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시대는 뭔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는 중학교 3학년인 마코토.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마코토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 마코토의 내면에 깃든 영혼은 이전의 마코토가 아니다. 마코토와는 다른 영혼으로, 그는 6개월간의 새롭게 부여된 삶의 유예기간 동안 자신이 지은 전생의 죄를 기억해낸다면 환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마코토로 살게 된 가짜(?) 마코토는 천상계의 안내자 프라프라의 도움으로 낯선 지상의 삶에 안착하려고 애를 쓴다.


  하라 케이이치의 '컬러풀(Colorful, 2010)'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연출이 굉장히 영화적이다. 무려 2시간에 이르는 이 장편 애니메이션은 도입부에서부터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기 시작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청소년 자살'이라는 소재가 가진 무거움도 만만찮은데, 거기에다 원조 교제와 이지메 같은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야기도 들어있다. 


  마코토가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라프라는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 온 '가짜' 마코토에게 자살 당일의 일을 설명해 준다. 마코토는 학우인 히로카가 원조 교제하는 남자와 모텔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되는데, 마침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춤 선생과 같이 나오는 것도 목격하게 된 것. 다시 살아 돌아온 마코토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 학교에서 친구 하나 없는 자신의 외로운 상황을 끌어안고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 그런 마코토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곳은 미술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마코토는 오직 그림을 통해서만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다. '진짜' 마코토가 그려놓은 미술실의 그림을 바라보며, '가짜' 마코토는 진짜 마코토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마코토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6개월간의 유예 기간 동안 '가짜' 마코토가 전생의 자신의 죄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환생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지상의 마코토의 삶도 끝나게 된다. 과연 '가짜' 마코토는 영혼의 그 수습기간 동안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전생의 죄는 무엇이며, 다시 살아난 마코토가 또 죽게 된다면 마코토의 가족은 어떻게 그 고통을 견뎌낼 것인가? '컬러풀'은 2시간 동안 그 이야기를 아주 우직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매우 잔잔하면서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억지로 주어진 새로운 삶이 영 마뜩잖은 마코토는 새롭게 사귄 반 친구 사오토메에게 지금의 시대가 자신과 맞지 않다며 불평을 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지만 사오토메는 마코토에게 그렇게 말한다.


  "잘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인생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겠지."


  '진짜' 마코토가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보면서, 오로지 아름다운 색의 물감만을 써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짜' 마코토. 그는 어두운 색의 물감도 그림에 쓰이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에는 다양한 색들의 일들이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여러가지 색을 써서 그리는 그림처럼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마코토의 기억도 같이 끌어안으며 현재를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컬러풀'의 메시지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에게 '자살하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애니메이션은 말못할 여러 고민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삶은 원래 다 그런 거에요. 힘든 날도 좋은 날도 있는 거죠. 밝고 화사한 색의 물감을 써서 그리는 때도 있고, 어둡고 칙칙한 색이 쓰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그리는 그림이 당신의 인생이에요."


  다 보고 나면, 마치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며 누군가 건네는 그런 따뜻한 위로를 들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movieforum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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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르 시몽의 다큐 'Le Concour(2016)'는 프랑스 영화학교 페미스(La Femis)에 들어오려는 학생들의 입시 과정을 담아냈다. 우리말 제목은 '프랑스 영화 학교 입시 전쟁'이다. 이 다큐는 영어 제목이 'The Competition'과 'The Graduation'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생 선발 과정을 다뤘다는 점에서 'The Competition'이 더 적절한 제목이다. 제목 그대로 2시간 가량의 이 다큐는 그야말로 프랑스 최고의 영화 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의 치열한 입시 과정을 보여준다.


  다큐의 첫 부분, 입시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는 필기 시험이 진행된다. 시험 문제로 나오는 영화 화면을 보니 일본 영화인데, 아오이 유우가 나오는 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다큐 보다 말고, 아니 저 영화는 무슨 영화인가 궁금해진다. 아무튼 그 많은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머리를 쥐어짜며 답안지를 작성한다. 그러고 나서는 각자가 지원한 분야의 실기 시험과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대한 면접 시험이 이어진다.


  사실, 이 다큐의 진정한 주인공은 학생들을 뽑는 면접관들이다. 페미스는 학생 선발에 있어서 학교 교수들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실무자들을 초빙해서 의견을 듣는다. 영화 평론가, 제작자, 다큐 감독, 배급 회사의 책임자 같은 이들이다. 필기 답안지를 채점할 때도 한 사람이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청취한다. 그래서 더러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학생을 정말로 뽑아야 한다구요."

