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eumart/110073715340 

 

"이음책방을 마감하며 인사드립니다."
위에 링크한 글은 이음책방 폐점을 앞두고 한상준 대표가 밝힌 담담한 소회의 글이다.

대학로의 이음책방이 올해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정말 슬픈 소식이다.  

서울에서, 아니 한국에서, 몇 군데 남지 않은 인문학 전문서점이었는데... 
연극이나 무용 작업 때문에 대학로를 방문할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방문했던 서점. 

지금껏 재정난 때문에 수차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지만, 
대학로의 여러 배우들과 지인들이 서점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곳. 

그런데 이제 한상준 대표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드셨나 보다. 
어쨌든 정말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음책방의 이 슬픈 소식과 더불어 생각이 미치는 것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책방인 소피아 서점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하는 물음인데, 
이 50년 넘은 국내유일의 독일 문학/철학 전문서점이 문을 닫게 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상상조차도 하기 싫다. 

내 자신도 어느덧 소피아 서점을 드나든지 10년이 훨씬 넘었고,  
매니저인 백환규 선생님이 지금 거의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시니... 
특히 90년대 후반부터는 독일의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급감하면서,
소피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수도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지난 달이었던가, 소피아 서점을 가장 최근에 방문했을 때 백환규 선생이 들려주신 재미있는 이야기.
누군가가 내 제자라고 하면서 소피아 서점을 방문해서 Marx의 Das Kapital 1권을 사갔다는 것이다.
그가 누굴까?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제자를 둔 적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이 궁금증이 기원하는 곳은,
어떤 '용의자'를 찾는 의혹의 마음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 대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다.

 
한 인문학 서점의 폐점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서, 이음책방이 폐점되지 않기를,
그리고, 소피아 서점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늘따라 유독 간절해진다.



ㅡ 襤魂, 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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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1-1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읽는데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는 모 대형서점이 들어서면서 서점이 즐비해 있던 시내 중심가의 셔터문들이 거의 내려져 있습니다. 비단 서점뿐만이 아니라 다른 상가들까지 타격을 입었다 할 수도 있겠지요. 구조적인 문제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는 의견들도 많겠지만, 요즈음은 저 자신의 소비행태를 많이 반성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입니다만. 문화가 숨쉬는 거리를 걷고 싶은데 그 공간들까지 절멸되는 중인거죠... 마음이 많이 쓸쓸해지는 오전입니다.

람혼 2009-11-14 07:24   좋아요 0 | URL
최근 알라디너들 사이에서도 알라딘의 비정규직 문제로 드러난 '구조적'인 문제가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텐데요, 알라딘'조차도' 비정규직 문제에서 다른 기업들과 큰 차이점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온라인 서점들의 장점도 많겠지만, 그에 비해 다양한 특성을 지닌 전문 서점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음아트는 단순한 인문학 서점이 아니라 연극, 전시회, 낭독회, 작가와의 대담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지속해 왔다는 점에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게슴츠레 2009-11-1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웹서점 이용을 줄이던가 끊고 이음책방에 들락거리려 했는데 이거 정말 안타깝군요. 최근에 기획강좌도 열리길래 어느 정도 운영이 지속되는 줄 알았건만...

람혼 2009-11-14 07:24   좋아요 0 | URL
그 마음 그대로 앞으로도 많이 방문해주시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또 모르잖아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다시 서점의 운영이 재개될 수 있을지도요.^^

푸하 2009-11-1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이제라도 가야겠군요.

람혼 2009-11-14 07:25   좋아요 0 | URL
네, 지금도 다 함께 시간 나는 대로 열심히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선 독문학이 점점 스러져가나 봅니다.편견을 떨치고 읽으면 독일 소설도 좋은 게 많은데...19세기 초에서 20세기 초의 작품들...오스트리아 것도 좋구...

람혼 2009-11-14 20:22   좋아요 0 | URL
어떤 편견이 있는 걸까요? 철저하게 '국민국가/언어'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저는 '독일어' 소설들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훌륭한 소설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쪽입니다만...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대로 오스트리아 소설도 좋죠. 오스트리아 작가 중에서 저는 Thomas Bernhard나 Ingeborg Bachmann의 소설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독일 소설 중의 하나는 Daniel Glattauer의 <세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였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희곡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 국내에서 독문학의 '사양(斜陽)'이 일반적인 현상 또는 확정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몇몇 징후들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4 20:40   좋아요 0 | URL
독일소설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그런 편견이죠.저는 좀 옛날 작품을 좋아해요.하우프트만<소아나의 이교도>는 산골짜기의 묘한 야성미가 좋았구요,제가 산골이야기를 좋아해서요.파울 하이제도 좋아해요.역시 산골 이야기가 있지요.좀 더 옛날 것으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중단편도 재밌구요.오스트리아 소설은 역시 중단편 작가들 작품인데,아르투어 슈니츨러,요셉 로트 것이 읽을 만하더라구요.독일 소설이 읽는 재미도 있던데...

제 취향이 좀 구닥다리죠? 새벽 세시...가 요즘 화제던데,희곡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니 관심이 갑니다.

전에 독일 문화원의 어느 독일인이 한국대학에서 독문학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데 대해 한말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외국문화 수용에도 좀 다양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람혼 2009-11-14 22:41   좋아요 0 | URL
저도 클라이스트 좋아합니다.^^ 독일어 소설로는 역시 카프카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겠죠. '구닥다리 취향'으로 말하자면 아마 저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대로 외국문화 수용에도 다양성이 있어야 할 텐데, 그 다양성이 이 '한국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허용'될 수 있는 건지 때때로 질문해보게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5 17:04   좋아요 0 | URL
독일어권에는 소설가들이 희곡도 쓰는 전통이 있는데 아직 그런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카프카가 <미하일 콜하스>를 좋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독일단편선>(을유문화사)의 역자해설에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장편<늦여름>이 니체의 애독서였다고 나와있는데 혹시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시겠어요?

람혼 2009-11-15 17:16   좋아요 0 | URL
니체 스스로가 유고에서 슈티프터의 <늦여름>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습니다.
'괴테적인 것'과 <파우스트>에 대해 쓰고 있는 중간에 잠깐 슈티프터의 이름이 등장하는데요, 해당부분의 원문을 옮겨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ch habe später, um dieses Begriffs 'Goethe' halber, den 'Nachsommer' Adalbert Stifters mit tiefer Gewogenheit in mich aufgenommen: im Grunde das einzige deutsche Buch nach Goethe, das für mich Zauber hat."
ㅡ Nietzsche, Nachgelassene Fragmente, Oktober-November 1888, 24[10].

"나는 나중에, 이러한 '괴테'라는 개념 덕분에, 깊은 호의를 품고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괴테 이후 내가 매력을 느끼는 유일한 책."

국역본의 번역으로는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 21권의 549쪽을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6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확인하고 싶었는데 원문까지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베껴서 독-한사전 찾아가며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람혼 2009-11-16 18:39   좋아요 0 | URL
역시 노이에자이트님은 '독한' 자세로 공부에 임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실 제가 정말 본받고 싶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7 17:59   좋아요 0 | URL
모처럼 열심히 사전 찾으면서 공부했습니다.사실 독어는 문장이 길어지면 해석을 잘 못하는데 '깊은 매력(호감)' 등등의 단어를 알게 되어 좋네요.

람혼 2009-11-18 03:19   좋아요 0 | URL
Ich habe die 'Neue Zeit'...
mit tiefer Gewogenheit in mich aufgenommen.^^

노이에자이트 2009-11-18 14:44   좋아요 0 | URL
하하하...아무래도 제가 볼매라서....볼수록 매력! 감사합니다.


람혼 2009-11-19 04:14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은 역시 말 그대로 '볼매'! ^^
'오나전 깜놀'입니다! 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19 16:09   좋아요 0 | URL
하하하...인터넷 용어의 향연! 즐거워요.

람혼 2009-11-20 00:05   좋아요 0 | URL
저로서는 정말 잘 안 쓰는 용어들이긴 하지만요...^^;

조르바 2009-11-2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소피아 서점의 위치를 좀 여쭤봐도 될까요?^^

람혼 2009-11-24 17:10   좋아요 0 | URL
조르바님, 처음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요, 반갑습니다.^^

소피아 서점은 예전에는 충무로에 있었는데요, 지금은 충정로로 이사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서점인데, 최근에는 독문학 전공자들조차도 잘 모르는 곳이 되어서, 나이가 어린 저로서도 외람되나마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입에 담게 됩니다.

위치는 지하철 2, 5호선 충정로역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충정로역 8번 출구(5호선 개찰구에서 가깝습니다)로 나가셔서, 서대문 방면으로 대략 200 미터 정도 걷다 보면 왼편에 골든타워 빌딩이 있습니다.
소피아 서점은 그곳 13층에 위치해 있고요, 전화번호는 02-362-2036입니다.
먼저 전화를 거시면, 매니저 백환규 선생님이 멋진 목소리로 맞이해주실 겁니다.^^

조르바님과 좋은 책과의 만남을 기원합니다.^^

조르바 2009-11-2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근간 꼭 찾아가 보겠습니다.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네티즌이 아니라서, 이렇게 댓글을 다는 것도 참으로 오래만의 일입니다만,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람혼님의 글을 끽독하는 독자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람혼 2009-11-27 10:27   좋아요 0 | URL
네, 꼭 찾아가 보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두루 '끽독'해주신다니,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응원해주심에 큰 힘을 얻습니다. 자주 뵐게요~!

강아지풀 2009-12-30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자면 이것은 '어처구니'없은 일이다.

람혼 2009-12-31 15:05   좋아요 0 | URL
어이쿠, 누구신가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다행히 이음아트는 폐점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한상준 사장님은 서점 운영에서 물러나시는 게 좀 아쉽지만, 이음아트는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어제 이음아트 다녀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거나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괜히 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2010-01-16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6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 개새끼들의 면상을 똑똑히 기억해둬라

 

모두 아시다시피, 어제는 용산 참사에 관해 재판부의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첫 선고가 있었다.
재개발토건공화국 대한민국의 악마성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와중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되고 범죄집단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에게는 물론이지만, 이제 그들은 대한민국 사법부에게도,
절대 '국민'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간다고 할 때 과연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이나 남게 될지,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계산기'를 잘 두드려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섭섭했던지, 이에 질세라,
슬픔과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있을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오늘은 헌법재판소에서 우리 '국민'에게 큰 웃음 선사하는 한 건을 터뜨려 주셨는데,
미디어법 통과 위헌 청구 심판에 대한 결정문이 바로 그것.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절차의 위법성은 인정되나, 법안의 효력은 유효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금과옥조와도 같은 '시적(詩的) 역설'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헌재의 이 눈부신 시학(詩學) 앞에서 현대 한국문학의 시인들은 처절하고 철저하게 반성할지어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히트작을 뛰어넘는 시대의 명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이 극단적 '문학성'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근본적 물음 한 자락:
절차가 위법인데 어떻게 바로 그 위법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된 법안의 효력이 유효가 될 수 있을까?

국회 안에서 쟁의 중인 대상은
그 책임소속인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소위 헌재의 '점잖은' 소견이라는 것인데,
그럴 거면 헌법재판소라는 국가기관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헌재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당위성, 필요성에 대해 그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이후 성립된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정부의 기본적 체제를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그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 스스로, 권력의 '시녀'는커녕, 이젠 아예 권력의 '주구'가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으로써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명제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사법살인'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음을 느끼는 건, 나만의 공상이며 망상인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오늘> 기사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위조지폐는 분명한데 화폐는 맞다는 식"인 것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864

또한 나의 한 블로그 이웃 분께서 이러한 헌재의 결정에 관해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다:
http://bookgram.pe.kr/120093684973

정치적으로 부끄럽고 비겁한 판단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헌재는 이를 스스로 '순수하게 법리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고매하고 고상하며 '법치주의'에 충실했다고 강변한다.

