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선생에게 사과의 말부터 해야할 것 같소. 어느날 TV를 틀었는데 선생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소. 선생의 얼굴은 반쪽이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소. 그런데 그 모양이 너무 흉해서 정말 보는 것이 괴로웠다오.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TV화면으로 보는 것 자체가 괴롭다고 느껴졌소. 나는 즉시 채널을 돌렸다오. 하지만 리모컨을 계속 눌러봐도 달리 볼 것이 없었고, 결국엔 다시 선생의 얼굴이 나오는 채널로 돌아왔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계속 트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괜찮았소. 나는 그렇게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를 보게 되었소. 마침내 다 보고나서 마음 한켠이 저릿해지고야 말았소. 미안하오. 선생의 얼굴을 처음 보고 흉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말이오.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거대 트럭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선생에게는 Diesel Gypsy라는 별칭이 붙어있더이다. 참, 선생이란 호칭이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구려. 선생이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하여 그 호칭을 쓰기로 했소. 사실 나는 선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오. 그것이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이란 것을. 삼십대 초반에 겪은 뇌졸중 이후로 선생은 거울을 안본다고 했소. 유학을 다녀오고 자신의 사업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리 되었으니 선생이 겪었을 충격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나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소. 어쩌면 조금 보다는 더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도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동병상련. 참으로 가슴 절절한 고사성어가 아니오?
서른 일곱, 초봄의 그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오. 나는 일주일 넘게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소. 평소에도 긴장성 두통이 자주 있는 편이고, 진통제를 먹으면 나아지곤 했소.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이어진 두통에 도통 약이 들어먹질 않는 거요. 마치 누가 와서 도끼로 내 머리를 쪼개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소. 그러다 귀까지 욱신거리고 아프길래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고, 삼차 신경통이라는 말을 들었소. 처방받은 약을 먹었지만 통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소.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다음날 아침, 나는 뭔가 얼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소. 차가운 것도 같고, 뜨거운 것도 같고, 아무튼 몹시 이상한 느낌이었다오. 양치질을 하는 동안 물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내렸소. 거울을 보니 얼굴이 약간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았소.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결국 급하게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소.
"대상포진입니다."
신경과 주치의는 아주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소. 나는 대상포진이라는 것이 발진과 수포가 몸에 띠처럼 생기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소. 피부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는데, 무슨 대상포진인가 싶었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이었소. 알고보니 대상포진은 신체 어디에나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이다.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어느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나타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Ramsay Hunt syndrome. 그것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을 지칭하는 병명이라오. 당장 입원을 해야한다고 의사가 말했소. 신경절을 뚫고 나온 바이러스가 안면신경을 따라 퍼지면서 얼굴이 마비되고 있었고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오. 입원 당일 저녁무렵에는 오른쪽 눈이 감기지 않았고, 입은 심하게 비뚤어져 있었소. 나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얼굴이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소.
"불가능해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무지막지한 적개심이 들더이다. 그냥 예후가 나쁘다고만 말했어도 될 일이었소. 저런 callous한 인간이 의사라는 것이 참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아픈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면 그런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소.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한 항바이러스제 주사를 정해진 시간마다 맞았고, 무시무시한 통증을 잠재우려고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야 했소. 그 약도 듣질 않아서 통증 때문에 머리가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소.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소. 새벽마다 잠이 깨서 앉아있다가 통증을 잊으려고 라디오를 들었소. 이어폰에서 Maroon 5의 Maps가 흘러나오던 것이 기억나오.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이다. 이 병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지도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소.
