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添削)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등지고 날면
더 잘 날아갈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어깃장을 놓으며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붓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백날 해봐야 안 되는걸

바람의 첨삭(添削) 선생을 진작에 찾아갈 걸
바람의 독에 말라버린 황무지의 공항
마지막 남은 관제사는 도망가 버렸다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본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바람의 결을 읽어라
바람과 함께 노래해라
바람을 첨삭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들과 작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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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장마는 끝났다
참외는 끝물이다
옥수수는 조금 더 먹을 수 있다

아침 6시 반
아파트 경비는 기다란 삼각 괭이로
놀이터의 흙을 고른다
쿡쿡 탁탁 
굳은 흙을 헤집었다가
다시 평평하게 만드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매일 똑같은 하루

살아온 여름보다
살아갈 여름날은
이제 적게 남았다

열대야로 설친 잠이
푹 꺼진 낡은 소파로
꾸벅꾸벅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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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죽어가는 산호초에서
불가사리가 번성하고 있다더군
과학자들은 불가사리를 사냥하고 있어

불가사리는 그저
죽어가는 산호의 몸뚱이를
먹고 살기 위해 뜯어먹을 뿐인데
그걸 죽이다니

그 불쌍한 불가사리를
내 머릿속에 풀어두자
너의 푸르스름한 눈웃음과
희디흰 손과
단정한 입술을
천천히 뜯어먹을 수 있게

붉은 촉수가 잘라버린
불온한 손가락 하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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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 중입니다
라디오는 기계음의 목소리를
미적지근한 온수로 흘려보낸다

휘적휘적 더운 물길을 헤치며
집안을 천천히 걷는다
이 바다는 참으로 따뜻하다

작은 열대어 한마리
스르륵
갈라진 아가미에는 커다란
낚시 바늘이 눈물처럼 꿰어져 있다
나는 눈물을 똑똑 떼어서 버린다
너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의 바다는 참으로 먼 곳에 있으며
어쩌면 나는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끝없이 가여워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부엌의 창문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대어가 가버린 자리
내 손바닥에는 바늘 모양의 문신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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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未知)의 시


에어컨이 없는 작은 방
목에다 젖은 수건을 두르고 시를 쓴다
슬픈 시 좀 어디 알려줘 봐요
시란 원래 슬픈 거야
사는 게 즐거우면 시를 쓸 수 없어
어느 머저리의 시학을 떠올린다

나는 방바닥을 천천히 긁으며
미지의 시를 탐구한다
멸종된 공룡의 뼈가 만져진다
시커먼 세월의 때가 낀 지층 속
화려한 깃털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한때 크게 울었고
땅이 울리도록 달렸으며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품었었지
하지만 이제 한낱 뼛조각으로 이렇게

언젠가 내가 죽어서 누울 관을 생각한다
나의 뼈와 나의 시들이 우는 소리를
아주 아주 먼 훗날의 누가 듣겠는가

15년 된 낡은 컴퓨터는 밭은 숨을 내뱉는다
목덜미의 젖은 수건은 반쯤 말라버렸다
땀에 절은 탱크톱에서는 어설픈 쉰내가 난다
미지의 뼈를 가만히 만져보다가
나는 서둘러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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