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군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12살 아이작, 7살 조이는 아빠를 열렬히 환영하며 끌어안는다. 남자는 2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좋은 시간도 잠시, 남자는 다시 떠난다. 카트린 아인혼과 레슬리 데이비스의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는 제대 군인 가족의 삶을 10년의 시간을 두고 담아낸다.

  삼촌 내외와 함께 지내는 아이작과 조이, 부모는 이혼했고 아빠는 먼 나라 아프간에서 군 복무 중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영웅이며, 거대한 산과 같은 그리움이다. 그런데 그 아빠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견뎠지만, 결국 절단 수술을 받게 된다. 군인으로만 살아온 남자는 장애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도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는 동안 아빠의 동거녀 마리아, 마리아의 아들 조던이 새로운 가족으로 들어온다. 다큐는 파병 군인의 부상과 제대, 그 가족이 보내는 긴 재건의 시간을 펼쳐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그 어떤 정치적 신념과 쟁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물 흐르듯 펼쳐지는 이 가족 드라마를 보며 관객은 미국의 골치아픈 아프간 전쟁에 대해 구태여 떠올릴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다큐 제작자들의 의도이기도 하다. 아인혼과 데이비스는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말한다(출처 coffeeordie.com과의 인터뷰).

  일반적으로 전쟁 다큐가 보여주는 긴박하고 치열한 전투 현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 부상과 죽음, 그러한 장면들은 이 다큐에서 볼 수 없다. 브라이언이 주둔한 아프간 쿤두즈 기지와 그가 수행한 전투가 짧게, 삽화적 장면처럼 들어가기는 한다. 그러나 다큐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아프간 파병 군인에 대한 기사를 시리즈로 내보냈는데, 육군 중사 브라이언도 취재 대상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해서 'Father Soldier Son'의 10년에 걸친 여정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여성 제작자들이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의 풍경은 매우 인간적이다. 가족 구성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이고 집안의 자잘한 소품들을 담아내는 것에도 남다른 데가 있다. 다큐 속 집안의 풍경은 이 가족이 군인 가장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군복과 군모를 일상복처럼 걸치고 지낸다.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세우는 군인들 미니어처를 비롯해 전쟁 관련 소품들이 진열된 거실, 아이작은 소파에서는 군용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잔다. 아버지 브라이언은 아이들이 강한 남성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조이가 학교 레슬링 경기에서 패하는 모습을 보이자 브라이언은 아들을 다그친다. 아이작이 하는 컴퓨터 게임은 전쟁 서바이벌 게임이다.

  브라이언이 상정한 '군인'이라는 이상적 직업, 사명감과 자부심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린 조이는 군인이 되어 아빠의 다리를 못쓰게 만든 놈들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조이와는 다르게 아이작은 대학에 진학하는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브라이언과 새엄마 마리아는 아이작의 꿈에 냉소적이다. 브라이언은 아이작이 결국 군대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된 아빠가 어떻게 아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반길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남자의 삶에서 군대는 전부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야할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두 아들의 내면에 무겁게 드리웠다는 점이다.

  다리 절단 수술 후 의족에 적응해야 하는 힘든 재활의 시간, 제대 군인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경제적인 어려움... 그에 더해 12살이 된 조이의 죽음으로 가족은 길고 고통스런 시련의 시간을 보낸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동생 조이는 아이작의 인생 행로를 바꾸게 만든다. 고교 졸업 후 아이작은 군에 입대한다. 입대 지원서를 쓰고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료식에 이르기까지 다큐는 담담하게 아이작이 군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들은 미 육군에서 자원 입대 홍보 영상으로 써도 괜찮을 정도로 보인다. 거기에서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군사 작전과 정치적 결정으로서의 파병과 같은 배경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다큐는 오직 '가족'의 풍경에만 집요하게 천착할 뿐이다.

