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부터 나던 흰머리가 올해 들어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이 나고 있다. 나이들수록 그렇게 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고, 볼 때마다 뽑을 수 있는 정도도 이젠 넘어섰다. 자주 가는 사이트 게시판에도 '흰머리 어떻게 하세요?'라는 질문은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글들 가운데 하나다. 언젠가 이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십대에 접어든 그는 자신의 초등생 딸에게 가끔씩 흰머리를 뽑게 하는데, 어느 날 딸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이제 더이상 흰머리를 뽑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무 많아."


  그렇다. 어느 때가 되면 흰머리를 뽑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임계점 같은 순간이 꼭 온다. 흰머리 뽑다가 모근이 손상되면, 나중에는 머리숱이 적어져 머리가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흰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내버려 둔다.


  흰머리가 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영향 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의 흰머리 나는 시기를 대략적으로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일찍부터 머리가 세셨다. 열살 무렵, 어머니의 흰머리를 열심히 뽑아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이제는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내 흰머리가 이리 극성인 것도 나름 납득이 간다. 얼마전, 요새 들어 흰머리가 너무 많이 나고 있다고 어머니와 전화 통화 끝에 말이 나왔다. 


  "염색을 하려므나."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염색할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내가 대학시절에 보았던 어떤 영화 한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가 대학교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분야의 전성기 였다면, 1990년대는 영화와 관련된 동아리의 전성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지던 시기였다. 다니던 대학교에는 몇 개의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동아리가 일주일에 한편씩,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었다. 대개는 복제본 비디오 테이프를 프로젝터로 재생하는 수준이라서 화질은 기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DVD가 보급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 영화 동아리에서는 정기 시사회에 열심이었다. 상영 장소도 구하기 힘든지 도서관, 소강당, 대강의실을 오가며 자신들의 영화 열정을 전파했었다.


  나는 심심하면 읽던 영화 잡지에서 언급되는 유명 고전 영화들을 가끔씩 그 동아리 시사회를 통해 보곤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도서관 영상자료실에서 보았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영상자료실이 새롭게 개관한지 얼마 안되어서 시설은 좋았다. 문제는 화질이었다. 정말로 지지직 거리는, 등장 인물의 얼굴이 가끔씩 뭉개져서 보였으며, 영화 내내 비가 오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영화가 가진 엄청난 흡인력은 그런 것조차 무시하게 만들었다. 미소년 타지오 역의 배우가 내뿜었던 빛나는 아름다움이 스크린 전체를 휘감았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외모였다. 그런 그에게 매혹당한 작곡가 아센바흐의 늙음과 절망이 영화 내내 절규하듯 울려퍼졌다. 


  그 마지막 장면. 사랑의 열정에 미친 아센바흐는 젊게 보이려고 염색을 하고, 잔뜩 성장한 채 타지오가 있는 해변으로 나간다. 검은 염색약이 오물처럼 얼굴을 흘러내리고 눈물과 비탄 속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그를 배경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이 흐른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서 늙음이란 비정한 추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할 정도로 슬펐다. 그때 본 염색약의 엄청난 영화적 효과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나는 염색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늙음이란 이런저런 말로 좋게 포장하려해도 결국은 이 악물고 견뎌야하는 괴로운 통과의례일 뿐이다. 노안이 온 지도 꽤 되어서 모니터 화면의 글씨를 크게 해놓고 보아야 편하다. 활자가 작은 책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어느날 변해버린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며 사는 것이다.


  "포기하면 편해."


