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해할 수 없다면 마음을 열어라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무지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려는 자세 필요하다.

48. 변화이 바람 속에서도 나아가라.

"시간의 변덕에 따라 변하는 정의는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라.

불확실성과 불공정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

49.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혜는 어린 시절로의 회귀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호기심, 단순함.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

50.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이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이에게는 미움을 살 수 있어 불리하다."

51.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소통을 하라.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친구는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비판보다 긍정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52. 우리는 자신을 위장한다.

"우리는 거짓, 이중성, 모순일 뿐이며 우리 자신을 숨기고 위장한다."

거짓과 이중성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인정하라.

part4.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53. 자존감은 과시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생각하길 원한다면, 스스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마라"

54. 호기심은 위험하기도 하나 그것을 잃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이지만 그 호기심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55. 참된 종교는 인생을 가르친다.

"참된 종교는 위대함과 비참함을 가르쳐야 하고, 자존감과 자기경멸, 사랑과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

56. 일단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라.

"작업을 마칠 때 비로소 시작할 때 무엇을 해야 했는지 알게 된다."

초심 잃지 말고 일단 계속 가기 실패하고 자절하고 배우면 된다.

57. 삶의 모든 면을 살펴봐야 한다.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그 행동의 과거, 현재, 미래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행동의 결과를 넘어 과거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 생각할 것.

개인적이고 짧은 시간적 효과 넘어 장기적인 사회적 결과 고려해야 한다.

58. 친구라는 존재의 가치 잊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친구는 없는 자리에서도 지지하므로 군주에게 큰 이익이 된다. 군주는 이런 친구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군주만이 아니겠지.

친구는 신뢰와 지지 통해 서로의 성장을 촉진한다.

59. 인간은 자존심을 통해 고난을 극복한다.

"인간은 자존심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며이는 자존심이 정신적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방식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토해 나아가는 것 자존감은 인간실현의 필수 요소이다.

60. 명예의 매력을 경계해야 한다.

"명예의 매력은 커서 우리는 그것이 있으면 죽음까지도 좋아한다."

명예도 인간적 가치와 도덕적 선택 안에서 추구해야.....

61. 성공을 소유물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일부 작가들이 작품을 '내책''내 논평'이라 자랑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집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

집 자랑하면 안되나? 안되겠구나...

마음의 평안을 잃고 더 많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아야 되니까.

62.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경험해야 한다.

"두개의 무한평균,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느리게 읽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삶의 목적은 분명히 하고,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에 시간투자할 것. 

속도의 균형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삶 살아가는 방법? 알게 되겠지...

삶의 속도 조절하면서 깊이 있는 경험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과 성공 가져다 준다.

'무한'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의 무한함. 실질적으로 의미있는지 파악하고 처리하는 것이 중요.

'평균' 정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속도와 깊이.

삶의 의미와 가치 찾을 수 있는 나만의 속도는?

나는 느리게 가도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63. 유연하게 흐름을 관찰하라.

"우리는 강가 위에 앉아 겸손하고 안전하게 있어야 한다."

64.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나 다양한 측면을 돌아볼 수는 있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이 하나를 깊이 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

65. 마주하는 모든 길을 조심히 걸어야 한다.

"모든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벽이나 계단도 우리를 해칠 수 있다."

66. 사람을 머리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손,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은 상상할 수 있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돌이나 동물과 같을 것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유와 감정, 윤리적 선택.

67. 삶의 모순과 대립을 모두 그려내라.

"좋은 초상화와 좋은 작품 해석은 모든 모순된 요소들을 조화시켜야 완성된다."

다양성과 모순을 조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이해와 성장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p6

 결론적으로,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는 깊은 철학적 통찰과 삶의 지혜를 제공하며, 자기 이해와 성찰, 지적 성장, 감정과 이성의 균형, 윤리적 성찰에 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독자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파스칼의 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p9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여 "인간의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인간 불행의 대부분은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왔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4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팡세>의 불어 원문과 함께 인간의 심리를 해부할 수 있는 쉬운 해설을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꼭지에 대해서는 "사례"형태로 서두에 설명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천재 인문학자 파스칼의 생각 및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을 것입니다.

p20

 파스칼은 천사가 되려는 자가 오히려 짐승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인간이 지나치게 완벽하고 이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할 때, 오히려 본래의 인간성을 잃고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강요하는 사람은 종종 타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비하합니다. 이는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증가시킵니다.

