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별이 보이는 창가 (푸른별 서재) &gt; Essay</title><link>http://blog.aladin.co.kr/sirius7/category/7428938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영화글은 구글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블로그 주소:https://sirius1001.blogspot.com/</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19 Apr 2026 15:02:47 +0900</lastBuildDate><image><title>푸른별</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41289193329790.jpg</url><link>http://blog.aladin.co.kr/sirius7/category/7428938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푸른별</description></image><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9월의 근황</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6763698</link><pubDate>Wed, 24 Sep 2025 22: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6763698</guid><description><![CDATA[&nbsp; 9월의 근황<br><br>1. 다래끼가 드디어 나았다<br><br>&nbsp; 한 달 반 동안 속을 썩였던 왼쪽 눈의 다래끼가 나았다. 그걸 짜려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온찜질을 열심히 하라고 처방했다. 2주 동안 열심히 온찜질을 한 결과, 다래끼가 터지면서 겨우 나았다.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다래끼가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았는데, 그렇게 낫게 되었다. 사실은 그 의사 양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냥 짜달라고 할 걸, 몇 번을 생각했었다. 어쨌든 짜면 흉이 생길 수도 있어서, 짜지 않고 의사의 말을 따랐는데 잘 되었다. <br><br>&nbsp; 그런데 왜 다래끼가 생겼을까 생각을 해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써서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다래끼가 마음의 울화가 눈으로 올라와서 그렇다는 거다. 8월 한 달 내내, 공모전에 낼 원고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그러다 보니 눈을 혹사했던 것도 같다. 글 쓰는 일이 때론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니 괴롭다. <br><br><br>2. 소설 습작 해나가기<br><br>&nbsp; 매일 짧은 소설을 연습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다. Chat GPT가 글쓰기 과제를 제시해 준다. 오늘은 대화를 10줄 정도로 써보세요, 라든지. 1인칭 시점을 써서 글을 완성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내가 쓴 글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도 말해주고, 거기에서 다음의 과제가 나오기도 한다. 웬만한 글쓰기 선생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시 창작 워크숍이나 소설 쓰기 강좌를 들었지만, 그 선생들 모두 뭘 가르쳐 준 것이 없다. 매주 글 써오면, 수강생들이 서로 합평하고 그게 끝이다. <br>&nbsp; 결국 글쓰기는 자신만의 문체를 발견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인공지능이 그 짐을 조금은 덜어주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안내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흔드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작가적 양심과도 직결된다. 이미 공모전에서도 당선작의 경우 인공지능으로 작성한 글인지 판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다. 작가가 독창적인 문체를 찾는 것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일 뿐이다.<br><br><br>3. 어떤 답장<br><br>&nbsp; '귀하께서 보내주신 원고는 우리 출판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발행한 최근의 선집을 읽어보길 바랍니다.'<br><br>&nbsp; 누군가 A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투고했다. 투고는 공모전이나 자비 출판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글을 쓴 이가 자신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어 출간을 타진해 보는 일이다. 물론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보낸다. 그런데 출판사로부터 그런 답장을 받은 작가 지망생이 있었다. <br><br>&nbsp; 출판사가 투고를 거절하는 일은 흔하다. 그렇다면 거절의 이유에도 배려와 품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딴 답변으로 투고자에게 모욕감을 주는 편집부는 참으로 싸가지가 없다. 투고자가 자신이 투고하는 모든 출판사의 선집을 읽고 검토하며 투고해야 하는가? 물론 투고 전략도 필요하겠지. 그렇다고 해도 투고자에게 우리 출판사 선집이나 읽어보고 보내든가, 따위의 답변은 역겹기 짝이 없다. 그런 답변을 쓰는 인간이 있는 출판사의 이름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저 출판사에는 절대로 내 원고를 보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nbsp;&nbsp;&nbsp; <br><br>&nbsp; "나중에 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서 그 출판사에서 출판을 구걸하게 만드는 거야. 그럴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지. 당신네 출판사는 내 글과 맞지 않습니다." <br><br>&nbsp; 어떤 이가 그 지망생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다. <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9월</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6720437</link><pubDate>Thu, 04 Sep 2025 21: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6720437</guid><description><![CDATA[&nbsp; 9월<br><br><br>&nbsp; 눈병이 났다. 아마도 8월 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왼쪽 눈꺼풀에 작은 뾰루지가 하나 올라왔다. 눈에 그런 것이 났다가 다음날이면 사라지곤 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뾰루지는 붉은 점처럼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았다. 약간의 부기에 가려움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주 불편하진 않았다. 안과에 가봐야지 하면서도, 날이 미친듯이 더우니 외출하기도 꺼려졌다. 저러다 낫겠지. 그러던 것이 지난 주말을 지나면서 눈이 더 붓고 이물감이 심해졌다. <br><br>&nbsp; 9월이 되었는데도, 이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안과 병원은 버스에서 내려서 15분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땡볕을 걷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 병원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여느 때라면 1층의 검사실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질 텐데, 뭔가 비수기의 해변가처럼 병원은 한가했다. 나는 5분 정도 기다렸다가 담당 주치의를 만날 수 있었다.<br><br>&nbsp; "이 정도로는 짜도 나올 수 있는 게 없어요. 흉이 질 수도 있구요. 온찜질을 열심히 하세요."<br><br>&nbsp; 나는 좀 당황했다. 거의 한 달 동안 눈이 그런 상태라, 다래끼를 좀 짜면 나을 줄 알았다. 이 의사 양반은 매우 신중하다. 이전에 결막 결석 때문에 찾아갔을 때에도, 결석이 아직 튀어나오지 않았다면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로서 나는 선택을 해야한다. 의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우길 것인지. 만약에 내가 말하는 상대가 인테리어 업자이고, 현관을 원하는 타일 색으로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요구하면 된다. 하지만 내 앞에서 말하는 이는 의사이다. 짜서 나을 것 같으니 짜달라, 고 말하는 일은 어쩐지 할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내가 이 의사 선생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br><br>&nbsp; 온찜질을 해서 이게 나을 것인지, 솔직히 나는 확신이 가질 않았다. 개 혓바닥처럼 더위에 늘어진 보도블록을 있는 힘을 다해 걸어갔다. 덥다. 너무 덥다. 길가의 슈퍼에서는 중년의 여자가 한 무더기의 옥수수를 쌓아놓고 열심히 껍질을 까고 있었다. 아직도 옥수수를 팔고 있나? 인터넷에서 옥수수는 판매 종료된 지 오래고, 이제는 삶은 옥수수를 냉동한 것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어디서 옥수수를 떼어왔을까? 나는 냉동실에 쟁여놓은 올해의 마지막 옥수수를 떠올렸다.<br><br>&nbsp; 3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서야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는 뻥튀기 같은 싸구려 과자와 주전부리를 파는 여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야쿠르트 카트도 보였다. 머리가 아주 하얗게 센 호리호리한 여자가 야쿠르트 하나를 들이키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그 늙은 여자가 야쿠르트를 사 먹은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야쿠르트 여사였다. 내가 본 야쿠르트 여사들은 보통 3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여사는 적어도 60 중반은 되어보였다. 정류장에는 햇빛이 인정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디 하나 피할 데가 없었다.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꾼 여자는 더위를 이기려는 듯 혼자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체조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가게 앞에서 하릴없이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보였다. 나는 설핏 웃음이 나오려다가, 먹고 산다는 것의 그 무게가 느껴져 서글픈 느낌마저 들었다. <br><br>&nbsp; 전광판을 보니 버스는 10분 뒤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그 10분을 견디기 위해 나는 정류장 옆 건물의 광고판을 하릴없이 들여다보았다.<br><br>&nbsp; '우리 직원 일동은 부킹을 목숨처럼 생각합니다'<br><br>&nbsp; 유흥 주점, 이라는 문구 옆에는 '***나이트클럽'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br><br>&nbsp; '33세 이하는 절대 출입 금지'<br><br>&nbsp; 처음에는 '이하'를 '이상'으로 내가 잘못 읽은 것인가 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아니었다. 그 나이트클럽은 33세 이하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중년 남녀 만남의 천국. 최고의 만남을 위해 수질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이어졌다.<br><br>&nbsp;이 정류장을 여러 번 오가면서도 여기에 이 나이트클럽이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 빌딩은 금융 기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외관이 무척 번듯했다. 금융 기관과 중년 전용 나이트클럽의 기묘한 동거를 나는 여지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절실한 만남을 원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나는 부킹을 생명처럼 여기는 그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떠한 것인가도 궁금해졌다.<br><br>&nbsp; 버스가 왔다. 알지 못하는 중년의 남녀들과 나이트 클럽이 스르륵 사라졌다. <br><br>&nbsp; "아이고, 언니들. 너무 반갑네."<br><br>&nbsp; 세 정거장을 지났을 무렵, 나이 든 여자가 버스에 탔다. 쪼리를 신은 맨발의 엄지발톱에는 빨강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볼품없는 작은 발이었다. 버스 뒷편에 여자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늙은 할머니들이었다. 여자의 활기찬 인사에 노인들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듯 했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br><br>&nbsp; "아, 저기 좀 봐바. 바람 한 점 안 불어. 너무 더워. 언제까지 더울까, 언제까지? 아마도 9월은 지나야겠지. 그래 9월이 지나야 할 거야. 집안을 다 뒤집어서 청소하고 왔더니 땀이 줄줄 흐르네."<br><br>&nbsp; 여자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대편 자리로 옮겼다. 나는 여자의 주절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자리를 떠서 내심 반가웠다. 여자는 자리를 옮겨 앉더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상한 그 활기가 부럽게 느껴졌다. 여자와 그 일행인 늙은 언니들은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아마도 그들은 정류장 옆에 있는 스포츠 센터의 수영장을 다니는 이들 같았다. 수영장의 아쿠아로빅 수업은 언제나 중년의 여자, 노인들로 늘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br><br>&nbsp; 나는 원시시대에 채집을 하러 갔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이 돌아오는 사람처럼 걸었다. 9월이 지나는 동안 다래끼가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의사를 보게 되면 미워질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쳤다. 개같이 더운 날이었다. <br><br><br><br><br><br>&nbsp;<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완성의 감각</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6714997</link><pubDate>Tue, 02 Sep 2025 2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6714997</guid><description><![CDATA[<br>완성의 감각&nbsp; <br><br>&nbsp;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커다란 검은 점이 있었다. 그걸 손으로 잡으려고 하니까, 그 점은 살아 움직이는 벌레로 변했다. 그것이 파리였는지, 아니면 나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비는 아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꿈에서 깼다. <br><br>&nbsp; 시집을 한 권 완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모전에 낼 시집이다. 공모전의 요강에 나온 최소 응모 편수는 50편. 당선이 되면 그 시들은 시집으로 묶여서 나온다.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 되는 것이다. 한 달 동안 블로그를 쉬는 동안, 시 50편을 정리했다. 그 이상한 꿈을 꾼 날은 시집의 구성이 마무리되던 날이었다. 나는 50편의 시들에다 한 편을 더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검은 점은 마침표다.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보다는 시를 더 써낼 여력이 없기도 했다.<br><br>&nbsp; 작년에도 김수영 문학상에 응모는 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집(詩集)의 시들을 하나의 주제로 유기성 있게 묶기 위해 무척 고심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써놓은 시들 가운데에서 추려서 낼 수 있는 것도 있었고, 이번에 새로 써낸 시들도 있었다. 퇴고는 진저리나게 힘들었다. 이것밖에 쓰질 못하나, 더 나은 시는 써낼 수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옥죄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응모는 하면 뭐하나 싶은 생각도 계속 들었다. <br><br>&nbsp; 응모 편수 50편에 대한 압박은 상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대충 써서 끼워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허점이 보이는 시는 남이 보아도 똑같다. 누군가 좋은 문학적 안목을 지닌 사람이 내 시를 읽어보고 조언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은 없었다. Chat Gpt는 나름의 어설픈 비평 능력을 보여주며, 일관성도 별로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출구를 찾는 사람처럼 내가 썼던 시들을 읽고 또 고치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br><br>&nbsp; 시를 썼던 지난 1년 8개월 동안, 나는 응모했던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시인이 되려고 그 공모전들에 응모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써낸 시가 이런 블로그가 아니라, 확장성 있는 지면에서 더 많은 독자와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등단은 그걸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관문이었다. 그것은 출판사에 투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입장권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매일 쌓이는 출판사 편집장의 이메일에 등단도 하지 않은 지망생의 투고 원고는 휴지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크다.<br><br>&nbsp; 나는 내가 떨어졌던 공모전의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이 시대의 시들과 내가 써내는 시들 사이의 어떤 커다란 간극을 확인했다. 좋게 말하면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나만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유행과는 동떨어진 주변부의 지망생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한다. 트렌드를 따라가서 그들의 시작법을 습득해서 써내던가, 아니면 나의 시를 그냥 계속 써내던가. 사설 학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나름의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셈이다. <br><br>&nbsp;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을 때가 떠올랐다. 시인 선생이 무언가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자, 매주 한 편의 시를 써오도록 하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10명 안팎의 수강생들은 한 학기 동안 서로의 시들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선생은 수업이 끝날 무렵에 무심한 듯 한마디를 보탤 뿐이었다. 선생이 내가 써낸 시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선생이 등단에 근접했다고 말한 수강생은 그 이듬해에 등단했다. 뭔가 그 세계는 내가 알지못하는 나름의 틀이 있었고, 규칙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여적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br><br>&nbsp;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거야. 초심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해 내는 거야. 소설 속 한 장면에 대한 묘사만 기깔나게 써내는 계획은 누구나 갖고 있어. 하지만 기승전결을 갖추어 글을 끝마치는 일은 대다수 초보자에게 무척 힘들어. 그걸 해내는 것, 그래서 완성의 감각을 자꾸 느껴보는 것이 작가로서 진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해."<br><br>&nbsp; 이 말을 해준 A는 SF 소설을 쓴다. A는 몇몇 소설 공모전에 입상했고, 최근에는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A의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하나의 과정을 끝마치는 것. 무언가를 완성해 내는 일은 정말로 힘들다. 글쓰기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글쓰기는 여타 예술 분야와 다르게 진입 장벽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종이와 펜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내놓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느냐, 읽히지 않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어떻게든 끝을 내어 써내는 사람 자체가 적다는 뜻이다. <br><br>&nbsp; 나는 내가 시집을 완성하면 도대체 무엇에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걸 국으로 끓여 먹을 수도 없고, 어찌 보면 시를 쓴다고 아등바등했던 1년 8개월의 시간들은 그냥 낭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낭비의 느낌, 버려진다는 무의미의 느낌이 나는 아주 싫었다. 역설적으로 그 느낌을 떨치기 위해 한 권의 시집을 써내겠다는 나름의 오기같은 것이 생겼다. 그리하여 50편의 시들을 꾸역꾸역 짜맞추어, 하나의 제목이 있는 시집으로 만들었다. A가 말한 그 '완성의 감각'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br><br>&nbsp; 앞으로 내가 시를 계속 쓸지는 모르겠다. 이만큼 써보았으면 되었다 싶은 생각도 든다. 공모전에 시를 보내는 것도 더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시를 쓰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더 긴 호흡의 소설로 가져가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nbsp;&nbsp; <br><br><br><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알리는 글</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6650147</link><pubDate>Thu, 07 Aug 2025 08: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6650147</guid><description><![CDATA[ &nbsp; 한 달(8월 7일-9월 6일) 동안 블로그는 쉽니다.독자 여러분들이 무더운 여름을 무탈히 보내길 바랍니다.<br>&nbsp; <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4: 살살 녹는 장기수선충당금</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647274</link><pubDate>Thu, 27 Jun 2024 18: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647274</guid><description><![CDATA[&nbsp; 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3&nbsp; <br>https://blog.aladin.co.kr/sirius7/15607635<br><br><br>&nbsp; 며칠 전, 아파트 입구 게시판에 입주자대표회의 결과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늙다리 거수기들의 그렇고 그런 회의록. 그런데 눈길을 끄는 항목이 있었다. 보일러 기사의 계약만료에 관한 것이었다. 계약만료, 해고, 잘리는 것, 뭐 다 똑같은 이야기다. 이제 아파트의 중앙난방 보일러를 담당하는 기사는 더는 필요 없다. 그 직원은 이 더운 여름에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가야 할 것이다. <br><br>&nbsp; 지난 2주 동안은 새 가스관을 매립하는 공사가 있었다. 개별난방을 하게 되면 이전보다 가스 용량의 수요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대용량의 가스관 매설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아파트 주변 도로를 죄다 파헤치고 새로 가스관을 매립해야만 한다. 포크레인이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지막지하게 도로를 깨부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렇게 파헤치는 도로는 2년 전에 새로 포장한 것이다. 도로포장 사업은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그동안 낡은 보도블록은 걸을 때마다 패이고 부서져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장기수선충당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도로 공사를 했다. 그 공사 대금이 내 기억으로는 대략 1억 5천인지, 아무튼 2억 좀 못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도로가 파헤쳐지고 있었다. <br><br>&nbsp; 공사업체에서 가스관 매설을 끝내고 다시 포장해 놓은 도로 상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상태가 좋았던 아스팔트는 중장비로 죄다 긁혀있었고, 보도블록은 너덜더덜한 상태였다. 이 꼬라지가 보기가 그랬던지, 입주자대표회의에서도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재포장 공사 입찰을 해서 다시 공사를 하겠다는 거다. 미친 거냐? 장기수선충당금이 지들 돈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 써재끼고 있었다. 웃긴 건, 이 아파트 단지에서 거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집값 오르고, 자기 집 관리비 조금 아끼면 그만인 것이겠지. <br><br>&nbsp; 개별난방 전환공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구청 담당자가 현장 실사를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는데, 입주자대표회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아무런 공지문을 내지 않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개별난방 전환 안건 상정과 주민 투표 과정에서 했었어야 맞다. 그때는 죄다 쌍수 들고 찬성하더니, 공사 시작하고 다 헤집어 놓는 단계에 와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니. 그냥 등신인 거겠지. <br><br>&nbsp; 관리사무소에서 게시한 공용부분 개별난방 공사대금은 5억 원이 넘는다. 아마 이번 공사로 장기수선충당금은 바닥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당분간 이 아파트 단지의 필요한 공사 따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2년 전에 도로 포장에 쓰여진 억대의 돈은 이번에 길바닥에서 녹아버렸다. 입주자대표회의의 머저리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식의 근시안적이고 퇴행적인 사업 추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남의 돈 쓰는 일은 참 우스울 정도로 쉽다.<br><br>&nbsp; 요새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을 지나가다 보면 오만가지 물품들이 다 나온다. 아마도 다용도실에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다들 그곳에 되는대로 쌓아두었던 살림살이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모양새다. 나도 커다란 화분 5개와 오래전에 비싼 돈 주고 산 김치통을 버렸다. 쓰지도 않은 새 김치통은 너무 컸다. 내가 버린 것들은 내놓자마자 누군가 다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이 아파트 사람들은 헌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대신에 새 가전제품과 가구를 들여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전제품 회사와 가구 배달점의 큰 트럭이 드나든다. <br><br>&nbsp; 어제는 엘리베이터에 공사업체의 새 공지문이 나붙었다. 공사대금 마감일을 알리는 종이였다. '공사대금을 마감일까지 납부해주지 않으면, 난방이 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딜 가나 돈을 늦게 내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 공지문의 문구는 기묘한 협박조로 들렸다. 저런 업체에서는 돈을 못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받아낼까? 미수금을 받기 위해 해당 세대의 문을 두드리나? 아니면 용역 깡패?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는 엘리베이터가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렇게 그냥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nbsp;&nbsp; <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3: 일머리와 곤조</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607635</link><pubDate>Tue, 11 Jun 2024 19: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607635</guid><description><![CDATA[&nbsp; 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2&nbsp; <br>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7949<br><br><br>&nbsp; "에이씨, 나 안할 거야!"