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선생님이 등록 요청한 논문은 학사 학위논문이잖아요. 그건 학위 논문에 해당하지 않아요. RISS에서 등록, 검색되는 논문은 석박사 논문만 해당하거든요."

  RISS(학술연구 정보서비스)의 담당자는 예의 바르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럼, 학사 논문이 RISS에 등록되는 방법은 없는가 나는 물었다. '기타 논문'으로 접수하면 된단다. 내가 그 '기타 논문'으로 접수해야 할 논문은 영상원 예술사 학위 취득 논문이다.

  그 논문을 나는 쓸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머리는 반백이 되고, 급기야 폐렴까지 걸렸었다. 그런 사실 따위는 '학사 학위'라는 사실 하나에 무의미하게 수렴될 뿐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예술 영재를 육성하기 위해 문화체육부가 세운 국립 예술학교이다. 이 학교는 특이한 학위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학사 학위에 해당하는 '예술사'와 일반 대학원의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전문사'가 그것이다. 내가 예술사 학위 논문을 쓴 지 15년이 지나서야 RISS에 내 논문을 등록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내 논문을 표절해서 레포트 사이트에서 팔아 처먹고 있는 표절 잡범을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표절 레포트를 발견한 것은 11월 10일이었다. 내 논문이 인터넷에서 검색되는지 궁금해서 논문 제목을 검색창에 써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뜨는 것이 그 표절 잡범이 작성한 레포트였다. 그 쓰레기 글은 아수라 백작의 얼굴 같았다. 내 논문과, 같은 과 1년 선배의 논문을 반반씩 짜깁기한 표절 레포트였기 때문이다. 그 머저리가 레포트를 등록한 때는 2010년. 그러니까 13년 동안 그 잡범은 남의 논문을 베껴서 돈을 벌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벌었을까? 스타벅스 커피 몇 잔 값이나 되려나? 나는 새삼 그 액수가 궁금해졌다.

  그 인간은 내가 피와 땀으로 써내려간 논문을 표절했다. 나는 그 파렴치한 행위를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우선, 그 표절 잡범의 글을 대행해서 팔아주고 있는 레포트 사이트에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허섭스레기 같은 그 사이트는 고객 서비스 따위는 아예 없는 모양이다. 내가 보낸 메일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나는 그 사이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저작권 침해 신고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거기에 신고하려면 '증빙자료'가 있어야 한다. 즉, 내가 표절자가 베낀 원문 저작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냥 단순하게 내 논문 파일 원본을 그 레포트 사이트에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학위 논문 원본을 그따위 회사에 절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 대신에 공신력 있는 RISS 사이트에서 내 논문이 검색되도록 하고, 그 링크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시일이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표절 잡범이 베낀 내 논문의 일부분을 이미지 파일로 떠서 압축 파일을 만들었다. 마침내 오늘, 그 레포트 사이트에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다.

  그렇게 저작권 침해 신고를 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논문의 저작권을 새롭게 변경했다. 모교 도서관의 논문 등록 담당자가 그 과정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내 논문의 영리적 목적의 이용과 내용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 논문을 dCollection에 새롭게 등록했다. 디콜렉션은 디지털 학술 정보 유통 서비스로 대학의 학술 정보를 모아두는 일종의 거대한 지식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각 대학교의 학위 논문이 이곳에 등록되면 디지털화된 자료가 연구자들에게 제공된다. 이곳에서는 '학사 학위' 논문도 '논문' 취급을 해준다. 내가 영상원을 졸업할 때에는 학위 논문을 학교 도서관에만 제출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논문 제출 시스템이 바뀌어 예술사 논문도 디콜렉션에 등록하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내 논문은 한예종 도서관의 전자 검색 서비스로만 한정적으로 검색될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 표절 잡범을 영상원 출신이라고 의심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외부인은 검색할 수 없는 영상원 졸업생의 논문을 베껴다가 비열하게 팔아 처먹은 그 잡범은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쓰레기 잡범이 13년 동안 표절 레포트로 푼돈이나 벌고 있을 때, 내 논문은 그 머저리의 레포트에 참고 문헌으로만 표기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모교의 전자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내 논문을 세상 밖으로 꺼낼 필요성을 느꼈다.

