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던지는 일에 실패한 날


  요즘 들어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정현 군의 고민은 잘 들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한 지 벌써 석 달이 되었다고 했던가요? 좀 걱정스럽기는 하군요.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손을 오래 놓고 있다니 말입니다. 손이 쉬고 있으면, 마음이 굳고, 결국에는 머리가 굳어져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니까요. 두려운가요? 글을 쓸 수 없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정현 군은 왜 글을 씁니까? 어떤 이유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아, 물론 작가가 되는 것이 정현 군에게 운명이었다는 대답을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 대답은 좀 재미가 없네요. 솔직한 답변을 들려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마도 내 생각에 정현 군은 쓸 수밖에 없어서, 글쓰기 외에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는 없어서 그랬다고 답할 것 같기는 합니다.

  사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정말로 아주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므로 나는 정현 군에게 글쓰기를 부업으로 삼으면서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어요. 글쓰기가 본업이 되면 인생이 아주 고단해집니다. 어떻게든 팔리는 글을 쓰려고 아득바득 애를 쓰게 되니까요. 

  팔리는 글이란 게 뭘까요? 그건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드는 글입니다. 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 글에다 설탕물을 입히는 거예요.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정말로 참혹하고도 위대합니다. 작가라고 해서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작가는 글을 써서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잖아요.

  글을 파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 생각에 좋은 작가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글을 독자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납득을 시켜요? 무슨 수로요? 언젠가 읽은 소설 작법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글쓰기의 비결은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어떻게든 독자의 멱살을 잡고서 자신의 글 속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그런 구절이었어요.

  독자의 멱살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그런 방법이 있는지 그 책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내가 글을 쓸 때 하는 작업은 하나 있습니다. 공을 던지는 겁니다. 네, 공을 건지는 거예요. 어떤 공이든 상관은 없어요. 다만 축구공 같은 큰 공은 말고요. 탁구공은 좀 작을 것 같군요. 테니스 공 정도의 크기면 좋겠어요.

  정현 군이 쓰고자 하는 소설의 인물을 생각해 봐요. 예를 들어 17살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고 칩시다. 정현 군은 그 주인공에게 공을 던집니다. 사실 정현 군이 던지는 공을 그 친구가 받을지 안 받을지는 몰라요. 받으면 좋겠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너무 공을 세게, 빠르게 던지는 일은 하지 말자고요. 천천히, 받을 수 있는 거리에서 던져봅니다.

  아, 그 주인공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요? 영무, 라는 이름은 어떤가요? 이건 내가 방금 생각해 냈어요. 자, 영무가 정현 군이 던진 공을 받았어요. 그런데 공을 받고서 그냥 뒤돌아서 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공을 다시 정현 군에게 되돌려 줄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공을 주고받으면서 정현 군은 영무의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내 생각에 뛰어난 소설가는 그 공을 능숙하게 잘 주고받는 사람이지요. 어떤 날은 잘 되었다가, 어떤 날은 안되기도 하고, 그렇게 연습을 해보는 겁니다. 내 이야기를 해볼까요? 나는 오늘 그 공을 던지는 일에 실패한 것 같아요. 여기저기 공을 던져봤는데, 돌아오는 공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오늘 내가 공을 던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30년 동안 참기름을 짜온 기름집 부부에게 비극이 닥칩니다. 남편이 바람이 나서 딴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게 되었어요. 남편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을 둘이나 두었다지 뭡니까? 배신감에 치를 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죽음을 보고 딸도 충격을 받고 죽어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써낼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B. 작가 지망생인 대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청소일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12평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그는 4년째 SF소설 창작에 매달리고 있는데, 공모전에 소설을 내는 족족 다 떨어집니다. 이제 졸업을 앞둔 그 친구는 소설 쓰기에 더 매달릴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끌고 갈까요?

  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다 재미없는 이야기군요.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다지 재미가 없어요. 정현 군의 일상은 어떤가요?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되나요? 돌이켜 보니 인생에서 무언가 잘 풀렸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도 같지요. 그리고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건, 대부분 돈 때문에 그래요. 돈을 넣어보면 잘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빈곤과 결핍은 글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어요. 돈이 많고 인생이 순탄한 사람은 흔들려 본 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그 흔들림이 만들어내는 물결이 무엇인지 모르죠. 작가는 그 물결의 파동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현 군은 흔들리면서 공을 던지는 일을 주저하지 마세요. 반드시 강속구의 스트라이크를 정현 군의 주인공들에게 던질 필요는 없거든요. 때론 아주 느리게, 또는 삐딱하게 휘어지는 공을 던져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정현 군의 글 쓰는 감각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아, 물론 나도 그렇게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공을 던지는 일에 실패했지만요. 내일은 성공할 수도 있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공을 던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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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행성에서 온 편지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조금은 압니다. 당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이 편지를 발송할 때부터 수신인의 직업을 그렇게 입력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라고 말입니다. 당신네 행성에서 시인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 편지를 시인이 받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부터 내가 말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 물론 그 말이 내가 시인들을 경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튼, 당신이 시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내일모레, '센터'로 가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센터가 어딘지 당신은 물을 것입니다. 그곳은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키는 요람입니다. '요람'이라는 말은 당신의 행성에서 통용될 법한 단어이기는 합니다. 사실 그곳은 공장에 가깝습니다. 출산 공장이지요. 새로 태어날 생명들은 알파 종족의 자손들입니다. 이 행성의 시민들은 5등급으로 구분됩니다. 1등급의 시민이 바로 알파 종족입니다. 그들은 이 행성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지배 종족이지요. 알파 종족은 출산의 의무를 4등급의 시민, 그러니까 내가 속한 엡실론 족에 부과합니다. 왜 5등급의 시민에게 그 의무를 부과하지 않냐고 당신은 물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5등급의 그들은 시민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행성의 지하 세계에 거주하는 천민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천민에게 우수한 알파 종족의 자손을 대신 낳게 할 수는 없지요.