  흰머리 뽑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본다. 흰머리가 서리내리듯이 머리를 뒤덮는다고 해도 나는 염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도 당신의 흰머리를 견디질 못하신다. 어쩌면 늙음의 과정이란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어 내는 의지력의 시험을 매일매일 치루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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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선생에게 사과의 말부터 해야할 것 같소. 어느날 TV를 틀었는데 선생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소. 선생의 얼굴은 반쪽이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소. 그런데 그 모양이 너무 흉해서 정말 보는 것이 괴로웠다오. 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TV화면으로 보는 것 자체가 괴롭다고 느껴졌소. 나는 즉시 채널을 돌렸다오. 하지만 리모컨을 계속 눌러봐도 달리 볼 것이 없었고, 결국엔 다시 선생의 얼굴이 나오는 채널로 돌아왔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계속 트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괜찮았소. 나는 그렇게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를 보게 되었소. 마침내 다 보고나서 마음 한켠이 저릿해지고야 말았소. 미안하오. 선생의 얼굴을 처음 보고 흉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말이오.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거대 트럭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선생에게는 Diesel Gypsy라는 별칭이 붙어있더이다. 참, 선생이란 호칭이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구려. 선생이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하여 그 호칭을 쓰기로 했소. 사실 나는 선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오. 그것이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이란 것을. 삼십대 초반에 겪은 뇌졸중 이후로 선생은 거울을 안본다고 했소. 유학을 다녀오고 자신의 사업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리 되었으니 선생이 겪었을 충격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나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소. 어쩌면 조금 보다는 더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도 안면마비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동병상련. 참으로 가슴 절절한 고사성어가 아니오?

  서른 일곱, 초봄의 그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오. 나는 일주일 넘게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소. 평소에도 긴장성 두통이 자주 있는 편이고, 진통제를 먹으면 나아지곤 했소.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이어진 두통에 도통 약이 들어먹질 않는 거요. 마치 누가 와서 도끼로 내 머리를 쪼개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소. 그러다 귀까지 욱신거리고 아프길래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고, 삼차 신경통이라는 말을 들었소. 처방받은 약을 먹었지만 통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소.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다음날 아침, 나는 뭔가 얼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소. 차가운 것도 같고, 뜨거운 것도 같고, 아무튼 몹시 이상한 느낌이었다오. 양치질을 하는 동안 물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내렸소. 거울을 보니 얼굴이 약간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았소.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결국 급하게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소.

  "대상포진입니다."

  신경과 주치의는 아주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소. 나는 대상포진이라는 것이 발진과 수포가 몸에 띠처럼 생기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소. 피부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는데, 무슨 대상포진인가 싶었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이었소. 알고보니 대상포진은 신체 어디에나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이다.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어느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나타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Ramsay Hunt syndrome. 그것은 귀에 생긴 대상포진을 지칭하는 병명이라오. 당장 입원을 해야한다고 의사가 말했소. 신경절을 뚫고 나온 바이러스가 안면신경을 따라 퍼지면서 얼굴이 마비되고 있었고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오. 입원 당일 저녁무렵에는 오른쪽 눈이 감기지 않았고, 입은 심하게 비뚤어져 있었소. 나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얼굴이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소.

  "불가능해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무지막지한 적개심이 들더이다. 그냥 예후가 나쁘다고만 말했어도 될 일이었소. 저런 callous한 인간이 의사라는 것이 참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아픈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면 그런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소.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한 항바이러스제 주사를 정해진 시간마다 맞았고, 무시무시한 통증을 잠재우려고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야 했소. 그 약도 듣질 않아서 통증 때문에 머리가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소.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소. 새벽마다 잠이 깨서 앉아있다가 통증을 잊으려고 라디오를 들었소. 이어폰에서 Maroon 5의 Maps가 흘러나오던 것이 기억나오.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이다. 이 병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지도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소.