  RISS에 학위 논문이 아닌 '기타 논문'으로 등록되어도 좋다. 그래. 학사 학위 논문은 연구 가치도 떨어지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무수한 종이 뭉치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 논문은 영상원에서 보낸 6년의 세월, 그 전부인지도 몰랐다. 난 가끔 그런 질문을 해본다. 내가 만약 다시 서른살로 돌아간다면 그때에도 영화를 공부하려고 할까? 참으로 괴롭고 슬픈 질문이지만, 나는 그 질문에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인생의 어떤 선택은 고통과 후회를 동반하는 것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이 표절 레포트 저작권 침해 신고 건이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바대로 표절 잡범의 쓰레기 글이 레포트 사이트에서 더는 볼 수 없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도둑질은 눈에 보이는 물건을 훔치는 행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타인이 애써서 만들어 낸 무형의 지식 자산을 교묘하게 탈취하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한다. 누군가 내 논문을 표절해서 무려 13년 동안 자신의 것으로 팔아먹었다. 그러한 지적 절도 행위를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 표절 잡범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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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침해 신고 후기:

  내가 레포트 판매 대행업체에 저작권 침해 신고를 하고 나서 하루 뒤인 11월 24일 오늘, 업체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내가 신고한 자료는 삭제되어서 더는 서비스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업체는 해당 레포트를 등록한 회원에게 신고 내용을 알리고, 강력하게 경고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확인해 보니, 이제 그 표절 레포트는 더 이상 판매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구글 검색어를 치면 레포트 제목은 그대로 나온다. 그 링크를 클릭하면 '저작권자의 신고로 삭제된 자료입니다'라는 안내문이 팝업창으로 뜬다.

  11월 10일, 내가 표절 레포트를 발견하고 나서부터 그 레포트가 삭제되기까지 2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비록 그 표절 잡범의 사과는 받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일이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다. 이 글을 읽고 마음으로 함께 응원해 준 독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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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1-23 23:19   좋아요 0 | URL
사필귀정!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응원하며 기다려 봅니다^^

꼬마요정 2023-11-24 00:08   좋아요 0 | URL
저도 응원합니다!!

푸른별 2023-11-24 12:03   좋아요 1 | URL
은하수님, 꼬마요정님. 따뜻한 응원의 말, 고마워요.
 

 

  어제, 2주 전에 받았던 공단 건강검진 결과 통보서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우편물은 2통이었다. 하나는 일반 건강검진, 또 다른 하나는 암 검진 결과 통보서. 마침 산책하러 나가는 길이라 겉옷 안쪽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뭔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웠다. 혼자 생각에는, 안 좋은 소식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니, 그렇게 건강을 잘 챙기며 살아오지 못했다. 먹는 것도 대충, 운동도 걷기 운동 조금. 이번에 검진할 때, 의사가 내 검진 문진표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근력 운동을 전혀 안 하시네요. 근력 운동을 해야 합니다."
  "전에는 달리기를 했었는데, 그것도 하다 보니 힘들어서 그만두었어요."
  "달리기는 근력 운동이 아니에요."
  "근력 운동은 그러니까... 아령 같은 거 들고 하는 운동, 그런 거 말하는 거죠? 스쿼트는 매일 조금씩 합니다."
  "스쿼트도 근력 운동이긴 하지만, 어쨌든 근력 운동량 자체를 늘려야 합니다."

  덤벨, 케틀벨, 뭐 그런 걸 사야하나...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떠올린 것은 플랭크(Plank)였다. 뭐 이런 것도 제대로 하려면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아야겠지. 그래도 유튜브로 찾아보면서 대충 감을 익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해보니, 이거 정말 너무 힘들다. 플랭크 자세로 20초씩 3번, 1세트 해내기가 무지하게 힘들다. 그다음 날에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뭐든 처음은 힘들다.

  산책을 다녀와서 조심스럽게 우편물을 뜯었다. 암 검진 결과 통보서는 별 것이 없다. 일반 건강검진 통보서가 문제였다. 가족력 때문에 늘 신경을 썼던 질환이 있었다. 나는 그 병을 피하고 싶어서 지난 10년 동안 살얼음을 걷듯 살아왔다. 그런데, 올해 결과 통보서는 이제 그 병이 내 가까이에 왔음을 알려주었다. 결국 유전(遺傳)을 이기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식탁 위에 뜯어진 우편물을 놔두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몸 여기저기가 아픈 건 당연하다. 올해는 특히, 그동안 자주 가지 않았던 병원도 갈 일이 많았다. 고도 근시에다 노안까지 겹친 내 눈의 시력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 안경도수를 높이기 싫어서 저도수로 맞추어 버텨왔다. 안과 의사 선생은 도수를 높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조만간 안경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다.

