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남쪽'이란 영화는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E. Solanas)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역시 제목이 '남쪽'으로 번역되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 스페인의 감독 빅토르 에리세(Víctor Erice)는 1983년에 'El Sur'를 만들었다.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영화는 정관사 el이 없는 'Sur(1988)'로 표기된다. 빅토르 에리세는 프랑코 정권의 폭압적 지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벌집의 정령(El espíritu de la colmena, 1973)'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대 스페인 역사는 '프랑코'란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랑코는 1975년에 사망했지만, 스페인 정부가 국립 묘역인 전몰자의 계곡에서 그의 유해를 이장시킨 것은 2019년이었다. 독재자의 그림자는 죽어서도 스페인을 암묵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에서도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감지된다.

  영화는 어린 소녀 에스트렐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별'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소녀는 별 모양의 반지를 늘 끼고 있다. 에스트렐라는 의사인 아버지 아구스틴, 평범한 주부인 엄마 줄리아와 함께 스페인 북부에서 살고 있다. 소녀에게 아버지는 신비한 비밀과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비춰진다. 진자로 수맥을 알아내 마을 사람들이 우물을 파도록 돕는 아버지는 에스트렐라에게 흠모의 대상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을 대부분 다락방에서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어린 딸은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엄마는 아버지가 프랑코 충성파였던 할아버지와 싸우고 '남쪽'의 고향집을 떠났다고 일러준다. 어느 날, 에스트렐라는 아버지의 다락방 서랍에서 '아이린 리오스'라고 써진 종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얼마 후, 시내 영화관 앞을 지나다 본 영화 포스터에 그 이름이 적혀있다. 소녀는 영화관에서 나오는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아가씨가 된 에스트렐라는 어렵게 아버지에게 여배우와의 관계를 묻지만, 아버지는 답해주지 않는다. 예기치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에스트렐라는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은 과거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남쪽'으로 떠난다.

  놀랍고 허망하게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아니, 무슨 영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중간에서 그렇게 끝나는가? 그렇다. 이 영화는 미완성작이나 다름없다. 에스트렐라가 남쪽으로 떠난 이후의 이야기가 영화의 후반부를 채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작자는 도중에 제작 중단을 통보했고, 빅토르 에리세는 그것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제작비 부족'이었지만, 에리세는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을 거라며 이후 여러 번에 걸쳐서 불만을 토로했다. 영화의 원작은 에리세의 부인이 쓴 소설이었다. 굳이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언급하자면, 에스트렐라는 '남쪽'에서 이복 오빠를 만나게 된다. 여배우는 아버지의 과거 연인이었다. 아버지의 숨겨진 삶의 이야기는 결국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에리세는 이미 찍어놓은 전반부를 가지고 편집을 해서 '남쪽'으로 내놓았다.