법치(法治)가 법치(法痴)가 되었고 또한 법치(法恥)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제의 재보궐 선거에서 강원 강릉과 경남 양산의 '국민'들은
또 다시 한나라당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부디 '부자 되시길' 빌겠다.
수도권에서는 민주당의 승리라고들 말하지만,
현재 우리가 민주당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상황인 것도 아니다.

자, 이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이젠 사법부의 비겁함과 삼권분립의 정당성까지 생각해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생각과 사유의 재료는 '분에 넘치게' 차고 넘쳐나는 셈이다.
이토록 생생한 정치적 사유의 거리를 던져주는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에게
우리 '국민'들은 감사해야 하나? 그것도 세 배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레닌이 1901년에,
이보다 앞서 체르니솁스키가 1863년에,
이미 절실하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 우리는 이 똑같은 질문에 다시 새롭게 대답할 수 있을까?

 
ㅡ 襤魂, 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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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10-2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재 판결은 맞지만 정당성은 없는 판결이죠.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아주 과격한 판결이기도 하구요...

람혼 2009-10-29 22:31   좋아요 0 | URL
역설적이지만,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어쩌면 참으로 '해체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셨듯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를 그 스스로 부정하는 지극히 해체론적 결정들을 이렇게 쏟아놓으니 말입니다. 성문법의 '기원' 자체를 해체하는 관습헌법적 결정도 그랬고, 이번에는 아예 국가기관으로서 자기 자신의 존립근거와 존재의의까지도 해체하는 '과격한 철학적 결단성'을 보여주고 있으니, 정말 용감한 판결이라 아니할 수 없겠죠. 그런데 뭐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판결문은 '법리적'인데, 판사들은 '병리적'이로군요.

로쟈 2009-10-29 22:40   좋아요 0 | URL
아, 마지막 멘트에 웃었습니다.^^

람혼 2009-10-29 22:44   좋아요 0 | URL
하지만 저 '병리적' 판사들의 '법리적' 개그에는 결코 비할 바가 못 되지요! ^^

푸른바다 2009-10-30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 파괴 현상이라고 해야할까요?^^ 권력층에 있는 지식인(?)들의 사고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문득 어떤 동영상이 공개됐을 때 '주어'가 빠졌기에 설립 주체라는 증거가 아니라는 모 의원의 개그가 떠오르네요. 병리적 초현실의 첨단을 달리는 대한민국^^ 우리는 근대화를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는데 역설적으로 그 병폐의 극단을 선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람혼 2009-10-31 02:14   좋아요 0 | URL
헌법재판소라는 '이익집단'은ㅡ헌재가 이제 더 이상 '국가기관'이 아님은 이번에 명백해졌다고 봅니다ㅡ이번 판결을 통해 '한글'을 우롱하고 '문법'을 파괴했으며 또한 그 스스로 '법치'의 의미를 가장 성공적으로 퇴색시켰죠.

이러한 초법적이고 위법적인 판결이 증명하는 것은 헌법재판소가 얼마나 법에 대해 '악의적으로 무지'한가 하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러한 후안무치한 행위에 대해 어떤 '법적' 책임이 따르는지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드팀전 2009-10-3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V로 보다가 다들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처음에 절차상 위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만 해도 헌재앞에 있던 언론노조 분들이 희색이 만연했었는데..나중에 침통한 표정으로 DMB모니터보고 계시더군요.
민주화의 척도를 이야기하다보면 흔히 87년 이후 절차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식으로 말하지요.그런데 이번 헌재의 판결을 보면 절차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니 손바닥만큼 이룬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스스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주요사안에서 대중들이 갖는 헌재 판결의 절대성에 대해 어떤 식의 견제가 가능한지 실로 고민스럽군요.

람혼 2009-10-31 02:15   좋아요 0 | URL
네, 절차상 위법이라는 결정에 '대한민국 만세'를 연창하던 언론노조 분들이 나중에 정말 머쓱해졌고 보고 있는 저도 정말 '뻘쭘함'을 넘어 넋을 상실할 지경이었죠. 한 마디로 기가 차도록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 정도로 '법리' 개념을 상실한 헌법재판소가 사법부의 최고 기관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근대국가/민주주의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헌재 판결의 '절대성'과 저들의 정치적 '악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조치가 없다는 것이 정말 문제입니다.

정치적으로 불순한 일개 모리배에 불과한 헌재 재판관들의 정신감정을 의뢰할 수 있는 '초법적'인 치료기관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그런 의미에서 '[헌]법학'보다는 '[정신]의학'에 더 기대고 싶은 요즘입니다.
 

 

▷ 극단 풍경 <마라, 사드>의 공연 포스터: 2009년 10월 8~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i) 연극 <마라, 사드>가 엊그제 10월 8일 처음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10월 18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쉬는 날 없이 계속된다. 이 연극 역시 내가 음악을 작곡한 작품인데, 악단이 실황 연주를 통해 직접 연극 안에 참여하는, 국내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형태의 작품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의 全 멤버가 2006년에 공연했던 새러 케인(Sarah Kane)의 연극 <새벽 4시 48분>(원제: <Psychosis 4. 48>) 이후로, 밴드가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연극 공연은 내게도 실로 오랜만이다. 이번에 나는 직접 연주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조민기, 허철주, 김윤호라는 어리지만 걸출한 세 명의 연주자들을 만난 것은 이번 공연이 내게 선사해 준 소중한 인연들 중 하나이다. 이들 연주자들이 없었다면 내 음악은 지금의 이 형태로 '실현(實現)/실연(實演)'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덕분에 내 음악이 더욱 풍성해졌다. 이 연주자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관극의 재미를 더욱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는 '관전 포인트'임을 지나가는 길에 꼭 언급해둬야 할 터, 또한 올해 중순에 있었던 박근형 연출의 <마라, 사드>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 두 연극의 연출과 음악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일 것이라는 점을 첨언해둔다. 

 

▷ 사드와 마라: 배우 남명렬 선생(左)과 홍원기 선생(右)[사진: 정형우].

ii) 개인적으로 연극 음악 작업을 지금까지 대략 7년 동안 해오면서 언제나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멋진 배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이다. 이번 연극을 통해 얻게 된 소중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배우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과의 만남을 말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을 통해 나는 남명렬 선생의 '사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연극에 임하는 그의 자세와 예술에 대한 태도를 통해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하여 이 자리를 빌려 또한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 두 배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밝혀둔다.

iii) 덧붙여 한 마디 첨언해둔다. 이 연극의 드라마투르그(혹은 드라마터그)는 팸플릿에 수록한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연출가 박정희는 프로덕션을 정식으로 구성하기 이전에, 더욱 분명히 말하자면,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필자를 드라마터그로 섭외하였다. 덕분에 필자는 공연의 시의성과 의미를 탐구하고,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드라마투르그'와 영어 '드라마터그'의 차이점을 각주를 통해 세밀히 밝히면서까지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대한 장문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이 '드라마터그'의 '실제' 작업 안에서, 이른바 그가 쓰고 있는 문자 그대로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실체가 정작 목격되지 않고 실종되어 있다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 설정이 동요하고, 작품의 '시의성'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부재하며, '연극'이 어떤 정치성 위에 있으며 또한 어떤 정치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되어 있는 채로, 무언가에 대해 '아니다'라는 정해진 답변만을 남발하고 권위만을 세우는 '나이브한' 태도는, 그 자체로 비겁하고 치졸하다. 곁가지를 치자면, '드라마투르그'는 한국의 연극 판에서 너무도 자주 '드라마트루그'라고 잘못 표기되곤 하는데, 이러한 오기(誤記/傲氣)에는 '트루(true)'에 대한 어떤 종류의 뒤틀린 '강박관념'이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진정성이란 단순히 확고한 '이론'에서만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러므로 이론 자체가 '확고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더 더욱 자명하지 않은가). 연극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무대 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와 배우의 관계', '배우와 연출의 관계'이듯이,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기반이 되었을 때에만 궁극적으로 '연극과 관객의 관계'가 설정되고 결정되듯이. 

iv) 이 연극은 말 그대로 배우와 연주자들의 힘이 전적으로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과 연주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른 작품보다 배로 힘든 연습의 과정이었을 텐데, 여러 가지 어려움들 속에서도 좋은 작품을 이루어준 이들에게, 그 감사의 인사를 소중히 담아 전하는 마음으로, 이하에서는 연극 팸플릿에 수록한 작곡의 글을 옮겨놓는다. 더불어, 당연하게도, 관극(觀劇)과 일람(一覽)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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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 사드>의 극작가, 페터 바이스(Peter Weiss)의 모습.

 
혼돈 혹은 축제: 말하기와 노래하기 사이에서
 

최 정 우 (작곡/음악감독)

1) '사드'와 '연극'의 만남? 『소돔 120일』,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행』, 『규방철학』 등 사드(Sade)의 외설스럽고 잔혹한 소설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혹은 떠도는 풍설로만 사드의 '악명'에만 익숙한 분들에게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어쩌면 지극히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는 사드가 말년에 샤랑통(Charenton) 병원에 수용되어 환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사드가 『옥스티에른』, 『에르네스틴』 등 스무 편에 달하는 연극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포베르(Pauvert) 출판사의 전집판을 기준으로 할 때도 그 분량은 책 세 권에 달합니다). 

 

▷ 하나의 '익숙한' 시선: 다비드(David) 作, <마라(Marat)의 죽음>.

2) 바이스(Weiss)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작가는 사드가 마라에 대한 희곡을 쓰고 그것을 환자들과 함께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다는 역사적 상상, 역사적 가정을 합니다. 이러한 상상과 가정 안에서 서로 대면하고 논쟁하는 마라와 사드,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인간군상이 직조하는 하나의 '총체성'은 극중극의 형태로 우리에게 '혁명'의 자리와 '정치'의 자리를 새삼 되묻습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3: théâtre I, Paris: Pauvert, 1991.

3) 작곡의 측면에서는 이 '음악극'이 결코 '뮤지컬'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들은 노래할 때 노래만 하고 말할 때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들은 노래하듯 말하며 또한 말하듯이 노래합니다. 이러한 '말하기-노래하기'의 형식이 오페라의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다른 점은 사실 이 작품이 '연극'이며 또한 '연극'일 수밖에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대하면서 작곡자로서 품었던 기본적인 생각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극중극의 형태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상성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비정상성의 카오스적 에너지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는 결코 말과 노래의 엄밀한 구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또한 '연극 안에서 노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노래 사이의 모호한 구분은 어쩌면 제가 음악적으로 이 작품의 내재적 혼돈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하나의 '상동적' 전략일 것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4: théâtre II, Paris: Pauvert, 1991.
 
4) 이 작품의 작곡은 기본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어법에 기초하여 진행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극 안에서 그 장르가 형성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일 것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 작품이 지닌 지독한 '혼돈'의 성격과 동시에 또한 흥겨운 '축제'의 측면도 포착할 수 있었다면 제 의도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극중에서 사드는 루이 15세 시해미수범 다미엥(Damiens)에 관해 말하는데(이 이야기는 사실 푸코(Foucault)가 『감시와 처벌』의 초입에서 신체형의 '화려함'에 관련해 들고 있는 인상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 처형의 잔혹함은 처형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지켜보는 군중의 들뜬 열기와 겹쳐져 역설적으로 하나의 '희생제의', 하나의 '축제'가 되기도 합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수천수만 명의 죽음과 '화려한' 신체형 속에서 드러나는 한 개인의 '아름다운' 죽음 사이의 간극, 아마도 마라와 사드 사이에는 저 죽음의 숫자와 형태 사이에 놓인 간극이, 그러나 또한 단지 숫자와 형태라는 기술적 술어로만 치환되고 소급될 수 없는 그런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연극이 그런 '심연'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또한 동시에 그런 '축제'의 자리에 값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5: théâtre III, Paris: Pauvert, 1991.