  치과 검진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지만, 잇몸이 내려가고 시린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이젠 딱딱한 음식을 먹는 일은 생각도 못 한다. 전에 그런 음식을 잘못 먹었다가 치아가 살짝 깨지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깨진 부분을 조금 다듬는 정도로만 끝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임플란트 안 하고 내 자연치로 버티는 것이 어디냐 싶기도 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이는 먹어가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이십 대에 있는 것 같아."

  나는 친한 수녀님이 오래전, 나한테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수녀님이 그 말을 했던 때의 나이가 얼추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스스로 내 사진을 찍는 일도 웬만해서는 하지 않게 되었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볼 때마다 낯설다.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게 보이다니... 반짝거리는 청춘의 날들은 손가락사이로 어느새 스르륵 빠져나갔다. 이제는 병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조심해서, 살살 살아야지. 나는 다음 달에 병원 진료 예약을 하고 정밀 검사를 받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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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인 올해는 무슨 마가 끼었는지 나에게 이런저런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몸이 아파서 병원을 자주 방문할 일이 생겼다. 여러 과의 전문의를 만나면서 내가 느꼈던 바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1. 환자, 네가 의사 말을 안 믿어서 아픈 거야: Retronychia가 뭔지도 모르는 피부과 의사

  올해 초, 왼쪽 엄지발톱이 자라지 않은 채 내내 붓고 아팠다. 2월에 피부과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는 그냥 두면 된다고 했다. 무좀도 아니고, 염증이 생긴 것도 아니니 발톱을 내버려 두란다. 그럼 자라나거나 아니면 빠지거나 할 거라고. 그 후 2달이 지났지만, 발톱은 자라지도 않았고,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붓고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4월에 다시 방문한 그 피부과에서 의사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의사인 자기 말을 신뢰하지도 않고 이런저런 연고와 약을 발라서 악화된 것이라고. 그러면서 피부과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날더러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의사 말을 듣지 않고 자가처방으로 소염진통제와 항생제 연고를 발라서 발톱이 그리 된 것일까? 명백하게 그건 아니었다. 문제는 Retronychia가 뭔지도 모르는 그 피부과 의사에게 있었다. 발톱, 주로 엄지발톱에 외상이 가해지면 발톱 뿌리 부분의 성장판이 손상된다. 그렇게 되면 발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마치 떡판이 겹겹이 쌓이듯 두껍게 겹쳐 자라면서 통증과 염증을 야기한다. 그런 경우에 유일한 치료 방법은 발톱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내버려 두라고? 의사의 말을 믿지 않는 환자인 내가 문제라고? 자신의 한정적인 임상 경험에만 의존해서 제대로 된 진단도 내리지 못하는 의사는 오만하고 무능하다.

Retronychia로 고생한 내 경험담은 여기에 기록해 두었다.


https://blog.aladin.co.kr/sirius7/14695630


2. 난 망막만 본다니까: 사소한 결막 질환을 대학 병원에 가서 보라는 안과 의사

  지난 4월에는 책상 스탠드의 전구를 갈다가 유리 조각이 내 눈에 들어가는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 다음 날, 안과 진료를 받고 유리 조각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눈의 이물감과 불편함이 지속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 가장자리의 결막 안쪽에는 조그만 수포 같은 것이 생겼다. 며칠 후에 그 안과에 다시 방문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자기는 결막에 생긴 게 뭔지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진료의뢰서를 써줄 테니, 나에게  대학 병원에 가보란다.