 즉 천사와 짐승 사이의 존재로서 인간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한계와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서로 포용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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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4  

 세상에 하나뿐인 나는 수많은 하나뿐인 나들의 하나일 뿐이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같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하나일 뿐인 특별한 내가 세상과 홀로 마주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혈연)이나 마을(지연)같은 공동체를 매개로, 근대이후에는 협동조합 같은 결사체를 매개로 세상과 관계했다면, 지금처럼 공동체가 무너지고 결사체가 취약해진 상황에서는 나 혼자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p226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위험한 이유는 다수의 주장을 소수에게 강요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다수의 주장에 대해 소수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선량한 다수'와 '고독한 소수'로 나누어 대립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팬덤 정치'가 유행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고독한 소수가 자기들 나름의 탈출구를 찾으려 한데 그 원인이 있다.

 배타주의는 이런 민주주의 내부적 취약성이 밖으로 굴절되면서 자행되는 행태다. 고독하고 불안한 개인은 어떤 집단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고, 불안의 요인이 실은 다른 데 있음에도 특정 집단에 그 원인을 돌려 자기들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인터넷을 떠도는 각종 악성 댓글들,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생각(사상)의 차이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발언들, 도쿄 한복판에서 자행되는 한국인. 조선인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와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한국 사회에서의 반일 선동, 트럼프 시대 미국의 국경 장벽 설치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이민 규제 강화 등은 모두 그 이면에 고독한 개개인의 불안이 있고, 이런 불안이 왜곡돼 드러난 집단적 배설이다.

p228

 어쨌든 개개인의 마음을 지배하던 두려움과 우러러봄의 대상을 마음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자기 마음뿐이다. 과거에는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대부분이 미지의 외부에서 왔다면, 지금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내 감정이 나를 괴롭힌다. 이는 개인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똑같은 불안일지라도 과거의 두려움이 미지의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들 마음의 반응이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잘 알게 된 지금의 두려움은 나 자신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이다. 이런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지금의 불안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진정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만약 관계의 단절 때문에 정말로 불안을 느낀다면, 이는 관계 회복을 통해 어떻게든 해소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관계를 가볍게 봐서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통해 불안이 해소될 거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과 불안에 휩싸인 이들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왜 SNS를 중단하라고 권유하는지 그 이유를 되ㅐ길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불안은 세상과 혼자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느길 수밖에 없게 된 피동적인 감정이라기보다, 혼자인 것을 즐기며 살아갈 힘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기 내면의 감정이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실제로 못나서라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 가치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잇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 내 안에서의 감정이다.

 가령, 요즘 유행하는 SNS를 예로 들어보자. 미학적으로 볼 때 SNS는 근대 이전의 창작활동과는 크게 다르다. 우선 미 즉 아름다움의 대상이 근대 이전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별천지였는데, SNS에서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움의 표현방식 또한 근대 이전에는 화려함과 추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과도한 대비로써 그려졌는데, 지금의 SNS에서ㅓ는 소소한 자기 일상의 담담한 반복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근대 이전까지는 귀족이나 성직자, 그들에게 봉사하는 전문 예술가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아름다움의 표현 주제가 SNS에서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무상으로 제공되는 각종 웹사이트를 화선지 삼아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이 지금의 SNS다.

 이는 분명 지난 근대화가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선물이 정작 그 수혜자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누구나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징조다. ...다른 이의 자기표현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나 손십게 자기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도 분명 행복한 소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내 소소한 일상을 들어주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내 작품을 누군가는 봐줘야 작품을 내놓은 내 마음이 충만해질 텐데,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짜증뿐이다.

 무관심에 따른 짜증은 어떤 면에서는 마음의 해방에 따른 불안과도 상통한다. 모두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짜증을 얻었다. 모두가 미지의 외부 세게에 대한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을 얻었다.

