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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사막


그곳에 갔었지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모래가 눈동자를
먹어버리는 곳 사이드와인더(sidewinder)의
삼각뿔 눈썹이 저 멀리에서
아주 선명하게도 보이더군
맹독의 독사는 아주 조심해야지
물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죽으면 영원으로 갈 수 있으니
눈을 감으면 너의 희고 고운
손이 떠올라 모래가 사부작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지

달구어진 모래에 발이 타들어 가
개미귀신이 파놓은 깔때기가
한없이 아래로 꺼지고 있었지
줄줄이 사탕처럼 개미들이
그 입속으로 그렇게 안녕,
너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함께

신기루인가 멀리서 여우가
나타났어 사막에 여우가
살고 있었어 뾰족한 입에는
전갈을 물고 커다랗고 하얀
귀는 쉴 새 없이 펄럭였지
가만, 여우의 입매가 너의
입술을 닮은 것도 같아

아무리 달음질을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부정맥에 걸린
모래 언덕은 그리운 비탄을
불규칙하게 삼키고
또 토해내지 너무나
다정한 너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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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그 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멀리서 은빛 물결이
반짝이고 청새치가 첨벙
바다오리가 철썩거리며 지나가
단풍나무였던가 날개를 가진
푸르고 붉은 잎들에는 작은
씨앗이 있었는데 그게
방 안으로 들어오곤 했지
청소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밟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조용히 바람에 날려서 보낸
그 씨앗들의 행방이 궁금해

너는 창가에 작은 꽃나무를 하나
두었는데, 옅은 자주색 꽃에는
흰색 점들이 푸른 애벌레의
눈처럼 콕콕 박혀 있었어
그때가 쥐똥나무꽃의 달큰한 향이
퍼질 무렵이었었지 아마
이제 그 화분은 버려지고
희디흰 폴리에스터 커튼은
영영 누렇게 떠버렸지
고양이들은 더이상 말하지 않아
모든 것이 완벽한 방이었는데
너는 떠났지 아직 그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군데군데 금이 가버린
칠보 장식의 열쇠고리도 함께
아픈 창문으로 검은 물이 들어와
이제 빈방을 잠그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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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地圖)


서걱거리는 지도를
씹으며 부러뜨린 손가락
너의 푸르스름한 입매
번득이는 면도날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었어
왔던 길을 더듬어
처음으로 가야 하겠지
그 절벽에는 동굴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의 발자국이 있는
단 하나의 동굴

질기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
입에서 뱉어내었어
읽을 수 없는
잃어버린 지도의
붉은 선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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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기원


진공청소기의 먼지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이롭다 매일 청소를
하는 데도 어디서 그
먼지들이 나오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흰 머리카락과 회색의
솜뭉치들이 몽글몽글
며칠 전에 깎은
손톱도 하나
모래알이 자잘자잘
오리털 이불에서
나온 깃털도 있군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속의 철이 그렇게
내게 왔듯이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부드러운 살과
눈물과 노래를 생각한다
한 처음에 있었던
어떤 손짓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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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것들


세탁기 아래의 끈끈이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다 해마다
늦봄이면 야생 바퀴가
그렇게 들어온다 걔들은
진짜 엄청나게 크다
그 시커먼 덩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다
우리집까지 왔을 텐데
그대로 저승길을 밟아

5월의 비가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사흘째 내리는
저녁에 작은 방 방충망에
어리는 비닐 조각 그림자
불을 켜고 보니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난 네가 싫어,
손가락으로 방충망을
튕기며 기어코 녀석을
쫓아내었다 우리집이
아니더라도 다른집에서
잘 쉬겠지 그냥 놔둘 걸
날 밝으면 가버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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