5) 연극은 '연출의 연극'이며 특히 제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연극은 '배우의 연극'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여기서 새삼 환기하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기본적'인 이유는, 배우가 연극의 필수적 요소라는 기초적이고 소극적인 규정 때문이 아니라, 연극의 시작도 끝도 모두 배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배우에 의해서 구현된다는 가장 적극적이며 숭고하기까지 한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특히나 이 연극의 배우들에게 개인적으로 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제게 새삼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의 정치'는 어쩌면 가장 낡은 형태의 정치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또한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정치가 아닐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연극이 묻는 궁극적 질문은 바로 이것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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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생경한' 시선: 보드리(Baudry)가 그린 마라와 코르데(Corday)의 모습.

*) 덧붙여: 마라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단연코 다비드의 그림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런데 보드리의 그림은 그 장면의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보드리는 마치 카메라를 회전시키듯 다비드의 그림이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시선과 관점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마라의 '욕조'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드리의 그림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살해된 마라보다는 마라의 암살자, 곧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모습이다. 그녀 자신과 어떤 이들에게 코르데는 그 자체로 '유디트'의 현현이었을 것이다. 연극은 때때로 이러한 '관점의 [동시적] 이동'과 '시차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극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나이브한' 정치적 충정과 울분 혹은 무력감이나 좌절감을 통해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질문은 연출이ㅡ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ㅡ가장 치열하게 던져야 할 물음이며, 이 질문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연출에게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연극은 이 질문에 연극 그 자신으로써 답해야 하는가? 반드시 '대답할' 필요는 없다('장르' 자체와 그 장르가 빚어낸 어떤 '결과물'이 언제나 하나의 '대답'일 수는 없다). 모든 철학과 예술이 그러하듯, 연극에서도 또한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질문을 잘 던지는 것' 혹은 '질문 하나를 모든 관객이 소중하고도 고통스럽게 품게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연극적 실천'의 끝과 시작이 아니겠는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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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erial88 2009-11-23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한수 배우고 갑니다! 님의 글솜씨에 감격해서 실례지만 안면도 없는 제가 한 자 남기고 간다는~:D
역시 순수 문학분야 출신분들은 못 이기겠네요. (__)// 전공이신지 취미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졸렬한 글솜씨에 님께 머리가 숙여집니다...;

람혼 2009-11-24 17:00   좋아요 0 | URL
지나친 겸양에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처음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요, 무척 반갑습니다.
'출신'으로 따지자면 저는 '순수문학' 분야 출신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브룩이 했던 마라 사드를 봤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람혼 2010-04-27 03:07   좋아요 0 | URL
저는 Peter Brook의 <마라/사드>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YouTube에서 몇몇 부분들을 확인했을 뿐이죠. 부럽습니다.^^
희곡의 영역본은 읽어보았는데, 당시 공연 때 Brook이 썼던 음악의 악보들도 몇 장 함께 수록되어 있더군요.^^
 



▷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

*)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호에 실린 내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자윤 기자가 상당히 공을 들여 기사를 써주셔서, 일천하고 부족한 사람으로서 송구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햇수로 따지자면 올해로 연극과 무용 등 무대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해 온 지도 벌써 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렵고 힘든 작업도 있었고, 행복하고 신나는 작업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간 작곡했던 스무 작품이 넘는 무대음악들 모두가 내게는 참 소중한 기억이자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새삼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느슨해진 발걸음에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매게 된다. 10월에도 내가 음악을 작곡한 두 연극이 극장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새롭게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11일까지 유진 오닐(Eugene O'Neill) 작, 임영웅 연출의 <밤으로의 긴 여로>(손숙, 김명수, 김석훈 등 출연)가 '절찬 상연' 중이고, 또한 10월 8일부터는 페터 바이스(Peter Weiss) 원작의 '문제작' <마라, 사드>가 박정희의 연출로 아르코 예술극장(舊 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홍원기, 남명렬 등 출연). 두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대비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한 작품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내러티브에 충실한 '정극'의 형식이라면, 다른 한 작품은 일종의 파격과 비약을 겸비한 '음악극'의 형식이다. 또한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는 음악이 녹음의 형식으로 '재생'되지만, <마라, 사드>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실황으로 매일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 작곡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두 작품은 서로 그 음악적 스타일이 정반대다(<밤으로의 긴 여로>의 음악이 다분히 클래식적인 요소에 기반하여 작곡한 것이라면, <마라, 사드>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에 기반하여 작곡한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음악 '안'에서조차 "모호한 경계" 위에서 일종의 '줄타기'를 즐기고 있는 것인데, 이 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단어를 차용하자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은 또 없을 것 같다. 가을 하늘, 공활(空豁)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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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최정우
"연주자도 몸으로 리듬을 표현해요" 

 

1998년 스페인 음악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호주, 브라질, 인도, 그리스 및 동유럽, 아프리카, 아랍 지역 등 여러 문화권의 음악을 주제로 한국의 주요 안무가 및 작품을 소개해 우리 춤과의 융합을 시도해 온 <세계음악과 만나는 우리 춤>이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했다. 12년을 거쳐 올해 다다른 카리브해 음악과의 만남 중 지난 7월 22일 <아바나行 간이열차: 여섯을 위한 삼중주(Train for Havana: Trio for Six)> 이윤정 작품에서 음악 연주와 직접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 예사롭지 않은 밴드에 주목하게 된다. 무용수와 함께 등장해 움직임에 익숙하지 않은 세 명의 뮤지션들이 날것 그대로의 신선함을 보여주며 관객과 소통을 시도, 그들이 무용수가 아닌 음악가이기에 궁금함은 더욱 커졌다.

1970년대 다방을 연상시키는 눅눅한 나무 테이블과 거리낌 없는 분위기의 카페 공간에서 밴드의 리더인 그(최정우)와 편안함으로 마주하였다.

무용과 그와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술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객석을 조용히 메워왔던 그에게 무용이라는 장르는 연극처럼 언어적 텍스트(text)에 기반이 되어 있지 않기에 그것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좀 더 넓고 자유로운 음악적 영역을 표현할 수 있어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 후 정영두, 장은정, 이용인 등의 무용가들과 함께 음악작곡가로서 대면해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무용가와 작업을 함께 하면서 그는 '음악'을 소품과 같은 백그라운드가 아닌 공연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라이브 연주 자체가 주는 생동감과 연주자 각각의 움직임들 또한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작품에 스며든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그가 무용작품을 위해 작업한 음악들을 녹음이 아닌 대부분 현장에서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하며 무용수와 관객과 호흡하곤 했다.  

 

 

 

작품 <아바나行 간이열차: 여섯을 위한 삼중주>에서 음악과 퍼포밍

"리듬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연주자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음악이란 늘 무용수의 몸짓에 맞춰 '연주'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연주하는 동안 둘이 각자 다른 듀엣을 하고 이중주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동안에는 나도 무용수와 같은 작품을 함께 하는 퍼포머라고 생각하죠. 그런 점에서 무용 공연에서 음악작업은 어떠한 장르보다 매력적이고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작품과 음악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념이 얼마 전 그를 무대에서 악기뿐 아니라 몸으로 작품에 녹여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퍼포머로서 이전에 무대에 서 본 적은 없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고, 안무가/무용수(이윤정)와 친분관계가 있어 음악도 연습도 편안하고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작곡가.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 그의 표면적 활동 명칭은 홍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레나타 수이사이드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이다.

수이사이드?... 자살?... 레나타 자살? 자살을 동경하는 음악단체인가? 무서운 상상의 나래를 부풀이고 있는 기자를 이내 가라앉히는 말. '단지 어감이 갖는 이미지가 좋아서 선택했지 어떠한 영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들지는 않았다' 한다. 음악적 특성이 강한 밴드음악을 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하나의 장르를 편식하지 않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잡식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무대음악은 늘 예측불허예요. 작품과 상황의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풍성히 알아야 그려낼 수 있기에 평소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많이 접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기타와 가야금 등 여러 가지 악기가 내는 소리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악기들을 다뤄 왔었던 그는 '예술과 철학을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론뿐 아니라 실천의 경험을 통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의 평론가와 예술가라는 모호한 경계에 그를 서게 했다.  

 

 

 

월간 <한국연극>에 평론 기고하는 음악가

현재 그는 철학, 문학 평론 글을 월간 『한국연극』에 매달 연재하고 있으며, 그의 블로그에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무용, 영화 등 모든 장르에 대한 관람과 그 느낌에 대한 잔상과 후기들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글로 토해낸 자신의 비평 작업을 모두 묶어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리뷰에 그치는 평이 아닌 해당 작품이나 공연을 접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글을 통해 공감하고 편하게 읽어 내려 갈 수 있는 책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될 때 밴드의 앨범작업과 동시에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만들었던 무대음악들을 모두 모아 영화의 사운드트랙처럼 음반으로 제작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차후에는 어느 장르에 국한되어 있는 단체가 아닌 무대작품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들로 여러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의 작은 예술단체를 만들어 윌리엄 포사이드와 같이 소재와 영역의 폭을 확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도전하게 될 수많은 예술적 시도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 줌과 동시에 예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자(글), 미술작품, 음악, 영화, 퍼포먼스. 그가 흡수한 모든 장르의 예술적 분야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빚어지는 예술적 영역에 과히 '기대감'이란 설레임의 나무를 심어본다. '기대감'이란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카타르시스적인 선물이 아닐까...

ㅡ 최자윤 기자, 『춤과 사람들』 2009년 9월호,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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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1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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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2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현대 비평과 이론』, 2009년 봄/여름.

1) 『현대 비평과 이론』 2009년 봄/여름호에 기고했던 바타이유에 관한 글을 뒤늦게 이곳에 옮겨놓는다(아직 이곳에 채 옮겨놓지 못한 다른 많은 글들이 계속 쌓여만 가는 중이다...). 이 글은 올해 초ㅡ대학원이라는 곳에 적을 둔 지 거의 9년만에ㅡ'가까스로' 완성한 나의 석사논문(「바타이유의 '유물론'과 문학적 전복: 『마담 에드와르다』를 통해 본 부정성과 변증법의 의미」)을 계간지 원고에 적합한 분량으로 대폭 축약한 것인데, 전체 논문의 기본적인 대의는 모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은사(恩師) 오생근 선생님이 제안해주신 소중한 지면이었는데, 일천한 제자의 [마찬가지로] 일천한 석사논문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그 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2) 바타이유의 연구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불모지 또는 황무지에 가깝다는 게 소위 바타이유 '전공자'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한국에서 바타이유 전공자는 정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희귀종'이다). 돌이켜보면, 한창 대학 입시 준비로 바빴던 1995년에 바타이유를 처음으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푸코의 책이 나를 바타이유로 안내했다). 지금 다시 펼쳐보면 문제가 많은 번역본이지만, 그 당시 조한경 선생 번역의 『에로티즘』이 내게 안겨준 충격과 자극은 지금 회고해봐도 여전히 가슴이 뛰고 설렌다. 프랑스어는 전혀 모르던 시절, 고등학교 시절 내내 배운 독일어만 껴안고 있던 시절이었다. 푸코를 읽기 위해, 바타이유를 읽기 위해, 말하자면 책을 읽기 위해,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서야 프랑스어를 떠듬떠듬 배우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인연과 우연의 길들이 겹쳐져 나를 '바타이유 전공자'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으로서는 참 흥미롭고 신기할 뿐이다(현재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며 또 다른 '바타이유 전공자'가 되는 길을 가고 있는 한 후배와의 만남 또한 그런 '인연'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 누구에게든 자신의 '전공'과 만나는 일은 어떤 종류의 '운명'을 수반하는 것 같다(이 '전공'이란 반드시 대학에서의 전공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전공'이 자신의 현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쨌든 그 '운명'은 자신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고 있을 것이므로. 바타이유의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나와 '영혼이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혔었다. 그것이 완벽한 무지에서 나온 오해였는지, 아니면 간교한 예지에서 나온 착각이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사후적이고 후행적으로 냉철히 판단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그러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지금까지의 나를 추동해 온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이 길은 다시 어디로 이어질까? 올해 초에 논문을 완성하면서 품었던, 너무나 진부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절실한 질문이었다. 무언가가 일단락되었다,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다는 것은, 또한 다른 길들을 예고하고 예감하고 있는 것일 텐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무엇이 될지도 모르므로, 여전히 짜릿하고 위험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당분간 이 위험을 즐기게 될 것이다. 피해갈 수 없다면 즐길 것이 아니라, 이 피해갈 수 없음 자체를 즐길 것.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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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1년 앞두고, 1961년의 바타이유.
 


