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미국에서 '사라(Sarah)'라는 제목의 소설책이 나온다. 작가의 이름은 Terminator.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가명으로 출판된 이 책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매춘부 엄마를 둔 어린 소년의 학대와 상처 가득한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역시 그 해에 출판된 단편 소설 모음집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도 호평을 받으면서, '터미네이터'란 이름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2000년 5월, 익명의 작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름은 'JT LeRoy', 제레마이어 터미네이터를 줄인 'JT'로 불리는 17세의 소년은 단번에 천재 소설가로 떠오른다. 염색한 긴 머리, 선글라스, 독특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JT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마약 중독,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예민하고 불안한 예술가로 대중에게 비춰졌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계 뿐만 아니라 패션, 영화, 음악계의 유명인들과 교류하는 셀럽이 된다. 영화 감독 구스 반 산트는 JT가 쓴 '사라'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JT의 또 다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는다. 커트니 러브, U2, 위노나 라이더 같은 이들도 JT와 알고 지냈다. 그런데 이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제프 퓨어차이그(Jeff Feuerzeig) 감독의 2016년작 다큐 'Author: The JT LeRoy Story(2016)'는 작가 JT 르로이를 둘러싼 거대한 사기극의 전모를 보여준다.

  다큐는 로라 알버트란 이름의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여자는 어린 시절에 이혼한 부모로 인한 불행한 성장기, 위탁 가정에서의 생활, 폰섹스 전화 상담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십대 초반을 회고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을 '스피디(Speedie)'라는 별칭으로 소개한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던 여자는 청소년 전화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다. '터미네이터'란 가명의 소년으로 상담을 받았던 스피디는 의사로부터 글쓰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 소설들을 유명 작가들의 연락처를 알아 내어 보내버린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첫 소설 'Sarah'가 출판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계속 발표한 소설이 인기를 끌자,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나올 궁리를 해야만 했다. 당시 동거하던 남자 친구 제프에게는 '사반나'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뚱뚱한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지닌 여자는 사반나를 '터미네이터'로 소개한다. 곧 이 이름은 'JT 르로이'로 바뀐다. 그렇게 스피디의 현실 아바타 'JT'가 탄생한다. 여자는 남자 친구 제프와 함께 공동 매니저로 'JT'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함께 한다. 이 기가 막힌 사기극은 무려 5년 동안 이어졌다. 대중 매체와 유명인들은 'JT'의 모든 것에 열광했고, 덩달아 매니저 노릇을 하던 여자는 음악하는 남친 제프와 함께 꿈꾸던 음반까지 낸다. 여기에서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프레이저'로 또 바뀐다. 'JT'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의 제작 과정에도 참여한다. 물론 모든 것은 그 여자 로라 알버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각색과 작사 작업, 매니저, 가수, 의상 코디네이터... 여자는 자신의 아바타 'JT'와 함께 하는 동안 문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간다.

  다큐 내내 유명인들과 'JT'의 통화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재생된다. 로라 알버트는 'JT'를 가장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고, 그것을 다 녹음해 놓았다. 중간 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 장면들과 알버트의 자필 메모들도 이 다큐의 독창성과 사실성을 배가시킨다. 거기에 자신의 사기극을 차근차근 되짚어 회고하는 로라 알버트는 전문 배우 뺨치는 연기력까지 보여준다. 이 여자는 물론 '사기(hoax, scam)'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부르는 '다중 인격 장애'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명의 사용은 예술가에게 용인된 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단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대리인을 내세운 것이 죄가 되냐고 묻는다.

  다큐는 현실과 예술적 속임수의 불분명한 경계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로라 알버트와 시누이, 동거남 제프로 구성된 이 희한한 가족 사기단의 좋은 날은 2005년, '뉴욕 매거진'의 폭로 기사로 끝나버린다. 더는 역겨운 사기극을 볼 수 없었던 제프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로라 알버트는 'JT 르로이'의 이름으로 회사까지 차렸는데, 가명을 내세워 영화사와 계약한 일로 고소당했다. 소송은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폭로 이후 잠시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로라는 자신의 글재주로 재기에 성공하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동안 잠적했던 'JT' 아니, 사반나는 나중에 공연 예술을 전공해서 행위 예술가가 되었다. 5년 동안 보여준 놀라운 연기력이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로라 알버트는 대중을 기만한 사기꾼인가, 아니면 예술적 아바타를 내세워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한 작가인가? 'Author: The JT LeRoy Story'는 관객들에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쓰는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지만, 사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그린다. 로라 알버트는 자신이 써낸 소설처럼 자신의 또 다른 존재도 그렇게 만들어 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강변하는 이 뛰어난 연기자이자, 사기꾼이며, 작가인 여자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흥미롭다. 2018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JT LeRoy'가 개봉되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JT', 로라 던이 알버트를 연기했다. 영화는 혹평 속에 흥행에 참패했는데, 아마도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 다큐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 독창적인 구성, 깊이있는 성찰까지 갖춘 이 다큐는 좋은 다큐가 무엇인지 스스로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JT'와 로라 알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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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의 일이다. 우연히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EBS라디오에서 추리소설을 낭독해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의 초반부가 낭독되고 있었다. 배우 조희봉 씨의 낭독이 꽤 좋았다. 어찌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던지, 매일매일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한 며칠 듣고는,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와 손톱'의 리뷰들을 찾아 읽다가, 어느 글에서 멈추었다. 저자를 보니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였다.

