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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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몇년 전에 길을 가다 우연히 박완서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그렇게 만나게 되다니, 들뜬 마음에 몇마디 말을 붙여보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그다지 내켜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반듯하고 다소 차가워 보이는 그 때의 짧은 인상은 이후 선생의 글을 대할 때마다 중첩되어서 읽히곤 했다.

  "친절한 복희씨"는 읽히는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이지만, 작가와 나이듦의 함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작가도 나이가 들면 글 쓰는 것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 우선 작업량에 있어서 그렇고, 주제의식이나 깊이에 있어서도 이전에 자신이 고수해왔던 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어렵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친절한 복희씨"는 선생의 펜촉이 이제는 세월과 함께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나이듦에 따른 원숙함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선생의 첫 작품인 "나목"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소 성글고 거친 부분이 있어 보이는 그 소설이 참으로 반갑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선생의 설레임과 두려움,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렇게 선생은 작가가 되었다. "친절한 복희씨"는 오래전 선생이 내디뎠던 작가로서의 발걸음을 다시한번 돌이켜보게 만든다. 여전히 선생의 필력은 빛나고 있지만, 예전의 날카롭고 생생한 문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작년에 나온 선생의 전집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둔 때문도 있지만, 아껴가면서 조금씩 읽고 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선생을 우연처럼 만날 일이 있을까? 아마 만나게 되더라도 십몇년 전처럼 말을 걸지는 못할 것 같다. 그 때는 어렸을 때라 창피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었던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용기를 내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생의 글과 함께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친절한 복희씨"는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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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 제127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토가와 유자부로 지음, 이길진 옮김 / 열림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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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년간 일본 소설은 문학 출판 시장에서 인기있는 아이템이 된듯 하다. 그것은 서점에 가보면 아주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이 잘 나가는 일본 소설 때문에 한국 문학 책이 안팔린다는 자조섞인 푸념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이제는 익숙해진 아쿠타가와 상을 비롯해 일본의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손쉽게 접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 소설들이 수작이 될 수는 없을 터, 더러는 깊이와 알맹이 없는 소설들을 만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 실망은 기껏 시간을 들여 읽은 소설이 무슨 무슨 상 수상작의 타이틀을 갖고 있을 때 더 배가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 나오키 상 수상작들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은 별로 없었다. 적어도 "살다"를 읽기 전까지는.

  책에 실린 세 편은 모두 시대소설이다. 배경과 등장인물은 모두 옛날 것이지만 거기에 담긴 주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녀간의 정, 명분과 실리 사이의 갈등, 인생에서의 선택과 후회에 대한 이 소설들은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자칫 휘청거릴 수 있는 이러한 무게있는 주제들을 간결하게 정돈된 문체로 풀어낸다. 

  세 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평온한 모래톱'이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을 사창가에 판 아버지가 딸에 대한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혈육지정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작가는 삶을 견딘다는 것의 고통과 쓸쓸함을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소개되고 있는 일본소설의 대부분은 가볍고 감각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살다"를 읽고서 조금은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다. 내 경우엔 그랬다.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 소설책을 덮으며, 일본에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다. 좋은 소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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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쥬코 - 프랑스 희곡선 1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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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위키 백과에서 로베르토 쥬코에 대해 찾아보니 이 인물의 간략한 전기가 나와 있었다. Succo 또는 Zucco로 불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이 연쇄 살인범은 1962년에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모를 칼로 찔러 죽였다. 같은 날 경찰 한명을 더 죽였는데 법정은 그가 정신이상이라는 이유로 10년 감호 선고를 내렸다.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던 그는 정치학 학위를 따기도 했다. 『로베르토 쥬코』에서 쥬코가 신사에게 자신을 학생으로 소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째 되던 해 탈옥을 한 쥬코는 유럽 일대를 떠돌며 강간과 납치, 살인과 같은 갖가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 1987년과 1988년에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고향에서 붙잡힌 그는 다시금 탈옥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감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는 AIDS에 걸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지하철에 나붙은 쥬코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희곡을 썼다고 했다. 왜 콜테스는 이 살인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콜테스는 쥬코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 보여주기만 할 뿐, 왜 그가 그런 살인을 저지르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콜테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쥬코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쥬코가 만나게 되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집안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소녀와 깊은 고독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귀부인 같은 인물은 모두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콜테스는 그들을 소녀, 귀부인, 신사, 형사와 같은 일반명사로 지칭한다. 이 극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로베르토 쥬코 뿐이다.

 

  콜테스가 보기에 스스럼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쥬코나 쥬코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마저도 죽여버리는 쥬코의 범죄는 혈육과도 단절된 마음의 무서운 심연을 엿보게 한다. 콜테스는 왜 쥬코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동성애자로서, 또 AIDS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느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외와 고독을 쥬코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콜테스는 자신이 느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연쇄 살인마라는 거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쥬코는, 또 쥬코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소통을 갈구하지만 그 시도들은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린다. 『로베르토 쥬코』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앞의 생에 대해 결국 혼자일 뿐이라는 뼈저린 진실을 보여준다.

