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로봇 청소기를 한 번만 써보시면, 절대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권해드립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경진은 홈쇼핑에서 파는 로봇 청소기를 보고 잠시 멈췄다. 쇼핑 호스트는 판매 마감 시간이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저거나 한번 사볼까? 로봇 청소기가 편하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화면 상단에 박혀있는 가격이 놀라웠다. 청소기를 100만 원 넘게 주고 산다는 것은 경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가전제품 하나로 삶이 달라지는 체험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10만 원 대의 진공청소기를 사려고 일주일째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경진에게 로봇 청소기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림 속의 떡에서는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나오고 있었다. 경진은 손을 뻗어보려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청소기의 먼지 통이 덜커덩거리면서 본체에 끼워지지 않은지가 한 달이 넘었다. 경진은 박스용 노란 테이프로 먼지 통을 본체에다 고정해서 쓰고 있었다. 먼지 통의 먼지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테이프를 떼고서 비웠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다 보니, 청소기의 모양새가 참으로 볼품없어졌다. 청소기를 사야지, 하면서 가격 비교 사이트를 들락거리기를 며칠, 마침내 청소기 모델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런 때에 홈쇼핑의 로봇 청소기 방송을 보게 된 것이 얄궂기까지 했다.
"내 팔자에 로봇 청소기는 무슨..."
한숨을 내쉬면서 경진은 청소기의 먼지 통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먼지 통의 먼지가 중간 이상 채워지면 흡입력이 떨어진다. 청소기 소리를 들어보니, 오늘은 먼지 통을 비워야 했다. 휴지통에 먼지 통을 조심스럽게 털어넣는데도, 아침나절의 햇살에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먼지 통의 밑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이 정도면 다 비워졌겠지. 경진은 먼지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먼지통의 구석에서 무언가 박혀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작은 조각이 보였다.
"이게 뭐지?"
그것은 길게 잘린 손톱이었다. 손톱의 모양새로 봐서는 여자의 손톱이었다. 그런데 손톱에는 시커먼 때가 끼어서 마치 하수구의 밑바닥을 박박 긁은 듯한 손톱처럼 불결하게 보였다. 더러운 것도 더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감정은 혐오와 약간의 공포였다. 이 손톱이 어떻게 이 먼지통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집안 식구라고 해봐야 남편과 대학생 아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들은 기숙사에서 살아서 한 달에 한 번, 그마저도 어쩌다 올 뿐이었다. 이 더러운 손톱은 신발에 묻어온 것일 수도 있고, 택배 상자나 뭐 그런 것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경진은 그 손톱을 바라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날 저녁을 준비할 때까지도 경진의 머릿속에서 손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순간접착제로 단단하게 붙여놓은 것 같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에도 손톱에 대해 생각했다. 그냥 밖에서 들어온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구. 정말이지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경진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다음날, 경진은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먼지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먼지라고 해봐야 작은 소독솜 같은 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솜 사이로 손톱이 삐죽, 날카롭게 나와 있었다. 때가 낀, 어제 본 손톱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경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늘은 일부러 현관을 청소기로 돌리지 않았다. 오직 방과 거실만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상하고 더러운 손톱이 그 안에 있었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 경진은 다급하게 먼지 통에 붙여놓은 테이프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은 멀쩡했다. 때가 낀, 길게 잘린 손톱 하나가 먼지 통에 분명히 있었다.
만약에 그 손톱이 매니큐어를 칠한 것이거나, 아니면 단정하게 잘린 여자의 손톱이라면 경진은 남편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커멓게 때가 낀 그 손톱은 남편의 소지품 어디에서 묻어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남편은 돈 문제라면 모를까, 여자 문제로 경진의 속을 썩인 적은 없었다. 남편은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면 만족해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마음이 늘 복잡한 사람이었으므로, 경진은 그런 남편의 단순함을 늘 미덕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이 손톱은 남편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확신했다.
뒤숭숭해진 경진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일도 이 손톱이 먼지 통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초자연적인 뭔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진의 상상력이 뒤엉키며 뻗어나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경진은 새벽녘에야 조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9시 40분이었다. 경진은 세수도 하지 않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무슨 힘이 나오는지 31평 아파트를 청소기로 돌리는 데에는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먼지 통을 들여다 보았을 때, 다시 그 손톱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손톱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나 나왔다. 그 모양도 틀에 찍어낸 듯 똑같았다.
경진은 숨이 멎을 듯 놀랐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귀신의 농간이거나 그런 것이다. 이 집에 악령이 스며들었다거나 하는. 상갓집에 갔다가 귀신이 붙어오는 일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경진이나 남편이 최근에 상갓집에 간 적은 없었다. 이 손톱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무지 풀 수 없는 의문이 경진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날 내내 머리가 아파서, 경진은 타이레놀을 먹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안 되겠다 싶어서 묵주를 꺼내어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한 시간도 넘게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성모님께서 자신과 가족, 이 집을 악령으로부터 지켜주시길 기도했다. 그렇게 그 하루가 지나갔다. 성모님은 반드시 그 이상한 손톱의 악귀로부터 당신의 자녀를 지켜주시리라, 경진은 그렇게 믿었다.
그다음 날, 경진이 먼지 통에서 발견한 것은 다섯 개의 그 검은 손톱이었다. 경진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어쨌든 뭔가를 해야만 했다. 스마트폰을 열어 구글 검색창에 '악령을 퇴치하는 법'이라고 써넣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무당과 퇴마사, 도사들의 말도 안 되는 비방(祕方)을 듣고 있노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들은 저걸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굿을 해야 한다느니, 명산에 가서 치성을 드리라느니, 달마도를 방마다 걸어 놓아야 한다느니, 그 정도는 그나마 상식처럼 보였다. 무슨 동물의 뼛가루를 구해서 집안에 뿌려야 한다는 사술(邪術)도 있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내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경진은 수십 개의 동영상을 보는 내내 그렇게 되뇌었다.
"냄새 나게 저게 뭐야? 당신의 새로운 인테리어야?"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현관을 들어오며 경진에게 말했다.
"그냥 모른 척 해줘. 다 우리집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똑같은 거 본 적 있다. 가끔 오래된 음식점에 들어가면 저런 거 있었어. 손님 많이 오라고 달아놓은 건가 했는데. 우리집에 사람들 오라고 그런 거야?"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현관문 위쪽에는 사람 팔뚝만 한 말린 통북어가 두터운 무명 실에 묶여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내일을 그 더러운 손톱을 볼 수 없을 거야. 딱, 딱, 딱... 경진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