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별이 보이는 창가 (푸른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영화글은 구글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블로그 주소:https://sirius1001.blogspot.com/</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9 Sep 2026 05:47:34 +0900</lastBuildDate><image><title>푸른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4128919332979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푸른별</description></image><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배롱나무꽃이 질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516156</link><pubDate>Mon, 14 Sep 2026 18: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516156</guid><description><![CDATA[&nbsp; 배롱나무꽃이 질 때<br><br><br>1. <br><br>&nbsp; 엊그제는 동시 공모전에 낼 시들을 골라서 응모했다. 그 공모전은 온라인 응모라서 참으로 편했다. 10편을 내는 것이었는데, 내고 보니 맨 처음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제출한 원고의 변경이 쉽지가 않았다. 변경 과정에서 자꾸 오류가 나서, 그냥 제출을 취소하고 다시 접수했다. '어차피 안될 것이다'와 '어쩌면 뽑힐지도 모른다' 사이에서 어쨌든 동시 원고를 냈다.<br><br>&nbsp; 동시를 쓰면서, 나는 가상의 독자를 상정하기보다는 그냥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느낌으로 써나갔다. 그것이 의외로 편했다. 글을 쓰는 작업이 작가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고 즐겁지 않다면, 글쓰기는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버려진 시간처럼 느껴졌던 2년 동안의 시 습작 기간이 도움이 되었다. 시 속에 화자를 설정하는 것,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이런 것들이 동시를 쓰면서 다시금 되살아났기 때문이다.<br><br>&nbsp; 이번 주에는 지난달에 응모했던 동화 공모전의 결과 발표가 있다. 그냥 장려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또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발표가 나는 날에도 아마 동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50편을 내야 하는 동시집 원고는 이제 9편을 채웠다. 어떻게든 써내지 않을까 싶다. 자꾸만 머리 복잡하게 이걸 왜 하나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금은 동시를 써야 할 때인가 보다, 하고 쓰고 있다. <br><br><br>2. <br><br>&nbsp; 지난주에는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고, 에어컨에 커버를 씌웠다. 올해도 덥기는 했지만 의외로 여름이 선선히 물러선 느낌이다. 작년에는 지독한 늦더위로 9월 말까지 에어컨을 켰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남은 것은 선풍기 2대, 그건 아직은 낮이 더우니까 좀 더 있다 들여놓을 생각이다. 선풍기 가운데 한 대는 15년 된 것인데, 목 부분이 부러져서 스카치테이프로 칭칭 감아두었다. 그 모양새가 참으로 볼품없다. 하지만 모터가 멀쩡히 돌아가는데, 버리는 것도 아까워서 쓰고 있다. 고장 나면 버려야지 싶지만, 고장이 나질 않는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죄다 중국산 일색인 소형 가전제품이 국산이었던 시절은 참으로 만듦새가 좋았다.<br><br>&nbsp; 오늘은 마음먹고 생두를 볶았다. 원두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다시 커피를 볶아서 먹기로 했다. 오늘처럼 날이 선선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 로스팅하기에 좋은 날이다. 이건 할 때마다 그냥 사먹는 게 낫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엄청난 연기와 가스불의 열기, 한 이틀은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미친 듯한 커피 냄새 때문이다. 다시 원두를 사는 것은 오늘 볶아놓은 1kg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br><br><br>3. <br><br>&nbsp; 옆 단지 아파트에는 멋진 배롱나무들이 있다. 여름 동안 그 나무의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보러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나서 꽃들을 보러 갔다. 한창 고왔던 때의 꽃들은 지고, 이제는 빛바랜 배롱나무꽃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그것이라도 보았으면 되었다, 고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또 여름을 보낸다. <br><br>&nbsp; <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동시, 오초완</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501207</link><pubDate>Mon, 07 Sep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501207</guid><description><![CDATA[&nbsp; 동시, 오초완<br><br><br>1. <br><br>&nbsp; 9월 말일이 마감인 동시 공모전은 써내야 할 응모 편수가 10편이다. 공모전 공고를 본 것은 8월이 끝나갈 무렵.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채우나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동시를 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루에 2편을 쓰는 날도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10편을 채우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좀 더 써서 나중에 동시집으로 묶으면 어떨까 하는. 물론 그냥 시집도 잘 안 팔리는 판국에 동시를 누가 얼마나 사서 볼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동화는 나름의 시장성이 있어서 동시보다는 낫다. 큰 상금이 걸린 동화 공모전도 여럿 있다. 그게 다 시장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nbsp; <br><br>&nbsp; 집에서 굴러다니는 동시집 몇 권을 읽다가, '참 재미없네' 하고는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저런 동시는 쓰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을 주는 책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동시가 재미있어야 하나? 밝고 희망을 주는 그런 메시지만을 아이에게 주어야 하나?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br><br>&nbsp; 처음 쓰기 시작한 동시는 짐짓, '너희들, 세상의 밝은 면을 보아라' 하고 조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써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시를 쓰는 것이 싫어졌다. 점점 내가 쓰는 동시에는 삐딱하고, 외롭고, 괴로운 아이의 목소리가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매우 솔직한 동시라고 생각했다. 물론 솔직함이 재미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대중성과는 더 멀어지고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nbsp;&nbsp; <br><br><br>2. <br><br>&nbsp; 원래 목표는 동시는 그냥 써보고, 동화 부문에 응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동시를 쓰다 보니, 소설 쓰기로의 전환이 되질 않는다. 2년 동안 시를 쓸 때도 그랬는데, 압축하면서 좁게 들어가는 시를 쓰는 동안에는 일반적인 산문 쓰기가 잘 되질 않았다. 반대로, 서사를 확장하고 풀어서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시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는 건 양립 불가능한 작업 같다. 그러니 지금 동화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br><br>&nbsp; 이 와중에 동시집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50편의 동시를 써서 내야 한다. 기한은 10월 31일까지. 요즘 동시를 하루에 2편을 쓸 때도 있으니까, 어떻게 규칙적으로 매일 써낸다면 마감일에 맞춰서 원고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써내는 것이 맞는지,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쪽, 그러니까 아동문학 분야도 나름대로 준비하는 지망생들이 많을 것이고 내봤자 안될 거 같기도 하다. 뭔가 김수영 문학상에 2년 동안 시 써서 보냈다가 떨어진 그때의 기분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듯도 하다.<br><br>&nbsp; 이것이 된다,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공모전에 글을 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는 감정의 파고를 겪는다. 오늘, 문학 커뮤니티에서 읽은 우스갯소리는 이랬다. '글 잘쓰는 사람의 사주에는 반드시 문곡귀인(文曲貴人)이 있는데, 내 사주에는 그것이 있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문곡귀인이란 글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는 명운인 모양이었다. 지망생이 여북 답답하면 그런 것에나 의지할까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요새 드는 생각은 인생의 7할, 아니 8할 정도는 그냥 운의 영역 같다. 나머지 2할은 재능이나 노력이 마구 욱여지는 무언가일 테고. <br><br>&nbsp; <br>3. <br><br>&nbsp; 어떤 사람이 문학 커뮤니티에 자기 기록처럼 '오초완'이라고 올리는 것을 보았다. '오초완'이 뭐지? 하고 궁금해하다가 나중에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초고(草稿) 완료'의 줄임말이었다. 무슨 소설을 어떻게 써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투지 하나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글쓰기는 시간과 체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의 매일 '오초완'이라고 써낼 정도라면, 습작의 여건이 괜찮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br><br>&nbsp; 위층에서는 보름째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집안을 깨부술 듯 울리는 소음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 앞 놀이터에서는 선선해진 날씨에 아이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논다.