  그 의사는 대학 병원 안과에서 교수로 오랫동안 환자를 봐온 사람이다. 그런 안과 전문의가 결막에 생긴 작은 질환이 뭔지 모른다고? 대학 병원 안과가 동네 점방인가? 환자인 나는 대학 병원에 예약해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진료를 기다려야 한다. 정말로 그 의사는 내 눈의 결막 질환이 뭔지 몰라서 그랬을까? 그는 환자인 내 불편과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뒤에 밀린 환자 진료를 위해 나를 얼른 진료실에서 내보내고 싶어 했을 뿐이다. 나는 의사에게 무책임하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의사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난 망막만 봅니다. 지금 환자들 밀려서 환자분하고 말할 시간 없습니다."

  의사가 돈벌이에 집착하면 그렇게 된다. 나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진료실을 나왔다. 결국 나는 다른 안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는 진료실에서 주삿바늘로 결막에 생긴 수포를 터뜨리는 것으로 끝났다. 아주 간단한 처치였다. 새로 만난 안과 의사 선생님은 눈도 잘 보고,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명의였다. 나는 이 경험을 다음의 글에 남겼다.


https://blog.aladin.co.kr/sirius7/14714480


3. 어디가 아픈지 빨리 말해: 무성의한 병력 청취에다 예의도 없는 이비인후과 의사

  지난여름에는 한 달 넘게 목이 붓고 아팠다. 좀 큰 병원에 가서 목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종합병원에서 두경부를 전문으로 보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았다. 이 의사는 나름 두경부 전문 명의로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의사라면 내 목의 질환을 잘 봐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내 기대는 그 의사를 만난 지 몇 분이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어떻게 아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의사가 내 말을 뚝 자르더니 묻는다.

  "그래서 환자분은 어디가 아프다는 겁니까?"

  내가 그 의사에게 이야기한 지 2분이나 되었을까? 왜 저 의사는 환자의 병력 청취를 저따위로 하는 것일까? 저런 사람이 과연 명의라고, 환자를 잘 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종합병원에는 늘 환자들이 넘쳐나고 5분 단위, 10분 단위로 진료 예약이 잡힌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의 병력 청취를 그딴 식으로 하는 것이 의사로서 정말로 잘하는 일인가? 병력 청취는 환자 진료의 기본이다.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환자에 대한 예의도 없다. 만성 편도선염으로 진단을 내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편도선이 좀 부어서 그래요. 정 힘들면 편도선 절제 수술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나이 들어서 그런 수술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래, 내가 좀 나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따위로 말하는 건 아니지. 병력 청취는 개나 줘버리고, 환자의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고. 참으로 그는 저렴한 태도를 지닌 의사 양반이었다. 나는 당시의 불쾌한 경험을 다음의 글에 남겼다.


https://blog.aladin.co.kr/sirius7/14814494


4.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위내시경 하면서 한마디도 안 하는 목석같은 내과 의사

  11월에는 건강검진을 받았다. 나는 위내시경은 진정 내시경으로 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충분히 참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 내시경을 하는 경우에 검진자가 힘든 이유는 구역 반사(嘔吐反射, gag reflex) 때문이다. 인체는 목 안쪽으로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반사 작용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내시경 같은 기구가 들어오는 것을 맨정신으로 참아내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다. 위내시경할 때,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의 불안을 줄이고 안심시켜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번 검진에서 만난 위 내시경 의사는 내시경을 하는 과정 내내,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역 반사가 심해서 내시경이 잘 들어가지 않자, 그냥 내 목에서 내시경을 도로 뺐다. 나는 내시경이 목에서 나오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 의사는 나름대로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환자인 내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서 내시경이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고 두 번째에서야 내시경이 겨우 들어갔다. 내시경이 내 위장을 들쑤시는 동안에도 나는 도대체 이 과정이 언제쯤 끝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검사가 끝나서 내시경이 나온다고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이 간호사는 내시경을 받는 동안, 내 머리를 꽉 잡고 마구 뒤흔들었다. 정말이지 최악의 내시경 의사에다 무지막지한 간호사였다.