  '물만두'... 무언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 닉네임을 쓰는 이는 내 서재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래 전에도 내 블로그에는 누가 댓글을 남기는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몇 안되는 방명록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2005년에 그가 남긴 방명록 글이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서로 친구 신청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퍼런색 화면의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에서 뭔가 댓글로 소통한 적은 거의 없다. '싸이월드'와 '아이러브스쿨'도 내겐 남의 일이었다. 그랬던 터라, 그 방명록에도 따로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자 소개 글을 읽다가, 나는 순간 멈칫했다. 책은 그의 유고집 '물만두의 추리책방'이었다.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홍윤 님은 추리 소설 리뷰의 대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불치병으로 투병하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했다. 바로 추리 소설을 읽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쓴 글로 인터넷의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그에게는 삶의 낙이고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10년간 쓴 리뷰글이 1800편이 넘었다. 내가 읽은 글은 그가 쓴 리뷰를 엮은 책의 한 부분이었다. 라디오 낭독 추리 소설의 결말을 알아보려다 그렇게 오래 전 내 블로그의 방문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남긴 방명록의 글에 답글을 남기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인이 2010년에 세상을 떴으니,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새삼, 나는 한 사람이 남긴 글과 그의 삶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써냈다. 병마와 싸우는 시간 동안 글이 그에게 가졌을 의미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작년 가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소설을 쓰기 위해 글쓰는 습관을 만들려 시작했던 수필이 이제는 영화 리뷰들로 채워지고 있다. 거의 매일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가끔은 모니터 앞에서 멍 때리는 시간이 오기도 한다. 도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막내 동생을 위해서 쓰고 있기는 하다. 막내는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해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동생이 나에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이 좋겠다고, 꼭 그랬으면 한다고 말했다. 막내는 내가 영화 공부를 하던 시절에 매달 용돈을 부쳐 주었다. 고흐의 편지글에서 내가 결코 잊지 못하는 귀절이 있다.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너에게 진 빚은 꼭 갚겠다."

  고흐는 그렇게 동생 테오에 대한 마음을 글로 남겼다. 물론 나는 고흐가 아니지만, 동생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전히 갚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영화 공부한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었나 싶다. 나는 영화로 딴 학사 학위 절반은 막내 동생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배웠던 것을, 이제는 영화 리뷰 쓸 때나 조금 써먹을 뿐이다. 어쨌든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폴 오스터가 '빵 굽는 타자기'에서 했던 말도 그랬다. 트랙의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며, 날마다 무언가를 써내려 간다는 것은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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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만국(晩菊)'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고 지인이 일하는 여관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결근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가 나가자, 여관에서 일하는 청소부는 여자가 걸어가는 방향 쪽으로 냅다 물을 뿌린다. 마치 '재수없는 여편네, 얼른 꺼져라' 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이름은 킨, 일숫돈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여자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또 다른 채무자의 가게에 가서는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간다. 전번에 자신을 보고 도망쳤기 때문에, 미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늘 집에 돈을 둔 여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까봐, 하녀가 잠깐 두부 사러 나간 새에도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은 '흐르다(流れる, 1956)'의 스핀오프(spin-off)처럼 느껴진다. '흐르다'에서 궁기 흐르는 늙은 게이샤 소메카로 나왔던 스기무라 하루코가 '만국'에서는 있는 것이라고는 돈 뿐인 은퇴 게이샤 킨으로 나온다. 영화는 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 명의 은퇴 게이샤들의 사연이 어우러진다. '흐르다'에서 쇠락해가는 게이샤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나루세 미키오는 은퇴 게이샤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역시 '돈' 문제는 나루세 미키오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만국'의 주인공들은 어떤 형태로든 돈에 얽매여 일그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들이 뛰노는 주택가 골목을 비추던 카메라는 킨의 안방으로 들어간다.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킨은 돈 세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킨의 관심사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땅을 사들이는 것과 일숫돈을 받아내는 일이다. 괜찮은 집에서 청각 장애인 하녀를 두고 윤택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킨과는 달리 동료 게이샤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따름이다. 타마에와 토미는 여관 청소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타마에는 번 돈을 파친코와 경마에 쓰느라 늘 돈에 쪼들린다. 킨에게 꾼 돈은 갚지도 못하고, 하나 뿐인 딸에게도 늘 돈 달라는 이야기만 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토미는 아들 키요시가 번듯한 직장이라도 얻어 자신을 부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들은 첩살이 하는 여자의 돈에 기대어 산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게이샤 노부는 남편과 작은 주점을 운영하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다.