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저녁이나 되어서이다. 오늘도 동시 한 편을 써냈다. 새롭게 동시집 공모전에 낼 시를 세어 나간다. 50-1. 49편이 남았다. 그걸 써낼 수 있을지는 지금은 모른다. 10월 말일까지 매일 '동시, 오초완'을 해내다 보면 가능할지도. 이건 마치 실수로 잘못 탄 기차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같다. 나는 이 기차의 종착역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지금은 기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다.&nbsp;&nbsp;&nbsp; <br><br>&nbsp; <br><br><br><br>&nbsp;<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흐르는 시간 속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81241</link><pubDate>Sun, 30 Aug 2026 20: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81241</guid><description><![CDATA[<br>흐르는 시간 속에서<br><br><br>1.<br><br>&nbsp; "오늘 이를 다섯 개나 뺐어. 지금 얼굴 모양새가 말이 아냐. 내가 밖에 다닐 수가 없다고."<br><br>&nbsp; 전화기 너머, 할머니의 목소리는 슬프고 기운이 없게 들렸다. 이제 구십이 다 된 친척 할머니의 치아는 수명이 다한 모양이다. 늙음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틀니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나이에도, 할머니는 자신의 치아를 보내버린 것이 서러울 따름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그 나이가 된다면 남아 있을 치아는 몇 개가 될까를 가만히 가늠해 본다.<br><br>&nbsp; "어머니는 암 투병을 열심히 하시다가, 지난달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br><br>&nbsp; 그렇게 세상을 뜬 이는 솜씨가 좋은 요리 블로거였다. 나는 가끔 들러서 그의 레시피를 메모하곤 했다. 블로그의 주인이 암이 발병한 것을 알아챈 것은 작년 여름, 병기(病期)가 말기에 가까워서 항암 치료가 힘들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랬는데 결국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궂긴 소식을 듣고 말았다. 내 나이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절(夭折)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나이. 이르게 가긴 했지만, 절절히 안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나이. 뭔가 어정쩡한 나이. 나는 다른 이의 죽음에서 내가 서있는 삶의 자리를 바라본다.<br><br><br>2. <br><br>&nbsp; 작년 이맘때에 무얼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니, 김수영 문학상에 응모할 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공모전이라는 게, 한 명만 뽑히고 나머지는 버려지는 것이니까 어떤 면에서 내가 쓴 시들은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고 매달린 시간이 2년이었다. 김수영 문학상의 작년 응모자 수는 역대 최대인 359명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시집으로 시를 묶어 응모한 그 359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하나의 시집을 완결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제 시는 그만 써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br><br>&nbsp; 그러던 것이 요즘은 동시를 쓰고 있다. 올해 단편 소설을 낼 수 있는 공모전은 끝났고, 어떻게 찾다 보니 남은 것이 아동문학 공모전이었다. 아이들은 미래에 내 글의 독자가 될 수도 있다. 뭔가를 쓰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그래서 조금씩 써 내려가는 작업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써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다시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동시를 쓰는 건,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동시든 동화든, 아동문학을 하는 이들은 그런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작업 자체가 일종의 해방감, 치유의 느낌을 주었다.<br><br>&nbsp; 결국 문학 치료라는 심리학적 치료 방법도 문학의 그런 기능에 기대어 나온 것이다. 문맹인 할머니들이 글을 배워서 자기 삶을 시나 산문으로 풀어서 써내는 것. 트라우마를 가진 개인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다 그러한 범주에 속해 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새삼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해서 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헝클어져 있을 때, 일기를 쓰다 보면 정리가 되곤 했다. 시를 쓰는 것, 소설을 쓰는 것도 다 그 고요해지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br><br>&nbsp; 그러니 작년에 뽑히지 못한 50편의 내 시들이 실패한 시들이라고만 할 수 없다. 2년 동안 그 시들을 써내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 언어와 감정을 응축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소설로 서사를 확장할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실패한 작업, 쓸모없는 일로 단정하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러한 일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건 나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br><br>&nbsp; "우리 인생에 있었던 과거의 일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늘 움직이는 것이죠."<br><br>&nbsp; 주역을 연구하는 역학자 강기진의 유튜브 강의를 보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역동성을 지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 현재가 지닌 의미도 바뀔 수 있다. <br><br><br>3. <br><br>&nbsp; 어린 시절의 책장에는 계몽사의 10권짜리 백과사전이 있었다. 붉은색의 두꺼운 장정(裝幀)으로 된 그 백과사전은 꽤 비싼 물건이었다. 그 시절의 아이에게 백과사전이란 첨단의 지식과 만나는 어찌 보면 유일한 통로였다. '브리태니커'라는 이름의 백과사전을 들었던 것은 아주 한참 뒤, 나의 유년 시절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때였다. 나는 부들부들한 고급 종이로 된 백과사전을 심심하면 들춰보곤 했다. 거기에는 '지구의 최후'였나, 우주와 관련된 항목도 있었다. <br><br>&nbsp; '수명이 다해서 백색왜성으로 변한 태양은 지구를 삼켜버릴 것입니다.'<br><br>&nbsp; 아직도 그 부분의 삽화가 기억이 난다. 허여멀겋게 변한 태양이 흰색의 팔과 같은 띠로 지구를 휘감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지구의 운명이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했다. 뭔가 비감한 느낌에 약간의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로 지구가 사라질까? 정말로? 아이는 스스로에게 혼자 그렇게 물었다.<br><br>&nbsp; 언젠가 소멸하게 될 지구처럼,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다. 언젠가 나도 수명이 다한 치아를 생각하며 서글퍼할 것이고, 그러다가 눈이 떠지지 않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도 마음에 떠도는 시를 붙잡는다. 흐르는 시간 속, 스러지는 모든 것들이 내쉬는 숨을 그렇게 글 속에 담는다.&nbsp;&nbsp;&nbsp;&nbsp;&nbsp;&nbsp; <br><br><br>&nbsp;<br><br><br><br><br><br><br>&nbsp;&nbsp; <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무엇을 쓸 것인가 - 어떤 독서의 시대와 글쓰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64291</link><pubDate>Fri, 21 Aug 2026 20: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64291</guid><description><![CDATA[ &nbsp;무엇을 쓸 것인가 - 어떤 독서의 시대와 글쓰기<br><br><br>1.<br><br>&nbsp; 올해 초,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들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화가 분명한 문장에 그 어디에서도 큰따옴표(" ")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나열된 문장 속에서 이것이 대화이겠거니 하면서 소설들을 읽어 내려갔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소설들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요새는 이렇게 소설을 쓰나 보군. 인물들의 말과 생각은 문장들 속에서 정처 없이 떠내려가며 유랑하고 있었다. 그걸 제대로 정렬해 내는 것은 오직 독자의 몫이었다. <br><br>&nbsp; 불친절하군, 참으로 불친절해.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말을 자꾸만 되뇌었다. 도대체 이딴 유행은 누가 만든 것이며, 왜 그런 소설들을 써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독자에 대한 철저한 기만과 무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옴표의 사용은 독자의 이해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없애고 그냥 평서문으로 기술된 문장들 속에서 독자에게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 묘사를 온전히 구분해 내라고? 왜 독자가 그래야만 하는가? 우린 이렇게 쓸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은 어떻게든 읽으라고. 나에게 따옴표 없는 그 소설들은 거만한 선언처럼 들렸다.<br><br>&nbsp; 불친절한 것은 삭제된 따옴표뿐만이 아니었다. 