 만약 우리가 "소소한 일상의 담담한 변주곡"을 그려내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자체에 더 큰 즐거움을 두었다면, 아마도 짜증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과 우러러봄에서 해방되었더라도 이를 불러온 내 마음의 조감도를 좀더 세심히 살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불안 따위는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거나 생겨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우러러봄이 지금 그 모습을 바꿔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고, 무관심으로 인한 짜증이 전문 예술가를 넘어 지금 우리 모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p235

 어떤 이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온 것이 점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급기야는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 이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소외'라 부른다.

 소외는 단지 '신과 인간 사이'(포이에르바흐)'상품과 노동자 사이'(마르크스)에서만 잇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전도된 모습으로서 항상 발생한다.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서 인간이 특히 소외에 민감한 이유는, 단지 자타를 식별하는 의식 능력이 탁월하게 발달한 만큼 자기가 만들어온 대상에 대한 소유욕도 다른 생명체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상가 요시모토 역시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 특징으로 소외를 들어ㅓㅆ다.

 ......

 요시모토에 따르면 소외는 낯섦이다. 실제로 독이러 '소외(Entfremdung)'도 본래는 이런 뜻이다. 그 낯섦이 일차적인 감각기관을 통한 것이든 이차적인 의식작용에 따른 것이든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감지하고, 따라서 자기와는 다른 대상에게서 어떤 낯섦을 감지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가장 큰 위대함이다. 감지의 대상인 자연을 무기적이라고 단정한 것, 이런 낯섦을 생명이 부정할 거라고 단언한 것 빼고는 생명의 본질을 꿰뚫은 탁월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p242

 자기 안의 것을 자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외화'라 부른다. 외화와 소외를 동일시한 헤겔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는 자기 안의 정신과 이념이 밖으로 드러나 바깥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신과 인간이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양도하고 처분한 결과로 신에 의해서는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는 역사와 문명이 정립된 것이다. 둘 사이에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은 혼자서 이루고 인간은 공동으로 이루었다는 것, 신이 먼저 이루고 인간은 이를 모방해 이루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소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신을 모방해 신처럼 역사와 문명을 창조하고자 햇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런 소외는 어떻게 해야 넘어설 수 있을까? 소외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외는 소외한 것을 다시 자기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즉 '내화'함으로써 비로소 지양된다. 그리고 이런 외화와 내화의 반복, 즉 내 안의 것을 밖으로 드러내고 그 드러낸 것을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p245 

 소외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아니다. 자연에 묻혀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오던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을 대상으로 역사와 문명을 만들면서부터 소외는 이미 시작되엇다. 그리고 이 소외는 실은 인간에 의한 자기 소외에 다름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은 자연가 하나였던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소외의 지양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옳다. 자연과 하나였던 나로 돌아가 지금의 나와 다시 대면하는 것이 지양의 시작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소외(외화)한 것의 내화, 밖으로 드러낸 나를 다시 내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의 끊임없는 반복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p252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이라 부른다. '석가'란 샤키야족 출신임을 가리키고, '모니'는 침묵의 수행자라는 뜻이며, '불'은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한다.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되돌아보는 데는 침묵만 한 것이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침묵은 소외(외화)한 나를 다시 내 안에 들이는 내화이고, 떨어져 나간 나의 귀환이기도 하다. 내가 낳고 기른 또 다른 나, 지금은 바깥에 떨어져 있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나, 그런 나를 '타자적 존재'로 내 안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귀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적 존재'란 일단은 지금의 나와 구분해서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런 타자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일단은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한, 다 자란 자식과 부모 사이의 소원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같다.

 침묻 다음으로 제안하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귀환한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 내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가 태동한다. 이런 새로운 나를 말로써, 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자기표현이다.

 침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침묵을 통해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로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드러내야 나도 살고 협동조합도 되살아난다. 나아가 이렇게 새로이 태동한 내가 정말로 나인지를 확인하고,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이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또 한 번의 자기 표현은 '다시 외하'다. 협동조합에서 소외란 내가 외화한 내 말과 관계가 가짜 말과 관계로 전도되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또 한 번의 자기표현은 이렇게 전도된 가짜 말과 관계르 내 안으로 내화해,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태동시키고, 이렇게 태동한 새로운 나를 말과 관계롯써 다시 외화하는 것이다.