바타이유의 '유물론'과 문학적 전복
—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타이유의 '문학적 철학'과 '이질성'의 글쓰기


최 정 우

 
 


1. '사실'의 질문으로부터 — 바타이유에게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문학과 철학을 살펴보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우리는 '사실'에 관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바타이유의 유물론(matérialisme)이란 무엇인가? 이 작은 글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試論)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 이전에 먼저 되물어야만 할 물음이 있다. 그것은 곧, 바타이유에게 과연 '유물론'이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유물론과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가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생각할 때 바타이유의 문학과 사상이 여타의 유물론적 철학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체험(expérience intérieure)'을 이야기하고 '희생'과 '과잉'의 문제를 논하며 '저주의 몫(part maudite)'과 에로티즘(érotisme)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침잠하는 성(聖)과 성(性)의 사상가 바타이유에게, 과연 유물론이라는 주제는 무엇이며 또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흔히 바타이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언급되는 이러한 요소들 중 그 어디에서도 유물론과의 연관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곧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라는 말은 마치 '신학자의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일견 생소하고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타이유의 '유물론'이—저 '신학자의 무신론'이라는 어법을 전도시킨—이른바 '무신론자의 신학(la théologie athéistique)'이라고 하는 바타이유 사상 특유의 역설적 본령임을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문학과 철학의 구분과 경계가 사라지는 바타이유의 사유 체계에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Georges Bataille, Madame Edwarda, Paris: Jean-Jacques Pauvert, 1956.

따라서 '바타이유에게 유물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시간적으로 가장 '늦게' 도달하게 되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으로는 가장 '먼저' 도달해야 할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다뤄볼 핵심적인 문제는 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다시 말해 그가 에로티즘이라는 개념 틀로 파악한 '인간학(anthropologie)'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또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질문들을 먼저 제기해야 하는데, 곧 성스러움(le sacré)과 희생(sacrifice)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과잉(excès)과 부정성(négativité)과 웃음(rire)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바꿔 말해 바타이유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근본적' 요소들에 대한 연구를 위해 우리가 여기서 설정하는 문제가 바로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물음은 구조적으로는 '최초로' 제기되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시간적으로는 '최후에' 도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무엇보다 바타이유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역설, 전복, 위반의 문법을 다루는 데에 있어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이라는 것, 곧 바타이유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를 묻는 물음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II, Paris: Gallimard, 1971.

이를 위해 우리는 바타이유의 『마담 에드와르다(Madame Edwarda)』(1941)를 중심으로 그의 여타 텍스트들 사이를 오가며 바타이유의 유물론이 지닌 의미와 전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마담 에드와르다』를 두고 "현대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le plus «beau» récit contemporain)"라고 평한 바 있으며[Maurice Blanchot, Le livre à venir,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6[1959¹], p.260], 자크 라캉(Jacques Lacan) 역시 프로이트(Freud)의 슈레버(Schreber) 증례와 관련하여 '내적 체험'과 『마담 에드와르다』의 중요성을 별도로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 1966, p.583]. 이하에서는 '총체성'과 '징후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마담 에드와르다』를 바타이유 사상과 문학의 한 '원형적 추출물' 내지는 한 '문학적 증상'으로 삼고 바타이유의 글쓰기가 지닌 특성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여기서 문제가 되는 '원형'의 의미를 어떤 사상의 '기원'이나 '원천'의 뜻으로 새겨서는 안 된다. 바타이유 작품의 해석에서 방법론적 '총체성'이란 단순히 한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보편적이고 최종적인 규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러한 총체성은 하나의 중심적인 작품을 통해 작가의 생애와 사상 전반을 압축적이고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일반적 비평의 방식과도 거리를 둔다. 어떤 의미에서 바타이유는 전 생애에 걸쳐 '단 하나의' 작품만을 썼던 작가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의 '대표작(chef-d'œuvre)' 같은 것을 선정하거나 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타이유의 작품 속에서 '총체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어떤 직선적인 발전 방향이나 시기별로 구분되는 상이한 주제들의 국면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일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총체성'이란 그의 전 저작에서 발견되는 어떤 공통적인 주제들,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이 지닌 '반복적 계기들' 혹은 '연속적 경향들'을 파악하려는 입장을 의미한다. 거의 '강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이러한 주제들의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출몰' 속에서 바타이유의 작품 세계가 지닌 '무의식적 초상(portrait inconscient)'을 그려보는 것, 또한 이것이 바로 '징후성'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징후성이란 총체성을 통합과 합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균열과 불화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균열들 사이의 통합'이 아니라 '통합 속의 균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Georges Bataille, Madame Edwarda / Le mort / Histoire de l'œil
    Paris: UGE(coll. "10/18"), 1979.
 


2. 바타이유의 초기 텍스트들: '낮은' 유물론, 극성과 양가성, 이질학의 개념

유물론에 대한 바타이유 사상의 단초를 살펴볼 수 있는 초기 텍스트로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다섯 개의 글들, 곧 「유물론(Matérialisme)」, 「낮은 유물론과 영적 인식(Le bas matérialisme et la gnose)」, 「사드의 사용가치 (1)(La valeur d'usage de D. A. F. de Sade (1))」, 『이질학(Dossier «Hétérologie»)』, 『사회학 시론(Essais de sociologie)』 등이다[앞의 두 글은 바타이유 전집(Œuvres complètes) 1권에, 뒤의 세 글은 전집 2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하에서 바타이유 전집의 인용은 ' O.C.'로 약칭하고 그 뒤에 권수(로마 숫자)와 면수(아라비아 숫자)만을 표기하기로 한다]. 유물론을 단독적인 주제로 삼아 서술했던 글이 그리 많지 않은 바타이유에게 이 텍스트들은 잠언에 가까운 단편적인 형식으로나마 그가 생각했던 유물론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라는 이 '낯선' 주제에 중점을 두고 이론적 작업을 수행했던 논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논의의 길잡이로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와 미셸 쉬리야(Michel Surya)의 선구적인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Pierre Macherey, "Georges Bataille et le renversement matérialiste", À quoi pense la littérature?, Paris: PUF, 1990; Michel Surya, "Le très bas", L'imprécation littéraire. Matériologies 1, Tours: Farrago, 1999 참조]. 

 

Georges Bataille, Romans et récits,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2004.

바타이유가 기존의 유물론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극명하다. 기존의 유물론은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라는 구도 하에서 정신에 부여되었던 우월한 위치를 다시금 물질에 부여하는 우를 범하면서 구조적으로 재차 관념론적 도식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은, 그들이 비록 모든 정신적인 실체(toute entité sprituelle)의 제거를 원했다 하더라도, 결국 특히나 관념론적인 위계 관계(rapports hiérarchiques)로 특징지어지는 사물들의 질서를 서술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Matérialisme", O.C., I, 179] 이러한 유물론은 관념론의 반복이자 재판일 뿐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이 되지 못한다. 바타이유가 「낮은 유물론과 영적 인식」에서 일견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유물론과 '영적 인식(gnose)'을 서로 연결시키는 이유는, 그노시스주의에서 말하는 이러한 '영적 인식'이야말로 분리와 구분의 이항대립이라고 하는 '진정한' 유물론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물질(la matière basse)은 인간의 이상적 열망에 있어 외부적인 것이고 낯선 것이며, 그러한 열망에서 기인하는 거대한 존재론적 기계(grandes machines ontologiques)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Le bas matérialisme et la gnose", O.C., I, 225] 물질은 정신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며 이질적인 것이다. 바타이유는 '낮음' 자체가 지닌 고유한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낮음'과 '높음' 사이에 이미 하나의 위계를 전제하고 있는 관념론적 체계와 결별한다[그러나 또한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타이유의 본령이 유물론의 쟁점들을 '그노시스주의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바타이유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일견 유물론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노시스주의와 유물론적 사유를 연계시키고 접합하려는 기획 자체의 '역설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타이유 사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질성' 또는 '이종접합(hybridation)'의 한 사례일 뿐, 그노시스주의 자체에 대한 특별한 강조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곧 그는 관념론적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도식을 벗어난 곳에서 '낮은' 물질에게 그 자신의 단독성(singularité)을 되돌려줌으로써, 관념론의 영역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유물론의 진정한 자리에 대해 다시금 새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타이유가 말하는 '진정한' 유물론은 이러한 '낮음'의 유물론이며, 이는 곧 가치들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는 모든 이상적이고 관념론적인 시도로부터 벗어난 '지고성/주권(souveraineté)'의 유물론이기도 하다[La souveraineté, O. C., VIII, 247 참조. 여기서 바타이유는 자신의 'souveraineté' 개념이 국제법상의 국가적 주권 등의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삶과 관련해 노예적이고 종속적인 상태에 반대되는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이를 일단 '지고성(至高性)'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주권'의 의미 또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데, 좁은 의미의 국가/국민 주권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정치적 삶의 주체가 지닌 주권이라는 뜻에서라면 '주권'이라는 번역어 역시 정당하게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바타이유의 이 개념이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주권(Souveränität)' 개념과 맺고 있는 모종의 연관성,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대한 논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 개념의 번역어로 '지고성'과 '주권'이라는 두 단어를 병기하는 것이 차선이라고 판단된다]. 

 

Georges Bataille, Madame Edwarda [version illustrée], Paris: Jean-Jacques Pauvert, 2001.

바타이유의 이론이 갖는 긴장감은 바로 극성(極性, polarité)에 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에서 기인한다. "성스러움의 요소는 그 자체로 극성을 띠고 있는데, 성스러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원적으로 순수함과 불순함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성스러움 자체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아니다."[Dossier «Hétérologie», O. C., II, 167] 바타이유의 사상 체계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극성은, 기본적으로는 높음과 낮음, 성과 속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스러움의 개념 그 자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성스러움의 개념이 지닌 이러한 양가적 특성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 우리는 특히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분석을 참조할 수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는 프랑스어 'sacré'의 어원인 라틴어 'sacer'가 "때로는 '성스러운(sacré)'의 뜻으로 때로는 '저주받은/혐오스러운(maudit)'의 뜻으로" 새길 수 있는 양가적인 단어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Paris: Grasset, 1972, p.356 참조.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 역시 '속죄양'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의 개념에 관해 상세한 분석을 행한 바 있는데, 그는 내면과 동일성의 철학이 기반하고 있는 가능조건이 실제로는 '독'이면서 또한 동시에 '약'이 되는 '파르마콘'의 양가적 성격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파르마콘'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달래주는(angoissant et apaisant)" 것 또는 "성스러우면서도 저주받은(sacré et maudit)" 것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Jacques Derrida, La dissémination, Paris: Seuil, 1972, pp.143-144 참조]. 이러한 종류의 이항대립은 필연적으로 양가성(ambivalence)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양가성은 소극적으로 해석하자면 단순한 '모호함'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는 두 극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이원론'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인간은 […] 성스러운 것이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에 오직 그것을 넘어서거나 깨뜨린 사람만이 이해하고 소유하게 될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Roger Caillois, L'homme et le sacré,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8[1950¹], p.76] 따라서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단일한 관념론적 위계를 갖는 일원론적 유물론이 아니라 근원적인 극성을 내포하는 이원론적인 유물론, 곧 양가성을 띠는 '역설의 철학(la philosophie du paradoxe)'이 된다. 이러한 양가성이 지닌 두 개의 극은 그 둘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변증법적인 제3항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순(contradiction)의 해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고 전복되는 지속적인 대립(opposition)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삽화.