서사가 실종된 소설에는 미문과 분위기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원룸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이웃집 할머니와 소통하며 코코아나 마시는 소설들. 이제까지 내가 아는 소설이란 인물과 사건, 주제가 있는 명확한 세계였다. 그런데 이제 그 세계는 흐릿해져서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물체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작금의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그러한 혼란스러움은 내가 살아온 시대와 문학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br><br><br>2. <br><br>&nbsp; 1980년대의 문학이란 사회변혁과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와도 같았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5)'은 그 당시의 나에게 약간은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독서 체험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분위기가 무거웠다는 뜻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운동권의 후일담 문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개인성에 대한 자각은 분명 이전 시대의 거대 담론에 포획된 개인과는 달랐다. 정치적 민주화는 사회와 대결했던 개인이 비로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br><br>&nbsp; 개인의 부상(浮上).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의 IMF 외환위기였다. 외세에 떠밀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과 경기침체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신경숙의 '외딴방(1995)'을 흔들리는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 소설에는 상처받은 개인이 과거를 반추하며 만들어내는 나름의 울림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신경숙은 그 시대를 통과하는 문학적 티켓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티켓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버려졌다. 신경숙이 다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표절'이라는 치명적 오점보다도, 지금의 독자들이 더는 그의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br><br>&nbsp; 그 독자들이란 다름 아닌 20대와 30대의 여성 독자들이다. 쪼그라든 순문학 시장에서 여성 독자들은 쓰러진 집의 유일한 버팀목처럼 남아 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소설을 써내는 것은 잘 알려진 생존의 비결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이 보여준 성공은 얄팍한 문학적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소설이 있는데, 양귀자의 '모순(1998)'이다. 양귀자는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1987)'을 통해 자신이 그려낸 주변부 세계에서 탈출했다. 작가는 이제 부촌인 평창동의 주민이 되었다. 그런 양귀자의 소설 '모순'이 보여주는 저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그리고 그 책은 2000년대의 여성 독자들을 지나, 지금은 책이 출간된 시기에 태어난 여성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모순'은 젊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사랑과 연애, 결혼을 이야기한다. <br><br>&nbsp; 양귀자에게는 먼 훗날 자신의 독자를 예견하는 선구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모순'을 읽는 젊은 여성의 책상 위에는 요새 잘 나간다는 시인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2023)'도 있을 것이다. 2026년에도 1955년생 작가의 책은 1997년생 시인의 시집에 밀리지 않는다. 내게는 이 기묘한 조화가 꽤나 경박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한국 문학은 이제 우리 사회의 부조리, 계층적 불평등을 말하는 대신에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앞세우고 그것에 함입(陷入)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nbsp;&nbsp;&nbsp; <br><br>&nbsp; 물론 그러한 흐름에서 비켜선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편혜영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2007)'가 보여준 중산층의 서늘하고도 허무한 초상을 기억한다. 편혜영은 매우 영리하게 계층적 서사와 여성의 이야기를 직조해 나갔다. 편혜영이라고 그늘이 없지는 않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몬순(2014)'의 표절 의혹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편혜영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공모전의 심사 위원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고갈된 창작력의 대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br><br>&nbsp; 김애란을 빼놓는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 될 것이다.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2012)'을 통해 동시대를 통과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고 폭넓은 서사로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유쾌하지만 부박(浮薄)하지 않고, 때론 서글프게 떠돈다. 어떤 면에서 김애란은 한국의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나에게 김애란은 단편에 최적화된 작가이다. 이 작가에게 장편은 어쩐지 잘 맞지 않는 어색한 옷 같다.<br><br>&nbsp;&nbsp;&nbsp;&nbsp; <br>3. <br><br>&nbsp; 결국 내게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 시대에 한국에서 소설을 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류 서사는 여성 서사, 주변부의 서사는 성 소수자와 외국인 이야기가 자리 잡았다. 최근에 내가 흥미 있게 들은 단편 소설의 아이디어는 이주 여성(移住女性)의 서사였다. 글을 쓴 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그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소재를 그러모았다. 그저 그런 일상적 이야기, 주제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br><br>&nbsp; 내가 아는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EBS의 프로그램 '다문화 고부 열전'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 그런 나와는 달리, 글을 쓴 이는 진짜 현실에서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그러한 현실성은 그저 이야기로 들었을 뿐인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려면, 기자 출신의 작가 장강명처럼 취재를 열심히 하든가 아니면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해야 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방구석의 모니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서도 남는 문제는 있다. 나는 어떤 관점으로 쓸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br><br>&nbsp; 그 관점이란 어떤 면에서 글을 쓰는 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생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시대를 견디었고, 살아내었다. 그리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다.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그 관점, 가치관,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써내려고 하고, 써내는 중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단편 소설을, 지난 한 달 동안에는 SF 단편과 동시, 동화를 써서 공모전에 냈다. 그 이야기가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br><br><br><br><br><br><br><br> <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까다로운 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51078</link><pubDate>Fri, 14 Aug 2026 20: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51078</guid><description><![CDATA[<br>까다로운 일<br><br>&nbsp; 1. <br><br>&nbsp; "정말로 종양을 이해하려면, 나 자신이 종양이 되어야 해요."<br><br>&nbsp; 바바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 미국의 유전학자로 198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br><br><br>2. <br><br>&nbsp; 8살 아이는 5살 때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 3년 동안, 기억 도서관에서 대출한 엄마의 기억 칩이 아이의 로봇에 장착된다. 마침내 기억 칩의 대출 기간이 끝난다. 기억 칩은 반드시 반납해야만 한다. 아이는 엄마의 기억 칩을 반납하러 기억 도서관으로 떠난다. 아빠와 함께 떠난 짧은 하루의 여행. 아이는 엄마와 두 번째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br><br>&nbsp; 어제, 동화 공모전에 내기로 한 동화를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SF로 써내느라 좀 골머리를 앓았다. 일반 단편 소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에 어떻게든 세계관을 욱여넣으려니, 퇴고하는 내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동화를 쓰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주인공인 8살 어린아이의 심정을 이해해 보는 것은 여느 단편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또 달랐다.<br><br>&nbsp; "그게 쉽지가 않아. 까다롭다고. 아주 까다로워."