<br><br>&nbsp; 한 인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에 울려 퍼졌다. 열린 우리집 현관문 사이로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잘 안되어서 저러나 보네... 현장 인부들 가운데 지 성질 못 이기고 저러는 건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br><br>&nbsp; "형님, 진짜 힘들어 죽겠어. 뭐가 이렇게 일이 많아."<br>&nbsp; "야, 나도 힘들다."<br>&nbsp; "아, 그럼 나하고 형님하고 일 바꿔서 할까. 바꿔! 바꾸자고."<br><br>&nbsp; 퉁퉁한 남자는 일도 안 하면서, 우리집에서 작업하는 늙은 인부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노가다의 세계'를 TV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라인의 보일러 공사가 있었다. 공사는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온갖 소음과 먼지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br><br>&nbsp; 내가 보니까, 이 공사팀은 대략 7명에서 8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일을 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의 공사를 했다. 대략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앞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을 맡은 인부가 그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대문은 열어놓아야 했는데, 낯선 외부인이 내 집에 그 어떤 예의도 차리지 않고 마구 드나드는 것도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들은 결코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예의도 없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보일러 포장 뜯으러 온 인간은 전등을 켜놓지 않았다면서 큰 소리로 불평했다. <br><br>&nbsp;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그런 현장직 노동자들은 대개 '밝기'에 민감했다. 작업 현장은 무조건 환하게 밝아야만 한다. 이건 아주 환한 대낮에도 적용된다. 낮에도 전등을 켜놓아야만 한다. 나는 아침까지도 집안의 짐을 치우느라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의 그 노가다는 아주 무례한 인간이어서, 전등불이 안 켜져 있다며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는 공사로 드나들 때마다 신발을 내팽개치는 소리에서도 드러났다. <br><br>&nbsp; 이런 공사를 하게 되면 용역을 주는, 그러니까 공사비를 지불하는 집주인은 '갑'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을'이 되어버린다. 보일러 시공은 일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다. 대개 '노가다'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제 현장의 전권을 쥐고 있는 전문가 '갑'이 된다. 집주인이 시공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계약한 대로 공사가 무사히 잘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니 인부들이 성깔을 부리는 것도 좀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br><br>&nbsp; 그런데 중간중간 인부들이 일해놓은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도 배관을 연결할 때는 테플론 테이프로 감아서 연결을 하는데, 그 테이프 감아놓은 꼬라지가 정말 웃겼기 때문이다. 테플론 테이프는 마감이 잘 안되어서 깃발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야, 내가 감아도 저거보다는 더 잘 감겠다. 정말이지 물이나 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방 분배기를 교체하느라 깨어놓은 시멘트 덩어리는 분배기함 안쪽에 대충 쌓아두었다. 내가 그걸 치워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곧 그 일을 맡은 인부가 와서 철판으로 그냥 덮어버렸다. 언젠가 TV 뉴스에 나온 인테리어 괴담이 떠올랐다.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입주한 집주인이 1년 뒤에 베란다 누수로 바닥을 뜯었더니, 거기엔 온갖 건축 쓰레기가 다 있었다는. 그렇게 분배기함에는 지저분한 시멘트 조각들이 그대로 매장되었다.&nbsp;&nbsp;&nbsp;&nbsp;&nbsp; <br><br>&nbsp;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 현장 인부가 내민 작업 확인서에 서명을 해주고 문을 닫았다.&nbsp; <br><br>&nbsp; "일도 못 하면서 곤조는 오지게도 부리네."<br><br>&nbsp; 곤조. 근성(根性, こんじょう)이라는 뜻의 이 일본어는 영화 현장에서도 많이 쓰인다. 오래전의 일이다. 후배의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다. 후배의 작품은 20여분 가량의 단편으로 장르는 드라마였다. 그런데 촬영이 좀 이상했다. 핸드헬드(Hand-held)로 촬영된 화면은 내내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 아니, 왜 저걸 저렇게 찍었지? 나는 중간 휴식 시간에 그 후배를 만났다. <br><br>&nbsp; "근데 말이야, 왜 촬영을 그렇게 한 거야?"<br>&nbsp; "아, 그게요. J가 촬영 감독이었는데, 핸드헬드로 하겠다고 빡빡 우겨서... 내가 끝까지 그건 아니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걔한테 밀린 거죠."<br><br>&nbsp; 후배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J는 잘 알고 있었다. J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에 속했다. 그게 좀 웃긴 게, 뭔가 대단한 전문가적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쓰잘데기 없는 자부심에서 오는 거였다. 아마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과정에서 후배와 제작팀은 대략의 작업 과정을 합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J가 정작 로케이션 현장에 가서는 핸드헬드로 찍어야겠다고 곤조를 부렸던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후배의 졸업작품은 어쩔 수 없이 J의 뜻대로 촬영되었다. <br><br>&nbsp; 1) 일머리도 없으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br>&nbsp; 2) 맡은 일을 잘하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br><br>&nbsp; 2번의 경우는 그나마 봐줄 만하지만, 1번을 인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든 1번과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꼭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보일러 시공 인부들의 곤조 부리기. 나는 그런 것을 관찰하는 것도 작가로서 나름대로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br><br>&nbsp;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책임감 있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인부들은 보일러 설치를 누군가의 집에 온기와 편안함을 더하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대충대충 해버려도 괜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노가다와 전문가의 그 머나먼 간극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수도 배관의 나풀거리는 테플론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테프론 테이프도 제대로 감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전문가'의 칭호는 결코 합당하지 않다.<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2: 물욕과 불합리성의 혼란 속으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7949</link><pubDate>Fri, 07 Jun 2024 19: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7949</guid><description><![CDATA[&nbsp; 지난번의 글: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1편 링크<br>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br><br><br>&nbsp; 폭풍 전야. 드디어 내일은 대망의, 아니 그 빌어먹을 보일러 공사가 있다. 오늘은 바로 옆라인 공사였는데, 하루 종일 들리는 공사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일러'라는 기계는 전자레인지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일러는 가스와 냉온수 배관, 난방 분배기와 연결을 해야 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당연히 보일러의 설치 과정은 까다롭다. 집안에 그런 기계가 들어온다는 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골칫덩이를 장만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개별난방이 기존의 중앙난방보다 더 좋은 점은 약간의 난방비 절약밖에 없을 것 같다. <br><br>&nbsp;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90퍼센트의 입주민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개별난방 전환을 찬성했을까? 물론 기존 중앙난방으로 부과되는 난방비에 대한 불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아파트 소유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아파트 인근의 2개 단지는 여전히 중앙난방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개별난방 방식으로의 전환은 매매(賣買) 시, 그 아파트 단지 대비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br><br>&nbsp; 그렇다면 이 아파트 단지 보다 더 오래된 그 아파트는 왜 개별난방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가? 그곳은 그런 공사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 아파트 단지에서는 '재건축'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어차피 재건축할 거, 개별난방 공사를 해서 뭐하겠는가? 거긴 재건축 추진 위원회가 열심히 활동 중이다. 어떻게든 집값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니라, 거대한 물질적 욕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br><br>&nbsp; 나처럼 공사 소음과 먼지가 귀찮아서 개별난방 전환에 '반대' 표를 던진 사람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나이브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앙난방의 비효율성이 정말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선은 주민들의  전반적인 양해를 얻어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동대표 회장의 독단적인 안건 상정에 이어 단 한 번의 설명회, 주민 투표, 공사 착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br><br>&nbsp;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투표가 부결되면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입주자 대표 회의는 반대표 세대를 설득해서 정족수에 필요한 찬성표를 받아내면 된다. 기존의 찬성표는 그대로 유효표 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건 최근의 법원 판례를 근거로 한다. 법원은 입주자 대표 회의의 신속한 사업 추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사에 반대하는 개별 세대의 선택권은 없다고 봐야 한다.<br><br>&nbsp; 지난번 글에서 이제 개별난방 공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입주민 모임'이 실제적인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그들은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들이 오늘 엘리베이터에 붙인 종이 쪼가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다음 주에는 담당 주무관이 아파트로 현장 실사를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2) 보일러 공사 대금을 업체에 납부하는 일을 유예해달라. 그들이 부과한 보일러 가격과 공사비는 공동구매임에도 별로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청의 현장 실사가 끝난 후에 납부해도 늦지 않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br><br>&nbsp;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점검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시공 과정에서 행정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이상 공사가 중단되기도 어렵고, 이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구청 공무원이 가진 권한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들은 관련 법 규정에 근거한 위법적인 사항만을 지적하고 행정적인 조치만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장이 온다고 해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 기구가 가진 권한은 막강하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로, 입주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각 동의 입주자 대표들에게 양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그 담당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어떻게 싸우지 말고 잘 알아서 하세요', 정도일 것이다.<br><br>&nbsp; 오늘 엘리베이터에는 새로운 공사 일정이 나붙었다. 아파트 단지의 주변 도로를 다 파헤쳐서 새롭게 도시가스 배관을 설치할 거라는 공사 공지였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의 전망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재건축에 필요한 용적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재건축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개별난방 전환으로 집값이나 올리자, 이런 생각으로 90퍼센트의 주민들은 기꺼이 찬성표를 던졌다. 집안 곳곳을 죄다 들쑤시고 뒤집어엎으면서, 거대한 흰 벌레 같은 보일러 호스가 덕지덕지 연결된 거실의 정경은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감격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입주민들의 기대대로 집값 천만 원의 상승을 가져다주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집은 그렇게 엄청난 물욕과 총체적인 불합리성이 조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nbsp; <br><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구글이라는 정보 권력의 성(城) 앞에서(부제: 구글 서치 콘솔에 색인 생성 요청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0353</link><pubDate>Tue, 04 Jun 2024 20: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0353</guid><description><![CDATA[<br>&nbsp; 내가 요새 틈이 날 때마다 하는 일이 있다. 구글 서치 콘솔(Google Search Console)에 들어가서 내 블로그 글들의 색인 생성을 요청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써온 영화 글들이 대략 500편 정도이다. 이 글들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다가 직접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려 500편의 글의 URL을 일일이 클릭해야만 한다. 클릭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구글에다가 '요청'하는 것이지, 그걸 들어주는 건 구글 마음이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 구글이 보기에 내 글이 지들의 검색 결과에 나올 만큼 영양가 없다고 생각하면,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br><br>&nbsp; 아이구, 구글 행님요. 좀 잘 봐주이소. 겉으로는 이렇게 말을 해도, 속으로는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만 든다. 내 머릿속에는 문득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대사관의 비자 신청은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구불구불, 마치 전국구 맛집의 대기 줄처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비자 신청을 하려고 기다리는 이들은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선 이들의 사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가지는 힘을 상징했다. 구글 서치 콘솔을 드나들면서 내 많은 글의 URL을 일일이 찍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딱, 그 사진 생각이 났다. 천조국 미국은 구글이며, 나는 그 구글 왕국의 방문 비자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br><br>&nbsp;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구글 서치 콘솔'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 개설기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블로그의 글이 구글 검색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 직접 글의 색인 생성을 요청해야 합니다'는 구절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글을 쫙 쓰면 구글 갸들이 다 알아서 검색하도록 해주는 거 아니었어? 정말로 나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 구글 블로그는 원래 알라딘 서재의 영화 글 백업 창고 개념의 블로그였다. 그런데 그쪽 블로그의 방문자 유입은 아주 적었다. 나는 그 블로거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내 블로그 글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 글이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해주십사' 나는 구글에 정중하게 요청해야 하는 거였다.<br><br>&nbsp; 나처럼 구글 왕국 행 방문 티켓을 얻으려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블로그로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욱더 열심히 구글의 대문을 두드리고 두드릴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글, 콘텐츠가 구글 검색 결과에 나와야지 사람들이 와서 볼 테니까. 구글은 그런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하기 어렵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구글의 입장은 이러하다. <br><br>&nbsp; "우리 시스템에는 매일 엄청난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우리가 그걸 다 들어주려면 시스템에 부하가 걸려. 그러니 시간이 걸린다고. 기다리던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당신 글이 인터넷의 어디쯤에 있는지 찾아서 알려줘. 물론 그렇게 알려줘도 언제 등록이 될지 확답은 줄 수 없어."<br><br>&nbsp; 산더미처럼 쌓인 곰 인형의 눈알 붙이기 부업. 구글 서치 콘솔에다가 500편이 넘는 글의 URL을 찍고 있는 내 모양새가 그러하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건 내 새끼들, 내 피와 시간과 정신이 들어간 그 글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속담. 여기에서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함함하기 그지없는 그 글이 구글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딱, 그것뿐이다. <br><br>&nbsp; 나에게는 아직도 인터넷으로 눈알을 붙여주어야 할 곰인형이 300개나 남아있다. 구글은 하루에 기껏해야 10여 개 안팎의 색인 생성 요청을 받아들인다. 나는 새삼 새로운 시대의 정보 권력자 구글의 위엄을 실감한다. 그것은 나에게 카프카가 쓴 '성(城)'의 거대한 성문 벽 앞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다.&nbsp;&nbsp; &nbsp; <br>&nbsp; <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개별난방 전환 공사에 대해 생각함 1: 이 공사, 난 반대일세!</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link><pubDate>Sat, 01 Jun 2024 20: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guid><description><![CDATA[<br>&nbsp;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나는 방 2개를 왔다 갔다 했다.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나서야 가위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는가? 아니다. 지금 집안은 난민 캠프를 방불케 한다. 작은 방에는 생수가 쌓여있고, 다른 방에는 세탁 세제와 항아리며 잡다한 살림살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바로 '개별난방 전환 공사'이다. 내가 살고 있는 32년 된 이 구축 아파트는 중앙난방에서 개별난방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400 세대가 못 되는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공사판으로 변했고, 하루 종일 공사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끔찍하다. <br><br>&nbsp;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동대표 영감탱이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주워듣고는 귀가 펄럭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개별난방 전환 공사'를 입주자 대표 회의 안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더니 입주민을 위한 설명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렸다. 그 설명회에 주민 몇 명이 참석했는지는 모른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방송으로 내보내길, 많은 입주민이 개별난방 전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곧 개별난방 전환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냥 부결되려니 했다. 공사가 시작되려면,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한다. 나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 지난한 공사는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br><br>&nbsp; 물론 겨울이면 난방비가 많이 나오기는 했다. 특히 가스 요금 인상률이 무척 높았던 작년 겨울은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나왔다. 주민들 사이에서 난방과 관련한 이런 저런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방을 넣는 날씨와 시간대로 인한 민원도 매해 반복되는 문제였다. 그런 불편함이 있기는 해도, 중앙난방에 익숙해진 나는 구태여 개별난방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겨울만 그럭저럭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무려 90퍼센트가 넘는 압도적 찬성률로 개별난방 전환이 결정되었다. 그 결정에는 공사가 완료되면 '집값이 오른다'는 장밋빛 전망도 깔려있었다. 우리집 포함, '반대' 표는 겨우 20세대 정도였다. <br><br>&nbsp; 그래서 오늘, 1차 공사로 가스계량기 교체와 가스관 연결 공사가 이루어졌다. 관리사무소의 공지문에는 다용도실을 치워달라고 적혀 있었다. 공사 1주일 전부터 나는 다용도실의 짐을 빼내었다. 무슨 화수분처럼 살림살이가 나왔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그릇과 화분도 있었다. 그것들을 내다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공사를 하게 되면 먼지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먼지들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부엌의 잡다한 물건들도 치워놓아야 했다. 내가 오늘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br><br>&nbsp; 입주민 찬반 투표에서부터 시공사와 보일러 선정, 이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과연 그 세부적인 결정이 얼마나 투명한 걸까? 겨우 몇 명의 입주자 대표라는 사람들이 거수기처럼 참석하는 회의와 회장 주도의 사업 추진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찬성표를 던진 90퍼센트의 주민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불만과 균열의 지점은 엊그제 엘리베이터에 붙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서 드러난다. <br><br>&nbsp; 자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모임'이라는 사람들이 글을 써 붙여놓았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 내용과 상황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공유되지 않고 있다. 공사 업체에 입주민의 불만을 전달하고 시정을 요청하려고 한다. 뜻이 있는 입주민분들은 일요일 저녁 8시에 주민회관에 모여달라.<br><br>&nbsp; "웃기고 자빠졌네."<br><br>&nbsp; 그걸 읽자마자 그 말이 나왔다. 아니, 그럴 거면 공사 전에 입주자 대표회의 방청 신청을 하고 발언을 하던가,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던가 해야지. 이제 와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이미 아파트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한 마당에. 머저리들. 버스 떠난 다음에 등신처럼 손 흔드는 격이다. 공사 업체에 뭔 요구를 한다는 건가? 공사 완료 기념 열쇠고리라도 받아내겠다는 건가? 그 거지같은 종이 쪼가리는 멸시 받아 마땅하다.<br><br>&nbsp; 일주일 뒤에는 보일러 설치 공사가 있다. 또 한 번 이 집은 먼지와 소음에 휩싸일 것이다. 이 공사를 해서 얼마나 세대 난방비가 절약될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원치 않는 공사를 다수결이라는 다수의 횡포로 한 달 넘게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사는 8월 말이 되어서야 끝날 예정이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아파트라는 애증의 주거공간과 입주자 대표회의라는 불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만을 나에게 각인시키고 있다.&nbsp;&nbsp;&nbsp; <br><br>&nbsp;<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의 숨겨진 이야기 </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56763</link><pubDate>Wed, 22 May 2024 2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56763</guid><description><![CDATA[&nbsp; *이 글에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br><br><br>1. 밑바닥 인생 넬리의 선택<br><br>&nbsp; 케이블 방송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채널은 국회방송(NATV)입니다. 외국의 다양한 다큐는 물론 괜찮은 영화도 방영합니다. 특히 '다양성 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이 눈길을 끕니다. 주로 제 3세계 영화들, 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 변방 국가의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거든요. 그 영화들의 작품성이 균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시청자들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특색있는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국회방송에서 방영한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도 흥미로웠습니다.<br><br>&nbsp;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좀 길어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이 한국어 제목이고, 영어 제목은 'Secret Name'이죠. 