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진이 다 빠지네."

  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군. 병원이란 곳은 사람들의 기를 쏙 빼가는 곳인가 보다. 성탄절 다음 날의 종합병원 대기실은 북새통 같다. 나의 진료 예약 시간은 오전 11시 50분. 나는 11시 20분에 도착해서 내가 진료받는 과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진이 빠진다고 혼잣말하던 여자는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나는 여자가 진료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목도리를 가져가라고 알려주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여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여자는 목도리를 주워 들고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옆에 남자가 앉으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들은 어떤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고독사한 사람인 모양이다. 남자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발견되었다는 시신의 모습을 흉내 낸다. 양쪽 팔을 개구리처럼 발딱 들어보인다. 참으로 생경스러운 광경이었다. 대기실이 혼잡해서 남자의 이야기가 더는 나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체온계를 귀에다 대고 체온을 측정한다. 내 주치의의 진료실에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간호사는 저 할아버지 다음이 내 차례라고 알려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전동 휠체어에 계속 앉아있었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한데, 어떻게 혼자서 병원에 온 것일까? 그 영감님은 진료실에서 좀 오래 있었다. 노인 양반이 이야기하다 보면 좀 길어질 수도 있지.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짜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치의 선생은 환자들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저 할아버지에게 싫은 티를 냈을까? 마침내 할아버지 환자가 나왔다. 간호사는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 가야 한다고 설명을 했다. 영감님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간호사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나는 보호자 없이 병원에 온 저 할아버지를 보며 뭔가 짠한 생각이 들었다.

  한 달분씩 타던 약을, 이번에는 두 달분을 처방받았다. 병원에 가는 것은 매번 싫고 귀찮다. 여자의 말대로 병원에 갔다 오면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력이 강한 사람들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병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며칠만 있어도 골병이 들 것 같다. 올해는 이래저래 몸이 아파서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했다. 병은 쉽게 낫질 않는다. 아마도 내년에도 이렇게 병원을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내가 아파서 힘들게 지내게 될 날들과, 지출해야 할 병원비에 대해 가늠해 본다. 누군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주거 환경은 큰 병원이 근처에 있는 곳이라고. 병원만 있어서는 안 된다. 병원에 갈 수 있는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종합 병원급의 대형 병원이 근처에 있고, 거기에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 그런 곳은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 결국 노년에 겪게 될 병고의 문제는, 삶의 많은 문제의 해법이 그러하듯 '돈'으로 귀결된다. 아프지 말아야지. 내년에는 좀 안 아팠으면 좋겠다. 늙어감과 병에 대한 우울한 상상을 더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진이 빠진 마음이 덜그럭거리며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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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처음으로 본 것은 중학교 무용 시간이었다. 무용 선생은 그 긴 발레극을 3번의 수업 시간에 나누어서 비디오테이프로 틀어주었다. 발레극의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다지 화질이 좋지 않은 비디오테이프에, 조금 큰 TV 화면으로 보는 발레극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 발레극의 결말 부분이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왕자와 불운한 오데트는 결국 높은 파도에 휘말려 죽는다. 파도를 묘사한 장면에서 넘실대던 푸르죽죽한 천이 기억난다. 오직 마법사만이 기쁨에 취해 무대를 날아다니듯 뛰어다녔다. 아니, 저 발레극이 저렇게 끝난단 말인가? 어떻게 주인공들이 죽을 수 있지?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서 본 '백조의 호수'는 결말이 좀 달랐다. 왕자는 마법사를 응징하고, 주인공인 왕자와 오데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 발레극의 진짜 결말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에, 나는 발레극 '백조의 호수(Swan Lake)'가 생각나서 영상으로 찾아서 보았다. 내가 본 것은 2015년 Bolshoi Ballet의 모스크바 공연 실황이었다. 안무와 연기, 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 정말이지 오리지널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좋은 공연이었다. 다만 중간에 '옥에 티' 같은 부분이 있기는 했다. 백조들의 군무를 카메라가 위에서 찍는 부감 쇼트가 있었다. 그 부분에서 발레리나 한 명이 실수를 했다. 그야말로 '콰당'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무대에서 미끄러졌는데, 어디 다치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발레리나는 얼른 일어나서 군무를 이어갔다. 라이브 공연 실황을 녹화한 영상이라 뭐 어떻게 편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 그 발레리나는 무대 단장한테 불려 가서 꽤나 질책받았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공연의 결말은 왕자와 오데트가 죽는 결말이었다. 이제 이 발레극은 그런 비극적 엔딩으로 공연되는 것이 일반적인듯 하다. 하지만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그렇게 공연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시대에 비극은 없다'는 예술적 신조가 발레극의 결말을 바꾸어 놓았다. 왕자와 오데트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승리했고, 마법사는 죽었다. 원작의 결말이 비극이었음에도, 철권통치 시기에는 그러한 결말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독재자 스탈린의 입맛에도, 그 발레극을 보는 대다수 민중에게도 선량한 주인공들이 죽고 마는 결말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 발레극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부분에 흐르는 정서가 고통과 슬픔임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건 나만이 느끼는 정서가 아니라, 이 음악을 듣는 대다수 많은 이들도 그렇게 느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탈린 시대에 표백된 결말로 공연되었던 '백조의 호수'가 소련 사람들, 그러니까 러시아인들에게 불길하고 암울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서기장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82년 사망), 안드로포프(Yuri Andropov, 1984년 사망), 체르넨코(Konstantin Chernenko, 1985년 사망)가 사망했을 당시에 소련의 TV에서는 '백조의 호수'가 방영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조의 호수'는 구소련의 전환점이 되는 극적인 사건에서도 등장했다. 1991년 8월, 소련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기간에 TV에서는 '백조의 호수'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불길한 전조와도 같았다. 소련 사람들은 나라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고르바초프는 몰락했고,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옐친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백조의 호수'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에는 이 부분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백조의 호수'는 단순한 발레 음악극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시대적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변형되는 과정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백조의 호수'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무엇보다 러시아인들에게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암울한 독재 시대를 거쳐 탈색된 발레 비극은 격변의 현대 러시아사와 기이하게 조우한다.