  말하자면 4등급의 우리 엡실론 족은 당신네 행성에서 자행되는 그 '대리모'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셈입니다. 아, 물론 모든 엡실론 족이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행성의 출산위원회는 대리모를 선별하는 일에 매우 까탈스럽게 구니까요. 첫 번째 조건은 건강할 것, 두 번째 조건은 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엡실론 족은 13살 때부터 대리모로 선발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성에는 당신네 행성과는 달리 출산이 암컷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수컷도 얼마든지 출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센터에 선발되는 대상은 어린 소년, 소녀 모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보내지면 대다수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운명입니다.

  이 출산의 과정은 특수한 긴 관을 팔에 주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알파 종족의 수정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들어가는 순간 엡실론 족의 대리모는 수정란의 숙주가 됩니다. 이 과정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단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그리고 출산이 시작되지요. 그런데 이 출산은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새로운 알파 종족의 아기는 무자비하게 숙주의 몸을 뚫고 나옵니다. 머리로 나올 수도 있고, 배에서 나올 수도 있고, 다리로 나올 수도 있지요. 아무도 그 아기가 어디로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머리로 나오면 대리모는 즉사하겠지요. 그러므로 센터에 온 엡실론 족의 대부분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다리로 나온다면, 그 대리모는 아주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다리 한쪽만 잃는 것으로 끝나니까요.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바로 그 무시무시한 센터로 가도록 결정된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당신네 행성의 48시간에 해당하는 이틀입니다. 내가 죽을지 살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길 바라면서도, 다리가 없이, 또는 팔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어떨지는 가늠이 되질 않는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까요? 아니요. 나는 살고 싶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 나는 해가 지는 저 너머의 프록시마 B 행성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거든요. 죽으면 그 행성의 분홍색 대기를 볼 수 없어요.        

  내가 왜 알파 종족으로 태어나지 못했는지, 꽤나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말하기를, 그것은 행성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정해진 법칙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행성에서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하던가요? 왜 나의 부모는 알파 종족이 아닌지, 아니, 하다못해 2등급이나 3등급의 시민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참으로 더러운 운명입니다. 지배 종족의 생명을 대신 낳도록 강제된 엡실론 족의 운명이 말입니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엡실론 족에는 혁명의 전사들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지, 나에게 묻고 싶겠지요. 네, 당신네 행성에 있는 그 혁명의 전사는 이 행성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알파 종족은 그렇게 허술하게 행성을 통치하지 않습니다. 엡실론 족은 철저히 순응하도록 설계된 종족입니다. 이 종족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는 불만의 마음을 사그라들게 만드는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엡실론 족은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오로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음식들을 거부하고, 먼 들판에 나가서 풀과 흙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센터에서 돌아온 뉴무스를 보면서부터입니다.

  뉴무스라는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센터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알파 종족의 새끼는 뉴무스의 배를 찢고서 나왔지요. 뉴무스는 엄청난 출혈로 죽을 뻔했는데, 아주 운이 좋게 살아남았어요. 그의 배는 그 찢긴 흉터가 마치 불가사리처럼 새겨져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뉴무스를 '불가사리'라는 별명으로 불러요. 이 불가사리 뉴무스가 어느 날 나에게 그러더군요. 센터에서 살아서 돌아오고 싶다면, 알파 종족이 배급하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구요. 그 음식을 먹으면 몸은 살아나지만, 정신이 죽는다면서요. 불가사리는 나에게 정신의 위대함을 알려주었지요. 자신이 센터에서 살아남은 것도 오직 정신력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불가사리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모님 몰래 들판으로 나가서 풀과 흙을 먹었습니다. 살아남고 싶었거든요. 뉴무스처럼 배에 불가사리 흉터를 갖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센터로 가기로 정해졌습니다. 지난주, 출산위원회에 불려가서 정밀 검진을 받았어요. 그들은 철저한 검사 끝에 내가 출산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사악하기 짝이 없는 위원회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가차없이 죽음에 몰아넣으니 말입니다.

  나는 어쩌면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대신에 이 행성의 역겹기 짝이 없는 악습에 대해 누군가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내가 3년 동안 몰래 먹은 그 거친 보랏빛 들판의 풀과 흙 덕분일 것입니다. 나는 마을의 유일한 우체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학교에서 배운 '지구'라는 당신네 행성의 좌표를 발신 기계에 입력했습니다. 아, 물론 '작가'라는 수신인의 직업도 함께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은 지구의 어느 작가일 것입니다.

  자,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입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다면, 그 생존기를 당신네 행성에 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지도요.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겨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작가'의 의무는 약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약자는 언제나 강한 자들에게 짓밟히고 그렇게 죽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자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든 생명은 동등한 것입니다. 그 가치를 뒤흔드는 자들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당신은 작가로서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꼭 써서 남겨주길 바랍니다. 나의 이름은 엡실론 족의 카예트(Kayet), 15살의 소년입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나의 죽음이 당신의 글 속에서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의 이 초단편(超短篇)은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E. Butler)의 SF 단편 '블러드 차일드(Bloodchild)'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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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단막의 희곡.

등장인물: 할머니 정 여사, 정 여사의 아들 진현, 며느리 주미

무대는 정 여사의 집 거실이다. 정 여사는 무대 중앙의 1인용 소파에 앉아있다. 정 여사 앞에 기다란 직사각형의 탁자가 있다. 그 탁자 왼편에는 2인용 소파가, 오른편에는 3인용 소파가 있다. 무대 왼편에는 작은 4인용 식탁이 있다. 식탁에는 물병과 컵이 놓여 있다. 오른편에는 현관 출입문이 있다. 등장 인물은 그 출입문으로 들어온다.

늦가을, 어느 금요일 오후. 안경을 쓴 흰머리의 정 여사는 거실의 소파에서 혼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때 현관에서 번호 키 소리가 나면서 며느리 주미가 들어온다. 주미는 40대 중반으로 다소 마른 체구이다.



주미: 올가을은 무슨 비가 이리도 오는지 몰라. (트렌치코트를 입은 주미가 우산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다.)

정 여사: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깨며) 아이구야, 여기가 어디냐?

주미: 어머니, 저예요. 이제 들어왔어요.

정 여사: 밖에 비가 오는 게냐? 우산을 들고 있네.

주미: 네. 가을비가 많이 오네요. 시장하지 않으세요? 저녁 드셔야죠.


주미는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소파에 걸쳐둔 후, 왼쪽의 2인용 소파에 앉는다.