 ......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소외는 본래<외화-소외- 내화- 대화(갈등)-지양- 다시 외화>라는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의 일부다. 즉, 흔히 말하는 '소외 문제'는 실은 소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자기 관계적인 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무제다. 내가 낳고 기른 협동조합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대상화되도 외재하게 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협동조합을 다시 내 안에 들여 비대상화하고 내화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다.

 물론 대다수 좌파 진영 지식인들은 이와는 다르게 소외를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소외는 외재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외체화한 것이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외부에 실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덕분에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세상을 잘못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로는 소외의 지양은커녕 폭력적인 투쟁만 부추긴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256

 마음의 영역에서는 이 둘이 분명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개념을 사고할 때, 그 개념은 보통 상반된 두 계기에 이해 성립된다.

 예를 들어 '동일'이라는 개념은 '이질'이라는 계기에 대한 '동질'이라는 계기의 작동에서 생겨난 것이고, '차별'역시 '평등'이라는 우리의 이상에 대해 '불평등'이라는 우리의 현실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두 대립적으로 보이는 계기가 서로 얽혀 만들어지고, 한 계기는 다른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

 우리가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애증'즉 '사랑과 미움'의 한 측면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미움과 함게 사랑마저도 동시에 끊어내야만 비로소 절대 평등의 사랑 즉 부처의 자비에 이른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동시에 우리에게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고, 마음과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운'도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해서 비로소 우리의 '삶'이 된다.

 이런 삶에서 서로 다른 두 계기는 대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공존한다. 마음속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서로 대립해 더 큰 사랑이나 미움이라는 '(지양적)통일'을 이룰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면서 우리는 산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더구나 '(지양적)통일'은 우리의 삶에서 찰나에 불과할 뿐, '기우뚱한 균형'이 상시다. 이미 떨쳐버린 줄 알았던 사랑이나 미움이 다시 밀려오고, 하나의 업이 지나가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또 다른 업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상시적인 모습에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야지, 찰나적인 한 순간의 상태로 인간과 사회를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

....새로운 나, 그 나를 또 한 번 자기표현하고 다시 외화하는 내화와 외화의 끊임없는 반복을, '진화'니 '진보'니 하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생명의 차이에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차별을 낳고, 마찬가지로 인간 집단 간의 폭력적인 갈등만을 부추기게 된다.

p263

...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럿이 모여 '우리'를 형성해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우리'를 문제를 함게 해결해온 데 그 특징이 있었다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식을 가지고 나다움을 모색하는 속에서 그런 '나'들이 모여 '나와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독재정치와 금권정치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해왓따면, 앞으로의 협동조합은 그 성과를 끌어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에 훨씬 다가가느 '개인주의'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모든 책임을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흔히 말하는 '개인주의'와 는 다른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넘어 "주권을 가진 개인이 스스로 통치하는 것"을 말하고, 실천적으로는 "다수의 인간다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넘어 "존엄한 개개의 존재가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서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p267

 역사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자기 감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감각을 자연스럽게 모든 타자에게로 넓혀가는 것이 역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

 ...진정한 내 말이라면 다른 이의 내 말을 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찰과 긴장은 오히려 나와 너를 되돌아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p269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은, 협동조합이 아니라 실은 사람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실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협동조합에 관한 정체성이다. '성정체성'은 내가 남자냐 여자냐, 혹은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성이냐에 관한 자기동일성이지, 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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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2  

한때 일부 정치인들이 공무원들을 향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선출된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대의 민주제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선출되지 않은 공무원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도 문제지만, 선출되었다고 해서 국민으로부터 그 권력마저 위임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이다. 아무리 대의 민주제라도 그 권력은 여전히 선출한 이에게 있다. 대리인을 통한 대의 민주주의가 그럴듯한 대의를 빌미로 전체주의로 변질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p163

... 협동조합에 관한 모든 일을 조합원에게 소상히 설명하고 이를 통해 조합원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도우며, 이런 조합원 판단과 의견이 협동조합 운영에 잘 반영되도록 하고, 그 결과를 다시 조합원에게 소상히 설명하는, 이런 연속적 행위의 과정이 바로 선출된 대리인으로서 복무하는 협동조합 임원의 역할이다.

