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 밑바닥 인생 넬리의 선택

  케이블 방송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채널은 국회방송(NATV)입니다. 외국의 다양한 다큐는 물론 괜찮은 영화도 방영합니다. 특히 '다양성 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이 눈길을 끕니다. 주로 제 3세계 영화들, 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 변방 국가의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거든요. 그 영화들의 작품성이 균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시청자들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특색있는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국회방송에서 방영한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좀 길어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이 한국어 제목이고, 영어 제목은 'Secret Name'이죠. 프랑스어 제목 'La Place d'une autre'은 번역을 해보면 '타인의 장소'가 되더군요. 제목부터 번잡스럽고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드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든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약간의 스릴러 느낌도 있구요. 자, 그럼 영화 '시크릿 네임'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대, 여자 주인공 넬리는 고아입니다. 하녀 생활을 하던 넬리는 주인집 남자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옵니다. 하층민 고아 여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지요.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넬리는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넬리에게 적십자사의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넬리는 간호사의 일을 배우고, 전장에 파견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거든요.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지요. 그렇지만 넬리는 놀라운 적응력과 활달한 성품으로 간호사 일을 잘 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라는 이름의 스위스 여성이 프랑스군 막사에 머물게 됩니다. 로즈는 프랑스로 가야하는데, 전쟁통에 길을 잃었어요. 로즈는 넬리에게 프랑스에 있는 엘레노어 부인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로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인 엘레노어 부인이 후견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죠. 상류층 여성이기는 해도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잃은 로즈 앞에 놓인 삶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넬리와 로즈, 두 여성이 잠깐 통성명하는 사이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쾅, 로즈는 죽고 넬리는 겨우 목숨을 건지죠.

  넬리는 무척 영리한 여성이에요. 넬리는 재빨리 로즈의 소지품을 챙기고, 로즈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네, 넬리는 로즈의 삶을 살아보려는 겁니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빠져나온 넬리는 엘레노어 부인이 있는 낭시로 향합니다. 그리고 곧 부인을 만나죠. 부유한 사교계 인물인 엘레노어 부인은 로즈를, 아니 로즈 행세를 하는 넬리를 환대합니다. 특유의 붙임성과 신실한 태도로 넬리는 부인이 신뢰하는 손님이 되죠. 손님이라기보다는, 우리말의 '수양딸'이 더 어울리는 단어겠군요.

  넬리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좀 불안하기는 하죠.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구요. 넬리는 충분히 불우한 삶을 살았거든요. 넬리가 로즈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로즈는 전쟁통에 불운하게 죽었으니까요. 부인에게는 목사인 조카 줄리앙이 있는데, 그도 넬리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엘레노어 부인은 넬리를 더 아끼게 되고, 사교계에도 소개하려고 하죠. 이제 넬리에게 꽃길만 펼쳐지는 걸까요? 그런데,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넬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로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죠. 넬리는 자신의 사교계 데뷔 파티에 나타난 로즈를 보고 기절해 버립니다.

  오, 영화가 꽤나 흥미진진해집니다. 과연 넬리는 어떻게 될까요? 넬리의 정체를 알게 된 엘레노어 부인은 어떻게 할까요? 로즈는 길길이 날뛰면서 넬리가 자신의 행세를 하는 가짜라고 외치죠. 그런데 거렁뱅이같은 행색의 로즈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부인은 넬리를 철썩같이 믿습니다. 넬리는 로즈만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자신의 평화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죠.

  이후 넬리와 로즈의 대결은 스릴러물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게 되죠. 줄리앙은 넬리가 진짜 로즈인지 적십자사의 기록이며 전쟁 때 로즈와 함께 일했던 군의관까지 만나봅니다. 로즈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정신병원에 갇히고요. 와우, 이 영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요?

  그런데 영화 '시크릿 네임'은 중반부가 지나면서 이야기의 힘을 잃어갑니다. 넬리는 로즈가 겪는 고초를 외면하질 못해요. 넬리는 결국 자신이 로즈 행세를 했다는 걸 부인과 줄리앙에게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길거리 여성들이 머무는 구빈원으로 가버리죠. 엘레노어 부인은 그런 넬리를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넬리는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딱, 끝나버립니다. 대체 이 허망한 결말은 뭔가요? 스릴러물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 뭔가 감동이 있는 드라마도 아닌 '시크릿 네임'은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에요.