  은퇴한 게이샤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만국'은 나이든 게이샤들의 맨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나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연 중년 여자의 삶에 무엇이 남아있는가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킨은 타마에와 토미가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아이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킨에게는 남자도 없다. 타마에는 토미와 킨의 뒷담화를 하면서 킨에게는 '돈'이 곧 '남자'라며 비웃는다. 킨에게 과거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용지물이다. 함께 죽자며 킨에게 매달렸던 세키도, 킨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꼈던 멋진 외모의 타베도 모두 킨의 돈을 바라고 찾아온다. 킨에게 돈이란 남은 여생의 동반자이다. 그 돈이 없는 타마에와 토미에게는 대신 자식이 있다. 그러나 타마에의 딸은 결혼으로, 토미의 아들은 일자리를 구했다며 어머니 곁을 떠난다. 그나마 의지가지가 되던 자식도 날아간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장성한 자식을 떠나 보낸 중년의 부모가 느끼는 상실과 외로움의 감정. 특히 그 감정은 아이의 양육과 살림을 도맡아 했던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게이샤로 먹고 사느라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만, 타마에와 토미는 떠나버린 자식들을 보며 회한에 젖는다.  

  돈도 자식도 없는 노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돈 받으러 온 킨은 노부에게 나이를 생각하라며 되지도 않는 일이라 말한다. 무골호인 같은 남편은 노부가 데리고 살기는 편하지만, 힘이 되어줄만한 사람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혈육 한 점 세상에 남기고 싶은 노부는 생당근을 열심히 먹으면서 아이를 바란다. 결국은 떠나버릴 자식, 그래도 있는 것이 나은 걸까? 자식들 빈자리로 허전한 타마에와 토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술 뿐이다. 타마에는 자신에게 딸을 준 신에게 고맙다며 혀꼬부랑 소리로 주정한다.

  흐르는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타마에는 토미의 아들을 배웅하는 역전 다방에서 젊은 게이샤들을 본다. 그 게이샤들의 모습은 자신의 과거였다. 젊음도 남자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타마에는 파친코 경품을 그러모을 것이며, 토미는 아들의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킨은 늘 그랬듯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돈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킨은 거간꾼과 함께 시골 땅을 둘러보러 떠난다. 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킨의 발걸음은 왠지 활기차 보인다. 나루세 미키오는 명멸하는 불빛과 같은 중년 여인의 삶에 그렇게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다. 여자로서의 삶은 이미 빛이 바랬지만, 아직 살아가야할 날들은 남아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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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Java Head(1934)'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A의 가난한 중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는 영화를 보면서 배우에 대한 꿈을 키운다. 영화 촬영의 중심지였던 도시에서 14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엑스트라를 맡는다. 독특한 마스크와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17살에 드디어 첫 주연을 따낸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각색된 영화 버전인 'Toll of Sea(1922)'에서 였다. 안나 메이 웡(Anna May Wong)은 헐리우드 최초의 중국계 여배우로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쌓았다. 헐리우드 경력 초창기, 안나는 동양에 대한 이국적이고 차별적인 선입견에 기반한 역할들이 주어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이 여배우는 주로 사악한 악녀로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연기 경력에 대한 열망은 안나를 유럽으로 향하게 했다. 영국을 비롯해 독일에 머물면서 영화를 찍었다. 영화 'Java Head(1934)'는 안나가 영국에서 찍은 5편의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배우 자신이 가장 사랑한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 작가 조셉 헤르게스하이머(Joseph Hergesheimer)가 쓴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Java Head'는 1923년에 헐리우드에서 무성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유실되었다. 1934년에 영국의 소롤드 디킨슨 감독은 같은 제목의 유성 영화를 찍었고, 안나는 백인 남편과 결혼한 만주족 공주 역을 맡았다. 매사추세츠가 배경인 원작은 시나리오로 각색되면서 항구 도시 브리스톨로 바뀌었다. 영화의 제목 'Java Head'는 부유한 선주 제레미 아미돈이 자신의 저택에 붙인 이름이다. 인도양의 험한 해협 지형 자바 헤드는 제레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게릿은 집안의 앙숙인 던삭 가문의 딸 네티를 사랑하고 있다. 네티의 할아버지는 게릿과의 교제를 반대하고, 게릿은 실망하며 1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마침내 게릿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게릿의 옆에는 중국인 아내 타오 위옌이 있다. 낯설고 기이하게 보이는 만주족 공주의 출현은 브리스톨에 동요를 일으킨다.