 우리는 보통 제 2원칙에서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운영'에만 관심을 쏟지, 임원의 명칭과 역할의 변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임원의 명칭이 '간부'에서 '대리인'으로 바뀌고, 조합원을 향한 마음가짐과 설명 책임의 역할이 강조된 것은 제2원칙 개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조합원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이 그 조합원을 제대로 모시고 조합원과 협동조합 사이를 잘 연결해야 비로소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운영도 가능해진다. 이것이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운영을 강조한 바로 다음에 임원의 역할을 언급하게 된 이유다.

p165

...다수의 전횡이든 소수에 대한 배려든 이는 모두 숫자의 논리일 뿐이다. 조합원을 사람이 아닌 숫자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는 소수를 배려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숫자로 변질된 조합원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이런 숫자에 의해 진짜 사람이 좌지우지되게 놔둬서는 안 된다.

 단위조합이든 연합조직이든 그 주체는 당연히 조합원이어야 하고, 그 조합원이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존재할 때 다수의 전횡이나 소수에 대한 배려를 넘어서는 진정한 인간의 연대가 싹튼다. 비록 그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이것만이 참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유일한 길이다. 협동조합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넘어서는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배려이고, 이를 향해가는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연대다.

p188

 정부의 '사회통합'과 기업의 '사회공헌'이 협동조합에서는 '사회적 책임'과 '타인에 대한 배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를 어떻게 하나로 모을 것인가""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것이가"와는 다르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윤택하게 할 것인가"가 협동조합의 특징이고 과제였던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중심의 접근에는 한계가 잇었다. 생명이 살아가는 데는 항상 생명 활동의 시간적 장으로서의 '생활'과 공간적 장으로서의 '지역'이 같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은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시간과 생활에 중점을 두고 관계를 형성해왔지만,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되기 쉽다. 잘 엮인 관게일수록 굳이 확장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실제로도 지난 세기 동안 협동조합은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과제와 싸우느라 시간에만 집중해왔지, 공간을 형성할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었다.

p191

..."협동조합은 지역사회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활동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9동시에 조합원) 삶의 기반이 되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활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런 빈약한 해설이 제 7원칙을 새롭게 제정한 진짜 취지라면, 그 문구는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가 아니라 "동조합은 지역사회의 발전과 환경보호를 위해"라고 정했어야 옳다.

....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미래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느 발전으로 정의된다."하지만 이런 해설 역시'발전'에 약간의 조건을 붙이는 정도일 뿐 결국에는 '발전'에 무게를 둔 것이다. 그동안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다음 세대의 필요를 조금은 배려하면서 지금의 필요를 계속 충족해가겠다는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이 문제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지속가능'과 '발전'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는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21세기 협동조합의 전략을 구체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진정한 의미는 '지속가능'과 '발전'을 동일선상에 병렬로 놓는 것이 아니다. '지속 가능'이라는 조건을 조금 붙여 '발전'을 계속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지속 가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지금까지의 '발전'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비추어 현재를 재검토하자는 것이고, 다음 세대의 생존을 위해 지금 세대의 필요를 양보하자는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밖에서 안을 되돌아보자는 것이고,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조합원의 삶도 꾸려가자는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바탕이 되어야 조합원이 다음 세대와 이웃을 위해 나설 수 있고, 협동조합도 다가올 21세기에 합당한 자기모습을 찾을 수 있다.

p199

 ...사회적 협동조합은 전통적 협동조합과 비교해서 그 사업목적이 다르다. 전통적 협동조합이 "조합원 공통의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기 위해 사업을 전개한다면, 사회적 협동조합은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사업을 전개한다. 이를 두고 전통적 협동조합이 조합원 '공통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데 비해, 사회적 협동조합은 '일반적 관심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interest'는 좁은 의미의 '이익'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관심사'다. 전통적 협동조합이 추구해온 것은 '공익'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고, 사회적 협동조합이 추구하고 있ㄴㄴ 것 역시 '공익'이 아니라 '일반적 관심사'다 협동조합을 홍보한답시고 일반기업은 '사익'을 추구하고, 전통적 협동조합은 '공익'을 추구하고, 사회적 협동조합은 '공익'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협동조합을 이익집단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협동조합을 공익단체로 둔갑시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조합원 공통의 관심사를 조합원 아닌 이들의 관심사로까지 넓혀 사죄적으로 - 사람과의 관게에서 - 배제된 이들의 필요와 염원을 함께 충족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지, 공익 즉 '불특정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공익'의 추구는 협동조합이 아닌 정부와 공기업이 담당해야 할 당연한 자기 몫이다.

