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야, 춘자 어디 갔어?"

  저 인간은 아까부터 계속 춘자를 불러댄다. 마누라 이름이 춘자라는 걸, 이 호스피스 병실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구 엄마나 여보도 아니고, 마누라 이름을 저렇게 불러대냔 말이다. 나는 이제까지 집사람한테 '수진 엄마' 이렇게 불렀지, '숙희야'하고 불러본 것은 손에 꼽는다. 덜떨어진 인간 같으니. 그런데 대체 춘자는 어디 간 건가?

  "수진아, 춘자 씨는 어디를 갔길래 저 사람이 하루 종일 저러고 있냐?"
  "추석이라 차례 준비하러 갔대요. 저 아저씨 아들이 왔는데, 휴게실에서 코 골며 자고 있고."
  "아니, 그럼 저기 옆에서 좀 앉아 있기라도 하지, 저 춘자 타령을 언제까지 들어야 해?"
  "아빠, 조용히 말씀하세요."
  "어차피 듣지도 못할 거야. 지금 진통제 때문에 혼수 상태 같은데."

  창 쪽의 저 남자는 담도암이라 했던가? 이제 거의 죽을 때가 다 되니, 그래도 마누라 생각만 간절한 모양이다. 수진 엄마는 수진이와 교대하고 집에 갔지. 내가 눈 감을 때에는 수진 엄마가 꼭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서 얼마를 지내다 죽을까?

  "수진아, 죽는 게 무섭다. 정말이야, 죽는 게 무서워."
  "아빠, 기도문 읽어드릴게요. 수녀님이 알려준 거예요."
  "아냐, 그 기도문은 실컷 들었다. 아까 잠결에도 네가 읽는 소릴 들었어."
  "어쨌든 아빠가 영세를 받으셔서 다행이에요."
 
  나는 죽은 후의 세상을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봐도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천당이 진짜 있을까? 어디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기는 하겠지. 그리고 메리도 있을 것이다. 항상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조그만 강아지 메리. 그 메리가 쥐약을 먹고 뒤뜰의 멍석에서 죽어 나왔을 때, 너무나도 슬퍼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메리는 내가 가면 정신없이 달려 나와 나에게 안길 것이다. 내 말을 안 들어서 야단을 치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메리.

  "춘자야, 춘자 어디 갔어? 날 버린 거야. 그렇지?"

  마누라가 안 보인다고 울기까지 하는 저 바보는 정말이지 대책이 없다.

  "우리 아저씨가요, 젊은 시절에 얼마나 의처증이 심했는지 몰라요. 내가 너무 마음고생해서, 에휴."

  나는 춘자 여사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며칠 전에 들었다. 거친 쇳소리를 내며 숨을 쉬는 걸 보니, 저 사람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 춘자 여사가 좀 돌아와 주면 좋으련만.

  "아빠, 오늘은 좀 컨디션이 어때요?"
  "야, 이상하게 오늘은 아주 오래전 기억도 다 나고, 밥도 먹고 싶고 그렇다. 하나도 안 아파."
  "식사는 하실 수가 없어요. 뭔 수액이 들어가고 있어서, 의사가 절대 금식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종양내과 의사 말이냐? 빌어먹을 놈."

  내가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의사라는 그 작자의 돼먹지 못한 태도 때문이다. 나도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걸 대충은 알고 있다. 그러면 죽음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이라도 흔들어 반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든 살고 싶은데, 그 인간은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저, 선생님. 나 항암 치료 좀 받게 해주시오. 치료를 어떻게든 받으면 살 가망도 조금은 있지 않소?"
  "환자분, 잘 들으세요. 환자분은 췌장암 말기입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항암 치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구요. 통증을 덜어주는 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암 치료를 해달라느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저딴 게 의사랍시고 의사 노릇을 하고 있구나. 너도 죽을 때, 꼭 너 같은 의사 만나서 그런 소리 들어라. 내가 41kg 되는 몸으로 항암 치료받는 게 가능해서 그렇게 물어봤겠냐? 내가 제약회사에서 35년을 일했어. 너 같은 의사들, 무수히도 만났지. 의사라는 직업 가졌다고 얼마나 대가리 쳐들고 다니는지 아주 잘 알지. 그래, 아주 잘 알고말고. 뼛속 깊이 박힌 그 선민의식이며, 나 원 참 같잖아서.

  "아이구, 우리 석구 얼굴 좀 봐야지. 이게 뭐냐, 얼굴이."

  저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네. 일가친척들이 다 모였어.

  "환자분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어서, 좀 있다가 임종실로 이동할 겁니다. 가족분들,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어요."

  생콩 같은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나가버린다. 쟤가 어젠가, 엊그제 후배 간호사를 쥐잡듯이 야단을 치던데.

  "이 선생님. 내가 2층에서 ECG 결과 받아오라고 했죠. 그런데 이게 뭐에요. ECG가 뭔지 몰라요? 이런 것도 모르면서 여기서 일해요? 돌대가리 아닌가? 자, 말해봐요. ECG가 뭐예요? 뭐냐구요?"

  내가 말할 기운만 있으면, 저딴 거 대신에 다른 간호사 좀 보내라고 항의를 했을 텐데. 죽어가는 사람들 있는 호스피스 병실에서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저 애는 왜 간호사가 되었을까? 쟤가 내 수액 줄 갈아줄 때는 몸서리치게 아주 싫어진다.

  "아빠, 아빠도 저 간호사가 마음에 안 들죠?"
  "그래. 정말 그렇다."
  "아까, 아빠 수액에 들어가는 약이 뭔지 물어봤더니 아주 퉁명스럽게 말하더라구요."
  "천성이 독살스러운 것들은 어쩔 수가 없지. 엊그제인가, 신참이 심전도 대신에 뭘 잘못 뽑아왔다고 있는 대로 악을 쓰는 거야.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냐? 여기 수간호사라는 여자도 아침마다 간호사들한테 그렇게 소리를 질러. 어째 죄다 저런 것들만 모아놨는지."

  그런데 석구라는 이름의 저 환자는 후두암이라고 했던가? 어제부터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만, 인제 진짜 가려는 모양이다.