  일주일 후 퇴원을 했지만 마비된 얼굴은 그대로였소. 어머니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었는데, 아들이 대학병원 신경과 의사로 있었소.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을 때 보고 거의 삼십년만에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나는 마침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오. 아주 영민하고 친절한 그 친구는 내가 병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답해주었소. 다만 그가 대답을 머뭇거렸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소. 얼굴이 돌아올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소.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 친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렇게 대답했소. 그때 알아챘지. 시간이 지나도 얼굴이 돌아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증으로 눌려있던 신경이 서서히 펴지면서 마비된 상태가 나아지기는 했지만. 내 얼굴은 예전의 얼굴로 돌아가지 못했다오. 감기지 않는 눈에는 안구건조증이 왔고, 밤에는 안대를 하고 자야했소. 음식물을 먹다가 흘리는 일은 일상이었고.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 양치질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결국 오른쪽 치아들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흔들거리기 시작했소. 바이러스가 청신경에도 침범을 해서 소리를 듣는 감각에도 이상이 왔소. 청각과민증.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irreversible.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소. 신경 손상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회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전과 동일하게 회복될 수 없다오. 선생과 나의 얼굴에 생긴 변화는 그런 것이오. 생각해보면 우리들 인생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을 거슬러 되돌릴 수 없소. 그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거나 그것으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오.

  선생의 인터뷰를 찾아서 읽어보니, 선생은 그렇게 변해버린 얼굴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에 부딪히느라 상처를 입었다고 했소. 회사를 그만 두고 트럭 운전으로 직업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소. 나는 선생처럼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었소. 전부터 하던 번역일을 계속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해서 먹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소. 어느해는 일이 들어오지 않아 책 한권을 번역한 것이 전부였소.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언어의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소. 활자 속에서 내가 자유롭게 숨쉴 수 있었던 것처럼 선생은 '돌쇠'라고 부르는 자신의 트럭안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소. 그것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고 선생의 일상 대부분을 함께 하는 친구같기도 한 존재였을 거요. 나에게는 그 트럭이 선생을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선생의 진짜 집,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소. '돌쇠'의 할부금을 갚느라 빡빡한 운행 일정을 감내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트럭 운전을 하면서 만난 미국과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은 선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보듬어주었소.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다오. 선생도 잘 알거요, 기이한 것,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천박한 관심에 대해서. 선생이 그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갔던 캐나다에서는 선생을 보고 그 누구도 얼굴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고 들었소. 나는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았다오. 세계 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여행, 이런 프로그램이었소. 그런 프로들을 10년동안 보고나니, 이젠 어느 여행지에 가서는 어딜 꼭 가야하고, 어디를 들러서 뭘 먹어야하는지에 대해 줄줄 읊어댈 정도가 되더이다. 마이애미 비치에서는 'Roberts is here'이라는 과일 가게에 들러서 다양한 과일빙수를 먹어봐야 한다던지, 베니스에서는 세계 최초의 카페를 방문해봐야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오. 마카오의 육포거리와 아몬드 쿠키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소. 여러번 나온 여행지는 지겹기까지 했지. 예를 들면 터키의 파묵칼레 온천이라던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체험, 베니스의 곤돌라 유람 같은 것은 안보게 된다오. 어느날은 킬리만자로 산을 오르는 여행기를 보고 있었소.

  "아, 저긴 가봤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오. 그곳에 간 사람의 여행기를 읽었던 기억이 났소. 정말로 실감나고 재미있게 잘 쓴 여행기여서 마치 내가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던 거요. 나는 그렇게 TV와 글을 통해 전세계를 유랑하고 다녔소. 선생도 14년 동안 trucker로 일하면서 유명 관광지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보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들었소. 내게도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하오. 페트라. 그곳에 가서 고대 페트라인들이 세운 신전들을 직접 보고 싶다오.

  선생, 혹시 인터넷에서 선생에 대해 검색을 하면 뜨게 되는 연관 검색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소? 결혼, 나이, 연봉, 이런 것들이라오. 뭐랄까,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는 적나라한 관점을 알게 된 느낌이었소.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검색어가 '결혼'이었소. 다큐에는 장거리 운행을 떠나기 전에 선생이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이 나왔소. 주방에서 밥과 반찬을 능숙하게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김치와 소분해서 밀폐용기에 담아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선생의 혼자살이가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소. 평균적인 삶의 행로, 그러니까 대략 몇살 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서 독립시키고, 편안한 노후를 맞는 그런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행로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소. Personal velocity. 다른 길로 가게되면 그 길을 가는 속도도 달라지는 것 같소. 가끔은 내 나이가 아직도 삼십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아마 아이가 있었다면 커가는 아이를 보며 내 나이를 실감했을지도 모르오.