정 여사: 아니다. 배가 하나도 안고파. 아까 누구더라, 아무튼 누구하고 밥을 먹었어.

주미: (딱한 표정으로 정 여사를 보며) 아휴, 그럴 리가요. 우리 어머니는 매일 까마귀 고기를 드셔서는 뭐든지 다 까먹으셔.

정 여사: (약간 노여운 목소리로) 아니래도. 아까 집에 온 손님하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어.

주미: (식탁을 힐끗 바라보며) 그런데 식탁이 아주 깨끗한데요. 그럼, 설거지도 어머니가 다 하신 거예요?

정 여사: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손님이 치우고 갔는지.


정 여사와 주미가 그렇게 대화하고 있을 때, 현관문에서 번호 키 소리가 나면서 진현이 등장한다. 40대 후반의 진현은 피곤에 절은 회사원이다. 배가 약간 나왔고, 정수리가 휑한 탈모에 시달리고 있다.

진현: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어머니, 저 왔어요. (주미를 보고는) 당신도 이제 들어온 모양이군.

정 여사: (아주 반갑게) 우리 아들 진현이가 왔구나. 오늘도 얼마나 힘들었니?

진현: 그래요, 어머니. 먹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정 여사: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가 우리 아들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고.

진현: 에이, 저는 그냥 어머니만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아들 며느리, 손주들 얼굴 잊어버리지 않고.

정 여사: 아무렴. 내가 그걸 왜 잊어버려? 그런데 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거냐?

진현: (크게 한숨을 쉬며) 어머니, 아버지는 8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정 여사: 아니, 그게 사실이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태껏 살아왔네. 그럼, 할머니는 어디에 계셔?

진현: (괴로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머니, 할머니는 15년 전에 돌아가셨다구요.

정 여사: 아, 그렇구나. 할머니가 네 아버지보다 먼저 가셔서 다행이다. 만약에 살아계셔서, 아들이 세상 뜬 걸 알면 얼마나 슬프셨을까? (정 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주미: 당신도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우선 여기 와서 좀 앉아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나도 이제 막 와서 앉아있는 참이라.

진현: (주미 옆자리에 앉는다) 오는데 길이 얼마나 막히던지. 이런 비 오는 날은 차 가지고 다니는 것도 일이야, 일.

정 여사: 우리 아들, 배고프지? 에미야, 얼른 저녁 준비해야지.

주미: (입을 삐쭉거리며) 어머니, 저도 좀 쉬고요. 어머니는 배 안고프다고 하셨죠? 아까 손님하고 식사하셨다고.

진현: (약간 놀란 표정으로) 뭐, 손님? 손님 누구? 우리집에 손님이 왔어?

주미: (진현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린다) 네. 어머니 손님이 낮에 오셨대요.

진현: (안도하며) 아, 그랬구나. 어머니, 누가 어머니를 찾아왔어요?

정 여사: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쎄다. 누가 오긴 왔어. 그래서 밥 먹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거든.

진현: 어머니, 아무튼 아무나 문을 열어주시면 안 돼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누가 벨을 눌러도 열어주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우리 가족은 번호 키 열고 다 알아서 들어오니까. 근데, 그 손님이 누굴까? 남자예요, 여자예요?

정 여사: (잠시 생각하다가) 흠, 남자 같아.

진현: 젊은 사람이에요? 아니면 늙은 영감?

정 여사: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이, 나도 잘 모르겠어.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구나.

진현: 어머니, 만약에 그 사람이 도둑이라 우리집 물건들 훔쳐갔으면 어쩐대요?

정 여사: (안절부절못하며) 정말, 그 사람이 도둑이었을까? 내가 도둑을 집에 들인 거야?

주미: (진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휴, 참 당신도. 그만 좀 해요. 어머니, 우시겠네.

진현: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어머니, 그러니까 아무나 문 열어주면 큰일난다구요. (주미를 보며) 당신도 말야, 어머니 혼자 놔두고 어디 좀 돌아다니지 말아.

주미: (서운하다는 듯) 영호 아빠, 내가 어딜 돌아다녔다고 그래요? 이가 아파서 치과 좀 다녀왔어. 주간보호센터에서 낮에 어머니 데려다 준 거 확인하고 나간 건데.

진현: 당신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을 집에 들어오게 한 거 아니야?

정 여사: (단호한 표정으로) 그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주미, 진현: (서로 바라보며) 아는 사람이요?

정 여사: 그래,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았어.

진현: (작게 한숨을 쉬며) 그래요, 어머니. 어머니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손님이 왜 어머니를 찾아왔대요?


진현은 목이 마른 듯, 식탁으로 가서 물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정 여사: 그건, 그러니까... 글쎄다. 아마, 내가 오라고 전화를 했을 거야.

주미: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진현: (다시 소파에 앉는다) 어머니, 우리가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아시죠?

정 여사: (슬픈 목소리로) 너희들이 밥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사람들한테는 내가 창피해서 그 말은 못 해.

주미: (천장을 쳐다보며) 아...

진현: (부아가 치미는 얼굴로) 어머니, 지금 어머니 체중이 얼만지 아세요? 83kg이에요. 너무 잘 드셔서 그래요. 우리가 어머니를 굶겼으면 그렇게 살이 쪘겠어요?

정 여사: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늘 배가 고파. 제대로 된 밥을 언제 먹었는지 몰라.

주미: (비꼬는 말투로) 어머니, 아까 온 손님하고 식사는 잘하셨어요? 뭐에다 드셨어요?

정 여사: (당황한 듯) 음, 그건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줬어. 짜장면하고 탕수육. 아주 잘 먹었어. 그래서 배가 하나도 안 고픈 거야.

진현: 그렇다면 아무튼 도둑은 아닌가 보네요. 도둑이 집주인한테 음식 시켜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정 여사: 아무렴. 그 사람, 착한 사람이야.

주미: 우리 어머니, 그 착한 손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나?

진현: (얼굴을 찌푸리며) 여보, 인제 그만 좀 하지?

주미: (짜증이 난 표정으로) 뭘 그만해요? 그러는 당신은?

정 여사: 왜들 그리 싸우고 그러냐. 내가 얼른 이 집을 떠나야지. 나, 송화리로 가련다. 거기에 진짜 내 집이 있어.