  가족 심리 상담학자들에게 이 다큐는 매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아버지가 만들어낸 가족 문화와 양육 방식, 그것이 어떻게 한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 구성원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가를 'Father Soldier Son'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의 부모와 성장기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이 다큐의 경우에는 '군인'이라는 직업적 특수성이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반적인 가족과 좀 다를 뿐이다. 여느 전쟁 관련 다큐와는 달리 군인의 '가족'에 촛점을 맞추고, 10년의 시간을 두고 담아낸 이 다큐에는 가족 관계의 역동성(Family dynamics)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2년을 군에서 보낸 후, 아이작은 자신의 입대 결정은 부모의 이혼, 동생의 죽음,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 같은 여러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혼란과 불안함 속에 있는 이 젊은이의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조이의 죽음 이후,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은 브라이언은 군복 무늬가 그려진 배냇저고리를 산다. 겉보기에 이 가족은 시련을 이겨내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재건된 가족의 풍경에서 '조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사회인과 가장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브라이언, 그런 남편의 모습을 감내해야하는 마리아, 자신의 욕구 보다는 아버지의 기대에 종속된 아이작, 떠도는 주변인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아들 조던, 이들 가족의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진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다큐는 애국심과 같은 보수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는 의혹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전쟁과 정치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유화적으로 그려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Father Soldier Son'이 담고 있는 가족이란 주제의 근원성, 상처와 회복의 과정은 묵직한 감정의 파고를 일으킨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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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성찰, The Imposter(2012)와 American Animals(2018)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쟤들 선 넘네'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범죄 피해자가 된 도서관 사서도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cross the line', 중산층 출신으로 미래가 보장된 4명의 백인 대학생들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 바트 레이튼(Bart Layton) 감독의 2018년작 'American Animals'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2004년,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있었던 고서적 강탈 사건을 재연한다. 특이하게도 사건과 관련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에 들어간다. 레이튼 감독은 이전 작품인 다큐 'The Imposter(2012)'에서는 영화적 형식을 잘 결합시켰는데, 'American Animals'는 역으로 극영화의 틀에 다큐멘터리를 이식시켰다. 

  미술을 전공하는 스펜서는 도서관 안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매혹시키는 고서적과 만난다. 19세기 미국의 자연 화가이며 조류학자 존 오듀본(John Audubon)의 화첩 'The Birds of America'였다. 아름다운 핑크 플라밍고가 펼쳐져 있는 그 화첩은 무려 1200만 달러에 달하는 희귀한 책이었다. 약간의 비행(非行) 기질이 있는 친구 워렌은 스펜서가 흘리듯 말한 그 이야기에 혹한다. 그걸 훔쳐보면 어떨까, 하고 했던 농담은 1년이 지난 뒤에 치밀한 계획으로 변모한다. 모범생 회계학과 학생 에릭, 운동을 좋아하는 채스가 거기에 합류하고, 4명의 대학생들은 마침내 결전의 그날에 강도로 돌변하는데...

  영화는 Heist film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간다. 훔쳐야할 대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며,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레이튼 감독은 4명의 영화 속 인물들을 내러티브에 풀어놓고,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병치시킨다. 그런데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 속 워렌이 편의점에 들른 스펜서를 차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 진짜 워렌이 옆자리에 앉아 있고 둘은 대화를 나눈다. 현실의 스펜서는 영화 속 배우들이 도서관을 습격하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본다. 영화와 실제의 경계는 흐릿해지며 둘은 마구 뒤섞인다. 실제 인물들과 비슷하게 닮은 외모의 배우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The Imposter'에서 레이튼이 썼던 방법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발견된 16살 소년은 자신이 3년 전 미국 텍사스에서 실종된 '닉'이라고 말한다. 닉은 스페인으로 날아온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기다리던 가족들의 환대를 받는다. 언론도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이 소년과 관련된 수상한 점들이 드러난다. 금발에 푸른색의 눈동자였던 13살 소년 닉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청년의 외모로 나타났다. 프레데릭 부르댕, 그는 실종 아동을 사칭하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The Imposter'는 시작부터 그의 사기 행각을 본인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사기극은 부르댕을 빼다 박은 배우를 기용해서 다큐 속 액자 형식의 스릴러물이 된다. 실제 부르댕의 내레이션이 재연 배우의 입모양에 겹치기도 한다.  