  과연 작가와 그가 쓴 작품을 엄밀하게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할까? 콜테스의 경우엔 그것이 어렵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피가 날 정도로 파고 또 파내어 그것으로 작품을 써서 먹고 사는 존재이다. 나는 이 말이 잔인하지만 진실이라고 믿는다. 고통스러운 상처 하나 없이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이, 그는 바로 작가이다. 콜테스는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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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엄마
마샤노먼 지음 / 예니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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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 세퍼드의  『매장된 아이』와 마샤 노먼의 『잘자요 엄마』두 작품 모두 알라딘에서는 품절이군요.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감독이며 배우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는 한 토크쇼에서 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버리고 싶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은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1978년 샘 세퍼드가 발표한 『매장된 아이』와 1983년에 마샤 노먼이 쓴 『잘자요 엄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다. 두 작품은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문제와 위기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두 작품이 모두 퓰리처 상을 수상한 데에는 그 안에 미국 사회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미국의 가정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매장된 아이』에서는 뒤뜰에 묻혀있는 매장된 아이가 문제가 된다.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는 죽임을 당하고 땅 속에 묻히지만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서 고통을 주는 존재이다. 『잘자요 엄마』에서는 자살을 결심하는 한 여성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간질 발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시는 원하지 않은 결혼과 그로 인한 이혼, 아들의 비행, 홀로 남은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 두 작품은 모두 미국의 가정이 병들어 있고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곳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나온 가정의 모습이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위기라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샘 세퍼드는 그것을 서부라는 강력한 공간적 지형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서부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곳이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일구어낸 도시, 개척자들이 실현해낸 일확천금의 꿈, 가족과 종교로 강력하게 결합된 공동체, 이 모든 것이 서부 개척의 역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부의 모습 이면에는 미국이 감추고 싶어하는 학살과 차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디언 학살과 인종 차별과 같은 미국의 근원적 원죄가 마치 매장된 아이처럼 미국민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 『매장된 아이』를 단지 한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부라는 공간의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에 의해 머리를 다 깎여버린 아버지, 과거의 추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 정신을 놓아버린 큰 아들, 한쪽 다리를 잃은 작은 아들, 그런 가족 속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손자, 그들의 모습은 모두 병들어 있다. 매장된 아이가 있는 원죄의 대지가 키워낸 것은 기형적 가정이며, 그것은 샘 세퍼드가 바라본 미국의 가정이기도 하다.

  

  마샤 노먼은 세퍼드가 보여준 상징성과는 다른 측면에서 사실적인 희곡의 언어로 미국의 가정을 그려낸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가 어릴 적부터 앓고 있는 질병인 간질은 벗어나기 어려운 천형(天刑)처럼 묘사된다. 간질 치료약조차 제시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제시의 간질은 제시가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데 바로 그 병 때문에 제시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제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온전한 통제력을 가지려는 시도가 된다. 그 무엇도 제시의 자살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가정은 치유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의 모습은 미국의 가정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병들고 고통받는 개인에게 가정이 더 이상 위안과 사랑을 주는 삶의 근거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혼율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 성문제, 빈부 격차로 인한 하층계급 가정의 붕괴와 같은 현상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는 총으로 자살을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총기 소지문제와도 일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가정은 그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 동력이 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잘자요 엄마』는 치밀한 극적 구성과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윤리적인 딜레마는 우리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 자살을 한 개인, 또는 가정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가? 사회는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마샤 노먼은 미국 사회를 향해 마치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샘 세퍼드와 마샤 노먼은 『매장된 아이』와 『잘자요 엄마』를 통해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미국 가정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과연 위기에 처한 미국의 가정을 구해낼 방법은 있는가? 작가는 침묵한다. 답은 찾는 이들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란 그렇게 답을 찾는 이들에게 한 자락 빛을 던져주는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세퍼드와 노먼은 그러한 작가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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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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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 전집은 알라딘에서 볼 수가 없군요. 핀터의 전집만 있길래 그것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인베이젼 Invasion〉은 원작의 세 번째 리메이크 작이었다. 1957년에 나왔던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계의 힘이 보여주는 공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도시의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며 자신들과 다른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감정을 가진 존재인가’하는 것이다.

  

  베케트와 핀터가 〈게임의 종말〉, 〈덤 웨이터〉를 통해 보여주는 현대인의 초상은 어떤 면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신체강탈자들은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생각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빼앗아 가버린다. 〈게임의 종말〉의 함과 클로브, 〈덤 웨이터〉의 구스와 벤은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브는 함의 뒤치다꺼리와 무의미한 행위로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구스와 벤은 살인청부업을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여 해내고 있다. 왜 그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발표된 년도가 같다. 1957년이다. 전후 깊게 드리워진 상처의 그림자를 이 두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학살극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치열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의 분위기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베케트와 핀터가 자신들의 시대와 호흡하며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문제적 작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임의 종말〉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부상당한 함이나 〈덤 웨이터〉의 도입부에서 나온 늙은 노인의 죽음과 어린아이의 고양이 살해 기사는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 폭력적 현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보여준다. 

  베케트와 핀터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여주는 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두 작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구원을 제시하는 대신에 파국의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클로브는 함의 위협에 떠나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소극(笑劇)이 반복되는 무대(삶)에 남는다. 구스는 자신에게 끊임없는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인물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반항을 선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 베케트와 핀터가 보여주는 이러한 결말은 그들이 바라본 현대세계가 얼마나 우울하고,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곳인지를 증명한다.

 

  〈덤 웨이터〉의 구스는 외친다. “왜,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야.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게임을 그만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하나 말해주지 않는다. 핀터는 게임에서 패배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인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독자와 관객에게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누구도 그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코 그 누구와도 진정한 감정의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모두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하게 된 시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이다. 두 작가는 그 황량하고 슬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분열증적인 언어의 희곡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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