  미완성작이 반드시 실패작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영화를 이야기 중심의 서사로 파악한다면, '남쪽'은 분명 불완전한 작품이다. 그러나 소녀 에스트렐라가 아버지의 비밀스런 과거와 조금씩 조우하면서 성장하는 과정 그 자체로도 이 영화의 서사는 충만하다. 무엇보다 사물 그대로의 색감을 온전히 살리면서 빛과 어두움을 대비시킨 촬영이 무척 빼어나다. 에스트렐라가 살고 있는 북쪽 마을의 풍경, 에스트렐라의 첫 영성체와 파티 장면을 비롯해 '남쪽'은 풍성한 회화적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가 절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에게 완전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그런 영화적 요소들 때문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영화가 말해주지 않은 나머지의 이야기들, 에스트렐라의 남쪽 여행과 아버지의 과거의 삶에 대한 이야기 없이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남쪽'을 반드시 스페인 현대사와 연결지어서 해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물론 에스트렐라의 아버지는 공화파로 프랑코 지지자인 할아버지와의 불화로 고향을 떠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영화는 에스트렐라와 아버지의 관계, 한 소녀의 '성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와 관계를 맺는 방식, 그것이 한 사람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어린 에스트렐라는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진다. 표현하기 보다는 속으로 감추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인생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어떤 비밀이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아닌 타인의 삶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 알지 못하는 접혀진 시간들이 존재한다. '남쪽'은 관계와 삶의 불완전성에 대해 넌즈시 일러준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남쪽'을 실패작이라고 느끼지 않는 데에는 영화가 담고 있는 그러한 인생의 진실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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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우 감독의 1966년작 영화 '초우(草雨)'에는 서로의 신분을 속이고 만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주불 한국 대사의 딸인 영희(문희 분)는 비오는 날 나갔다가 우연히 부잣집 아들 철수(신성일 분)를 만난다. 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그들은 각각 서로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 영희는 대사의 딸이 아니라 식모였고, 철수는 자동차 세차일로 먹고 사는 건달 같은 남자였다.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 감독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Moscow Does Not Believe in Tears, 1979)'에도 그와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 공장 여공으로 일하는 카챠는 교수인 삼촌으로부터 여행 간 사이에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삼촌의 집은 혁명 광장 앞에 있는 부유층의 아파트이다. 카챠의 친구 류다도 함께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는다. 류다는 카챠와 함께 교수의 딸들로 자신들을 속이고, 알고 있는 인텔리 계층의 남자들을 불러모아 아파트에서 파티를 연다. 과학자, 유명한 운동 선수, 방송국 직원,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카챠와 류다. 그러나 짧은 쇼타임은 끝나고 그들에게는 다시 팍팍한 현실이 기다린다. 그런데 카챠는 그로부터 3개월 후, 임신한 것을 알게 된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1981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해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소련 영화로 기록된다. 영화는 헐리우드 멜로 드라마의 내러티브 공식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모스크바의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들은 각자 다른 삶의 행로를 걸어간다. 여자의 인생은 좋은 남자를 붙잡는 것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류다는 잘 나가는 운동 선수와 결혼한다. 미혼모가 된 카챠는 어려움을 이기고 학업을 마친 후 공장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 순박한 토샤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삶에 만족하며 산다. 영화의 전반부는 1958년의 시점에서 카챠, 류다, 토샤가 어떻게 사랑을 찾아가는지를 보여주고, 후반부는 20년 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중심 캐릭터는 카챠이지만 류다와 토샤의 삶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라는 옛속담이 있다. 뒤웅박은 박을 쪼개지 않고 작은 구멍만 내어 그곳에 씨앗이나 곡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그릇이었다. 한 번 잘못 들어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뜻으로 여자의 일생도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으로 쓰였다. 류다는 그런 신념을 신봉하는 매우 세속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빵 공장 여공은 교수 딸로 위장해서 유명한 운동 선수를 하나 나꿔챈다. 그리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남자는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술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콜 중독자가 된다. 결국 류다는 이혼녀로 세탁소 점원으로 살아간다. 카챠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 루돌프에게 버림받는다. '야, 네가 조심했어야지,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해'를 시전하는 찌질한 마마보이한테 데인 뒤로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 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카챠는 외롭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시골 아낙으로 살아가는 토샤는 행복할까? 농사일이 대박 터질 일도 없고, 힘들게 아들 셋 키우며 그냥 저냥 살아간다. 20년이 지난 후, 세 명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남자가 드리운 그늘 아래에 놓여있다.