  바트 레이튼은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실제와 허구의 모호한 경계, 서로를 모방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 자체에 관심을 둔 것처럼 보인다. 'American Animals'의 주인공들은 화첩 강탈을 모의하면서 Heist film을 열심히 본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자신들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펼쳐졌을 때, 그들은 겁에 질려 당황하고 허둥대며 무거운 화첩을 들고 나올 수 없어서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죄책감과 발각될 것이라는 불안은 이후 그들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장물을 팔아 나눈 돈으로 멋지게 잠적하는 영화와 같은 결말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7년형의 감옥 생활이었다.    

  도대체 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실질적인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워렌의 경우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개인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을 뒤바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달리 짜릿하고 멋진 상상 속의 세계, 그것을 현실로 그대로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그들이 도서관을 습격한 날, 오듀본의 화첩 속 그림은 이전의 플라밍고가 아니라 먹잇감을 나꿔채는 독수리로 바뀌어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은 흉폭한 포식 동물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벽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The Imposter'의 부르댕도 실종된 이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사이코패스 범죄자에게 '상상'은 '현실' 그 자체로 기능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낸 500여명의 가상 신분의 인물들과 그들의 과거사는 사기꾼과 뛰어난 이야기꾼의 차이가 종잇조각 한 장임을 보여준다. 부르댕에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그들 모두는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넘지말아야할 위험한 선을 넘었죠.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요."

  강도로 돌변한 대학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사서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한다. 'American Animals'의 실제 인물들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답변도 들려주지 않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하다. 흔히 예술은 삶을 모사한다고 말한다. 감독 바트 레이튼은 현실의 모사로서의 허구,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실제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자신의 두 작품을 통해 주의깊게 성찰한다.