  문득 이십대 때의 일이 생각나오. 대학 때, 희곡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소. 칠순이 가까운 극작가 선생님이 수업을 하셨소. 같이 수강하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고 여겼소. 그래서 지들끼리는 '영감님이 집에서 손주나 보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수업을 하겠다고'하면서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았소. 처음에는 스무명쯤 되던 수강생이 나중에는 서너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가운데 한명이 나였소. 나는 그 수업이 아주 재미있었다오. '영감님'은 결코 꼰대같은 분이 아니었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알았고 좋은 유머감각도 있었소. 그리고 오랫동안 문단에 있으면서 여러 이야깃거리를 알고 있어서, 나는 마치 용사의 무용담을 듣듯이 수업을 즐겁게 들었소. 나중에는 '영감님'과 꽤 가까워졌소. 한번은 그런 질문을 했더랬소.

  "인생의 의미가 뭘까요?"

  뭔가 중 2병스러운 질문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영감님의 대답은 이러했소.

  "글쎄다, 내가 이 나이만큼 살아보니까 그게 그렇더라. 자신의 혈육 한점 남기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

  영감님에게 드라마 작가인 따님이 한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소. 따님은 그분의 자랑이기도 했소. 당시 나는 비평 수업도 들었는데, 비평가 선생님과도 친했었소. 영감님의 인생철학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 했더니, 비평가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소.

  "그 양반은 첫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하나 있어. 워낙 방랑벽이 심해서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지. 지금은 어떤 젊은 여자와 같이 산다는 말이 들리던데."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 자녀들이 영감님을 아버지로서 그다지 잘 대우해줄 것 같지 않았소.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삶이었소. 그런데도 영감님이 자식을 남기는 일을 인생의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 말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어떤 생의 이면은 그토록 복잡하다오. 혈육 한점 없는 삶이면 뭐 어떻소.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이다. 자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요양원에 보러올 사람이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라고. 언젠가 할머니들이 있는 요양원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소. 할머니들은 한달에 한번 오는 자식들의 방문을 그야말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더이다. 자식들이 오는 날은 무슨 잔칫날처럼 즐거웠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뒤의 할머니들의 표정은 너무나 애잔했소.

  "그게 그렇게 슬프세요? 다음에 자녀분들이 또 올 거잖아요."

  감독의 질문에 할머니가 대답했소.

  "슬퍼. 그냥 슬퍼. 가고나면 보고파."

  아마 나는 그 할머니의 심정을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거요. 그렇다고 그것이 괴롭지는 않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많은 경험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참된 경험인 것처럼 어줍잖은 동정과 연민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소. 그 편협하고 오만한 시선이 나는 참으로 싫다오.

  혼자 산다는 것. 선생, 나는 그 삶이 가져오는 '외로움' 보다도, 아프다가 홀로 죽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소. 선생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소? 최근에 아주 주의깊게 읽은 신문 기사는 고독사 청소부의 인터뷰였소. 경찰과 유족, 건물주의 의뢰로 고독사 현장을 청소하는 사람이 전해주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서늘한 슬픔이 느껴졌다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무엇인지 아시오? 특히 건물주들이 한결같이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걸 글로 써보면 이런 걸거요.

  "재수도 더럽게 없지. 죽을려면 어디 딴데 가서 죽지, 하필이면 여기서 죽고 말이야. 어이, 이봐. 자넨 이런 일 많이 해봤으니 잘 알 거 아냐. 거 뭐냐, 혼자 죽을 것 같은 사람들 특징 같은 거. 그런 것 좀 알려줘. 그래야 다음에 이런 고약한 일 안겪지."