  "하잘것없는 풀도 풀씨는 남기는 법인데, 너는 어쩌자고 여자 잘못 만나서 네 씨앗 하나 남기질 못했냐? 박복한 것 같으니."
  "아유, 고모님, 그만 좀 하세요."

  저 사람은 이제 쉰을 조금 넘었다 들었는데, 저런 사연이 있었구먼. 그래서 그 부인이 죄지은 사람마냥 얼굴이 그랬구나. 내 자식들, 내 풀씨 세 개.

  "박 서방, 사람이 괜찮아. 네가 함께 살기는 괜찮을 거다."
  "그래요, 아빠. 나도 그래서 박 서방하고 결혼했지. 같이 있으면 편해서."
  "그런데, 너도 있다가 가봐야하는 거 아니냐. 추석 연휴도 다 끝나가는데, 내일 출근해야지."
  "저녁에 엄마하고 수민이 올 거예요. 그때 가려구요."
  "회사일이 힘들지? 어떻게든 버텨봐. 먹고 사는 일이 쉽지가 않단다."
  "힘들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나. 우리 아빠는 이 힘든 걸 어떻게 35년을 했을까, 하고."
  "샐러리맨이라는 게 그렇지."

  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내가 처음으로 맡았던 서울 남부 사무소가 전국 지부 통틀어 영업 매출 1위를 달성했을 때였을 거야. 그때, 정말로 발이 부르트도록 약국이며, 큰 병원 원무과 드나들며 제약 영업을 했었지. 내가 밥을 먹여야 할 식솔들이 다섯이나 되었으니까. 내 불쌍한 어무이, 수진 엄마, 수진이, 수민이, 수현이.

  "자, 이제 임종실로 옮기겠습니다. 직계 가족분들만 따라오세요."
  "석구야, 어찌 이리도 명이 짧으냐. 좀 더 살고 가지. 다 이게 지 서방 잡아먹은 저 모진 년 때문이다."
  "아이구, 고모님도 참. 너무 하시네."

  풀씨 하나를 남기지 못한 남자가 떠나간다. 떠나버린 남자의 침대를 간병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소독약으로 닦는다. 이곳은 죽음이 가득찬 곳이면서도, 죽음의 냄새를 필사적으로 지우려고 하는 이상한 곳이다.

  "춘자야, 춘자 언제 와? 응?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

  사람이 죽어가는데 뭔 명절 준비를 하러 갔을까? 저기도 희한한 집구석이네.

  "아빠, 저 아저씨는 춘자 아줌마를 죽도록 사랑하나 봐요."
  "그러네. 죽을 때가 되도록 저렇게나 사랑하는 모양이다."

  내가 죽으면 수진 엄마는 어떻게 살까? 그래도 자식이 셋이나 되니까, 그 애들이 잘 보살펴 주겠지. 다 착하니까. 날 닮고, 수진 엄마를 닮은 내 착한 아이들.

  "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자꾸만 눈이 감긴다. 수면제 같은 것도 수액에 넣은 모양이다. 얘기를 더 하고 싶은데.

  "저기, 집에서 밤을 좀 삶아왔어요. 이것 좀 드셔보시라고."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밤이라니, 눈이 떠진다. 밤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밤 한 톨만 다오."
  "안 돼요, 아빠. 의사가 수액 말고 음식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어이구, 이 자식아. 그거 한 톨만 주면 되는데. 너 나중에 후회할 거다."
  "아빠, 미안해요."

  깐 밤 같이 예쁜 내 아들. 어무이는 내가 어릴 때, 날 그렇게 불렀지. 그 어무이는 어디 계실까? 밤 한 톨이면 되는데, 밤 한 톨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 밤 한 톨을 결국 먹지 못하는구나. 저 아이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점점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산길 같은 곳을 나는 걷고 있다. 은회색 마고자와 한복 바지를 입고 걸어간다. 깊어지는 산 속. 뒤를 한번 돌아보고 싶은데, 주변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저걸 따라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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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지수야, 이거 막내 삼촌한테 좀 까달라고 해라."

  엄마는 작은 스텐 그릇에 담긴 알밤을 내밀면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엄마는 명절만 되면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도와야 합니다. 엄마의 말씀은 이 집안에서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밥을 먹으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살 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지난주에 엄마는 나에게 가스불 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전기밥솥에 밥도 해서 먹을 줄 알아요.

  "엄마는 늘 바빠. 그러니까 너는 혼자 있을 때, 밥도 지을 줄 알아야 해."

  아무튼 명절 때에는 나도 덩달아 바빠집니다. 나는 스텐 그릇에 조심스럽게 과도를 챙겨서 작은방에 있는 삼촌에게 가져다줍니다.

  "삼촌 이거, 엄마가 좀 깎아달래요."
  "그래. 삼촌이 밤을 잘 까지."

  막내 삼촌은 일산에서 삽니다. 그래서 나는 막내 삼촌을 일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다. 거실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삼촌은 거기에 있으면 불편한가 봐요. 삼촌은 작은방에서 스마트폰으로 해외 축구 경기를 보고 있네요.

  "삼촌, 삼촌도 명절이 싫지?"
  "아냐, 명절이 왜 싫어? 지수도 볼 수 있고 좋은데."
  "에이, 거짓말. 작은할아버지가 말 거는 게 싫잖아, 그치?"
  "그건 좀 그래."

  삼촌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삼촌의 흰 얼굴이 더 붉게 보이거든요. 그 말을 하는 삼촌의 얼굴은 하얗네요.

  "우리 승호가 올봄에 병원을 옮기면서 연봉이 좀 올랐어. 나도 놀랐다니까. 1억이 좀 넘어."
 
  열린 방문으로 셋째 작은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그 할아버지는 분당에 살아서 분당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어요. 그 분당 할아버지는 아들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데 1억이라는 돈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요? 나는 지난 설에 세뱃돈을 35만 원 받았거든요. 35만 원을 몇 번 받으면 1억이 되는 걸까요?

  "삼촌, 1억은 얼마나 큰 돈이야?"
  "글쎄, 아무튼 많은 돈이지. 지수는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괜찮아."
  "돈이 많으면 좋기는 좋겠지?"
  "꼭 그렇지는 않아."

  삼촌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어요.

  "세금을 떼고 그렇게 받았으면 많이 받는 거긴 하네."