바타이유가 제시하는 '이질학(hétérologie)'의 개념은 이러한 극성의 이항대립 구조와 그로부터 전개된 유물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질학은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우열을 구분하거나 위계적 구조 또는 체계를 수립하지 않는다. 바타이유는 인간 행동 전반을 전유(appropriation)와 배설(excrétion)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의 대립 구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이질학의 개념은 ‘생산’의 영역과는 구별되는 '소비'의 영역에 관한 '일반 경제(économie générale)'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économie/oikonomia)'의 개념을 단순히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만 보지 않고 더 나아가 인류학적이고 종교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이론적 시도의 단초를 이룬다. 바타이유가 이후 『저주의 몫(La part maudite)』의 핵심으로 제시하게 되는 '일반 경제'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이질성의 영역만이 유일하게 축적과 보상의 논리를 벗어나고 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상의 원리는 생산과 재생산, 축적과 저장에 강조점을 두는 '제한적인' 경제를 대표한다. 이에 반해 바타이유가 말하는 이질성의 영역, 곧 '저주의 몫'에 해당하는 소비와 탕진과 잉여의 영역은 그러한 보상의 논리를 초과하는 '과잉'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의미하는바 '일반 경제'의 '일반성(généralité)'이란 단순히 동질적인 재현으로서의 철학 체계가 지니는 제한적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가성과 과잉 등 '이질성'의 개념을 포괄하고 아우른다는 의미에서의 '일반성'을 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질학은 세계에 대한 어떤 동질적인 재현(représentation homogène)과도, 다시 말해서 어떤 철학적인 체계와도 대립되는 것이다. […] 이를 통해 이질학은 전유의 도구였던 것을 배설 작용에 봉사하는 것으로 이행시키고 사회적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격렬한 만족에의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La valeur d'usage de D. A. F. de Sade (1)", O. C., II, 62-63] 하지만 바타이유가 말하고 있는 전유와 배설의 대립 구도는 단순히 순응과 저항이라고 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심급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히려 에로스와 타나토스, 리비도와 죽음충동이라는 보다 정신분석적이고 인류학적인 이항대립의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전유와 배설은 인간 충동의 가장 근본적인 두 극을 이루는 것이며, 이러한 극성에 근거한 이원론은 바타이유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다른 주제들, 곧 성과 속의 관계, 신성한 것과 더러운 것 사이의 근접성,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사이의 지양 없는 변증법 등에 대응하는 또 다른 도식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타이유가 '위반(transg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운동이 인간의 한계와 금기를 파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확인'하고 '완성'시키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위반의 진정한 의미와 의의는 이러한 금기와 한계에 대한 확인의 과정, 금기의 '존재증명', 불가능의 경계를 그리고 구획하는 일종의 '작도법' 또는 '지도제작법'에 있는 것이다. "위반은 금기의 부정이 아니라 금기를 통과하여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다."[L'érotisme, O. C., X, 66] 이러한 관점에서 바타이유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비천함'의 개념이다. "인간존재의 비천함(abjection)이란 그 단어의 형태적 의미에서도 부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부재(absence)를 기원으로 삼기 때문이다."[Essais de sociologie, O. C., II, 219] 비천함의 유물론은 무엇보다 존재나 현존이 아닌 부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낮음'과 '비천함'을 논하는 유물론이 부재의 형식을 띠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동질성의 사회가 배제하려고 하는 이질성에 대한 이론, 곧 그렇게 배제된 이질성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재로서의 이질성은 동질성을 초과하며 오히려 그러한 동질성의 조건을 규정한다. 부재가 존재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질성이 동질성 자체의 가능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역시 이러한 '비천함'을 바타이유의 핵심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Julia Kristeva, Pouvoirs de l'horreur,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83[1980¹] 참조]. 이질성은 동질성을 구성하는 조건이 됨과 동시에 동질성 자체를 언제나 초과하고 위반한다. 동질성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리비도라면 이질성은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타나토스이다. 동질성은 전유하고 한계 짓지만, 이질성은 배설하고 넘쳐흐른다. 

         

▷ 바타이유와 라캉: 불가능과 실재계, 신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바타이유가 말하는 이질성의 '불가능(l'impossible)'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le réel)'와 접점을 갖게 된다. 실재계는 상징계(le symbolique)가 배제시키려고 하는 잉여와 과잉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상징계의 역설적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 곧 상징계의 또 다른 '진리'이기도 하다. 실제로 라캉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실재계의 특징을 '불가능성(impossibilité)'이라는 말로 규정하면서 동질적인 상징계와 이질적인 실재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X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Paris: Seuil,1973, p.152; 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I. Les écrits techniques de Freud, Paris: Seuil, 1975, p.80 참조]. 이러한 실재계와 불가능성의 특성은 다시 각각 바타이유적 의미에서의 신성(divinité) 개념과 라캉적 의미에서의 여성성(feminité) 개념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계단을 오르는 에드와르다.
 


3. 신 없는 신학, 또는 어느 '관념론자'의 유물론: 불안, 소통, 종교의 의미

성과 속의 양가성, 쾌락과 고통의 양면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타이유는 어쩌면 철저한 유물론자임과 동시에 '뒤틀린' 기형적 관념론자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낮은' 물질과 이질성을 논하는 유물론자 바타이유는 때로 '관념론적 신비주의자'의 모습을 띠기도 하며, 또한 체험과 과잉을 논하는 극단적 경험론자 바타이유 역시 때로는 '비합리적 합리론자'의 모습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타이유 사상 특유의 모호하고도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물론자'라고 부르기를 꺼리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를 '관념론자의 유물론'이라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타이유는 가장 물질적인 육체를 내적 체험의 정신성 속에서 바라보고자 하며, 또한 동시에 가장 정신적인 종교성을 유물론적인 어법 속에서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드와르다라는 인물은 신(神)과 제물(祭物)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형태를 하나의 몸 안에 육화하고 있는 양가성의 현현이 된다. 이는 또한 바타이유가 지니고 있는 두 개의 얼굴, 그의 핵심에 놓여 있는 양면성이며, 그의 이러한 특성은 곧 '신 없는 신학'이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철학에 가닿는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보다시피, 나는 신(神)이야..."

모든 바타이유 작품의 시작은 불안(angoisse)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Jean Durançon, Georges Bataille, Paris: Gallimard, 1976, p.29 참조]. 거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마담 에드와르다』의 첫 장면에서부터 이후 이어지는 화자와 에드와르다 사이의 관계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의 정서이다. "어느 거리의 한 구석에서, 불안이, 취기를 머금은 더러운 하나의 불안이, 나를 망가뜨렸다."[Madame Edwarda, O. C., III, 19. 이 작품에 대한 앞으로의 인용은 본문에서 'ME'로 밝히기로 함] 더러운 거리와 불순한 욕망 위에 내려앉는 어두운 밤은 불안으로 시작되며 또한 불안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바타이유가 의미하는 이러한 '체험'의 순간이 언제나 밤의 시간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바타이유에게 밤이라는 시간은 무엇보다 지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비지(非知, non­-savoir)의 밤'이다. 그러므로 불안이란 바로 지성이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서의 감정이며, 또한 동질성의 공간이 아닌 이질성의 공간을 경험할 때 느끼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안을 경험하는 밤은 바타이유의 유물론이 지닌 시간적이고 인식론적인 배경이 된다. 우리는 화자와 에드와르다 사이의 만남과 여정이 이러한 불안의 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안에서 에드와르다는 화자에게 환희와 동시에 고통을, 사랑과 동시에 죽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불안이란 또한 양가성을 이루는 상반되는 두 극 사이를 왕복하는 존재의 운동에서 오는 불안이기도 하다. 에드와르다가 화자에게 묻는 질문은 바로 화자 자신의 질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지?"(ME, 25) 바로 이 불안을 통해 화자는 환희와 고통 사이, 혹은 사랑과 죽음 사이의 어떤 '동일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에드와르다라는 이질성의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불안의 주제는 바타이유적 유물론과 문학의 핵심 범주가 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불안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것이며 또한 해소를 목표로 하지도 않는 본원적인 존재조건으로서의 불안이라는 사실이다[바타이유는 한 인터뷰에서 불안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역설적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불안을 추구했습니다. 나는 불안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이 바로 불안의 과잉 속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Madeleine Chapsal, "Georges Bataille", Quinze écrivains, Paris: Julliard, 1963, p.14]. 그러한 의미에서 바타이유의 모든 작품은 미지의 불안으로 시작하여 또한 불안의 과잉으로 종결된다. 불안은 바타이유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에드와르다, 혹은 죽음의 얼굴.

에드와르다는 창녀임과 동시에 하나의 신성(divinité)으로 출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화자 앞에 자신의 나체와 음부를 드러낸 에드와르다는 단 한 마디의 단언을 통해서 신의 모습으로 현현한다. 그녀는 음란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자신이 신임을 주장한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 내 누더기(guenilles)를 보고 싶어?' […] '왜 이러는 거지?'/ 그녀가 말한다. '보다시피, 나는 이야(je suis DIEU)...'/ '미치겠군...'/ '아니, 그런 말 하지 마, 당신은 바라봐야 해, 바라보라고!'/ 그녀의 쉰 목소리는 부드러워졌고, 체념하는 끝없는 미소를 띤 채 내게 권태롭게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그녀는 거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ME, 20-21] 이 지극히 부조리해 보이는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타이유의 타자(他者) 이론, 그리고 그에 기반하고 있는 에로티즘의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특히나 '내적 체험'은—일견 유아론적(唯我論的)으로 느껴지는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근본적으로 타자의 존재 없이는, 곧 이질성의 영역 없이는 불가능한 경험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들이 함께 피 흘리고 서로를 찢어발기며—수치심의 극단적 한계에 이르기까지—모든 부분을 서로 문제 삼았던 죽음의 밤은 그들 사이의 합치(communion)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Sur Nietzsche, O. C., VI, 43. 여기서 '합치'로 옮긴 'communion'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성체배령'이라는 종교적 의례의 뜻으로도 새길 수 있다. 종교적인 의미의 개념과 형식들을 '신성모독'의 형태로 전유하여 다시금 전복하는 방식은 바타이유의 역설적 철학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폭력과 상처, 이질성의 영역이 갖는 광폭한 힘은 에로티즘과 희생제의 안에서도 하나의 진리가 된다. "그[개인]의 능력 범위 안에서 이러한 다양한 한계들을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파괴(destruction)하는 것이다. […]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입은 폭력은 유한한(finies), 경우에 따라서는 유용한(utiles) 사물들의 질서를 벗어난다. 폭력은 이러한 질서를 광대함(l'immensité)으로 되돌린다."[La littérature et le mal, O. C., IX, 255] 에로티즘 안에서 이러한 폭력이 가능하게 해주는 연속성의 순간은 핵심적인 개념으로 떠오른다. "희생물은 죽고, 그럼으로써 희생제의의 참가자들은 그 제물의 죽음이 계시해주는 하나의 요소를 공유하게 된다. 이 요소는 종교역사가들을 따라서 성스러움(le sacr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성스러움이 바로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discontinu)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존재의 연속성(continuité)이다."[L'érotisme, O. C., X, 27] 택시 안에서 화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택시 기사와 섹스를 나누는 에드와르다의 모습은 희생제의 안에서 살해되는 희생물의 모습과 닮아 있다. 화자는 거기서 죽음을 읽는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시선이 불가능(l'impossible)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았고, 그리하여 그녀 속에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부동(不動)의 어떤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천의 범람처럼 그녀를 넘쳐흐르는 눈물이 뿌리에서부터 철철 흘러내렸다. 그 눈에는 사랑이 죽어 있었고(l'amour, dans ces yeux était mort), 새벽의 차디참만이 투명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바로 거기서 나는 죽음(la mort)을 읽었다."[ME, 29] 신이자 동시에 희생물인 에드와르다가 불연속적 존재인 화자에게 계시하고 개시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속성의 순간이다. 소통(communication)은 무엇보다 사랑이지만, 그러한 소통은 존재를 더럽히고 훼손하는 사랑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에드와르다는 불연속적 개체일 수밖에 없는 화자에게 죽음을 환기함으로써 순간으로나마 존재의 연속성을 경험하게 해주는 존재이며, 따라서 이질적이며 외부적인 타자의 모습을 띠게 된다. 바타이유가 의미하는바 소통은 바로 이러한 이질성의 폭력과 상처를 통해 불연속적 존재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연속성의 순간 속에 있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에드와르다의 하이힐.