진현: (울화가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 송화리에는 어머니 집이 없어요. 여기가 어머니 집이라구요. 거기에 집 있으면, 팔아서 좀 돈이라도 아들한테 줘보세요. 어휴.

정 여사: (목소리를 높이며) 거기에 내 집이 있다고. 나 좀 거기에 데려다 다오. 여긴 내 집이 아냐. 거기 송화리 내 집에 가서 잘 거야.

주미: (차분하게) 어머니, 저녁 안 드실 거에요? 우리가 밥을 굶긴다면서요? 제가 저녁 잘 차릴게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간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신다.)

진현: 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 어머니 집은 여기고, 송화리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셨죠? 여기서 주무셔야 해요.

주미: 영호 아빠, 자꾸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왜 자꾸 쓸데없이 그래. 그냥 어머니 달래드려야지.

정 여사: (울먹이는 목소리로) 송화리에 못 간다는 거냐? 여기서는 잘 수 없어. 내 집이 아니라 잠도 안 오는데.

진현: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제가 내일 모셔다드릴게요.

정 여사: 그래, 정말 그럴 거지? 이 에미한테 약속해라.

진현: 네, 진짜, 정말로, 약속해요.

주미: (억지로 활기를 되찾으려는 듯) 어머니, 저녁 뭐 드시고 싶으세요? 미역국 어때요? 어머니, 미역국 잘 드시잖아.

진현: 어머니, 그냥 저녁이나 먹읍시다. (진현은 이제야 양복 외투를 벗는다.)

정 여사: 아까 그 손님하고 잘 먹어서, 나 배 안 고프다. 밥 생각이 없어.

진현: (일어나서 식탁으로 가서 앉는다) 그럼, 우리끼리 밥 먹을게요.

정 여사: 에휴, 저렇게 지들끼리만 또 밥을 먹지. 고얀 것들 같으니.

진현: 엄마! 내가 엄마 때문에 돌겠어, 돌겠다고. (식탁에서 일어나며 자기 가슴을 세게 친다)

주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호 아빠, 화내지 말고.

정 여사: 아까 그 손님은 나한테 친절했는데, 너는 이 에미한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냐?

진현: (소파로 다시 돌아와 앉는다) 그러니까, 어머니! 그 손님이 누구냐구요? 누군데 그렇게 친절하냐고요? 그 친절한 사람한테 어머니 아들이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잖아요. 어머니한테 맛있는 음식도 사줬다는데.

정 여사: 아, 생각났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미: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정 여사를 바라본다) 어머니, 그러니까 누구예요?

진현: 누구긴 누구야? 있지도 않은 사람 가지고 괜히 저러시는 거지.

정 여사: 그 사람이 왜 없어. 이름도 내가 알아. 덕호야, 덕호. 신덕호.

진현: 어머니, 신덕호가 누군데?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정 여사: 나 어렸을 적에 옆집 살던 애. 덕호가 참 착했거든. 덕호가 아까 왔어. 중절모 쓰고. 옷은 좀 낡았더라. 잘 살지는 못하나 봐.

진현: (안도하며) 아, 그랬구나.

주미: 어머니가 아는 사람이 집에 왔었다니, 도둑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정 여사: (웃음을 지으며) 덕호, 걔가 말이지. 나한테 연도 만들어서 날리게 해주고, 겨울에 나무로 썰매도 만들어 주고 그랬거든. 그런 건 오빠가 있으면 해주는 건데, 난 오빠가 없어서 늘 서러웠지. 근데 덕호가 착해서, 내가 말하면 다 들어줬더랬지. 근데 덕호가 공부는 너무 못했어. 그 착한 덕호가 아까 날 찾아온 거야.

진현: (주미를 향해) 여보, 저녁이나 먹자. 어머니, 진짜 안 드실 거예요?

정 여사: 내일은 송화리에 갈 거야. 꼭 데려다 줄 거지?

진현: (건성으로) 네, 그럴게요.

주미: 어머니가 살이 너무 찌셔서 걱정이에요. 밥을 조금만 드셔야 하는데.

진현: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로)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우리가 밥 굶긴다고 하는 소리 못 들었어?

정 여사: 덕호가 내일도 온다고 그랬어.

진현: (식탁으로 가서 앉는다) 어머니, 덕호든 누구든 아무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구요.

정 여사: (졸린 듯 고개를 소파에 대고 눈을 감는다) 덕호가 오면 열어줘야지. 그래도 내 손님인데...

주미: 저러니 내가 어머니 놔두고 어디를 못 가요, 못 가.



천천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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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삐이...'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명희의 오른쪽 귀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명희는 전부터 앓고 있는 이명의 증상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데 라디오의 노랫소리가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가수의 목소리는 웅얼거리고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서 들렸다. 왜 이렇게 들리는 걸까? 설거지를 하다 말고 명희는 식탁에 잠시 앉았다. 귀도 뻐근하게 아팠다. 마치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갈 때 느끼는 통증과도 같았다. 물을 한 모금 마셔보고, 침도 열심히 삼켜보았다. 그런데도 소프라노 가수의 지글거리는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거 같아."

  명희는 라디오를 끄고서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예전에 병원 소식지에서 읽었던 '돌발성 난청'이란 질병이 떠올랐다. 인터넷 검색창에 '돌발성 난청'이라는 단어를 써넣으니, 자료가 주르르 뜬다. 조금 전에 자신에게 생긴 그 증상과 똑같았다. 갑작스러운 청력의 소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돌발성 난청은 이비인후과의 응급질환이므로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토요일 저녁이다. 일요일에 문을 여는 이비인후과는 없다. 응급실에 가봐야 하는 걸까? 명희의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돌발성 난청을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영구적인 청력 손실이 생깁니다. 그 무시무시한 경고 글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펄럭거렸다.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귀에서는 지글지글 뭔가가 끓으면서 나는 소리, 쉭쉭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 그런가 하면 휘파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명희는 바깥을 몇 번이고 내다보았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말 저녁의 아파트 단지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럴까?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생겼을까? 돌발성 난청은 치료받는다고 해도, 낫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긴다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명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당신, 자는 거야?"

