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01111425

 

지난 6월쯤에 <프레시안>에 썼던 서평이 하나 있었는데, 링크 해둔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피터 버크(Peter Burke)의 <문화 혼종성(Cutural Hybridity)>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 제가 썼던 서평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따위의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잡종(hybrid)' 개념의 이론적 전유와 실천적 발명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 피터 버크, <문화 혼종성> 서평

 

 

소위 혼종(hybrid)과 혼합(fusion)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세계라는 시공간이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어떤 절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름들로 '우리'의 시대가 규정되고 소비되며 유통된 지 이미 오래라는 의미에서, 혹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시공간이 그러한 규정적 개념어들이 지닌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단일하게' 규정되어 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쩌면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의 시대와 세계는 말 그대로 혼종과 혼합의 시공간이다.

 

'우리'의 시공간은 혼종과 혼합이라는 어떤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인해 매우 '상상적으로' 작동되고 조작되는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상상적 시공간 한복판에서, 아니 그러한 한복판이 도래한 듯 보인지도 이미 한참 된 어떤 한복판에서, 한 책의 번역은 좀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뒤늦은 감마저 있다(이러한 '지연'의 감각은 이 책의 출판 연도인 2009년과 한국어 번역본의 출판 연도인 2012년 사이의 물리적인 시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터 버크(Peter Burke)의 책 <문화 혼종성>(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혹은 바로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어떤 집단적 정체성이) 속해 있는 남한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다문화(多文化)'라는 또 다른 폭력적 용어가 소위 '한국적 관용(tolérance)'을 의미하는 지극히 어용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서부터, '우리'에게도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게도"라는 저 가장 익숙한 듯 보이는 어구의 맥락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혼종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가장 문제적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낯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문화 혼종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그렇게 전형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교과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일차적인 미덕은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매우 영미적인) 교과서적 서술에 있으므로.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문화 혼종성이 현재 어떤 첨예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현상이 어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과연 다른 책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저 "각양각색의"라는 혼종적인 꾸밈말에 걸맞게 실로 각양각색의 사례와 예시들을 통해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포괄적 지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차후 더 진행될 수 있는 비판적 독해의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구인은 음악의 영역, 특히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같은 다른 문화로부터 음악을 차용한 뒤에, 결과물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본토 음악가들과 저작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3세계 음악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가공'되는 일종의 원자재처럼 취급해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00여 년간 서구 학자들은 자주 세계 다른 지역들의 식물이나 치료법 등에 대한 토착적 지식들을 이용해왔지만, 그 원천에 대해 항상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쪽)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른바 문화적 '덧쓰기(palimpsest)'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분류에 바쳐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란 쓰고 지우며 그 지움의 흔적을 지닌 채 다시금 덧입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특징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예시들을 따라 그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보려는 욕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양날의 검일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에 대한 어떤 날 선 문제의식과 날카롭게 벼려진 비판 의식을 얻고 또 되묻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주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이택광의 해제를 오히려 피터 버크의 본문보다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택광의 해제 역시 다소 교과서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그리고 예상외의 그 논문 식 어투가 계속해서 독해를 방해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택광은 피터 버크가 그 자신의 주제인 '문화적 혼종성'에 대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해제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 해제를 단순한 '해설'로 읽지 않고 오히려 문화적 혼종성을 일견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피터 버크의 기만적인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서 읽어낼 때 우리는 이 해제의 의미와 위치와 맥락을 더욱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왜 (피터 버크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어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전략과 목표는, 단순히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정보의 습득에 멈춰서는 안 되며, 피터 버크 그 스스로가 오히려 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 저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라는 더욱 적극적인 독해 행위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독해의 방식이 이 책을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어쩌면 가장 '다문화적으로' 읽는 전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독서란 무엇보다 하나의 전략인 것).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철 지난 유행의 이론 혹은 일의적이고 동일적인 세계화의 숨겨진 전략이자 이데올로기였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지난 지는, 지났다고 생각된 지는, 실로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직 죽지 않은) 유령을, 그 유령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시 소환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냉전 시대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닌 가장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알리바이였다고 한다면, 문화적 혼종성이란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지닌 가장 국가적이자 국지적인 알리바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주에 반대하는 유목이란, 다시 말해 정착과 영토화를 거스르는 노마드(nomad)의 개념이란, 현재 그 정치적 파괴력을 잃고 얼마나 '낭만화'되고 '안전화'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실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hybrid'라는 개념은 '혼종성'이라는 지극히 점잖은 용어로 옮겨지는 동일성의 다른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 뜻에 걸맞게(그러나 또한 'hybrid'에 있어 '본래'라는 기원과 시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잡종'이라는 보다 잡스러운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날것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이 책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이 책이 지닌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서,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크레올화"(169쪽)이라는 개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은 실로 양가적인 개념이어서, 때로는 수구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적 질서 구축을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가장 파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이고 급진적인 논의들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아닌) '우리'는 작가의 (영문판) 서문으로 새삼 다시 돌아가 작가 그 자신의 변명 혹은 자기변호를 재차 되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백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한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는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혹은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문화적 전지구화가 작가 자신에 미친 '영향'이 정말 '복수'였는가 하는 문제(혹은 그것이 외부의 '복수'라는 이름을 가장한 지극히 내밀한 어떤 '욕망'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영향' 혹은 '복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쓰일(作/用)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일종의 폭력적 단순화 작업, 잡종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동일화 작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한 가능성의 주제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 불가능성의 지점을 매우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책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인 문화 혼종성이 지닌 어떤 불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 혹은 '우리'에게 이 책의 '번역'이 주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것일 터, 아마도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고 되물어야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야 할 어떤 문제적인 시발점일 것이며,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의 의미를 되물으며 이렇듯 끊임없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때에만 어떤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유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유목의 정치적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야 하듯, '우리'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잡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잡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6743 

 

 

"어느 비평가처럼 '절충주의와 예술적 아취는 병립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즈가 본질적으로 절충적인 음악 형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는 출발부터 '사생아'였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재즈를 순수와 절충 형식으로 구분해볼 때 오늘날 순수해 보이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절충적이며 얼마나 복합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 요아힘 에른스트 베렌트(Joachim Ernst Berendt), <재즈북(Das Jazzbuch)>(한종현 옮김, 자음과모음, 2012), 8쪽.