 
2. 소설 'The New Magdalen(1873)'과 Wilkie Collins(1824-1889)

  나는 영화 '시크릿 네임'이 뭔가 더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읽어봤죠. 영화의 시나리오는 원작이 되는 소설을 바탕으로 쓰여졌어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작가인 Wilkie Collins(1824-1889)가 쓴 'The New Magdalen(1873)'이라는 소설이었죠. 제목의 '막달레나'는 신약 성서 속의 창녀 막달레나가 맞아요. 소설은 중편 소설의 분량입니다. 오래전에 저작권이 풀린 작품이라 인터넷으로 원본을 구해서 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Project Gutenberg: Free eBooks www.gutenberg.org). 나는 원작 소설이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았어요.

  거리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 여자 주인공 Mercy Merrick이 영화의 넬리입니다. 로즈는 'Grace Roseberry'라는 이름으로 나오고요. 성씨의 로즈베리에서 로즈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재밌군요. 엘레노어 부인은 Lady Janet으로 나옵니다. 재닛 부인의 조카 줄리앙은 영화와 이름이 같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이 하나 더 있죠. 재닛 부인의 지인으로 중산층 남성인 Horace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와 거의 비슷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1차 대전이 아닌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이구요.

  원작 소설에서 호레이스는 머시(영화의 넬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줄리앙도 넬리를 사랑하게 되죠. 좀 통속적인 삼각관계 로맨스군요. 이 로맨스는 그레이스의 등장으로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그레이스는 머시를 사기꾼 범죄자로 비난하며, 머시의 천한 신분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고아 출신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머시에게 온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속 머시의 과거에는 매춘부로 살았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의 넬리가 그냥 거지로 살았던 것과는 좀 다르죠. 말하자면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의 머시는 진짜 영락한 하층민 여성의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최하층민 출신인 머시를 인간적인 품격이 있는 여성으로 그려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레이스입니다. 이 상류층 출신의 여성은 오만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재닛 부인이 그레이스의 신분을 알고 나서도 머시에게 마음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결한 여왕이 다스리는 영국에서 '가정'은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 가정에 매춘부 출신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자리합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그런 면에서 아주 남다른 시대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작가 '윌키 콜린스'의 이름은 진짜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영화 '시크릿 네임'을 보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영문 위키에 나온 작가의 이력을 읽어보니, 동시대 영국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교류도 했을 만큼 이름있는 작가였습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주로 추리소설이었어요. 소설 'The New Magdalen'은 콜린스에게 약간 막간극 같은 느낌을 주죠. 이 소설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의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오죽 인기가 있었으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을까요. 콜린스는 소설을 희곡으로 직접 각색도 했습니다. 나는 희곡도 읽어보려다가 그만두었어요. 뭐 소설하고 같은 내용일 테니까요.