  둘째 작은할아버지가 분당 할아버지의 말을 받습니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는 평촌에 살아서 평촌 할아버지입니다. 평촌 할아버지는 딸만 셋이었는데, 막내 삼촌이 아들로 짜잔, 하고 나타난 것이지요. 그래서 막내 삼촌은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대요. 막내 삼촌은 누나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가,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얼굴도 참 귀엽게 생겼어요. 그런데 나이가 서른일곱인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평촌 할아버지 걱정이 커요.

  "일산 도련님의 문제는 그러니까, 키야, 키."
  "5센티미터 차이가 그렇게도 엄청나구나."

  나는 엄마와 아빠가 일산 삼촌을 두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5센티미터는 아빠와 삼촌의 키 차이를 말하는 것이었어요. 아빠도 키가 큰 편은 아니거든요. 162센티미터인데, 삼촌은 157이에요. 엄마는 아빠가 1센티만 작았어도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아, 저기 김연경이가 나오네. 김연경이 키가 얼마지?"
 
  분당 할아버지가 거실 벽에 걸린 TV를 보면서 말합니다. 배구 경기가 나오나 봐요. 후, 나는 밤을 깎는 삼촌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삼촌은 키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무척 싫어하거든요.

  "의사가 돈을 많이 버니까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공무원만 한 직업도 어디 없어. 나라의 녹(祿)을 먹는다는 것이 어딘데 말야."

  평촌 할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시네요. 막내 삼촌의 직업이 공무원이거든요. 삼촌은 시청에서 일하는 7급 공무원입니다.

  "삼촌, 녹을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철 같은 데에 스는 녹 같은 거 말고, 뭐가 또 있어?"
  "응, 그건 나라에서 주는 월급 같은 거야."
  "아, 그렇구나. 오늘 하나 배웠다. 어디 가서 멋지게 써먹어야지."
  "지수는 뭘 배우는 걸 좋아하는구나."

  삼촌은 동그란 밤을 껍질 조각 하나도 없이 예쁘게 깎아놓으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밤을 깎는 삼촌의 손가락이 참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작년 추석에는 삼촌이 일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밤을 깎았는데, 너무나도 못생기게 밤을 깎아놓았어요. 내가 봐도 엄마는 그런 솜씨는 없는 거 같아요.

  "네 엄마가 살림에는 뜻이 없지."

  아빠는 가끔 일 때문에 집에 늦게 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밥상을 차리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뭔가를 기억할 때부터 엄마는 항상 일했어요.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은 모르겠어요. '시민운동'이라는데, 엄마말대로라면 좋은 일이라고 했어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그런 거라고. 엄마는 그런 엄마를 내가 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엄마가 바깥세상이 아니라, 나하고 좀 더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지수야, 여기 와서 약과 봉지 좀 가위로 잘라줘라."

  나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가 귀찮았지만 얼른 부엌으로 갔어요. 엄마도 이런 날은 힘들 테니까요.

  "어머니를 하루만이라도 요양원에서 모셔 올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 고모할머니의 뿌루퉁한 목소리가 들리네요. 고모할머니도 늙었지만서도, 할머니의 엄마가 보고 싶기는 할 것도 같아요.

  "저번에 넘어져서 어머니가 다리를 다치셨잖아. 그 뼈가 아직도 안 붙고 있다는데 뭔 수로 모셔 오냐?"

  분당 할아버지가 작은 고모할머니에게 시큰둥하게 말하네요.

  "아니, 모셔 오기가 싫은 거겠지."
  "야, 너는 그런 억지소리 좀 하지 마라. 그렇게 어머니 생각하면 네가 한 번이라도 더 가보던가. 새삼스레 무슨 효녀노릇이냐?"
  "오빠는 무슨 말이 그래? 효녀 노릇? 그러는 오라버니는 효자 노릇 좀 해보기라도 했수? 그저 맨날 아들 자랑만 늘어지게 할 줄 알아. 나 원 참."
  "자식 잘난 것도 죄냐? 너도 의사 아들딸 만들지 그랬냐? 자격지심도 유분수지." 

  나는 약과를 뜯어서 엄마에게 주고는, 엄마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어요.

  "엄마, 나 작은방 삼촌한테 가 있을래."
 
  엄마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보라며 손짓했어요. 작은방으로 오고 나니 두근두근 불안했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어요. 삼촌은 밤을 좀 깎다 말고, 계속 스마트폰으로 축구 경기만 보고 있었나 봐요. 까야 할 밤이 그릇에 많았거든요. 삼촌도 밤 까기가 좀 귀찮았는지도 모르죠.

  "아이구, 저 볼을 저렇게 놓치네."

  삼촌은 무릎을 탁, 치면서 안타까워했어요. 그때 삼촌의 머리가 잠깐 흔들렸는데, 흰 머리카락이 몇 개 보였어요.
 
  "삼촌, 흰 머리카락 있어."
  "응, 나도 알아."
  "삼촌, 흰머리 안 나게 하는 방법은 없어?"
  "그런 건 없어.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런데 삼촌, 작은 고모할머니하고 분당 할아버지 좀 싸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삼촌에게 그렇게 가만가만 말했어요.

  "응. 어른들은 원래 이런 날 좀 싸우고 그러는 거야."

  삼촌은 다시 밤을 깎기 시작했어요. 삼촌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예쁘게 밤을 깎아서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놓았어요. 못생긴 밤이 있다면서, 삼촌은 다 깎은 밤 하나를 나에게 주었어요. 내가 밤을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어요. 큰고모 할머니인가 봐요. 삼촌은 밤을 깎다 말고 현관으로 나갔어요.

  "오셨어요?"
  "아이구야, 우리 막둥이. 키는 좀 컸냐?"

  큰고모 할머니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요. 큰고모 할머니의 목소리는 쇳소리 같아서 전부터 싫었어요. 삼촌은 어딘지 모르게 좀 슬퍼 보였어요. 다시 작은방으로 온 삼촌은 남은 밤을 깎기 시작했어요.

  "삼촌, 내가 이거 하나 갖고 왔어. 삼촌 줄게."

  나는 아까 약과 봉지를 뜯으면서 엄마 몰래 하나를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삼촌은 내가 건넨 약과를 보더니 조그맣게 웃었어요.

  "우리, 이거 반씩 나눠먹자."
 