<br><br>&nbsp; 오래전, 다큐멘터리 감독님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나는 다큐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감독님은 촬영 대상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고 답했다. 영화는 시나리오에 적합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되지만, 다큐는 다르다. 찍으려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 다큐멘터리의 동물이든 그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시간이 걸린다. 언젠가 북극곰에 대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촬영 감독은 곰들을 찍기 위해 3개월이었나, 아무튼 몇 개월 동안 카메라를 세워두고 바라보기만 했다고 메이킹 필름에서 말했다.&nbsp;&nbsp;&nbsp; <br><br>&nbsp; 나는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8살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라는 정도로는 글을 써낼 수가 없었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말처럼, 종양을 이해하려면 종양이 되어야 하듯 나도 8살 아이가 되고자 했다. 그게 쉬웠을 리가 없다. 나는 내가 8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떠올려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 엄마는 다홍색의 재킷 윗주머니에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달아주었다. 입학 첫날의 수업도 생각이 난다. 흰색의 도화지 연습장에다 색연필로 구불구불한 곡선과 뾰족뾰족한 직선을 그렸었다. 참으로 8살 아이에게는 빡센 입학식 날이었다.<br><br>&nbsp; 그런데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심지어 담임 선생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성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매우 파편적으로 남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장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뇌의 가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 뇌는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별로 필요하지 않은 유년의 기억을 과감히 삭제한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서 어린아이의 생각과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다.<br><br>&nbsp; 아마도 많은 동화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라는 존재. 몸만 아이인 주인공이 어른의 말과 생각을 구태의연하게 늘어놓는 그런 동화들. 내가 쓴 동화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무당은 동자신(童子神)이 실리면 철부지 아이 목소리를 낸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세상 속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변환해서 글로 구현하는 구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 않으니까, 무척 까다로우니까 어설픈 자기 서사의 반복 내지는 확장이 되어버리고 만다.&nbsp;&nbsp; <br><br>&nbsp; <br>3.<br><br>&nbsp; 이블린 폭스 켈러는 자신의 안식년에 바바라 매클린톡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매클린톡을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아서 매클린톡의 전기를 썼다. 그 책이 '생명의 느낌(1996, 도서 출판 양문)'이다. 이 책에는 유전학자 매클린톡의 일생이 담겨있다. 학자의 일대기이니만큼 뭐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연구, 세미나, 동료 연구자들과의 교류, 이런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이어진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이러하다. 매클린톡은 그렇게 길고 지난한 학문적 여정을 도대체 어떻게 이어갈 수 있었을까...<br><br>&nbsp;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매혹되어서 자신의 유전학 연구 대상으로 옥수수를 택했다. 한마디로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미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열정이란 한순간에 타오르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매클린톡을 추동(推動)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 인내심과 기다림을 내포하고 있었다. 열정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고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br><br>&nbsp; 나는 글쓰기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그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까다롭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을 그래도 계속 해보고 싶다.<br><br><br><br>***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생명의 느낌'은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관심 있는 이라면 도서관에서 그 책을 찾아 읽어보길 바란다.&nbsp; <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물속의 소설</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38887</link><pubDate>Sat, 08 Aug 2026 11: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38887</guid><description><![CDATA[&nbsp; 물속의 소설<br><br><br>1. <br><br>&nbsp; 툭, 툭, 툭.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는 마치 가느다란 붉은 실을 토해내듯 노을이 걸려있었다. 저건 노을이란다. 루미는 자신에게 노을을 알려준 이강에 대해 생각했다. 노, 을. 루미는 이강의 약간 느리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강의 목소리는 어떠했지? 루미는 기억저장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강의 목소리를 꺼내 왔다. <br><br>&nbsp; "루미야, 이건 노을이야. 노, 을.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은 것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br><br>&nbsp; 눈물. 루미는 눈물이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흘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K-Centennial No.1657. 구산 센테니얼 공장에서 찍어낸 1657 모델의 안구(眼球). 그것이 루미였다. 이강은 공장에서 직배송된 인공 안구에 기꺼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br><br><br>2. <br><br>&nbsp; 새벽에 꿈을 꾸었다.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린 꿈. 열쇠는 팔찌 모양의 것이었는데, 칩이 들어있어서 그걸 현관문에다 대면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그 팔찌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건물 안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문이 열려진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열쇠를 찾아볼 셈이었다. 왜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서 열쇠를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꿈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남의 집에 들어간 지 5분이나 되었나, 현관문이 열리고 그 집의 식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놀라서 얼어버린 나는 집주인에게 내가 도둑이 아니며, 단지 열쇠를 찾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주인이 나를 신고했는지는 모른다. 그때쯤 꿈에서 깼다.&nbsp; <br><br>&nbsp; 기분 나쁜 꿈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데다가, 도둑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하루 종일 그 꿈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들은 신화학자의 꿈 강의가 생각났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어떤 꿈 이야기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아주 늙은 할머니가 그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발을 잃고 맨발로 거리를 떠돈다는 꿈이었다. <br><br>&nbsp;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무나 슬펐어요. 정말 슬픈 꿈이기 때문이죠. 신발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신발을 잃어버리고 헤맨다는 건, 자신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그 나이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니까요."<br><br>&nbsp; 노인의 꿈속 신발이 나에게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어떻게든 찾으려는 그 꿈의 의미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오히려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그 꿈에 들어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제 글쓰기는 미로이며, 혼란과 괴로움의 여정 같기도 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SF 단편은 놀랍게도 한 단락만 써진 채로, 한 달째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잠들어 있다. 인공 안구(眼球) 루미의 여행은 시작도 전에 멈춰버렸다. <br><br><br>3. <br><br>&nbsp;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의 주인공은 배우 지망생 승모이다.