*사진 출처: cinemapoli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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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들어!'하는 대사와 함께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겁에 질린 집주인 남자와 침입자 사이의 총질이 시작된다. '소련 웨스턴(Red Western)'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 무렵에 남자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세피트코(Larisa Shepitko)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과 나(You and Me, 1971)', 도입부 장면부터 범상치 않은 영화는 러닝타임 97분 내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며,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감독의 의중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관객을 내러티브 바깥으로 밀쳐내는 영화, 세피트코는 동시대에도 그랬고 후대의 관객들과도 불화할 것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표토르의 과거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중간 중간 제시된다. 의사인 표토르는 친구 샤샤와 의학 연구소에서 뇌종양 연구를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표토르는 연구를 그만 두고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일한다. 샤샤 또한 정부 기관의 관리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오른다. 표토르는 어느 날 갑자기 스웨덴에서 귀국해서 다시 이전의 연구를 이어가려 한다. 샤샤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지만 샤샤는 거절한다. 실망한 표토르는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는 동안 표토르의 아내 카티야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샤샤와 가까워진다. 시베리아의 시골 마을 의사가 된 표토르, 친구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샤샤, 자신과 아이를 두고 잠적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 카티야, 이 세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50년대에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VGIK)에서 구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배웠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있었다. 바실리 슉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라리사 세피트코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소련 영화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했던 슉신은 고향 알타이의 정서를 소련 민중의 삶 속에 녹여내었고, 타르코프스키는 독자적인 영상 미학을 확립했다. 세피트코 또한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아닌, 이미지가 가진 힘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1971년작 '당신과 나'는 그것을 잘 드러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표토르의 직업은 의사인데, 영화는 표토르의 직업과 과거에 대한 정보를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화면과 나중에 시골 마을 의사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인공에 대해 알게 된다. 표토르가 왜 연구를 그만 두고 외국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다만 표토르와 샤샤 사이에 있었던 카티야의 존재가 어느 정도 그 결정에 영향을 끼쳤음을 추측할 수 있다. 카티야는 갑작스런 남편의 귀국과 잠적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표토르의 내면에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은 무작정 길을 떠나게 만든다. 모스크바에서 떠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표토르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거칠게 따라간다. 마구 흔들리는 쇼트는 표토르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이어지는 여행에서 남자는 가난하고 소박한 민중들과 만난다. 귀향하는 젊은 농부 가족, 사과 한 알을 건네는 중년의 시골 아낙네, 그들과의 만남 끝에는 연인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는 철부지 아가씨도 있다. 결국 표토르는 시골 의사로 정착한다.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 보다는 이미지를 우선으로 한다. 먼지 낀 구두 위에 십자가를 그리던 표토르의 시선이 창공을 응시하자, 그것은 붉은 십자가 마크가 그려진 구급 헬기로 바뀐다. 헬기를 타고 가던 표토르는 한창 댐 공사 중이던 인부들을 보게 된다. 인부들은 손짓을 하며 헬기를 향해 인사한다. 건강하고 즐거운 노동자와 새롭게 변모하는 소련의 모습을 넣은 것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의도가 아닐 수 있다. 세피트코의 영화는 검열 당국의 심기를 늘 불편하게 했고, 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 세피트코 영화 속 인물들의 고뇌, 방황, 불행과 고통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표토르가 구두에 그린 십자가는 단지 구급 헬기와 구급차에 새겨진 마크가 아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표토르는 자신을 살아가게 만들 중대한 목표를 찾고 있다. 남자는 자신이 만난 민중들의 얼굴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비상(Ascent, 1977)'에서도 예수를 닮은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구원과 희생의 의미를 말했던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도 클로즈업 쇼트를 사용한다. 시골 마을의 보건소에서 표토르는 뇌종양을 앓는 소녀의 엑스레이를 보게 된다. 과거 그는 개를 대상으로 한 뇌종양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연구소를 그만 두고 스웨덴 행을 택하면서 연구는 중단되었다. 자신이 계속 연구를 했더라면 낫게 할 수도 있었던 소녀의 얼굴을 보며 표토르는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세피트코는 이 소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의 선택과 그것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한다. 영화 속 표토르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뛰어난 의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로 세상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며, 그가 그것을 저버렸을 때 그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의 삶이 달라진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영화는 일러준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피트코 감독 자신의 신념처럼 보인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 영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만드는 것,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화의 예언자적 기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중 문화 산업에 종속된 영화가 '재미'와 '수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추세가 되었다. 

