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에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이 복순이였구요. 그런데 안보이네요."
  "아, 복순이요. 작년 여름 무렵이었나? 밥을 줘도 안먹고 잠만 자길래 좀 이상하다 했었지요. 그러더니 시름시름 앓더군요. 결국 가을이 오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복순이가 토마 형제를 잘 따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랬죠. 우리들끼리는 토마 형제가 떠나고 나서 개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도 하고. 복순이도 참 불쌍하지요. 나름 사연도 있고."
  "사연이요?"
  "버려진 개였으니까요. 녀석을 발견한 건 수도원 문 앞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근 마을의 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을 어르신에게 혹시 개를 잃어버린 집이 있냐고 물었죠. 근데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떠돌이 개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하더군요. 마을 근처에 지방 국도가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종종 개를 내버리고 간다 들었습니다. 아마 그런 개들 가운데 하나일 거라고... 하는 수 없이 우리가 복순이를 거두기로 했지요."

  나는 외진 산골의 수도원에 왜 저리 큰 개가 목줄에 묶여서 지내나 궁금했었다. 그 의문은 5년 뒤에야 풀렸다. 토마 형제가 복순이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안좋겠구나 싶은 생각도 얼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르코 수사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복순이는 토마 형제와 정이 많이 들었을 거에요. 내 생각에는... 그 정이라는 거, 애착이 복순이를 죽게 만들었다고 봐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건 참 좋은 겁니다. 하지만 수도자에게는 그 좋은 가치가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일년에 한 번, 회원들의 방을 다 바꾸어 이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물건도 최소한의 개인 용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놓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지요. 어느 공간, 물건에 익숙해지면 정이 듭니다. 그 안온함은 긴장을 풀게 만들고요. 수도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어야 해요. 칼날 위를 걷듯 늘 자신의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에게 마르코 수사의 말은 토마 형제를 에둘러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토마 형제가 복순이한테 너무 잘 대해주었고, 그 길들임 때문에 토마 형제가 떠난 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개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수도 생활의 본질이란 어쩌면 인간적인 애정에 대한 결별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독함, 모질음과도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 기억 속 토마 형제는 분명 그러한 수도자의 모습에는 부합되지 않았다.

  마르코 수사님과 나는 마침내 정원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다양한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피어있었다. 분홍색의 작은 고깔이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초롱꽃, 자줏빛 꽃잎의 작약, 흰색의 철쭉, 한 무더기를 이룬 노란색의 금계국, 주황색의 큰나리꽃, 그리고 가장 화려한 붉은 장미가 정원의 울타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정원의 중앙에는 작은 성모상이 있었다. 마르코 수사님은 그 성모상 앞에서 잠시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우리 수도회의 창립자 신부님께서는 수도회를 성모님께 봉헌하셨습니다. 모든 회원들은 첫 서원 때 자신의 영세명 앞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새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제 이름도 마리아 마르코가 되었지요. 어쩔 때는 서로를 마리아 수사님이라고 불러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마르코 수사님은 웃음을 보였다. 나는 언젠가 토마 형제를 만나면 '마리아 토마 수사님'으로 불러주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수사님과 함께 찬찬히 정원을 둘러보던 나는 정원 끝에서 작은 팻말을 발견했다. 그 팻말에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이름과 함께 붉은색 화살표가 위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억의 공간이라... 이 팻말은 어떤 곳을 가리키는 건가요?"
  "수도회의 묘지입니다. 먼저 주님 곁으로 떠난 수도회 회원들이 잠든 곳이지요."

  내가 5년 전, 수도원에 머물렀을 때에는 수도원 안에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원도 산골의 매서운 추위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만 보냈던 기억이 났다. 마르코 수사님은 나에게 그곳에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도원의 묘지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졌다. 한편으로 그것은 종교학 전공자로서의 학문적 관심이기도 했다. 잘 정돈된 작은 오솔길을 한 10여분 정도 걸었을까? 얕은 둔덕이 층을 이루며 자리한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도회가 세워진 후, 스물 일곱 분의 수사님들이 영면하셨습니다."

  묘지의 제일 상단층에서부터 아랫부분은 가장 자리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 계단을 따라 위에까지 가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화창한 5월의 봄날인데도 묘지라는 장소가 주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랫부분을 살펴보기로 했다. 윗부분의 무덤에는 잔디가 보기좋게 잘 자라고 있었지만, 아래쪽은 최근에 만들어진 곳이라 잔디 보다는 봉분의 붉은 흙이 도드라져 보였다. 특이하게도 초록색 천테이프로 네 귀퉁이를 둘러 표시를 해둔 곳이 있었다.

  "여기는 왜 이런 표시가 되어있나요?"
  "베드로 수사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수사님은 부산으로 떠나기 전에 이곳을 둘러보고 가셨어요."

  나는 자신의 삶이 다한 후에 자신이 묻히게 될 곳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없이 쓸쓸한 마음으로 그 앞에 서있던 나는 바로 옆 묘소의 비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이의 이름이 있었다.

  '변성식 마리아 토마, 주님의 착한 종이 여기에 잠들다'

  도대체 왜, 토마 형제의 이름이 여기에 있는가? 마르코 수사님은 토마 형제가 페루로 떠났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마르코 수사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사님은 마치 돌기둥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굳은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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