일주일 후 퇴원을 했지만 마비된 얼굴은 그대로였소. 어머니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었는데, 아들이 대학병원 신경과 의사로 있었소.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을 때 보고 거의 삼십년만에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나는 마침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오. 아주 영민하고 친절한 그 친구는 내가 병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답해주었소. 다만 그가 대답을 머뭇거렸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소. 얼굴이 돌아올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소.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 친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렇게 대답했소. 그때 알아챘지. 시간이 지나도 얼굴이 돌아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증으로 눌려있던 신경이 서서히 펴지면서 마비된 상태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내 얼굴은 예전의 얼굴로 돌아가지 못했다오. 감기지 않는 눈에는 안구건조증이 왔고, 밤에는 안대를 하고 자야했소. 음식물을 먹다가 흘리는 일은 일상이었고.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 양치질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결국 오른쪽 치아들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흔들거리기 시작했소. 바이러스가 청신경에도 침범을 해서 소리를 듣는 감각에도 이상이 왔소. 청각과민증.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irreversible.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소. 신경 손상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회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전과 동일하게 회복될 수 없다오. 선생과 나의 얼굴에 생긴 변화는 그런 것이오. 생각해보면 우리들 인생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을 거슬러 되돌릴 수 없소. 그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거나 그것으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오.
선생의 인터뷰를 찾아서 읽어보니, 선생은 그렇게 변해버린 얼굴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에 부딪히느라 상처를 입었다고 했소. 회사를 그만 두고 트럭 운전으로 직업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소. 나는 선생처럼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었소. 전부터 하던 번역일을 계속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해서 먹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소. 어느해는 일이 들어오지 않아 책 한권을 번역한 것이 전부였소.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언어의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소. 활자 속에서 내가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돌쇠'라고 부르는 자신의 트럭안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소. 그것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고 선생의 일상 대부분을 함께 하는 친구같기도 한 존재였을 거요. 나에게는 그 트럭이 선생을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선생의 진짜 집,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소. '돌쇠'의 할부금을 갚느라 빡빡한 운행 일정을 감내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트럭 운전을 하면서 만난 미국과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은 선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보듬어주었소.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다오. 선생도 잘 알거요, 기이한 것,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천박한 관심에 대해서. 선생이 그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갔던 캐나다에서는 선생을 보고 그 누구도 얼굴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고 들었소. 나는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았다오. 세계 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여행, 이런 프로그램이었소. 그런 프로들을 10년동안 보고나니, 이젠 어느 여행지에 가서는 어딜 꼭 가야하고, 어디를 들러서 뭘 먹어야하는지에 대해 줄줄 읊어댈 정도가 되더이다. 마이애미 비치에서는 'Roberts is here'이라는 과일 가게에 들러서 다양한 과일빙수를 먹어봐야 한다던지, 베니스에서는 세계 최초의 카페를 방문해봐야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오. 마카오의 육포거리와 아몬드 쿠키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소. 여러번 나온 여행지는 지겹기까지 했지. 예를 들면 터키의 파묵칼레 온천이라던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체험, 베니스의 곤돌라 유람 같은 것은 안보게 된다오. 어느날은 킬리만자로 산을 오르는 여행기를 보고 있었소.
"아, 저긴 가봤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오. 그곳에 간 사람의 여행기를 읽었던 기억이 났소. 정말로 실감나고 재미있게 잘 쓴 여행기여서 마치 내가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던 거요. 나는 그렇게 TV와 글을 통해 전세계를 유랑하고 다녔소. 선생도 14년 동안 trucker로 일하면서 유명 관광지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보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들었소. 내게도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하오. 페트라. 그곳에 가서 고대 페트라인들이 세운 신전들을 직접 보고 싶다오.
선생, 혹시 인터넷에서 선생에 대해 검색을 하면 뜨게 되는 연관 검색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소? 결혼, 나이, 연봉, 이런 것들이라오. 뭐랄까,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는 적나라한 관점을 알게 된 느낌이었소.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검색어가 '결혼'이었소. 다큐에는 장거리 운행을 떠나기 전에 선생이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이 나왔소. 주방에서 밥과 반찬을 능숙하게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김치와 소분해서 밀폐용기에 담아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선생의 혼자살이가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소. 평균적인 삶의 행로, 그러니까 대략 몇살 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서 독립시키고, 편안한 노후를 맞는 그런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행로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소. Personal velocity. 다른 길로 가게되면 그 길을 가는 속도도 달라지는 것 같소. 가끔은 내 나이가 아직도 삼십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아마 아이가 있었다면 커가는 아이를 보며 내 나이를 실감했을지도 모르오.
