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암병동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고나자, 이제 가족들도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호스피스 병동은 뭐랄까,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기이한 곳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옆에서 보면서도, 그저 그날 하루를 무사히 잘 보내면 죽음의 그림자를 피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죽음의 전령은 병자의 침대 밑에 분명히 서있는데도, 살아있는 가족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예정된 그 시간은 들이닥치게 마련이다.
추석 연휴 기간이 끝나가던 날이었다. 밤샘 간호를 하던 어머니와 동생을 집으로 보내고, 낮에는 내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경미한 혼수상태였다. 의식은 명료하지 않았고, 뭔가를 계속 말씀하시는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숨소리는 거칠고 고르지 않았다. 슈욱슉, 샤아샥, 마치 고장난 기관차의 엇갈리는 배기음처럼 불규칙적인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고 있었다. Death rattle. 임종을 앞둔 이들이 흔히 보이는 징후였다. 비강과 폐에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한 침과 가래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이다.
아버지는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나의 마음도 두렵고 무거웠다. 나는 임종을 앞둔 이들을 위한 기도문을 반복해서 계속 읽어드렸다. 병실에는 다른 두명의 환자가 있었는데, 폐암 말기 환자도 Death rattle을 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는 소리가 낮게 깔리는 소리였다면, 그의 경우는 굉장히 크고 탁했다. 맑고 화창한 가을 날의 낮병동을 가득 채우는 그 소리는 긴장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나는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더러는 그런 소리가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괴로운 기억 때문에 호흡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명절 연휴의 병동에는 그런 것까지 신경써주는 주치의는 없었다.
담도암을 앓는 다른 한명의 환자는 가수면 상태에서 부인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의처증으로 부인을 힘들게 했다는 그 환자가 간절하게 부르던 부인은 명절 준비를 하러 집에 가고 없었다. 대신 심드렁한 표정의 아들이 자신의 가족과 함께 와있었다. 그 아들은 휴게실의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보살피러 다시 나왔다. 그때쯤 아버지의 숨소리는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폐암 환자는 임종실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병원을 떠나기 전에 그의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평소에는 휴대폰을 밤에 꺼놓는데 그날은 끄지 않았다. 새벽에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평온하게 임종하셨다. 1년여에 걸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병실의 담도암 환자는 그 다음날 병실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글이 있었다. 폐암 말기인 부친이 통 드시질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미 가까운 가족을 먼저 그렇게 보낸 이들에게 그것은 익숙한 징조였다. 이제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죽음을 준비하는 육신은 뭔가를 먹어도 장에서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음식물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혈육지친을 먼저 보내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그런 일련의 풍경들은 남은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될 명시적인 진리, 즉 Memento mori,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되새기게 만든다. 17세기 유행했던 서양의 정물화 Vanitas에 등장하는 해골의 이미지가 말하는 바도 그런 뜻이었다.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당시의 중산층은 집안에 그런 정물화를 걸어놓고 인생의 덧없음을 성찰했다.
내게는 아버지의 임종 전날 들었던 Death rattle이 마치 그 Vanitas처럼 마음에 남아있다. 이제 곧 아버지의 세번째 기일이 다가온다. 시간이 흘러서,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슬픔 보다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 아버지여서 참 고마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