  소설의 인기는 콜린스 사후에 무성 영화 시절로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무성 영화가 여러 편 있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걸 구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검색되는 자료가 없어서 아쉽더군요. 결국 그 무성영화 시절의 유산이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로 이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 소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건 '새로운 막달레나'에 내포된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일 겁니다. 소설에서 머시의 신분이 탄로 나면서 호레이스는 머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매춘부 여성은 신성한 가정의 여주인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목사인 줄리앙만이 머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 합니다. 재닛 부인은 둘의 사랑을 묵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줄리앙과 머시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지요. 신대륙 미국만이 신분과 과거를 뛰어넘은 사랑을 포용할 수 있으니까요. 윌키 콜린스는 불행한 매춘부에게 자비(여주인공 Mercy의 이름 그대로)를 베풀지 않는 당시 영국 사회의 폐쇄성과 이중성을 에둘러 비판합니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윌키 콜린스 자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겁니다. 콜린스는 이른바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는 애 딸린 과부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그 두 여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콜린스에게 동시대 사람들이 큰 돌맹이는 아니더라도 작은 돌맹이라도 던졌겠지요. 그의 행실은 분명히 비도덕적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콜린스는 '두 집 살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마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고수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콜린스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이들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는 너희들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빅토리아 시대라는 번지르르한 도덕 우위의 시대에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영화 '시크릿 네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여정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에게는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한 편의 영화는 그렇게 접혀진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시대,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나의 이 글도 그러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작가 Wilkie Collins(1824-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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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희(김민희 분)는 영화사 직원입니다. 만희는 지금 칸(Cannes)에 머물고 있어요. 영화사의 일 때문에 출장을 온 거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만희는 상사인 양혜의 호출을 받습니다. 카페에서 만희와 마주앉은 양혜는 만희의 해고를 통보합니다. 양혜는 만희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만희는 자신의 어떤 점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지만, 양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는 상사의 말대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상사 양혜는 무슨 이유로 5년 동안 함께 일해온 부하 직원 만희를 해고한 것일까요?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는 낯선 타국의 휴양지에서 그렇게 해고 통보를 받은 만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만희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그렇군요. 만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해두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의 카메라를 통해 전달됩니다. 클레어는 칸에 온 관광객인데 우연히 만희와 만나게 됩니다. 클레어의 우연한 만남은 만희의 상사 양혜, 영화감독 소완수와도 이어지고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연'이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 얼개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건 하나의 공식 같아요. '클레어의 카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연 만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혜가 만희를 해고한 다음의 시퀀스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양혜와 영화감독 소완수는 칸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죠. 양혜는 만희가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완수는 양혜가 영화사 대표로서 후원하는 감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입니다. 소완수는 양혜에게 만희와의 일이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말해요. 그는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합니다.

 클레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입니다. 곧 칸의 관광객 클레어의 카메라는 만희, 양혜, 소 감독의 얼굴을 담아냅니다. 양혜와 소 감독은 클레어가 찍은 만희의 사진을 보게 되지요. 만희는 클레어가 보여준 사진에서 양혜와 소 감독을 발견하구요. 클레어의 사진은 잃어버린 조각 퍼즐의 일부분 같아요. 그 사진은 거기에 찍힌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어요. 양혜는 사진 속 만희의 화장한 모습에 놀랍니다. 양혜는 5년 동안 만희가 그렇게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만희도 클레어가 찍은 소 감독의 사진을 봅니다. 클레어는 술에 취한 소감독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죠. 만희는 클레어가 묘사한 여자의 모습을 듣고 양혜일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해고된 진짜 이유가 양혜의 질투였음을 알게 되지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국어 wikipedia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영화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소완수 감독 역을 연기하는데, wikipedia의 정진영의 캐스팅 항목에 소완수가 아닌 '홍상수 감독' 역이라고 되어있는 거예요. 아마 누군가 살짝 장난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면으로는 그 삐딱한 장난이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해요. 누가 보더라도 영화 속 소완수는 홍상수, 라는 사람 그 자체에요.

  만희는 소 감독의 옛 제자와 우연히(역시, 우연이군요) 마주칩니다. 그 제자는 소 감독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술 마시며 보냈다고 말하죠. 네, 그건 홍상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있던 시절의 홍상수가 그랬으니까요. 나는 홍상수가 학생들과 워크숍이나 영화 촬영 나갔을 때, 현장에는 늘 소주가 상자째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듣곤 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진짜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만들어진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죠. 배우들은 술에 취한 척하는 게 아니고, 진짜 술을 마시고 연기하니까요. 영화 속 소완수 역을 연기한 정진영도 진짜 소주를 마시고 그렇게 연기했을 겁니다. 진정한 '소주 무비(soju movie, 해외 평론가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일컫는 말)'의 완성이죠. 그리하여 소완수는 클레어가 찍은 만희 사진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져서 진창 술을 마시고 취합니다.