  삼촌은 약과를 반으로 쪼개어서 나에게 건네주었어요.

  "나도 지수처럼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약과를 먹으면서, 나는 삼촌의 딸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았어요. 삼촌에게 딸이 있으려면, 우선은 아가씨를 만나야지요. 그러려면 삼촌의 키가 조금 더 커야 할 것 같았어요. 내년에는 삼촌의 키가 5센티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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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5년의 시인(詩人)


  "오늘은 2055년 9월 14일. 오전 7시, 선생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경진은 아침마다 듣는 로미의 알림에 눈을 떴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늘 선생님의 일정은 9시 서울 글쓰기 센터 출근, 2시 퇴근, 5시 산책.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별거 없네. 거의 매일 같은 하루."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경진은 칫솔에 치약을 짜다 말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시를 좀 써볼까 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재밌을 거 같아. 지금의 생활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그렇지. 시를 대학 시절에 좀 써봤거든. 나중에는 시시해져서 그만뒀지만 말야. 지금 다시 써보면 좀 다를 수도 있잖아."
 
  로미는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인공지능 로봇이 저런 소리를 낼 때는 뭔가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시를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면 선생님의 경력에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글쓰기 센터에서 맨날 시시껍절한 남의 글이나 봐주면서 경력을 쌓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으면 시청이나 국가 홍보부에 채용될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봤자, 여전히 다른 사람들 일이나 해주는 거겠지. 난 이제 내 글을 쓰고 싶다고."
  "이 문제는 오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각을 하면 안 되니까요."
 
  경진은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시를 쓰기 위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외부 강좌를 들어야 할지는 로미가 다 알려줄 것이다. 로미는 신뢰할 수 있는 로봇이었다. 이전의 로봇 버전이 버그로 인해 국가 전체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 사태로 인해 로봇 부서의 장관이 사퇴까지 했다. 그 이후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로미는 지난 8개월 동안 경진에게 둘도 없는 비서이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어요."

  경진은 에세이 첨삭을 원하는 방문객에게 터치스크린으로 자신의 첨삭문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미가 있는 글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고, 인간의 고유한 목소리를 글에 입히는 것. 그것이 글쓰기 센터가 국가 지원을 받는 공익 부서로서 대중들에게 봉사하는 이유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흠, 그냥 모든 게 다요."

  50대 중반의 여성 방문객은 자신이 쓴 수필을 가지고 첨삭을 요청해 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을 비웃고 험담하는 글이었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경진에게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글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경진의 첨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부어터진 얼굴로 경진의 앞에 앉아있다.

  "그럼, 다른 직원을 연결해 드리죠."
  "그렇게 해주세요. 좀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이봐, 당신 글솜씨는 누구의 실력을 따질만한 그런 것도 못 된다고. 이 센터에서 일한 지 5년째에 접어드는 경진에게 타인의 글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지도와도 같았다. 이 늙은 여자는 분명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한문이라는 것은 써본 적도 없을 것이다. 경진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엄격한 국어 교육을 받아왔다. 경진의 부친은 글쓰기에 나름의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는 서울 문인 협회의 지부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시대의 문인들이란 인공지능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희귀종과 같은 신세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국어가 지닌 근원적인 의미를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출세와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지만,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그 무게와 명예를 경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이나 읽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어. 내 글을 써야지, 내 글을.'

  경진은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넌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그저 국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한계를 경진은 쓰라리게 잘 알았다. 12평의 국가 임대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 애증과 연민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직업을 경진은 이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퇴근하셨군요. 오늘 센터의 일은 어땠나요?"
  "뭐 늘 그렇지. 한심한 글들 읽으면서 열심히 고쳐주었지."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선생님의 직업도 각광받는 것이겠죠."
  "그런가?"

  경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로미의 말에 대꾸했다. 로미는 경진의 표정을 인식하고는 얼른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시를 다시 쓰시는 문제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아, 그래? 내가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 시 쓰기의 기초부터 배워야겠지?"
 
  드르륵드르륵, 로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선생님이 쓰신 시를 보고 가능성을 판단하겠습니다."
  "그것도 방법이네. 내가 좀 생각해 둔 게 있어. 그걸 써보려고."
  "그럼, 써서 보여주세요."
  "알았어. 오늘 산책은 취소."
  "산책을 취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깥바람을 쐬고 땅에 발을 디디면 글을 쓰는 감각이 살아나죠."
  "그래, 그 말이 맞아."

  경진은 로미의 제안대로 산책을 다녀왔다. 원래 일과라면 5시에 나가야 할 것을 오늘은 산책을 일찍 다녀왔다. 오후 시간에 시를 쓸 생각이었다. 산책을 다녀오고 나니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책(散策)


저 나무는 왜 매실이 열리지 않는가
잠깐 생각하다가
저 나무는 벚나무였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열리지
매실은 매화나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

쓸데없이 큰 정원을 가진 정원사
가지치기는 엉성하고
꽃들은 모두 제멋대로
그래도 샛노란 나리꽃은 눈물이 났다

무언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법칙에는 배신의 상수(常數)가 
그래도 누군가는 오늘
너의 산책을 읽었다
 

  경진은 산책하면서 느낀 것들을 전자 노트에 천천히 입력해 나갔다. 경진이 거기에 쓰는 모든 글은 로미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로미는 경진이 시를 써내려갈 때마다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었다.

  "선생님이 쓰신 시, 잘 읽어보았습니다. 흥미롭군요."
  "흥미롭다는 말이 좀 웃기네. 재미없다는 뜻이지?"
  "아, 그렇게 들렸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드는데? 솔직히 말해봐."

  경진은 로미에게 의견을 물어볼 때 '솔직하게'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이 친절한 로봇은 거의 모든 경우에 싫다고 말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로봇을 이용하는 사람은 로봇의 말 사이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파악하는 능력에 따라 로봇은 멍청한 하인도, 명민한 비서도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시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합니다."
  "유기성?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야. 좋은 지적인데."
  "이 정도라면 출발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만 뭐?"
  "제 생각은 선생님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지?"
  "시간 낭비니까요."