 

 

<재즈북>.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2004년에 초판이, 2006년에 재판이 나왔던 책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구한 판본은 올해 8월 초에 출간된 3판. 서문을 읽다가 위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마지막 문장의 한국어가 약간 어색하긴 하다). 비단 재즈뿐이랴. 예술도, 철학도, 그 자신의 절충적이며 복합적인 기원의 '기원성'을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아니, 보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원'이란, 그렇게 '순수한' 것으로 상정되고 상상되며 (바로 그러한 상상적 상정을 통해) 회고되기에 비로소, 그렇게 상정되고 상상되며 회고될 때에야 비로소, 그렇게 '기원'으로 기능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조금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적확함이 지닌 역설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말하자면, '기원'의 가능조건이란 오히려 바로 이러한 '망각'에 다름 아니다.

 

<재즈북>의 차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읽고 싶은 부분들만 조금씩 읽었는데, 재즈 초심자에게는 두고두고 확인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일 테고, 재즈 애호가에게는 재즈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점검해보면서 정리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일 거라 생각된다. "Quintet du Hot Club de France"를 "퀸텟 '두' 핫 클럽 드 프랑스"(547쪽)로 표기하고 있는 게 아주 작은 흠이라면 흠이겠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12-08-2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음과 모음'에서 다시 나왔군요. 과거의 판형은 아닌 듯 하군요.ㅎㅎ 너무 크거나 또는 너무 길거나. 지난해 봄에 나온 <문화/과학> '21세기 주체형성론'을 살펴보고 있는데, 람혼님의 글이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한밤의 미학이 한낮의 정치...'

람혼 2012-08-28 11:26   좋아요 0 | URL
네, 과거 판형보다 조금 작게, 조금더 도톰하게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책은 참 예쁩니다.^^ 그나저나 그 글을 읽으셨군요? 작년에 썼던 글이었는데, 저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2-08-28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8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학에 던지는 12가지 질문](12)

SNS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SNS의 ‘소통’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저자 최정우씨의 배경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인터랙티브 예술을 선보인 고 백남준의 작품(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이다. | 사진작가 박재찬

ㆍSNS시대 ‘징후’의 해석과 대응은 인문학의 몫

■ 집단지성이라는 알리바이

바야흐로 SNS의 시대, 곧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의 시대다. 나는 물론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인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혹은 반대로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에 어떤 효과를 미치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말하자면, 마치 원래 ‘인문학’이란 것이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소화와 평가를 어쩌면 필연적이고도 의무적으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수행하거나 반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SNS의 시대라고 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메타적인 층위에서 무언가를 규정할 수 있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 또는 현상들 자체가 특정한 인문학적 ‘가능조건’들을 규정하고 또한 그러한 인문학적 ‘효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인문학 자체는 SNS 시대를 해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어떤 불변하는 상수가 아니라 현재의 SNS 시대라고 하는 역사적이고도 기술적인 환경에 내속되어 있는 어떤 종속적인 변수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소위 ‘인문학’이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포함하여 현재 SNS 시대의 등장 안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해온 주체는 통상적으로 ‘집단지성’이었으며 그러한 논의의 틀은 현재도 큰 변함이 없다. 집단지성은 익명적이고 불특정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성격들 때문에 특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이고 단수적인 주체나 대중적, 여론적인 지성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자기갱신이 가능하고 정치적으로 더욱 기동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위키피디아, 구글, 다음의 아고라 등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가 사실 그러하며 우리는 거기에 그러한 특성들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지성은 실재하는가, 또는 집단지성이란 그러한 실체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가, 혹은 이 질문을 더욱 ‘인문학적’으로 적확하게 정식화하자면, 인문학은 이 SNS의 시대에 집단지성이라는 주체의 이름을 소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정당한 윤리와 적합한 정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 인문학의 알리바이, 상이한 형태로 언제나 있어 왔다고 생각되는 ‘시대정신’, 바로 그 이름으로 부여되는 어떤 환상의 알리바이는 아닐까.

■ SNS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시대가 SNS 시대라는 저 하나의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적인 네트워크, 곧 인간관계의 사회적인 망이 단순히 지역적이거나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역과 분과들로 ‘확장’되었다는 의미, 둘째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망이 일종의 ‘서비스’로서 제공되고 향유된다는 의미, 셋째 이러한 SNS가 어쨌든 과거와는 매우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의미는 그 자체의 표면적인 의의보다는 징후적인 효과로서 독해되어야 하며, 또한 일견 가장 중심적으로 보이는 의의로부터가 아니라 가장 주변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로부터 독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확장’이란 단순히 양적인 공간의 팽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 안에 ‘비관계의 관계’까지도 포함되고 포착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트위터에서 단순히 우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따르지/구독하지(follow) 않으며, 또한 페이스북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친구 신청(friend request)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비관계’ 혹은 ‘무관계’였던 어떤 인간관계가 SNS 안에서는 하나의 실체적인 관계로 등장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비관계/무관계가 이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전혀 다른 형식의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인간관계는 기존의 관계망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두 번째로 그것이 ‘서비스’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근본적으로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질서 바깥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 ‘서비스’에 가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어떤 가격을 지불하거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그 이름 그대로 하나의 ‘서비스’인 한에서 그것을 통해 어떤 식의 ‘이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 이익의 형태는 인간관계의 구성(페이스북의 ‘친구’나 ‘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의견의 확대재생산(트위터의 ‘인용’이나 ‘리트윗’)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입장과 위치의 확립과 파괴에 결부된다. SNS를 통해서 인문학이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SNS는 흔히 ‘소통’의 현대적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예를 들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그에 붙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일반적인 이름과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예상되는 소통의 기능과는 어긋나게도, 결코 ‘대화(dialogue)’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트위터는 대화라기보다는 ‘증언(testimony)’의 형식을 띠며, 페이스북 또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전시(exhibition)’의 형식을 띤다. 다시 말해 SNS의 이 대표적인 두 형태는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monologue)’ 형식에 가까운 모습을 띠는 것이다.

