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부클래식 Boo Classics 43
조지 오웰 지음, 김설자 옮김 / 부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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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의 막장에 진짜 내려가본 작가가 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 그는 1936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북부의 탄광촌에 머물면서 그곳 광부들의 삶을 취재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쓴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이 책은 실질적인 탄광촌 취재기인 1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오웰의 생각을 담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오웰이 보여주는 피폐하고 비참한 탄광 노동자들의 삶과 열악한 노동 현장은 말그대로 뼈를 가르는 치열한 문장들로 열거되어 있다. 막장에 내려가 보고 나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육체 노동자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면 결코 육체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꼭 그래야 한다면 내가 해낼 수 있는 육체 노동이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쓸만한 도로 청소부나 비효율적인 정원사나, 형편없는 농장 노동자는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노력을 하고 훈련을 받는다 해도 나는 석탄 광부는 될 수 없다. 그 일은 나를 몇 주 안에 죽게 할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강도의 일을 매일매일 해내는 탄광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된 노동 여건을 견뎌낸다. 오웰은 최하층 노동자들이 그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질병과 가난에 길들여지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자세하고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작가의 실천적 신념에서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1부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하층 노동 계급의 삶의 단면이라면, 2부는 오웰이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펼쳐진다. 왜 사회주의인가? 그는 그 사상이 가난과 불평등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주의에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웰은 '사회주의는 믿지만, 사회주의자는 믿지 않는다'는 약간의 냉소주의와 거리감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가진 이상이 제대로 실현된다면 최선의 것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제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의 무모함과 결함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예측했던 것 같다. 이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인 샤르트르가 공산주의의 이상에 극도로 매몰된 나머지, 스탈린 집권기의 강제 수용소와 무장 혁명의 폭력성을 옹호한 것과는 대비된다. 1950년부터 1956년 사이에 소련의 편에 섰던 샤르트르는 소련이 1956년에 헝가리의 반소 자유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선다.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그 시기는 샤르트르의 인생에서 오점으로 남았다.


  진정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오웰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계급간에 존재하는 편견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로 다른 계급이 하나로 뭉치고, 그들을 이끌어갈 사회주의 정당이 정치적 세력을 얻어서 가난의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웰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글로써 투쟁했던 오웰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출신 배경을 가지고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오웰의 젊은 시절은 가난과 노동의 일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동물 농장'을 비롯해 독재권력이 감시하는 어두운 미래를 그린 '1984'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들은 인간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어하는 작가가 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아낌없이 별점 5개를 매긴다. 문학성과 시대정신이 온전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삶과 작품으로 입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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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영화사'란 과목은 뭔가 참 애매한 기억으로 남았다. 엄청 두꺼운 책을 교재로 썼는데, 글씨가 정말이지 깨알만 했다. 세계 각국의 오만가지 영화들을 모아놓은 잡동사니 책 같았다. 아, 물론 거기서도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사였다. 3학년 때 그 과목을 들었는데, 강사는 '400번의 구타(1959)' 같은 영화를 과제로 냈다. 이미 다 본 영화들이 줄구장창 나오는데다, 도무지 얻어들을 것이 없는 맥아리 없는 강의는 실망스러웠다. 그 과목이 아마 전공 필수였나, 억지로라도 들어야해서 더 짜증스러웠다. '400번의 구타' 대신 다른 영화를 과제로 써냈다가 학점 못받은 기억이 난다.