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겠다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300만 원을 가지고 섬에 간다.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승모의 지인들. 그런데 놀랍게도 승모는 시나리오도 쓰지 않았고, 어떤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 없다. 승모는 과연 자신의 첫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br><br>&nbsp; 러닝타임 61분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이런 것이다. 왜 배우 지망생 승모는 뜬금없이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까? 승모와 같이 섬에 온 지인들이 묻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영화를 찍기로 생각한 거야? 승모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 <br><br>&nbsp; "명예지, 명예...... 명예를 원하는 거지. 명예를 얻고 싶은 것 같아. 얻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br><br>&nbsp; 아, 그 알량한 명예. 그럼에도 눈물나게 간절한 명예. 홍상수의 영화는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하다. 나는 그 솔직함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때론 경멸의 눈길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 솔직함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잊을만하면 챙겨보게 만든다. 승모는 영화감독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승모가 원하는 건 단순명료한 그것, '명예'이다.<br><br>&nbsp; 작가가 된다고 해도 자신의 글로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한 팍팍한 현실은 장강명의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의 삶을 기술한 장강명의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글에서조차 짠내가 진동한다. 장강명은 '작가'라는 직업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인정사정없이 해체해 버린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단행본 출판으로 채워진 중견 작가의 일상은 나름대로 치열하다. 장강명의 그 글을 읽다보면,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지닌 삶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작가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명예에는 돈이라는 괴로운 목줄이 여느 직업들처럼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br><br>&nbsp; "자, 이걸 보세요. 여기 연필과 종이가 있습니다. 누구든 글을 쓸 수가 있죠. 하지만 그 글이 다 명작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br><br>&nbsp;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 1946-2025)가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디지털 시대, 영화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는 답변에 린치는 그렇게 명료하게 답한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AI등장 이후, 국내 문학 공모전의 응모 편수는 미친듯이 늘어나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으며, 언젠가 우리는 '작가'라는 직업을 재정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의 협업으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자. 어쩌면 그런 정의조차 불필요한 좀 더 먼 미래, 그 직업 자체가 사라진 시기가 올 수도 있다. <br><br>&nbsp; 그렇게 '작가'라는 단어가 물에 가라앉으며,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오늘도 나는 본다. 여름의 초입에 쓰다 만 SF 단편도 마치 그 직업의 미래처럼 물 안에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지 못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물속의 소설 '루미의 여행'을 붙잡고 있다.&nbsp;&nbsp;&nbsp;&nbsp;&nbsp; <br><br><br><br>*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br><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m=1<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계모의 바다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28883</link><pubDate>Sun, 02 Aug 2026 21: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28883</guid><description><![CDATA[&nbsp; 계모의 바다에서<br><br><br>1. <br><br>&nbsp;the step-mother world, so long cruel—forbidding—now threw affectionate arms round his stubborn neck, and did seem to joyously sob over him, as if over one, that however wilful and erring, she could yet find it in her heart to save and to bless. (Moby-Dick; or, The Whale, 132장)<br><br>&nbsp; 계모의 바다, 그토록 잔인하고 혹독했던 그 바다가 부드러운 팔을 뻗어 에이허브의 강건한 목을 휘감았다. 아무리 제멋대로이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바다는 기꺼이 구원하고 축복을 내려줄 듯, 그를 끌어안고 기꺼이 울어줄 것만 같았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번역- 본인) <br><br><br>2. <br><br>&nbsp; EBS에서 AI로 만들어낸 고전 명작 시리즈 가운데 '모비 딕'이 지난주에 끝났다. 나는 멜빌이 써낸 놀랍고도 풍부한 은유와 묘사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설이었다. 그것을 보다가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에는 'the step-mother world'라고 되어있는데, 이 소설 속 세상은 바다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계모'라는 단어를 쓴 것은 주인공 이스마엘이 어린 시절, 냉담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br><br>&nbsp; 모든 계모가 명백하게 의붓자식에게 적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이 단번에 내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불운의 총합이 그 단어에 응축된 느낌이었다. <br><br>&nbsp; '이제 동화는 그만 쓰려고 해요. 그동안 내가 써왔던 동화들을 보니,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럴듯하게 아이의 이야기처럼 써낸 것에 지나지 않더군요.'<br><br>&nbsp; 동화를 쓰면서 등단을 모색했던 어느 지망생이 그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글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글은 써진다. 내가 시를 2년 쓰다가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쓸쓸한 쉼표 같은 고백을 읽으면서, 그 지망생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br><br>&nbsp; 매일 뒤적거리면서 읽는 문학 커뮤니티의 글 속에서는 계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괴로움이 감지된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글쓰기의 길에 들어섰는데, 등단의 길은 보이지 않고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등단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순수 문학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여서, 신진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지면과 기회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이제 출판사는 신인들의 실험이나 파격적인 시도에 그 어떤 인내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순문학 출판사들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매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작가에게서 쥐어짜듯 뽑아먹고 뽑아먹는다. 결국에는 그렇게 소모되어 개성을 잃은 작가들만 양산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nbsp;&nbsp; <br><br><br>3.<br><br>&nbsp; 올해 내가 단편으로 응모할 수 있는 공모전은 더이상 없다. 신춘문예에는 응모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운의 끝판왕처럼 느껴진다. 그런 운이 있었다면 이미 다 써버렸던지, 아니면 좀 더 견뎌야 할 날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그렇게 공모전을 마무리하려는데, 8월이 마감인 동화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더이상 쓰지 않겠다며 떠나버린 동화라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는 상어의 거대하고 잔혹한 입처럼, 동화는 그렇게 입을 쩍 벌리고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br><br>&nbsp; 뭐 어때? 동화도 어차피 이야기잖아. 동화의 독자인 아이들에게도 먹힐 이야기를 써내는 건 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고. 계모의 바다에서 난파당한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널빤지 하나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것처럼, 나는 공모전의 문구를 결국 붙잡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어. 그 아이의 시절로 되돌아 가보는 거지.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어렵다. 