  클레어의 카메라, 참 제목은 그럴듯해요. 그렇다면 클레어는 왜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마구(!) 사진 찍는 걸까요? 만희는 클레어에게 사진을 찍는 이유를 묻습니다. 클레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Because the only way to change things is to look at everything again very slowly."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걸 매우 찬찬히, 다시 잘 살펴보는 것이라서 그래요)


  클레어에게 사진은 단지 과거의 멈춰진 순간이 담긴 것이 아닙니다. 그건 찍힌 순간부터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거예요. 클레어는 소완수에게 사진 속 인물이 사진에 찍히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찍은 소완수의 사진도 그렇다고 말하면서요. 이 무슨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요? 클레어의 사진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사진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 경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사진을 통해 흘러나오는 거죠. 홍상수에게 '영화'는 클레어의 '카메라'로 치환될 수 있는 거겠죠.

  영화 속 만희가 만난 소 감독의 제자는 '영화는 솔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잠깐만요, 이건 '동어 반복(tautology)'이군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서 배우 상원이 하는 말과 똑같거든요. 영화 속에서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은 배우가 되려면 '솔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감독, 작가로서 홍상수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진심을 담아서,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런 면에서 솔직한, 너무나도 솔직한 영화입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솔직할까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배우 김민희에 대한 진심이죠, 뭐.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부분이 있어요. 소완수는 리셉션 파티에서 만희와 마주칩니다. 만희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죠. 소완수는 만희가 남들의 눈요깃감이나 되는, 형편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아니, 자기가 대체 만희한테 뭔데요. 애인도 남편도 아니면서, 겨우 하룻밤 같이 잤을 뿐이잖아요. 소완수의 그런 질타를 받고는 만희가 보여주는 태도도 웃깁니다. 만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요. 감독님 말이 다 맞다면서 고개를 떨구죠. 아, 이건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모습 아니던가요? 물론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 순간의 만희도 담아냅니다.

  내게는 클레어의 직업이 '교사'라는 점이 나름대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만희가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게 만드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중요한 쇼트가 있어요. 클레어가 해변가 도로 아래의 지하로 들어가는 장면이죠. 글쎄, 관객은 그게 정확히 지하보도인지 동굴인지 잘 알 수는 없어요. 인터뷰(씨네 21, 2018년 홍상수와의 인터뷰 기사 참조)에서 홍상수는 '동굴'이라고 말하더군요. 해변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던 클레어는 그 동굴로 쓱, 들어가서는 갑자기 사라집니다. 다른 시각, 같은 장소를 만희도 지나가는데 만희는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리죠. 홍상수는 그 장면을 꽤나 공들여 찍었어요.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서 들어가는 사람,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차이일까요? 만희는 클레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마음속 진실을 들여다 보게 되는 거죠. 짧은 바지를 입은 자신을 향해 길길이 날뛰는 술고래 감독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우린 사랑하고 있어요.' 홍상수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죠.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합니다. 홍상수는 작가로서 진실된 사람이에요. 그의 진실이 반드시 세상의 도덕과는 일치하지 않지만요. 배우 김민희와의 관계를 공식화한 이 영화를 기점으로 홍상수는 한국 영화 평단에서 차츰 지워지기 시작해요. 그에게 덕지덕지 붙여졌던 온갖 상찬(賞讚)은 가을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더군요. 어쩌겠어요. 그건 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도 치루어야 하는 거겠죠.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홍상수의 솔직함, 진심이 불쾌하다고 느낄 관객들도 많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영화는 홍상수의 아주 내밀한 일기의 한 부분처럼 다가옵니다. 남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는 일도 때론 용기가 필요해요. 그 용기 하나만은 칭찬해 주고 싶더군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4/in-our-day-20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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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팔도강산> 연작: 개발독재 시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팔도강산(Paldogangsan, 1967)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


1.