  그 수업에서 브라질 영화사 같은 건 다루지도 않았다. 한국 영화사를 비중있게 다루는 외국대학의 영화학과는 얼마나 될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리오 페이소토의 'Limite(1931)'를 얼마 전에 보고 나서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브라질이란 나라에는 어떤 영화 역사가 있는지에 대해서 찾아 보다가 'Vidas secas(1963)'가 눈에 들어왔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가 1938년에 그라실리아노 라모스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다. 이 감독은 브라질 영화사의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는 '시네마 노보(Cinema Novo)'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시네마 노보, 번역하면 '새로운 영화'쯤 되겠다. 기존 브라질 영화가 서구 자본에 의해 영혼 없는 오락물만 양산하고 있다고 느낀 영화인들이 좀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어 보자, 해서 일어난 영화 운동. 뼈대는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닮아있고, 곁가지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작가주의 정신을 덧붙인듯하다. 아무튼 'Vidas secas'는 시네마 노보의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제목을 직역하면 '메마른 삶'이 될 텐데,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황폐한 삶'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다른 제목 '보람없는 삶'으로도 나와있다. 어떤 제목이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하층민의 삶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러닝타임 1시간 43분.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완성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이야기는 '옛날 옛적 브라질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의 배경은 1941년, 먹고 살 것을 찾아 떠도는 일가족의 고통스런 생존기가 펼쳐진다. 탐욕스러운 대농장주, 부패한 경찰과 관료, 그들이 가혹하게 수탈하는 민중의 밑바닥 삶...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영화적 '재미'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 기대하면 안된다. 영화가 정치적 대의명분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이런 방식은 193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적 성취도 함께 이루어낸 것에 비해 'Vidas secas'는 그저 정치 선언적인 의미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 보기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영화 속의 'Baleia'라는 이름의 개였다. 영화의 도입부, 땡볕의 더위에 메마른 평야를 걷는 부부와 어린 두 아들이 있다.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그들을 활기차게 이끄는 것은 바로 '발레야'이다. 이 가족들에게 발레야는 둘도 없는 충견인 동시에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어렵게 도착한 마을의 집. 먹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발레야는 집 마당의 기니피그(꾸이, cui)를 잡아서 가져온다. 오랜 굶주림으로 키우던 앵무새조차 잡아먹은 가족에게 발레야는 식량도 조달한다.


  대농장주에게 푼돈을 받으며 소를 치게 된 가장 파비아노. 아이들은 양을 돌보는데, 발레야는 양몰이견으로도 활약한다. 외롭고 지친 아이에게 친구 노릇도 해주는 발레야는 진짜 자기 밥값을 해내고도 남는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발레야를 빼고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개는 영화 속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개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참 드문 경우다. 얼마나 싹싹하고 영리하며 활기가 넘치는지 모른다. 물론 영화 속 가족의 처절한 밑바닥 삶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Vidas secas'의 진정한 주인공은 발레야이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외국 논문에는 이 영화의 발레야와 가족의 관계를 라캉 이론을 적용해서 분석한 것도 있다. 라캉 이론에 개를 밀어넣다니, 참... 뭔가 아스트랄한 영화 평론의 세계를 목격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 영특하고 충실한 개 발레야는 영화 내내 가족의 삶과 함께 한다. 그러다 발레야가 병이 드는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가족은 발레야를 버린다. 그냥 두고 가는 게 아니라 안락사 시킨다. 아이들은 아빠가 개를 죽일 것이라는 알고 공포와 슬픔에 휩싸인다. 발레야도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다.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인을 안내한다. 마치 자신이 죽을 곳을 정하는 것 같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기다리는 발레야. 마침내 총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이내 곧 가족은 그곳을 떠난다.


  발레야는 절뚝거리면서 집 앞 마당에 자리잡는다. 발레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쇼트가 이어진다. 죽어가는 발레야는 가족들이 살던 집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마당에는 발레야가 가족들을 위해 잡았던 꾸이들이 몰려다닌다. 그 꾸이들을 잡아다 줄 가족은 이미 먼 길을 떠났다. 꾸이들을 바라보면서 발레야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을까? 이런 삶은 정말 짐승과 다름없어."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태양 아래 길을 떠나게 된 여자는 남편에게 한탄한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한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 거 같아."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걷는 일가족이 사라질 때까지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짐승처럼 사는 삶. 일가족은 자신들에게 충심을 다했던 개를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그 지옥과 같은 삶을 그나마 온기있는 인간의 삶으로 만든 것은 '발레야' 덕분이었음에도... 


  개의 죽음은 그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영화학도, 영화광, 그리고 개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 정도나 될까... 발레야가 어떤 견종인지 찾아보았다. 브라질리언 테리어(Brazilian Terrier)이다.