  남편이 식탁에 엎드려 있던 명희를 깨운 시각은 밤 9시였다. 저녁 약속이 있다고 나간 남편이 그제야 들어왔다. 명희는 자신이 얼핏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남편의 목소리가 멀쩡하게 들렸다. 그래, 그건 일시적인 증상이었구나. 소리를 듣지 못했던 2시간은 악몽의 기억으로 남았다.

  "글쎄, 저녁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귀가 안 들리는 거야. 너무 놀랐지 뭐야."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스트레스 때문 아닐까?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잖아. 지금은 괜찮지?"
  "응. 당신 목소리, 잘 들려."

  명희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남편은 별다른 대답 없이 소파에 가서 TV를 틀었다. 명희는 그런 남편이 무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퇴직으로 대기업 연구소에서 나오게 된 남편은 중소기업에 재취업으로 다니고 있었다. 새롭게 주어진 '생산부장'이라는 직함은 남편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700만 원이 넘었던 남편의 월급은 반토막이 나서 300만 원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아직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의 동기들에 비하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급전직하의 삶은 남편에게도 명희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희는 새삼스럽게 자신과 남편이 꾸려온 삶의 경제적 기반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명희가 살고 있는 일산은 이제 신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지 오래다. 낡은 수도 배관에서는 녹물이 나와서 집집마다 수전에 녹물 필터를 끼우지 않고서는 물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일부 단지에서는 몇억을 들여 수도 배관 공사를 진행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질까 봐 그런 사실을 쉬쉬하면서, 재건축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명희는 지금 살고 있는 일산의 31평 아파트를 팔아 봤자, 서울의 변두리 20평대의 아파트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서울은 그저 가끔 외출할 때나 다녀오는 곳이지, 들어가서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산에는 대형 병원이 많아서, 노후에 병원에 갈 때에는 무척 편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신도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늙어버렸다. 젊은 사람들은 인근의 파주 운정 신도시로 떠나버렸다. 일산은 말 그대로 노인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산의 아파트 한 채, 1억 정도의 은행 저축, 이제까지 성실하게 부어온 연금과 보험. 그것이 명희와 남편이 가진 전부였다. 재테크와는 거리가 먼, 50대 부부가 처한 현실은 그러했다. 두 사람의 하나뿐인 아들은 올해 고등학생이 되었다. 명희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햇수를 헤아려 보고는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았다. 달마다 나가는 학원 과외비가 80만 원이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줄여볼 방법이 없었다. 그다지 특출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아들이 명문대에 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서울의 대학만이라도 진학하려면 학원 과외라도 열심히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남편의 이직 이후에, 그 학원비 80만 원은 명희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아들이 독서실에서 돌아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들의 말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원체 말이 없는 아이가 더 말이 없어지니, 명희는 무슨 따돌림이나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때도 있었다. 그나마 아들은 키가 크고 약간의 덩치가 있는 편이어서, 체력으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아마도 성적 때문이겠지 싶은 생각만 들었다. 중학교 때에는 그래도 전교 50등 안쪽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성적이 쭉 미끄러지면서 전교 100등에 겨우 턱걸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쟤는 왜 공부를 잘하지 못할까? 남편은 연세대 공대를 나왔고, 자신은 이화여대를 나왔다. 부모가 그 정도라면, 자식은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들은 공부에 별 소질이 없는 듯했다. 아들이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 살지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콱, 하고 막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니 학원비를 줄인다는 건, 아들의 미래를 내던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지, 나도."

  화요일, 귀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병원 예약을 했다. 버스 정류장을 걸어가면서 명희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명희가 가려는 종합병원은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그 버스의 배차시간은 25분으로 꽤 길었다. 명희의 집은 일산에서도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있었다. 명희는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자신과 남편이 어쩌면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그토록 무지했던 것일까,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명희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정류장 게시판에 붙어있는 광고를 하릴없이 쳐다보았다.

  '학원비는 무료로 국비로 전액 지원됩니다. 중년 주부의 실용적인 재취업 기회! 간호조무사 자격증에 도전하세요. 미래 간호학원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명희는 전에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어떻게 잘 준비해서 자격증을 땄다고 하자. 그것으로 어딘가에 취업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이 있을까?

  '솔직히 말할게요. 그 자격증, 나이 든 사람한테는 별 의미 없어요. 요새 개업하는 젊은 원장들 나이가 30대에요. 그 사람들이 50대 간호조무사를 쓰겠냐고요. 자기가 부려먹을 사람인데, 아무래도 더 어린 친구들 쓰죠.'

  어느 중년 여성이 간호조무사 자격증 따는 것에 대해 주부 커뮤니티 게시판에 고민 글을 올렸다. 그러자 누군가 그렇게 신랄한 답변을 달아놓았다. 명희는 그 답변을 읽고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 답변을 읽고 나니, 간호조무사 자격증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져 버렸다. 나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혹 같이 거추장스럽다는 걸, 요즘 들어 명희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아줌마, 나이가 많네."

  며칠 전, 명희는 지나가다 동네 마트에 붙은 파트타임 캐셔 모집 공고를 보았다. 마트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점장이라는 젊은 남자가 명희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서른 좀 넘었을까, 하는 새파란 놈이 혓바닥 짧게 놀리는 꼬락서니가 역겨웠다. 더군다나 나이를 운운하는 것에 너무나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취직했다면 저런 놈한테서 받을 대우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그 분노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명희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돈을 버는 고생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20년이었다.

  버스는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기시간은 25분에서 15분으로 줄어들었을 뿐이다. 명희는 이런저런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귀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일까? 명희는 가만히 오른쪽 귀를 막고서 소리가 들리는지 보았다. 그런 다음에는 왼쪽 귀를 막아보고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소리가 들리는지 보다가, 정류장 근처 교회가 눈에 띄었다. 작업용 권색 조끼를 입은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교회 뒤뜰의 비좁은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들어가는 통로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 가지에 얼굴을 부딪친 모양인지, 움찔하면서 가지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이내 그 나무 옆에 있는 가스 배관의 계량기를 확인하고는, 수첩 같은 전자기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저 여자는 가스계량기 검침원이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체력도 없는 자신은 저렇게 민첩하게 몸을 쓰는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잉여적인 부산물처럼 취급받는다. 명희는 남편의 수입에만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이 뼈저린 실패처럼 여겨졌다.   