  유선방송의 'KTV 국민방송'은 국정홍보 채널입니다. 그 채널의 대부분을 채우는 프로그램은 '우리 정부는 아주 잘 해내고 있다'를 선전하고 있죠. 그렇다고 정권 홍보물만 만들어 방영하는 건 아닙니다. 흘러간 옛날 드라마나 한국 영화도 틀어줍니다. 얼마 전에 KTV에서 한국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를 방영하더군요.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박정희 정권의 국정 홍보 영화로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시리즈물로 나오게 되었죠. 이후에 '팔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그 원조 격인 영화 '팔도강산' 초창기 3부작에 어떤 재미가 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팔도강산' 3부작의 주인공은 김희갑, 황정순 부부와 그 자녀들입니다. 노부부의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부부는 자식들이 사는 모습을 살피려 여행을 떠납니다. 1편에 해당하는 1967년의 '팔도강산'은 부부의 국내 유람 편을 담고 있구요. 부부의 자식들은 각자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모두 한국의 산업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경제발전에 일조하는 충실한 산업 역군인 셈입니다. 그 모습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맞물려 있죠. 이 영화의 제작사가 '국립영화제작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팔도강산(1967)'은 나름 유쾌한 프로파간다 영화입니다. 그것이 그 이듬해에 제작된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에 이르러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납니다. '속 팔도강산'은 부제가 '세계를 간다'입니다. 김희갑은 서독에 있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길에 해외 유람을 하게 되죠. 그의 자녀들이 해외 각지에 살고 있거든요. 김희갑이 미국에 들렀을 때, 그는 '한국 가발'의 우수성을 알게 됩니다. '가발'은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한 수출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자랑할 것이 얼마나 없으면 '가발'을 홍보했을까 싶어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경공업 제품 수출에 머물러 있을 때였으니까요. 뭔가 '뽀대나는' 수출 품목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걸 보여줬겠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보여줄 건 '한국 사람'과 '개척 정신'입니다. 미국을 떠난 김희갑은 브라질 이민을 떠난 사위 박노식을 만나러 가요. 그는 사위가 대농장을 일구는 농장주가 되었음을 알고 뿌듯해하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경험 부족으로 농장 개척에 실패한 사위는 주정뱅이가 되어버렸거든요. 그걸 알게 된 손아랫동서 신영균은 자신의 사업자금을 털어서 박노식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발도상국 한국의 국민에게 필요한 도전 정신이 아닌가요?

  김희갑은 해외 여행길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도 들릅니다. 구한말, 망국의 비탄을 끌어안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기념비를 참배하기 위해서이죠. 당신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고국이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를 고하는 후손의 묵념이 이어집니다. 그쯤 되면 후대의 한국 관객 또한 비감함에 젖을 수밖에 없겠지요. 서독에서 김희갑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태권도 사범으로 활약하고 있는 일가족을 만나고요. 중간에 프랑스 파리도 경유합니다. 이 영화의 해외 촬영분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아무리 국책 영화라고 해도 그 엄청난 제작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싶죠. 그건 그만큼 당시의 정권이 영화를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가 오락적인 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속 팔도강산(1968)'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이미자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에서는 패티김을 비롯해 김추자와 나훈아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요. 특히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은 서울시 홍보 영상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는 프로파간다의 틀에 코미디 장르와 뮤지컬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속 팔도강산'에서 해외 유람은 실컷 했으니, 3편에서는 한국으로 돌아와야죠. '내일의 팔도강산(1971)'에서 김희갑, 황정순 부부의 국내 유람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죠. 사위 김진규는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의 부하직원으로 나오는 구봉서가 시멘트 공장의 운영 현황을 청산유수로 읊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에 있어서 원자재인 시멘트의 중요성은 달리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이 영화에는 중공업 홍보만 나오지는 않아요. 작은 사위 신영균은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번듯한 사업체를 일구어 냅니다.

  물론 약간의 실패도 필요합니다. 맏사위 허장강이 무리하게 부동산 투자를 했다가 망하거든요.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아직은 시작되지 않았던 때였던가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어요. 아무튼 허장강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원래 사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죠. '내일의 팔도강산'은 수출 주도 산업과 함께 내수 진작의 토대를 놓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開發獨裁)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김희갑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줄줄 읊어대는 모습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의 씁쓸한 일면이기도 해요.     



2.   
     