  경진은 로미의 기계음 목소리가 아주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들렸다. 기껏해야 금속 덩어리일 뿐인 로봇이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인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아닙니다. 분명한 낭비입니다. 선생님이 시를 써낸다고 해도 이제 그걸 읽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시집은 2040년 이후로 모두 절판되어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어를 로봇에게 입력해서 그것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시를 원하는 대로 출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쓰시는 시가 의미가 있을까요?"

  "온전히 나의 힘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은 가치가 있어. 남이 읽어주고 안 읽어주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냐."
  "저는 유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를 써낸다 해도 단돈 1원도 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쓰시겠습니까?"
  "그냥 써보는 것뿐이라고. 언젠가 내 시를 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건 선생님의 희망사항이겠죠."

  경진에게 로미의 말은 점점 더 이죽거리는 듯이 들렸다.

  "기분 나쁘군. 시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

  경진은 전자 노트에 더이상 시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써내는 글을 로미가 읽는 것이 불현듯 끔찍하게 싫어졌다. 종이에다 시를 써야겠군. 경진은 책상 서랍에 종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실 종이에 뭔가를 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책상 서랍의 맨 아래 칸에 한 뭉텅이의 종이가 있었다. 종이 뭉치 옆에는 볼펜이 3개 있었다. 경진은 볼펜이 잘 나오는지 종이에다 끄적거려 보았다. 하도 오래전에 사놓은 것이라 그런지 볼펜의 잉크는 다 말라서 나오질 않았다. 쓸 수 있는 필기도구가 없었다.

  볼펜이든 뭐든 쓸 수 있는 것을 사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이와 펜을 쓰지 않게 된 이후로 그것을 판매하는 곳도 대부분 사라졌다. 경진은 책상에 깔린 유리 패널에다 '필기도구 판매점'이라고 입력했다.

  '마지막 연필 판매점, 9월 16일에 문 닫을 예정'

  판매점을 알려주는 지도는 뜨지 않았고, 그 대신 뉴스 기사 하나가 떴다.

  '87년을 이어온 이 유서 깊은 연필 공장의 부속 판매점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다. 사람들이 연필을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연필 공장을 운영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사장 김만수(75세)는 자신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아 이어온 이 공장과 판매점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연필을 구매하려는 이들은 서두르기 바란다. 마지막 연필은 9월 16일까지만 살 수 있다.'

  오늘이 9월 14일이니까, 아직 이틀은 남았군. 마지막 날은 모르니까, 내일이라도 그 공장에 가봐야 했다. 경진은 연필 공장이 자리한 곳의 지도를 전자 수첩에 저장해두었다. 그러고 나서 큼지막한 배낭을 하나 챙겼다. 그 공장의 연필은 경진이 사게 될 마지막 연필이 될 터였다. 언제 쓰게 될지 모르므로 물량이 있다면 넉넉하게 사올 생각이었다. 경진은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 이곳에 가려고 하는데요."
 
  다음날 오후, 유인 택시에 탄 경진이 전자수첩에 저장된 지도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경진은 자율주행하는 무인 택시를 탔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 사고를 겪은 이후로는 유인 택시만을 타고 다녔다.

  "아, 여긴 어제도 손님을 한 분 데려다줬는데. 거기 주변이 좀 으스스해요. 공장이 다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뭔 연필을 산다고 하더라구요. 손님도 연필을 사러 가세요?"

  머리가 휑한 중년의 택시 기사가 넉살맞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런데 시간이 얼마쯤 걸릴까요?"
  "아마 40분 정도? 차들이 밀릴 시간은 아니니까요. 자, 그러면 가볼까요?"

  경진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본 시 외곽의 풍경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늘 도시 중심부에서 머무르며 지냈던 터라, 시 경계의 풍경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곳은 끝없이 이어진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소의 터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도시는 인공지능 로봇과 그것이 처리하는 데이터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했다. 만약에 저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전력이 없다면, 이 도시는 마비 상태에 빠질 것이다.

  "삭막하지요, 풍경이?"
  "그러네요. 기사님은 이 길을 자주 다니십니까?"
  "아주 가끔요. 그런데 지나다닐 때마다 좀 몸서리가 쳐지곤 해요. 새들 죽은 시체 위로 지나다니니 원. 그 뭡니까, 새대가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걔들은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눈도 안 좋은지, 풍력 터빈 날개에 맨날 부딪혀 죽고 그래서. 그런데 그렇게 많이 죽어서 그런가, 요새는 새 구경하기도 어려워요."

  경진이 택시 기사와 그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택시는 연필 공장에 다다랐다. 기사의 말대로, 공장 주변은 폐가처럼 으스스했다. 녹슨 지붕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경진은 무인도에 난파당한 선원처럼 조심스럽게 공장 출입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누가 왔소?"
  "아, 저는 연필을 사러..."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기계를 만지다 말고 경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작업복에 묻은 톱밥과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는 경진을 맞이했다.

  "젊은 손님은 연필 얼마나 사시게?"
  "글쎄요. 이 배낭을 채울 만큼은 사고 싶습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쓰고는 배낭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100다스는 들어가겠는데. 한번 채워봅시다."
 
  노인은 공장 한구석에 쌓여있는 연필 상자를 들고 와서, 경진의 배낭을 채우기 시작했다. 경진의 배낭은 한없이 늘어지는 그물처럼 연필을 채워갔다.

  "170다스. 배낭이 요술 배낭이구려."

  경진은 2,040개의 연필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바늘처럼 꽂혔다.

  "뉴스 기사에는 내일 문을 닫는다고 적혀 있어서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사실은 오늘이 그날이라오. 이 연필 박스가 끝이니까. 사람들에게 이제 연필은 필요하지 않지. 연필을 잡는 법도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법도 잊고, 그렇게 바보가 되어가는 거요. 그 바보들이 대체 어디까지 더 바보가 될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소?"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배낭의 지퍼를 채웠다. 경진의 배낭은 10kg쯤 되는 쌀 포대를 담은 것처럼 무거웠다. 노인은 공장을 떠나는 경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어스름 저녁 풍경 속의 노인은 공장처럼 곧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경진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9시가 좀 넘어서였다. 집에 오자마자 경진은 연필을 깎아서 종이에다 써보았다. 사각사각, 글이 써지는 느낌이 낯설지만 기분이 좋았다.

  "연필이군요. 저는 연필이라는 단어를 알기만 했지, 실물은 처음 봅니다."