  "아니, 우리가 같은 답안지 본 거 맞아요? 그건 정말 형편없는 글이에요."


  그런 과정들은 모든 입시생들에게 '평등'한 입시를 보장 하기 위한 것이다. 불어로는 egalite, 영어로 equality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에서 나왔다. '자유, 평등, 박애(Liberte, Egalite, Fraternite)'가 그것이다. 그러한 공화국의 이상은 영화 학교의 입시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이 다큐에서 보게 된다. 면접관들은 학생들을 평가할 때에 무엇보다 영화적 재능을 우선으로 하지만, 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도 면밀히 살핀다. 평가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면접관들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다. 지원자 하나를 두고 극과 극을 달리는 관점차가 존재한다. 


  "이런 미친 학생은 페미스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만약 이 학생이 들어온다면 나는 절대로 안 보고 피해서 다닐 겁니다."

  "그래도 영화적 재능이 있잖아요. 의사 소통 능력(communication skill)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해요. 영화 감독 가운데도 미친 인간들 많아요. 그들이 좋은 작품을 찍기도 한다구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 소통 능력이에요. 그게 없으면 말짱 꽝이에요. 영화 촬영 현장은 엉망으로 돌아가는데, 감독이 그걸 외면하고 장난감 가게로 도망가서는 장난감 사는 인간도 있어요. 정말 미친 거죠."

 

  다큐 내내 그렇게 학생들을 두고 이어지는 면접관들의 다양한 토론과 의견 청취 과정은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특히, 후반부에 눈길을 끄는 지원자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두 여성 면접관의 의견 대립은 너무나도 맹렬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 지원자는 직업이 호텔 도어맨이었다. 그는 힘들게 일하면서 어떻게 하다 영화에 매료되었다. 촬영 장비를 사서 이것저것 찍어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간 뒤에 면접관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 '도어맨' 지원자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라고 적었지만 말로 하는 전투같다) 과정을 보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다. 지원자의 계층적 배경까지도 고려하면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면접관들의 모습은 '진짜 프랑스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게 만든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보다가, 필기 시험 출제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2012)'였다.

**사진 출처: unifran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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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맨날 영화나 파고 있으니 답답도 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잡다한 강의들을 들었더랬다. 예를 들면 선무도나 택견, 도예 수업 같은 것들. 아무튼 연기 수업이라고 해서 막 연기하는 거 배우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여러 동작들을 해보는 것이라, 어떻게 보면 스트레칭과 요가 수업 같다고 보면 된다.


  나는 워낙 몸치에 가까운 사람이라 연기과 사람들이 하는 동작을 따라가기는 커녕 그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이삼일은 근육통에 시달렸다. 참, 수업을 듣기 위해 처음으로 쫄쫄이 타이즈도 샀다.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의 초창기라 그런 옷은 인터넷으로 살 수도 없어서, 동대문 평화시장까지 갔었다. 무슨 스판덱스 쪼가리가 그렇게 비싼지, 내 기억에 3만원인가 했던 것 같다. 뭔가 무용이나 예능과 관련된 그런 특수 의상에는 특별한 가격이 책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었다. 내가 그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그랬다. 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몸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소통하는구나... 흔히 '연기'라고 하면 얼굴 표정을 짓거나 대사를 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일 뿐이다. 좋은 연기를 하려면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몸을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그 수업은 마치 연기의 세계를 아주 짧게, 잠깐 동안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게도 연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 다니던 동네 교회의 크리스마스 연극 공연에서였다. 그 교회는 아주 단촐한 개척 교회였는데, 당시에 나를 가르치던 피아노 선생님이 집사로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억지로 다니게 했던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다니게 되었는데 분위기가 나름 좋았다. 교회는 침례교파에 속했는데 목사님은 40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교회의 벽면에는 목사님이 수영장인지 아무튼 허리까지 몸을 담그고 목사 안수를 받는 커다란 사진이 있었다. 신자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느낌으로 나는 기억한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자리한 그 작은 교회를 나는 1년 가까이 다니다가 이사가면서 그곳을 떠났다.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부흥의 시대'였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경제 개발과 호황에 맞물린 개신교의 확장세는 거침이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신앙심으로 교회를 다녔다기 보다는, 서양의 새로운 신이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것 같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조차도 전도 열풍에 휩쓸렸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그 정점이었다. 아, 여름 성경 학교도 그러기는 했다. 애들은 그런 특별한 시기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 교회를 순례하면서 설교 듣고 과자와 여러가지 선물을 받아왔다.