  명희의 우울한 마음처럼 하늘이 흐려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듣고, 명희는 천 가방에 우산을 챙겨서 나왔다. 우산을 펴서 들고서 조금 서 있으니 버스가 왔다. 다섯 정거장이 금세 지나갔다. 비 오는 화요일 오후의 종합병원은 이상하게 한가했다. 늘 환자로 미어터지는 병원이 한가하니까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다. 검사받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명희는 미리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젊은 여자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보통은 그런 청소 아줌마들은 나이가 있는 편인데, 아무리 봐도 그 여자는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저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하다니, 명희는 그 여자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돈을 벌 방법은 어떻게든 있는 법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안 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명희는 자신의 안일한 마음가짐을 꾸짖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비인후과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고는, 명희는 귀에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소음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의사는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양쪽 귀를 한번 보고, 건성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진료를 끝마쳤다. 초면의 환자에게 반말 섞어서 하는 저 늙은 의사는 참으로 세상 편하게 사는구나. 저렇게 말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저런 거야. 명희는 의사의 태도에 혀를 끌끌 차면서 진료실 문을 나왔다. 반말 찍찍 해대는 의사를 견디는 기분도 무척 더럽겠네. 명희는 자신이 간호조무사 일은 더더욱 못할 것 같았다.

  '별다른 경력이 없어도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특별히 보너스 시급이 지급됩니다. 많은 신청 바랍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뉴스를 클릭하다가, 명희는 대형 쇼핑몰 물류센터 알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물류센터는 일산에서 가까운 파주에 있었다. 일산에서 파주까지의 이동은 통근버스가 담당하고, 근무 시간의 선택지도 몇 가지가 있었다. 명희는 별 생각 없이 광고에 적힌 문의 안내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보았다.

  '50대 주부인데, 지원 가능한가요?'
  '네, 그럼요.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명희는 단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문자 답변이 그렇게 오자 깜짝 놀랐다. 답변 문자에는 통근 버스 정류장의 위치, 신발과 복장에 대한 안내, 첫 출근 시 제출해야되는 서류에 대한 첨부파일이 들어있었다.

  '성훈이 학원비라도 벌어봐야지. 그냥 단 며칠간만이라도 해보는 거야.'

  명희는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책을 떠올렸다. 동화책 속, 중세의 기사는 무작정 길을 떠났고 불을 뿜는 용을 만나서 단칼에 제압했다. 그 여정의 시작은 어쨌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힘들어서 하루 만에 그만두더라도, 한번 해보는 거야. 명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목요일, 가을비가 지나가고 난 뒤에 갑작스러운 초겨울 추위가 몰려왔다. 명희는 물류센터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기다란 행렬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내렸다. 물류센터는 허허벌판에서 포효하는 거인처럼 보였다. 그곳의 구석진 작은 출입문으로 들어가서는 시린 손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명희는 '레일(rail)'이라고 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진 상품을 토트박스(tote box)에 실어 이동하는 일을 배정받았다. 초보자임을 감안해서 명희의 토트박스에 담긴 상품들은 주로 가벼운 의류와 소형 상품들이었다. 그곳에서 질문은 금기사항이었다. 무엇이든 눈치껏 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고 따라 하면서, 시키는 것을 잘 알아들어야만 했다.      

  '이곳에서 나는 여자가 아니다. 그냥 한 명의 노동자일 뿐이다.'

  여자라고 해서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더 쉬운 일을 찾을 수는 없다, 고 명희는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48kg의 명희보다 더 말라 보이는 여성도 있었다. 155cm 정도의 작은 키에 비쩍 마른 체구의 여성은 딱 봐도 무거운 짐이 실린 토트 박스를 끌고서 이리저리 날쌔게 걸어 다녔다. 저 몸의 어디에서 힘이 그렇게 나오는 것인지, 명희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파란색의 토트 박스가 물을 잔뜩 먹은 소금 포대처럼 느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벼운 물건을 담았다고 해도, 명희에게 그 일은 갑작스러운 막노동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6시까지는 버티자. 내일 못하더라도, 오늘은 끝까지 해야지. 명희는 이를 악물고 토트 박스를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명희가 통근 버스를 타고 집에 온 시각은 7시가 좀 넘었을 때였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긴장했던 다리가 탁 풀리면서 명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땀으로 눅눅해진 바람막이의 지퍼를 내릴 기운도 없었다. 겨우 바람막이를 벗고는 한 손으로 신발장을 짚고 신발을 벗었다. 현관의 거울에 비친 사람은 기미가 끼고 주름진 얼굴의 늙은 여자였다. 머리카락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떡처럼 뭉쳐있었다. 검은색의 티셔츠는 희끗희끗한 먼지 같은 것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명희는 티셔츠에 묻은 것을 탁탁 털어보았다. 그것은 소금이었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의 소금기가 마르면서 가루처럼 옷에 엉겨붙은 것이었다. 명희는 오늘 하루 일하면서 일당 9만 2천 원을 벌었다. 명희는 티셔츠에 묻은 소금 가루를 차마 털어내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현관에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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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다


  "아빠, 꿈에 어떤 할머니가 보여."
  "그 할머니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니?"
  "음,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 입고 있었는데."

  올 것이 왔구나, 명준은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영이가 말한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은 할머니는 대신(大神) 할머니다. 영이에게 신명(神明)이 있다는 것은 6살 때 알았다.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를 보더니, '저 아줌마는 얼마 못 살겠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며칠 후, 영이가 말한 동네 아줌마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명준은 영이의 신명을 누르기 위해 눌림굿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신명을 그렇게 눌러주면, 영이가 무당이 되는 것은 어떻게든 미룰 수가 있겠지. 명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명준의 바람과는 달리 이제 대신 할머니가 영이에게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저리도 일찍 오고 말았다.

  "무당은 당신만으로도 족하잖아요. 신령님도 그 어린 것을 데려다 뭐에 쓰신다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신이 오시고 싶으면 오시는 거지. 감히 우리 인간 따위가 신에게 그런 소릴 할 수는 없는 법이야."