이러한 연속성의 경험은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반종교적인 양가성과 역설의 특징을 갖는다. 화자와 에드와르다의 여정이 내포하는 연속성의 체험으로서의 시간은 일종의 흑미사, 죽음과 공허에 봉헌되는 일종의 제의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이 아치의 허무(le néant)를 지나가겠지!"[ME, 25] 이는 일견 가장 비종교적 혹은 반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위 안에 내포된 역설적이고 전복적인 '종교성'의 모습을 띤다. 화자가 에드와르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흐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해볼 수 있는데, 이는 각각 미사에서 말하는 입당송(entrance), 봉헌송(offertory), 성체배령(communion)의 형식에 대입시킬 수 있다[Allan Stoekl, "Recognition in Madame Edwarda", Carolyn Bailey Gill(ed.), Bataille: Writing the Sacred, London/New York: Routledge, 1995 참조]. 화자가 사창가에서 에드와르다를 만나 그녀가 신이라는 사실을 고지 받는 부분이 입당송, 거리에서 부재하는 신의 형태로 사라졌다가 다시 출현하는 에드와르다 안에서 화자가 신성을 체험하는 부분이 봉헌송, 마지막으로 화자가 택시 안에서 갑자기 택시 기사와 섹스를 나누는 에드와르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합치'를 경험하는 부분이 성체배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사는 가장 신성모독적인 경배, 가장 비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종교행위라는 역설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는 곧 일종의 전도된 미사, 전복된 제의에 다름 아니다. 신이 없는 신학이 맞닥뜨리는 의미는 결국 무의미가 된다. "내 삶은, 내가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내가 미쳐 있다는 조건에서만, 의미가 있다."[ME, 30] 바타이유에게 있어 인간의 종교적 열망과 행위란 결국 이러한 공허와 무의미를 향해 열려 있는 희생제의 안에서 집약된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개선문, '부재하는 존재'로서의 에드와르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정식을 도출해낼 수 있다. 첫 번째 정식: 희생제의 안에서 우리와 비슷한 존재의 한계는 부정되며, 바로 그 희생제의 안에서 작용하는 폭력을 통해서 불연속적인 존재는 순간적인 연속성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러한 폭력과 희생제의는 그 자체로 과잉의 행위가 되는데, 그것이 생산과 삶에의 욕망과는 다른 방향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소진과 탕진 혹은 죽음의 욕망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순수 소비’의 영역이 바타이유가 의미하는바 '저주의 몫'이자 '이질성'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연속성은 단지 순간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순간적일 때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사실 불연속적인 존재가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연속성이란 실제적인 죽음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존재가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의 형태는 그러한 연속성의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정식: 근대적 코기토(cogito)의 의식 작용과 생산적 경제활동은 유한성과 유용성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러한 작용과 활동에 외부적인 타자의 존재는 유한성과 유용성을 벗어난 질서 속에서 경험되는 이질적인 것이다. 코기토에 의해 포착되는 대상은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관점과 목적에 맞게 변형된 것이며 따라서 유용성(utilité)의 원리 위에 있다. 그러나 희생을 통해서, 곧 우리와 비슷한 존재의 살해와 파괴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성스러움의 영역은 그러한 유용성의 질서와 생산의 논리를 벗어난다. 그것은 북서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potlatch)와도 같은, 전혀 생산적이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순수한 소진이자 낭비인 것이며 바타이유는 이를 일종의 "영광(gloire)"으로까지 규정한다["La notion de dépense", O. C., I, 319 참조]. 이는 유용성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일종의 잉여이고 과잉이며 넘침이다. 따라서 바타이유가 말하는 희생은 우리가 흔히 도덕적인 행위들의 원천으로 파악하는 이타적인 선(善)의 영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러한 희생은 선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악(惡)에 의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타이유는 이를 "초도덕(hypermorale)"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다[La littérature et le mal, O. C., IX, 171]. 유한성과 유용성의 질서 안에서, 그러한 질서를 초과하여 경험되는 죽음과 타자의 세계란 곧 성스러움의 영역이며, 또한 이는 가능 세계의 범위와 조건을 결정짓는 어떤 불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불가능성으로서의 신성과 희생 개념이 바로 바타이유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소통과 종교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화자를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에드와르다의 '상스러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설적인 "하나의 은밀한 교환(un échange sournois)"[ME, 23]이 되고 있다. 바타이유가 말하는 종교성은 또한 이러한 교환이 지닌 '증여(don)'의 형태와도 맞닿아 있게 된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에드와르다의 현현, 교환과 증여.
 


4. 물질 없는 유물론, 또는 어느 '무신론자'의 신학: 경련, 서사, 놀이의 주제

바타이유의 유물론이 지닌 또 하나의 역설적인 특성은, 가장 '낮고 비천한' 물질적인 층위의 요소들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의 '비물질성' 또는 ‘정신성’을 띠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단지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하부 구조'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정신적 상부 구조에 대한 물질적 하부 구조의 특권적 결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정신을 물질에 종속시키는 기존 유물론의 관념론적 도식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가장 물질적인 것 안에서 가장 정신적인 것을 발견하는 작업, 곧 성과 속의 질서 안에 내포되어 있는 극성과 양가성의 역설적인 의미망을 파악하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은 '낮은' 물질을 정신의 ‘높은’ 지위에 위치시키는 단순한 위계적 관계의 역전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높은 것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파괴와 추문의 과정 안에서, 곧 가장 고고한 정신성을 가장 비천한 물질성을 통해 사유하고자 하는 전복적 유물론의 기획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이다. 이러한 과정을 쉬리야는 "형이상학을 격하시키기(abaisser la métaphysique)"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으며[Michel Surya, "Le très bas", p.87], 또한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는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만들기(enlaidir ce qui est beau)" 혹은 "순수하게 보이는 것을 불순하게 만들기(corrompre ce qui semble pur)"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Pierre Klossowski, "La messe de Georges Bataille", Un si funeste désir, Paris: Gallimard(coll. "L'Imaginaire"), 1994[1963¹], p.121]. 『마담 에드와르다』 안에서 물질적인 몸은 떨리는 정신의 불안을 체현하고, 이야기 구조의 물질성은 서사가 지닌 정신성을 담보하면서 동시에 파괴하며, 기표가 지닌 물질성의 놀이는 기의의 정신성을 초과하고 위반하며 침범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또한 '물질 없는 유물론'이라는 역설적 자리에 가닿는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떨리는, 경련하는 에드와르다.

우리는 화자와 에드와르다의 여정을 공간의 이동에 따라 사창가, 거리, 택시 안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해볼 수 있다. 이러한 공간 안에서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경련(convulsion)의 주제이다[Jean­-Louis Cornille, Bataille conservateur, Paris: L'Harmattan, 2004 참조. 특히 이 책의 3장에서는 이러한 경련의 주제에 접근하는 데에 유용한 언급들을 다수 찾을 수 있다]. 『마담 에드와르다』 안에서 다양하게 변용되는 경련의 주제가 일종의 공간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공간을 거치면서 증가하고 심화되는 일련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경련들이 또한 신성을 체험하는 공간 자체의 확장과 수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내게 너무나 부드럽게 미소 지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떨었다. 결국 나는 무릎을 꿇고 비틀거리면서 그 생생한 상처(la plaie vive)에 입술을 갖다 댔다."[ME, 21] 사창가에서 시작된 내적인 불안과 욕망의 경련은 거리로 나와 근본적인 부재와 공허에 대한 추위를 느끼는 경련으로 확장된다. 공간과 함께 확대된 경련의 강도는 마지막으로 가장 협소한 공간인 택시 안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가장 커다란 경련으로 끝을 맺는다. 이 가장 큰 경련은 곧 신과 희생물의 양면성을 지닌 에드와르다가 화자에게 안겨주는 사랑과 죽음의 동일성에서 오는 것이며, 이는 또한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불안이 육체적으로 경험되고 완성되는 형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 경련은 동시에 시와 행동 사이, 문학과 체험 사이에서 동요하는 근원적 극성으로부터 기인한 어떤 정신적 경련이기도 하다[Susan Rubin Suleiman, "Bataille in the Street", Carolyn Bailey Gill(ed.), 앞의 책 참조. 특히 여기서 설레이먼은 바타이유가 시와 행동에 대해 품었던 생각을 랭보(Rimbaud)의 문학관과 대조하고 있다]. 이러한 경련이 도달하는 지점은 공허를 향한 웃음인데, 이러한 웃음은 근원적인 불안에서 출발하여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에 실로 '희비극적'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탁자를 밀어 엎어버리고 싶었고,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탁자는 바닥에 딱 붙은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이도 이보다 더 희극적인 일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홀도, 마담 에드와르다도. 오직 밤만이..."[ME, 20] 모든 것을 뒤엎고 전복시키고자 하는 불안의 욕망은 움직이지 않는 탁자에 의해 지극히 희극적인 시도로 바뀐다. 공허 그 자체를 드러내는 맹목적인 밤만이 남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바타이유의 이러한 웃음은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직접적으로 죄의식과 소통의 주제로 다시 연결된다. "예수의 처형은 신의 존재를 훼손한다. 상황은 마치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완전함을 찢어발겨서 난 상처에 의해서만 창조주와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상처는 의도된 것이며, 신이 원한 것이다."[Sur Nietzsche, O. C., VI, 42-43] 바타이유가 말하는 소통은 존재들에게 상처를 내고 그들을 더럽히는 행위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죄악'이다[Sur Nietzsche, O. C., VI, 43 참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죄악이 지닌 종교적 상징성과 특수성이 아니라 상처 내고 피 흘리게 한다는 희생제의의 일반적인 폭력성,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죄와 악의 보편적 구조와 힘이다. 이러한 죄와 악의 영역이 없었다면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합치는 말 그대로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바타이유의 단언은 그의 역설적 철학이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바타이유의 사유는 이러한 상처의 고통/소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인간은 이로부터 성과 속, 선과 악, 유용성과 과잉, 존재의 보존과 희생 사이를 현기증 나도록 왕복한다.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인식으로 상정된 연속성의 순간적 성취는 이러한 고통과 소통의 사유가 촉발시킨 환희의 현기증, 그를 통한 존재의 한계 확인,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오롯이 드러나는 존재의 불가능성, 또한 동시에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마주치게 되는 존재의 어떤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경련하는 몸이란 결국 피 흘리는 희생물의 몸을 통한 소통 속에서 두려움과 웃음, 불안과 황홀을 동시에 경험하며 떨리는 인간의 모습이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뒤집힌 채로, 혹은 뒤집어지기 위해.