특정한 수신자를 상정하고 있는 전화 통화나 문자 송신과는 전혀 다르게,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특정되지 않은 수신자를, 전혀 정해지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게 발설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발설이 적확하게 기대하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수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언(message)의 개념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며 특징적인 성격이다. 그 전언은 특정한 수신자를 갖지 않고 부유하며, 수신자는 오히려 그 스스로 자발적이고도 임의적으로 그러한 수신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소통’의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의 실체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인문학이 SNS를 통해 물어야 하고 또 인문학 자체가 SNS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징후에 대한 해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소위 보편성을 지향하고 객관성으로 통합되며 중립성으로 교정되는 집단지성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희망이 합의나 종합에 대한 일종의 ‘지독한 환상’에 근거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되물어야 한다. 오히려 SNS는 인문학으로 하여금 보편적이지 않고 편파적이 되는 인식의 방법, 중립적이지 않고 당파적이 되는 존재의 윤리, 통합적이거나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러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총체성이 지닌 감각의 정치를 요청하며 또한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는 보편성을 해체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이 전제하던 통일성과는 다른 형태의 어떤 총체성,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을 인문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통’이라는 공허한 지저귐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세심하게 경계해야 할 근본적인 지점은 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SNS 시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SNS가 그렇게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해버릴 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저 월드와이드웹과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일견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매우 특수하고 특정한 물질적 조건의 유물론적이거나 계급적인 의미를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라고 하는 지저귐(twitter)의 형식과 대상은, 잠에서 깨 일어나서 먹고 싸고 일하고 놀고 다시 자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개인적인 안부의 교환과 소망의 표현,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발언과 의지의 표명을 통과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140자라는 지극히 협소한 공간 안에서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트위터는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 (최근 이 질문은 무심하게도 ‘새 트윗을 작성하세요(Compose new tweet)’라고 하는 밋밋한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질문이 남겨둔 공란에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로 그 제한적인 140자 안에 적어 넣는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대답이 반드시 지녀야 할 어떤 적합한 대답의 형식을 포함한다.

그 대답이란, 대답의 형식이란 ‘무엇(what)’이다. ‘무엇’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무엇’이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라 일종의 ‘사건(event)’이 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SNS 안에서 물어야 하고 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추상적인 관념의 시대는 사라지고 현실적인 경제의 시대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저귐만큼이나 공허한 지저귐은 다시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라고 하는 시대의식만큼 강력한 이념이야말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SNS는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우리 시대의 투쟁이 개념과 이념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수신자는 바로 인문학일 것이다.

<시리즈 끝>

<최정우 | 비평가·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름과 호명의 미학, 고유명과 국적의 정치 (1)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

1) 하나의 지도에서 시작해보자. 한국과 일본 사이에 펼쳐져 있는 저 바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 한국인들은 이 바다를 '동해(東海)'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당신은, 나의 저 주어를, 말 그대로, 잘 읽어야 한다, 나는 저 '우리'라는 주어에 언제나 기시감 같은 경기와 구토증 같은 혐오를 일으킬 정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으므로). 주지하다시피, 일본인들은 같은 바다를 '일본해(日本海)'라고 부른다(또한 당신은, 나의 저 부사어를, 말 그대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지하다시피'라는 말이 드러내고 행사하는 가장 근본적인 폭력성에 매혹되는 동시에 압살되므로). 이는 말 그대로, '말 그대로' 말하자면, '일본의 바다'라는 뜻이겠는데,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말 그대로'라는 말 그대로 지나치는 말로 부연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무엇보다 이름의 문제이다. 이 '일본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일본의 바다라는 뜻을 갖는가? 여기서 소유격 조사 '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어떤 소유의 관계를 나타내는가(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 이름이 이렇듯 어떤 실제적이고도 실효적인 '소유 관계' 혹은 '지배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열을 올리지 않는가)? 혹은,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법적이거나 경제적인 권한의 문제가 아닌 단순한 문법적 관계를 가리키는 규정어인가(그런데 우리는 그 말이 이렇듯 '단순한 문법적 규정'이 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곧 하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의 지위를 넘어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정하면서 또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에[라도], 하나의 바다를 '동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일본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자존심이나 자긍심 따위의 문제를 훨씬 상회하는 문제, 곧 근대 국민국가라는 체제 그 자체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문제가 된다. 하여 나는 이 바다의 이름(들), 하나의 바다를 가리키는 두 개의 이름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국가라는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하기 위하여.

2) 여기까지 되물었을 때, 이 문제들은 단지 '일본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지적'인 문제이기를 그치고, 우리가 매우 당연한 듯 지나친 저 첫 번째 이름, 곧 '동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가적'인 문제로 옮겨간다. '동쪽에 있는 바다'라니, 어디의 동쪽, 누구의 동쪽이란 뜻일까? 이거 왜 이래(우리가 남인가), 어디라니, 소위 '대한민국'의 동쪽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왜 당연한 걸 몰라?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다시 묻자면, 이러한 이름은, 그리고 우리가 그 바다를 그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말 그대로', 당연한가? 하지만 나는 여기서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방위의 개념을 바다의 이름에 포함시킨 이러한 명명법의 어떤 자기본위적 성격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말 그대로,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본위적 성격을 지닌 일견 '중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름에 담겨 있는 어떤 '편향성'이다(그리고 '우리'란 이러한 편향성 안에 지극히 '편향적'으로 묻혀 있는 주체, 매몰된 주어이다). 여기에는 어떤 하나의 미학이, 그것도 눈먼 미학이 놓여 있다. '동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일견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부를 때 그 이름이 감추고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잘 생각하지 못한다고 [누군가에게서] 질책을 받는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여기서 잠시 친절한 금자 씨의 명언을 빌리자면, '너나 잘하세요'), 지극히 중립적이면서 동시에 편향적인 방위의 개념을 통해 하나의 지명을 규정하고 있는 어떤 미학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동해'라는 이름은 사실 '한국해'라는 이름을, '한국의 동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있는 이름인 것. '우리'라는 주체/주어는 '동해'가 '일본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국적의 침탈'을 느끼며 불쾌해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동해'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저 국적의 성격과 저 침탈의 성격을 보지 못한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우리가 다시금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 지극히 당연하며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사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의 정서와 국적의 이름을 둘러싼 하나의 미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는 또 다른 바다의 이름: 그렇다면 왜 세계의 모든 '지-중(地-中, medi-terranean)해'들은 그 고유명의 고유성을, 혹은 그 보통명사의 보편성을 주장하거나 기소하지 않는가?