  과연 여자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여성의 연애와 일에 대해 꽤나 구식의 관념을 강하게 투사한다. 제대로 된,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만 여자는 비로소 완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고 외친다. 카챠는 전문직 여성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지만, 결혼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이혼남 고샤와 새출발을 꿈꾸는데, 이 남자는 마초 기질이 있어서 카챠가 자기 주장하는 꼴을 못본다. 그런데 고샤의 이런 기질이 영화 속에서는 '남자다운 것'으로 아주 잘 포장된다. 고샤는 카챠의 딸 알렉산드라의 남자 친구 문제를 주먹으로 해결한다. 그런 방식을 반대하는 카챠에게 '그런 딴지는 접어두지 그래'하며 훈계한다. 집안의 중심인 남자로서 카챠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는 당시 소련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 사회학적 자료로 쓰이기에 충분하다. 엘다 라쟈노프 감독의 'Office Romance(1977)'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정을 볼 수 있다. 통계국의 최고 책임자에 오른 나이든 독신 여성 루드밀라는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불행하다. 그나마 루드밀라가 뒤늦게 찾은 연인으로 나오는 아나톨리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소탈한 남자다. 그와는 달리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고샤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카챠는 그런 고샤를 인생에 둘도 없는 배필로 여긴다. 그것은 국가 경제적 측면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억압적 틀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련 영화 당국은 '통속적인 멜로 영화'라며 마뜩잖은 반응을 보였지만, 영화는 9천만명의 관객 동원을 이뤄내며 소련에서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세르게이 니키친이 작곡한 영화의 주제곡 '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의 아름다운 선율이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부르짖는 소련의 구식 멜로 영화, 오늘날의 여성 관객이 '이런 걸 봐야해?'라고 물을 수도 있는 영화. 그럼에도 카챠와 류다, 토샤가 보여주는 인생의 행로들은 여성의 삶에서 남자와 결혼이 가지는 의미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유리구두 들고 찾아와서 신겨줄 왕자님은 현실에 없다. 영화 속 카챠가 보여주는 현실판 '짚신 찾아 삼만리'의 눈물겨운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짠한 구석이 있다. 고샤를 두고 '그런 남자는 세상에 없어'를 외치는 카챠,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카챠의 행복을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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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는 것이 때론 도박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평점이나 리뷰도 괜찮은데 막상 보니 싱겁고 별 내용도 없는 시시한 영화인 경우, 뭔가 사기당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Blaxploitation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데, 1970년대의 정서를 잘 담았다는 평이 있어서 마이클 슐츠의 'Car Wash(1976)'를 보았다. 정말이지 처참한 영화였다. 화장실 유머와 개연성 없는 설정이 너절한 시나리오를 채우고 있었다. 이런 영화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에 대해 누군가 한 말을 믿었어야 했다. '당신의 아이가 더럽게 말을 듣지 않을 때, 벌을 주려거든 이 영화를 보게 하십시오' 그랬다, 벌 받는 심정으로 영화를 끝까지 다 봤다. 그러고 나서 본 영화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데드 엔드(Dead End, 1937)'였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이름이 등장한다. 각본을 릴리언 헬만이 맡았다. 원작은 시드니 킹슬리의 브로드웨이 연극(1935)이다. 짜임새 있고 극적인 서사를 잘 써내려가는 헬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매카시즘에 맞서서 의회 증언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답게(헬만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영화는 좌파주의적 시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사실 제작사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걱정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 헤이스 코드(Hays code)에 따른 검열이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Baby Face' 마틴은 악명높은 갱스터이지만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틴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예전 여자 친구 프랜은 '매춘부'인데, 거기에 대한 언급도 검열에 걸리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제시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수수께끼 풀어가듯 막연한 암시들을 하나하나 짜맞추면서 보아야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검열에 통과했음'이라고 자랑스럽게 자막이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촬영을 누가 했는가 하면 그레그 톨랜드가 했다. 그렇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그 위대한 촬영 감독이다. 톨랜드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촬영은 그야말로 눈을 정화시키는 느낌이다. 빛과 어둠을 명징하게 조화시키는 톨랜드의 촬영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일종의 수미쌍관을 이룬다. 뉴욕의 화려한 고층 건물에서부터 수직으로 하강하는 크레인 쇼트는 East River의 빈민가에서 멈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반대로 빈민가에서 화려한 빌딩이 보이는 공중으로 상승하는 쇼트이다. 톨랜드는 이 영화에서 크레인 쇼트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런 쇼트들은 부자와 빈자, 고층 고급 주택과 더러운 슬럼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뉴욕의 퀸즈보로 다리 근처의 빈민가, 그곳은 강이 보이는 좋은 전망 때문에 부유한 이들의 고급 고층 주택과 맞닿아 있다. 그 거리의 아이들은 미래 갱단의 후보자들이다. 폭력과 욕설이 일상인 아이들 무리의 리더 토미는 누나 드리나와 살고 있다. 드리나는 빈민가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 동생과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경제 공황의 무거운 그늘 속에서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이다. 역시 그곳의 주민인 데이브도 불경기에 간판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고 있는데, 그는 바로 코앞의 고급 주택에 사는 케이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그곳에 낯선 남자 두 명이 나타난다. 데이브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마틴을 기억해낸다. '베이비 페이스'란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만나러 그곳에 왔다. 그러나 마틴의 어머니는 보고 싶지 않다며 저주를 퍼붓고, 여자친구는 병든 매춘부로 나타난다. 마틴은 상심하고, 떠나기 전에 부잣집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와중에 토미는 아이들과 함께 부잣집 아이의 옷을 빼앗고 때린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토미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일은 커져가는데...