프랑스어 제목 'La Place d'une autre'은 번역을 해보면 '타인의 장소'가 되더군요. 제목부터 번잡스럽고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드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든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약간의 스릴러 느낌도 있구요. 자, 그럼 영화 '시크릿 네임'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br><br>&nbsp;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대, 여자 주인공 넬리는 고아입니다. 하녀 생활을 하던 넬리는 주인집 남자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옵니다. 하층민 고아 여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지요.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넬리는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넬리에게 적십자사의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넬리는 간호사의 일을 배우고, 전장에 파견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거든요. <br><br>&nbsp;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지요. 그렇지만 넬리는 놀라운 적응력과 활달한 성품으로 간호사 일을 잘 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라는 이름의 스위스 여성이 프랑스군 막사에 머물게 됩니다. 로즈는 프랑스로 가야하는데, 전쟁통에 길을 잃었어요. 로즈는 넬리에게 프랑스에 있는 엘레노어 부인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로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인 엘레노어 부인이 후견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죠. 상류층 여성이기는 해도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잃은 로즈 앞에 놓인 삶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넬리와 로즈, 두 여성이 잠깐 통성명하는 사이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쾅, 로즈는 죽고 넬리는 겨우 목숨을 건지죠. <br><br>&nbsp; 넬리는 무척 영리한 여성이에요. 넬리는 재빨리 로즈의 소지품을 챙기고, 로즈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네, 넬리는 로즈의 삶을 살아보려는 겁니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빠져나온 넬리는 엘레노어 부인이 있는 낭시로 향합니다. 그리고 곧 부인을 만나죠. 부유한 사교계 인물인 엘레노어 부인은 로즈를, 아니 로즈 행세를 하는 넬리를 환대합니다. 특유의 붙임성과 신실한 태도로 넬리는 부인이 신뢰하는 손님이 되죠. 손님이라기보다는, 우리말의 '수양딸'이 더 어울리는 단어겠군요. <br><br>&nbsp; 넬리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좀 불안하기는 하죠.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구요. 넬리는 충분히 불우한 삶을 살았거든요. 넬리가 로즈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로즈는 전쟁통에 불운하게 죽었으니까요. 부인에게는 목사인 조카 줄리앙이 있는데, 그도 넬리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엘레노어 부인은 넬리를 더 아끼게 되고, 사교계에도 소개하려고 하죠. 이제 넬리에게 꽃길만 펼쳐지는 걸까요? 그런데,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넬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로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죠. 넬리는 자신의 사교계 데뷔 파티에 나타난 로즈를 보고 기절해 버립니다. <br><br>&nbsp; 오, 영화가 꽤나 흥미진진해집니다. 과연 넬리는 어떻게 될까요? 넬리의 정체를 알게 된 엘레노어 부인은 어떻게 할까요? 로즈는 길길이 날뛰면서 넬리가 자신의 행세를 하는 가짜라고 외치죠. 그런데 거렁뱅이같은 행색의 로즈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부인은 넬리를 철썩같이 믿습니다. 넬리는 로즈만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자신의 평화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죠. <br><br>&nbsp; 이후 넬리와 로즈의 대결은 스릴러물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게 되죠. 줄리앙은 넬리가 진짜 로즈인지 적십자사의 기록이며 전쟁 때 로즈와 함께 일했던 군의관까지 만나봅니다. 로즈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정신병원에 갇히고요. 와우, 이 영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요?<br><br>&nbsp; 그런데 영화 '시크릿 네임'은 중반부가 지나면서 이야기의 힘을 잃어갑니다. 넬리는 로즈가 겪는 고초를 외면하질 못해요. 넬리는 결국 자신이 로즈 행세를 했다는 걸 부인과 줄리앙에게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길거리 여성들이 머무는 구빈원으로 가버리죠. 엘레노어 부인은 그런 넬리를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넬리는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딱, 끝나버립니다. 대체 이 허망한 결말은 뭔가요? 스릴러물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 뭔가 감동이 있는 드라마도 아닌 '시크릿 네임'은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에요.<br><br>&nbsp; <br>2. 소설 'The New Magdalen(1873)'과 Wilkie Collins(1824-1889)<br><br>&nbsp; 나는 영화 '시크릿 네임'이 뭔가 더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읽어봤죠. 영화의 시나리오는 원작이 되는 소설을 바탕으로 쓰여졌어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작가인 Wilkie Collins(1824-1889)가 쓴 'The New Magdalen(1873)'이라는 소설이었죠. 제목의 '막달레나'는 신약 성서 속의 창녀 막달레나가 맞아요. 소설은 중편 소설의 분량입니다. 오래전에 저작권이 풀린 작품이라 인터넷으로 원본을 구해서 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Project Gutenberg: Free eBooks www.gutenberg.org). 나는 원작 소설이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았어요. <br><br>&nbsp; 거리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 여자 주인공 Mercy Merrick이 영화의 넬리입니다. 로즈는 'Grace Roseberry'라는 이름으로 나오고요. 성씨의 로즈베리에서 로즈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재밌군요. 엘레노어 부인은 Lady Janet으로 나옵니다. 재닛 부인의 조카 줄리앙은 영화와 이름이 같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이 하나 더 있죠. 재닛 부인의 지인으로 중산층 남성인 Horace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와 거의 비슷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1차 대전이 아닌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이구요. <br><br>&nbsp; 원작 소설에서 호레이스는 머시(영화의 넬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줄리앙도 넬리를 사랑하게 되죠. 좀 통속적인 삼각관계 로맨스군요. 이 로맨스는 그레이스의 등장으로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그레이스는 머시를 사기꾼 범죄자로 비난하며, 머시의 천한 신분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고아 출신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머시에게 온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속 머시의 과거에는 매춘부로 살았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의 넬리가 그냥 거지로 살았던 것과는 좀 다르죠. 말하자면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의 머시는 진짜 영락한 하층민 여성의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br><br>&nbsp; 작가 윌키 콜린스는 최하층민 출신인 머시를 인간적인 품격이 있는 여성으로 그려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레이스입니다. 이 상류층 출신의 여성은 오만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재닛 부인이 그레이스의 신분을 알고 나서도 머시에게 마음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결한 여왕이 다스리는 영국에서 '가정'은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 가정에 매춘부 출신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자리합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그런 면에서 아주 남다른 시대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br><br>&nbsp; 나는 작가 '윌키 콜린스'의 이름은 진짜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영화 '시크릿 네임'을 보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영문 위키에 나온 작가의 이력을 읽어보니, 동시대 영국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교류도 했을 만큼 이름있는 작가였습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주로 추리소설이었어요. 소설 'The New Magdalen'은 콜린스에게 약간 막간극 같은 느낌을 주죠. 이 소설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의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오죽 인기가 있었으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을까요. 콜린스는 소설을 희곡으로 직접 각색도 했습니다. 나는 희곡도 읽어보려다가 그만두었어요. 뭐 소설하고 같은 내용일 테니까요. <br><br>&nbsp; 소설의 인기는 콜린스 사후에 무성 영화 시절로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무성 영화가 여러 편 있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걸 구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검색되는 자료가 없어서 아쉽더군요. 결국 그 무성영화 시절의 유산이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로 이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br><br>&nbsp;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 소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건 '새로운 막달레나'에 내포된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일 겁니다. 소설에서 머시의 신분이 탄로 나면서 호레이스는 머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매춘부 여성은 신성한 가정의 여주인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목사인 줄리앙만이 머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 합니다. 재닛 부인은 둘의 사랑을 묵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줄리앙과 머시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지요. 신대륙 미국만이 신분과 과거를 뛰어넘은 사랑을 포용할 수 있으니까요. 윌키 콜린스는 불행한 매춘부에게 자비(여주인공 Mercy의 이름 그대로)를 베풀지 않는 당시 영국 사회의 폐쇄성과 이중성을 에둘러 비판합니다.&nbsp;&nbsp; <br><br>&nbsp;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윌키 콜린스 자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겁니다. 콜린스는 이른바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는 애 딸린 과부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그 두 여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콜린스에게 동시대 사람들이 큰 돌맹이는 아니더라도 작은 돌맹이라도 던졌겠지요. 그의 행실은 분명히 비도덕적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콜린스는 '두 집 살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마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고수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콜린스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이들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는 너희들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빅토리아 시대라는 번지르르한 도덕 우위의 시대에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br><br>&nbsp; 결국 영화 '시크릿 네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여정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에게는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한 편의 영화는 그렇게 접혀진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시대,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나의 이 글도 그러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사진 출처: en.wikipedia.org&nbsp; 작가 Wilkie Collins(1824-1889)<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522/pimg_741289193430187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56763</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클레어의 카메라(2018): 홍상수의 진심, 혹은 내밀한 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42873</link><pubDate>Thu, 16 May 2024 22: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42873</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만희(김민희 분)는 영화사 직원입니다. 만희는 지금 칸(Cannes)에 머물고 있어요. 영화사의 일 때문에 출장을 온 거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만희는 상사인 양혜의 호출을 받습니다. 카페에서 만희와 마주앉은 양혜는 만희의 해고를 통보합니다. 양혜는 만희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만희는 자신의 어떤 점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지만, 양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는 상사의 말대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상사 양혜는 무슨 이유로 5년 동안 함께 일해온 부하 직원 만희를 해고한 것일까요?<br><br>&nbsp;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는 낯선 타국의 휴양지에서 그렇게 해고 통보를 받은 만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만희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그렇군요. 만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해두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의 카메라를 통해 전달됩니다. 클레어는 칸에 온 관광객인데 우연히 만희와 만나게 됩니다. 클레어의 우연한 만남은 만희의 상사 양혜, 영화감독 소완수와도 이어지고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연'이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 얼개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건 하나의 공식 같아요. '클레어의 카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br><br>&nbsp; 과연 만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혜가 만희를 해고한 다음의 시퀀스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양혜와 영화감독 소완수는 칸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죠. 양혜는 만희가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완수는 양혜가 영화사 대표로서 후원하는 감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입니다. 소완수는 양혜에게 만희와의 일이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말해요. 그는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합니다.<br><br>&nbsp;클레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입니다. 곧 칸의 관광객 클레어의 카메라는 만희, 양혜, 소 감독의 얼굴을 담아냅니다. 양혜와 소 감독은 클레어가 찍은 만희의 사진을 보게 되지요. 만희는 클레어가 보여준 사진에서 양혜와 소 감독을 발견하구요. 클레어의 사진은 잃어버린 조각 퍼즐의 일부분 같아요. 그 사진은 거기에 찍힌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어요. 양혜는 사진 속 만희의 화장한 모습에 놀랍니다. 양혜는 5년 동안 만희가 그렇게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만희도 클레어가 찍은 소 감독의 사진을 봅니다. 클레어는 술에 취한 소감독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죠. 만희는 클레어가 묘사한 여자의 모습을 듣고 양혜일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해고된 진짜 이유가 양혜의 질투였음을 알게 되지요.<br><br>&nbsp;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국어 wikipedia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영화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소완수 감독 역을 연기하는데, wikipedia의 정진영의 캐스팅 항목에 소완수가 아닌 '홍상수 감독' 역이라고 되어있는 거예요. 아마 누군가 살짝 장난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면으로는 그 삐딱한 장난이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해요. 누가 보더라도 영화 속 소완수는 홍상수, 라는 사람 그 자체에요. <br><br>&nbsp; 만희는 소 감독의 옛 제자와 우연히(역시, 우연이군요) 마주칩니다. 그 제자는 소 감독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술 마시며 보냈다고 말하죠. 네, 그건 홍상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있던 시절의 홍상수가 그랬으니까요. 나는 홍상수가 학생들과 워크숍이나 영화 촬영 나갔을 때, 현장에는 늘 소주가 상자째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듣곤 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진짜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만들어진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죠. 배우들은 술에 취한 척하는 게 아니고, 진짜 술을 마시고 연기하니까요. 영화 속 소완수 역을 연기한 정진영도 진짜 소주를 마시고 그렇게 연기했을 겁니다. 진정한 '소주 무비(soju movie, 해외 평론가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일컫는 말)'의 완성이죠. 그리하여 소완수는 클레어가 찍은 만희 사진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져서 진창 술을 마시고 취합니다.<br><br>&nbsp; 클레어의 카메라, 참 제목은 그럴듯해요. 그렇다면 클레어는 왜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마구(!) 사진 찍는 걸까요? 만희는 클레어에게 사진을 찍는 이유를 묻습니다. 클레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br><br>&nbsp; "Because the only way to change things is to look at everything again very slowly."<br>&nbsp;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걸 매우 찬찬히, 다시 잘 살펴보는 것이라서 그래요)<br><br>&nbsp; 클레어에게 사진은 단지 과거의 멈춰진 순간이 담긴 것이 아닙니다. 그건 찍힌 순간부터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거예요. 클레어는 소완수에게 사진 속 인물이 사진에 찍히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찍은 소완수의 사진도 그렇다고 말하면서요. 이 무슨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요? 클레어의 사진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사진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 경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사진을 통해 흘러나오는 거죠. 홍상수에게 '영화'는 클레어의 '카메라'로 치환될 수 있는 거겠죠. <br><br>&nbsp; 영화 속 만희가 만난 소 감독의 제자는 '영화는 솔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잠깐만요, 이건 '동어 반복(tautology)'이군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서 배우 상원이 하는 말과 똑같거든요. 영화 속에서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은 배우가 되려면 '솔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감독, 작가로서 홍상수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진심을 담아서,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런 면에서 솔직한, 너무나도 솔직한 영화입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솔직할까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배우 김민희에 대한 진심이죠, 뭐.<br><br>&nbsp;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부분이 있어요. 소완수는 리셉션 파티에서 만희와 마주칩니다. 만희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죠. 소완수는 만희가 남들의 눈요깃감이나 되는, 형편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아니, 자기가 대체 만희한테 뭔데요. 애인도 남편도 아니면서, 겨우 하룻밤 같이 잤을 뿐이잖아요. 소완수의 그런 질타를 받고는 만희가 보여주는 태도도 웃깁니다. 만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요. 감독님 말이 다 맞다면서 고개를 떨구죠. 아, 이건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모습 아니던가요? 물론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 순간의 만희도 담아냅니다. <br><br>&nbsp; 내게는 클레어의 직업이 '교사'라는 점이 나름대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만희가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게 만드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중요한 쇼트가 있어요. 클레어가 해변가 도로 아래의 지하로 들어가는 장면이죠. 글쎄, 관객은 그게 정확히 지하보도인지 동굴인지 잘 알 수는 없어요. 인터뷰(씨네 21, 2018년 홍상수와의 인터뷰 기사 참조)에서 홍상수는 '동굴'이라고 말하더군요. 해변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던 클레어는 그 동굴로 쓱, 들어가서는 갑자기 사라집니다. 다른 시각, 같은 장소를 만희도 지나가는데 만희는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리죠. 홍상수는 그 장면을 꽤나 공들여 찍었어요.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서 들어가는 사람,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차이일까요? 만희는 클레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마음속 진실을 들여다 보게 되는 거죠. 짧은 바지를 입은 자신을 향해 길길이 날뛰는 술고래 감독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br><br>&nbsp; '우린 사랑하고 있어요.' 홍상수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죠.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합니다. 홍상수는 작가로서 진실된 사람이에요. 그의 진실이 반드시 세상의 도덕과는 일치하지 않지만요. 배우 김민희와의 관계를 공식화한 이 영화를 기점으로 홍상수는 한국 영화 평단에서 차츰 지워지기 시작해요. 그에게 덕지덕지 붙여졌던 온갖 상찬(賞讚)은 가을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더군요. 어쩌겠어요. 그건 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도 치루어야 하는 거겠죠.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홍상수의 솔직함, 진심이 불쾌하다고 느낄 관객들도 많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영화는 홍상수의 아주 내밀한 일기의 한 부분처럼 다가옵니다. 남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는 일도 때론 용기가 필요해요. 그 용기 하나만은 칭찬해 주고 싶더군요.&nbsp;&nbsp; <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nbsp; <br><br><br><br>**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리뷰<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4/in-our-day-2023.html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516/pimg_741289193429595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42873</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영화 &amp;lt;팔도강산&amp;gt; 연작: 개발독재 시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8757</link><pubDate>Fri, 10 May 2024 19: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8757</guid><description><![CDATA[&nbsp; 영화 &lt;팔도강산&gt; 연작: 개발독재 시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br><br><br><br>팔도강산(Paldogangsan, 1967)<br><br>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 <br><br>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br><br><br>1.<br>&nbsp; 유선방송의 'KTV 국민방송'은 국정홍보 채널입니다. 그 채널의 대부분을 채우는 프로그램은 '우리 정부는 아주 잘 해내고 있다'를 선전하고 있죠. 그렇다고 정권 홍보물만 만들어 방영하는 건 아닙니다. 흘러간 옛날 드라마나 한국 영화도 틀어줍니다. 얼마 전에 KTV에서 한국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를 방영하더군요.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박정희 정권의 국정 홍보 영화로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시리즈물로 나오게 되었죠. 이후에 '팔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그 원조 격인 영화 '팔도강산' 초창기 3부작에 어떤 재미가 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br><br>&nbsp; '팔도강산' 3부작의 주인공은 김희갑, 황정순 부부와 그 자녀들입니다. 노부부의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부부는 자식들이 사는 모습을 살피려 여행을 떠납니다. 1편에 해당하는 1967년의 '팔도강산'은 부부의 국내 유람 편을 담고 있구요. 부부의 자식들은 각자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모두 한국의 산업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경제발전에 일조하는 충실한 산업 역군인 셈입니다. 그 모습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맞물려 있죠. 이 영화의 제작사가 '국립영화제작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br><br>&nbsp; '팔도강산(1967)'은 나름 유쾌한 프로파간다 영화입니다. 