  '당신과 나'의 불친절한 서사, 쉽게 이입될 수 없는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와 관객들 사이의 간극을 크게 만든다. 거기에는 영화 당국의 검열이라는 요소도 개입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세피트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은 낯설고 투박하게 보인다. 감독의 유작이 된 'Ascent'가 빛을 발하기까지 그 중간 단계로서의 징검다리 같다는 인상도 준다. 영화의 제목 '당신과 나'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영화의 첫부분, 스웨덴에서 돌아온 표토르는 샤샤에게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함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안온한 삶을 위해 각자의 길을 걸어갔던 두 사람의 삶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불행해 보인다. 엄혹한 공산 정권 치하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사명감과 개인적 선택과의 괴리, 세피트코는 고뇌하는 의사 표토르를 통해 그 삶이 가진 무게감과 속내를 드러낸다. 'Ascent'의 영화 음악을 담당했던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가 이 영화에서도 종교적 영성의 분위기를 더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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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가다가 특이한 외모에 남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피해서 갈 것이다. 경찰은 그 사람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일 것이다. 뉴욕 거리를 친구와 함께 걷던 크리스탈 모젤(Crystal Moselle)이 그랬다. 모젤은 눈길을 사로잡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보게 된다. 선글라스를 쓰고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그들은 한 형제들로 신기한 표정으로 거리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모젤과 그 형제들 사이에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영화'였다. 모젤은 그들과 시간을 두고 연대감을 쌓아갔고, 4년 후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6명의 앙굴로(Angulo) 형제들은 14년 동안 아버지에 의해 감금된 삶을 살았다. 모젤이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형제들은 그 즈음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웃들은 앙굴로 일가의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도 않았고, 오직 집에서 갇혀서 지냈다. 어떻게 대도시 뉴욕의 한 복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삶의 행로를 걷는 이들은 언제나 다큐 제작자들의 관심을 끈다. 다이렉트 시네마의 기수 메이슬스 형제의 'Grey Gardens(1975)'는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로 가득찬 대저택에서 사는 상류층 모녀(재클린 케네디의 고모와 사촌)의 삶을 담았다. 테리 즈위고프의 'Crumb(1994)'은 외설적이고 기괴한 만화를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만화가 Crumb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리드먼가 사람들 포착하기(Capturing The Friedmans, 2003)'의 감독 앤드루 재러키는 '광대'라는 직업을 찍으려고 취재하는 도중에 자신의 취재 대상이 아동 성범죄자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다큐에는 범죄 가족의 뒤틀린 삶의 행로가 드러나 있다. 'The Wolfpack'의 감독 모젤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인물들을 찍었다. 명백히 아동 학대와 유기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형제들의 이야기, 그 형제들이 세상으로 나오면서 겪게 되는 변화를 담아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놀랍고 짜릿하지 않은가? 풋내기 영화학도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과 그 형제들이 다큐를 찍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고 결국 그것을 해냈다.

  다큐는 가족의 과거 홈비디오 자료들과 그들의 현재 삶의 모습이 대비되어 진행된다. 허름한 아파트에는 6명의 형제들, 다큐에는 나오지 않는 1명의 여자 형제가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백인으로 페루 트레킹 여행을 갔다가 원주민을 만나 결혼했다. 북유럽 국가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 그들 가족은 뉴욕 시의 주거 프로젝트 혜택을 받아 6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아버지 오스카는 가족들을 마약과 폭력이 있는 현실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오직 집에서만 지내도록 강제한다. 바깥 외출은 오스카만이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어머니의 홈스쿨링 덕분에 문맹은 피했다. 과대망상과 편집증을 가진 아버지 아래서 숨죽이던 아이들은 첫째 무쿤다가 15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외출을 감행한다. 그것이 2010년의 일이었다.     

  홈비디오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들 가족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원주민 분장을 한 아이들의 생일 파티 장면에서 아버지 오스카는 마치 부족장처럼 보인다. 독재적 가부장인 이 남자는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며 일 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왔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종속되어서 아이들과 함께 고통스런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다큐 속 아이들 모친의 모습은 정서적인 문제를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엄마는 자식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취미 생활은 '영화', 형제들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워갔다. 다큐는 중간 중간 이 형제들이 재연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보여준다. 가짜 총과 가면을 쓰고 아파트의 한정된 공간 속에서 자신들만의 공연을 하는 형제들의 모습은 기이하며 비현실적인 것처럼 제시된다. '펄프 픽션(Pulp Fiction, 1994)',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와 같은 영화를 보며 첫째 무쿤다는 대사를 받아적고 장면을 분석하며 자신만의 영화 공부를 한다.