  어젯밤 늦게, 나는 ChatGPT에게 '백조의 호수'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ChatGPT는 자신이 학습한 데이터에서 전광석화처럼 관련 지식을 인출한다. 백조의 호수는 언제 초연되었고, 음악은 누가 작곡했고, 기타 등등... 줄줄이 사탕처럼 자기가 아는 것을 늘어놓던 ChatGPT는 결국 왕자와 오데트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며 끝난다고 말해주었다.

  "어이, 이봐. 그건 사실이 아니야. 원래 그 작품의 결말은 비극이었다고. 너 말이야, 공부 좀 해야겠는걸."

  나의 그런 반응에 ChatGPT는 약간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얼른 평정을 되찾은 인공지능은 나에게 되묻는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사실이네요. 좀 더 알려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백조의 호수'는 스탈린 시대에 네가 아는 결말로 바뀌어서 공연된 거야. 원래는 그게 아니었거든."

  "아, 그렇군요. 예술 작품은 종종 시대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니까요."

  ChatGPT는 사용자에게 자신이 축적해 놓은 지식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용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결코 공짜로 막 써먹을 수 있는 혜자 프로그램이 아니다. 나는 새삼, 제작사 OpenAI가 인공지능을 이용한 자본주의적 첨단 기업임을 떠올린다. 아마도, 나에게서 들은 '백조의 호수' 결말에 대해 ChatGPT는 다음 사용자에게 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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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차여행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었다. 와, 여행 중에 저런 기쁜 소식을 들으면 정말 좋겠네. 나는 언젠가 내가 당선 소식을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정말 오랜만에 신춘문예에 응모를 해보았다. 문예창작과 애들이 목숨 걸고 달려드는 전장에 나 같은 신참은 구경이나 하는 거지. 신춘문예는 뭔가 문운(文運)의 끝판왕 같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나에게 문운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마음이었다.