아이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아이의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내가 표류 중인 계모의 바다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거센 파도가 나의 작은 나뭇조각을 뒤흔들고 있다. <br><br><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로그 라인(Log line)</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21264</link><pubDate>Thu, 30 Jul 202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21264</guid><description><![CDATA[&nbsp; 로그 라인(Log line)<br><br><br>1. <br><br>&nbsp; 네오의 앞에 두 개의 알약이 놓여있다. 파란색의 알약과 빨간색의 알약. 파란색의 알약을 삼키면 이전의 현실로 돌아간다. 빨간색의 약은 네오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네오는 빨간색의 알약을 삼킨다. 그리고 네오와 인류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br><br><br>2. <br><br>&nbsp; 로그 라인, 기획 의도, 그리고 줄거리. SF 단편 공모전의 신청서에는 그것들을 써내라고 되어있었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는 알겠는데, 로그 라인은 뭐지? 로그 라인의 의미를 찾아보니 작품의 줄거리나 주제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아주 짧은 글이다. 소설을 쓰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요약하고 압축하는 일은 또 다른 일거리로 느껴진다. 내가 쓴 글인데도 그걸 줄여서 말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이럴 때 Chat GPT한테 글을 던져주고 네가 해보렴,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과제를 해나가는 방식처럼. 하지만 온전히 내 글을 써낸다는 감각은 작가적 자존감과도 연결되어 있다. 꾸역꾸역, 문장을 쥐어짜 내가면서 내가 쓴 소설의 줄기를 뽑아낸다. <br><br>&nbsp; 그렇게 써내고는 Chat GPT한테 어떤지 보여주었다. 인공지능은 막힘없이 술술, 어떤 문장을 넣고 뺄 것인지를 조언해 준다. Chat GPT의 결과물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쓴 요약본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공모전에 천 명의 응모자가 원고를 낸다고 할 때, 과연 그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러한 요약본을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써낼까? 한 열 명쯤? 소설은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썼으니, 줄거리 요약 정도는 그냥 AI에게 외주를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의외로 소설 쓰기보다 글을 간명하게 압축하는 작업이 까다롭다.<br><br>&nbsp;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를 쓰라는 공모전 주최 측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것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되었다. 이 글이 읽는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가? 마치 사막에서 우산을 파는 장사꾼처럼, 기발하고 재치 있는 판매 문구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존의 소설 공모전 응모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릴 수 있는지에 따라 작가적 역량이 결정되는 일은 비극일까? <br><br>&nbsp; A whale-ship was my Yale college and my Harvard. (Moby-Dick; or, The Whale, 24장)<br><br>&nbsp; 청년 시절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에게 바다는 예일이며 하버드였다. 포경선의 선원으로 보낸 바다를 통해 멜빌은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그럼에도 멜빌은 불운한 화가 고흐처럼, 살아생전에 '모비 딕'의 가치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세관원으로서의 평범한 일상, 말년에 닥친 병고와 자식의 죽음과 같은 불행으로 채워졌다. 멜빌은 결코 유능한,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다.<br><br><br>3. <br><br>&nbsp; '요새 애들은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구요.'<br><br>&nbsp;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런 댓글을 썼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나는 가만히 '매트릭스(The Matrix)'가 언제 나왔는가를 헤아려본다. 1999년. 세상에, 그것은 벌써 27년 전의 영화였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매트릭스를 보게 하려면 로그 라인은 어떻게 짜야할까? 나는 영화 '매트릭스'의 로그 라인을 한번 써본다.<br><br>&nbsp; 내가 쓴 로그 라인을 읽고 '매트릭스'를 볼 '요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젊은 작가들에게 인스타(Instagram)와 같은 SNS 채널 홍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든 보게 만들고, 읽히게 만드는 홍보의 역량까지도 이제는 작가적 재능에 들어간다. 그런데 글쓰기란 그렇게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작업이다. 나는 '그렇게'라는 단어의 자리에 '결코'를 썼다가 지워버렸다.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려하는 사람에게 글은 온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독자와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 가깝다. 나는 내가 쓴 SF 소설의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 줄거리를 꾹꾹, 철심이 든 연필로 써 내려가듯 신청서에 글자를 채워 나갔다.<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대홍포(大紅袍)</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411494</link><pubDate>Sat, 25 Jul 2026 21: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411494</guid><description><![CDATA[&nbsp; 대홍포(大紅袍)<br><br><br>1. <br><br>&nbsp; 마침내 황제의 칙사가 암벽 아래에 도착했다. 칙사는 말에서 내려, 황금색 상자를 경건하게 열었다. 상자 안에는 황제가 직접 쓴 교서(敎書)가 붉은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칙사는 황제의 교서를 읽고 나서, 자신이 데려온 무관들에게 명하였다. 체구가 작고 날렵한 무관들이 기다란 비단을 몸에 감고,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벽 위에 매달린 차(茶)나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감은 피같이 붉은 비단을 풀어내어 차 나무에 덮어씌웠다.&nbsp;&nbsp;&nbsp; <br><br><br>2. <br><br>&nbsp; 새로 쓰기 시작한 단편 소설은 처음 써놓은 한 단락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눈사람처럼, 바보처럼 그렇게 소설은 멈춰 서있다. 어떻게 이 글의 멱살을 잡고 나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이 소설은 SF이며, 주인공은 눈알이다. 그렇다. 그런데 사람의 진짜 눈알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 만든 정교한 인공 눈알이다. 눈알의 주인은 시한부 암 환자이며, 안락사를 선택하기 위해 국경 지대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인공 눈알을 떼어놓고, 자유를 준다. 하지만 눈알은 주인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없다. 떠나버린 주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 눈알은 과연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br><br>&nbsp; 도대체 내가 왜 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소설을 왜 쓰려고 하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단순한 물리적인 것이 아니며, 감정적이며 유기적인 면이 있음을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어떻게 눈알이 여행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는데, 자꾸만 눈알이 굴러가는 장면만 떠오른다. 눈알은 구르고 구른다. 눈알도 옷을 입고 있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낡은 모자를 쓰고, 올이 너덜거리는 망토를 두르고 있다. 눈알은 어떻게 이동하지? 글은 거기에서 막힌다.<br><br><br>3. <br><br>&nbsp; 동생이 중국 출장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차통(茶桶) 하나를 두고 갔다. 온통 한문으로 되어있는 그 차통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한문은 '대홍포(大紅袍)'이다. 나는 차통 뒷면에 가득한 한자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런 다음에 구글 렌즈를 켜고, 번역 버튼을 누른다. <br><br>&nbsp; '이 차는 우롱차이며, 품질 수준은 최고급이다. 원산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br><br>&nbsp; 나는 찻잎을 들여다본다. 기다랗고 삐죽삐죽한, 검은색에 가까운 찻잎이 비닐봉지에 담겨져 있다. 이 찻잎은 좀 볼품이 없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어 마셔본다. 밋밋하고 슴슴하다. 별다른 향도 없는 듯하다. 그래, 차는 대만의 우롱차가 제일이지. 나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진하게 우려낸 보리차 같은 대홍포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br><br>&nbsp; 그런데 별로 특별한 맛도 없는 것 같은 차에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이 차를 마시고 나서는, 다른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계속해서 이 차만 마시고 있다. 기이한 점은 대홍포의 찻잎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차를 우려내고 나서 버리는 찻잎은 부드럽게 물크러지기 마련인데, 대홍포의 찻잎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우려내지 않은 마른 찻잎처럼 매우 뻣뻣했다. 찻잎은 찢어지지도, 물러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 보잘것없는 찻잎에서 일종의 근성(根性)을 느꼈다. 