*사진 출처: revistapesquisa.fape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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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막장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한때 잘나가던 연극배우로 엄청나게 큰 돈을 모았으나, 지독한 수전노가 되어서 가족들의 원망을 듣고 있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연극 배우에게 반해서 결혼했으나, 출산 후유증 때문에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다. 첫째 아들은 술고래에 주색잡기로 인생을 망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선원으로 떠돌아다니다 폐결핵을 얻어 돌아왔다. 술에 취한 첫째 아들은 부모를 노랭이, 약쟁이로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 4명의 가족이 여름 별장에서 보낸 하루 동안의 이야기, 바로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TV와 연극 연출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시드니 루멧의 첫 영화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이었다. 배심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이야기를 다룬 그 작품은 매우 성공적인 데뷔작이었다. 인물과 공간을 다루는 그의 솜씨가 연극 연출에서 기인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밤으로의 긴 여로(1962)'를 비롯해 '갈매기(The Sea Gull, 1968)', '에쿠우스(Equus, 1977)' 만듦으로써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장 찬사를 받은, 주목할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캐서린 햅번은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랄프 리처드슨과 제임스 로바즈, 딘 스톡웰은 공동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들의 불꽃튀는 연기대결뿐만 아니라, 루멧의 연출과 영화적 감각도 눈부시게 빛난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자신이 사후 25년 동안 출판과 공연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오닐이 사망한 후 3년 뒤인 1956년에 출판이 되었고, 루멧은 1962년에 희곡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50분에 이른다. 뒤틀리고 어긋난 티론 일가의 고통스런 애증의 관계가 처절하게 펼쳐지는데, 루멧은 그것을 결코 단조로운 화면에 담지 않았다. 다양한 쇼트들, 카메라의 위치를 바닥에 둔 쇼트들부터 미디엄, 롱 쇼트, 그리고 여러대의 크레인(crane)을 사용한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카메라 렌즈도 장면에 따라 광각렌즈(wide-angle lens)와 장초점 렌즈(long-focus lens)를 사용해서 복잡한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주로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장면들을 카메라가 매우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단순히 연극 공연을 찍듯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루멧은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그런 몰이해에 굉장히 분노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학도에게 더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영화를 분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적인 것'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메리 티론을 연기한 캐서린 햅번은 불안과 회한, 원망이 뒤엉킨 약물 중독자의 모습을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다. 가난에 대한 상처와 배우로서 좌절된 경력을 지닌 제임스 티론 역은 랄프 리처드슨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는 다소 '연극적'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과장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첫째 아들 제이미 역의 제임스 로바즈의 연기도 뛰어나다.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 공연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나는 막내 에드먼드 역을 맡은 딘 스톡웰의 연기가 가장 좋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생산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쟁쟁한 연기 경력의 대선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스톡웰의 강단있는 연기는 그가 칸 영화제 공동 남우 주연상을 받기에 충분했음을 입증한다.


  이 영화의 음악은 앙드레 프레빈이 맡았다. 날카롭고 음울한 음악이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영화 중간 중간 들어가는 피아노 음악은 장면의 전환를 알리는 역할도 한다. 프레빈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명성이 드높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클래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재즈 애호가들에게 프레빈은 뛰어난 재즈 피아니스트로 기억된다. 클래식 음악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재즈 음악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음에도 그가 남긴 재주 음반들은 상당하다. 그의 재즈 연주를 듣다 보면 프레빈은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클래식의 심장과 재즈의 심장, 그런 재능을 가진 이는 아마도 그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우디 앨런의 아내 순이 프레빈은 그가 미아 패로와 결혼 기간 중에 입양한 딸이다.


  영화 속 4명의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들추고 과거를 헤집는 모습은 마치 전갈들이 독침으로 적을 찌르며 하이에나가 시체를 물어뜯는 것을 연상케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티론 일가의 오래된 곪은 상처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밤 속에서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막장 가족의 처절한 비극 밑바닥에 혈연의 뜨거운 피와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밤으로부터의 긴 여로'는 피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드리운 고통과 슬픔의 뿌리를 들여다 보게 만든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이어진 그 내력, 그것이 주는 빛과 어두움, 환희와 절망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들리는 고동 소리는 무적(霧笛), 안개가 끼었을 때 선박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나 등대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별장이 자리한 곳은 동부 코네티컷 해안가로 안개가 수시로 끼는 곳이다. 4명의 인물들은 과거의 상처라는 안개 속에 갇혀서 삶의 방향성을 상실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적 소리를 들으며 배들은 충돌을 피할 수 있지만, 티론 일가의 사람들은 서로를 들이받으며 고통스럽게 침몰한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메리는 모르핀에, 가장 제임스와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술에 중독되어 있다. 이 안개 속의 가족을 시드니 루멧은 흑백의 화면 속에 정교하고 밀도있게 담아낸다.