그것이 그 이듬해에 제작된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에 이르러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납니다. '속 팔도강산'은 부제가 '세계를 간다'입니다. 김희갑은 서독에 있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길에 해외 유람을 하게 되죠. 그의 자녀들이 해외 각지에 살고 있거든요. 김희갑이 미국에 들렀을 때, 그는 '한국 가발'의 우수성을 알게 됩니다. '가발'은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한 수출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자랑할 것이 얼마나 없으면 '가발'을 홍보했을까 싶어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br><br>&nbsp; 그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경공업 제품 수출에 머물러 있을 때였으니까요. 뭔가 '뽀대나는' 수출 품목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걸 보여줬겠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보여줄 건 '한국 사람'과 '개척 정신'입니다. 미국을 떠난 김희갑은 브라질 이민을 떠난 사위 박노식을 만나러 가요. 그는 사위가 대농장을 일구는 농장주가 되었음을 알고 뿌듯해하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경험 부족으로 농장 개척에 실패한 사위는 주정뱅이가 되어버렸거든요. 그걸 알게 된 손아랫동서 신영균은 자신의 사업자금을 털어서 박노식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발도상국 한국의 국민에게 필요한 도전 정신이 아닌가요? <br><br>&nbsp; 김희갑은 해외 여행길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도 들릅니다. 구한말, 망국의 비탄을 끌어안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기념비를 참배하기 위해서이죠. 당신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고국이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를 고하는 후손의 묵념이 이어집니다. 그쯤 되면 후대의 한국 관객 또한 비감함에 젖을 수밖에 없겠지요. 서독에서 김희갑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태권도 사범으로 활약하고 있는 일가족을 만나고요. 중간에 프랑스 파리도 경유합니다. 이 영화의 해외 촬영분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아무리 국책 영화라고 해도 그 엄청난 제작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싶죠. 그건 그만큼 당시의 정권이 영화를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br><br>&nbsp;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가 오락적인 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속 팔도강산(1968)'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이미자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에서는 패티김을 비롯해 김추자와 나훈아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요. 특히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은 서울시 홍보 영상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는 프로파간다의 틀에 코미디 장르와 뮤지컬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nbsp;&nbsp; <br><br>&nbsp; '속 팔도강산'에서 해외 유람은 실컷 했으니, 3편에서는 한국으로 돌아와야죠. '내일의 팔도강산(1971)'에서 김희갑, 황정순 부부의 국내 유람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죠. 사위 김진규는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의 부하직원으로 나오는 구봉서가 시멘트 공장의 운영 현황을 청산유수로 읊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에 있어서 원자재인 시멘트의 중요성은 달리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이 영화에는 중공업 홍보만 나오지는 않아요. 작은 사위 신영균은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번듯한 사업체를 일구어 냅니다. <br><br>&nbsp; 물론 약간의 실패도 필요합니다. 맏사위 허장강이 무리하게 부동산 투자를 했다가 망하거든요.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아직은 시작되지 않았던 때였던가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어요. 아무튼 허장강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원래 사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죠. '내일의 팔도강산'은 수출 주도 산업과 함께 내수 진작의 토대를 놓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開發獨裁)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김희갑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줄줄 읊어대는 모습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의 씁쓸한 일면이기도 해요.&nbsp;&nbsp;&nbsp;&nbsp;&nbsp;<br><br>2.&nbsp;&nbsp;&nbsp; <br>&nbsp;&nbsp;&nbsp;&nbsp;&nbsp; <br>&nbsp; '내일의 팔도강산(1971)'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The Flower Girl, 1972)'는 그런 면에서 조금은 다른 결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명의 혁명가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정일의 주도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이 영화의 엄청난 성공으로 북한 당국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선전 효과를 실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꽃파는 처녀'는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 수출되어서 크게 흥행했으니까요. 공산국가인 중국에서의 흥행 대성공은 물론, 당시 동유럽 40개국에서 거둔 흥행 성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br><br>&nbsp; 영화 '꽃파는 처녀'는 시대적 배경이 일제 강점기입니다. 주인공 꽃분이의 집안은 친일파 지주의 강탈에 풍비박산이 나버립니다. 악독한 지주 때문에 꽃분이의 오빠는 감옥에 갇히고, 꽃분이의 어린 여동생은 눈이 멀죠. 그리고 어머니마저 고된 종살이 끝에 숨을 거두지요. 꽃분이와 그 가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의 서사는 관객의 정서에 강하게 호소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영화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볼셰비키' 소책자를 나누어 읽으면서,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에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요. <br><br>&nbsp; '꽃파는 처녀'를 보고 있노라면,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정서'에의 호소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분야 원조 맛집 주인으로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이 있지요. 네, 히틀러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었던 그 여성 감독 말입니다.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와 '올림피아(Olympia, 1938)'에서 리펜슈탈이 보여준 미학적 성취가 어떻게 나치 파시즘 정권을 홍보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관객의 눈과 마음을 움직이고, 급기야 홀리게 만드는 것. 프로파간다 영화의 심연에는 그렇게 인간 심리에 대한 기본적 원리가 깔려있습니다. <br><br>&nbsp; 다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로 돌아갑니다. '팔도강산' 연작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아우르며 박정희 정권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정권 홍보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뻔하고 밋밋하기 짝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영화 시리즈가 당시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하는 한국 국민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흰쌀밥과 고깃굿' 보다도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는 희망 말입니다. KTV에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가 방영된 시각은 늦은 새벽이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는 그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살아온 나의 부모 세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잘 사는 나라, 에 대한 꿈 말입니다.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그 희망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구현해 냅니다.&nbsp;&nbsp;&nbsp;&nbsp;&nbsp; <br><br><br>*사진 출처: kmdb.or.kr<br><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510/pimg_741289193428941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8757</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성혜의 나라(2020): MZ세대의 좌절감과 불편한 진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6352</link><pubDate>Thu, 09 May 2024 19: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6352</guid><description><![CDATA[&nbsp; *이 글에는 '성혜의 나라(202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br><br><br>&nbsp; 29살,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성혜의 삶은 무척 고달픕니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죠. 성혜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는 착한 딸이 성혜입니다. 성혜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 승환도 있습니다. 승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죠. 남자 친구가 좀 의지할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승환이 가난한 부모 탓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 좀 철딱서니가 없어요. 자, 어떤가요? 이 두 연인의 앞날이 그려지나요?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는 소위 가진 것 없는 흙수저 MZ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줍니다. <br><br>&nbsp;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성혜의 일상은 숨돌릴 틈도 없이 팍팍합니다.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가서는, 원치 않는 신문을 넣었다고 주민의 항의를 받습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준 스쿠터는 고장 나기 일쑤죠. 편의점에서는 어떤가요? 매번 라면 먹고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나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혜의 끼니는 삼각김밥입니다. 편의점에서 폐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죠. 성혜는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세면도구를 알뜰하게 챙겨서 남자친구에게 줍니다. 그런 성혜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가끔 지나치는 애견 가게의 진열장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혜는 휴대전화로 강아지가 노는 것을 찍습니다. <br><br>&nbsp; 성혜의 삶이 이렇게 고달파진 건 과거의 그 사건에서부터였습니다. 성혜는 틈틈이 입사 원서를 넣으며 취직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전의 직장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 둔 이력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면접관은 성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죠. 성혜는 인턴 때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일을 고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일 이후로 성혜의 삶은 말 그대로 꼬여버립니다. 취직은 쉽지 않고, 힘겨운 서울살이에다, 부모님의 어려운 처지도 모른 척할 수 없죠.<br><br>&nbsp; 대학은 나왔지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삶.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성혜의 친구는 빈곤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한국 청년 세대의 높은 자살률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관객은 성혜 친구의 죽음에서, 그것이 성혜가 겨우 버텨내고 있는 이 삶의 어그러진 결말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런 와중에 성혜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집값이 높은 서울에서 성혜가 구할 수 있는 괜찮은 단칸방이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성혜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br><br>&nbsp; 성혜가 느끼는 삶에 대한 막막함은 '미래가 없다'는 침울한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성혜는 승환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승환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어려운 집안 형편의 승환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성혜는 승환과 결혼해서 낳을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거예요. 그 아이에게 자신보다 못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겠죠. 현재 우리나라의 저조한 출산율은 성혜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 세대가 많기 때문입니다. <br><br>&nbsp; 참 우울한 영화입니다. 정형석 감독은 젊은 여성 성혜의 삶을 통해 한국 청년 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다큐처럼 담아냅니다. 출구가 없어요, 성혜에게는. 꽉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런 성혜에게 갑자기 5억이 생깁니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성혜라면 그 5억을 가지고 무얼 할 생각인가요? 5억, 크다면 큰돈인데, 어찌 보면 좀 애매한 액수 같기도 하고요. 서울에서 괜찮은 월세방 보증금으로 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넣어둘까요? 아니면 그동안 못 해봤던 여행도 하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사볼까요? 그런데 정기적인 소득이 없다면, 그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게 뻔하잖아요. 성혜도 고민합니다.&nbsp;&nbsp;&nbsp; <br><br>&nbsp;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감독이라면 성혜에게 어떤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는 5억을 신탁 연금으로 넣고, 매달 140만 원씩 받기로 결정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삶. 그것이 성혜가 꿈꾸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혜에게 5억이 생긴 것은 과연 행운이기만 할까요? 그 무해하고도 안온한 삶은 변화도 없고, 꿈도 없는 삶이에요. 그런 면에서 '성혜의 나라'는 젊은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해 강렬한 펀치를 날려버리죠. <br><br>&nbsp;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래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혜만큼이나 힘든 세대는 빈곤한 노년 세대입니다. 청년 자살만큼이나 노인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가난'이고요. 그런데 왜 힘들고 가난한 노인에 대한 영화나 이야기는 보기가 어려운 걸까요? 쪽방촌에 살면서 폐지 줍는 70대 독거노인 춘삼 씨가 있다고 합시다. '춘삼의 나라'라는 영화를 찍는다면, '성혜의 나라'를 보고 공감했던 젊은 관객이 공감해 줄 수 있을까요? <br><br>&nbsp; 영화 '성혜의 나라'는 기묘하게도 MZ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그것은 성혜가 아무 것도 꿈꾸지 않는, 어쨌든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5억이란 돈이 성혜의 부모가 사고로 죽음으로써 주어지는 돈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 영화가 명백한 '부친살해(Patricide)'의 코드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공 성혜에게 있어 부모는 부담스러운 짐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거든요. 돈에 쪼들리는 성혜의 엄마는 딸이 조금이나마 돈을 보내주기를 바라죠.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에게 통용되는 밈(meme) 가운데에는 '틀딱(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젊은 사람이 산다'는 말도 있죠. '틀딱'으로 대변되는 노년 세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br><br>&nbsp; 영화의 마지막, 성혜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 나갑니다. 성혜의 앞에는 느리고, 안온한, 하지만 가슴 뛰게 만드는 희망과 새로움은 없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성혜는 나름 괜찮은 월세방을 구합니다. 월세가 저렴한 성혜의 집은 경사가 심하고,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다닥다닥 모여있는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 거기에서 성혜는 예쁜 강아지를 키우게 됩니다. 나는 왜 성혜가 서울을 떠나지 않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모두가 알다시피, 지방은 서울에 비해 집값이 싸잖아요. 그런데 성혜는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거든요. 성혜에게는 서울에서의 버거운 삶이 주는 긴장감이 지방에서의 따분한 삶보다 나은 것일지도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지방 소멸'이라는 개발 불균형의 사회 문제도 갖고 있지요. 여러모로 영화 '성혜의 나라'는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나름의 시의성(時宜性)을 지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nbsp;&nbsp;&nbsp;&nbsp;&nbsp;&nbsp; <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509/pimg_741289193428792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526352</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예술가의 삶과 부서진 기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498972</link><pubDate>Mon, 29 Apr 2024 19: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498972</guid><description><![CDATA[&nbsp; *이 글에는 영화 '우리의 하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br><br><br>&nbsp; 상원은 전직 배우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상원은 선배 정수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이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고양이예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가 살포시 들어가 있어요. 고양이 집사들을 위한 영화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br><br>&nbsp; 영화에는 2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과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가 그들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각자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대비시켜서 보여줍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원은 낮잠을 청하고, 나중에 조카 지수의 방문을 받습니다. 나이든 시인 홍의주도 아침나절에 잠을 좀 잤다가 일어납니다. 그런 그에게 배우 지망생 재원이 찾아오지요. 상원의 조카 지수도 배우 지망생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수는 유명 배우였던 상원에게 배우의 길에 대한 조언을 청합니다. 재원은 시인 홍의주에게 인생의 지혜를 듣고 싶어하구요. 그리하여 상원은 지수에게, 홍의주는 재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하루는 다른듯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은가요? 초심자(novice)는 권위자(expert)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는 각각 배우와 시인이라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같은 인상을 줍니다. <br><br>&nbsp; 이 영화에서 상원의 캐릭터에는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가, 시인 홍의주의 모습에는 감독인 홍상수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홍상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좀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런 데에는 아마도 감독 자신의 매끄럽지 못한 사생활이 포개어져 있기 때문이겠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자기 삶과 사랑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워요. <br><br>&nbsp;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br><br>&nbsp;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여배우 영희를 연기한 김민희의 대사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영화는 명백하게 홍상수의 자기 변명과 연민이 범벅이 된 영화에요. '당신들이 뭔데, 우리의 사랑에 왈가왈부 하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그게 홍상수의 본심인 거죠. 좀 뻔뻔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구현해 내는 영화적 세계에는 기이한 매력이 있거든요. 그 영화는 배우 김민희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기도 했구요. <br><br>&nbsp; 자, 다시 '우리의 하루'로 돌아갑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자신의 배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상업 영화가 배우의 내면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진정한 배우로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상원은 배우란 직업은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글쎄요, 그게 어떤 걸까요? 배우라는 직업도 멀게 느껴지는데, 상원이 말하는 '솔직함'이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영화 속 초심자 지수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냐고 확인하듯 묻습니다. <br><br>&nbsp; 지수가 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막막함을 시인을 찾아간 재원도 느낍니다. 재원은 존경하는 시인 홍의주를 만나서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아는 것이 배우를 꿈꾸는 재원에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요? 시인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지혜들을 풀어놓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짜' 삶을 살아라. 그런데 그 '진짜 삶'이 뭘까요? 의외로 홍의주가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이 인생철학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건 홍상수 자신의 인생 철학이기도 할 테니까요. 상원이 조카 지수에게 했듯, 역시 시인 홍의주도 재원에게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듣냐고 묻습니다. <br><br>&nbsp;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가는 오롯이 예술가가 성취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지상주의인 낭만주의적 관점이지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사생활이 논란이 되는 것은 참기 힘든 역경일 거예요. 작가로서 그는 영화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우리의 하루'에서 홍상수는 연인 김민희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상원이 말하는 배우의 '솔직함'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예술가로서 그들 자신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김민희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강변합니다. 그건 영화 속에서 정수와 고양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nbsp; <br><br>&nbsp; 정수는 '우리'를 잃어버린 걸 알고서는 실신해 버립니다. 정수는 현관문 앞에서 쓰러져서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죠. 겨우 정신을 찾은 정수는 고양이를 찾기 위해 현상금 '천만 원'을 내 건 전단지를 만듭니다. 물론 고양이는 나중에 정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요. 고양이의 이름 '우리(We)'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cliche) 같기도 해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뿐인가요? 상원은 홍의주가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라면을 먹습니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죠. 물론 영화 속에서 상원과 홍의주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명백한 암시는 없어요. 관객은 그냥 그럴 것이다, 라고만 추측할 뿐이죠.&nbsp;&nbsp; <br><br>&nbsp; 영화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가 써낸 어느 하루의 일기 같은 인상을 줍니다. 무겁지도 않고 담담한 이 일기에는 뚜렷한 감독 자신의 각인이 찍혀 있어요. 예술가의 삶은 자신의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습니다. 거기엔 가식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시인 홍의주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에 무알콜 맥주를 마시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영화의 마지막, 시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양주를 한 잔 들이키죠.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재촉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그에게는 시인으로서의 '진짜 삶'을 살아가게 만드니까요. 영화 속 시인 홍의주의 '술과 담배'는 홍상수에게는 '영화'임이 자명하죠. <br><br>&nbsp; 홍상수의 삶에서 '영화'는 시인 홍의주의 '부서진 기타'와도 겹칩니다. 홍의주에게는 기타가 있었는데, 후배가 술 마시다 실수로 부수어 버렸죠. 