2. "구미(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

3) 왜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하나의 '아름다움', 혹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둘러싼 미학적 투쟁인가? 게다가 그것은 왜 또한 그러한 '이름'들을 둘러싼 투쟁인가? 여기서 잠시 이 문제를 에둘러 가보자(그리고 내가 항상 이렇게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 우회의 길에는 급행의 길 안에 없는 어떤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일말의' 진리야말로, 그 '전체 아닌' 진리야말로, 실은 '전부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길에 대한 선택과 사랑은, 어쩌면 선택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지극히 가능한 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에게는 '구미(歐美)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진부하리만치 익숙한 하나의 문형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문형은 이런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었다니, 이는 미국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스러운 일이다" 혹은 "이렇듯 국회 안에서 날치기가 횡행하고 폭력이 난무하다니, 이는 유럽 의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해외 토픽감이다" 등등.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문형들을 일거에 각성케 하는 명문이 있었으니, 그 일례로 <뉴데일리>라는 보수반동 언론의 최근 기사 한 토막을 살펴보자. 김진숙 씨가 여전히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고 '희망버스'가 오가는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가 군함 등의 군사 장비를 생산하는 국가 보안 시설임을 강조하면서 이 언론은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고 상정된 '무지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그런데 여기서 진짜 '무지'한 것은 누구인가): "이런 중요시설에 '희망버스'라는 정체불명의 시민단체 차량을 내세우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사다리를 이용해 침입한 것이 자랑스럽게 언론에 올라올 정도라는 것은 총체적인 국가 혼란 상태를 의미한다. 공권력의 힘이 강력한 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국가였더라면 A급 국가 보안 시설에 무기를 들고 난입한 자들은 경비 병력들에 의해 무력 저지(경고 사격 후 실탄 사격)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의 국가 보안 등급 시설물을 지키고 있는 군과 경찰 병력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뉴데일리> 기사 「한국 공권력은 죽었다?」: http://j.mp/k9AZxL 참조) 이 땅의 우익은 모두 죽었는가, 하고 절규하듯, 마치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심정과 그 정서로, 이 실로 거대한 엄살을 떨고 있는 문장을, 우리는 함께 읽는다, 이 시대에, 마치 하나의 진기한 기적처럼, 그렇게 함께 읽게 된다.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1814)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1951). 이 절멸의 신화는 왜 역사 안에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반복되는가? 그리고 저들의 절멸에 맞서는 우리의 절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4) 반복하자면, 그렇게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저 진부한 문형('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이 얼마나 참신하게 사용한 경우인가!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저 언론이 부러워하고 있는 어떤 '선진국'의 위용이란, 바로 저 무지하고 무례한 폭도들을 일거에 총살시킬 수 있는 어떤 '용기', 그런 불순분자들을 일거에 절멸시킬 수 있어야 하는 어떤 '애국심'인 것. 그렇다,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그렇게 함께 읽고 있다, 믿을 수 없게도, 말하자면, 다른 나라도 아닌 소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한 언론의 지면에서, 그렇게 초현실적으로 함께 읽고 있다(그렇다면 그 '자랑스러움'이란 누구를 위한 자랑스러움이었는지 여기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자,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어느 쪽일 것인가? 국가 보안 시설을 제멋대로 침탈하는 폭도들을 향해 사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 병신 같은 군과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라고 종용하며 강권하는 저 대쪽 같고 위엄 어린 자유 언론일 것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 구미에는 있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또 과연 어느 쪽인가? 나는 위의 주장과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한 하나의 반례를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그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서, 어쩌면 오히려 반대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한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936년 GM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있었을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그곳에 군대를 파견한다. 왜 그는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군대를 파견했을까? 그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들에게 발포하기 위해서? 전혀 아니었다. 군대의 총구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바로 사측의 용역과 구사대를 향했던 것. 말하자면 루즈벨트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 자유 언론의 말을 그대로 비틀어 그들에게 다시금 되돌려주자면, 이는 실로, 경찰이 용역 깡패를 비호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폭도로 규정하여 진압하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묻는 것이다: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또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들에게만 있는 것, 우리에게만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것이란, 그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란, 그 상상 가능한 것과 상상 불가능한 것이란, 정말 무엇인가?



▷ 마이클 무어 감독,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2009)의 한 장면. 되묻자면, 진정한 '범죄 현장(crime scene)'은 과연 어디인가?


3.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당위

5) 그렇다면 왜 저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은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 모든 '상상 가능한 것'에 관한 담론들이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중심으로 그렇게 '환상적'이고 '허구적'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orange'를 '아린지'라고만 발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한 그러한 발음법만이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생존 전략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 식민지 국가 안에서,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 협박과 공갈의 문형은 하나의 영속적인 지배 규준으로 기능한다(그러므로 진정한 '식민지 국가'란, 상상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범위와 경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하나의 미학적 체제이다). 그리고 그 지배적 규준이란 '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이라는 한 절체절명의 분류법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때때로 발생하곤 하는 일들이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설정된 저 '선진국'이란,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발전 단계로 설정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계속해서 지연되고 유예됨으로써만, 오직 그렇게 계속 연기됨으로써만, 하나의 전범이자 모범이자 규준으로 기능하게 되는 뒤틀린 욕망의 장소이다. '우리'는 '선진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죽었다 깨어나도 소위 '한국인의 국민성'은 선진국 진입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 요소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선진국 진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들 그 자체가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단계가 하나의 허구적 전범으로 기능하고 있는 한, 우리가 그 허망한 욕망의 문법과 지연의 체제를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노파심에서 반복하자면,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가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누군가를 크레인 위에서 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리고 용역이든 경찰이든 동원해서라도 누군가를 재개발 구역에서 몰아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이 오매불망 불철주야 노력하고 경주하는 저 선진국 진입이라는 허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그리고 실은 그들은 바로 그 허상의 '요원함' 자체를 무기로 지배하고 군림한다.


 

 

 

 

▷ 용산의 기억과 망각: 그들이 원하는 '선진국'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선진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러한 망각일 것이다. '이름'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망각'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어떤 것이다.