  빈민가와 바로 인접한 고급 주택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데드 엔드'에서는 그것을 거대하고 정교한 세트로 구현해 낸다. 멋진 외관의 주택 출입구는 바로 슬럼가와 마주하고 있으며, 그곳의 출입구는 더운 여름인데도 긴팔의 정장 외투를 걸친 경비원이 지킨다. 개인 풀장이 있는 집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부잣집 아이는 칼쓰는 법에 익숙해진 더러운 빈민가 아이들과 대비된다. 생계를 이어가느라 허덕이는 데이브와 드리나의 삶과는 달리, 주택 테라스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헬만은 아이들의 대사를 통해 경제 공황 시기에도 흥청망청 먹고 노는 부자들을 비판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것은 삶의 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판이하게 가른다. 토미를 비롯해 그곳 아이들의 모습은 갱스터 마틴의 어린 시절을 연상하게 만든다. 마틴이 마주하는 비극적 현실은 이미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의 거리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으며,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서있다.

  그나마 나쁜 길에 빠지지 않고 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드리나와 데이브의 현실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데이브는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케이를 연모하지만, 케이는 데이브가 사는 곳에 갔다가 불결하고 비좁은 주거 환경에 경악한다. 헬만은 계급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한다. 결국 데이브는 케이를 떠난다. 대신 그는 토미의 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드리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 마치 헬만은 그것만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헬만의 이러한 좌파주의적 시각은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미국의 시대적 상황과 강하게 공명한다. '데드 엔드'는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의 대도시 뉴욕 버전 같다. 영화에 깔린 노골적인 좌파주의에 불편해할 관객들도 있겠지만, '경제 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이 결코 과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빈곤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드리나의 직업은 나오지 않지만, 드리나는 파업(picketing)하다 경찰의 곤봉에 맞았다며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준다. 

  마틴이 맞는 비극적 최후는 아마도 그 거리의 삶이 보여주는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그럼에도 '데드 엔드'는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드리나와 데이브는 경찰에 끌려가는 토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들이 슬럼가의 삶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함께 견디어낼 수 있다면 무거운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거리의 끝에서 그렇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간다.



*사진 출처: tcm.com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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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류하는 마을(Floating Village Asylum, 2020)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에 위치한 수상 가옥촌에는 미얀마 난민들이 산다. 오랜 군부 독재와 여러 종족들 사이의 분쟁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한 미얀마인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 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모두 무국적자 신분인 그들은 아이들만이라도 나은 미래를 찾기를 바란다. 프리차 스리수완 감독은 4년의 시간을 두고 수상 가옥촌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에 떠있는 난민들의 집처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금어기에도 생계를 위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단속에 걸리는 일도 부지기수, 또한 남획으로 고갈되는 어족 자원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공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국적을 얻지 못하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남자들은 태국인이 하지 않는 저임금의 고된 농장일을 하며 생존을 위해 애를 쓴다.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짜 고생이 뭔지 모르지."

  그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철모르고 마구 뛰어놀던 아이들은 다큐가 끝날 무렵에는 훌쩍 자라나 있다. 아이들은 마침내 태국 국적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딸에게 13살이 되면 큰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냉엄한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얀마인이 아닌 태국인으로, 태국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미래 세대 아이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특이한 장면 하나: 아이가 '뇌전증(간질)'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가 아이에게 하는 주술 의식이 눈길을 끈다. 길다란 칼로 아이의 몸을 여러 번 쓸어내린다. 우리나라의 무속에서도 치병이나 잡귀를 내쫓을 때 그와 비슷한 방법을 쓴다. 동아시아권의 샤머니즘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한 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링사이드(Ringside, 2019)

  시카고, 그 도시에서 특히 거친 곳으로도 유명한 사우스사이드에서 권투로 남다른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 독일 감독 안드레 회어만은 두 어린 소년 복서의 성장기를 8년에 걸쳐 기록한다. 케네스 주니어는 엄격한 코치인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경력을 쌓아간다. 또 다른 유망주 데스틴 주니어는 놀라운 재능을 가졌으나 잘못된 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바람에 4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다. 다큐는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하층 계급의 흑인 소년이 복싱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바꾸어가는지 영상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보여준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여러 번 다루어진 익숙한 주제이다. 이미 이전에 사회학자 로익 바캉(Loïc Wacquant)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사회와 복싱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저서 'Body and Soul(2004)'로 내놓은 바 있다.