문득 이십대 때의 일이 생각나오. 대학 때, 희곡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소. 칠순이 가까운 극작가 선생님이 수업을 하셨소. 같이 수강하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고 여겼소. 그래서 지들끼리는 '영감님이 집에서 손주나 보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수업을 하겠다고'하면서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았소. 처음에는 스무명쯤 되던 수강생이 나중에는 서너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가운데 한명이 나였소. 나는 그 수업이 아주 재미있었다오. '영감님'은 결코 꼰대같은 분이 아니었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았고 좋은 유머감각도 있었소. 그리고 오랫동안 문단에 있으면서 여러 이야깃거리를 알고 있어서, 나는 마치 용사의 무용담을 듣듯이 수업을 즐겁게 들었소. 나중에는 '영감님'과 꽤 가까워졌소. 한번은 그런 질문을 했더랬소.
"인생의 의미가 뭘까요?"
뭔가 중 2병스러운 질문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영감님의 대답은 이러했소.
"글쎄다, 내가 이 나이만큼 살아보니까 그게 그렇더라. 자신의 혈육 한점 남기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
영감님에게 드라마 작가인 따님이 한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소. 따님은 그분의 자랑이기도 했소. 당시 나는 비평 수업도 들었는데, 비평가 선생님과도 친했었소. 영감님의 인생철학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 했더니, 비평가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소.
"그 양반은 첫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하나 있어. 워낙 방랑벽이 심해서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지. 지금은 어떤 젊은 여자와 같이 산다는 말이 들리던데."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 자녀들이 영감님을 아버지로서 그다지 잘 대우해줄 것 같지 않았소.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삶이었소. 그런데도 영감님이 자식을 남기는 일을 인생의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 말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어떤 생의 이면은 그토록 복잡하다오. 혈육 한점 없는 삶이면 뭐 어떻소.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이다. 자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요양원에 보러올 사람이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라고. 언젠가 할머니들이 있는 요양원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소. 할머니들은 한달에 한번 오는 자식들의 방문을 그야말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더이다. 자식들이 오는 날은 무슨 잔칫날처럼 즐거웠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뒤의 할머니들의 표정은 너무나 애잔했소.
"그게 그렇게 슬프세요? 다음에 자녀분들이 또 올 거잖아요."
감독의 질문에 할머니가 대답했소.
"슬퍼. 그냥 슬퍼. 가고나면 보고파."
아마 나는 그 할머니의 심정을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거요. 그렇다고 그것이 괴롭지는 않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많은 경험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참된 경험인 것처럼 어줍잖은 동정과 연민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소. 그 편협하고 오만한 시선이 나는 참으로 싫다오.
혼자 산다는 것. 선생, 나는 그 삶이 가져오는 '외로움' 보다도, 아프다가 홀로 죽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소. 선생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소? 최근에 아주 주의깊게 읽은 신문 기사는 고독사 청소부의 인터뷰였소. 경찰과 유족, 건물주의 의뢰로 고독사 현장을 청소하는 사람이 전해주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서늘한 슬픔이 느껴졌다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무엇인지 아시오? 특히 건물주들이 한결같이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걸 글로 써보면 이런 걸거요.
"재수도 더럽게 없지. 죽을려면 어디 딴데 가서 죽지, 하필이면 여기서 죽고 말이야. 어이, 이봐. 자넨 이런 일 많이 해봤으니 잘 알 거 아냐. 거 뭐냐, 혼자 죽을 것 같은 사람들 특징 같은 거. 그런 것 좀 알려줘. 그래야 다음에 이런 고약한 일 안겪지."
그런 건 없다, 고 아무리 말해줘봐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런 속물들이 보기에 뭔가 외모도 이상하고, 수입이 일정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장 첫번째로 꼽을 것 같았다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름이 끼쳤소.