  다큐의 후반부는 그들 형제의 세상 탐험으로 채워져 있다. 지하철을 타고 뉴욕의 명소 코니 아일랜드 해변에 가보고, 인터넷을 통해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환경 운동 시위에 참여하는 형제의 모습도 있다. 다큐는 세상과 만나면서 달라지는 형제들을 즐겁게 응시한다. 모젤 감독은 자신의 다큐에서 인물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촛점을 두었다고 했다(출처 dissolve.com과의 2015년 인터뷰). 어찌 보면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민한 감독은 여러가지 요소들을 통제했다. 터너 증후군(염색체 이상의 유전병)을 앓고 있는 첫째 딸은 화면에서 배제되었고, 아동학대와 유기의 혐의를 가진 아버지의 모습과 대화도 최소한으로 절제했다. 형제들의 외출 장면 또한 나름대로 잘 기획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The Wolfpack'은 14년 동안 감금되었던 형제들의 나름 성공적인 현실 안착기로 끝난다. 그러나 이 다큐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윤리와 관련된 의문들을 남긴다. 모젤 감독이 다큐에서 보여준 촬영 대상자들과의 긴밀한 정서적 유대는 놀라운 것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촬영 당시 미성년자였던 형제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전적이고 합의된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문서화된 어떤 것이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을 보면 이 형제들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도 참여했다. 그들의 모친이 소식이 끊겼던 가족과 전화를 하는 장면은 형제들이 찍어서 감독에게 건넨 것이다. 감독은 형제들과 일정 부분 협업을 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상호 이익을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 다큐는 분명 가족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첫째 무쿤다는 광고 제작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다른 형제들은 요가와 환경 운동,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처럼 내러티브와 재미를 강조하게 되면서, 'The Wolfpack'과 같이 다큐 제작의 윤리 규범을 모호하게 넘나드는 작품들을 보게 된다. abc 뉴스의 대담에 나온 형제들은 1년에 몇 차례 정도는 외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감옥 같은 생활은 맞지만, 외출 한 번 안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다큐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감독이 카메라를 촬영 대상자에게 주면서 이야기가 될 거리를 스스로 찍게 하는 것은 또 어떤가? 변화, 낙관, 희망,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장면, 감동을 주는 결말에 대한 집착은 결국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극영화를 만들어낼 뿐이다. 뉴욕 거리에서 형제를 처음 본 감독의 친구는 그들에게 '어린 늑대 무리(wolfpack)'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어린 늑대들은 다큐를 통해 세상 속에서 사람의 삶을 살게 되었고, 감독은 경력의 반짝거리는 한 줄을 추가했다. 모두가 다 잘 된 이 다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고 안좋은 뒷맛을 남긴다. 
 


*사진 출처: vulture.com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로 분장한 Angulo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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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빠죄아.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불륜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또 있다. 홍상수의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 나오는 영희(김민희 분)와 상원(문성근 분)이 그들이다. 배우인 영희는 유부남 영화 감독 상원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2부로 나누어져 있는 이 영화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 2부는 한국의 강릉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것처럼 보이는 영희는 낯선 외국의 도시에서 선배 지영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 지인들과 만남을 갖는다. 관객들은 영희가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이 배우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의 감독 홍상수와 연인 사이이기도 한 김민희는 영화 속 영희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 받을 자격 없어요!"

  강릉에서 지인들과 함께 가진 술자리, 갑자기 영희는 '사랑 받을 자격'을 운운하며 좌중을 향해 일갈한다. 어째 영희가 하는 대사가 아니라 홍상수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신들이 뭔데 우리 사랑에 대해 떠드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희의 지인 준희(송선미 분)와 천우(권해효 분)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영희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이들을 천박한 관심을 지녔다며 폄하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보고서인 동시에 대중들을 향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 시선의 끝에서 당사자인 감독과 여배우를 마주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자아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왔다. 이전까지 관객들은 그 캐릭터들이 감독 본인의 부분적 특성이거나 주변 지인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2010)'에서 역시 감독으로 나왔던 문성근이 여기서도 감독으로 나온다. 우리는 문성근이 연기한 상원이 홍상수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대사들에 귀를 기울인다. 상원은 영희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폐해졌는지를 토로한다. 이 자의식 과잉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상원'이란 캐릭터는 영희에게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며, 체호프의 책 구절로 절절히 사랑 고백을 늘어놓는다. 아, 난 그 부분에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홍상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한결같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