  명준은 아내가 한탄을 하며 하는 말을 그렇게 막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명준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영이의 나이가 이제 고작 열 살. 저 아이가 지금 내림굿을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래처럼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그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스물, 아니 열다섯 정도나 되어서 내림굿을 받는다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인 자신의 생각일 뿐이지, 신의 뜻은 다를 수도 있다. 명준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준은 자신이 신병(神病)에 걸려서 삼 년을 고생했던 일을 떠올렸다. 박수로 살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친 삼 년이었다. 그러다 결국 눈이 멀어서 보이지 않게 되자, 명준은 신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림굿을 받고 나서야 명준은 시력을 되찾았다. 안개가 자욱한 세상에 안개가 걷히고, 해가 쨍쨍하게 비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길 하나가 있었다. 신의 제자로 살아가는 단 하나의 길. 그렇게 자신만 제대로 살면 자식에게는 그 신명이 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신명은 영이에게도 뻗쳐서 영이도 무당이 될 운명이었다.

  "영이야, 아빠하고 산에 기도하러 가자."
  "그래, 아빠. 그렇잖아도 할머니가 산에 좀 다녀오라고 그랬어."

  명준은 늘 하던대로 기도에 필요한 짐 몇 가지를 챙겨서 배낭에 넣었다. 늦더위가 남아있어도 아직 산 위쪽은 한기가 느껴진다. 어린 영이가 추워할까 봐 작은 담요를 옷장에서 꺼냈다. 저 아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 천진스럽게 웃는 막내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명준의 마음은 한없이 쓰라렸다.

  명준이 기도하는 산의 기도처는 보통의 등산로로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자리한 작은 기도처는 비탈진 길을 꼬박 5시간이나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어른인 자신도 걷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길이었다. 영이가 힘들면 자신이 좀 업고, 쉬어가면 되겠지. 하지만 명준의 걱정과는 달리, 영이는 날랜 다람쥐처럼 명준보다 저만치 앞장서서 걸었다. 딸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명준이었다. 신이 실려서 저러는구나. 명준은 자신의 인간적인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마침내 기도처에 이르자, 커다란 새 초를 꺼내어 명준은 신당의 작은 상에다 놓았다. 

  "영이야, 산신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저 왔어요, 하고. 자, 여기 초에다 불을 붙이거라."

  명준은 성냥에 불을 붙여서 조심스럽게 영이에게 건넸다. 명준은 신당에 초를 켤 때 라이터를 쓰지 않았다. 성냥에 불을 붙이는 작은 정성 하나도 신이 보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할아버지, 영이 왔어. 아빠하고 같이."
  "영이야, 할아버지께 좀 많이 도와달라고 말씀드려라."
  "응."

  영이의 얼굴은 상기된 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차가운 돌바닥을 두툼한 은박 깔개로 덮고, 그 위에 방석과 담요를 겹쳐서 깔아 놓았다. 영이에게 가만히 앉아서 기도를 해보라고 하니, 영이는 자기는 서서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명준은 어린것이 신명이 뻗쳐서 그렇구나 싶어서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35살의 박수무당 아빠와 10살 딸은 이른 아침부터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기도를 했다.

  "영이야, 껌껌해지니까 좀 무서워?"
  "아니, 아빠가 옆에 있는데 뭐. 그리고 산신 할아버지가 지켜주고, 할머니도 있고."
  "어떤 할머니? 꿈에서 본 노랑 저고리 할머니?"
  "응, 그 할머니 말고 또 다른 할머니도 있어. 흰 고깔 쓴 할머니."

  영이가 말한 흰 고깔을 쓴 할머니는 불사(不死) 할머니이다. 조상 가운데 기도 공덕을 많이 바친 어른이 신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명준은 영이에게 내려온 불사 할머니가 자신의 조상 쪽인가, 아니면 아내 쪽인지 궁금해졌다. 아내의 작은고모님은 인천에서 이름난 무당이었다. 그러니까 영이의 신줄이란 어찌 보면 꼬이고 꼬여서 단단해진 동아줄 같은, 그런 강력한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할머님께 외가에서 오셨냐, 친가에서 오셨냐, 한번 여쭈어봐라."
  "엄마네 5대 할머니."
 
  그랬구나. 이제 그 할머니는 영이가 내림굿을 받으면 몸주신으로 영이와 평생을 함께하실 것이었다. 할머니, 우리 영이 좀 잘 굽어살펴주세요. 이 어린 것이 기특하고도 가엾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아빠한테 아무 걱정하지 말래. 내 자손 굶기지 않는다고."
  "그렇구나. 우리 영이를 많이 예뻐하시는가 보다."

  그렇게 명준이 영이와 함께 산 기도를 드리고 내려온 후, 명준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답답한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다. 어떻게든 좀 시간을 벌어보고 싶은 것이 명준의 마음이었다. 지금 영이가 신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신의 뜻이고, 몇 년이라도 조금 더 늦추는 것은 아비로서 명준의 바람일 수밖에 없었다. 명준은 신에게 간절히 빌면 어떻게든 말미를 주지 않으실까, 하는 소망이 있었다. 명준은 우선 신어머니를 찾아가 이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신령님들이 하시는 일이기는 하지만서도, 영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한 5년, 아니 3년 만이라도 늦추면 싶은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것은 애비로서의 네 마음이고, 우리가 신제자로서 신명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신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서 하는 소리냐? 네가 앞 못 보고서야 신 받은 것을 벌써 잊은 게냐?"

  명준의 신어머니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명준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이 딱한 사람아. 그런 게 없다는 걸, 자네나 나나 잘 알지 않는가? 공연히 시간만 끌면, 오히려 영이한테 화가 미칠 수도 있어. 신은 한번 마음을 정하시면, 끝을 보고 마시지. 신을 거역했다가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마시게나."