『마담 에드와르다』의 화자는 때로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서, 때로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서사 속으로 개입하고 침범하며 간섭한다. 바타이유는 작품 안에 의도적으로 작가와 화자를 혼재시킴으로써 이야기(récit)의 영역과 소설(roman)의 영역 사이에 놓인 어떤 경계를 문제 삼는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제사(exergue)와 잠언(aphorisme)의 형식이 사용되는가 하면 주석이나 괄호의 형태로 작가적 개입이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이 작품의 형식이 던지는 물음은 곧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는 서사성에 관한 질문이 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마담 에드와르다』는 생경하고 전복적인 텍스트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작품은 이른바 '근대적' 소설이 지녀야 할 일반적인 형식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서두의 제시나 모범적인 결말의 구성 등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예 그런 것들을 무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나의 서두는 거칠다. 나는 이런 서두를 피하면서 '그럴 듯하게'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회해서 시작하는 것이 내게는 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이렇게 되었고, 시작에는 우회(détour)가 없다. 나는 계속한다... 더욱 거칠게..."[ME, 19] 곧 『마담 에드와르다』는 이야기의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는 장치와 문체를 바로 그 이야기의 구조 안에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며 이질적인 텍스트가 된다. 바타이유는 여기서 우회 없는(sans détour)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날것'의 서두를 제시한다. 기탄없고 거리낌 없는, 곧 유보 없는(sans réserve) 이러한 서두의 전복은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생산과 축적의 방향과는 반대되는 하나의 방향, 곧 이야기 구성의 이질성이라는 방향을 따른다. 이 이야기의 맨 처음은 바로 이 책 자체에 대한 자기 지시적 언급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도 하다. "당신이 모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라. 그러나 먼저 내 말을 들어라. 당신이 웃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 그것은 당신에게 무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신이 읽을 줄 모른다면? 당신은 두려워해야 할까? 당신은 혼자인가? 당신은 추위를 느끼는가?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이 '당신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가? 어리석다는 것을? 그리고 벌거벗었다는 것을?"[ME, 15] 이야기의 이러한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을 문제 삼는 한에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서사성을 구성하는 전제조건들 자체를 해체하고 다시금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불안의 주제로 돌아온다. 이 불안은 주체의 불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형식이 지닌 불안이기도 한 것이다. 근대적 주체의 형식은 근대적 문학의 형식, 곧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확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타이유가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가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소설과 문학의 근대적 건축 체계이다. 생산과 축적의 구성력에 기반하고 있는 이러한 문학적 '건축 의지'에 대한 의문이 바로 서사성 자체에 대한 전복적 몸짓의 핵심을 이룬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에드와르다의 몸짓, 혹은 날갯짓.

『마담 에드와르다』는 또한 문학을 구성하는 언어의 차원과 기표의 층위에 있어서도 하나의 전복적 놀이를 수행한다. 이러한 기표상의 전복적 성격과 관련해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는 바타이유의 또 다른 텍스트는 『눈 이야기(Histoire de l'œil)』이다. 『눈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는 기표의 놀이에 대한 논의로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꼼꼼한 분석을 참고할 수 있다[Roland Barthes, "La métaphore de l'œil", Essais critiques, Paris: Seuil, 1964 참조]. 바르트는 『눈 이야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기표들의 연쇄, 다시 말해 눈(œil)-달걀(œuf)-불알(couille)이라는 계열체들(paradigmes)이 그 은유의 대상으로 어떠한 기의도 갖지 않는다고 논파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서로에 대한 기표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바르트는 이러한 과정을 "기의 없는 의미작용(signification sans signifié)"이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Roland Barthes, "La métaphore de l'œil", p.241]. '눈'의 은유에는 어떠한 원형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의미론적 중심을 설정하지도 않는다. '중심 없음', 이는 기본적으로 혼돈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혼돈은 질서에 대립되는 무질서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어떤 떨림, 그 의미들의 확정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향유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바타이유가 수행하는 전복적 기표의 놀이는 부정성 안에서 긍정성을 향유하는 역설적 몸짓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은유의 연쇄는 '기원'의 개념을 희석시키면서 본질과 속성, 원본과 모사, 중심과 주변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에 관한 형이상학적 믿음에 균열을 내고 그러한 '신학적' 믿음을 '신성모독'의 방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이렇듯 원형적 중심을 지니지 않는 기표들의 연쇄는 역시나 『마담 에드와르다』 안에서도 발견된다. 바르트의 논의와 관련하여 특히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기표들의 연쇄는 경련과 전복의 이미지를 갖는 동사의 계열체들이다. 곧 『마담 에드와르다』 안에서 '경련하다(convulsionner)', '전복하다(renverser)', '떨다(trembler)' 등의 동사들이 이루는 '기의 없는 의미작용'은—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중심의 상실과는 다르게 규정"되는 일종의 "비-중심(non­-centre)"을 자신들의 중심으로 갖는 기표들의 연속체에 다름 아니다[Jacques Derrida,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p.427 참조]. 또한 우리는 "한 무리의 여자들 가운데서, 마담 에드와르다가, 벌거벗은 채, 혀를 내밀고 있었다[목말라하고 있었다](tirait la langue)."[ME, 19], 그리고 "'여인은 올라가고[올라타고](monte)' 그녀와 관계를 맺을 남자가 그 뒤를 따르는 이 외설스러운 제의는 그 순간 내게 단지 환각적인 성대함이었다"[ME, 21] 등의 문장에서도 바타이유가 수행하고자 하는 기표의 놀이를 목격할 수 있다. 바타이유에게 '비-중심'이란 중심의 상실이나 위계적인 의미에서의 주변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부터의 '해방', 중심이라는 것의 초월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역설적 '초월성'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단어들은 확정되지 않고 부유하고 유동하면서 '떨리는 의미(sens tremblé)'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타이유의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요체이다. 바타이유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 "어떤 의미에서 시는 언제나 시의 반대"인 것이다[La littérature et le mal, O. C., IX, 197].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장엄하고 성대한 환각.
 


5. 이론과 문학 사이의 모호한 경계: 글쓰기의 '여백'과 '과잉'

이상의 논의에 덧붙여 우리는 다소 '메타-형식적'인 측면에서 『마담 에드와르다』의 구조와 성립을 둘러싼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따로 고찰해야 하는 이유는, 바타이유의 글쓰기가 바로 문학의 영역과 문학 외적인 영역 사이의 어떤 '교환', 곧 문학과 이론 사이의 경계라는 어떤 '불가능성'의 지점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바타이유의 문학이 지닌 양가적 '여백'의 성격과 '과잉의 잔여물', 그리고 이를 배치하고 조직해가는 '주변적'이고 '전복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 안에서 그 자신의 유물론적 사유를 실천하려는 바타이유의 '총체적' 글쓰기 기획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는 곧 '문학적 철학'이라는 형태를 띠는 하나의 실천이다. '형식 바깥의 형식'이라는 문학적 여백과 과잉의 문제는 곧 이질성의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 『마담 에드와르다』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신(神)은 돼지일 것이다."

먼저 바타이유의 작품을 논함에 있어 그의 가명 또는 필명의 문제가 별도의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임을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가명에는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는 소극적 의도 외에도 적극적으로 작명(作名)의 행위 자체를 글쓰기의 핵심 안에 포함시키려는 문학적 기획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국립도서관 사서라는 국가공무원의 신분으로 자신의 본명을 내걸고 '음란하고 폭력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는 일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현실적 이유는 여기서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바타이유가 사용했던 가명과 필명 안에 어떤 적극적인 사상적 전략과 전복적 장치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Michel Surya, Georges Bataille, la mort à l'œuvre, Paris: Gallimard, 1992, p.114 참조]. 결국 바타이유에게서 이름의 문제는 작품 그 자체의 문학적 형식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가명 또는 필명이라는 문제는 이미 작품 자체의 의미 구조 안에서 수행적(遂行的)으로 계산되고 기획되고 있는 어떤 문학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바타이유의 가명과 필명은 작품에 대해 외적임과 동시에 또한 내적인 구조 안으로 기입되고 있는 '형식적' 양가성의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바타이유 그 자신의 이름('Bataille')은 이미 하나의 전쟁('bataille')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마담 에드와르다』를 출판할 때 사용했던 가명인 'Pierre Angélique'의 경우, 이 이름은 본래 『마담 에드와르다』를 1부로 하여 전제 3부작으로 기획되었던 『성스러운 신(Divinus Deus)』 안에서 주인공 또는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으며, 그 이름 자체가 지상의 것인 '돌(pierre)'과 천상의 것인 '천사(angélique)'를 결합시킴으로써 일종의 극성과 양가성을 바탕으로 작명된 것이기도 하다. 『눈 이야기』를 처음 출판할 때 바타이유가 사용했던 필명인 'Lord Auch'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그의 또 다른 글 제목인 '태양의 항문(anus solaire)'도 이와 마찬가지이다['Lord'는 영어에서 '주(主)' 또는 '신(神)'을 뜻하는 말이며, 'Auch'는 '변소에서(aux chiottes)'라는 구절의 발음을 차용하여 변형시킨 단어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변소에 있는 신'이라는 뜻을 갖게 되는 'Lord Auch' 역시 가장 고귀한 것과 가장 비천한 것의 만남을 표현하고 있는 이름이며,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이는 또한 그 자체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가명 또는 필명 안에서도 또한 바타이유의 전복적 유물론이 지닌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Georges Bataille, Histoire de l'œil [version illustrée], Paris: Jean-Jacques Pauvert, 2001.

바타이유의 여타 문학 작품에 첨부된 많은 서문들 중에서도 『마담 에드와르다』에 붙여진 서문은 조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서문은 작품의 발표(1941)로부터 15년이나 지난 후인 1956년에, 그리고 바타이유 자신의 본명을 걸고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 앞에 붙이는 발문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또한 이 서문은 『마담 에드와르다』의 본문과 맞먹는 분량의 철학적 서술에 할애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는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연결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하나의 문학작품과 그에 붙은 서문이 지닌 일반적 관계를 전복시키고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 신과 전복의 문제, 경련과 존재의 문제를 차례로 다루고 있는 이 서문은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가 의미하는바 "비평가-작가(critique-écrivain)"의 초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Tzvetan Todorov, Critique de la critique, Paris: Seuil, 1984, pp.55-81 참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바타이유의 다른 두 개의 작품과 그 작품들이 서문과 맺고 있는 관계들을 추가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바타이유 자신의 본명으로 출간되었던 소설 『하늘의 푸르름(Le bleu du ciel)』과 그 서문, 둘째, 가명으로 출간되었던 『눈 이야기』와 그 서문 「일치들(Coïncidences)」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서문 모두 일종의 자전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담 에드와르다』의 서문이 지닌 '이론적' 성격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마담 에드와르다』의 서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전적이며 자기 지시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동질적인' 텍스트이지만, 동시에 그 형식에 있어서는 타자에 대한 비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 객관성'을 띠고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곧 이 서문은 그 자체로 양가성과 이질성의 형식 자체를 내재화하면서 서문과 본문이 통상적으로 지녀야 할 문학적 관계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이론적 서문은 문학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 아니며, 반대로 하나의 문학작품 역시나 특정 이론의 도식적인 형상화와는 거리를 둔다. 바타이유에게 문학과 이론의 형식은 모두 공히 자신의 '체험'을 서술하는 글쓰기의 다른 두 형태일 뿐이었다. 바타이유의 글쓰기 안에서 이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의 문학적 작업에 대해 외부적인 자리에 있지 않다. 『마담 에드와르다』 서문의 내용과 형식이 제기하는 문제는 곧 장르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히려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이질적 글쓰기의 문제가 되고 있다. 

 

▷ 『눈 이야기』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눈, 달걀, 불알.