6) 그러나 '선진국이 될 수 없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는 모종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유포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전혀 아닌 이유는, 그럼에도 내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어떤 당위를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선진국'이 되는 어떤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소위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으로 이 땅의 '후진성'을 진단하고 '선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들 자신이 믿든 믿지 않든, 그들은 바로 그 '선진국'이라는 환상의 체제를 통해서, 바로 그 '개발도상국-선진국'이라는 허구의 발전 단계 도식을 통해서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선진국'을 앞당기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과정들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지연함으로써 바로 이 현재의 체제를 공고히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 지닌 진짜 모습일 것이며, 그들이 왜 진정한 선진화를 주장하는 다른 많은 목소리들을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잠재우는가 하는 궁금증이 여기서 풀릴 수 있다. 하여 다시 묻자면, 왜 우리는 어떤 바다를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단지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건 사활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자국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참칭되고 환원되며 소급되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저 국가라는 괴물을 공동으로 마주하여 함께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그러므로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자생적이고 민족적인 분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당신은 어쩌면 저 찬란한 '선진국'이라는 담론에 의해서 가장 '감정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한쪽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상찬해 마지않는 눈물 나는 국민주의 미학이 존재하며,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는 이 땅이 선진국으로의 진입 따위를 절체절명의 문제로 삼는 국가와는 전혀 별개의 장소임을 깨달은 자들의 미학이 존재한다. 어떤 미학 위에 설 것인가 하는 이 가장 '미학적'인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미학적인 문제인 한에서, 다시금 가장 '정치적'인 문제로 연결되며, 결국 그러한 정치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임을 직시하게 한다.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저 바다를 마주 보며, 그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에둘러 가는 길을 통해, 시작하고자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달사르 2011-08-0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거 같애요. 특히 식자입네, 하는 사람들에게서요. 그럴때면 괜히 주눅들면서도 뭔가 모를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던 거 같애요. 저 사람은 그 말 빼면 할 말이 없지..등이 고작이었는데요. 오늘 이 글 읽으니, 속이 후련! 합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화면에 나오신 분인가봐요. 저 영화도 본인이 등장을 했나봐요? 식코처럼.

람혼 2011-09-11 16:27   좋아요 0 | URL
속이 후련하다고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사르님. 화면에 나오는 사람은 마이클 무어 감독 본인이 맞습니다. 진정한 범죄현장은 바로 이곳이라며 금융기관 건물 바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장면이죠. <식코>가 재미있으셨다면(재미있다기보다는 씁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도 매우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가합니다.^^

굿바이 2011-08-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다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는 것 자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그래서 이미 질문 자체가 나쁜 선택이 되어버리는 분위기가 답답합니다.
더 나아가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진행되는 그들의 나쁜 버릇도 참기 힘든 시절입니다.

람혼 2011-09-11 16:28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지는 일 자체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저도 불만이고, 이 글도 그러한 불만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글입니다. 결을 따라 섬세하고 꼼꼼히 잘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8-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올려주신 연재글을 모두 정독했습니다. 읽기 전엔 휴우 이 긴 걸 언제 다 읽나 싶다가도 다 읽고 나면 어, 벌써 끝났나? 싶어 늘 아쉬운 것이 람혼님의 글입니다ㅋㅋ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도 3편으로 끝나고 나니 아쉽네요. 람혼님을 계속 쪼아대면 '노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나 '평가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평론'은 제가 잘 모르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설'은 마치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소금을 만들어내는 맷돌처럼 무궁무진하게 해주실 것 같네요. 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인데 건강 잘 챙기시구요^^

람혼 2011-09-11 16:30   좋아요 0 | URL
언제 다 읽나, 그럼에도 벌써 끝났나, 이 말은 제가 들었던 찬사 중 최고의 찬사인데요.^^ 잘 읽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을 거의 살아남듯 통과했더니 아주 짤막한, 그만큼 잔뜩 찌푸린 가을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후와님도 이 힘든 계절(들), 무탈히 나시길 바랍니다. (연재는 네이버 자음과모음 카페에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2011-09-10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세 개의 시각:
삼위일체, 환영과 출현, 제3의 눈, 그리고 다시 외눈박이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십자가형(Crucifixion)>.

1) 그리하여 나는 세 개의 그림, 세 개의 시각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왜 나는 하나에서 둘로, 그리고 둘에서 다시 셋으로 가려 하는가? 곧, 나는 왜 하나의 시점에서 두 개의 시선으로, 그리고 다시 세 개의 시각으로 옮겨 가려고 하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대속(代贖)의 희생자를 목격하기 위하여, 곧 그의 충실한 '증인'이 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틀에 박힌(못에 박힌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 대립과 극성(極性)으로부터 잠시 한쪽으로 비켜나, 가장 기이하나 동시에 가장 미적인 하나의 삼위일체(trinity)에 다다르기 위하여, 다시 말해, 2가 아닌 3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2가 있기에 비로소 어떤 '의미'를 지닐 3을 숭배하기 위하여. 따라서 이 글은 숫자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 혹은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일종의 '수론(數論)'이라는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실망을 금치 못할 텐데(그리고 나는 여기서 실로 그러한 실망을, 심지어 하나의 절망까지를 기대하고 기원하고 있다고 고백해야겠는데), 내가 예찬하고 숭상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항들 사이의 임시변통과도 같은 신비주의적인 봉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이름 아래 지극히 자의적이고 임시적으로 봉합된 3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현재 안에서 무한하게 출현하는 3, 바로 그 세 개의 시각, 세 개의 존재/부재를 위하여, 나는 저 세 개의 그림들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2) 그러므로 이쯤에서 당신은 아마도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한 명의 유물론자로서 기이하게도 어떤 종류의 신성(神性)에 천착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동시에 그 신성에는 신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곧 이것이 신(Dieu) 없는 신성(divinité)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러한 신학은 일종의 유물론에 가닿고 있으며 또한 가닿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따라서 이 신성이란 피가 뚝뚝 듣는 고기가 지닌 어떤 육화(肉化, incarnation)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신의 유물론, 물질의 관념론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한다, 저 세 개의 시각을 향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왜 거의 언제나 세 개의 그림을, 세 개의 시각을 보여주는가(그리고 동시에 묻자면, 왜 그는 거의 언제나 이 '셋'으로써 '하나'를 제시하는가)? 답하자면, 증인/목격자의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 증인/목격자의 시선이 대상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대상과 함께, 틀이 나눠져 있으나 또한 서로 그 경계들이 연결되고 있는 하나의(세 개의) 프레임 안에, 그렇게 하나의(세 개의) 리듬과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 개의 시선, 제3의 시선은 그림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그림들에 속해 있다. 이에 관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 그림은 분리되어 있지만, 더 이상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한 그림의 틀과 가장자리는 더 이상 각각의 제한적인 통일성(l'unité limitative de chacun)을 가리키지 않고, 세 개의 분배적인 통일성(l'unité distributive des trois)을 가리킨다."(Gilles Deleuze, Logique de la sensation, tome I, Paris: Éditions de la Différence, 1981, p.56) 이 통일적/동일적이지 않은 통일성, 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셋(하나)을 나는 종합(Synthese) 없는 총체성(Totalität)으로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하려 한다(우리는 후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다시 읽게 될 것이다, 곧 중독(重讀)하게 될 것이다).