  그런 건 없다, 고 아무리 말해줘봐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런 속물들이 보기에 뭔가 외모도 이상하고, 수입이 일정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장 첫번째로 꼽을 것 같았다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름이 끼쳤소.

  선생, 선생도 알다시피 뭐 달리 방법이 없소. 그 역겨운 편견의 시선을 견디며 사는 수 밖에. 문득 서른 일곱, 그 고통스러웠던 봄날의 일이 생각나오. 입원했던 병원 건물 7층은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소. 통증에 시달리다 지치면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아있곤 했소. 입원한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나,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소. 꽃샘추위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꽤나 추웠던 기억이 나오. 정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소.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거치대를 끌고 좀 걷다가 의자에 앉아있었소. 뭔가 인기척이 나서 보니 내 건너 옆자리에 누가 털썩, 소리를 내며 앉더이다. 아직 스물은 되지 못한 것 같은, 열 일고여덟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학생. 찬바람도 불었고 통증 때문에 더 앉아있기 힘들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소. 수액 거치대를 끌고 가려는데 수액줄이 엉켜서 그걸 좀 풀고 있었지. 그때 학생이 입을 열었소.

  "다리를..."

  학생은 고개를 수그리고 울먹이는 것 같았소.

  "다리를 잘라내야 한대요, 이젠 방법이 없다고. 골육종인데... 5년동안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러더니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요?"

  나는 수액줄을 풀다 말고 잠시 가만히 있었소.

  "학생."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는 말을 이어갔지.

  "학생, 내 얼굴을 좀 봐봐. 난 얼굴을 잃었어.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가게 될 지도 몰라. 학생이 나라면 어떻게 삶을 견디며 살아야할 것 같아? 나도 정말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거야.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남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황망해진 표정의 학생을 뒤로 하고 나는 걷기 시작했소.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소. 아직도 그 봄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고통과 매화꽃 향기가 같이 뒤엉켜 떠오른다오.

  작년에 번역한 추리소설이 하나 있었소. 주인공의 직업은 detective. 그는 여덟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느라 소설 내내 고군분투한다오. 마침내 범인을 검거하고 3개월만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소. 키우던 고양이는 옆집에 맡겼는데 도망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혼한 아내와의 양육권 소송은 재판기일에 출석도 제대로 못해서 패소했소. 먼지구덩이가 되어버린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그가 하는 말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었소.

  "It was a very long haul."

  a long haul. 장거리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나 꽤나 품이 드는 힘든 일을 뜻하는 관용구. 선생이 하는 트럭 운송도 long-haul이라고 하지요. 정말로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라고만 번역하자니 뭔가 밋밋하고 싱거운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소. 나는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냥 이틀동안 내버려두었소. 그 문장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괴롭게 느껴지더이다. 주인공의 혼잣말이 내 지난 10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르오.

  불시에 들이닥친 도적처럼 불행과 고통이 찾아왔고, 그것을 견디려고 무척 애를 썼소. 새옹지마, 전화위복 같은 말로 고통에 쓸데없는 덧칠을 하고 싶지 않다오. 어떤 불행과 고통은 한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회복될 수 없게도 만들지요. 그래서 그건 신이 인간에게 보이는 아주 순전한 조롱과 악의같다는 생각도 들었소.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느냐고 물었던 10년전 학생의 물음에 답할 그 무엇도 나는 찾지 못했소.

  "참으로 길고도 지독한 날들이었군 그래."

  지난 10년의 시간에는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건 오직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 거요. 어쨌든 지금 살아있다는 것,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 말고 중요한 사실은 없다는 생각도 드오.

  선생이 한국에서 처리해야할 일 때문에 7월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 미친 전염병의 시대에 선생의 생업도 부득이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이곳에서 잘 지내다 캐나다로 무탈히 돌아가길 바라오. 선생이 나온 다큐를 보면서 고통을 견디며 살아낸 사람의 기개와 강인함이 느껴져서 참 보기 좋았소.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썼다오. 멀리서, 응원하리다.



