상을 류즈창이 견디는 방법은 '공상'이다. 이 중학생은 바닷속에 아이들의 꿈만을 먹는 물고기가 있는데, 9,999개의 꿈을 먹으면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류즈창이 칭자이의 고향 바다에서 본 열대어는 어쩌면 그 상상 속 물고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괴롭고 비참할수록 상상의 나래는 더 아름답게 채색되는 법이다. '열대어'의 등장 인물들은 상실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류즈창은 한쪽 귀의 청력이 소실되어 보청기를 끼고 있고, 칭자이의 남동생은 불편한 한 쪽 다리를 끌면서 다닌다. 칭자이의 할머니는 치매로 인지능력이 손상되었다. 류즈창과 함께 납치된 다오난은 미혼모의 아이로 그의 엄마는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불완전하며 고통스럽다.

  류즈창의 미래를 위해 칭자이의 가족들은 몸값을 포기하고 납치극을 끝내기로 한다. 시험을 보기 위해 타이페이로 떠나는 류즈창에게 아주안은 열대어가 담긴 작은 어항을 선물한다.

  "너처럼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인생은 힘들어도 헤쳐나가야만 하는 거야."

 감독 첸유순은 다소 투박하지만,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대만의 사회적 현실과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그려낸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 '열대어'에는 잔잔한 웃음과 함께 가슴 뻐근한 슬픔이 흐르고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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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Babylift'란 명칭의 작전이 수행된다. 그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온 베트남 고아들은 입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이디(Heidi Bub)도 그렇게 미국으로 온 베트남 아이였다. 미국 남부, 신실한 종교심을 가진 싱글 여성의 아이로 입양된 하이디에게 성장의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억압적이고 냉담한 양모는 하이디에게 베트남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도록 가르쳤고, 하이디는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양모와의 갈등은 급기야 하이디가 대학생이 되면서 완전한 결별로 이어진다.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엄마가 된 하이디는 베트남의 친모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하이디의 친모도 딸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베트남계 미국 언론인 트란의 도움으로 모녀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다낭에서 온 딸(Daughter from Danang)'은 불행하게 헤어진 모녀의 상봉 속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의 깊은 상처를 조명한다.

  첫 인터뷰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이디의 외모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베트남 인과 백인 혼혈인 하이디의 외모는 이 여성에게 드리운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짐작케 한다. 유색 인종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이 있는 남부에서 성장한 하이디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KKK단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며 자란 하이디에게 남부는 독선적인 양모와 함께 견뎌야할 삶의 토대였다. 양모와의 단절 이후, 하이디는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애정에 대한 갈망을 상상 속의 친모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다낭에서의 상봉, 하이디는 친모 마이와 의붓 아버지, 이부(異父) 형제들을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은 이 가족의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감독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는 이 베트남 모녀의 상봉기를 흥미있는 플롯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우선 다큐는 'Babylift' 작전과 베트남전 관련 자료 화면으로 이야기를 연다. 뒤이어 하이디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 만남을 기대하는 친모 마이의 인터뷰, 베트남으로의 여정, 상봉에 이르는 과정을 속도감있게 전개시킨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의 궁금증은 증폭된다. 하이디의 생모는 어떻게 하이디를 낳게 되었고,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을까? 현재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은 어떤 이들이며, 과연 하이디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다큐의 후반부는 그런 의문에 대한 답들이 실타래 풀듯이 제시된다. '다낭에서 온 딸'은 잘 구성된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의 예시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봉의 기쁨은 이내 서로 다른 문화와의 부딪힘에서 오는 '문화 충격(Culture shock)'으로 이어진다. 덥고 습한 베트남의 날씨는 하이디를 힘들게 하며, 온갖 낯선 식재료들이 팔리는 재래시장의 풍경은 기이하게만 느껴진다. 친모의 과도한 스킨십도 냉정한 양모 밑에서 자란 하이디에게는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하이디는 친모가 얼굴을 부비며 입을 맞추자, 곧바로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기도 한다. 의붓 아버지의 존재도 하이디에게 무척 낯설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11년 동안 베트콩으로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다. 하이디의 생모는 먹고 살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어느 미군을 알게 되고, 하이디가 태어났다. 미군의 아이를 낳았다는 손가락질, 자신의 아이들이 겪는 차별과 설움, 하이디의 미래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이 맞물려 하이디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어떻게 아이를 버릴 수 있는지 친모를 원망하던 하이디의 생각은 베트남에 와서 곧 바뀐다. 이부 자매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현실을 보며 자신이 미국에서 누린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며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하이디는 원래 머무르기로 한 체류 기간을 단축한다. 6살까지 살았던 베트남에서의 추억은 퇴색되었고 실망으로 채워졌다. 거기에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남은 하이디에게 크나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다. 이부 큰오빠는 하이디에게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서 같이 살아야 할 것과, 그것이 어려우면 매달 어머니 봉양을 위한 생활비를 보내라고 말한다. 이미 체류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해 많은 지출을 한 하이디는 생면부지의 낯선 베트남인들이 자신을 현금출납기로 취급한다고 여긴다. 하이디는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절한다. 친모와 그 가족들은 자식으로서 가져야할 의무를 하이디가 거부한다고 생각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이 문화적, 정서적 충돌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 아시아권 관객들과 서양 관객들의 리뷰 반응이 갈리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이 다큐에 대한 리뷰를 읽다보면, 베트남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하이디의 무지와 오해를 질타하는 평이 나온다. 서양의 관객들에게 베트남 가족의 요구는 뻔뻔하고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22년 동안 헤어져 아무런 교류도 없는 자식에게 봉양의 의무를 설파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글쎄요, 문은 닫았는데 아직 잠그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다큐는 그로부터 2년 후, 하이디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이디는 베트남에서 날아온 편지들이 돈과 관련된 요구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거기에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은 하이디는 베트남의 가족들에 대한 입장을 묻는 감독의 질문에 그렇게 답한다. 결국 베트남 계 남부 미국인 여성 하이디의 과거로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다낭에서 온 딸'은 그 여행이 보여주는 미국 현대사의 민낯과 서로 다른 문화의 부딪힘에서 오는 파열음을 우직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그것을 담는 다큐의 관점은 일부는 기울어져 있고, 편파적이다. 카메라는 베트남의 모습을 낯설고, 기이하며,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혼합물로 포착한다. 이 다큐의 제목이 '다낭에서 온 딸'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어떤 면에서 그 제목은 미국이 수용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이식한 베트남 출신 입양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미국식 조망이라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사진 출처: itv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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