  환자와 그 어떤 소통도 하지 않는 그 의사는 환자를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걸까? 환자인 나는 자신의 내시경 경험 케이스를 더하기 위한 도구인가? 그 어떤 환자도 의사에게 도구로 취급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 끔찍했던 내시경 체험을 나는 글로 기록해 두었다.


https://blog.aladin.co.kr/sirius7/15043804

  엄밀히 말하면 의사도 환자에게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올해 진료실에서 만난 위의 4명의 의사는 그런 서비스 마인드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이들이었다. 아마도 AI로 대체될 직업군 가운데 '의사'는 가장 나중의 목록에 있을 것이다. 저런 최악의 의사들을 만나느니, 나는 차라리 인공지능 의사를 만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아픈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그 괴로운 마음도 헤아려 주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 나는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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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저녁, 보온병에 우롱차를 우리기 위해 뜨거운 물을 부었다. 보온병 안쪽 뚜껑을 끼우려고 하는데 똑,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 아랫부분 플라스틱이 떨어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플라스틱이 삭아서 그리된 것이었다. 그랬다. 플라스틱이 삭아서 떨어질 만큼의 세월을 이 보온병은 지나왔다. 정확한 햇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대략 30년은 좀 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Tiger 보온병'을 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수입 상품점에서 사 오셨다. 10년 전인가, 그 보온병이 엄마네 집 찬장에 처박혀 있던 것을 내가 찾아서 가지고 왔다. 겉면 스테인리스 부분에는 찌그러진 곳이 두어 군데 있었다. 할머니가 그걸 가지고 다니시다가 땅에 떨어져서 그리되었다. 그런 흠집과는 상관없이 이 보온병의 성능은 놀랍도록 짱짱했다. 저녁에 뜨거운 물을 부어두면 다음 날 저녁까지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우롱차를 우리는 데에 그 보온병을 썼다. 식탁 중앙에는 무려 4개의 보온병이 자리하고 있다. 한여름에도 나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차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운 여름에 찻물 끓이는 것도 일이다. 내가 쓰는 4개의 보온병 가운데 타이거 보온병은 가장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은색 스테인리스의 외관은 투박하고, 무게도 꽤 나갔지만, 나는 이 보온병을 참으로 좋아했다. 보온병 안쪽 뚜껑의 실리콘 부분의 경화는 이미 진작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뚜껑으로 물을 따르지 않고 매번 뚜껑을 열어서 쓰곤 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오랜 시간을 이 보온병은 버텨내었다. 그리고 이제, 어쩔 수 없이 자진 폐업을 하는 가게처럼 보온병은 뚜껑의 부속을 스스로 끝장내 버린 것 같았다.

  뚜껑의 떨어진 아랫부분이 없으면, 물의 온기는 윗부분의 구멍으로 다 빠져나간다. 그러니 이 보온병은 무용지물이 된다. 혹시라도 그 뚜껑 부품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궁리 끝에 타이거 보온병의 한국 지사 홈페이지를 찾았다. 그곳 홈페이지 한구석에 있는 고객 문의란에 글을 올리려고 보니 기가 막힌다. 이름, 전화번호, 집 주소, 이메일 주소... 보온병 뚜껑 하나 물어보려고 내 개인 정보를 그 사람들에게 줄 생각은 없다. 나는 문의 글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Strong Vacuum Flask, BWP-C500, 0,47리터, For Your Refreshment. 보온병의 겉면에 붙어있는 라벨 테이프는 아직도 멀쩡하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보온병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이 보온병의 온전한 부속 뚜껑은 일본 타이거 보온병 회사 본사에나 있을 것이다. '우리 회사가 걸어온 길'과 같은 문구가 있는, 본사의 전시실에나 있지 않을까? 나는 보온병 뚜껑 부속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버리자.  

  오랫동안 써온 물건을 버리는 일이 매번 속 시원하지는 않다. 나에게는 몇 년 전 세일할 때 사둔 새 보온병이 2개나 있다. 이제 이 타이거 보온병을 버리고 그걸 쓰면 된다. 새 걸 쓸 수 있으니 좋긴 좋은데, 이상하게 이 보온병을 버리는 것이 아깝다. 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롯이 뜨거운 물의 온기를 견뎌내었다. 가끔 물건의 상품평을 읽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지칭할 때 '아이'라는 단어를 쓴다. 너무 예뻐서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죠, 이런 식으로. 나는 그 표현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보온병을 내다 버릴 수밖에 없는 지금에서야 '이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 '아이'가 아니라 '노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정확한가? 투박한 몸통에는 찌그러진 자국이 있고, 뚜껑의 플라스틱은 삭아서 떨어졌다. 겉뚜껑도 예전에 안쪽 플라스틱과 분리된 것을 내가 강력 본드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 아니 이 늙은 보온병은 참으로 꾸역꾸역 숨을 내쉬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Time to say Goodbye. 내 귀에는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부르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타이거 보온병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의 분리수거함이 있는 곳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마침내 '캔류, 고철'이라고 되어있는 통에 나는 보온병을 가만히 떨어뜨렸다. 챙그랑. 나는 보온병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돌아섰다. 고철더미 속에 잠겨버린 보온병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 나의 보온병! 오직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인사를 건네었다.  