*영화를 보기 전에 희곡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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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내멋대로 살아왔어.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 대학도 다니다 때려쳤거든. 그러다 '누리'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알게 되었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쿠르드족 출신 전직 마약상. 직업이 좀 그렇지? 그런데, 난 괜찮았어.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구. 남자는 새출발하려고 감옥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어. 뭔가 의지가 있어 보였지. 결혼식장은 교도소 안이었어. 장소 따위가 중요한가? 어쨌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냐? 난 그렇게 생각했어.

  곧 아이가 생겼어. '로코'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착하디 착한 아들. 이제 6살이 된 그 아이는 한 번도 내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없어.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잊을 수 있었어. 내게도 온전히 나만의 것,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내 것이 생긴 거야. 남편도 마음잡고 착실히 잘 살아주었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때론 그런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일은 드무니까. 
 
  그날도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지. 친구와 만나고 남편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다 막혀있었어. 경찰차와 경찰들이 그득한 거야. 폭발 사고가 있었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어. 그때 직감했어. 불안하게 이어지던 내 행복이 끝났다는 것을. 경찰이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더군. 못으로 만든 사제 폭탄이 온몸을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다는 걸, 나중에 재판정에서 들었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죽는 것도 쉽지가 않아. 눈을 떠보니 살아 있었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누리와 로코는 왜 죽어야 했지? 경찰은 동유럽 마피아 짓이래. 웃겨, 미리 범인을 다 정해놓은 거 같아. 그날, 로코를 누리에게 데려다 주고 나오는데 백인 여자 하나를 길에서 만났었지. 새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고 어딜 가려고 했어. 도난당할 수 있으니 자물쇠를 채우라고 알려줬지. 좀 이상하게 보였어. 거긴 이민자들이 사는 곳인데, 저런 백인 여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했어. 그 여자,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어. 분명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야.

  변호사가 용의자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려줬어. 죽지 않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 그 짐승같은 것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길바닥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지. 내 짐작이 맞았어. 새 자전거에 실었던 건 폭탄이었어. 백인 여자와 그 남편이 저지른 짓이었어. 쓰레기 같은 나치 추종자들.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것들의 면상을 죄다 칼로 긁어버리고 싶었지. 나는 참고 또 참았어.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 편이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가. 집에서 나온 마약을 가지고 날 마약중독자로 몰아가고 있어. 여자를 봤다는 내 증언은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악마같은 것들의 변호사 놈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더 몰아붙였고, 난 결국 법정에서 그 짐승들에게 욕을 퍼붓고 말았어. 견딜 수가 없었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질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어. 그 악마들이 사건 당시 그리스에 휴가차 있었다는 증언을 그리스 숙박 업자가 했고, 그게 먹혔어. 웃으면서 그것들은 법정을 떠날 수 있었지.

  항소를 하자고 변호사한테서 자꾸 연락이 와. 항소? 그런 게 의미있어? 난 이길 수 없을 거야.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어. 사제 폭탄을 만드는 법을 찾아봤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로코의 찢겨나간 부드러운 살과 혈관들을 떠올려 봤어. 그것들도 그렇게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모든 걸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거야. 어쩌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 그리스, 거기에 그 나치 패거리들이 있어. 그 더러운 것들이 도피 여행을 떠났더군.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로코를 위해서, 누리를 위해서. 목숨값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줄 참이야.

  결국 난 그 악마들을 찾았어. 그리스 파시스트 놈한테 붙잡힐 뻔 했지만 용케 빠져나왔지. 해변가 캠핑카에 그 짐승들이 숨어있더군. 멀쩡히 잘 살아있었어. 매일 건강을 위해 해변을 달리더군. 난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폭탄은 완벽하게 준비됐어. 그런데, 좀 무섭고 떨려. 왜 그럴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쉬울 리가 없잖아. 그것들이 없는 사이 차 밑에 폭탄을 넣어두었어. 그대로 돌아서서 오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근처 나무에 새 둥지가 있었거든. 아기새를 어미새가 보듬고 있었어. 폭탄이 터지면 새들도 죽겠지.

  해낼 수 있을까? 로코와 누리를 생각해야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구. 저 미친 쓰레기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난 죽은 거나 다름없어. 난 해야할 일을 할 뿐이야. 되돌려 주는 거지. 내 소중한 모든 걸 앗아간 악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거야.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끝내야 해...