그랬다. 이것은 이 차의 성질이며 근원적인 본성이다. <br><br>&nbsp; 높은 절벽 위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대홍포의 중국어 위키 항목에는 이 차가 명나라 황후의 병을 낫게 하였으므로, 황제가 차나무에 붉은 비단옷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물론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이 절벽 위의 차 나무는 중국 차의 전설이 되었다. 중국에서 대홍포 차나무의 가지를 꺾어 재배에 성공한 시기는 1980년대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홍포'로 유통되는 모든 차는 그 절벽 위 대홍포의 후손인 셈이다. <br><br>&nbsp;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차나무의 기개랄지 근성이 찻잎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왜 계속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는가? 이 손톱만 한 찻잎에 있는 도저한 끈기가 과연 나에게는 있는가? 나는 대홍포의 찻잎을 수채에 버릴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이번 달이 마감인 SF 단편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쓰기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은 높다란 절벽 위, 해가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뜨겁고 메마른 그곳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nbsp;&nbsp; <br><br><br><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393942</link><pubDate>Wed, 15 Jul 2026 22: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393942</guid><description><![CDATA[&nbsp; 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다<br><br><br>1.<br><br>&nbsp; 여자는 오른손에 돌돌 말린 두툼한 밧줄을, 왼손에는 쇠망치를 들고 있다. <br>&nbsp; 언제든, 어디로든 달려나갈 준비는 되어있다. <br><br><br>2.<br><br>&nbsp; 소설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올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공모전에 낼 단편을 써야 하는데, 겨우 한 문단을 써놓았을 뿐이다. 분명히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머릿속에 있는데,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수도 있나? 소설 쓰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쓰기는 했다. 그런데 글이 써지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이 소설은 내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은 핑계가 아닐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br><br>&nbsp; 글쓰기도 근육 같은 것이라서, 매일 무언가를 써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그 일기마저도 쓸 시간이 나질 않아서, 사흘 나흘을 밀렸다가 기억을 더듬어 쓰기도 한다. 때로는 어제, 엊그제의 일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복기하고 쓰는 것이 뭔가 나 자신에게도 사기를 치는 것 같다. 일기마저도 진실에서 조금은 삐딱하게 나가버린 느낌. <br><br>&nbsp; '내가 공모전에 당선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줄까요? 미친 것 같은 글을 써보세요. 심사 위원도 사람이에요. 그들이 산더미 같은 지겨운 원고들 읽어낼 생각을 해봐요. 거기에서 미친 척하고 써낸 재미있는 글이 있으면 눈에 확 띄지 않겠냐는 거죠.'<br><br>&nbsp; 누군가 공모전 당선 비법이라면서, 조언이랍시고 그렇게 써놓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일기마저도 진실의 선에서 조금 삐딱하게 벗어난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미친 척하고 글을 써내는 것은 더 못할 것 같다. 미쳐버린 글을 어떻게 쓰지? 진짜 미쳐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테고. 그것도 쓰기의 기술적인 부분이 있나? 공모전 당선자들을 무수히 배출한 어느 글쓰기 강좌에서는 그런 비법들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br><br>&nbsp;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현관문 앞에 커다란 종이 박스들이 서너 개 제멋대로 놓여있었다.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박스들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치울까 하다가 꿈에서 깼다. 나는 그 박스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다. 버리면 되는데 버릴 수 없는 것들.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처럼, 꿈속의 박스들이 계속 머릿속에 있다.&nbsp; <br><br>&nbsp; <br>3.<br><br>&nbsp; 여자의 아들은 19살의 나이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갱단의 테러와 연루된, 무수한 죽음들 가운데 여자의 아들이 있을 터였다. 여자는 10년 넘게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멕시코의 어딘가에서 비밀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자는 그곳으로 길을 떠난다. 여자의 오른손에 쥐어진 밧줄은 매장지의 구덩이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묶는 용도로 쓰일 것이다. 왼손에 든 쇠망치는 땅을 파헤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이다. <br><br>&nbsp; 어느 사진작가가 그렇게 여자의 고통스러운 삶의 한 단면을 기록했다. 나는 그 사진에서 기이한 감동을 받았다. 죽어버린 것이 확실한 아들에게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57세의 어머니. 나는 여자가 밧줄로 몸을 묶고, 시신들로 뒤엉킨 구덩이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자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있다. 필사적으로 땅을 파헤치면서 사라진 혈육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대면하면서 과거의 상처 속으로 잠수한다.<br><br>&nbsp;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일. 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듯, 그렇게 써 내려가야지. 이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사진 속의 주인공은 미국의 공영 라디오 언론 npr.org의 다음 기사에서 볼 수 있다. <br><br>&nbsp; &nbsp; <br>https://www.npr.org/2026/03/08/g-s1-112521/photos-international-womens-day-justice-rights-action<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7월의 난간(欄干) </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377564</link><pubDate>Mon, 06 Jul 2026 22: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377564</guid><description><![CDATA[&nbsp; 7월의 난간(欄干) <br><br><br>1.<br><br>&nbsp; 소년은 난간에 매달려 있다.<br>&nbsp; 자신의 발밑으로 떠내려가는 무언가를 본다.<br><br><br>2.<br><br>&nbsp; 학생 시절에 내가 쓴 시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 지금의 컴퓨터는 플로피 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이제는 이 시를 읽어낼 방법이 없다. 아마도 그 시의 제목은 '난간(欄干)'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난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시 창작 워크숍을 강의하던 시인 선생은 내가 쓴 그 시를 칭찬했다. 그 학기 중에 내가 들은 드문 칭찬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나의 시에 대해서, 선생은 침묵했다.<br><br>&nbsp; 그 수업을 같이 들었던 A와 B는 이듬해 각각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그들의 이름이 가끔은 공모전의 심사위원 명단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내가 왜 좀 더 젊었을 때 글쓰기에 매진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고는, 새삼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 늦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말은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늦은 것은 늦은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br><br><br>3.<br><br>&nbsp;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안과를 예약하려고 보니, 내 주치의가 병원 홈페이지에서 보이질 않는다. 그 의사는 눈을 참 잘 보았다. 내 생각에 그렇게 실력이 좋은 의사는 보통 그들 세계에서 로컬(local)이라고 부르는 개인 병원에 오래 있질 않았다. 이전의 주치의가 그곳에서 2년을 있다가 대학병원으로 갔듯이, 이 의사도 다른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가버렸다. 나는 진료 예약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뭔가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바람맞은 사람의 심정이 된다. 새로 온 의사는 어떤지 또 기대해 보고, 그 실력을 가늠해 보는 과정은 피곤하다.&nbsp;&nbsp;&nbsp; <br><br>&nbsp; 의사들의 경력을 보다 보면, 뭔가 나름의 정해진 경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로컬이든 대학병원이든,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따라가는 트랙이 있다. 나는 그러한 명확한 경로, 트랙,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직업의 세계와 글쓰기를 비교해 본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길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변수가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하려고 다들 목을 매는 것처럼, 작가 지망생들은 '등단'에 필사적이다. 