p217

 모든 시대에는 항상 그 시대를 견인해온 말이 있다. 말이 중요한 이유는, 어느 시대든 그 시대를 견인하는 것이 결국은 사람인데, 그 사람을 견인하는 것이 바로 말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경우, 그 말은 아마도 '자유'와 '평등'일 것이다. 국가나 종교 등 그 어떤 초월적인 것에 의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신분이나 지위 등 그 어떤 위계적인 것에 의한 차별에서 벗어나려는 평등, 이 두가지야말로 근대를 열고 근대의 오랜 기간을 지배해온 가장 중요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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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0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민계급에 한정됭ㅆ던 자유. 평등. 우애가 한편에서는 '나'로 응축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모두'에게로 확장해갔다. 자유는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내게 강요하지 말고, 상대가 바라지 ㅇ낳는 것을 상대에게 행하지 않는다"라는 나와 모든 이들의 자유로, 평등은 "누구도 나를 돈으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자여서는 안 되고, 또 누구도 자신을 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 된다"라는 나와 모든 이들의 평등으로, 우애는 "내가 바라는 것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베푼다"라는 나와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응축된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만 보면 실패한 혁명이다.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어도 곧이어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와 나폴레옹의 왕정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프랑스혁명이 역사에 남은 것은 그것이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상(신념)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시민계급을 넘어 나에게로 응축되고 모든 이들에게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특히 사랑이 시민계급 간의 우애를 넘어 모든 이들을 향한 형제애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 정신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랑을 '자비'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자비에는 다시 '중생연 자비''법연자비''무연자비'라는 세 종류가 있다. 중생연 자비란 공통의 상 즉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태어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예컨대 같은 친족이나 마을 사람들끼리의 우애가 이에 해당한다. 법연자비란 법 즉 어떤 생각이나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 간의 사랑으로, 예컨대 협동조합에서 같은 조합원끼리 서로 사랑하는 우애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무연 자비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들에 대한 태양이나 바다와 같은 사랑으로, 위에서 말한 친소관계나 이념적 동질성과 상관없이 펼치는 모든 인간과 생명을 향한 사랑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삼연 자비'가운데 무연자비를 무조건적이고 절대 평등한 아미타불의 자비(=대자비)로 승모한다.

p124

 사람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나는 그의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우리가 믿는 것은 대체로 무지에서 나온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국가를 본 적이 없고 만져본 적도 없다. 이는 국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말(언어)이고, 말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법령이나 제도 같은 말이 있고, 그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가 쌓여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말과 그 말에 대한 믿음이 국가를 만들고, 그 믿음이 무너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자본도 마찬가지여서, 자본이란 본래 종이 위에 새겨진(최근에는 종이마저 필요 없게 되었지만) 말이고, 그 말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그 믿음이 흔들리면 자본의 힘도 쇠약해지고(= 인플레이션), 그 믿음이 무너지면 자본의 힘이 사라진다(= 공황).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는 데 있다. 그가 국가를 '환상의 공동체'라 표현한 것은 국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강요된 말의 믿음 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분명 우리에게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준 위대한 과학자였다.

.....

 ...과학 엾는 믿음이 환상이라면, 자기 나름의 믿음 없는 삶은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습니다.

p127

 ...그 말에 거짓이 없는지,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그 말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는지, 일단은 가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말도 결국에는 나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협동조합을 안다는 것은 그 말을 과학 하는 데서 시작되고, 이는 나도 마르크스로부터 배운 바다.

p128

 주문이란 "사람이 입으로 먹는 말"이란 뜻이다. 말을 입으로 먹는다? 밥이나 술 같으면 당연히 입으로 먹겠지만, 말을 입으로 먹는다? 괴상한 이야기지만,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되뇌고 곱씹는다는 의미다. 밥이나 술을 먹어 내 안에 들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말을 되뇌고 곱씹는 가운데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p129

 ..."하쿠나 마타타"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문제없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될 거야"라는 뜻이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없고, 왜 걱정 안 해도 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나무아미타불"은 간단히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라는 뜻이고, 자세히는 "삼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빛과 생명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지만, 그 깊은 일념에 제대로 도달하려면 최소한 대승 경전을 수십 권은 돌파해야 한다.