  파티흐 아킨의 2017년작 '심판(Aus dem Nichts, In the Fade)'의 주인공 카티야의 이야기다. 이 글에서 카티야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티야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카티야 역을 맡은 다이앤 크루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에게 있어 영혼을 불사르는 '인생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찾아볼 법 하다. 내 생각에 다이앤 크루거가 앞으로 어떤 배역의 연기를 하든 이 영화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카티야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 'Aus dem Nichts'의 뜻은 '무
()로부터'이다. 영어 제목 'In the Fade'의 의미가 더 명징하게 다가온다. 소멸, 사라짐의 의미이다. 



*사진 출처: cinema.de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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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 솔로(Free Solo, 2018)', 장비 없이 맨몸으로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 알렉스 호놀드의 엘 케피탄(El Capitan) 도전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 다큐를 보면서 받았던 나름의 충격과 감정의 여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문자 그대로 백척간두(竿頭)의 삶을 사는 그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등반 도중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치명적인 부상 내지는 사망으로 이어지는 그 도전의 여정. 열정인가, 목숨을 건 도박인가, 보는 내내 들었던 여러 생각들은 다큐가 끝나고서도 머릿속에 헝클어진채 있다.


  호주 출신 제니퍼 피돔 감독의 2017년 다큐 'Mountain'에는 알렉스 호놀드 같은 이들이 떼로 나온다(그도 다큐의 초반부에 잠깐 나온다). 자신들을 뒤따르는 엄청난 눈사태 속에서 스키 타는 이들, 윙슈트(wingsuit)입고 협곡 사이를 날아다니는 사람들, 수직 절벽에서 산악 자전거로 낙하하는 이들, 절벽 사이를 연결한 외줄을 타는 사람... 그냥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Mountain'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에 바치는 영상 찬가이다. '찬가'라는 표현에 걸맞게 음악을 담당한 호주 체임버 오케스트라(ACO)의 연주가 정말 빼어나다.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겨울'이 설산을 내려오는 보더와 스키어들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흐른다. 300년 전의 이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이 산을 주제로 한 다큐에 이토록 아름답게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내레이션을 맡은 이는 배우 윌렘 데포. 영상과 음악이 주가 되는 다큐라서 해설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차분하고도 또렷한 발성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배우는 얼굴 이전에 목소리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와 오케스트라는 촬영된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현장 녹음을 했다. 다큐 도입부에 그 장면이 나온다. 내레이션과 음악의 역동적인 조화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다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의 풍경만을 담지는 않는다. 흑백 영상 자료 화면을 통해 산이 외경의 대상에서 어떻게 모험과 스포츠의 현장이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본다. 드론을 비롯해 다양한 첨단 촬영 기기로 담아낸 기기묘묘한 산의 절경들이 74분 동안 펼쳐진다. 다큐 내내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감독 제니퍼 피돔의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2015년에 찍은 다큐 'Sherpa'도 역시 산과 그 사람들에 대한 다큐다. 이 감독에게 산이란 어쩌면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평온과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불편해하며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갈구한다. 'Mountain'에 나오는 극한의 모험가들이 그런 이들일 것이다.


  "춤을 추는 이들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다큐의 시작에 그 문장이 나온다. 과연 'Mountain'의 그 많은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까? 이에 대해 뇌과학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아드레날린, 도파민과 같은 물질의 폭주하는 연쇄작용은 육체적, 정신적 쾌감의 중독을 가져온다. 이른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는 이들은 그 반응의 역치(threshold)가 일반인에 비해 높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그 연구 결과를 들은 것이 30년 전 일이다. 이제 뇌과학은 세포와 물질의 차원에서 유전자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러니 이 다큐에 나온 이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에 따라 사는 이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가, 온갖 부상과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등산복의 그 유명한 '북벽' N사의 로고를 발견했다. 어쩐지 다큐에 나오는 등반가들 옷에서 그 상표가 눈에 참 많이 띄었다. 그러고 보니, '프리 솔로'의 알렉스 호놀드도 다큐 내내 그 회사 옷을 입고 나왔었더랬다. 뭐랄까, 이 산악 계통 영화나 다큐 제작에 있어서 'N'사는 꽤나 큰손인 모양이다. 보고나서 기묘하게 씁쓸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하긴 무슨 일이든 돈이 있어야 굴러간다. 어떻게 보면 영화도 외피는 예술의 형태를 띄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은 처절하고 치열한 자본의 세계임을 이 산악 다큐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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