                                                                   2020년 8월

                                                                   행운을 빌며

                                                                   R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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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트럭커 유투버 '디젤 집시' 최창기 씨의 다큐(KBS 1TV의 다큐세상 '디젤 집시의 대륙횡단기', 2020년 2월 7일 방영분)를 보고 지난 8월에 쓴 짧은 소설이다.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그의 블로그에 발인 날짜가 9월 30일로 적혀있었다. 인생이란... 타국이 아닌 고향 땅에서 영면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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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아직 한낮의 햇빛은 열기를 머금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감나무의 감 색깔은 푸른색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 양지바른 곳의 감나무에는 주황색의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래, 가을이지.


  자주 나가는 산책길은 작은 공원을 경유하는데, 이 공원에는 목련, 산수유 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 가운데 가을만 되면 가장 수난을 당하는 나무가 참나무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이든 아줌마들이 배낭까지 메고 와서 도토리를 따간다.


  긴 막대기를 가져와서 가지를 후려치고, 발로 나무를 쾅쾅 쳐대면서 도토리를 따가느라 여념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 공원에 참나무가 꽤나 많은 것 같지만, 내가 헤아려보니 열 두어서너 그루나 될까, 게다가 수령이 오래된 것도 아니어서 열매라도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 도토리를 서로 따가겠다고 그러고 있는 모양새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알기로는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서 해먹으려면 꽤 많은 양이 필요할 텐데, 아마 이 공원 말고도 다른 곳까지 다니면서 따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돌아오는 길에 보니, 참나무 잎들과 도토리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나뒹굴고 있었다.


  가로수로 흔하게 심어진 은행 나무의 열매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꽤 인기가 있었다. 커다란 포대 자루를 끌고 다니며 은행 나무를 쳐대면서 열매를 주워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열매를 따간 것으로도 모자라 그 냄새나는 껍데기를 까서 나무 밑에 한무더기로 버려놓고 가는 그 한심한 행태에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도시의 가로수 열매에는 매연같은 중금속 물질이 많다는 보도들이 여러번 나가고 나서는, 발에 밟힐 정도로 은행 열매가 많이 떨어져도 이제는 줍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은행 열매가 전통적으로 동양권에서는 식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은행 열매에 있는 4-MPN이라는 물질은 사람에 따라서는 신경 마비를 유발할 수 있는 신경독으로 작용한다. 이 물질은 열에도 안정적이라서 익히거나 열을 가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 병원 응급실에 은행 열매를 먹고 발작이나 마비 같은 증상으로 실려온 환자들의 인종을 살펴본 결과, 대다수가 아시아계라는 논문도 있을 정도다. 은행 열매의 독성을 간과하고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먹이다가 응급실에 실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소아과 의사들이 경고하기까지 한다.


  대추 나무도 수난을 당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나는 아파트나 공원에 심어진 대추 나무가 빨갛게 잘 익은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대개가 익기도 전에 푸른 열매 채로 죄다 다 따가버리기 때문이다. 감나무의 경우에도 그 열매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을 정취를 느낄만큼 보기 좋게 익은 감들이 한 며칠 보기도 전에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다. 아파트의 나무들은 정기적인 수목 소독을 하는데, 도대체 그런 나무 열매들을 기를 쓰고 따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몇년 전 가을의 일이다. 밖에서 무슨 큰소리가 나길래 내다 보았다. 중년의 남자와 늙은 여자가 서로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경비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당신이 동대표 마누라면 마누라지, 어디서 경비를 종처럼 부려먹어. 이 아파트 경비가 당신이 감따라고 하면 감따는 사람이야? 내가 관리사무소에 항의를 하려고 전화를 몇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그리고 경비 아저씨, 이딴 일 하지 마쇼. 진짜 열 받네, 어휴."