  이방인 타오 위옌에게 브리스톨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에 다름 아니다. 'Yellow face'라는 말로 노골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그들 앞에서 타오 위옌이 보여주는 태도는 매우 품격이 있다. 화려한 옷차림과 머리 장식은 백인 사회에서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 남편 게릿은 적극적으로 아내를 엄호하며, 고향 사람들이 타오 위옌의 존재를 받아들이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이 부부는 곧 국제 결혼한 부부가 겪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게릿은 아내가 불상 앞에서 시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불경을 읊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덜 야만적(barbaric)인 방식으로 할 수 없냐고 아내를 질타한다. 그는 아내의 방에 있는 불상을 비롯해 서화, 중국의 장식품들에 혐오스런 눈길을 보낸다. 그런 그의 마음은 예전의 연인 네티에게로 향한다.

  영화는 서구인들이 동양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환상과 편견의 진열장 같다. 영화 초반부 묘사된 게릿의 항해에는 동양의 항구 도시에 기항하는 선원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의 동양 여성들은 선원들을 유혹하며, 그들은 기꺼이 여인들의 환대를 즐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이 투사된 동양의 이미지는 부패와 탐욕, 악의 근원과 이어진다. 게릿의 형 윌리엄은 바다를 싫어하는 인물로 그 때문에 아버지 제레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에게 배와 바다는 그저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다. 제레미는 윌리엄이 돈 때문에 자신 몰래 아편 밀수를 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른다. 그 아편은 타오 위옌의 나라에서 온 것이다. 네티의 삼촌 에드워드는 아편 중독자로 나오는데, 그는 타오 위옌에게 매혹되어 게릿과 갈라놓으려 한다. 타오 위옌은 비로소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 만주족 공주는 맹렬한 질투심에 불탄다. 그리하여 네티를 찾아가 죽이려 든다...

  그러나 '노란 얼굴'의 동양인이 가하는 위협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타오 위옌은 네티를 없애더라도 남편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만주족 공주는 생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항해하는 게릿과 네티의 모습이다. 'Java Head'의 이러한 결말은 당시 서양이 타자인 동양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반영한다. 아편 중독자인 에드워드는 중국 문화에 경도된 인물로 나오는데, 그 캐릭터는 악마화된 타자로서의 동양이 끼치는 폐해를 상징한다. 그런 곳에서 온 타오 위옌이 'Java Head' 저택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제레미는 며느리와의 첫 대면에서 뭐라고 불러야 하는거냐며 '타오 위옌 아미돈'은 결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게릿을 매혹시켰던 타오 위옌의 미모와 아내 나라의 문물은 견디기 힘든 야만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의 초초상이 자신을 버리고 백인 여성과 결혼한 남편에게 아이를 보내고 자결하는 결말과 'Java Head'의 타오 위옌의 죽음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본부인으로 인해 네티는 게릿의 아내가 되어 행복을 누린다. 타오 위옌을 연기한 안나가 자신의 배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여배우는 영화에 만족했던 것 같다. 1934년의 'Hays code'로 본격화된 미국 영화의 검열은 타 인종간의 애정 묘사를 금지했다. 그 때문에 안나는 그 어떤 키스신도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 영화 'Java Head'에서는 백인 남성의 정식 부인 역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신을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이 안나 메이 웡이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은 이유였다. 일그러진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기이한 결합인 'Java Head'는 그렇게 선구자적 길을 걸어간 동양인 여배우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사진 출처: tvtropse.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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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는 속임수(feinting)의 기술이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영국과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가 넣은 두 개의 골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마라도나는 한 손과 머리를 사용해서 골을 넣었는데, 그 순간을 놓친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오명과도 같은 별명이 붙게 된 이유였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세나(Senna, 2010)', '에이미(Amy, 2015)'에 이어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2019)'를 내놓으면서 그의 유명인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큐는 현대 축구사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마라도나의 축구인생을 돌아본다. 카파디아는 수백 시간의 자료 화면을 추리고 추려서 마라도나의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이 다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마라도나의 첫 에이전트의 놀라운 안목 덕분이었다. 그는 두 명의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마라도나를 따라다니며 찍게 했다. 그렇게 남은 필름들과 마라도나의 아내 클라우디아의 개인 비디오 소장 자료가 더해지면서 다큐의 사실성은 세밀하고 풍성해졌다.