3) 자, 이제, 내가 간절히 원했던,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결코 원하지 않았을, 저 소소하면서도 거대한 실망과 절망의 정체가 밝혀졌는가? 3이라는 숫자는, 그 외면적 안정성과는 정반대로, 직선적인 발전의 서사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중심과 주변(좌우)의 균형 잡힌 대칭성을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모든 '신비주의'들을 배격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신비한' 언어로 이를 표명할 생각이다(그러므로 이러한 표명의 시도는 그 자체로 불가능하며,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 위에서 또한 일종의 역설적 수행성을 갖는다): 3은 불안이며 안정이다, 3은 안이며 바깥이다, 3은 완성이자 미완이다, 고로 3은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따라서, 이미 언급하고 경고했듯이, 이는 [거의] 종교적인 수론, [거의] 수적인 형이상학의 자리를 연다). 그렇다면 여기서 십자가형을 당한 대속의 희생자가 스스로 자신을 '알파(Α)'이자 '오메가(Ω)'라고 이야기했던 저 이유와 사정이 더욱 분명해지고 명징해지지 않는가(그리고 또한 여기서 저 3이라는 숫자에 대한 내 모든 언설들이 단순히 숫자에 대한 신비주의적 담론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음이 또한 확실해지지 않는가)? 스스로 '알파'이자 '오메가'이고자 하는 그 말은, 부동의 균형점에 위치한 채 죽어 있는 신화가 되기 위한 단언적 규정이 결코 아니다, 또한 고착되고 퇴행하는 어떤 신학의 정점에 서기 위한 절대적 선언이 결코 아니다. 3은 동요하는 세계를 포착하기 위한, 그러나 그 포착의 행위 자체가 지닌 동요를 또한 자기지시적으로 드러내고 포함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동시에 실재인 것, 곧 상징에 나 있는 결정적 '상처'로서 실재가 지니는 하나의 도식(Schema)이다. 나는 3을 이렇게 형식적으로(그러나 '내용[알맹이]'의 반대말로 상정된 '형식[껍데기]'으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전부'인 하나의 '형식'으로), 1에서 2에서 3으로의 이행을 이렇게 구조적으로(또한 '순행적 시간성의 직선'이 아니라 '발생적 역사성의 나선'으로) 이해한다. 


  

▷ 빌 비올라(Bill Viola), <낭트 삼면화(Nantes Triptych)>.

4) 이렇게 형식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되는 시간성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또 다른 세 개의 시각, 그리고 세 개의 시간이 있다. 나는 이 계속되는 시작들 속에서, 새삼스레 자리를 고쳐 잡으며, 이 또 다른 세 개의 시각, 세 개의 연계된 이미지들로부터 다시금 출발할 것이다(그러므로 이 글은, 말 그대로 끝이 없는, 적어도 세 개[이상]의 출발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런 시작(始作)이자 시작(詩作)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빌 비올라가 <낭트 삼면화>라는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편리하고 직선적인 시간 분류법이 아니다. 그 '삼면화'는 시작으로 상정된 탄생과 끝으로 상정된 죽음 사이에 어떤 이질적인(hétérogène) 형상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빌 비올라의 저 사이-형상의 의미와 무의미를 빌려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사이'에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우리는 세 개의 시각과 세 개의 항들 안에서 언제나 하나의 중간이자 중심점으로서의 '사이'를 상정하지 않는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 마치 어울리지 않게 들어가 있는 듯한,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한, 저 중간, 저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진행'으로서의 '중간 과정'인가?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그러한 진행과 과정과 그 지속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확정되지 않는 세 개의 시간성,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분류되고 사용되고 있는 삶의 유용한 도구로서의 이 구획된 시간성, 이 세 개의 시각과 시간들이야말로 실로 '세계의 시각/시간'이라는 또 다른 동음이의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다시 다른 불가능한 이야기로 이 모든 시작들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이 아편 같은 '환상'의 시간성을 어떤 유령 같은 '환영'으로 다시 통과하고 관통하기 위하여(그러므로, 다시 보자면, 저 사이의 영상/형상은, 중간도 과정도 이행도 아닌, 어쩌면 말 그대로 하나의 유령이 지닌/지녀야 할 모습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가).


 

▷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경우: '환영' 혹은 '출현'으로서의 'apparition'.