  '해변의 여인(2006)'에서 주인공 중래가 해안가 사구의 나무에게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그 장면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도 함부르크에서 산책하다 말고 다리 앞에 멈춰서서 갑자기 땅에 대고 절한다. 두 인물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나무 장면은 지극히 속물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캐릭터인 영화 감독 중래가 보여주는 어떤 순수의 한 조각, 생에 대한 열망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모습과는 다르게 본질적인 것, 숭고한 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사랑과 예술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고 너무 먼 곳에 있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상원은 사랑을 얻었고, 그 사랑을 심하게 앓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상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그의 고백을 듣고 있는 영희의 입장은 어떨까? 영희는 상원이 늘 주변에 예쁜 여자들을 둔다며 힐난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퍼붓는다. 정말 둘이 저렇게 살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행인에 의해 꿈에서 깬다. '여러분, 이거 다 꿈인 거에요.'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관객의 어깨를 툭 친다. 그의 이 영화는 사실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그 설정에 균열을 가한다. 1부에서 등장한 '검은 옷의 남자'가 그러하다.

  공원에서 함께 산책하던 지영과 영희는 시간을 물어보는 낯선 남자와 마주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남자는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겨주고, 두 사람은 그와 또 한 번 마주칠 것 같자 피해 버린다. 그런데 그 남자는 해변가의 영희에게 나타나 영희를 들쳐 메고 가고, 그 장면과 함께 1부가 끝난다. 2부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영희가 머무는 콘도에 나타난다. 해안가로 난 베란다의 창을 열심히 닦고 있는 그를 영희와 준희, 천우 모두 안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홍상수가 설치해놓은 이 '낯설게 하기' 같은 연극적 장치는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핍진성에 의문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영희(영화 속에서도 직업은 배우이다)이며 현실의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사랑에 빠진 이 여배우는 슬프고 외로우며,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배우의 연인인 감독은 영화 내내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외쳐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 속 영희는 표정과 연기, 심지어 직접 부르는 연가를 통해서 자신의 넘쳐나는 사랑을 입증해 보인다. 영희는 겉으로는 상원과 헤어졌다. 그럼에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니, '연결'이라는 표현 보다는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 영희는 상원이 나오는 꿈을 꾸는가? 꿈 속에서 영희는 상원에게 표독스럽게 굴며, 상처받고 정체된 자신의 삶을 날것 그대로 내보인다. 현실의 영희는 그것을 상원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꿈의 힘을 빌어서만 상원과 대등한 또는 보다 나은 우월적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릉에 도착한 영희는 영화관에서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도망친 여자(2020)'에서도 주인공 감희의 영화관 장면이 나온다. 감희는 계속해서 들이치는 파도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 사랑의 환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여배우는 이제 조금은 관조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 감희의 표정에 심한 고뇌나 불안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친 여자'의 감희에게서는 활기가 보이지 않으며, 지루함이 읽혀진다. 2019년, 감독의 이혼 소송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여전히 불확실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들려주는 개인사의 영화적 변주곡인 셈이다. 이 영화의 뻔뻔스러움은 많은 관객들에게 냉소를 짓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김민희의 연기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만든다. 관객들은 이 배우가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인 은곰상을 품에 안은 것을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 On the Beach at Night Alone  (By Walt Whitman)


On the beach at night alone,
As the old mother sways her to and fro singing her husky song,
As I watch the bright stars shining, I think a thought of the clef of the universes and of the future.

A vast similitude interlocks all,
All spheres, grown, ungrown, small, large, suns, moons, planets,
All distances of place however wide,
All distances of time, all inanimate forms,
All souls, all living bodies though they be ever so different, or in different worlds,
All gaseous, watery, vegetable, mineral processes, the fishes, the brutes,
All nations, colors, barbarisms, civilizations, languages,
All identities that have existed or may exist on this globe, or any globe,
All lives and deaths, all of the past, present, future,
This vast similitude spans them, and always has spann’d,
And shall forever span them and compactly hold and enclose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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