  '내일의 팔도강산(1971)'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The Flower Girl, 1972)'는 그런 면에서 조금은 다른 결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명의 혁명가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정일의 주도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이 영화의 엄청난 성공으로 북한 당국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선전 효과를 실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꽃파는 처녀'는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 수출되어서 크게 흥행했으니까요. 공산국가인 중국에서의 흥행 대성공은 물론, 당시 동유럽 40개국에서 거둔 흥행 성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영화 '꽃파는 처녀'는 시대적 배경이 일제 강점기입니다. 주인공 꽃분이의 집안은 친일파 지주의 강탈에 풍비박산이 나버립니다. 악독한 지주 때문에 꽃분이의 오빠는 감옥에 갇히고, 꽃분이의 어린 여동생은 눈이 멀죠. 그리고 어머니마저 고된 종살이 끝에 숨을 거두지요. 꽃분이와 그 가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의 서사는 관객의 정서에 강하게 호소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영화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볼셰비키' 소책자를 나누어 읽으면서,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에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요.

  '꽃파는 처녀'를 보고 있노라면,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정서'에의 호소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분야 원조 맛집 주인으로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이 있지요. 네, 히틀러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었던 그 여성 감독 말입니다.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와 '올림피아(Olympia, 1938)'에서 리펜슈탈이 보여준 미학적 성취가 어떻게 나치 파시즘 정권을 홍보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관객의 눈과 마음을 움직이고, 급기야 홀리게 만드는 것. 프로파간다 영화의 심연에는 그렇게 인간 심리에 대한 기본적 원리가 깔려있습니다.

  다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로 돌아갑니다. '팔도강산' 연작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아우르며 박정희 정권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정권 홍보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뻔하고 밋밋하기 짝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영화 시리즈가 당시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하는 한국 국민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흰쌀밥과 고깃굿' 보다도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는 희망 말입니다. KTV에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가 방영된 시각은 늦은 새벽이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는 그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살아온 나의 부모 세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잘 사는 나라, 에 대한 꿈 말입니다.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그 희망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구현해 냅니다.     


*사진 출처: kmdb.or.kr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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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성혜의 나라(202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9살,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성혜의 삶은 무척 고달픕니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죠. 성혜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는 착한 딸이 성혜입니다. 성혜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 승환도 있습니다. 승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죠. 남자 친구가 좀 의지할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승환이 가난한 부모 탓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 좀 철딱서니가 없어요. 자, 어떤가요? 이 두 연인의 앞날이 그려지나요?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는 소위 가진 것 없는 흙수저 MZ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줍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성혜의 일상은 숨돌릴 틈도 없이 팍팍합니다.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가서는, 원치 않는 신문을 넣었다고 주민의 항의를 받습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준 스쿠터는 고장 나기 일쑤죠. 편의점에서는 어떤가요? 매번 라면 먹고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나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혜의 끼니는 삼각김밥입니다. 편의점에서 폐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죠. 성혜는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세면도구를 알뜰하게 챙겨서 남자친구에게 줍니다. 그런 성혜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가끔 지나치는 애견 가게의 진열장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혜는 휴대전화로 강아지가 노는 것을 찍습니다.

  성혜의 삶이 이렇게 고달파진 건 과거의 그 사건에서부터였습니다. 성혜는 틈틈이 입사 원서를 넣으며 취직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전의 직장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 둔 이력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면접관은 성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죠. 성혜는 인턴 때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일을 고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일 이후로 성혜의 삶은 말 그대로 꼬여버립니다. 취직은 쉽지 않고, 힘겨운 서울살이에다, 부모님의 어려운 처지도 모른 척할 수 없죠.