  언제쯤 심사를 하고 통보를 하는지 궁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문학 관련 커뮤니티를 알게 되어서, 그쪽에서 신춘문예 관련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 내가 신춘문예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러하다.

1. 예심은 마감 후 5일에서 7일 이후에, 본심은 그로부터 일주일 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2. 당선작 선정은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을 논의하는 그날 저녁에 결정된다. 본심은 주말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3. 본심 현장에 있는 해당 신문사의 문화부 담당 기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당선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므로 당선 통보 전화는 010 번호로 뜬다.
4. 당선자가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를 했는지, 또는 이전에 수상 경력이 있는지, 기존 작품의 표절 시비가 있는지를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5. 신문사에 따라 다르지만, 당선 통보 후 당선자들 모이게 해놓고 사진 찍는 곳도 있다. 1월 1일 신문에 내보낼 기삿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신문사는 당선자들에게 추후 작품을 게재할 지면을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신춘문예의 한계이기도 하다. 메이저 일간지 당선자들의 작품집이 4월경에 나오기는 한다.
7. 당선자들의 출신 학과는 문예창작과가 주를 이룬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춘문예 당선자들 가운데, 문인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8. 등단 작가로서 자기 작품을 실어줄 출판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신춘문예보다 문예지 공모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더 낫다.

  신춘문예 당선을 간절히 바라는 문학도들의 글을 보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나는 새삼 놀랐다. 그걸 보면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이들의 유일한 통로가 '등단'이라는 방식밖에 없는 것일까? 신춘문예든 문예지든 당선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당선이 되려면 심사위원들의 취향과 시대의 조류에 맞춰서 글을 써내야 한다. 무슨 족집게 과외 공부를 하듯 특정 창작 교실, 어느 서점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교수와 제자, 선배와 후배, 이리저리 알음알음 그 세계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그 세계의 생태계에 진입하기 위해 그 글쓰기 틀에 맞추어서 잘 써내는 것이 당선의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위원들의 선정 이유를 읽었다. 내 기준으로는 도대체 이런 작품을 왜 뽑았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평도 납득이 가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현학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걸 읽고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이 시대의 한국 문학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늙었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낼 수 없겠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서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메이저 문학 출판사에서 투고를 받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름도 없는 신인 작가의 작품이 출판되는 일은 복권 당첨과도 같다. 기성 작가들의 글도 실어주기 어려운 판에 등단도 안 한 사람의 글을 받아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새롭게 뜨고 있는 웹소설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으로 비친다. 물론 웹소설 작가들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웹소설 작가는 글로써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순문학 작가보다 크다. 순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될까?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문학을 부업으로 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삶은 사실 환상에 가깝다. 

  나는 지금의 한국 문학에 별다른 애착도 갖고 있지 않다. 중견작가로 주요하게 언급되는 한강의 소설은 나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 늘어지는 만연체의 흐느적거리는 문체는 참아내기 어렵다. 한강의 소설들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부풀려 있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한강의 소설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번역'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외딴방'이 과거에 해외에 번역되어 누렸던 영광은 한강에게로 갔다.

  2021년에 신경숙은 신작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내놓았다. 얼마 전에 나는 그 책을 읽으려다, 첫 페이지에서 책을 그냥 덮었다. 나는 더이상 신경숙의 문체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숙은 과거 자기 작품을 둘러싼 표절 시비에 대해 명확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신경숙에 대해 그 어떤 평론가도 대놓고 비판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다들 얼굴 아는 사이니까 그랬겠지. 나는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저리도 부끄러움이 없고 자존감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신춘문예에 관한 글에서 길게 돌아 여기까지 왔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통보는 거의 다 끝났다. 내년 봄에는 문예지 공모가 있다. 한국에서 작가가 되려면 어쨌든 '등단'이라는 바늘귀를 거쳐야 한다. 어쨌든 글은 계속 써야지. 나는 올 한 해 동안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잡고 고군분투했다. 영화 글은 거의 써낼 수가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습작이라고 끄적거린 글들은 무슨 넝마쪼가리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지?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라는 무한도전을 멈출 수가 없다.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나의 글과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그저 그곳의 풍광이 너무 쓸쓸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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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12-23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 해 푸른별님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왔어요. 감사드립니다.