  쩌렁쩌렁 울리는 중년 남자의 말을 듣고나서 무슨 일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바구니에는 아파트 감나무에서 딴 감들이 그득했다. 나이든 경비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날은 마침 휴일이었다. 그래서 관리사무소 사람들은 중년 남자의 의기에 넘치는 분노를 피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 미학 개론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첫 강의 시간에 강사 선생님이 미학이란 학문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사과 나무에 열린 사과를 보는 두 가지의 관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따 먹는 것으로, 또 다른 하나는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미학은 후자의 관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과수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닌 도시의 사람들이 열매가 달린 가을의 나무들을 그러한 미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은 정녕 도달하기 힘든 이상일까? 며칠 전에 이미 따가버린 대추 나무 아래 떨어진 퍼런 대추들과, 나뒹굴어 다니는 참나무 잎가지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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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 뉴스를 보고 있는데, 하단 자막에 '일본 여배우 다케우치 유코 사망'이라는 기사가 빠르게 지나갔다. 뜻밖의 소식이라 무척 놀랐다. 오후 내내 뒤이어 나온 기사들에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는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비극적 죽음이 맞는 듯하다. 요새는 언론사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파급력을 생각해서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보도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을 보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다케우치 유코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의 여배우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영화를 보지 않은 나에게는 일본 드라마 '런치의 여왕(2002)'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 드라마에서 레스토랑 키친 마카로니를 운영하는 4형제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나츠미 역으로 나온 다케우치 유코는 참으로 행복하게 빛나는 건강한 미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 드라마가 그녀에게는 진정한 출세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잠시 잊을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이전 드라마 출연작이었던 '데릴사위(2001)'에서도 그러한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매력은 잘 드러난다. 그 드라마에서 그녀의 웃음은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전해주는 그런 것이었다. 같은 해에 SMAP의 나카이 마사히로와 같이 출연한 드라마 '하얀 그림자(2001)'에서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도 잘 소화해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의사 나오에를 사랑하게 된 간호사 노리코 역으로 분했는데, 생의 희망과 따뜻함을 자신의 연인에게 전해주는 모습으로 감동을 이끌어 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녀의 인생작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이겠지만, 내게는 그 영화가 이 여배우의 불행한 사생활의 전주곡처럼 여겨진다. 영화 출연을 계기로 부부로 맺어진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알려진 대로 불화로 점철되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종지부를 찍었다. 2005년에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와 함께 출연한 영화 '봄의 눈'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별로였지만, 다케우치 유코의 연기도 피상적이고 도식적으로 보였다.


  급하게 진행된 결혼과 출산, 이혼으로 이어진 사생활의 파고 속에서 이 여배우는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장미없는 꽃집(2008)'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드라마였다. 비밀을 간직한 여주인공 역을 무리없이 잘 소화해낸 다케우치 유코는 배우로서의 경력을 이어나갈 힘을 얻게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배우의 출연작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토록 열심히, 즐겁게 보았던 일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경력이 어떻게 더 이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재혼을 했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케우치 유코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나서, 배우로서 꾸준히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츠마부키 사토시를 떠올렸다. 최근에 츠마부키 사토시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영화 '워터 보이즈(2001)'의 미소년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가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 나는 그 배우가 자신의 외모가 주는 귀엽고 편안한 인상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넓히는지를 궁금증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아마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보고나서 그가 연기의 스펙트럼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고, 배우로서도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드라마 '런치의 여왕'과 영화 '봄의 눈'에서 다케우치 유코와 같이 공연했었다. 내가 알았던, 한 시절을 함께 했던 배우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미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배우 다케우치 유코. 그 미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나름의 정신적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떠나간 곳에서는 평안함 속에서 잠들기를, 작품 속에서 보여준 그 미소가 온전히 다케우치 유코 자신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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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TS(방탄소년단) 멤버가 어떤 영상에서 먹고 있었던 빨간색 음식에 대한 서양 팬들의 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그 음식의 간편식 해외 수출이 꽤 많이 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 빨간색 음식은 '떡볶이'였다. 아, 떡볶이... 마음으로는 먹고 싶으나, 현실적으로는 먹지 못한지가 여러해가 다 되어간다. 예전부터 매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수록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속이 불편해졌고, 그렇게 나는 빨간색 음식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사실 매운 맛이 식탁을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김치도 내게는 기피음식일 뿐이다. 고추장이 양념의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즉석 조리식품에서도 매운 맛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라면도 고춧가루 때문에 먹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우동 라면이 있었다. 그것도 어쩌다 먹는데, 어느날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약간의 매운 맛이 느껴졌다. 궁금해서 제품 포장지의 뒷면을 보니 스프 내용물에 '고춧가루'가 적혀 있었다. 더이상 그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맑은 국물의 탕류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분명히 맑은 색의 국물인데,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난다.