5) 그러므로 나는 이 '사이-존재'를 환상에 반대되는 하나의 환영으로 받아들인다. 그 '환영'이란, 곧 시작과 끝 사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이 '환영'이란, 또한 어쩌면 하나의 통일성을, 곧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져 있지만 또한 그렇게 나눠지지 않는 어떤 세계의 통일적 시간성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 앞서 언급했던 들뢰즈의 말처럼 일종의 "분배적인 통일성"을 이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환영의 의미를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 <L'apparition>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살로메 앞에 홀연히 등장한, 그렇게 '다시 돌아온' 세례 요한의 목. 이 세례 요한의 목은 무엇보다 산 것과 죽은 것,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여 있게 되는 어떤 것, 하여 죽은 것(부재)으로부터 다시 산 것(존재)에게로 끊임없이 다시 '되돌아가는(revenant)' 어떤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세례 요한의 목은 무엇보다 하나의 '환영'이자 '허깨비'(apparition)일 테지만, 그리하여 그것은 무엇보다 한 '유령(revenant)'의 모습을, 되돌아오는 자의 모습을 띨 테지만, 또한 그렇기에 동시에 그것은 결정적으로 하나의 '출현(apparition)'이기도 하다. 이러한 출현의 사건성 앞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눠져 있는 세 개의 시간성은 새로운 분류법을 원하고 있는 것, 감각적인 것의 새로운 분할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 유물론이 단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결정론이나 위계 구조가 아니라 어떤 물질적 관념성과 동시에 어떤 관념적 물질성을 띠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환상'이라고 단정 짓기는 쉽지만, 그것을 이러한 '환영'으로써, 이러한 '유령'으로써, 이러한 '사건'이자 '돌발'이자 '출현'으로써 돌파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경우: 송과선, 제3의 눈(『인간론(De Homine)』의 63번 도판).

6)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의 은유로서, 혹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어떤 '사이의 눈'을, 어떤 '제3의 눈'을 상정한다. 데카르트가 추측했듯이, 그리고 한참 이후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집착했듯이, 만약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으로부터 [퇴화되었던] 하나의 눈이 다시 자라나, 이마를 뚫고, 정수리를 뚫고 자라나, 우리가 단지 두 개의 눈을 갖고는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을, 예를 들어 태양과 죽음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면(최정우, 『사유의 악보』, 자음과모음, 2011, 29쪽, 243쪽 참조), 그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히 부재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또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눈이 불현듯 우리의 몸 안으로부터 몸 밖으로 돌출하고 출현한다면? 그러나 이러한 눈의 비유가 단순히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어떤 중립적이고 간편한 (혹은 간편하게 중립적인) '제3의 길'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송과선 눈에 대한 상상과 추구는 대칭성과 중립성의 담론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이 제3의 눈이란, 일단 '사이'에 있고 '가운데'에 있는 눈이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전혀 '대칭적'이거나 '중립적'인 눈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편향적이며 당파적인 눈이며, 또한 무엇보다 그 자체가 단지 한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외눈'인 것. 가운데에서 솟아난 그 하나의 눈은 모든 것을 보는 눈, 곧 편재(遍在)하는 눈이겠지만, 동시에 결코 공평무사한 시선을 뿌릴 수만은 없는, 그런 가장 절실하며 절박하며 치열한 눈, 가장 커다란 각도로 꺾어지고 치우쳐 바라보는 눈, 그 자신이 관찰자이며 목격자이고 증인이지만, 그 눈이 마주할 수 있고 또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명백하다는 점에서, 곧 편재(偏在)할 수밖에 없는 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유가 단순히 새로운 수사법을 하나 창안하는 일을 초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눈의 개수가 변하는 상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 새로운 감성의 정치, 새로운 지형의 미학을 짜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어떤 개안(開眼)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제3의 눈은 어떻게 열리는가? 아니, 과연 열릴 수 있는가?
 

 

 

▷ 1달러의 뒷면, 모든 것을 보는 눈(All-Seeing Eye).

7) 그러므로 다시금, 이 가장 불가능한 '하나의 눈'이 문제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저 김진숙의 눈, 그가 위에서 아래의 '모든' 풍경들을 목격하고 증언했던 하나의 눈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생각한다, 그 자신은 보이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그렇게 모든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상정되]는 또 다른 하나의 눈, 파놉티콘의 눈을. 말하자면, 하나의 눈이 멀 때, 그리고 대신 또 다른 하나의 눈이 떠질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눈뜸과 눈멂이 교차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외눈박이-파놉티콘의 눈을 어떻게 멀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전지적 시점의 무능성, 그 무능함의 전능성, 그 거리의 관계성을 우리는 저 폴리페모스의 외눈에 어떻게 마주 서게 할 것인가? 따라서 실은, 우리가 하나의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오디세우스의 시점은, 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으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폴리페모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어쩌면 이 가장 적나라한 무능성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힘을, 이 가장 불가해한 익명성이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이름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묻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부리부리한 외눈으로 당신을 감시하며 당신에게 관등 성명을 요구하는 폴레페모스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아무개'로서, '아무것도 아닌' 또 다른 이로서, 나는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닌 당신에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아무개'에게, 그러나 동시에 그 '모두'에게, 그렇게 묻는다, 나와 같은 그 이름(들)을 부르기 위해.
 

 

 

▷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과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장면들.

8) 아마도 이러한 복수의 '우리'의 이름(들)을 부르는 이유, 이 이름(들)이 지닌 하나의 눈을 소환하고 요청하는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해서 나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한 문장을 빌려 대답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설 또는 오히려 우리가 택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가 아닌 정신이 존재하며,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가 아닌 정신이 존재해야 한다(Car ce sera notre hypothèse ou plutôt notre parti pris: il y en a plus d'un, il doit y en avoir plus d'un)."(Jacques Derrida, 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 1993, p.36 /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2007, 41쪽) 우리는 이 '사이'에 복수의 형태로 존재[부재]할 뿐이다, 마치 [하나의] 유령(들)처럼. 아마도 이러한 '탈존재론화'의 모습이 바로 마르크스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성/해체가 목표로 하는 지점일 텐데, 아마도 또한 이렇듯 '탈물질화'하는 해석의 시도야말로 '속류' 유물론이 아닌 '진정한' 유물론, 곧 존재론적이고 실체론적인 유물론이 아닌 유령적이고 해체적이며 전복적인 유물론을 구성해줄 것이다(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로 바타유의 저 '낮은 유물론(bas matérialisme)'을, 곧 그가 그렇게 명명했으나 결코 그 이름으로 체계화하지는 않았던 '이질학(hétérologie)'의 시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기존에 존재하는] 존재론(ontologie)에 대비해 [도래하고 있는/되돌아오고 있는] 유령론(hantologie)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분할 방식을 제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