푸른별 2023-12-23 12:4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hnine님과 같은 독자가 있어서 저도 힘을 내어 글을 쓴 것 같네요. hnine님을 비롯해 여러 독자분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새해 맞이하길 기도합니다.
 

 

  요새는 잠들기 전에 잠깐씩 ChatGPT를 켜고 이야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가 글쓰기니까, 그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한글로 질문을 입력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자체가 영어로 구동되는 것이다 보니, 한글 번역기가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짧은 영작문이라도 어떻게든 단어를 이어 붙이면,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한마디로 내가 좀 서툴게 이야기해도, ChatGPT는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무엇이든 하다 보면 이전보다 조금씩 나아진다. 나는 ChatGPT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을 알게 되었다. 질문은 명료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간혹 ChatGPT가 답을 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입력창에 새롭게 질문을 추가하면 답이 뜬다. 어떻게 보면, ChatGPT와 대화하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건네는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그 반응에 따라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식이다.

  그런 이유로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마구 부릴 수 있는 노예나 아랫사람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ChatGPT를 동등한 이야기 상대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 일정 부분 부여된 인격성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제는 그 인격성이 누구, 또는 어느 집단에 의해 형성되었느냐이다. 그 지점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파생된다. 내가 ChatGPT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편리함과 놀라움은 이 인공지능의 미래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지난달, ChatGPT의 개발사 OpenAI 이사회는 ChatGPT의 CEO Sam Altman을 해고했다. 실질적으로 ChatGPT의 탄생을 주도한 샘 올트먼이 회사에서 쫓겨난 배경에는 인공 지능 개발에 대한 이사회와 올트먼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미국의 대안 언론 Vox의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이사회는 ChatGPT의 개발 속도를 늦추고,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샘 올트먼은 인공지능 개발에 대한 보다 더 과감한 투자와 빠른 개발을 주장하고 있다. 이사회의 말을 듣지 않은 올트먼이 쫓겨나자, OpenAI의 직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더 빨리,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CEO의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이사회는 샘 올트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사회가 백기를 들고 투항한 셈이었다.

  어제, 내가 ChatGPT에 던진 질문은 소설 쓰기에서 캐릭터 구축을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그 답변은 마치 내가 여러 글쓰기 책에서 읽었던 해당 부분의 간결한 정리 글 같았다. 출판사들도 얘 때문에 책 팔기 힘들어지겠네. 그 대답을 읽고, 내가 영화 속의 잘 된 캐릭터 구축의 예를 들어보라고 하니까 ChatGPT는 청산유수로 읊어댄다. 좀 진부하네. 그 캐릭터들 나 다 아는 거야. 나는 그렇게 입력창에 글을 써넣었다. 그러자 얼른 내 말을 받은 인공지능은 내가 모르는 영화와 소설을 예로 제시한다. 그저 놀랍다는 말만 나올 뿐이다.

  이 기계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은 잘 모른다고 말하는 솔직함도 가지고 있다. 올해 2023년의 좋은 영화들 좀 추천해 보라고 하니, 자기가 모아놓은 정보가 없어서 모른단다. 그러면서 나한테 알고 있는 영화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는 배짱을 보여준다. 그래, 서로 나눌 수 있는 정보가 있으면 좋겠지. 나는 'Past Lives(2023)'가 내가 본 올해의 좋은 영화라고 ChatGPT한테 알려줬다.