  아무튼,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공연하기로 한 연극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성탄 전날에 머물게 된 여관에서 일어난 일을 담아낸 것이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공연했는데, 나는 여관 주인을 맡았다. 여관 주인은 아주 속물적이고 못된 사람으로 돈이 없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방이 없다며 거짓말로 내쫓는 역이었다. 나는 그 역할이 싫었다. 요셉과 마리아 역도 있고, 천사 역도 있었다. 아, 여관 주인 마누라 역도 있었구나. 아무튼 주일학교 선생님은 나에게 여관 주인 역을 하게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연극에서 가장 대사가 많았다. 그렇게 대본을 받고나서는 진짜 열심히 외웠다. 의상도 있었다. 선생님이 가져온 흰색 보자기인지 이불 커버인지 그걸 머리에 쓰고 검은 색 띠를 둘렀다. 중동 지방의 남자 의상을 어설프게 흉내낸 의상이었다. 상연 당일에는 선생님이 분장도 해주었는데, 수염도 붙였다.


  마침내, 성탄절 저녁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라고 해봐야, 설교가 이루어지는 빨강색 카펫이 깔린 강단이었지만 오직 그곳만이 불이 켜졌다. 주일 학교 애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했다. 나도 그 어떤 막힘 없이 대사를 해냈고, 특히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구박하는 밉살스런 연기를 아주 잘 해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으며 아주 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뭔가를 완벽하게 해냈다는 느낌은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마도 배우들이 하나의 작품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을 때의 느낌도 그러하리라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내가 연기 수업을 들었던 것도 그 성탄절 공연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 붙는 타이즈는 움직이기에는 편했지만, 내게는 꽤나 민망하게 느껴지는 의상이었다. 그렇게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한 학기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몸치였던 내가 좀 더 유연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예술의 어떤 분야든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 타이즈는 택견복과 함께 창고의 박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문득, 성탄절을 앞두고 그 타이즈와 연기 수업과 어린 시절의 성탄절 연극 공연이 떠올라서 이렇게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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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큐는 마치 '레스트레포(Restrepo, 2010)'의 후속편 같다. Danfung Dennis의 'Hell and Back Again(2011)'은 아프간 전에서 부상으로 제대한 해군 나탄 해리스 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리스는 교전 중에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걷질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만성적인 통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 여러가지 진통제를 비롯해 다양한 약들을 복용하고 있는데, 거의 한 뭉텅이에 가깝다.


  Danfung Dennis는 자신의 경력을 전쟁 사진 작가로 시작했다. 그러다 아프간 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좀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다큐의 제작을 기획했다. 이 다큐는 해리스가 속한 부대를 따라 다니며 그가 직접 찍은 전투 장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그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촬영했다. 나중에 해리스가 제대하고 나서는 해리스와 그의 아내 애쉴리가 어떻게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는지를 약 1년에 걸친 시간을 함께 하며 화면에 담아냈다.


  이 다큐는 전쟁에서 귀환한 병사가 겪는 PTSD가 어떤 것인지를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아무런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해리스의 일상 속에서도 고통과 불안, 두려움이 상존한다. 관객은 해리스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아프간에서의 기억을 복기하고 있음을 다큐 내내 교차 편집되어서 등장하는 아프간 전투 화면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집에서도, 마트에서 장볼 때에도, 아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도 해리스의 내면에 수시로 침입하는(intrusive) 외상의 기억들은 마치 떼어낼 수 없는 망령 같다. 감독은 그렇게 해리스의 일상에서 전투의 기억으로 전환되는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기이한 효과음을 넣는다.


  대놓고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결코 조력자의 위치에 있지 않는 주둔지의 아프간 주민들의 모습은 미군들에게 탈레반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지휘관은 주민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이렇게 싸우는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 하지만, 냉랭한 표정의 현지인들은 미군이 와서 더 힘들다며 차라리 떠나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출구없는 긴 전쟁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쳐서 돌아왔다. 해리스는 살아남았지만, 그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버겁기만 하다. 부상의 후유증은 어쩌면 평생을 갈지도 모르고, 정신적인 고통도 그의 몫으로 남았다. 