9) 하여 나는 이 '유령 이야기' 앞에서 쉼 없이 절멸의 문제를 묻는다. 아마도 우리는 계속해서 절멸할 테고 또한 절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순간으로, 그 매순간에서 발현되고 출현하는 하나의 유령 혹은 허깨비 같은 의지로, 오직 바로 그 의지로서/써만, 가장 순간적으로, 유한하게,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유한한 순간 안에서, 찰나적으로, 매번, 무한하게, 끊임없이. 아마도 절멸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우리는 절멸 그 자체의 가능성을 꿈꾸고 실행하며 다시금 실패한다, 반복한다(그렇다면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베이컨의 저 <십자가형> 삼면화의 한 패널이 어째서 나치(Nazi)를 그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슬쩍 예감해 보게 되는 것, 따라서 이렇게 실패하고 반복되는 절멸에의 의지란 'revolution'과 'final solution'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채 위태로운 경계의 줄타기를 감행하는 어떤 '사이-존재'의 의지에 다름 아닌 것). 여기서 나는 다시 나의 저 예의 선택 가능한 듯 보이는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반복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획책하는 '자유', 그 소위 '자유로운' 선택의 테제로부터 벗어나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감시한다고) 말하는 저 외눈박이에 맞서, 역시나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목격하고 증언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눈, 단 하나의 눈을 선택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나를 '초과'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닌', '하나 이상의' 눈을, 그 선택 불가능한 선택지를 선택한다는 것. 이 모든 실천들이 아포리아에 봉착했음을 고지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실천의 아포리아들을, 아포리아(들) 그 자체를 선택하고 수행하며 실천한다는 것. 마치 예리한 면도칼로 하나의 눈을 자르듯, 그렇게 눈을 감듯, 하지만 불가능하게도, 그렇게 또 다시 다른 눈을 뜨듯.


 

▷ 2011년 7월 28일 저녁, 명동 3구역, 카페 마리(Mari)에서: 선언문을 낭독 중인 유채림 소설가, 심보선, 진은영 시인(사진: 람혼).

10) 그리하여 이렇게 뜬/감은 또 다른 하나의 눈은, 아마도 세 개[이상]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각각의 삶에 대해, 각자의 생활방식에 대해, 각자의 호구지책에 대해, 모두 제3자일 수밖에 없으므로(그러므로 우리의 법 체계는 얼마나 세심하고도 감사하게도 '제3자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금지해주고 있는 것인지, 얼마나 섬세하게도 이 모든 개인적인 영역들을 그리도 잘 보존해주려고 애쓰는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공공성'의 영역은 왜 언제나 소위 가장 '사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으로 그렇게 축소되고 환원되고 있는가? 개별적인 사유 재산의 권리와 전문성의 추구라는 일견 매우 정당하고 공평한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미학이 어떻게 우리를 공공성의 영역으로부터 격리시킨 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장 충직한 노예로 만들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정체성과 주체화와 공공성에 관한 이 하나의 명제를 여기서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제3자이고, 또한 그러한 제3자이기에,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러한 아무개이며, 그래서 또한 우리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 대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 '거리의 관계성'을 지닌 모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이다.

11) 만민을 호혜와 평등으로 대한다고 하는 시혜적이고 인류애적인 의식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범윤리적이고 초도덕적인 세계관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단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국위를 선양하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 따위가 아니라 국가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공산주의자(communist)가 되어야 하며, 반대로 ─ 또는 마찬가지로 나는 또한 세계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세계시민(cosmopolitan) 따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시대착오적인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가 되어야 한다(그리고 여기서 는 이 문장의 주어를 우리로 치환해 본다, 이 가장 쉽고도 어려운 하나의 주어, '우리'로). 따라서 이 '우리'가 하나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눈이 될 것이다. 이 역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이 하나의 눈이, 이 하나의 선택적 시점이, 선택 불가능하면서, 그렇게 필연적으로 선택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라고 명명된 이 모든 아무개들인 '나'는 과연 이 역설적 선택의 지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와 당신 앞에 놓인 하나의 눈, 하나의 질문이다. 그 눈과 그 질문은 무엇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목격하는 증인의 시점이지만, 그러나 이 증인은 그림의 틀 바깥에서 그 그림의 대상들을 단지 관조할 수 있는 외부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제3자인 증인이자 목격자로서 이 그림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곧 그렇게 편재하듯 부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러한 편재와 부재의 불가능성 안에 어떤 가능한 힘이 있을 것이다.

12) 바로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동일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것으로 전제된 사적 개인과 집단들의 연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불가능한 연대를, 제3자들만의 연대를, 아무개이자 동시에 모두인 사람들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게다가 그것이 가장 '미학적'이라는 의미에서, 곧 아직 주체로 이름 불리지 못한 '아무개'들의 주체화 과정을 현재 감각적인 것의 분할 방식 안으로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만, 또한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세 개로 나눠진 시각들은, 세 개로 조각난 틀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연대에 내기를 걸 것을 요청하고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연대는, 그것이 '불가능한 우정'이라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가장 나약하고 불안정한 이유 때문에, 아니, 그것이 바로 그렇게 가장 제3자적인 시각들이 구성하는 어떤 '총체성'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은 아닌가? 자,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저 모든 기독교도들을 실망시키고 절망시킬 또 하나의 욕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나중에'라고 말하지 말라, '이후'는 없다, 당신이 꿈꾸고 있을지 모르는 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황홀한 약속의 미래(futur)는, 없다. 따라서 '지금, 여기(ici et maintenant)'를 사유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주의나 현실주의를 올곧게 추종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속해서 도래하고(à venir) 있는 시간과 장래(avenir)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포착하고 수행하는 우리의 저 불가능한 미학적 태도, 우리의 저 불가능한 정치적 연대, 우리의 저 불가능한 이론적 실천, 바로 그 모든 것들의 가능성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절망'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희망'이라고 부를지는, 이로써 매우 자명해지지 않는가(또한 왜 어떤 이들은 단순한 버스 몇 대를 '희망'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또 어떤 이들은 똑같은 버스들을 '절망' 또는 '훼방'이라고 부르는지, 이로써 매우 명백해지지 않는가)? 하여, 나는, 당신을, 바라본다, 하나의 시점으로, 두 개의 시선을 맞세우고, 세 개의 시각을 증언하며, 그렇게, 마주보듯, 어쩌면 그 너머를 보듯.

襤魂, 合掌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사랑 2011-09-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오랜 기다림의 시작?인가요. 심신을 추스렸다니 선생님의 분발을 기대해봅니다.

2011-11-19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0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0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