 동학의 주문 또한 마찬가지다."사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는 "(각자가 자기 안에)한울을 모시고, (그 한울의) 조화에 정하니,(이를)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세상만사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자기 존엄의 극치를 이른 말이지만, 내 안에 모신 내 한울을 제대로 깨달아 그 드러남에 한 치의 거리낌도 없으려면, 이 또한 수많은 수련을 거쳐야만 한다. 한마디로 누구도 그 정확한 뜻을 모른 채로 끝없이 되는 것이 주문이고, 숨은 행간의 뜻을 자기 나름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 주문이다.

 또, 이런 주문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 주문을 되뇌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도 몰랐던 어떤 힘이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하쿠나 마타타"를 되는 가운데 걱정할 필요 없다고 위로 받게 되고, 어떻게든 될 거라고 격려받게 된다.

 신비는 결코 미신이 아니다. 미신이란 눈앞의 서로 다른 두 현상을 잘못된 인과관계로 엮는 것이다. 예컨대 '까마귀가 울었다'와 '나쁜 소식을 들었다'를 연결해 "까마귀가 우니 나쁜 소식이 들려 왔다"라고 믿으면 이는 미신이다. 이에 비해 신비란 드러난 현상의 깊은 곳에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느끼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덕에 병이 나았다고 믿으면 이는 미신이지만,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덕에 마음의 힘을 얻어 병이 나았다고 느낀다면 이는 신비다.

p134

신란: 그럼 왜 내 말을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느냐? 이제 알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 생각대로 된다면 내가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천 명을 죽이라 했을 때(너는) 즉시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생각대로 죽일 수 있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을 뿐이다. 자기 마음이 착해서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일 의도가 없어도 백 명이고 천 명이고 죽이게 되는 것이다.

p158

...이용자와 운영자를 구분하는 것은 사업체와 결사체를 분리하는 것과 같고, 이는 결국 조합원의 고객화로 이어질 것이다. 상당한 수준으로 원외 이용을 허용하는 우리나라 같은 상황일수록 이용자를 조합원으로 참여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p157

 협동조합이라면 당연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지녔느냐에 따라 조합원 가입이 저지당하거나 참여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협동조합의 모든 활동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조합원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현실 정치를 향해 발언하는 것은 협동조합이 갖는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물론 같은 정치적 행위라도 정파적인 행위는 삼가야 한다. 특정 정치세력에 개념 없이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거나 최소한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걷는 게 맞다 금지해야 할 것은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별이지 정치적 행위가 아니고, 지양해야할 것은 정파적 정치 행위지 정치적 행위 자체가 아니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협동조합이 크게 영향받는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논란거리로 '원외 이용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협동조합 진영은 지금가지 전면적인 긍정이거나 전면적인 부정, 혹은 그 중간의 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법적으로는 조합원이어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수준으로 비조합원 이용을 허용해왔다. 운영은 조합원이 하지만 이용은 가능한 한 열어두자는 것이 협동조합 진영과 정책 당국의 암묵적인 합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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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요즘 정보 프로그램 해설자는 인기 높은 일자리다. 본업에서 조금이라도 실적이 있으면, 그걸 내세워 해설자 자리를 얻을 수 있다. 대중은 권위에 약하기 때문에 일단 한번 텔레비전에서 얼굴이 알려지면 권위는 더더욱 쌓인다. 기본적으로는 우물가의 쑥덕공론 수준이라 전문 지식 따윈 없어도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현장 분위기를 읽고, 약간의 본심을 보태서 살짝 재미있게 말한다. 그런 조절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살아남아서 해설자로 녹봉을 받는다. 말하자면 새로운 유형의 텔레비전 예능인인 셈이다.

p90

 그럼, 화를 억누르다 보니 서서히 멀리로 피가 끓어오르고, 과호흡 발작이 일어나고, 공황장애가 나타나는 거네.