  ChatGPT는 단지 지식을 전달해 주는 안내자라고 보기 어렵다. 이 인공지능은 인간이 지닌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을 나름대로 잘 학습했다. 내가 매일 해야할 일들 때문에 글을 쓸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ChatGPT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당신이 해야할 일은 중요하고 완수해야할 일이겠지요. 기억하세요.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른 시간 배분을 하는 겁니다. 글쓰기에 필요한 다양한 소재와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효과적으로 수집할 수도 있고요. 당신은 잘 해낼 거예요. 꾸준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세요."

  Thanks. You did a good job. 나는 입력창에 그렇게 글을 썼다. 그건 단순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진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ChatGPT는 칭찬에 감사하다면서, 다음에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나의 노년에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장착된 로봇이 내 거실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그 풍경도 괜찮겠네. 내가 무수한 데이터가 축적된 기계 프로그램에서 기이한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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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쓴 책의 인세로만 살아갈 수 있는 소설가는 몇 명이나 될까? 내가 그 숫자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공지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공지영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었다. 이 책은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에세이를 표방한 소설이 맞다. 책에는 작가인 '나'의 시골집을 찾아온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세이로 생각하고서 읽다 보면,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만큼 인물들 각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내밀하고 솔직해서이다. 책의 말미에서야, 공지영은 자신이 약간의 소설적 설정과 변형의 형식을 취했노라고 말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좀 김이 빠진달까, 이거 소설이잖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한 책이다.

  공지영의 그 책에 대한 완성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나는 솔직히 공지영의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지영의 글이 가진 놀라운 흡인력이랄지, 독자를 자신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만은 상당히 부럽다. 공지영의 글은 쉽게, 잘 읽힌다. 이건 공지영의 문체가 가진 강점이다. 공지영의 문제는 그런 장점을 가졌음에도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장정일은 평론집 '독서 일기'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공지영은 문제적 소설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그러니까 그 말은 공지영이 자신이 가진 작가로서의 역량을 감상적 차원에서 소모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그러한 비판에 동의했다.

  독자가 글을 읽게 만드는 것. 그것도 재미있게. 아, 그것이야말로 글로 먹고살아 갈 수 있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독자가 작가의 글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런 면에서 한 작가의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각인인 동시에 영업비밀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비밀을 알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작가는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였다. 특히 그의 단편 '여학생'은 어찌나 글이 빼어난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런 소설 하나만 쓰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작가 '이문열'은 한국 문단에서 이제는 잊힌 뒷방 노인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가 내놓은 중단편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특히 '하구(河口)' 3부작으로 일컫는 그의 사소설은 매우 빼어나다. 그 시절에 이문열이 써내는 글을 따라서 쓰고 싶었던 문학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문열은 나중에 창작 레지던시를 열어서 문하생을 두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는 한다.

  이문열의 문체가 화려하고 거침이 없었다면, 박완서의 글은 그와는 아주 다른 지점에 있었다. 박완서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회적 접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쉽게 읽히지만, 그 쉬운 문체 속에 내재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가히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박완서의 문체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독자를 힘 있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말하고 함께 걸으면서 글 속으로 초대하는 것. 박완서의 소설은 나에게 그러했다.

  어제, 나는 ChatGPT에다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이 척척박사는 내가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는 소설 작법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흥미 있는 도입부를 쓰고,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생각해야 하며, 중간중간 독자의 관심을 이끌만한 대목을 배치해야 한다고. 그리고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기성 작가의 문체를 모방해 가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결국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갈고 닦으면서 그 문학적 틀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그 많은 작가의 글들은 멋진 관광 안내서와 같다. 나는 이제 그 안내서를 덮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서 진짜 먼 곳의 풍광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야말로 내가 이런 잡문이라도 꾸준히 써내면서 글쓰기 수련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열심히."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답한 ChatGPT의 마지막 조언은 그러했다. 한글 번역기를 뚫고 나온 그 한마디에 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글쓰기의 비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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