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케이블 TV


새벽 2시 반, 잠이 오질 않아서 케이블 TV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 데가
있나 열심히 리모컨을 눌러본다 하지만 그런 채널은 없다
성우는 기깔나는 목소리로 열심히 싸구려 물건을 선전한다
저런 걸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군
그 성우는 다음 채널에서 또 다른 물건을 팔고 있다
젊은 남자 가수는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트로트를 부른다
귀엽게 보이려는 손짓은 어색한 웃음을 터지게 만든다
자동차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나온다
열심히 배우고 졸업해서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 돈 벌어야지 쓸데없이 대학 가서 뭐하니

어떤 할머니는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응급실에 누워있다
보기만 해도 심란해서 얼른 채널을 돌린다
요새 새로 방영되는 미니 시리즈가 나온다
젊은 배우들의 얼굴은 죄다 낯설다 내가 모르는 애들
오래전 구닥다리 사극도 나온다 구질구질한 화질 속
중견 배우들은 이제 은퇴해서 시골에 집을 짓고 산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에 만들어진 사극이구먼
어떤 채널에서는 나를 가르쳤던 교수가 한국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저 양반은 별로 늙질 않았구나
나는 미친듯이 흰머리가 나는데

그 많은 채널 가운데 어쩜 그리 볼 게 없을까
TV를 끄고 창문으로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본다
불 꺼진 거실에 경광등처럼 번득이는 TV 화면
저 사람은 늘 새벽 4시까지 저렇게 시간을 보낸다
늙은 사람이겠지 내일 돈 벌러 나갈 젊은이는 자고 있다
정신 나간 매미가 짧게 우는 소리를 낸다
얘야, 지금은 잘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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