  로미가 경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이게 연필이라는 거야."
  "이것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글쎄. 마지막 연필이라고 하니, 나중에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 수도 있겠지."

  경진은 로미에게 그 연필로 자신이 시를 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미에게 약간의 거리감과 같은 불신이 생겼다. 자신이 쓰는 시를 로미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기계는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경진이 그 먼 데까지 가서 연필까지 사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녁을 준비할까요?"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 그냥 쉬도록 해."
  "그럼,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경진의 말이 끝나자, 로미는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 전원을 꺼버리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최저 생계비를 보장받는 필수 조건은 로봇의 전원을 24시간 켜놓는 것이었다. 국가는 모든 개인에게 지급된 로봇을 통해 그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경진은 종이와 연필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이야말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었다. 분자 감지기가 있어서 마약이나 폭탄 제조와 관련된 화학물질을 감지하게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에도 경진이 사는 아파트에서 누군가 화장실에서 마약 제조를 하다가 로봇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때 들었던 소름 끼치는 경고음이 아직도 경진의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서 경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2,040자루의 연필이 있다. 그것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글을 써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경진은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아주 작은 크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장실 위쪽 천장에 있는 사각의 나무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경진은 접힌 종이 조각을 천장의 안쪽으로 살짝 밀어넣고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앞으로 화장실이 경진의 진짜 서재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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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맨 마트(Two men mart)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손님도 별로 오지 않는다. 정현의 얼굴은 진회색 구름의 하늘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굵어졌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서 몹시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덜컹, 가게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정현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마 간판이 흔들리는 소리일 것이다. 7년 된 낡고 빛바랜 간판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혹시라도 간판에 문제가 없는지 보기 위해 정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 맨 마트'

  원래는 남색 바탕이었던 간판의 색은 이제 하늘색으로 변했다. 흰색의 글씨는 어쩐지 매가리 없이 늘어진 갈치처럼 보였다. 마트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었다. 정현의 아버지는 나중에 크게 번창할 가게를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투 맨 마트는 그렇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마음이 담긴 가게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가게는 정현 혼자서 꾸려가는 원 맨 마트가 되고 말았다. 약으로 그럭저럭 조절되었던 아버지의 파킨슨병이 심해진 것이 3년 전이었다. 그해, 정현의 어머니가 심부전으로 세상을 떴다. 정현에게 그해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아버지를 정현은 보살필 수 없었다. 회사의 정리해고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아버지의 마트를 떠맡았다. 그리고 정현은 아버지를 어쩔 수 없이 요양원으로 보냈다.

  "저걸 손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정현은 간판의 오른쪽이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을 발견했다. 정현에게는 이 마트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귀찮게 느껴졌다. 자신의 시간과 몸을 갈아 넣어서 굴러가는 가게는 그저 그날그날의 밥걱정을 겨우 면하게 해주는 삶의 방편이었다. 아버지가 마트를 열면서 진 빚의 원금과 이자가 매달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다. 작년까지는 캐셔 아줌마 한 명을 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인건비조차 부담스러워졌다. 결국 정현은 마트의 모든 것을 혼자 해나가기로 했다. 물건의 입출고와 캐셔일, 그리고 배달까지 다 해내느라 정현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기울어진 간판을 보고 들어온 정현의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그나마 매출이라도 나오니까 아버지 요양원비며 이런저런 나가는 돈을 메꾸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매출까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건 생각하기조차 싫은 시나리오였다. 정현은 기울어진 간판이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해 버리는 자신에 대한 불길한 전조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든 간판부터 고쳐야지. 정현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서 오세요."
  "이것 좀 환불해줘요. 진미채 색깔이 푸르딩딩하잖아."
 
  60대 중반의 파마머리 여자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정현에게 따져묻듯 말했다. 정현은 이 여자 손님에게 수박 여편네라는 별명을 붙였다. 여자는 지난 여름, 수박을 사가지고 가서는 수박이 맛없다며 정현에게 환불을 요구했다. 여자가 가져온 수박은 4분의 1쪽도 되지 않은 크기였다. 정현은 아무 말 없이 환불해 주었다. 그런 진상들과 입 아프게 말해봤자 성질만 더 뻗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저 여편네는 진미채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수증 좀 줘 보시죠."

  정현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지갑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의 날짜는 8월 7일로 찍혀있었다. 오늘은 9월 30일, 그러니까 이 수박 여편네는 거의 2달이 된 진미채를 가지고 와서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님,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건어물은 모두 냉장실에 진열되어 있고, 항상 그렇게 보관합니다. 8월 7일에 구매한 진미채에 곰팡이가 생겼다면, 그건 손님이 보관을 잘못한 거겠죠."
  "그래서, 지금 환불을 못 해주겠다는 거야?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물건을 팔아놓고 염치도 없네. 당신 애비 생각해서 내가 물건 팔아주는 건데, 이 따위로 나와?"

  정현에게는 아주 좋은 덕성이 있었는데, 그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까지 들먹이는 저 여편네에게는 쌍욕을 해주어도 시원찮았지만, 정현은 웃으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환불 못 해 드립니다. 손님, 여름에 다 처먹은 수박 쪼가리 들고 와서 4만 원짜리 수박 환불받으셨죠? 그럼 그걸로 끝내야죠. 앞으로 손님은 투 맨 마트 출입 금지입니다. 블랙리스트에 등록되었다구요. 블랙리스트, 알아요? 하긴 무식해서 블랙리스트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뭐야? 야, 너 이런 쥐꼬리만 한 가게 해서 어떻게 밥은 처먹고 사니? 하여간 복 쪼가리 없는 건 병신 애비나 새끼나 똑같네."

  정현은 뱀눈을 뜨고 악담을 퍼붓는 여자의 얼굴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지금 CCTV도 다 녹화되고 있고요. 이렇게 나한테 욕설하는 거, 다 촬영해서 모욕죄로 경찰에 고소할 겁니다. 이왕 시작한 거, 계속 더 해보시죠."

  정현의 그 말에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길길이 날뛰었다. 정현은 카운터 아래에 둔 소금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서는 소금을 되는대로 움켜쥐고는, 여편네의 발밑에다가 후려치듯 여러 번 흩뿌렸다. 그제야 여자가 움찔거리더니 가게를 나갔다. 