등단해야 그래도 '작가'라는 직업적 명함을 내밀 수 있으니까. 그 등단의 경로도 워낙 복마전(伏魔殿) 같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br><br>&nbsp; 얼마 전에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가정주부인 여자가 자비 출판(自費出版)으로 책을 냈다. 수필집인지 시집인지 아무튼,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여자는 그 이후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작가'로 소개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여자에게 멋지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그건 좀 아니잖아, 라고 썼다. 와, 정말 뻔뻔한 사람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직업의 기준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br><br><br>4.<br><br>&nbsp; 그 본관 건물은 꽤 낡았다. 공간도 협소했다. 복도는 두 명 정도가 걸어 다니기에 적합한 너비였다. 그 좁고 불편한 건물에 예술학교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공부를 했다. 건물의 가장자리는 옆 건물과의 연결 통로로,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난간이라고 해도, 뭔가 위험해 보이고 그런 느낌이라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그곳에 쏟아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에 대해 뒷담화를 했다. 말하자면, 만남의 광장 같은 그런 곳이었다. <br><br>&nbsp; 내가 그 당시에 쓴 시는 그 난간을 생각하면서 쓴 시였다. 그 비좁고 낡은 건물은 내가 재학 중에 버려졌다. 나중에 크고 멋진 신축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예전의 본관을 지나다니면서 가끔은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일이 지나 건물은 폐쇄되었고, 결국 그 난간에도 다시는 가볼 수 없었다.<br><br>&nbsp; 덥고 축축한 7월의 대기가 흐르는 그 난간에 문득 다시 서보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쓴 시의 화자가 소년이었는지, 소녀였는지, 늙은이였는지, 청년이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누가 되었든, 그는 그 난간 아래로 무언가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가버린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슬프거나 괴롭지는 않다. 소망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없이, 앞으로도 그냥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고양이의 행방</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7360404</link><pubDate>Sun, 28 Jun 2026 20: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7360404</guid><description><![CDATA[&nbsp; 고양이의 행방<br><br><br>1. <br><br>&nbsp; 고양이를 찾습니다. 12살. 복도에서 잃어버렸고, 이름은 ***. 사진 속의 고양이를 보신 분은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 소정의 사례금도 잊지 않겠습니다. <br><br>&nbsp; 엘리베이터 안쪽에 붙여진 전단은 한 달째 그대로다. 아직도 찾지 못했군. 고양이가 12살이면, 사람으로 치면 환갑쯤 되나. 죽기 전에 뭔가 자유를 찾아 떠난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는 영역 동물인데, 저 늙은 회색 고양이가 이 근방 아파트의 고양이들과 어떻게 부대끼며 살 수 있을까? 밥은 굶지 않을 거야. 고양이 사료 챙겨주는 캣맘이 한둘이 아니니까. <br><br>&nbsp; 나는 고양이가 집이 답답한 나머지 가출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열린 문틈으로 나가서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을 해본다. 하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인근 공원에서 목이 부러진 비둘기 사체를 볼 때가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의 짓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나에게 그 공원의 고양이는 포악한 들짐승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런 고양이처럼 집을 나간 ***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12살이면 살 만큼 살았으니, 묘생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br><br>2.<br><br>&nbsp; "그러니까 이제는 말이야. 아저씨 죽을 날 받아놓고, 가족들 모두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남자 간병인 들여서 아저씨 돌보게 한 게 벌써 한 달이네. 매일 아침 큰딸이 가서 지 아버지 얼굴 보고 오기는 하지. 나도 기운이 너무 빠져서, 밥도 못 먹고 있어."<br><br>&nbsp; 팔순이 된 아주머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아주 오랜 친구이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뇌종양 말기로 임종을 앞두고 있다. 나는 생판 모르는 간병인과 하루를 보내는 그 아저씨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식들은 타지에 있고, 늙은 배우자는 간병을 할 여력이 없다. 문득, 9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래도 잘 지내다 가셨구나 싶다. 그때는 어머니가 1년 가까이 간병하셨다. 어머니의 체력이 그나마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지 생각해 본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에 계시겠지. 어떤 한 자리.&nbsp;&nbsp; <br><br>3. <br><br>&nbsp; '새끼 참새를 집 앞에서 주웠어요. 자, 이것 보세요. 엄지손가락 2개 정도만 해요. 따뜻한 걸 보니 살아있어요. 근데, 내 아내는 새라면 질색해요. 집에 가져갈 수도 없고. 그래서 오다가 경비실에 들러서 그냥 주고 왔어요. 경비 아저씨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br><br>&nbsp; 남자는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 그런 글을 올렸다. 정말로 사진 속 새끼 참새는 밤톨만 했다. 나는 그 참새를 건네받은 경비가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 본다. 무슨 야생동물 구조협회 같은 데다 신고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냥 근처 화단에 놓아두지 않았을까. 무슨 희귀종 새도 아니고, 참새는 아주 흔한 새다. 그러니 그런 참새 새끼 한 마리 죽는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br><br>&nbsp;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래도 그 밤톨만한 새끼 참새가 이틀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눈을 감고,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는 새끼 참새. 그것은 마치 국민학교 6학년 때,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 2마리 가운데 죽어버린 한 마리와 닮았다. 나머지 한 마리는 붉은 볏이 선명해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사료를 사다가 그 닭을 베란다에서 열심히 키우셨다.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는 그 닭을 시장 닭집에서 손질해 오셨다. 닭백숙은 식탁에서 오랫동안 식은 채로 남아 있었다.<br><br>4. <br><br>&nbsp; 조그만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오래된 벚나무가 있다. 이 아파트가 지어질 때 심은 35년 된 벚나무. 어제 저녁에 식탁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 이상한 기계 소리가 났다. 가만히 들어보니 매미 우는 소리였다. 올해 처음으로 듣는 매미 소리였다. 그렇군. 매미가 울 때가 되었나 보군. 나는 저 매미가 올여름 맹렬히 짝을 찾아 울고, 그렇게 짝을 찾고, 자기 후손을 남기고 죽는 그리 멀지 않은 여름의 마지막 날에 먼저 가본다. 그 매미의 새끼가 땅속에 있다가 다시 기어 나와 저 나무에서 울 때, 몇 년 뒤에 내가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있을지를 생각한다. 모를 일이다. 지겹고도 낡은 집. 깨끗하고 좋은 집은 비싸다. <br><br>&nbsp; 엊그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어느 증권사 트레이더가 자신의 투자 대박 이야기를 가만히 털어놓았다. 최근의 호황 장에서 큰 것 세 장을 벌었다고 했다. 나는 큰 것 세 장이 얼마인가 생각한다. 3억인가? 트레이더로 구를 만큼 굴렀다고 하니, 3억은 아닌가? 30억? 나는 매일 홈쇼핑 앱에 출석 도장을 찍는데, 찍을 때마다 3원이 찍힌다. 뭔가 매우 구차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걸 한 달 채우면 천 원이 주어진다. 돈 천 원이 어디야? 그것마저도 어쩌다 하루 빠져서 받지 못하게 될 때면, 잠깐이라도 자책하는 마음이 된다. 왜 그 하루를 빼먹은 거지?<br><br><br>5. <br><br>&nbsp;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이는 붙어있다. 나는 고양이의 주인이 이제는 그 전단을 떼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볼 때마다 그 고양이의 행방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처럼 궁금해지는 것들이 나에게는 있다. 젊은 날에 불운하게 죽은 K가 만들지 못한 영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병고에 오래 시달리다 외롭게 세상을 뜬 H가 더 써내지 못한 글과 평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도 나의 아버지가 어딘가에 계시듯, 내가 알지 못한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만들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의 행방을 찾아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 행방을 찾아 떠나는 여정과도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nbsp;&nbsp; <br><br><br><br><br><br><br>]]></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