  그렇게 신어머니를 만나고 나니, 명준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명준은 점사(占辭)를 봐주기로 한 손님들의 예약도 취소했다. 속이 시끄러우니, 신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신당의 문을 닫고, 산으로 바다로 기도를 한다고 나가는 때가 많아졌다. 아내는 그런 명준을 애처로운 심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영이에게 내린 조상신은 아내의 집안 할머니였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신줄의 내력이었다. 영이가 신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준의 아내도 잘 알았다. 받아들이는 것이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10월의 고성 바닷가는 벌써 겨울이 온 것처럼 매서운 찬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다. 하늘은 짙은 먹색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민박집의 라디오에서는 풍랑주의보를 안내하는 일기예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런 날씨에 나가시게? 지금 부둣가에 배들 묶어놓느라 다들 난리인데."
  "좀 답답해서요. 조금 걷다 오겠습니다."
  "아무튼 조심하시구려. 바다 날씨라는 게 정말 무서우니 말입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그걸 잘 몰라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민박집 주인은 걱정인지 가벼운 면박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명준은 아침에 시장에서 사 온 시루떡과 은박 돗자리 하나를 천 가방에 넣고는 민박집을 나섰다. 민박집 주인의 말대로 바람이 심상치가 않았다. 헐렁한 가방이 세찬 바람에 명준의 어깨를 휘감았다. 괜히 나왔나. 그래도 방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힘겹게 바람을 견디면서, 명준은 어제 봐둔 바닷가 바위 아래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은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그나마 조금은 바람이 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위 아래 모래사장에 명준은 은박 돗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돗자리에 떡을 꺼내어 놓고,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용왕님, 바람 때문에 초를 켜지 못하는 제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물도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제자의 간절한 마음만 잘 받아주십사..."

  명준은 염주를 단단하게 왼손에 말아쥐고는 절을 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곧 내리는 비와 섞여서 비바람으로 변했다. 거친 비바람이 명준의 얼굴을 때리며 머리카락을 뒤엉키게 했다. 명준의 눈에 흐르는 것이 비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명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무업(巫業)을 잇지 않게 하겠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명준은 할 수만 있다면 영이에게 내린 신명을 모두 거둬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절을 오랫동안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는 돗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바람은 갈수록 더 세어져서 돗자리까지 정신없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휴대전화의 전화벨이 울렸다.

  "영이 아빠, 지금 어디야? 영이가 다쳤어. 학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대. 나 지금 병원 응급실로 가는 길이야. 당신도 얼른 좀 와봐요."
 
  아내의 전화를 받은 명준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명준은 갑자기 뒤통수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마치 신이 자신을 벌주는 것 같았다. 명준은 영이의 내림굿을 미루려는 자신의 인간적인 바람이 비바람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잘못을 깨닫고, 신의 부르심에 '네'라고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영이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지만, 정말 놀랍게도 어디 하나 부러진 곳이 없었다. 아주 가벼운 찰과상과 멍자국만 남았다. 명준은 신이 영이를 지켜주시는 것에 거듭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영이의 내림굿 날짜를 잡는 일이었다. 신어머니와 상의하고 영이의 내림굿 날짜를 두 달 후로 잡았다. 그렇게 날을 받아놓으니, 홀가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영이가 이런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어제는 꿈에 어린 애들이 보이던데."
  "동자들이야. 네 또래지?"
  "응. 나한테 막 사탕 내놓으라고 떼를 써."
  "다음에 또 꿈에서 보면, 사탕하고 과자 많이 준비해 놓겠다 그래라."
  "그런데 왜 동자한테 그런 거 줘야 해?"
  "동자는 신령님들 목소리 전해주는 심부름을 하거든. 그러니 잘 보여야지."
  "그럼, 신령님들한테는 내가 무슨 선물을 하면 될까?"
  "그건..."

  명준은 그 말을 하다가 말고, 목이 메었다. 신의 제자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신에게 바치는 사람이다. 명준이 그랬던 것처럼 영이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아빠하고 영이는 가진 모든 걸 그냥 다 신에게 드리면 되는 거야. 기도하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 돕고."
  "좋은 거네. 아빠, 그런 거지?"
  "그래."

  낙엽들도 소슬바람에 다 쓸려나가 버린 초겨울의 어느 날, 영이는 내림굿을 받았다. 명준의 오랜 재가(在家) 신도들이 영험한 애기 무당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들 와주었다. 신어머니와 명준의 신형제 신자매들도 와서 굿을 도왔다. 명준은 신명과 인연, 돈으로 기묘하게 얽힌 이 공동체가 '내림굿'이라는 큰 행사를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게 영이의 내림굿은 아주 순조롭게 이어졌다. 영이는 명준이 굿당 앞마당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둔 방울도 잘 찾아내었다. 아버지로서 자신이 딸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기도 했다. 그 무령(巫鈴)이 딸의 앞날을 잘 지켜주길, 명준은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영이가 별상(別上)장군을 받기 위해 작두를 탈 시간이 되었다. 무당이 된 지 10년이 된 명준도 작두 타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그런데 어린 영이가 그걸 탈 수 있을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모든 건 신이 다 하신다.'

  명준은 그렇게 여러 번 되뇌었다. 부정(不淨) 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지를 입에 물고 명준의 신형제들이 쌍작두의 날을 양옆에서 꼭 붙들고 있었다. 파란 무복(巫服)을 입고 관모(冠帽)를 갖추어 쓴 영이가 제단 앞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십수 번을 돌았다. 영이가 한달음에 내달려 쌍작두 앞으로 가더니, 가볍게 작두 날 위에 올라섰다.

  "아, 오늘 기분이 좋다. 정말 좋아. 나라 평안하고, 너희들 집안도 무탈하냐. 너희들 안 좋은 거, 힘든 거 막아주려고 내가 왔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10살 여자아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카랑카랑한 영이의 목소리가 굿당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아이구, 별상장군님 오셨어요? 장군님, 잘 오셨습니다. 저희가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내 잘 안다. 누가 이 좋은 자리에 허섭스러운 말을 보태느냐.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벌을 받을지어다. 이 어린 자손, 내가 잘 지켜줄 테다. 온 천지에 제자의 신명이 가득차도록 불리고 불릴 것이다."
  "네, 복을 주시고 또 주십시오. 온갖 액운, 장군님의 영검으로 다 막아주고 끊어주소서."

  명준은 영이가 작두날 위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신어머니에게 작두거리를 꼭 해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신어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작두를 타지 못하면 영검이 더해지지 않고, 큰 무당도 될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생각이 많은 어른보다 어린 영이에게 신이 제대로 실리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영이는 작두거리를 무사히 끝냈다. 명준은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것을 느끼며 굿당의 문을 꼭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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