  다큐의 첫 도입부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내달리는 스포츠카의 내부 장면에서부터이다. 마라도나가 타고 있는 차는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한다. 나폴리, 그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빈 손으로 오게 된 도시였다. 1984년 7월, 마라도나가 왔을 당시 SSC 나폴리는 리그 순위 밑바닥을 전전하는 약체 팀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적으로도 낙후된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하수구, 시궁쥐로 부르며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런 그곳에 마라도나는 세리에 A리그 우승을 2번이나 안겨준다. 그는 나폴리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폴리에서의 활약과 함께 1986년 조국 아르헨티나의 멕시코 월드컵 우승은 마라도나 인생의 정점을 이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오직 축구공 하나만으로 세상을 평정했다.

  카파디아의 전작 다큐의 주인공들이 영광의 순간을 지나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마라도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큐 초반부에 나온 펠레의 청년 마라도나에 대한 짧은 언급은 예언이 된다. 펠레는 마라도나의 정서적 불안정성을 지적한다. 축구장에 서있으면 인생도, 골칫거리도, 그 모든 것도 잊게 된다고 말한 마라도나는 축구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약점 투성이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친자를 30년 동안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척 했으며, 복잡하고 문란한 사생활은 황색언론의 먹잇감이었다. 결국 마약으로 점철된 선수 경력 후반기를 지나며 마라도나는 몰락한다. 마라도나의 마약 공급책인 나폴리의 토착 마피아 Camorra의 줄리아노 일가는 그런 마라도나의 추락에 일조한다. 도시의 성인에서 마약 사범으로의 급전직하, 거기에 더해진 자격 정지 징계는 마라도나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는 나폴리에서 도망치듯 떠나야 했고, 망가진 경력은 복구되지 못했다.

  다큐는 마라도나의 인생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화려한 전성기에 이어진 몰락을 대비시켜 마라도나라는 인물의 인생을 영화처럼 편집한다. 카파디아는 다큐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비디오와 필름으로 찍은 마라도나의 개인 자료 화면과 과거 경기 장면을 설명하는 이는 마라도나 본인과 그의 누나, 아내, 개인 트레이너와 축구 해설가들이다. 이 다큐에서 그나마 주목할만 것은 음악이다. 빠른 비트의 전자 사운드로 작곡된 음악들이 다큐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그런 음악과 함께 다채롭게 편집된 경기 장면들에 축구 팬들이라면 '넘나 재밌는 것'이라며 열광하리라. 그러나 비평적 차원에서 나는 그런 열광을 보낼 수는 없다. 카파디아는 좋은 이야기꾼(storyteller)은 될 수 있겠지만, 작가로서의 독자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다큐에서 그가 직접 찍은 장면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좋게 평가하자면, 카파디아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이야기가 될 만한 것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그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폴리를 떠난 마라도나는 갑자기 13년 후인 2004년의 아르헨티나 토크쇼로 순간이동한다. 그 후의 인생 하반기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 화면으로 제시될 뿐이다. 쿠바의 카스트로를 비롯해 남미의 여러 정치인들과 친했던 마라도나의 정치적 면모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다.

  아마도 언젠가 관객들은 마라도나에 대한 또 다른 다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인물이 보여준 인생역정은 너무나도 극적이고 흥미진진해서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는 언더도그였던 소속팀을 정상에 올리고,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무참하게 패배한 조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켰다. 마라도나 인생의 대부분은 분명 축구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보다 복잡한 현실의 정치적 외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마약 문제로 자격 정지를 당한 처분조차도 축구계 내부의 정치 역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마라도나의 인생은 스포츠와 정치, 스타와 파파라치 언론의 공생과 같은 측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카파디아는 그런 마라도나의 인생 한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해서 보여준다. 독창성은 없지만, 그가 만든 이 다큐에는 떨치기 힘든 매혹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pars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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