*Tiger 보온병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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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버지의 꿈은 당신의 자식들이 모두 약사가 되어 약국을 차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그 약국의 이름까지 지어두셨다. '삼 남매 약국'. 의약 분업 이전에 약사들은 약의 처방과 조제의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특정 질병에 대한 약을 잘 만들어 파는 약국은 전국에 이름이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피부병에는 서울의 A 약국, 관절염에는 천안의 B 약국, 불면증에는 부산의 C 약국... 이렇게 환자들은 병을 낫게 해줄 기적의 약을 찾아 유명 약국 유람에 나섰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약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었다. 나름의 비법으로 약을 만드는 약사가 큰돈을 버는 일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제약업계에서 보낸 부친이 보기에 가장 안정적인 직업은 '약사'였다. 물론 아버지는 제약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 많은 의사들도 만났다. 당신의 자식이 의사가 되면 당연히 좋겠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의대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의대를 가기 위해 이과를 선택한 나는 수학의 벽에 좌절했다. 남동생은 공대에, 여동생은 인문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되니 아버지의 꿈인 '삼 남매 약국'은 진작에 파토가 나버렸다. 

  아버지는 내가 약대에 진학하지 못한 일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내 문과 머리로는 이과가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거나, 약국에서 약을 지을 때 약사를 보면, 나는 저 일은 못하겠다 싶다. '전문직'이라는 명칭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다. 물론 그 직업을 가지면 평생을 두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에다 '의사'라는 직업은 얼마나 때깔이 좋은가? 의사 자식을 둔 부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하다.

  어머니의 계모임 친구들 가운데에는 K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의료 기사였다. 그 아저씨는 의사 친척의 병원에서 온갖 궃은 일을 하며 설움을 겪었다. 긴 세월 동안 아저씨의 가슴에는 자기 자식을 반드시 의사로 만들겠다는 염원이 자리 잡았다. 그건 아내인 K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아주머니는 틈만 나면 절에 불공을 드리며 기도했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지방대 공대에 합격했지만,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를 했다. 아주머니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 그 아들이 의대에 합격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의대에 합격했다. 지방대이기는 해도 의대 합격은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아주머니와 남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의료 기사로 살아온 그 힘들었던 세월의 한풀이는 아들의 의대 진학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아들은 서울에서 개업해서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내 부친은 노년의 많은 시간을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당신이 보기엔 자식이 별 쓸모도 없는 공부를 하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었다. 내가 서른의 나이에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마도 아버지는 살짝 다른 소망을 품기도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수능을 준비해서 약대에 진학해라. 약사가 되면 약국 개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약 회사에는 약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있다. 약사가 되어서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영화는 취미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 않느냐...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결국 모른 척 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 이후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당신의 오롯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동생들은 아등바등 제각각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말이 좋아 마케팅이지, 동생들이 하는 일은 물건을 파는 일이다. 각각 다루는 상품이 다를 뿐이다. 월급쟁이의 버거움과 비애를 동생들은 절실히 느끼며 살고 있다.

  "너는...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아버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그 말씀을 하셨다. 내게는 아버지의 그 말이 유언처럼 가슴에 박혀있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런저런 잡문들을 써 내려가고 있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아주 가끔, 아버지의 꿈이었던 '삼 남매 약국'을 떠올려 본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약국에 전국에서 구름떼처럼 환자들이 몰려와서 약을 사가고, 우리 삼 남매는 아주 큰 부자가 되는 꿈. 물론 그 꿈은 '의약 분업'이라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라도 불가능했다. 지난주, 나는 추모 공원에 모신 아버지를 보고 왔다. 아버지의 유골함은 고요 속에 잠겨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룰 수 없었던 꿈에 대한 회한을 가지고 눈을 감으셨을 것이다. 글은 쓰고 있어요. 계시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나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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