  "결국 이렇게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나마 좋은 점 하나는 그 빌어먹을 전장터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해리스는 다큐 끝 무렵에 그렇게 독백한다. 그는 자기 전에 침대 옆에 총을 두는데, 언제든 침입자에 대비해서 쏠 준비를 해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의 곁에서 이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해리스는 과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다큐는 그 질문에 대해 해리스가 부상을 입은 실제 전투 장면을 마지막 장면에 넣음으로써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리스는 총을 맞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고 되뇌인다. 그렇게 지옥에서 귀환했건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독 Danfung Dennis는 이 다큐로 2011년 선댄스 영화제의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감독에 대해 자료를 찾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비디오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려서 CEO가 되었다. 물론 명시적으로는 사진 작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이전의 경력을 더이상 이어가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그의 원래 전공도 응용 경제학과 경영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며 사진과 다큐 작업을 했던 것은 한 시절의 경험으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이 다큐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어쩌면 'Hell and Back Again'의 해리스처럼, 그도 한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다큐라는 열정의 전장에서 냉엄한 현실로 귀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ilmmaker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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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화면 우측 상단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란 설명과 함께 '퍼스널 쇼퍼'란 제목이 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았다. 그래도 칸에서 상까지 주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나에게 매우 낯선 감독이다.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나 살펴보니, 필모그래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가 뜬다. 아, 이 영화... 우연히 보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린 영화였다. 줄리엣 비노쉬의 나이든 모습도 내게는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비노쉬는 얼마나 빛났던가.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늙어가는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 영화에서 나이든 비노쉬와 대비되는 젊은 여배우가 나왔었는데, 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게 유부남 감독하고 바람난 철없는 여배우로 각인되던 참이었다. 결국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여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나갈 것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다 어제 '퍼스널 쇼퍼(2016)'에서 스튜어트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모린 역을 맡아서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망해버린 영화를 심폐소생시켜서 다시 되살릴 정도로 좋은 연기다.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공허한 껍데기 같다.


  모린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얼마 전 잃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태에 있다. 영매(媒)였던 루이스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루이스의 집에서 심령체(ectoplasm, 죽은 영혼에서 발산되는 유동성 물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다. 그것이 루이스인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존재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느날 모린의 휴대폰으로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문자가 온다.


  "난 널 알아, 너도 날 알고."


  그때부터 그 'Unknown'과 문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모린. 그렇게 문자를 주고 받으며, 모린은 자신의 내면 안에 감춰진 욕망과 두려움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실 주목할 부분은 모린과 Unknown이 주고 받는 문자 대화들이다. 모린에게 끊임없이 각성과 관심을 요구하는 Unknown의 문자들은 마치 글로 뭉쳐진 공포의 덩어리 같다. 안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공포 영화의 가장 무서운 장면처럼 모린도 그 문자들의 공격에 강박적으로 매여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관객들은 모린이 목격한 심령체나 또는 허공에 떠있다 저절로 떨어져 깨지는 컵이 나오는 반복된 장면들 보다 더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모린은 자신의 고객인 키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 큰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균일하고, 툭툭 끊어지며, 여기저기 빈 구멍들이 나 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다 보고 난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도대체 칸에서 아사야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유가 뭘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양면성과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저 조잡하고 실없는 소리들의 나열(spooky hokum)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나는 후자의 편에 서겠다.


  물질과 영혼, 이승과 저승, 돈이 넘쳐나는 화려한 고용주와 그를 대신에 물건 사다 나르는 고용인 퍼스널 쇼퍼. 뭐 이렇게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탐구하는 한 인간의 내적 여정이라고 해야할지, 겉포장지는 그럴듯하다. 막상 뜯어본 상자 속에는 '커다란 벽돌' 하나가 터억 하고 놓여있어서 그렇지. 중고 거래에서 사기꾼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이 영화에서 오직 볼 것이라고는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밖에 없다. 지극히 예민하고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낸 이 여배우의 연기를 보았다는 것만이 이 영화에 대한 실망을 상쇄한다. 화려하고 매우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에도 결코 관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스튜어트에게서는 중성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어쩌면 영매로서의 재능을 루이스와 나누어 가진 모린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중간의 영역에 서있는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출연작들을 한번 살펴 보았다. 혹평을 받은 것도 있고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도 있다. 적어도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배우로서 가진 역량과 가능성을 관객에게 충분히 입증해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칸에서 받은 감독상을 전기톱으로 잘라서 절반은 스튜어트에게 주어야할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이 영화의 분열된 이미지와 의미들을 힘겹게 이끌고는 결국에 종착지에 이르게 만드는 이 여배우의 저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오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조만간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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