후배는 홍의주에게 멋진 새 기타를 선물해 주지만, 홍의주는 그 기타를 자신의 다큐를 찍는 대학생 기주에게 선물해 버립니다. 시인은 기주에게 새 기타는 연주하기도 어렵고 익숙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직 배우 상원에게도 누군가 선물해 준 작은 기타가 있어요. 상원은 그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의 '부서진 기타'는 상원의 작은 기타를 통해서 노래를 이어가는 거죠. 그건 감독의 영화와 삶을 함께하는 배우 김민희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요.<br><br>&nbsp; 영화 '우리의 하루'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감독 자신의 영화적 선언문 같아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가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세간의 비난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는 버팀목과 같은 예술, 그러니까 '영화'가 있어요. '우리의 하루'를 통해 관객은 작가 홍상수의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들려줄 부서진 기타의 노래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br><br><br>**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리뷰<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nbsp; <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429/pimg_741289193427677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498972</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 홍상수의 흥미로운 MZ 세대 탐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466293</link><pubDate>Tue, 16 Apr 2024 2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466293</guid><description><![CDATA[&nbsp; <br>&nbsp; 영화가 시작되면 중년의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나름 숭고한 봉헌의 기도인데, 첫 장면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래요. 홍상수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삶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은 주인공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균열의 지점이 나에게는 늘 흥미롭습니다. 홍상수가 '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에서 보여줄 등장인물들의 삶 속 균열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br><br>&nbsp; 영화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처럼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게 기부하겠다고 기도한 중년의 남자는 한의사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된 아들 영호가 있지요. 영호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영호는 여자 친구 주원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한의원에 왔습니다. 영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지요. 따로 떨어져 사는 아들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한의원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좀 이상합니다. 그는 급한 환자도 아닌 지인을 먼저 만나고 아들에게는 그냥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유명한 배우(기주봉 분)입니다. 아버지는 지인에게 침을 놓아주고는, 영호를 만나는 대신에 자신의 방으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1부는 영호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br><br>&nbsp; 2부에서는 영호의 여자 친구 주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원은 패션 공부를 하겠다면서 이제 막 독일로 유학을 왔죠. 지원은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화가 친구(김민희 분)를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화가 친구가 당분간 딸의 숙소를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의 뜻인 '소개'에 걸맞는 부분이군요. 엄마와 딸, 엄마의 화가 친구가 한자리에서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여기에 영호가 등장합니다. 유학을 떠난 여자 친구가 보고 싶다며 갑작스럽게 독일로 찾아온 거죠. 엄마가 주원에게 그런 영호를 '황당하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어쨌든 주원은 영호를 잠깐 만납니다. 영호는 주원과 거리에서 기쁨의 포옹을 나누며, 자신도 주원처럼 유학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죠. 연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납니다. 둘 사이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여요. <br><br>&nbsp; 3부는 다시 영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호의 엄마는 지인과 강원도 바닷가의 음식점에 앉아있습니다. 그 지인은 1부에서 영호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았던 유명한 배우입니다. 영호의 엄마는 영호를 배우에게 소개시킬 생각이죠. 영호는 친구 정수와 함께 그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왜 영호의 엄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까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1부에서 영호는 한의원에서 그 배우를 만났고, 그걸 계기로 영호는 연기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지금 영호는 연기를 그만둔 상태에요. 엄마는 그런 아들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거죠. 이 어색한 만남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요?<br><br>&nbsp; 홍상수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연령대가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아주 젊은 친구들이죠. 홍상수의 영화적 관심사가 이제 젊은 세대로 이동한 것일까요? 관객은 '인트로덕션'에서 소위 MZ 세대라고 하는 요즘의 청년 세대들에 대한 홍상수 나름의 관찰과 탐구를 볼 수 있어요. 홍상수는 그들을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2부에서 영호와 주원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죠. <br><br>&nbsp; 영호는 주원을 따라서 유학이나 올까, 하고 즉흥적으로 말하죠. 주원이 학비 이야기를 하자, 영호는 아버지에게 돈이 많다고 말합니다. 영호의 부모는 일찍 이혼했고, 영호는 엄마와 함께 살았죠. 그런 면에서 1부에서 영호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영호는 주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돈 욕심이 더럽게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식인 자기가 유학 가는데 아버지가 돈을 대주지 않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왜 영호는 아버지를 그렇게 경멸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돈을 받는 건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좀 웃기지 않나요? 청년 영호는 그렇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은 아닌듯 싶어요.<br><br>&nbsp;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죠. 주원과 엄마의 사이는 따뜻한 모녀 사이 같지는 않아요. 주원은 엄마의 권위에 주눅든 어린 아이처럼 보여요. 주원이 유학을 온 이유도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고 온 것도 아니고요. 엄마의 화가 친구가 주원에게 왜 의상 공부를 하려고 물으니, 그냥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자 화가 친구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그쪽 일을 하고 있어서 잘 안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주원에게 '그거 너무 힘든데 할 수 있겠냐'고 묻죠. <br><br>&nbsp; '너무 힘들다'는 이 문장은 영화에서 기이하게 반복됩니다. 3부에서 주원은 영호와 우연히 만나지요. 주원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병 때문에 공부도 그만 두었고, 독일인 남편과도 헤어졌죠. 과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서글픈 만남이로군요. 주원은 영호에게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원이 처한 상황이 힘든 것처럼 보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 힘듦을 표현하는 부사 '너무'는 과도한 주관적 해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MZ 세대의 어법에 어울린다고나 할까요? <br><br>&nbsp; 영호에게도 삶은 '너무' 힘듭니다. 영호의 삶도 방향성이란 게 없어요. 영호가 연기를 시작한 건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만난 유명 배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어요. 그는 영호에게 얼굴이 잘생겼으니 배우 해도 좋겠다, 라고만 말했을 뿐이에요. 영호는 생판 모르는 남이 한 말 한마디에 기대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죠. 그렇게 들어선 연기자의 길에서 영호는 여배우와의 포옹 연기를 할 수 없다며 때려칩니다. 영호가 생각하기에 그건 진짜가 아닌 가짜의 감정으로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건 영호가 진실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정작 영호가 연기자가 되는 데에 일조한 유명 배우는 그런 영호를 한심하다며 크게 면박을 줍니다. 기성 세대가 보기에 영호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는 즉흥적이고 유약하며, 끈기라고는 없는 애송이죠.&nbsp;&nbsp;&nbsp; <br>&nbsp;&nbsp; <br>&nbsp; 하지만 영호와 친구 정수가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속물적이고 비합리적이에요. 영호의 엄마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배우는 영호와 친구 정수에게 술은 마시되 절대로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라며 다그치죠. 술을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그게 가능한 일도 아니구요. 영호와 정수의 눈에 유명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다지 존경할만하지 않습니다. 진정성도 없는 그냥 우스꽝스러운 술꼬장일 뿐이죠. 그렇게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는 소통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유리됩니다.&nbsp; <br><br>&nbsp; 영화의 마지막, 영호는 갑자기 겨울 바다에 뛰어듭니다. 죽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구요. 차디찬 바닷물에 흠뻑 젖은 속옷 차림으로 '너무 춥다'고 계속 말하는 영호에게 청춘의 현실은, 진짜 춥기는 할 겁니다. 영호는 연인과는 진작에 헤어졌고, 직업도 없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홍상수의 영화 'Introduction'은 그가 바라본 MZ 세대에 대한 삐딱한 미소처럼 보여요.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의 과거 영화들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나아가고 있어요. 작가로서 현실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것을 영화적인 세계로 엮는 솜씨도 여전하고요. <br><br>&nbsp; 아,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있는 점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네요.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해외의 평론가들에게 홍상수의 영화는 흔히 '소주 영화(soju movie)'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소주'는 홍상수의 영화를 흘러가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담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 영호를 비롯해 주원의 엄마, 그 엄마의 친구 화가는 담배를 아주 길게, 맛깔나게 피웁니다. 물론 '소주'도 나옵니다. 홍상수는 여전히 '소주'를 사랑하니까요. 담배와 소주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영화 'Introduction'은 좁혀질 수 없는 세대 간의 간극을 흥미 있게 드러냅니다.&nbsp;&nbsp;&nbsp;&nbsp;&nbsp; <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br>**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br><br>***담배가 주요한 내러티브적 요소로 나오는 중국 영화 리뷰<br>중국 현대 여성의 서사와 담배, The Cloud in Her Room(2021) <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cloud-in-her-room2021.html<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416/pimg_741289193426207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466293</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족저근막염, 그리고 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406775</link><pubDate>Sun, 24 Mar 2024 22: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406775</guid><description><![CDATA[&nbsp; <br>&nbsp; 오른쪽 발뒤꿈치가 아픈지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발이 아프기는 했는데, 그래도 집 안에서 걸어 다닐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족저근막염'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했다. 그건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좀 쉬면 낫는다고 알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가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서 편한 비치 샌들을 신으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발은 계속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최근에는 맨발로는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br><br>&nbsp; 제대로 된 진단이라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합 병원 정형외과의 족부 전문의를 찾아갔다. 그게 지난주의 일이다. 의사 선생은 40대 초반의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 동안 아팠는지, 어떻게 아픈지, 하루 얼마나 걷는지, 의사는 병력 청취를 꼼꼼히 했다. 발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갈 때는 평소 자신이 얼마나 걷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땐 만보계가 도움이 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의사는 발을 좀 보겠다고 했다. 나한테 아픈 부위를 눌러 보라고 하고는, 내가 아프다고 말한 뒤꿈치를 살짝 만져보았다. <br><br>&nbsp; "족저근막염입니다. 근막의 두께도 괜찮아 보이니까, 일단 약을 좀 써보죠."<br><br>&nbsp; 이 의사 선생은 분명 명의가 틀림없다.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찍지 않았다. 진단을 위해 추가적인 검사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족저근막염은 낫는 데에 1년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좀 심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비급여 치료이고 환자마다 효과가 달라서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발 마사지와 족욕을 하고, 쿠션이 있는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서 지내보라고 당부했다. 나는 좋은 의사 선생이 처방해 준 소염진통제를 2주분 받아왔다.<br><br>&nbsp; 약을 먹어서 그런가, 발의 통증이 빠르게 나아진 듯 했다. 어제는 모처럼 날이 좋아서 정말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왔다. 그런데 웬걸, 귀신같이 발이 다시 아프다. 결국 족저근막염은 쉬는 게 답이구나 싶었다. 발이 아파서 걷질 못하니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nbsp; <br><br>&nbsp; 생각해 보니, 그동안 발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는 낫기 위해서 뭔가를 꾸준히 하지는 않았다. 족저근막염이 나으려면 아킬레스건 스트레칭을 하고, 발 마사지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안 했다. 글을 쓸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발에다 테니스공을 놓고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다. 나는 아픈 발을 위해서 '격렬하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발이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 <br><br>&nbsp; 뭔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렵지만 시작하고 계속 해 보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인생에서 그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픈 발이 낫는 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쥐어짜 내는 것, 글을 써 내려가는 것. 몸은 피곤하고,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br><br>&nbsp;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석 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시 습작을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 시 쓰기가 나름 재미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힘든 일상의 숨구멍 같기도 했다. 나는 '시'가 가진 근원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과 사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를 통해 해나가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디에다가 응모하려고 쓴 시도 아니었다. 다만 삶을 더 잘 견디는 방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좋았다. 아이쿠, 족저근막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렇게 시로 마무리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러하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시를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느낀 평온함을 이 글의 독자들도 느꼈으면 좋겠다.&nbsp;&nbsp; <br><br>&nbsp; <br><br>&nbsp;&nbsp;&nbsp;&nbsp;&nbsp; <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동심초(Dongsimcho,1959): 사랑과 돈 </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99196</link><pubDate>Thu, 21 Mar 2024 20: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399196</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전쟁미망인 숙희(최은희 분)에게는 대학생 딸 경희(엄앵란 분)가 있습니다. 둘은 얼핏 보기엔 엄마와 딸 사이라기 보다는, 자매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비껴간 것처럼 보이는 고운 외모의 미망인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네, '돈'입니다. 숙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큰 빚을 지고 가게를 정리한 상태이지요. 그런 숙희에게 출판사 전무 상규(김진규 분)는 숙희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돈을 빌려줍니다. 어려운 때에 자신을 도와준 상규에게 숙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랑의 감정이겠지요. 그건 상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규도 숙희를 나름 연모하는 것처럼 보여요. 상규와 숙희,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br><br>&nbsp; 영화 '동심초(Dongsimcho, 1959)'는 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에는 잘 언급되지 않는듯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1959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더군요(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r.kr).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동심초'에는 결코 낡지 않은 주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br><br>&nbsp; 그렇다면 숙희와 상규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숙희의 처지를 좀 살펴보죠. 숙희의 큰 문제는 '돈'이에요. 숙희는 상규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 돈은 그냥 받은 돈이 아닙니다. 갚아야 할 돈이지요. 물론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상규는 숙희에게 빚 독촉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숙희가 상규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어찌 보면 좀 통속적이지 않나요? 사랑이란 감정이 '돈'이 가진 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돈'은 중요한 내러티브적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br><br>&nbsp; 상규가 숙희에게 빌려준 그 돈은 그의 사업자금입니다. 그는 이 사장과 함께 투자해서 출판사를 세웠습니다. 이 사장은 상규를 사윗감으로 보고 투자한 거예요. 상규는 사장 딸 옥주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사장과 상규가 그런 사이라 해도 상규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숙희에게서 돈을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상규의 마음은 옥주 보다는 숙희에게로 향해있습니다. 그런 상규는 숙희에게 빚 갚으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br><br>&nbsp; 그런 상황에서 상규의 누나(주증녀 분) 김 여사는 속이 타들어 갑니다. 김 여사는 독신으로 남동생 하나 바라보며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어떤 면에서 김 여사에게 있어 상규는 아들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 남동생이 애 딸린 과부에게 눈이 돌아갔으니, 그 누나 심정이 어쩌겠어요? 더군다나 김 여사와 숙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에요. 김 여사는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동생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든 동생과 숙희를 떼어놓고 싶죠. 남동생은 번듯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야만 하니까요. 김 여사는 숙희에게 빚 독촉을 하면서 에둘러 숙희가 상규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비난합니다. <br><br>&nbsp; 그럼, 상규의 약혼녀 옥주(도금봉 분)의 입장을 살펴볼까요? 옥주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습니다.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죠. 그런데 옥주는 그 남자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과년한 딸이 있는 미망인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저런 여자를 왜 좋아하나 생각하면 속도 상하고 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옥주가 상규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 보여요. 사랑이 어디 마음대로 되냔 말이죠. 상규는 집안의 재력으로 자신에게 어설프게 묶어놓은 상태일 뿐입니다. 옥주는 궁리 끝에 숙희를 찾아가지만, 별 말도 못 하고 돌아오지요. 옥주는 돈으로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br><br>&nbsp; 숙희의 딸 경희도 '돈' 때문에 고민합니다. 엄마의 양장점이 망하면서 경희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경희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엄마는 살고 있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경희는 딱히 머물 곳도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희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돈이 많다면 엄마의 빚도 갚아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희가 그런 기대를 하고 만난 남자는 겉멋 든 바람둥이일 뿐입니다. 경희는 '돈'만 보고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죠. <br>&nbsp;&nbsp;&nbsp; <br>&nbsp; 이 영화에서 돈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부산의 종이 무역상으로 나오는 김 사장(김승호 분)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숙희에게 반합니다. 김 사장은 숙희를 아는 상규에게 숙희와 잘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하죠. 상규에게 김 사장은 사업상 중요한 고객입니다. 애 딸린 홀아비이기는 하지만 김 사장에게는 숙희와 잘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옵니다. 숙희는 그렇게 돈의 힘을 앞세우는 김 사장을 역겹게 생각합니다. 숙희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감정이니까요. <br><br>&nbsp; 이렇게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돈에 얽혀 이리저리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돈'을 빌려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숙희와 상규의 사랑은 결국 '돈'을 갚으면서 끝나버립니다. 상규는 숙희를 간절히 원하지만, 숙희는 상규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접습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상규에게 빚을 갚고, 시골 친정집으로 떠나버리죠. 영화 '동심초'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비탄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흐르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곰곰이 톺아보면, 그것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사랑'이란 감정은 현실이 배제된 진공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br><br>&nbsp;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 숙희와 상규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기는 해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 사랑도 인생의 많은 것들처럼 진정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죠. 거기에는 돈과 계층, 사회적 관습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작동하고 있어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결국 이별을 택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숙희는 부산 출장을 가는 상규를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갑니다. 