  케네스 주니어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자신의 방이 있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한다. 복싱에서 보여준 그의 가능성은 그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아버지 케네스는 자신의 훈련과 교육이 아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자부심을 피력한다. 전직 마약상인 또 다른 아버지 데스틴은 아들의 4년 옥바라지를 하며 재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복싱 말고는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는 그들이 사는 사우스사이드가 어떤 곳인지 두 번의 장례식을 통해 보여준다.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나오다 총에 맞아 죽은 흑인 복서들은 사우스사이드에 만연한 폭력이 어떤 것인가 입증한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링사이드'는 시카고 빈민가 복싱 클럽을 통해 인종과 빈곤,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를 성찰하게 만든다.
 

3. 요양원 비밀요원(The Mole Agent, 2020)

  비밀 임무를 띄고 요양원에 잠입한 스파이가 있다. 그의 나이는 무려 83세. 세르지오 할아버지는 탐정 사무소의 구인 광고를 보고 갔다가 면접에 합격한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요양원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딸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일이다. 여느 입소자들처럼 들어간 그는 요양원 할머니들을 관찰해서 매일 탐정 로물로에서 보고한다. 이 특별한 비밀 요원은 타고난 친화력과 이해심, 분별력으로 곧 요양원 할머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세르지오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이 대부분 가족들의 외면으로 외로움과 슬픔 속에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매일 엄마를 애타게 찾는 치매 할머니,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우는 할머니, 자신이 지은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는 할머니, 세르지오에게 남자 친구가 되어줄 수 있냐고 정중하게 묻는 할머니... 다큐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직 가보지 않은 노년의 풍경을 비감하지만, 나름의 따뜻함이 있는 수채화 풍경처럼 펼쳐놓는다. 무엇보다 비밀 요원 세르지오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타인에 대한 남다른 배려심과 존중의 자세, 뛰어난 공감 능력, 분별력과 지혜는 좋은 노년이 무엇인가를 그 자체로 보여준다. 극영화적 설정을 도입한 이 독특한 다큐는 초반의 지루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4. 그들이 부른 내 이름(They Call Me Babu, 2019)

  '바부(babu)'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다. 다큐는 1940년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의 가정부로 일했던 여성들의 삶을 돌아본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을 '바부'라고 불렀다. 당시에 촬영된 자료 화면에 '알리마'라는 바부 여성의 삶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아들만 위하던 아버지로부터 엄마와 함께 떨어져 나와 살던 소녀 알리마는 네덜란드 가정의 보모로 들어간다. 알리마는 주인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살피며 그들이 네덜란드로 잠시 이주했을 때 그곳까지 따라가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의 삶,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격변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들어온다. 자료 화면 속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본어와 일본 노래를 부르는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 관객들은 더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적 행태는 모든 식민지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다큐는 일본의 패망과 인도네시아 독립을 아우르는 역사적 사건까지 개관한다. 영화적 설정이기는 하나, 감독 산드라 베렌즈는 학술 연구와 함께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인도네시아 바부 여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야했던 하층민 바부 여성의 삶을 통해 관객들은 제국주의의 그늘을 돌아보게 된다.


**EIDF 2021에 대한 개인적인 총평:


  그다지 새로운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영화제였다. 나로서는 초창기의 참신하고 활기있었던 EIDF, 그 중간의 침체기를 떠올려 보면 그나마 중박은 쳤다는 느낌이다. EIDF는 이제 해외에서 화제가 된 신작 다큐들을 소개하는 대표적 통로로서는 안착했다. 하지만 과연 EIDF 자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이 뭐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전에는 페스티발 기간 동안 무료로 볼 수 있었던 D-BOX가 올해는 유료로 전환되었다. 공지에는 그 이유가 EBS '내부사정(이라고 읽고 돈 문제로 나는 해석한다)'이라고 되어 있다. 영화제의 수익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영방송의 다큐 영화제라는 취지에 걸맞게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무료 상영이 맞다고 본다. 재방송으로 관객들이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직 유료의 D-BOX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큐 제작자들이 다양한 주제와 접근 방식으로 다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점은 좋았다.