P91

 이건 일본 사람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지. 타인의 규칙 위반이나 부도덕한 행동을 봐도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렇게 계속 분노가 쌓여서, 결국은 자기 안에서 폭발해버리는 거지. 후쿠모토 씨의 과호흡이나 공황장애는 거기에서 온 거야. 그러니 쉽게 고칠 수 있어. 화를 내면 돼.

P99

 ...유튜브만 해도 난폭 운전이나 민폐 행위 동영상이 연일 올라와서 시청자의 분노를 유발하니 말이야. 예전에는 타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따윈 없었는데, 지금은 집에 있어도 스트레스가 제멋대로 날아들지-

 ......

 ...현대사회에는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날아드는 것이다.

  한동안 입원하는 건 어때?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병실을 준비할 테니까. 여기 있으면 모든 스트레스에서 해방될텐데.

P104

 그야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인 무리는 늘 있게 마련이니까-. 박멸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P125

 ...저 선생님은 인간에 대한 선입견이 전혀 없어.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아. 그래서 야쿠자인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게 내게는 신선했던 거지.

P140

 ...애당초 규칙을 지킬 마음이 없는 인간은 규칙을 설명하고 타일러도 듣질 않으니까. 그렇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논법밖에 효과가 없어. 일종의 정당방위인 셈이지. 내가 말한 행동요법이란 게 바로 그런 거야.

P173

 요컨대 사회와 얽히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하는 행동으로 치면 파치프로(파친코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 랑 똑같네. 다른 점은 운영하는 금액과 리스크의 크기라고 할까.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지. 게다가 머니게임은 골인지점이 없으니, 언제까지고 그만둘 수가 없고

P196

 잘 들어. 인간이란 누군가가 필요로 해야 비로소 열심히 할 수 있는 존재잖아.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족하게 소비할 수 있는 것뿐이면, 너무 쓸쓸하지 않나?

P254

 ...스포츠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사흘을 쉬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 일주일은 걸려요. 그래서 쉬면 오히려 더 효율이 떨어진다고요.

p298

...누구나 다 자기 병을 알아채지는 못하니까. 실제로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발달장애임을 깨닫는 사람도 있어. 뚜렷하게 건강을 해치는 증상이 아닌 한, 인간은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단순한 특징이나 성향으로 받아들이거든. 그래서 주위와 비교해서 나는 왜 이렇게 집중력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알아본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발달장애였다는 걸 깨닫는 거지. 기타노씨도 그럴만한 기질이 있었을지도 몰라.

p330

 ...다시 말해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열 배는 강해서 일상의 모든 면에서 기를 쓴다는 거지. 실패가 두려워서 동아리에도 안 들고,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않아. 난 마음만 먹으면 대단하다는 핑계만 대지. 한번 창피를 당하면 편해진다고 알려주고 싶지만, 중학생한테는 아직 어렵겠지.

 이라부의 이야기를 듣고 유야는 모든게 이해가 갔다. 마사루가 틈만 나면 유야를 커뮤니케이션 장애라고 놀리는 것은 사실은 자기야말로 커뮤니케이션 장애라 그걸 들킬까 봐 두려워서다. 난폭한 언동은 나약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서다.

p348

 때로 진실은 진지함보다 웃음 속에 있다. 상승 욕구, 치열한 경쟁, 자의식과잉, 가면 속 자신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혼란 속에 허덕이다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 우리에게 이라부는 살며시 숨구멍을 열어준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적당히 힘을 빼고 훌훌 털어내라며 넓은 품으로 감싸주고 토닥여준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균형이 깨질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덜어내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어떤 선입견도 없기에 고압적이지 않고,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도 않는 이라부를 만나 작업하면서 늘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는 오랜 친구를 재회한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꼈다. 이 책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라부가 선사하는 최고의 처방전이다. 앞으로도 나는 벽에 부딪칠 때마다 그의 진료실 문을 두드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럴 때마다 짧은 다리를 무리하게 꼬고 앉은 이라부는 이렇게 말하겠지.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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