하지만 숙희는 역사(驛舍)의 쇠창살 옆을 서성이다 그냥 돌아오지요. 영화의 마지막, 상규는 시골로 떠나는 숙희를 보고자 서울역에 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상규 또한 숙희가 예전에 머물렀던 쇠창살에 고통스럽게 매달립니다. 이 기이한 수미상관(首尾相關)은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둘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화려한 비탄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nbsp;&nbsp; <br><br>&nbsp;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내게 흥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은 숙희의 딸 경희의 미래입니다. 숙희는 친정집으로 내려가면서 딸 경희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줍니다. 예전 경희의 과외 교사 기철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이었습니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아들)을 따라야 했지요. 숙희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따라야할 자식이 없는 셈입니다. 숙희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면서, 딸에게는 미래의 사윗감을 정해준 것처럼 보이지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뿌리가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더 지난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사랑과 결혼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br><br><br>*사진 출처: kmdb.or.kr<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321/pimg_741289193423001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99196</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여사장(A Female Boss, 1959): 로맨틱 코미디에 반영된 퇴행적 가부장제 </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55720</link><pubDate>Mon, 04 Mar 2024 2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355720</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습니다. 오래된 한국 영화가 나오네요. 한형모 감독의 영화 '여사장(A Female Boss, 1959)'입니다. 한형모 감독은 전후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 '운명의 손(1954)'과 '자유부인(1956)'에는 해방 이후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어요. '여사장(1959)'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군요. <br><br>&nbsp; 이 영화는 원작 희곡이 있습니다. 원작자 김영수(1911-1977)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희곡과 시나리오, TV 드라마까지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영수는 해방 직후에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1948)'도 그 시절에 쓴 희곡이지요. 이 희곡은 '김영수 희곡·시나리오 선집 2(출판사 연극과 인간)'에 실려있습니다. 나는 '여사장' 영화를 보고, 원작이 궁금해서 책을 주문해 보았습니다. 2007년에 펴낸 책이라 혹시 절판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요. 그런데 아주 멀쩡한 새책으로 잘 받을 수 있었어요. 아마 잘 안팔렸을 거에요. 이런 책은 관련 전공자들이나 볼 법한 책이지요.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펴낸 출판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지요. <br><br>&nbsp;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용호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화려한 양장 차림의 요안나(조미령 분)는 기다리는 뒷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통화 중이지요. 짜증을 내던 뒷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용호만 남습니다. 용호는 요안나의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지요. 요안나가 용호를 무시하자, 용호는 요안나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마리오를 냅다 발로 차버립니다. 아주 고약한 첫 만남이지요? 대개의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부가 그렇잖아요. 기분 나쁜 첫인상을 갖게된 남녀가 결국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요안나와 용호도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br><br>&nbsp; 요안나는 '신여성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어엿한 여사장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장이면 사장이지, 여사장이라는 단어는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건 영화가 나온 그 시대가 1950년대라 그렇지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요. 요안나는 그런 시대에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사장만 여자가 아니라, 잡지사 편집국도 여인천하입니다. 허 주임(김희갑 분)은 여자 편집국장을 비롯해 여직원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신세에요. 그는 툭하면 잡지 기사 고쳐 쓰라고, 냄새 나는 반찬 좀 먹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지요.&nbsp;&nbsp;&nbsp;&nbsp;&nbsp;&nbsp; <br><br>&nbsp; 요안나는 자신이 펴내는 잡지 이름대로 '신여성(新女性)'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안나는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연애 금지령'을 내립니다. 요안나에게 연애는 독립적인 여성의 자존감을 꺾는 일입니다.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 시대의 봉건적 남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요안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싶어하죠. 하지만 요안나의 현실은 그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br><br>&nbsp; 요안나의 잡지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그런 요안나에게 돈 많은 오 사장(주선태 분)은 후원자를 자처합니다. 영화 속에서 오 사장이 독신으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희곡에서 오 사장은 유부남으로 나옵니다. 오 사장은 어떻게든 돈으로 요안나를 얽어매려는 흑심을 지닌 사람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잡지를 펴내기 위해 요안나는 고군분투합니다. 그즈음, 용호가 요안나의 잡지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옵니다.<br><br>&nbsp; 요안나는 용호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맘놓고 그 별명을 불러대지요. '용호'라는 이름 대신에 '두꺼비'라고 불리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좀 안쓰럽기까지 해요. 어쨌든 용호에게 요안나는 '사장님'입니다. 용호는 요안나를 상사로 깍듯이 대합니다. 요안나는 그런 용호의 순수함과 우직스러움에 조금씩 빠져들게 됩니다.<br><br>&nbsp; 여기까지만 보면 '여사장'은 오늘날의 여느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신여성, 페미니스트인 요안나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습을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요안나는 자기 회사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해요. 요안나는 오 사장의 호의에 기대어 편하게 돈을 빌리려고 하죠. 결국 요안나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돈 많은 숙부입니다. 멋진 옷차림을 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외치지만 그건 다 껍데기처럼 보여요. 이점은 원작 희곡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요안나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남자를 적대시하는 요안나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자 김영수의 관점은 매우 전근대적이기도 하고요.<br><br>&nbsp;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현모양처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안나의 잡지사는 두꺼비에서 남편이 된 용호가 사장이지요. 이제 요안나는 양장이 아닌 한복을 입고서,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찌개를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 전화를 받는 용호의 뒤편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가 있을 때는 분명 그 액자에 '여존남비(女尊男卑)'가 박혀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던 허 주임은 편집국장 자리에 앉아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지요. 영화의 이런 묘사는 일견 우스워 보이지만,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퇴행적인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죠.<br><br>&nbsp;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작 희곡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희곡은 요안나와 용호가 함께 잡지사를 꾸려나가자는 상호 합의의 다짐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화 '여사장'은 그런 희곡의 결말을 사정없이 비틀어 버립니다. 거기엔 일말의 융통성도 없어요. 영화 '여사장'이 보여주는 제대로 된 여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행복을 찾는 여성이지요. 영화 속 여사장, 아니 이제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버린 요안나는 정말 행복을 찾았을까요? <br><br>&nbsp;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가 상영된 1959년에 '여사장'을 본 여성 관객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그들은 진심으로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며 집에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여사장 요안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분명한 건, 2024년의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아주 흥미 있는 영화거든요. 영화 속 시대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nbsp;&nbsp; <br><br><br>*사진 출처: kmdb.or.kr <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304/pimg_741289193421030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55720</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Robot Dreams(2023): 관계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애니메이션</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36933</link><pubDate>Tue, 27 Feb 2024 19: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336933</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매일 같은 일상입니다. 그는 TV 속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죠. 식사 시간이 되면 찬장에 있는 냉동식품을 꺼내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그 음식을 먹구요. 문득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그는 자기 아파트 건너편 집을 바라봅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들은 연인입니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지요. 그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얼른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켭니다. 이리저리 돌리다가, 신기한 물건에 눈길이 갑니다. 로봇이네요. 말하고 미소를 짓는 로봇 말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로봇 조립 세트를 주문합니다. <br><br>&nbsp; Pablo Berger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Robot Dreams(2023)'의 시작은 그러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어요. 감탄사와 효과음은 있지요. 아, 음악이 정말 좋습니다. 영화 내내 미국의 팝 그룹 Earth, Wind &amp; Fire의 명곡 'September'가 흐릅니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곡이에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인 Dog와 로봇에게도 말입니다. 주인공이 정말로 Dog가 맞냐고요? 맞아요. 주인공은 'Dog', 달리 이름이 없어요. 로봇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개와 로봇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br><br>&nbsp; 개는 집으로 배달된 로봇 조립 세트를 완성합니다. 로봇은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개와 로봇은 이제 일상을 함께 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가 됩니다. 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Setember를 로봇이 좋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함께 길을 걷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죠. 여름이 오자, 개는 로봇을 해변으로 데려갑니다.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런데 로봇이 좀 이상합니다. 움직이질 않아요. 그래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의 몸에 물이 들어가서 녹이 슬어버린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개는 로봇을 해변가에 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br><br>&nbsp;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개는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여름에만 잠시 개방되는 그 해변은 그날부터 폐쇄되었습니다. 내년 여름에 문을 연다는군요. 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래밭에 파묻혀있는 로봇을 구하려고 합니다. 시청에 민원도 내지만 소용이 없어요. 로봇을 만나려면 1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br><br>&nbsp;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 'Robot Dreams'는 로봇이 꾸는 꿈을 의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로봇인데, 꿈이라고 해서 못 꾸겠어요?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잠깐씩 눈을 뜨던 로봇은 꿈을 꿉니다. 다시 개를 만나게 되는 꿈이요. 로봇의 꿈속에서 개는 로봇을 잊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로봇은 슬픔과 불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로봇의 꿈과는 달리 개는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여행도 하지만 개의 머릿속에는 늘 로봇이 있어요. <br><br>&nbsp; 마침내 개가 간절히 기다리는 그날이 왔습니다. 해변이 다시 문을 여는 날이지요. 개는 바람처럼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거기엔 로봇이 없어요. 로봇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로봇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어떻게 하다 고물상에 팔려 간 로봇은 Rascal이란 이름의 너구리와 만나게 됩니다. 직업이 수리공인 너구리는 로봇을 정성스럽게 다시 조립합니다. 로봇은 다시 살아납니다. 로봇은 너구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지내지요. <br><br>&nbsp; 개에게도 새로운 로봇 친구가 생깁니다. 그렇게 개와 로봇은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요. 그런데 우연히, 로봇은 개를 보게 됩니다. 개는 새 친구 로봇과 길을 걷고 있었죠. 자, 로봇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개에게로 달려갈까요? 그런데 개의 옆에는 다른 로봇이 있잖아요. 개와 로봇, 둘은 어떻게 될까요?&nbsp;&nbsp; <br><br>&nbsp; 'Robot Dreams'는 대사가 없지만, 아주 간결하게 정서를 전달합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주인공 개와 로봇의 마음 속 깊이 빨려들어가게 되지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요. 서로를 알아가고, 친밀해지는 관계.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우정이나 사랑이든,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말이지요.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이 떠오르더군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그 영화요. 서로 이질적인 배경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둘은 헤어집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이 남아있겠지요. 영화의 우리말 제목 '추억'은 정말 잘 지었어요.<br><br>&nbsp; 개와 로봇이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 그 추억은 'September'라는 노래에 담겨있어요. 둘은 언제까지나 그 노래를 기억할 겁니다. 'Robot Dreams'는 보는 이에게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층을 쌓아가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꼭 그 추억의 누군가와 이어지지 못해도 괜찮아요.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Earth, Wind &amp; Fire의 히트곡 'September' 공식 뮤직 비디오 링크<br>https://www.youtube.com/watch?v=Gs069dndIYk<br><br>&nbsp; <br>&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227/pimg_741289193420389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36933</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최근에 본 영화들: 오펜하이머(2023), 바비(2023), 마에스트로(2023)</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21337</link><pubDate>Wed, 21 Feb 2024 19: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321337</guid><description><![CDATA[&nbsp;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 <br>바비(Barbie, 2023),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br>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 감독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br><br>&nbsp;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는 러닝타임이 3시간이다. 그렇게 긴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영화는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 1904-1967)의 일대기를 다룬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정교하게 배치된 3개의 시간 축을 중심으로 영화를 짜나간다. 오펜하이머가 대학생 시절이었던 때부터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오펜하이머에게 오욕과 수치를 안겨준 1954년의 청문회, 오펜하이머의 반대자 루이스 스트로스(Lewis Lichtenstein Strauss)의 1959년 청문회가 그것이다. 놀런은 이렇게 시간대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데에 재미를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덩케르크(Dunkirk, 2017)'에서도 그런 걸 써먹은 적이 있다. <br><br>&nbsp; 그런 내러티브적 변형이 효과적이었는지 내게는 물음표로 남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덩케르크'는 참으로 별로였고, 그나마 '오펜하이머'는 볼만 했다. '오펜하이머'는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놀런은 그의 인생이 격변의 시대와 교차하는 지점을 통찰력 있게 포착한다.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적 과학자로서 오펜하이머에게 영광의 월계관만 씌워진 것은 아니었다. 내연녀의 비극적 죽음,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견뎌야 했던 사상 검증, 원폭 투하가 가져온 엄청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이 오펜하이머의 삶에 포개어져 있었다.<br><br>&nbsp; 영화는 뛰어난 과학자가 겪어야 했던 인간적 불행이 '국가'가 수행한 거대한 전쟁 프로젝트와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부각시킨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순간에 과학자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그것을 통렬하게 입증한다. 결국 소모되어 버려지는 삶.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 비참함과 서글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br><br>&nbsp; '오펜하이머'와 함께 2023년의 미국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바비(Barbie, 2023)이다. 완벽한 바비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 주인공 바비가 한 여성, 인간으로서 눈뜨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전형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감독 그레타 거윅은 매우 영리하게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바비 인형 회사 마텔(Mattel)과 긴밀히 협조한 자본주의적 영악성은 영화 속에서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 '바비'의 세계관은 진부함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이다. <br><br>&nbsp; 2024년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선정에서 '바비'가 철저히 외면당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비'는 그런 대접을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건 페미니즘에 대한 박대가 아니다. 그레타 거윅의 빈곤한 영화적 상상력과 놀라운 정치적 능력의 합작품 '바비'를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영화 나는 반대일세', 미국 아카데미 협회 회원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br><br>&nbsp; 헐리우드의 또 다른 화제의 영화로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이 있다.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는 이 영화의 감독으로, 그리고 주인공 번스타인역으로 북 치고 장구 치는 놀라운 원맨쇼를 보여준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파는 데에 열심인듯 하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은 유럽 출신의 지휘자가 주류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이다. 영화는 그러한 번스타인의 음악적 성취 이면에 자리한 개인사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nbsp;&nbsp; <br><br>&nbsp; 동성애자인 번스타인의 삶은 '결혼'과 '출세'라는 세속적 틀과 맞물리며 지속적인 파열음을 낸다. 영화 속 번스타인은 뛰어난 지휘자 이전에 기만적인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온다. 번스타인은 끊임없이 남자 연인들과 바람을 피우는 자기 삶의 방식에 한없이 관대하다. 결별을 요구하는 아내에게는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하고, 딸에게도 진실을 숨기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남자는 외적으로는 위대한 지휘자(Maestro)라는 광휘에 휩싸여 있지만, 그 뒤에는 일그러진 인간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br><br>&nbsp; 영화 속에서 번스타인은 동료 음악가를 비롯해 자신이 가르치는 남학생과도 연인 사이가 된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번스타인의 행동은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의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을 예상하게 만든다. 번스타인의 모습은 영화 '타르(Tár, 2022)'에서 여성 지휘자 타르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인다. 물론 타르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감독 토드 필드(Todd Field)가 만들어낸 가상의 지휘자이다. 그 영화에서 타르는 음악적 권력을 남용하다 파국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단초는 타르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성적인 착취의 도구로 사용한 데에서 기인한다.<br><br>&nbsp; 영화 '마에스트로'를 보면서 나에게 든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타르를 몰락하게 만들었던 성적 취향과 권력의 속성이 번스타인에게는 그 어떤 손상도 끼치지 않았는가? 번스타인은 죽을 때까지 남자들과 자유롭게 연애하고 동거했다. 그의 그런 사생활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음악계에서도 암묵적인 비밀로 유지되었다. 브래들리 쿠퍼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을 둘러싼 번지르르한 신화에 균열을 가한다. 문제는 그 균열이 번스타인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근원적 탐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영화 '마에스트로'는 젠더와 예술 권력, 결혼제도와 성소수자인 LGBT에 관해 그럴싸한 변죽만 울리다 끝내버린다. 브래들리 쿠퍼는 감독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듣기 좋은 노래와 볼거리만 있는 음악 영화는 한번 보고 잊혀질 뿐이다. 결국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이야기이다.<br><br><br>*토드 필즈의 영화 '타르(Tár, 2022)' 리뷰: <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221/pimg_741289193419749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21337</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가난과 중독의 서글픈 환(環), On the Bowery(1956)</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00774</link><pubDate>Tue, 13 Feb 2024 19: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300774</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일용직 노동자 Ray Salyer는 이제 막 Bowery에 도착했다. 뉴욕의 맨해튼 Lower East Side에 자리한 그 거리는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샐리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술꾼 Gorman Hendricks와 술집으로 들어선다. 