  대학은 나왔지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삶.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성혜의 친구는 빈곤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한국 청년 세대의 높은 자살률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관객은 성혜 친구의 죽음에서, 그것이 성혜가 겨우 버텨내고 있는 이 삶의 어그러진 결말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런 와중에 성혜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집값이 높은 서울에서 성혜가 구할 수 있는 괜찮은 단칸방이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성혜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성혜가 느끼는 삶에 대한 막막함은 '미래가 없다'는 침울한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성혜는 승환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승환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어려운 집안 형편의 승환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성혜는 승환과 결혼해서 낳을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거예요. 그 아이에게 자신보다 못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겠죠. 현재 우리나라의 저조한 출산율은 성혜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 세대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우울한 영화입니다. 정형석 감독은 젊은 여성 성혜의 삶을 통해 한국 청년 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다큐처럼 담아냅니다. 출구가 없어요, 성혜에게는. 꽉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런 성혜에게 갑자기 5억이 생깁니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성혜라면 그 5억을 가지고 무얼 할 생각인가요? 5억, 크다면 큰돈인데, 어찌 보면 좀 애매한 액수 같기도 하고요. 서울에서 괜찮은 월세방 보증금으로 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넣어둘까요? 아니면 그동안 못 해봤던 여행도 하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사볼까요? 그런데 정기적인 소득이 없다면, 그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게 뻔하잖아요. 성혜도 고민합니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감독이라면 성혜에게 어떤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는 5억을 신탁 연금으로 넣고, 매달 140만 원씩 받기로 결정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삶. 그것이 성혜가 꿈꾸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혜에게 5억이 생긴 것은 과연 행운이기만 할까요? 그 무해하고도 안온한 삶은 변화도 없고, 꿈도 없는 삶이에요. 그런 면에서 '성혜의 나라'는 젊은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해 강렬한 펀치를 날려버리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래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혜만큼이나 힘든 세대는 빈곤한 노년 세대입니다. 청년 자살만큼이나 노인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가난'이고요. 그런데 왜 힘들고 가난한 노인에 대한 영화나 이야기는 보기가 어려운 걸까요? 쪽방촌에 살면서 폐지 줍는 70대 독거노인 춘삼 씨가 있다고 합시다. '춘삼의 나라'라는 영화를 찍는다면, '성혜의 나라'를 보고 공감했던 젊은 관객이 공감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성혜의 나라'는 기묘하게도 MZ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그것은 성혜가 아무 것도 꿈꾸지 않는, 어쨌든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5억이란 돈이 성혜의 부모가 사고로 죽음으로써 주어지는 돈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 영화가 명백한 '부친살해(Patricide)'의 코드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공 성혜에게 있어 부모는 부담스러운 짐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거든요. 돈에 쪼들리는 성혜의 엄마는 딸이 조금이나마 돈을 보내주기를 바라죠.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에게 통용되는 밈(meme) 가운데에는 '틀딱(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젊은 사람이 산다'는 말도 있죠. '틀딱'으로 대변되는 노년 세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화의 마지막, 성혜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 나갑니다. 성혜의 앞에는 느리고, 안온한, 하지만 가슴 뛰게 만드는 희망과 새로움은 없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성혜는 나름 괜찮은 월세방을 구합니다. 월세가 저렴한 성혜의 집은 경사가 심하고,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다닥다닥 모여있는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 거기에서 성혜는 예쁜 강아지를 키우게 됩니다. 나는 왜 성혜가 서울을 떠나지 않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모두가 알다시피, 지방은 서울에 비해 집값이 싸잖아요. 그런데 성혜는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거든요. 성혜에게는 서울에서의 버거운 삶이 주는 긴장감이 지방에서의 따분한 삶보다 나은 것일지도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지방 소멸'이라는 개발 불균형의 사회 문제도 갖고 있지요. 여러모로 영화 '성혜의 나라'는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나름의 시의성(時宜性)을 지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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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우리의 하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은 전직 배우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상원은 선배 정수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이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고양이예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가 살포시 들어가 있어요. 고양이 집사들을 위한 영화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영화에는 2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과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가 그들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각자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대비시켜서 보여줍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원은 낮잠을 청하고, 나중에 조카 지수의 방문을 받습니다. 나이든 시인 홍의주도 아침나절에 잠을 좀 잤다가 일어납니다. 그런 그에게 배우 지망생 재원이 찾아오지요. 상원의 조카 지수도 배우 지망생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수는 유명 배우였던 상원에게 배우의 길에 대한 조언을 청합니다. 재원은 시인 홍의주에게 인생의 지혜를 듣고 싶어하구요. 그리하여 상원은 지수에게, 홍의주는 재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하루는 다른듯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은가요? 초심자(novice)는 권위자(expert)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는 각각 배우와 시인이라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 영화에서 상원의 캐릭터에는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가, 시인 홍의주의 모습에는 감독인 홍상수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홍상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좀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런 데에는 아마도 감독 자신의 매끄럽지 못한 사생활이 포개어져 있기 때문이겠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자기 삶과 사랑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워요.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여배우 영희를 연기한 김민희의 대사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영화는 명백하게 홍상수의 자기 변명과 연민이 범벅이 된 영화에요. '당신들이 뭔데, 우리의 사랑에 왈가왈부 하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그게 홍상수의 본심인 거죠. 좀 뻔뻔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구현해 내는 영화적 세계에는 기이한 매력이 있거든요. 그 영화는 배우 김민희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기도 했구요.

