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이야기


화단의 조팝나무 파가신 분
도로 심어놓으세요
엘리베이터의 삐뚤어진 글씨
화초 도둑이 개심(改心)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얘야, 초콜릿 좀 사서 보내다오
할머니가 왜 의사 아들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의 시는 1990년대에 갇혀있어요
기형도와 허수경이 있는 시대
chat GPT는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2025년의 시 트렌드는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벚나무는 가지치기를 하면 안된대요
잘못하면 죽거나 꽃을 피울 수 없다고
그 흔해 빠진 꽃나무가
왜 그렇게 예민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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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幕間)


시간을 노름판에서 잃고는
나는 한없이 게을러졌다

이제 이 사업도 내리막길이에요
나도 다른 일을 알아봐야죠
인형옷을 파는 여자가
하늘색 인형의 옷저고리에
쓴맛의 구슬을 쏟는다

텅 빈 객석에는 겨울이 내려앉는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린다
해진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며
인형이 노래하게 할
남아있는 시간을 가늠해 본다

좋은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났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무대 뒤에서 낡은 이불을 덮고
다음 공연까지 잠을 청한다

상처입은 늙은 산양처럼
옆으로 등을 세우고
가만가만 숨을 쉰다
그렇게 스러지는 모든 것들은
얇고도 가여운 날개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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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跡)


루르드(Lourdes) 순례를 다녀오신 수녀님이
기적의 샘물을 담아서 보내주셨다
나는 그 물을 엄마의 머리에 바르기로 한다
물론 엄마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머리에 발라주고 남은 물은
나의 모니터와 키보드에 발라주었다
물론 때깔 좋은 시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일 억을 모을거야
엄마는 일기장에다 그렇게 썼다
엄마의 일 억
나의 첫 장편 영화
첫 시집
서울 변두리의 아주 작은 아파트
그들은 모두 같은 궤도의 별들이다

서럽도록 갈망하는 것들의 뿌리는 깊고
기적에 기대어 휘청거리며 걷는다
병약한 믿음 한 방울이
파릇하게 샘물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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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絕版)


절판된 시집(詩集)을 읽는다
주문을 해도 오지 않는 책들
죽거나
미치거나
잠적(潛跡)해버린
시집의 주인들

꿈속의 칠판에는 내가 쓴 시가 있다
흘러내리는 시어(詩語)의 행방을 쫓다가
절판된 시집 한 권을 줍는다

눈부신 시들은 쉽게 잊혀져
붉은 눈거죽의 세월
견디어 내야지

간절한 것은 너무나도 늦게 온다
무겁게 세어진 흰 머리카락들
시편(詩篇) 사이에 켜켜이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담보할 수 없는
어떤 재능에 잠시 귀 기울이다가
가만히 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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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개


새벽, 검정개가 눈꺼풀 위로 지나간다
점심, 정신 나간 미친년과 말싸움을 했다
저녁, 1층의 사이코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5월, 미나리는 점점 더 억세진다
억세지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검정개가 웃는다







못난이


못난이 참외를 샀다
값이 너무 싸서 샀다
겨울에 잔뜩 사놓은 못난이 사과를 다 먹을 무렵
못난이지만 맛있다
못난이를 먹는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삐딱한 웃음이 찔끔

냉장고에는 못난이 파프리카도 있다
빨강색 못난이는 싱싱한데
노랑색 못난이는 주글주글
못난이에도 등급이 있다
괜찮은 못난이와 아주 못난 못난이
못난이는 가난하고
못난이는 부끄럽고
못난이는 좀 슬프다
못난이 시를 쓰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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