  '부자 동네에서 장사를 하면 저런 막돼먹은 손님은 없겠지.'

  '투 맨 마트'가 있는 이 동네는 재건축도 어려운 낡은 시영 아파트와 30년이 넘은 빌라가 공존하는 주거지역이었다. 명백히 '빈민가'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곳에 거주하는 대부분 주민의 행색에는 가난의 냄새가 꾸역꾸역 풍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정현 또한 그 가난에 물드는 중이었다. 발목 정도일까, 어쩌면 허리까지 그 가난의 물이 자신에게 들이찼는지도 모른다. 정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거리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뭐하냐? 손님은 좀 있어? 비도 오는데, 있다 저녁에 술이나 한잔 어때?"

  진상 여편네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아 있던 차에 경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배달할 거 좀 있어. 들어온 물건 정리도 해야 하고. 다음에 보자."
  "아따, 너 얼굴 잊어버리겠다. 다음, 다음 그러다 망년회 때 보겠네. 알았다, 그럼."

  사실 배달할 주문은 딱 1건밖에 없었다. 오늘은 입고되는 물건들도 없었다. 정현도 친구들과 만나서 술 마시며 힘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서 쓰는 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아껴서 빨리 대출금을 갚아버리고 싶었다. 빚이 없어져야만,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뭔가 번듯한 사업 같은 것도 할 수 있다. 술 마시는 데 쓰는 돈도 아까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술 마시다 자신이 무슨 사고라도 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마트를 혼자 하게 되면서, 오늘처럼 진상 여편네와 같은 손님이며 정현의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울분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밖에서 술을 마시다 취해서 불필요한 말다툼이나 싸움에 휘말리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어디서 뭔가를 부셔버리지는 않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정현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편을 택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 전에 소주를 종이컵으로 꽉 채워서 한 잔 마셔야만 잠이 들었다.

  정현은 8시에 마트의 문을 닫았다. 평상시에 9시 반까지 영업하던 것에 비하면 좀 이른 시각이었다. 오늘은 그냥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나마 배달해야 할 집이 한 군데라 다행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진 곳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배달 왔습니다."

  정현은 개나리 빌라 203호의 벨을 눌렀다. 그 집의 현관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음식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언제 맡아보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청국장 냄새였다. 청국장은 정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정현에게 청국장찌개를 자주 해주시곤 했다. 정현은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확 열리더니, 그 집의 고등학생 아들이 정현의 팔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형아다. 형아, 밥 먹고 가. 밥."
  "아니, 왜, 무슨..."

  정현은 당황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학생은 지적 장애가 있었다. 정현은 자신의 마트에 종종 들르는 그 모자(母子)를 알고 있었다. 남학생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또래보다 체구가 커서,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스무 살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학생이 정현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수고하시는구려. 마침 밥 먹으려던 참인데, 식사나 함께합시다."

  비좁은 안쪽 거실에서 퉁퉁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정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배달할 물건이 있어서요."
  "사양하지 마시고. 그냥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놓으면 되는 거니까. 여보, 밥은 넉넉히 있지?"
  "네. 식사하고 가세요."

  남학생은 정현을 보고 한없이 웃어 보이며, 정현을 현관 옆의 4인용 식탁에 끌어다 앉혔다. 정현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학생의 힘에 떠밀려 그렇게 식탁에 앉고 말았다. 정현이 식탁에 앉자, 학생이 물티슈를 건넸다.

  "형, 손 닦아. 깨끗이. 그래야 밥 먹을 수 있어."

  정현은 그런 학생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굳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식탁에는 청국장찌개와 겉절이,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 구이, 참외장아찌 무침이 놓여 있었다. 정말이지 얼마만에 보는 집밥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3년 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정현은 이런 밥을 차려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마트에서 돌아와 집에 가면 대개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을 데워서 끼니를 때웠다.

  "형아, 이거 맛있어.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학생은 비엔나 소세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정현의 밥 위에다 놓았다. 부부는 그런 아들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식탁에서 정현의 마음에 무언가가 몽글몽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정현이 밥 한 그릇을 비우자, 학생의 어머니가 밥을 더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정현은 손사래를 쳤다.

  "가봐야죠.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보니까, 겉절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좀 싸드릴게요."

  정현은 괜찮다면서 사양했지만, 어느새 정현의 손에는 겉절이를 담은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비가 그친 가을의 밤거리에는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정현의 마음은 그 집 식탁의 온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온기는 정현의 쩍쩍 갈라진 논바닥과 같은 마음에 논물이 되어 찰랑거렸다. 정현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도 자주 찾아봬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투 맨 마트에 언젠가 자신의 곁에 있을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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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방문객


  "거기, 문 좀 열어봐요. 문 좀 열라니까."

  쾅,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영의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이 한밤중에 누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신었다.

  "누구세요? 누구냐구요?"

  무영은 고장난 인터폰을 고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나름 공포스러웠다.

  "나, 소림이. 이, 소, 림."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무영의 귀에 쿡쿡 쑤시며 박혔다. 이소림? 이소림이 누구지?

  "이봐요. 난 댁이 누군지 모르는데..."
  "웃기는 인간이네. 자기가 만들어낸 주인공도 몰라."

  주인공이라고? 아, 이소림! 이소림은 무영이 웹소설 사이트에 연재중인 무협 소설 '청운의 꿈'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왜 나를 찾아왔지? 아니, 그보다 저런 소설 속 인물이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나? 무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이소림이라고 말하는 그 여자는 더욱더 문을 쾅쾅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쨌든 이웃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영은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이 집 찾으려고 이 밤중에 고생 좀 했지. 생각보다 동네가 후지네. 그렇게 돈 좀 벌었으면 좋은 데 집이나 사지."

  성큼성큼 거실에 들어온 소림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무영의 집을 휙 둘러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영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는데, 소림은 그보다 키가 좀 더 컸다. 머리는 양 갈래로 어깨까지 땋았고, 하늘색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무영은 자신이 소설에서 이소림을 저렇게 묘사했었나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무영의 약점은 언제나 디테일이었다. 성격이 급한 무영에게 캐릭터의 묘사를 자세하게 하는 일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아주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대개는 최고의 미인, 엄청난 무공, 이런 식으로 대충 뭉뚱그려 써내면서 장면의 전환을 꾀하곤 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엊그제 135화에서 당신이 나를 탄검과 혼인시키려고 복선을 깔아놨잖아. 난 그게 싫다고. 도대체 내가 왜 탄검과 맺어져야 하냔 말이지. 난 탄검이 싫어. 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무식하게 칼만 잘 휘두를 뿐이지."
  "탄검이가 뭐 어떻다고. 강호에서 탄검이만큼 무공이 뛰어난 애가 어디 있다고."