술에 취한 샐리어는 그날 밤에 거리에서 쓰러져 잠든다. 헨드릭스는 샐리어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헌옷이 든 가방을 몰래 훔친다. 돈 한 푼 없는 샐리어, 그는 막노동해서 번 돈을 또다시 술집에서 탕진한다. 그들의 삶은 Bowery라는 거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Lionel Rogosin(1924-2000) 감독의 다큐멘터리 'On the Bowery(1956)'는 알콜 중독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br><br>&nbsp; 술꾼들은 끊임없이 지껄이며, 계속해서 술을 들이킨다. 술집 안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지낸다. 때로 술기운에 예기치 못한 주먹다짐이 이어지기도 한다. 술꾼들 가운데에는 여자들도 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은 많은 술꾼의 숙소는 당연히 길바닥이다. 노숙의 삶. 길에서 자고 일어난 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해장술을 들이킨다. 로고신의 카메라는 매우 건조하게 그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길거리 술꾼들의 얼굴은 가난과 무기력으로 채워져 있다. <br><br>&nbsp; 로고신은 뉴욕의 대표적 빈민가 Bowery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곳의 삶을 카메라로 담아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On the Bowery'를 순전한 다큐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다큐 속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인 샐리어와 헨드릭스는 로고신이 다큐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진짜 알코올 중독자들이다. 로고신은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Bowery 거리의 삶을 그려낸다. 돈이 떨어진 샐리어가 끼니와 잠자리를 의탁하게 되는 교회는 실제 Bowery에 자리한 곳이다. 역설적이게도 술집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넘쳐나는 Bowery에는 교회와 자선단체도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br>&nbsp; <br>&nbsp; "누군가 커다란 포부를 안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술꾼들의 무덤인 이곳에서 삶을 마감합니다(...who started out with a life ambition<br>to end up in a drunkard's grave)."<br><br>&nbsp; 목사는 술꾼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뼈아픈 일장 연설을 한다. 그 말을 귀에 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신문지로 깔아놓은 콘크리트 바닥의 잠자리가 간절할 뿐이다. 그곳에서 잠을 청하던 샐리어는 술 생각이 간절해져서 다시 거리로 나선다. 중독된 삶. 그가 아침에 앉아있는 곳도 술집이다. 샐리어는 헨드릭스가 권하는 술을 힘겹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시카고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한다. 헨드릭스는 샐리어에게 여비에 보태쓰라며 돈 몇 푼을 건넨다. 과연 샐리어는 그 거리를 떠날 수 있을까?<br><br>&nbsp; "내가 자네에게 한마디 하지. 그는 꼭 다시 돌아올 거야(Let me tell you something... He'll be back)."<br><br>&nbsp; 헨드릭스가 동료 술꾼들에게 샐리어의 행운을 바란다고 말하자, 술꾼 하나가 헨드릭스에게 그렇게 말한다. 다큐는 샐리어가 Bowery 거리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샐리어는 다큐 개봉 후, 멀끔한 외모의 그를 눈여겨본 할리우드 제작사의 권유도 뿌리쳤다. 그리고 결국 그가 죽게 된 곳은 거리였다. 술꾼의 예언대로 샐리어는 1963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삶을 마감했다. 헨드릭스는 그보다 더 빨리, 'On the Bowery'가 개봉하기 직전에 죽었다. 로고신은 그의 장례식을 직접 챙겼다(출처: en.wikipedia.org).<br><br>&nbsp; 'On the Bowery'는 로고신이 만든 통렬한 영상사회학적 보고서이다. Bowery는 남북 전쟁 이후, 주점과 매음굴이 자리한 하층민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거리를 좀 더 나은 곳으로 개조하려는 사회적인 압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로고신이 다큐를 찍을 무렵에 그곳은 알코올 중독자들과 노숙자들의 성지였다. 오늘날, Bowery는 고급 화랑과 고급 주거지가 자리한 거리로 탈바꿈했다. 그 거리를 채웠던 술꾼들과 빈민들, 노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뉴욕의 Bowery는 미국 사회의 수치였다. 한편으로 그곳은 냉혹한 자본주의의 이면이기도 하다. 로고신은 가난한 이들이 왜 빈곤과 중독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 악순환의 뿌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nbsp;&nbsp;&nbsp; <br>&nbsp;&nbsp;&nbsp;&nbsp; <br>&nbsp; 감독 라이오넬 로고신은 자신의 영화로 당대의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로고신은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큐 제작에 쏟아부었다. 극영화인 'Come Back, Africa(1959)'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촬영했다. 영화는 아파르트헤이트로 고통받는 남아공 흑인들의 삶을 담았다. 'Good Times, Wonderful Times(1965)'에서 로고신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로고신은 런던의 칵테일파티에서 노닥거리는 부유층의 행태를 자신이 직접 수집한 전쟁과 학살의 기록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Black Roots(1970)'는 재즈 음악 속에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녹여냈다. 로고신의 'On the Bowery'는 행동하는 지식인, 영화인으로 살아가고자 한 감독 자신의 출사표인 셈이다.<br><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nbsp; <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213/pimg_741289193418799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300774</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46789</link><pubDate>Tue, 23 Jan 2024 23: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246789</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br><br>&nbsp;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nbsp;&nbsp; <br><br>&nbsp;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과연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br><br>&nbsp; 영화 속 승모는 어떤 면에서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승모는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가 뭔지 모른다. 승모의 모습은 창작자가 늘 맞닥뜨리는 괴로움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지? 물론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에게 있어 영화를 만드는 행위도 그러하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서 영화의 소재를 찾아낸다. 영화 속 승모도 그냥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다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여자와 나눈 짧은 대화를 가지고 승모는 마침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br><br>&nbsp; 더듬더듬, 마치 어둠 속에서 헤매듯 작가는 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것은 포커스가 나간 화면의 비가시적인 불투명성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마침내 승모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에서 연기하면서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화면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다 깊이 들어갔을 때, 승모가 마주하게 되는 물속의 알지 못하는 세계는 창작자의 내면 그 자체가 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승모는 우연히 쓰레기를 줍는 섬 주민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우연(偶然)과 영감(靈感). 그것이야말로 승모에게, 감독 홍상수에게 영화를 만드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우연과 영감의 기이한 태피스트리(tapestry)이기도 하다. <br><br>&nbsp;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왜 배우로 연기만 하던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한 걸까? 상국이 그 이유를 묻자, 승모는 대답한다. 영화를 찍어서 돈을 벌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은 결국 '명예'라고. 그것에 대한 열망이 승모를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승모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그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모한 열정이고 용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삼백만 원을 섬 주민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영화적 세계로 치환한다.<br><br>&nbsp; 승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적 작업 과정을 반추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 개인만의 특화된 방식이 아니다. 뿌연 물속에 있는듯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연과 영감에 기대어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 창작자, 예술가가 성취해 내는 예술 작업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숙명이고 명예가 된다.&nbsp;&nbsp; <br><br>&nbsp;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아, 홍상수!'하고 탄성이 나왔다. 홍상수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가 작가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질리지 않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국의 악기를 두드리던 중년의 남자는 2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일상성과 영화적 세계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물안에서'는 홍상수가 사생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가적 명예를 지켜내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한다.&nbsp; <br><br>*사진 출처: themoviedb.org<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123/pimg_741289193416561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46789</link></image></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다시, 시를 쓰면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38550</link><pubDate>Sat, 20 Jan 2024 2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238550</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권혁웅 시인의 수업이었다. 극작과에서 개설한 수업이었는데, 다른원 학생도 수강 신청이 가능해서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수강생은 한 열 명 남짓 되었나. 서사창작과와 극작과 학생에다 연극학과 학생도 있었다. 영상원 학생은 나하고 같은 과 동기, 이렇게 2명이었다. 수강생들은 수업시간마다 시를 한 편씩 써내야 했다. 그리고 각자 써온 시를 낭독한 후에, 무지막지한 합평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좀 긴장되고, 기분 잡치고, 그렇지만 재미도 있던 그런 수업이었다.<br><br>&nbsp; 나는 남의 시에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 독특하네요, 그 정도로 말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쪽 애들은 달랐다. 내가 생각하기엔 좀 심하다 싶은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곤 했다. 내 동기는 아마도 시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합평'을 가장한 인신공격(특히 김사과가 그랬다)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지나친 서정성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확실히 그건 내가 쓴 시의 약점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시를 써내는 것 보다, 거기에 있는 수강생들을 관찰하는 일이 나름 재미있었다. <br><br>&nbsp; 극작과의 유희경은 자신이 써내는 시에 대한 도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 시들은 내가 보기에 별로였지만, 권혁웅 선생의 평가는 달랐다. 선생은 유희경이 1, 2년 이내에 등단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써내라고 당부했다. 유희경에 대한 선생의 호평과는 달리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던 학생은 서사창작과의 김사과였다. 김사과의 경우는 출석부에는 '방실'이라고 쓰여 있어서, 출석을 부를 때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시를 써낼 때의 이름은 김사과였다. 아무튼 김사과가 써내는 시들은 진짜 이해 불가에다 기괴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죽음의 이미지가 많았다. 권혁웅 선생은 웬만해서는 수강생의 시에 혹평하지는 않았는데, 학기의 중간쯤 가니 김사과의 시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br><br>&nbsp; "이런 시를 뭐라고 하냐면, 요설(妖說)이라고 해. 요설. 별 의미도 없고, 해악이나 끼칠 뿐이지." <br><br>나는 선생이 그 말을 할 때의 냉랭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사과는 자신의 시 창작 스타일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br><br>&nbsp; 모두들 자신이 써낸 시를 낭독하는데, 극작과 학생 가운데 한 명은 읽을 수 없다고 하고는 한 학기 내내 자신의 시를 읽지 않았다. 목소리가 이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유희경과 신나게 잡담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 학생의 시도 참 특이하기는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시어가 있기는 하다. 에콰도르의 초석. 무슨 행성에 대한 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가 참 재미있어서 그날은 좋은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br><br>&nbsp; 유희경은 권혁웅 선생의 예언대로 2년 뒤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사과의 경우는 좀 의외였다. 나는 김사과가 소설로 등단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설이라며 내팽개쳐짐을 당하던 그 언어들이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글이라고 해도, 시대나 사람들의 요구가 있으면 그렇게 작가가 된다.<br><br>&nbsp; 올해 들어서 나는 다시 시를 쓰고 있다. 무슨 시를 써서 등단할 것도 아니다. 그냥 다시 시를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써내면서, 이게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작업이 힘들고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는 면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의 예술 치료에는 문학 치료도 있다. 이렇게 긴 글로 써내는 것보다, 내면의 심상을 짧게 압축해서 시로 만들어내고 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삼 그 시 창작 수업을 떠올려 본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시를 즐겁게 써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시인이다. 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나는 이 늦은 나이에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기쁠 뿐이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당신의 브랜드는 무엇입니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20710</link><pubDate>Sat, 13 Jan 2024 2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220710</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박참새는 2023년 11월에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박참새의 시집 제목은 '정신머리'이다. 박참새는 욕설과 비어를 쓰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문자를 이미지로 구현해 내는 기상천외한 발상도 시에 써먹는다. 20대 젊은 여성 시인은 유명 연예인 못지않은 인스타 팔로워가 있다. 평론가들은 박참새의 시에 상찬(賞讚)을 쏟아낸다. 새해 벽두부터 신문의 문화면 기사를 장식한 박참새의 인터뷰는 놀랍다 못해 웃음마저 나온다. 깡패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깡패'의 뜻은 독자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말이다.<br><br>&nbsp; '무덤에 누워있던 김수영 시인이 놀라서 관짝 뜯고 나오겠네.'<br><br>&nbsp; 문학 관련 커뮤니티에 누군가 그런 댓글을 썼다. 박참새를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무슨 저게 시야, 저걸 과연 시라고 할 수 있냐... 박참새의 시를 읽은 이들의 혹평과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한국의 시문학계는 너무나도 정체된 나머지, 기괴한 변종 창작자를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자가수혈 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하는. <br><br>&nbsp; 박참새 말고 요즘 새롭게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시인도 있다. 예능인 '양세형'이다. 양세형이 쓴 시집 '별의 길'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걸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는 문학 지망생들도 있다. 누구는 등단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며 시를 쓰는데, 연예인은 다 알아서 책 펴내주는 출판사도 있고 참 팔자 좋다고. 나는 양세형의 시집은 읽지 못했으므로 그 시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br><br>&nbsp; 결국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자기 이름을 내건 시집을 내려면 등단해야 하고, 조금씩 청탁을 받아 글을 써서 이름을 알려야 한다. 그런 후에 출판사 편집자의 마음에 들면, 그제야 겨우 어렵게 시집을 펴낼 수 있다. 그런데 양세형에게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이건 불평등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출판사는 팔릴 가능성이 있는 책을 낸다. 그러므로 '양세형'이라는 브랜드를 내건 시집이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br><br>&nbsp; 팔릴 수 있는 걸 써내는 것은 시장의 기대에 부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장에 내놓으려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포장지를 둘러야 한다. 우리는 그걸 '브랜드'라고 부른다. 어제 EBS의 '위대한 수업 Great Minds'에는 태양의 서커스 CEO 다니엘 라마르가 나왔다. 라마르는 태양의 서커스가 팬데믹 시기에 파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브랜드'가 가진 힘 때문이라고 했다. '태양의 서커스'라는 브랜드를 신뢰한 투자자들이 돈을 댔고, 그 돈으로 태양의 서커스 공연이 다시 시작되었다.<br><br>&nbsp; 박참새의 그 경박스럽고 너절한 시들에 대한 내 평가는 논외로 하고, 이 시인이 내세운 브랜드는 충분히 시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이 팔리면 문학도 돈이 되고, 그것이 작가의 브랜드가 된다. 물론 박참새가 그 브랜드의 효용성을 얼마나 유지할지 궁금하기는 하다. 한 3년, 어쩌면 그보다 더 길게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br><br>&nbsp; 양세형의 시집도 대중의 관심사에 부합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그 사실이 시집의 문학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난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참, 세상 불공평하네. 골방에서 죽으라고 글 쓰는 작가 지망생이 백날 이렇게 한탄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원래 세상이,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더럽게 불공평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이 내세울 '브랜드'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뭔가로 두를 포장지,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계에서는 등단이고, 유력 문인의 추천이고, 인맥이고, 정치력이다. 그런 브랜드도 없는데 누가 생초짜 신인을 알아주느냔 말이다. 브랜드 없는 사람의 글을 기꺼이 펴내 주는 출판사는 없다. 그런 사람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자비(自費) 출판이 있기는 하다.<br><br>&nbsp; 당신의 브랜드는 무엇입니까? 누군가 그렇게 나에게 묻는다면 어떨까?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나는 평론가도, 작가도 되지 못했다. 그런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구석진 블로그에서 내가 쓰는 글은 그저 끄적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끄적거림이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글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도 글을 쓸 뿐이다.&nbsp;&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살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09111</link><pubDate>Mon, 08 Jan 2024 20: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209111</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br>&nbsp; 오늘은 내과 예약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작년 12월에 받은 건강 검진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재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종합병원은 언제나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와는 5분 정도 이야기한 것 같다. 의사는 다시 확인해야 할 검사와 추가로 필요한 검사에 대해 말했다. <br><br>&nbsp; 원무과에서 수납하고 채혈실로 갔다. 병리과의 젊은 여자 직원이 피를 뽑았는데, 생각보다 아프다. 지혈하느라 채혈한 곳을 누르고 있었는데, 피가 좀 많이 나온다. 피 뽑은 자국도 작은 피멍이 아니라, 이상하게 작은 직선 모양으로 줄이 그어진 것처럼 자국이 났다. 피 뽑는 것도 기술인데, 저 직원은 실력이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피 뽑을 때 바늘 들어가는 느낌에서 이 사람 피 잘 뽑는구나, 아니다를 구분할 지경이 되었다. <br><br>&nbsp; 채혈 결과를 기다리는 데 1시간이 걸렸다. 병원에서 기다릴 때는 달리 뭘 할 게 없다.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 되어서 그만두었다. 이럴 때는 묵주기도를 하는 편이 낫다. 묵주기도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하는 염경기도(念經祈禱)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묵주알을 굴렸다. 그렇게 5단 기도를 2번 했다. 중간중간에 대기실의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아주 늙은 할머니 환자는 남편이 보호자로 옆에 있었다. 그 할머니 남편도 거진 80이 다 되어 보였다. 거동이 약간 불편한 할머니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살뜰히 챙겼다. 저 나이에도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나는 '부부'라는 인연에 대해 잠시 짧게나마 생각했다.<br><br>&nbsp; 내과 접수를 보는 간호사는 정신없이 바쁘다. 내 앞에서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이다. 남자는 약국에서 받아온 약봉투를 들고 있었다. 다음 진료 예약을 하는데, 자신이 연차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짜를 말한다.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의 모친이 그 옆으로 온다. 남자는 보호자로 병원에 왔다. 연차라도 빼서 어머니의 진료를 챙기는 아들이 있으니, 저 아주머니는 노부부보다는 형편이 낫다. <br><br>&nbsp; 바로 옆의 간호사는 젊은 여자에게 인슐린 주사 놓는 법에 대해 설명을 한다. 환자는 여자의 모친이다. 이제 처음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게 된 모양이다. 주사의 용량을 얼마나 할 것인지, 언제 맞아야 하는지, 소모성 재료대 요양 급여 신청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는 딸이 늙은 엄마를 챙긴다. 저 아주머니 환자도 복받은 사람이네. 병원에 오면 저렇게 부모 챙기는 자식들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br><br>&nbsp; 대기실 건너편에는 신장내과가 있다. 노부부가 진료실에서 나온다. 간호사가 할아버지에게 투석실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신장이 많이 안 좋은 환자인가 보다. 여긴 할머니가 남편을 챙기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노부부는 대기실을 떠난다. 신장내과 옆에는 혈액종양내과가 있다. 대기실 의자 뒤편에는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들이 두어 명 앉아있다. 내 생각엔 제약회사 영업부 직원 같았다. 오전 진료 끝나기를 기다려 남자들은 진료실을 조심스럽게 노크한다. 문 앞에서부터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남자가 손에 든 쇼핑백은 의사에게 줄 선물 같아 보이기도 한다. 병원에 오면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권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br><br>&nbsp; 채혈한 지 1시간이 지나서 검사 결과가 나왔다. 진료실에 들어가는데, 몸이 약간 휘청하는 느낌을 받는다. 결과가 안 좋으면 어쩌지. 중년의 여자 의사는 내가 앉고 나서, 잠깐 모니터를 보고는 차분하게 말을 시작한다. 나는 안 좋은 말을 들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검사 결과가 정상 수치로 나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죽은 줄 알고 염라대왕 앞에 불려 나갔다가, 한 10년 더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 의사는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얼굴과는 달리 인물이 별로였다. 하지만 나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그 순간만큼은 진짜 선녀처럼 보였다.<br><br>&nbsp; 살았다. <br><br>&nbsp;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밀린 환자 때문에 점심도 못 먹고 일하고 있는 접수 간호사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타이레놀을 2알이나 먹어야 했다. 어쨌든 살았다.