선생, 선생도 알다시피 뭐 달리 방법이 없소. 그 역겨운 편견의 시선을 견디며 사는 수 밖에. 문득 서른 일곱, 그 고통스러웠던 봄날의 일이 생각나오. 입원했던 병원 건물 7층은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소. 통증에 시달리다 지치면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아있곤 했소. 입원한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나,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소. 꽃샘추위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꽤나 추웠던 기억이 나오. 정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소.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거치대를 끌고 좀 걷다가 의자에 앉아있었소. 뭔가 인기척이 나서 보니 내 건너 옆자리에 누가 털썩, 소리를 내며 앉더이다. 아직 스물은 되지 못한 것 같은, 열 일고여덟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학생. 찬바람도 불었고 통증 때문에 더 앉아있기 힘들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소. 수액 거치대를 끌고 가려는데 수액줄이 엉켜서 그걸 좀 풀고 있었지. 그때 학생이 입을 열었소.
"다리를..."
학생은 고개를 수그리고 울먹이는 것 같았소.
"다리를 잘라내야 한대요, 이젠 방법이 없다고. 골육종인데... 5년동안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러더니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요?"
나는 수액줄을 풀다 말고 잠시 가만히 있었소.
"학생."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는 말을 이어갔지.
"학생, 내 얼굴을 좀 봐봐. 난 얼굴을 잃었어.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가게 될 지도 몰라. 학생이 나라면 어떻게 삶을 견디며 살아야할 것 같아? 나도 정말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거야.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남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황망해진 표정의 학생을 뒤로 하고 나는 걷기 시작했소.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소. 아직도 그 봄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고통과 매화꽃 향기가 같이 뒤엉켜 떠오른다오.
작년에 번역한 추리소설이 하나 있었소. 주인공의 직업은 detective. 그는 여덟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느라 소설 내내 고군분투한다오. 마침내 범인을 검거하고 3개월만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소. 키우던 고양이는 옆집에 맡겼는데 도망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혼한 아내와의 양육권 소송은 재판기일에 출석도 제대로 못해서 패소했소. 먼지구덩이가 되어버린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그가 하는 말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었소.
"It was a very long haul."
a long haul. 장거리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나 꽤나 품이 드는 힘든 일을 뜻하는 관용구. 선생이 하는 트럭 운송도 long-haul이라고 하지요. 정말로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라고만 번역하자니 뭔가 밋밋하고 싱거운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소. 나는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냥 이틀동안 내버려두었소. 그 문장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괴롭게 느껴지더이다. 주인공의 혼잣말이 내 지난 10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르오.
불시에 들이닥친 도적처럼 불행과 고통이 찾아왔고, 그것을 견디려고 무척 애를 썼소. 새옹지마, 전화위복 같은 말로 고통에 쓸데없는 덧칠을 하고 싶지 않다오. 어떤 불행과 고통은 한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회복될 수 없게도 만들지요. 그래서 그건 신이 인간에게 보이는 아주 순전한 조롱과 악의같다는 생각도 들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느냐고 물었던 10년전 학생의 물음에 답할 그 무엇도 나는 찾지 못했소.
"참으로 길고도 지독한 날들이었군 그래."
지난 10년의 시간에는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건 오직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 거요. 어쨌든 지금 살아있다는 것,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 말고 중요한 사실은 없다는 생각도 드오.
선생이 한국에서 처리해야할 일 때문에 7월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 미친 전염병의 시대에 선생의 생업도 부득이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이곳에서 잘 지내다 캐나다로 무탈히 돌아가길 바라오. 선생이 나온 다큐를 보면서 고통을 견디며 살아낸 사람의 기개와 강인함이 느껴져서 참 보기 좋았소.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썼다오. 멀리서, 응원하리다.
2020년 8월
행운을 빌며
R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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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트럭커 유투버 '디젤 집시' 최창기 씨의 다큐(KBS 1TV의 다큐세상 '디젤 집시의 대륙횡단기', 2020년 2월 7일 방영분)를 보고 지난 8월에 쓴 짧은 소설이다.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그의 블로그에 발인 날짜가 9월 30일로 적혀있었다. 인생이란... 타국이 아닌 고향 땅에서 영면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