***사진 출처: fotogramas.es  '요양원 비밀요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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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슈하드 동물원의 호랑이 '마야'는 출산 직후 3마리의 새끼 가운데 2마리를 죽였다. 부상을 입은 한 마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마야를 새끼 때부터 사육해왔던 조련사 모센은 왜 마야가 새끼들을 죽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세상이 새끼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마야를 촬영하던 감독의 말이었다. 잠시드 모자데디와 앤슨 하트포드의 다큐 '마야(Maya, 2020)'는 동물원 호랑이 마야를 통해 인간과 야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란 북부 지방에 서식하던 카스피 호랑이들은 서식지 파괴와 사냥으로 멸종되었다. 동물원은 멸종된 카스피 호랑이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육사 모센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호랑이 마야와의 특별한 관계로 이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맹수임에도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마야를 보기 위해 이란 전역에서 관람객들이 몰려들었고, 마야는 그야말로 마슈하드 동물원의 스타였다.

  모센만을 따르던 마야는 영화 촬영을 위해 카스피 연안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소련이 점령 당시 지어놓은 야생 사육장이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이란 왕실은 독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소련 연합군은 그것에 불만을 품고 이란을 침공한다. 영국은 이란 남부를, 소련은 이란 북부에 주둔한다. 다큐에서 마야가 머물게 된 사육장은 바로 그 소련군이 지어놓은 곳이었다. 다큐는 카스피해 호랑이 멸종의 비극적 역사를 들려준다. 감독이 인터뷰한 그곳의 노인은 소련군들이 호랑이를 많이 잡아갔고, 주민들도 호랑이를 많이 사냥했다고 말한다.

  마야가 처음으로 동물원을 떠나 진짜 자연과 마주하게 되면서 모센과 마야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비좁은 동물원의 우리에 있다가 드넓은 대지에 지어진 사육장에서 마야는 야생의 본성에 눈을 뜬다. 인근 마을의 말과 소떼를 쫓아가기도 하고, 숲속을 헤매기도 한다. 마침내 영화 촬영이 끝나고 동물원으로 돌아왔을 때의 마야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즈음, 동물원에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진다. 개인 소유의 동물원이었던 그곳에서 호랑이 사체와 가죽을 불법적으로 판매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고발당한 동물원 소유주는 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모센을 해고한다. 모센은 원래의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간다. 그는 실력이 좋은 '박제사'였다.

  2대째 동물원을 운영해온 소유주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모센 또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관객들은 그들이 포장해서 보여준 동물에 대한 애정 뒤에는 더러운 돈과 추악한 비리가 있었음을 직감한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를 외치는 동물원 소유주와 모센의 모습은 탐욕으로 일그러져 있다. 마야의 출산은 그런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두 마리의 새끼를 죽인 마야의 심정에 대한 감독의 추측을 이 다큐를 본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마야는 평생 우리에 갇혀 사람들의 놀잇감으로 살아야하는 삶은 자신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카스피해에서 영화 촬영이 끝날 무렵, 마야가 회복한 야생성은 급기야 촬영을 하던 감독에게 덤벼들어 목에 상처를 내는 데에까지 이른다. 모센은 팔뚝의 이곳저곳에 난 상처와 흉터를 보여준다. 야생동물로서 마야의 공격성은 평소에도 그렇게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을 부인한 채 사람을 잘 따르고 친근하게 구는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들인 이유는 오직 '돈벌이' 때문이었다. 박제사 모센이 마야에게 보여준 애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동물원을 떠난 그는 백화점에 코너를 임대해서 자신의 박제 박물관을 성대하게 개장한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그리즐리 맨(Grizzly Man, 2005)에서 이미 보여준 바와 같이, 야생을 자신의 방식대로 길들일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은 비극을 초래한다. 인간이 야생 동물들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거리를 두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국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 COVID-19 바이러스는 야생동물과 인간, 가축 산업의 무너진 경계선에서 발생했다. 감독은 살아남은 한 마리 새끼에게 마야의 젖을 물리기 위해 애를 쓰던 모센에게 묻는다. 마야에게 당신은 어떤 의미냐고. 모센은 아마도 공동 양육을 하는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냐고 대답한다. 모센의 그 대답은 서늘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인간에게 길들여져서, 자신의 새끼 또한 인간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마야의 모습은 도돌이표 같은 의문을 낳는다.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마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의 최후의 수호자로서 인류에게 부여된 책무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동물과의 더 나은 공존의 미래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사진 출처: mayafilm.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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