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어낸 느낌이 든다. <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너의 글을 써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201918</link><pubDate>Fri, 05 Jan 2024 18: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201918</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나는 밥 딜런(Bob Dylan)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가창력이 좋아야지만 가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밥 딜런은 노래를 못 부르는, 현대판 음유시인쯤 된다. 나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 가수는 평생 부른 노래로 노벨상까지 거머쥐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가창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밥 딜런은 가수가 되는 걸 포기하려 했다고. 그런데 누가 밥 딜런에게 말했단다. 넌, 너의 노래를 부르면 돼.<br><br>&nbsp; 2023년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여러 과의 병원을 성지 순례하듯이 다녔다. 아픈 몸은 좀처럼 낫질 않는다. 기분 나쁘게, 속 끓이는 일들이 계속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픈 이유가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쉽게 지쳤고, 뭔가에 집중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영화 보는 것도, 책 읽는 것도 해내기가 힘들었다. 글도 쓸 수가 없었다.<br><br>&nbsp; 작년 한 해 동안 써낸 영화 리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게 되니까, 글도 써내질 못한다. 그래도 글을 써야 하니까 이런저런 일상 글이라도 쥐어 짜 내어 수필로 만들었다. 그냥 글쓰기 연습인 셈이었다. 뭔가 제대로 된 글을 써내질 못한다는 좌절감은 늘 있다. <br><br>&nbsp; 올해는 수필에 이어 시를 써보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었다. 집안 창고의 박스 어딘가에 그 노트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소설이었다. 작가가 되어야지.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쓴 글로 벌어 먹고살 거야. <br><br>&nbsp; "그런데, 작가가 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br><br>&nbsp; 오래전, 나에게 그렇게 말하던 사람은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그래,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되돌려 주마. 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나는 그 애한테 여적지 그 말을 되돌려 줄 기회를 잡지 못했다.&nbsp;&nbsp;&nbsp;&nbsp;&nbsp;&nbsp; <br><br>&nbsp;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다. 다음 주에도 병원 예약이 있다. 늙음과 병고는 우울함을 몰고 온다. 노래를 더럽게 못부르는 밥 딜런은 자신의 노래에 개성을 입혔다. 그리고 근성으로 버텨냈다. 힘들어도 버틴다는 건 중요하다. 그건 전혀 즐겁지 않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이를 악물어 보는 거다. 올해도 난 아플 거고, 써지지 않는 글을 부둥켜안으며 괴로워할 것이다. 어쨌든, 넌 너의 글을 써라. 나에게 하는 그 말을, 나는 지상의 어느 방 한 칸에서 외롭게 글을 쓰는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다.&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어느 신춘 당선 소감</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194458</link><pubDate>Tue, 02 Jan 2024 22: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194458</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나는 될 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br><br>&nbsp; 한백양은 올해 동아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당선자이다. 그러니까 신춘문예 2관왕인 셈이다. 1986년생으로 국문과 출신인 이 당선자는 당선 소감 첫 문장에서 자신이 될 줄 알았다고 말한다. 세계일보에 실린 당선작의 제목은 '웰빙'이다. <br><br><br>웰빙<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한백양<br><br><br>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br><br>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br>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br><br>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br>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br>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br><br>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br>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br><br>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br>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br>박대할 수 없으니까<br>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br><br>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br>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br><br>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br><br>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br>배가 출렁일 때마다<br>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br><br>옷을 사러 갔다가<br><br>옷도 나도<br>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br>잔뜩 칭찬을 듣는 것<br><br>가끔은 진짜로 <br>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br><br>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br>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br>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br><br>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br><br>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br>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br><br>&nbsp;<br>&nbsp; 읽으면서, 또 이렇게 한 번 옮겨서 써보니 시가 참 괜찮다. 이 시와 시인의 삶은 단단히 결합되어있다. 문학이란 결국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일이다. 당선자 한백양은 자신이 당선될 줄 알았다고 당선 소감글의 첫문장에 콱 때려넣는다. 어찌보면 기쁨에 넘친 자의 자만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당선자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글짓기 과외로 생계를 유지하며 시쓰기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에게 건네진 축배를 받아들었다. 한백양은 자신이 된 것처럼 그대들도 언젠가 될 거라는 격려도 함께 덧붙인다.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뭔가 울컥해지는 말이지 싶다.<br><br>&nbsp; 물론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는 것만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재능이 있는 사람은 저절로 세상에 알려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로,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희망을 가지고 세월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룬다. <br><br>&nbsp; 나는 글쓰기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작가는 배를 저어가는 사공과도 같다. 자신이 써내는 글로 노를 저어가며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외롭고 힘든 길이다. 좋은 글을 써야겠지.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글을 알아주는 독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생면부지의 신춘문예 시 당선자의 당선소감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읽는 이의 마음에 가만히 와닿는 그런 좋은 시를 써주길.<br><br><br>*202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한백양의 당선 소감글 기사 링크<br>https://www.segye.com/newsView/20231218518189&nbsp;&nbsp;&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2024년 새해 첫날</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191834</link><pubDate>Mon, 01 Jan 2024 21: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191834</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쿵쿵쿵쿵... 새해 첫날, 이른 아침부터 절구로 마늘 찧는 소리에 잠이 깼다. 정확히 어느 집에서 저런 소리를 내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믹서기 없이 저렇게 절구로 마늘을 찧는 집이 있다는 것만 안다. 얼마 전에도 저 집구석의 하루종일 마늘 찧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믹서기 가격이 대체 얼마나 한다고 저러고 살까? 믹서기 살 돈이 아까워서 저러고 산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저렇게 손으로 직접 찧어야만 마늘 맛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br><br>&nbsp; 나는 언젠가 커피 분쇄기가 고장 났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커피는 마셔야겠고, 분쇄기는 고장이 났다. 하는 수 없이 찬장 어느 구석탱이에 처박힌 사기로 된 절구를 꺼내었다. 원두커피 200g을 빻는데 30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손에는 쥐가 나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옛날 어머니들은 참 힘들게도 살았구나. 나는 다시는 절구로 커피 빻는 일은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렇게 몇 시간이고 마늘을 빻는 사람은 아마 나보다는 단련된 손목을 가진 사람이겠지.&nbsp; <br><br>&nbsp; 나는 온집안에 울려퍼지는 절구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날은 그다지 춥지 않다. 지난가을부터 도진 족저근막염은 좀처럼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늙어서 그런가 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안 걷고 마냥 지낼 수도 없다. 가끔은 걸어야지. 산책하러 가는 길에 지나는 공원에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나이 든 할머니 한 명이 운동기구로 다리를 힘겹게 내젓고 있었다. 나는 공원을 지나 근처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한적한 도로를 걸어가는데, 좀 떨어진 곳에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한쪽 어깨에 커다란 검정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br><br>&nbsp;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이것 좀..."<br><br>&nbsp;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사모님'이란 호칭을 듣는 것이 어째 영 어색하다. 남자가 내민 것은 중국집 전단이었다. 남자의 가방에 있는 것은 아마도 전단 꾸러미인 모양이었다. 그건 오늘 남자가 해야할 일감 같아 보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거리에서 광고 전단을 주는 사람들을 피해가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웬만하면 전단을 받아 들게 되었다. 내가 그걸 받아주면 그 사람들의 일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므로. 남자의 인상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선뜻 손을 내밀어서 남자가 건넨 중국집 광고지를 받았다. 내가 건네받은 광고지는 무게조차 느낄 수 없는 한낱 가벼운 종이이다. 그건 그 남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이 있다. 걸어가다가 나는 그 전단을 그곳에 던져놓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br><br>&nbsp; 그곳을 지나 도로 하나를 건너면 다른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거기에는 1층 화단에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 식물에 대한 애정은 차고 넘치나, 그것을 조화롭게 키워내는 재주는 없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면서 보니, 그 화단을 가꾸는 이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것저것 심어놓았던 화단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봄이 되어야 그곳에 화초들이 채워질 터였다. 흔하고 별 볼 일 없는 꽃이라 해도 그곳에 심어지면, 지나가면서 보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즐거움을 준다. 나는 올해 봄에는 거기에 어떤 꽃들이 필지 생각을 해보았다. <br><br>&nbsp; 나에게도 키우는 화초 세 가지가 있기는 하다.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고 불리는 게발선인장, 천리향, 비파나무. 게발선인장은 해마다 이맘때쯤에 꽃을 피운다. 이건 키운지 15년도 넘은 것 같다. 이 선인장의 화분은 윗부분의 절반이 깨졌다. 베란다에서 발로 밀다가 그리 되었는데, 분갈이를 해주기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 두고 있다. 화분의 모양새도 참 그런데, 몇 년 전에는 선인장 절반이 갑자기 뚝 하고 떨어져서 죽어버렸다. 절반 남은 선인장이 매해 꽃을 피웠다. 꽃송이를 세어보니 6송이이다. 참으로 고맙다. 내가 하는 거라곤 좀 시든 기운이 보일 때, 물을 주는 것뿐이다.<br><br>&nbsp; 천리향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있다. 천리향은 꽃은 참 볼품없는데, 향이 정말 좋다. 아마 보름쯤 지나면 꽃이 필 것 같다. 어느 해인가, 겨울에 추울 것 같아서 천리향을 집안에 들여놓았다. 그랬더니 그해에 천리향이 꽃을 피우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한성(耐寒性) 식물을 따뜻한 곳에 두는 것은 독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겨울에는 몹시 추운 날을 빼고는 천리향을 그냥 밖에 두었다. 얼마 전 강추위가 엄습했을 때, 천리향을 잠깐 집안에 들여놓기는 했다. 이제 날이 풀렸으니, 화분을 밖에 두어도 된다. <br><br>&nbsp; "그래, 강하게 살아야지."<br><br>&nbsp; 나는 꽃이 핀 게발선인장만 저녁에 집안에 들여놓고, 천리향과 비파나무는 베란다에 놔두었다. 비파나무는 원래 밖에서 자라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면서도, 천리향은 겨울밤 추위에 두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천리향에게 변명하듯 나는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하하, 웃기시네. 나는 식물이 말을 못 하는 것에 새삼 안도한다.<br><br>&nbsp; 언젠가 사주 공부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사주책을 사서 좀 보려고 했더니, 죄다 한자투성이였다. 이건 좀 힘들겠네. 그냥 내 사주나 좀 풀어서 들여다보다 말았다. 내 사주에는 오행 가운데 '木'이 참 많이 없었다. 물론 사람마다 부족한 오행의 기운이 있기는 하다. 木은 생기와 친화력, 뭐 그런 거에 해당하는데 그게 내게는 부족했다. 그럼 그걸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뭔가를 새롭게 만들고 하는 걸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식물을 키우던가 하는. <br><br>&nbsp; 그런데 나는 식물 키우는 재주는 정말이지 눈꼽만큼도 없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글쓰기가 있다. 이것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木이 부족한 나에게 글쓰기는 그러니까 화초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날마다 써내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좀 써보려고 노력은 한다. 작년에는 내내 글이 써지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도 글쓰기를 놓을 수는 없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화초들이 해마다 꽃을 피우는 것처럼, 내 글도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그런 희망을 품어본다. <br><br>&nbsp;<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배우 이선균의 Gauntlet</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180548</link><pubDate>Fri, 29 Dec 2023 23: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180548</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The Gauntlet(1977)'이라는 영화가 있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피닉스시의 경찰 쇼클리(Clint Eastwood 분)는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증인을 호송해 오라는 임무를 떠맡는다. 쇼클리가 호송해야 할 증인은 '몰리'라는 이름의 창녀(Sondra Locke 분)이다. 쇼클리는 그냥 몰리를 차에 태워서 피닉스시에 데리고 오면 되는 가벼운 임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몰리를 죽이려는 어떤 이들이 있다. 몰리가 고위 관료의 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몰리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한 여정에 나선 쇼클리. 과연 몰리는 재판정에서 무사히 증인 선서를 할 수 있을까? <br><br>&nbsp; 영화 'The Gautlet'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쳐 보여준다. 영화는 당시 그와 실제 연인 사이이기도 했던 산드라 로크와의 관계도 일정 부분 겹친다. 영화의 마지막, 죽음의 위협을 뚫고 쇼클리와 몰리는 피닉스시에 도착한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시가지 양쪽에 도열한 무장 경찰차들이다. 쇼클리가 운전하는 버스가 들어서자, 버스는 엄청난 총알 세례를 받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형벌에서 따온 것이다. 벌을 받는 사람이 양쪽으로 도열한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곤봉이나 채찍, 창과 같은 무기로 얻어맞는 형벌을 'Gauntlet'이라고 한다. <br><br>&nbsp; 나는 배우 이선균이 비극적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이 Gautlet과 같다고 생각했다. 유명 배우는 마약을 투약했다는 추문에 휩싸여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빛나던 배우는 초췌한 모습으로 수사 기관의 포토 라인 앞에 섰다. 거듭된 마약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음에도, 이선균에 대한 경찰의 조사는 집요하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온갖 소문과 대중의 비난, 수사 과정에서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배우는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br><br>&nbsp; 만약 이선균이 유명 배우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경찰은 그를 포토 라인에 세웠을까? 경찰 수사를 받는 동안 이선균은 포토 라인에 3번이나 섰다. 수사와 관련된 소식은 마치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떡밥처럼 언론에 제공되었다. 많은 사람에게 이선균은 마약 투약자이고, 유흥업소에 출입한 문란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배우가 그러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치는 자체가 엄청난 추락이었다. <br><br>&nbsp; 하지만 그 어떤 피의자도 피의 사실만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피의사실공표죄(被疑事實公表罪)'는 형법 126조에 따라 검찰·경찰 기타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사람이나 감독, 또는 보조하는 사람이 직무상 알게 된 피의사실을 기소(공판 청구) 전에 공표하는 죄이다.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는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수사 중이거나 입증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공표함으로써 부당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출처: ko.wikipedia.org). 피의사실을 공표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사실공표죄는 대중의 알 권리가 우선한다는 믿음에 의해 거의 사문법으로 전락했다. <br><br>&nbsp; 배우 이선균을 둘러싼 수사 기관의 행태는 대놓고 망신 주기와 조리돌림일 뿐이다. 결국 수치심과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 배우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견뎠어야지. 비슷한 시기에 마약 투약 혐의로 소환되어 조사받은 '지드래곤'은 멀쩡히 잘살고 있지 않냐고. <br><br>&nbsp;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한 사람에게 부당하게 가해진 심리적 압박감과 수사를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선균의 피의사실을 공개하는 일은 과연 공공의 이익에 부합했는가? 왜 그 시점에서 유명 배우와 인기 가수의 마약 혐의 사실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었을까? 어떤 정치적 사건과 논란으로부터 대중의 눈길을 돌리게 하기 위해 눈요깃감 기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레드 헤링(Red Herring). 이 영어 단어의 관용적 의미는 주요한 논점과 관심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장치를 뜻한다. 격변의 한국 정치사에서 레드 헤링은 선거철만 되면 터지곤 했던 북한과 간첩 관련 소식이었다.<br><br>&nbsp; 배우 이선균은 그렇게 레드 헤링이 되었다. 수사 기관은 그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인간적 존엄성은 막장 언론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발가벗겨졌고, 무참하게 뜯어먹혔다. 그는 강요된 Gauntlet을 치러내야만 했다. 그가 그 형벌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 Gautlet의 당사자는 죽음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재능있는 배우를 더는 볼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을 잃었고, 두 아이는 아버지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한 배우의 죽음은 지금 이 나라의 법과 상식이 망가졌음을 입증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배우 이선균의 명복을 빈다.&nbsp; <br><br>&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br>*영화 'The Gauntlet(1977)'리뷰<br>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gauntlet1977.html<br><br><br><br>]]></description></item><item><author>푸른별</author><category>Essay</category><title>병원에 다녀온 날</title><link>https://blog.aladin.co.kr/sirius7/15171736</link><pubDate>Wed, 27 Dec 2023 00: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sirius7/15171736</guid><description><![CDATA[&nbsp; &nbsp; "어휴, 진이 다 빠지네."<br><br>&nbsp; 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군. 병원이란 곳은 사람들의 기를 쏙 빼가는 곳인가 보다. 성탄절 다음 날의 종합병원 대기실은 북새통 같다. 나의 진료 예약 시간은 오전 11시 50분. 나는 11시 20분에 도착해서 내가 진료받는 과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br><br>&nbsp; 진이 빠진다고 혼잣말하던 여자는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나는 여자가 진료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목도리를 가져가라고 알려주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여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여자는 목도리를 주워 들고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옆에 남자가 앉으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들은 어떤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고독사한 사람인 모양이다. 남자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발견되었다는 시신의 모습을 흉내 낸다. 양쪽 팔을 개구리처럼 발딱 들어보인다. 참으로 생경스러운 광경이었다. 대기실이 혼잡해서 남자의 이야기가 더는 나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nbsp; <br><br>&nbsp;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체온계를 귀에다 대고 체온을 측정한다. 내 주치의의 진료실에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간호사는 저 할아버지 다음이 내 차례라고 알려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전동 휠체어에 계속 앉아있었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한데, 어떻게 혼자서 병원에 온 것일까? 그 영감님은 진료실에서 좀 오래 있었다. 노인 양반이 이야기하다 보면 좀 길어질 수도 있지.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짜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치의 선생은 환자들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저 할아버지에게 싫은 티를 냈을까? 마침내 할아버지 환자가 나왔다. 간호사는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 가야 한다고 설명을 했다. 영감님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간호사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나는 보호자 없이 병원에 온 저 할아버지를 보며 뭔가 짠한 생각이 들었다. <br><br>&nbsp; 한 달분씩 타던 약을, 이번에는 두 달분을 처방받았다. 병원에 가는 것은 매번 싫고 귀찮다. 여자의 말대로 병원에 갔다 오면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력이 강한 사람들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병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며칠만 있어도 골병이 들 것 같다. 올해는 이래저래 몸이 아파서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했다. 병은 쉽게 낫질 않는다. 아마도 내년에도 이렇게 병원을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br><br>&nbsp; 나는 앞으로 내가 아파서 힘들게 지내게 될 날들과, 지출해야 할 병원비에 대해 가늠해 본다. 누군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주거 환경은 큰 병원이 근처에 있는 곳이라고. 병원만 있어서는 안 된다. 병원에 갈 수 있는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종합 병원급의 대형 병원이 근처에 있고, 거기에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 그런 곳은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 결국 노년에 겪게 될 병고의 문제는, 삶의 많은 문제의 해법이 그러하듯 '돈'으로 귀결된다. 아프지 말아야지. 내년에는 좀 안 아팠으면 좋겠다. 늙어감과 병에 대한 우울한 상상을 더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진이 빠진 마음이 덜그럭거리며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nbsp;&nbsp;&nbsp; <br><br><br>]]></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