결국 바타이유의 글쓰기가 나아가고 있는 장소는 이론과 문학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호해지는 또 다른 양가성의 지점에 다름 아니다. 바타이유는 이론과 문학이라는 두 극 사이를 오가는 운동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속에서도 또한 양가성의 유물론이 지닌 '경험적' 기획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담 에드와르다』와 그 성립 시기나 내적 구조 등의 측면에서 일종의 '쌍생아' 관계를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바타이유의 텍스트 『내적 체험(L'expérience intérieure)』을 검토해볼 수도 있다. 『마담 에드와르다』와 그 서문의 관계가 제기하는 문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내적 체험』은 그 자체로 '자서전인가, 철학서인가' 또는 '문학적 허구인가, 체험적 이론인가' 등등의 문제를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쓰기의 장르가 지닌 경계를 넘어 이론과 문학이라는 두 극이 지닌 양가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이질학은 바타이유적 글쓰기의 내용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글쓰기의 형식과 구조의 측면에 있어서도 하나의 '원리'로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문학이 철학적 이론의 자리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철학이 문학의 설명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학과 철학은 바타이유의 유물론적 기획 안에서 서로 뒤섞이면서 일종의 '문학적 철학(la philosophie littéraire)'이라는 이질적 글쓰기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이종접합'으로서 바타이유적 글쓰기가 지닌 또 다른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문학적 철학 안에서, 문학은 철학적 함의나 배후를 상정하지 않고, 반대로 철학은 문학적 문체와 장치들을 도구화하지 않는다. 이는 곧 문학과 철학의 환원불가능성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이 둘 사이의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 곧 문학과 철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극성이자 하나의 양가성으로 파악하려는 이론적이고 체험적인 기획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문학이나 철학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 파악하는 행위가 아니라 '문학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한계를 묻는 '불가능성'의 작업이 될 것이다. 

 

▷ 『눈 이야기』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육체의 '불가능한' 변용.
 


6. '당위'의 질문으로 — 유물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바타이유는 헤겔주의와 니체주의 사이에서, 곧 헤겔적 부정성의 극과 니체적 웃음의 극 사이에서, 동요하고 경련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타이유의 사유가 양자 간의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극단적인 철저화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바타이유 안에서 헤겔적인 부정성은 모순의 해소와 지양을 통한 통합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또한 니체적인 웃음은 긍정과 힘의 철학이 아닌 결핍과 결여의 사유 안에서 터지는 희비극적 웃음의 형태를 띤다. 이 두 양극단은 바타이유의 유물론 안에서 마치 하나의 이항대립처럼 서로를 오염시키고 훼손함으로써 소통한다. 곧 바타이유 안에서 헤겔은 니체에 흘레붙고 니체는 헤겔을 겁탈한다. 바타이유를 각각 헤겔의 영향 하에서 또는 니체의 영향 하에서 독립적으로 파악하려는 이론적 시도는 많았지만, 이러한 두 극 사이의 양가적인 '기형성'과 '잡종성'에 주목했던 논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Denis Hollier, "De l'au-­delà de Hegel à l'absence de Nietzsche", Philippe Sollers(éd.), Bataille, Paris: UGE, 1973만이 거의 유일한 예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세계의 밤(die Nacht der Welt)"[Hegel, Gesammelte Werke, Band 8, Hamburg: Meiner, 1976, p.187]이라는 '한계 경험'에 주목했던 헤겔, 그리고 그러한 헤겔의 논의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던 바타이유의 '내적 체험'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체험은 또한 지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이질성의 영역인 "맹점(tache aveugle)"[L'expérience intérieure, O. C., V, 129]이 바타이유에게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맹점은 지성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불가능의 지점, 지식(savoir)의 철학이 아닌 비지(non-savoir)의 체험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바로 여기서 바타이유의 웃음은 무엇보다 웃을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희극적' 상황에 대한 '비극적' 반응으로 나타나며, 또한 양가성과 이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지고성/주권의 유물론에 가닿는다. 

 

▷ 『눈 이야기』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기형과 잡종, 혹은 합일과 소통.

지양과 통일을 상정하지 않는 변증법은 '철저한' 유물론과 '처절한' 경험론의 모습을 띤다. 에드와르다는 신성과 동물성, 남성성과 여성성, 동질성과 이질성이라는 두 극 사이를 현기증 나게 왕복하는 어떤 유물론적 운동의 화신으로 출현한다. 이러한 두 극은 궁극적으로 어떤 지양이나 통합을 상정하지 않는다. 바타이유의 이원론적 유물론이 목표로 하는 것은 두 개의 극 사이를 오가는 '비목적론적인' 변증법이며, 따라서 결국 그것은 '탈-변증법적인' 변증법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기존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니라 그것의 전복된 형태인 '유물론적 변증법'의 모습을 띤다. 이러한 변증법은 이차원적으로는 단순한 왕복운동의 형태를 띠지만 삼차원적으로는 나선형의 운동성을 갖는 것이다. 이론과 문학, 성과 속의 영역 사이를 오가는 『마담 에드와르다』의 세계는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이질학적인 유물론과 변증법의 자리 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바타이유의 문학과 철학이 가리키고 있는 자리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파악된 인간의 조건, 곧 신성과 동물성의 양극을 오가는, 성과 속의 세계에 공히 속해 있는 인간의 장소이다. 바로 여기서 다시금 바타이유의 유물론을 구성하는 핵심범주인 극성과 양가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매우 흥미로운 언급을 하고 있는데, 바타이유의 이질학은 고귀함과 천함이라는 전형적인 이분법을 넘어서 규칙을 벗어나는 "제3항(le troisième terme)"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낮음'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낮음은 (고귀하지도 천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용어가 아니며, 또한 (고귀하기도 하고 천하기도 한) 절충적인 용어는 더 더욱 아니다. 그것은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 충만하고, 탈중심적이며, 환원불가능한 용어이다. 이것은 (구조적) 법의 바깥에 있는 유혹의 용어인 것이다."[Roland Barthes, "Les sorties du texte", Le bruissement de la langue. Essais critiques IV,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93[1984¹], pp.297-298] 따라서 '낮음'의 유물론과 이에 기초한 이질학의 개념은 변증법이라고 하는 '법'과 '규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탈중심적이며 탈변증법적인 것이다. 이러한 제3항은 변증법의 통합적 체계 안에 속한 항이 아니라 그 체계 바깥에 있는 어떤 균열로서, 그 자체로 하나의 이질성으로서 기능한다. 이 '낮음'은 '낮은' 것, '비천한' 것으로 불리지만 결코 위계 안에 종속되지 않는 것, 구조와 체계로의 환원이 불가능한 이질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며, 이는 또한 '유물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당위의 질문에 대한 바타이유의 결정적 답변이 되고 있다. 

 

▷ 『눈 이야기』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신성한' 신성모독, 혹은 무신론자의 '신학대전'.

따라서 바타이유의 글쓰기는 이러한 이질성을 글쓰기 자체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위계와 체계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의 형상을, 곧 금기와 위반, 경계의 안과 바깥 사이에 있는 인간의 자리를 서술하는 하나의 인간학적 기획을 구상하고 감행한다. "최소한, 신은 알고 있을까? 그가 만약 '알고 있다면', 신은 돼지일 것이다."[ME, 30-31] 이 문장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부조리 안에 바타이유 사상의 역설적 핵심이 위치한다. 이는 바타이유가 그의 또 다른 소설 『하늘의 푸르름』에서 여주인공 디르티(Dirty)의 존재를 통해 제시했던 인간의 양가적 조건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도끼를 맞은 돼지처럼 눈이 뒤집힌 채 비명을 지르며 신적인 질서에 가닿는다. '신'과 '돼지' 사이, 이 역설적이고 전복적이며 부조리한 인식의 자리가 바로 바타이유가 자신의 '인간학'을 기획하는 장소이다. 바타이유가 유물론과 에로티즘의 문제를 통해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계적' 지위를 갖는 인간의 모습, 그 이원론적 양가성의 형태인 것이다. 문학과 철학 사이, 소설과 비평 사이, 체험과 이론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호하게 만들면서 '단 하나의' 글쓰기를 수행했던 바타이유의 문학적/철학적 전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인간학을 서술하기 위한 이론적 개념이자 전복적 장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 안에서 이해되는 인간은 무엇보다 신이자 돼지, 곧 신성을 가진 존재이자 동시에 비천함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나선형의 극성 운동 안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양가적 존재이며, 또한 이질성의 체험 속에서 연속성을 경험하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신성에 가닿는 인간은 동시에 "짐승처럼 발가벗은(nue comme une bête)" 존재인 것이다[ME, 28]. "그녀의 행복, 발걸음이 지닌 절도 있는 엄숙함과는 무관한 홀의 소란스러움은 성대한 봉헌이자 화려한 축제였다. 죽음 자체도 그 축제에 속해 있었다. 사창가의 벌거벗은 몸이 백정의 칼을 부른다는 점에서."[ME, 21-22] 비명을 지르며 피를 뿜는 돼지 안에, 온몸을 떨면서 넘치는 에로스의 눈물과 체액을 쏟아내는 비천한 존재 안에, 바로 성스러운 신성과 존재의 연속성에 가닿는 이질적인 체험의 핵심이 위치한다. 신이자 돼지로서의 인간은 바로 그 둘 사이의 경계 위에 있는 존재이며, 오직 그 둘 사이를 왕복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도 하다.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의 잠언처럼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지만[La Rochefoucauld, Maximes, Paris: Garnier-Flammarion, 1977, p.47], 바로 그러한 태양과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불가능성 자체를 직시하게 되는 어떤 실명(失明)의 순간에,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개안(開眼)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또한 인간인 것이다. 

 

▷ 『눈 이야기』를 위한 한스 벨머의 삽화: '실명'과 '개안'의 표리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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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한 자락: 한스 벨머(Hans Bellmer)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ㅡ그러니까 한 마디로 '敬愛'하는ㅡ미술가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한스 벨머의 삽화들 중 위의 마지막 그림을 볼 때마다 내게는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앨범이 하나 있다. 펑크 록의 선구적 밴드들 중의 하나인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1973년도 데뷔 앨범이 바로 그것. 그들의 음악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저 앨범 표지만은 너무도 마음에 들어 했었는데, 이 앨범의 속표지에는 마치 한스 벨머 그림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한 듯한 그림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한스 벨머는 '보여주고' 뉴욕 돌스는 '가린다는' 것일 텐데(또 한 가지, 뉴욕 돌스 앨범의 그림은 한스 벨머의 그림에 비할 때 너무나 '조잡'하고 '천박'하다는 것), 구도의 상동성에도 불구하고 이 '드러내기'와 '덮어두기'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하나 놓여 있다는 점만을 첨언하고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는 길에 덧붙여, 언젠가는 회화와 사진 등 '이미지'의 관점에서ㅡ그리고 또한 초현실주의 등의 사조와 그 '변종'들, 또는 '예술사적 영향관계'라는 맥락에서ㅡ바타이유에 관한 또 하나의 '비천한' 글을 써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망을 슬쩍 밝혀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10월이다, 전쟁(bataille)이다.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 뉴욕 돌스(New York Dolls) 데뷔 앨범의 겉표지(↑)와 속표지(↓).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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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10-01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유'가 아니라 '바타이유'라서 반갑습니다.^^ 글은 나중에 읽게 되겠지만, 이미지만으로도 휘황하네요!..

람혼 2009-10-02 02:09   좋아요 0 | URL
제 스스로도 '바타유'라고 쓰는 건 언제나 너무 어색해서요. 저도 무척 '반갑습니다'.^^ 글은 나중에 읽게 되신다니 조금은 아쉽기도 합니다...! 이미지들은 제가 경애하는 벨머의 작품들입니다.

2009-10-01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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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2 0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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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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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6 0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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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6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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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8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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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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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0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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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1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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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2 0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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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2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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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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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16: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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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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