  자, 다시 '우리의 하루'로 돌아갑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자신의 배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상업 영화가 배우의 내면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진정한 배우로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상원은 배우란 직업은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글쎄요, 그게 어떤 걸까요? 배우라는 직업도 멀게 느껴지는데, 상원이 말하는 '솔직함'이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영화 속 초심자 지수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냐고 확인하듯 묻습니다.

  지수가 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막막함을 시인을 찾아간 재원도 느낍니다. 재원은 존경하는 시인 홍의주를 만나서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아는 것이 배우를 꿈꾸는 재원에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요? 시인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지혜들을 풀어놓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짜' 삶을 살아라. 그런데 그 '진짜 삶'이 뭘까요? 의외로 홍의주가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이 인생철학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건 홍상수 자신의 인생 철학이기도 할 테니까요. 상원이 조카 지수에게 했듯, 역시 시인 홍의주도 재원에게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듣냐고 묻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가는 오롯이 예술가가 성취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지상주의인 낭만주의적 관점이지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사생활이 논란이 되는 것은 참기 힘든 역경일 거예요. 작가로서 그는 영화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우리의 하루'에서 홍상수는 연인 김민희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상원이 말하는 배우의 '솔직함'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예술가로서 그들 자신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김민희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강변합니다. 그건 영화 속에서 정수와 고양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정수는 '우리'를 잃어버린 걸 알고서는 실신해 버립니다. 정수는 현관문 앞에서 쓰러져서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죠. 겨우 정신을 찾은 정수는 고양이를 찾기 위해 현상금 '천만 원'을 내 건 전단지를 만듭니다. 물론 고양이는 나중에 정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요. 고양이의 이름 '우리(We)'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cliche) 같기도 해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뿐인가요? 상원은 홍의주가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라면을 먹습니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죠. 물론 영화 속에서 상원과 홍의주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명백한 암시는 없어요. 관객은 그냥 그럴 것이다, 라고만 추측할 뿐이죠.  

  영화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가 써낸 어느 하루의 일기 같은 인상을 줍니다. 무겁지도 않고 담담한 이 일기에는 뚜렷한 감독 자신의 각인이 찍혀 있어요. 예술가의 삶은 자신의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습니다. 거기엔 가식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시인 홍의주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에 무알콜 맥주를 마시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영화의 마지막, 시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양주를 한 잔 들이키죠.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재촉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그에게는 시인으로서의 '진짜 삶'을 살아가게 만드니까요. 영화 속 시인 홍의주의 '술과 담배'는 홍상수에게는 '영화'임이 자명하죠.

  홍상수의 삶에서 '영화'는 시인 홍의주의 '부서진 기타'와도 겹칩니다. 홍의주에게는 기타가 있었는데, 후배가 술 마시다 실수로 부수어 버렸죠. 후배는 홍의주에게 멋진 새 기타를 선물해 주지만, 홍의주는 그 기타를 자신의 다큐를 찍는 대학생 기주에게 선물해 버립니다. 시인은 기주에게 새 기타는 연주하기도 어렵고 익숙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직 배우 상원에게도 누군가 선물해 준 작은 기타가 있어요. 상원은 그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의 '부서진 기타'는 상원의 작은 기타를 통해서 노래를 이어가는 거죠. 그건 감독의 영화와 삶을 함께하는 배우 김민희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요.

  영화 '우리의 하루'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감독 자신의 영화적 선언문 같아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가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세간의 비난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는 버팀목과 같은 예술, 그러니까 '영화'가 있어요. '우리의 하루'를 통해 관객은 작가 홍상수의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들려줄 부서진 기타의 노래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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