  프라이드 치킨에서도 매운 맛은 빠지지 않는다. 그냥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는데, 튀김옷에 매운 맛을 가미했는지 입안에서부터 얼얼한 느낌이 전해진다. 역시 먹고나서 속이 쓰려온다. 고로케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김치 고로케를 먹었을 때이다. 동생이 사 온 고로케 가운데 하나를 무심히 먹었다가 그날 내내 그 매운 맛 때문에 고생을 했다.


  전에는 특수한 양념의 식재료로 취급되었던 청양 고추를 요새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기본으로 넣는다. 그런 매운 맛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있다면, 아마도 어린이를 위한 음식 조리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이를 위한 요리에는 매운 맛 대신에 단 맛이 들어간다. 어른들 음식이라고 해서 단 맛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은 갈수록 달달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잡채밥 간편식이 나왔길래 사서 먹어보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단 맛이였다. 잡채가 아니라 물엿으로 범벅을 해놓은 당면 볶음 같았다. 그 잡채밥의 양념 간장에는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더 맵고 칼칼한 맛을 찾으러 다니면서, 그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강의 단 맛에도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김장을 할 때,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덜 매운 고춧가루를 구할 수 있는가, 였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맵지 않은 순한 맛의 고춧가루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춧가루는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고춧가루가 아주 매운 맛의 고춧가루여서, 맵지 않은 고추를 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아줌마의 전화 통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춧가루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샀는데, 하나도 맵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소리였다. 아, 그 고춧가루를 우리 어머니가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언제 고추가 들어왔는지 대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래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2010년, 한국 식품연구원과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공동 연구에서 새롭게 공개된 고문헌을 살펴본 결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15세기 이전에 고추장을 이용한 음식이 있었고, 그러한 발효 음식은 고추 전래 시기가 훨씬 이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고춧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이전까지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가 소금이 귀한 시기에 방부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 일반 대중의 식탁에 김치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은 이제는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소울 푸드(Soul Food)' 의 위치까지 차지했다.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뭔가 매운 것을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그 매운 맛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매운 맛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것이다. 언젠가 내가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매운 음식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여러 댓글이 달려서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회식 자리도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좋아하는 시뻘건 국물을 회식 자리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라는 글을 읽고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 기능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매운 음식 보다는 담백한 것을 찾게 되는 듯하다. 식품 회사들이나 요리 연구가들이 매운 맛 위주의 음식 보다는 좀 더 다양한 한국적인 맛을 찾아서 새로운 조리법과 간편식을 개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매운 맛의 나라에는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맛'의 정의가 어떻게 하면 더 매울 수 있는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온 장류와 발효식품을 사용해서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잦은 비 때문에 고추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고춧가루 값이 예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한다. 배추 농사도 좋은 작황을 기대할 수 없어서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하는 이들도 많다. 깍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 농사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매운 맛을 감수하고서라도 겨울 깍두기의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맛은 놓칠 수가 없다. 맵지 않은 고춧가루만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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