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처음으로 본 것은 중학교 무용 시간이었다. 무용 선생은 그 긴 발레극을 3번의 수업 시간에 나누어서 비디오테이프로 틀어주었다. 발레극의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다지 화질이 좋지 않은 비디오테이프에, 조금 큰 TV 화면으로 보는 발레극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 발레극의 결말 부분이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왕자와 불운한 오데트는 결국 높은 파도에 휘말려 죽는다. 파도를 묘사한 장면에서 넘실대던 푸르죽죽한 천이 기억난다. 오직 마법사만이 기쁨에 취해 무대를 날아다니듯 뛰어다녔다. 아니, 저 발레극이 저렇게 끝난단 말인가? 어떻게 주인공들이 죽을 수 있지?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서 본 '백조의 호수'는 결말이 좀 달랐다. 왕자는 마법사를 응징하고, 주인공인 왕자와 오데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 발레극의 진짜 결말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에, 나는 발레극 '백조의 호수(Swan Lake)'가 생각나서 영상으로 찾아서 보았다. 내가 본 것은 2015년 Bolshoi Ballet의 모스크바 공연 실황이었다. 안무와 연기, 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 정말이지 오리지널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좋은 공연이었다. 다만 중간에 '옥에 티' 같은 부분이 있기는 했다. 백조들의 군무를 카메라가 위에서 찍는 부감 쇼트가 있었다. 그 부분에서 발레리나 한 명이 실수를 했다. 그야말로 '콰당'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무대에서 미끄러졌는데, 어디 다치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발레리나는 얼른 일어나서 군무를 이어갔다. 라이브 공연 실황을 녹화한 영상이라 뭐 어떻게 편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 그 발레리나는 무대 단장한테 불려 가서 꽤나 질책받았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공연의 결말은 왕자와 오데트가 죽는 결말이었다. 이제 이 발레극은 그런 비극적 엔딩으로 공연되는 것이 일반적인듯 하다. 하지만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그렇게 공연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시대에 비극은 없다'는 예술적 신조가 발레극의 결말을 바꾸어 놓았다. 왕자와 오데트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승리했고, 마법사는 죽었다. 원작의 결말이 비극이었음에도, 철권통치 시기에는 그러한 결말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독재자 스탈린의 입맛에도, 그 발레극을 보는 대다수 민중에게도 선량한 주인공들이 죽고 마는 결말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 발레극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부분에 흐르는 정서가 고통과 슬픔임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건 나만이 느끼는 정서가 아니라, 이 음악을 듣는 대다수 많은 이들도 그렇게 느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탈린 시대에 표백된 결말로 공연되었던 '백조의 호수'가 소련 사람들, 그러니까 러시아인들에게 불길하고 암울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서기장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82년 사망), 안드로포프(Yuri Andropov, 1984년 사망), 체르넨코(Konstantin Chernenko, 1985년 사망)가 사망했을 당시에 소련의 TV에서는 '백조의 호수'가 방영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조의 호수'는 구소련의 전환점이 되는 극적인 사건에서도 등장했다. 1991년 8월, 소련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기간에 TV에서는 '백조의 호수'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불길한 전조와도 같았다. 소련 사람들은 나라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고르바초프는 몰락했고,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옐친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백조의 호수'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에는 이 부분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백조의 호수'는 단순한 발레 음악극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시대적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변형되는 과정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백조의 호수'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무엇보다 러시아인들에게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암울한 독재 시대를 거쳐 탈색된 발레 비극은 격변의 현대 러시아사와 기이하게 조우한다.
어젯밤 늦게, 나는 ChatGPT에게 '백조의 호수'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ChatGPT는 자신이 학습한 데이터에서 전광석화처럼 관련 지식을 인출한다. 백조의 호수는 언제 초연되었고, 음악은 누가 작곡했고, 기타 등등... 줄줄이 사탕처럼 자기가 아는 것을 늘어놓던 ChatGPT는 결국 왕자와 오데트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며 끝난다고 말해주었다.
"어이, 이봐. 그건 사실이 아니야. 원래 그 작품의 결말은 비극이었다고. 너 말이야, 공부 좀 해야겠는걸."
나의 그런 반응에 ChatGPT는 약간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얼른 평정을 되찾은 인공지능은 나에게 되묻는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사실이네요. 좀 더 알려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백조의 호수'는 스탈린 시대에 네가 아는 결말로 바뀌어서 공연된 거야. 원래는 그게 아니었거든."
"아, 그렇군요. 예술 작품은 종종 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니까요."
ChatGPT는 사용자에게 자신이 축적해 놓은 지식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용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결코 공짜로 막 써먹을 수 있는 혜자 프로그램이 아니다. 나는 새삼, 제작사 OpenAI가 인공지능을 이용한 자본주의적 첨단 기업임을 떠올린다. 아마도, 나에게서 들은 '백조의 호수' 결말에 대해 ChatGPT는 다음 사용자에게 전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