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3
형태가 쓸모를 발명하거나, 쓸모가 형태를 제한한다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쓸모가 형태를 제한한다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형태와 쓸모 때문에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소유의 욕망만이 제품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 이후 습관이 소비를 추동할 따름이다.
p78
타인과의 경쟁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얻기 위해서 항상 독서가 권장되는 건 아니다. 이미 최대제한속도 이상으로 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짐짝처럼 실려 가면서 한가롭게 독서를 하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삶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신호를 자칫 지나칠 수도 있기 대문이다 바옥에서 사는 동안 내가 신뢰한 지식과 경험은 순전히 대중매체나 인간관계를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 1년에 시사 잡지나 주식투자가이드 서너 권쯤 읽는 게 고작이면서도, 훗날 사업에 크게 성공한다면 서재를 화려한 장정의 책들로 가득 채워놓고 유럽풍 흔들은자에 앉아서 유명 작가에게 내 자서전에 들어갈 내용을 구술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나의 초라한 독서 편력을 생각한다면 이미 수백 년 전에 세상에 출간된 책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여생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업에서 실패했고, 고작 시사 잡지나 주식투자 가이드 몇 권만을 챙겨 모국을 급히 떠나야 했다. 만약 내가 견고한 독서 습관을 지녔더라면 적어도 실패의 인과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도 있지 않았을까. 책꽂이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영혼의 일부를 모국에 떼어두고 온 것 같아 쓸쓸해졌다. 물론 인터넷 덕분에 언제라도 모국어로 된 뉴스와 저작물들을 읽을 수 있지만 목적과 출처가 모호한 정보들은 더욱 깊고 무거운 갈증을 일으켰을 따름이다.
p 85
"상상이란 아주 위험한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잘못 취급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지요. 당신도 곧 그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거의 없을 거예요."
p106
...낙타와도 같은 마음이 칼날 같은 일상 위를 똑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고삐를 바투 잡게 해 주었다.
p107
목적의 제약과 수단의 독점은 필경 선의를 위악으로 만든다.
게다가 고객의 욕망은 비가역적 반응을 통해 무한 증식하므로 누구도 결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무한경쟁과 자연도태만이 자본주의의 유일하고 위대한 원칙이다.
......
파리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주 많이 필요하지만 그들이 파리의 낭만과 자유에 포함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저임금 노동자는 파리 안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만 숙소를 구할 여력은 없다.
우를리 공항 부근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는 숙소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다.
p113
자신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배경과 인물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찾아라.
하지만 배경이나 인물이나 사건은 하나같이 모든 가능성 위에 적절히 산포되어 있는 양자적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진실은 또 하나의 거짓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세상은 오로지 자신을 철저하게 절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오를리 공항 부근의 주차장에서 1년 내내 갇혀 지내는 열다섯 살의 나우팔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모호하고 어려운 잠언일 따름이었다.
생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로지 실수와 후회 그리고 침묵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니, 그런 가르침이 불법 이민의 현실을 벗어나는 데 어떤 쓸모가 있단 말인가.
p120
권력이 없는 약자는 연대의 방법만으로 창과 방패를 마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우팔과 동료들이 미처 헤어질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인생은 이미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각자의 인생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 당시의 배경과 인물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게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22
주사위를 한 번 굴렸을 때 각 숫자가 나올 확률은 정확히 6분의 1이지만, 열두 번쯤 굴렸을 때 각 숫자가 나올 확률은 결코 6분의 1이 아니다.
무한 반복의 결과로 6분의 1이라는 확률에 수렴해갈 수는 있겠지만 인생에서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p133
여갈사하두다는 아람어 방언으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고, '갈르엣'은 같은 뜻의 히브리 방언이다.
p137
"다시 말해, 한 인간의 삶이 없는 것처럼, 역사도 없고, 심지어 수많은 밤들 중의 하룻밤도 없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만 존재할 뿐, 그 순간의 가상의 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반론> 정경원 옮김<만리장성과 책들> 열린책들.
p144
이를 브라운 운동이라고 한다.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은 액체나 기체 속에 포함된 작은 입자들은 진로를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훗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를 수식으로 정리했고 장 바티스트 페랭이 실험으로 이 수식을 증명했다. 이 이론은 자연의 비가역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p145
현재라는 순간은 과거의 미래의 곤죽 상태이므로, 현재는 결코 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없으니,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멈춰 선 증기 기관차와 다르지 않다. 그 아래의 철로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다.
p156
...짖는 개는 실제로 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누군가 짖는 개에게 그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키지 않는다면 짖는 개는 인간을 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건 결코 개의 잘못이 아니다.
p157
...한꺼번에 결과에 이르려고 하지 말고 결과에 닿기까지의 시공간을 무한하게 쪼갠 다음 단 하나의 조각에만 완전히 도달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관성에 의해 나머지 조각들에 차례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뭉쳐져 확실한 결과로 완성될 것이다. 이것은 베르그송(제논의 역설을 부정하기 위해, 앙리 베르그송은 무한히 쪼갤 수 없는 운동의 개념을 제시한다.) 의 주장에 가깝다.
게스타처럼 자존감이 강한 자들은 외부의 자극을 감지한 즉시 방어기제와 균형감각을 총동원하여 원래의 상태를 지켜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과도한 반응은 오히려 내적 긴장감을 증가시켜 결국 단두대 위에 자신을 세운다. 변화란 임계점 부근에 분포해 있는 2퍼센트를 조정하여 49퍼센트의 소수를 51퍼센트의 다수로 만드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설령 역사의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폐허 위에서도 전후의 차이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p229
...사는 데 필요한 건 자신의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웃과의 공평한 연대뿐이며, 명징한 우열은 없고 사소한 차이만 있을 따름이라고 배운다.
p254
추론과 개인적 판단에 근거하여 율법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 것. '이즈티하드의 문'이 닫혔다고 주장하는 보수 그룹과, 여전히 열려 있다고 주장하는 개혁 그룹이 이슬람 세게에 늘 존재한다.
p261
...그는 마피아가 지배하는 세상에선 친구와 적이 구별되지 않고 진실은 적을 색출해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며 지혜로운 자는 침묵을 무기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문득 떠올렸다.
p298
...인간의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이 남아서 다른 이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황당한 궤변은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란 육신과 영혼으로 조합된 항구적 대상이 아니라 잠정적 상태에 불과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균형이 파괴되면 두 번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불간으하며, 용서나 징벌의 방법은 하나같이 부질없다.
p314
...역겹기 그지없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는 미래로 반복되고,현실로 이따금 과거와 미래에서 탈락한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려면 기억이나 상상의 능력을 퇴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간은 삶을 서서히 파괴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위안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일수록 시간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아이러니. 살아있다는 인식이 삶에 집중하는 걸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중단이 아니다. 오히려 삶은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 곰팡이고, 근육은 거듭된 상처를 통해서 강해지며, 기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망각이다. 그렇다고 항상 맛있는 음식만 삼켰던 것은 아니고, 모든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도 아니며, 망각이 화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p336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만, 한국과 그 주변만을 배경 삼아 모든 부조리를 낱낱이 제대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사회나 부조리는 비슷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김솔 소설이 세계 지도에 볼펜으로 점을 찍듯 온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이야기를 그려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