  소림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무영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무영은 몸은 움찔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게 당신의 문제야. 탄검이하고 나하고는 과거에 뭐 인연이고 말고 할 게 없잖아. 아, 소설이란 말이지.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개연성. 영어로 알려줄까? probability! 탄검이하고 내가 맺어질 이유가 당최 아무것도 없다고."

  무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글에서 개연성 같은 것을 고민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매일 써내야 하는 웹소설의 분량은 정해져 있었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생각을 오래하면 할수록 스토리만 더 엉킬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되는대로 써나가는 것이 무영의 작업 방식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싶으면 또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급조해서 메꾸어 나갔다.

  "소림 양, 아니, 소림아. 내 말 좀 들어봐. 넌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이야. 그러니까 내가 써내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작가의 뜻에 토를 달면 안된다고."
  "내 말은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거야. 이 머리하고 옷도 다 내가 궁리해서 꾸민 거라고. 그리고 난 주근깨가 있는데, 백옥같은 흰 얼굴 같은 표현을 내가 등장할 때마다 쓰고 있어. 그런 얼굴을 한 무림의 고수가 있을 리가 없어. 땡볕에 수련하느라 얼굴이 다 타고, 손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어. 자, 내 손을 봐봐."

  소림은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쫙 펴서 마구 흔들어 보였다. 무영은 여자의 손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여자는 '청운의 꿈'의 소림이 아닌 것 같았다.

  "어저께도 야식을 먹고 잤군. 이 먹다 남은 치킨 쪼가리 좀 봐."

  소림은 삐딱한 웃음을 흘리며 치킨 조각을 하나 집었다. 그러더니 입에 넣고는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자신이 만들어낸 청순가련한 소녀 무사가 닭 뼈까지 씹어먹고 있었다.
 
  "작가 양반, 올해 상반기 결산 수익이 얼마지? 세금 떼고 1억 좀 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무영은 소림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사람은 말이야, 입이 좀 무거워야 해. 남자는 더욱 그래야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자랑 좀 한답시고 결산 수익 인증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무영은 자신이 가끔 들르는 소설 창작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며칠 전 객기로 올린 글을 떠올렸다. 소림도 그걸 읽은 모양이었다.

  "정말 1억을 버니까 행복해? 행복한 거야? 뭐, 진짜 행복하다고 써놓기는 했더구만."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돌아다니고 싶은 데 돌아다니고. 돈이란 게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건데."
  "아니,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아."

  소림은 닭 목뼈를 천천히 뱉어내며 말했다.

  "지금 '청운의 꿈'이 137화잖아. 그거 쓰는 동안에 당신은 딱 하루 쉬었어. 분명히 기억나. 그날은 나도 대련(對鍊)을 쉬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어. 오죽 뺑뺑이를 돌렸어야지. 오늘은 화산, 내일은 북천, 그다음은 남만, 정신없이 인물들을 내모니까 다들 지쳐있었거든."

  소림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영은 단 하루만 쉬었다. 심한 몸살 감기가 나서 타이레놀을 먹고 그저 드러누워 잠만 잘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무영에게 연재를 하루 쉰다는 것은 극한의 공포였다. 자신의 글을 클릭하는 모든 독자는 돈이나 다름없었다. 무영은 그 아픈 날에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분기별 정산금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상상을 했다. 글이 단 하루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독자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초심을 잃었다느니, 배가 불러터져서 저 모양이라느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영의 집을 찾아가 폭파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미친 인간도 있었다.

  "나도 좀 지치기는 해."
  "그럼, 언제 끝낼 건데? 이거 끝낼 생각은 있어? 끝내려면 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해봐. 등장인물들 그냥 다 죽여버리고 그러지 말고."

  무영은 소림의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놀랐다. 사실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것은 무영의 고질적인 작법이었다.

  "주인공이 좀 죽어야 비감한 맛이 있지. 그래야 독자들도 울분을 느끼고 원통해하고 그럴 거 아냐?"
  "이봐, 작가 양반.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강호의 무림 고수들은 독화살 맞는다고 단번에 죽고 그러지 않아. 쌓아온 무공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만들어낸 것이 작가 양반 당신 아냐? 그런데 무슨 밀가루 포대 먼지 털듯이 장풍에 그냥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고 그러냐고. 어쨌든 말이 좀 되게 하라니까."
  "무협이란 게 말이 안 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소림은 한숨을 쉬며 그 말을 하는 무영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죽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떨 거 같아?"

  무영은 이제까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소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어 있어."
  "어쭈, 철학자 양반 납셨군. 자, 그럼 타협을 하기로 하지. 난 탄검이가 싫어. 하지만 작가 양반이 원한다면 탄검과 혼인하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날 죽이지는 말아 달라구. 어쨌든 난 살고 싶어. 죽는 건 아주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거든.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지금 말하기는 곤란해."
  "결국 죽이겠다는 거로군."

  소림은 탁자 위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기름기가 묻은 손을 빡빡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 티슈를 무영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내던졌다. 무영의 소설 속에서 소림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무공을 닦은 무사였다. 그 무사가 던진 휴지 조각은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무영의 오른뺨을 강타했다. 무영은 볼이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소림은 그런 무영을 식탁이 있는 벽 쪽으로 거칠게 밀쳤다.

  "잘 생각해 보라구. 다들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어. 참 내 팔자도 사납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살아내야 하다니 말이야. 결국 남는 건 당신 통장에 찍히는 그 숫자뿐이군. 행복? 그 똥통에서 열심히 잘 찾아봐."

  소림은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 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무영은 자신이 소림에게 씌워준 투명 망토를 떠올렸다. 그것은 소림의 열일곱 생일에 화산파의 당주에게서 뺏어서 준 선물이었다. 조금씩, 뜨뜻한 무언가가 무영의 입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영은 입안에서 헛도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부러진 윗니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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