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건강과 단순한 즐거움, 푸른색과 금색이 섞인 음악대 유니폼을 제이컵 게이하트보다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어쩌면 그는 해버프드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으리라.
; 건강과 단순한 즐거움.
p38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뿐이었다.
; 신변과 재산, 감정과 생각...
p69
...도시에는 외로움을 느낄 공간이 넉넉하다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애달픔에 허덕인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시골의 허허벌판과 다르기에 혼자 서서 애끓일 일이 없었다. 슬프고 낙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띈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에 묶인 말처럼 홀딱 젖은 부랑자들이 쉼터에 들어가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옆에는 웬 노인이 보도의 쇠창살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쐬고 있었다.
보통 루시는 자산이나 다른 누군가가 느낄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풍선을 쫓는 남자아이처럼 급한 마음으로 거리를 확보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 모든 사람이 동지인 듯했고, 그들에게 겸허한 애정을 느꼈다.
p83
...세상 만물이 순리대로 흘러가기 시작했으며 사소하고 성가신 것들은 시야 박으로 밀려낫다. 생은 단순하고 고귀한 것으로 거듭났다. 아무렴, 생은 즐거운 것이었다. 서배스천이 종종 부르는 슈베르트의 <송어> 처럼 세월과 변화에 마모되지 않는 즐거운 것이었다.
p101
매일 밤 적막 속에 혼자 있을 때, 그때 루시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 하루가 다 지난 후에! 왜 그런 것일까. 그는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그날 오전을 이루는 순간순간을 전부 곱씹었다.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았다. 노래 한 소절도, 서배스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나 손짓 하나도 잊지 않ㄴ았다. 조용한 밤에는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고, 1월 4일 이후의 몇 주가 그 전까지 살아온 21년보다 더 풍요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은 숫자로 셈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삶이 불행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처음 시카고에 온 뒤로 줄곧 행복했다.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살게 된 것, 파울 아우어바흐처럼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아득한 과거였다. 처음 클레멘트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들었던 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루시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은 전부 하찮고 허무맹랑했다.
그때부터는 생각도, 행동도, 심지어 외모까지도 너무나 달라져 자기 자신을 몰라볼 지경이었다. 다만 변화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더욱 충실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무엇이든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자기 것을 취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거부할 힘을 찾아낸 듯했다.
p141
...아내는 아이들이나 가정부가 잠에서 깨기 한참 전에 일어나 아우어바흐의 아침을 만들었다. 루시에게 말하기를, 나이가 들면 남편에게 해줄 것이 많지 않기에 온 집을 혼자 쓰며 근사한 아침을 차려주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아우어바흐는 종종 해리 고든에 관해 물었다.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던지라 루시와 잘됏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루시는 해리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상처받았으나 경멸하는 척했다. 해리에게는 결혼할 권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루시 게이하트의 남자였으니까!
p143
...살아간다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루시도 알게 될 거야.
루시는 삶의 방식이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 않냐고 대꾸했다.
너 같은 여자라면 하나뿐이란다, 루시. 루시는 너무 착하잖아. 위대한 재능과 대단한 야망을 품은 여자들이라 해도, 글쎄, 모르겠다. 꽤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럽지는 않더라고.
다음 날 아침 루시는 연습실 창문을 열고 건너편 호수를 내다보며 더는 아우어바흐네 댁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기가 꺾였다. 아우어바흐는 진중하고 철저한 독일인 음악 선생이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p173
"있는 힘껏 즐겨라, 루시. 삶을 사는 것 외에 중요한 건 딱히 없어. 삶에서 누릴 건 다 누리렴. 난 이제 다 늙어서 잘 안다. 성취는 삶의 장식품 같은 거야.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고. 때로는 사람들이 실망스럽고, 때로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 어쨌든 중요한 건 계속 살아가는 거란다. 루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봄에 힘든 일이 있었다고 낙담하면 안 돼. 네 앞에 긴 여름이 있는 데다가 모든 일은 때가 되면 풀리기 마련이니까."
p174
작은 마을에서는 여럿의 삶이 바투 붙어 굴러간다. 사랑과 증오가 옷깃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두근거린다.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모두가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를 속이고 배신했던 남자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간절히 원했던 여자와 몇 마디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여자의 치맛단이 살짝 닿을지도 모른다.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아슬아슬한 탈출. 저 넓은 세상에는 이토록 아슬아슬한 탈출이 없다.
p182
...그는 일어서고 무너질 줄 아는 사람, 살아 있는 사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한자리에 붙박여 있지 않았고, 게으르지 않았고, 겁쟁이도 아니었다. 대부분 자신만만한 채로 꾀부리며 살았으나 때때로 무언가 번쩍였다. 그 모든 방어적인 외피 밑에 한 남자가 있었다. 길들지 않은 마음을 지닌 남자였다. 그가 루시에게 손을 얹거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오래전의 암호 같은 눈빛을 밟혀주면 루시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 동력을 제공하고 나아가라고 등을 밀어줄 것만 같았다.
p192
문득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너무나도 선명한 깨달음이었으니 외부에서, 미동조차 없는 적막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만약 생 그자체가 연인이라면? 저 먼 도시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루시를 기다리는 연인. 루시를 끌어당기고, 유혹하고, 마법을 거는 연인. 루시는 부드럽게 창문을 열고 창가에 무릎꿇고 앉아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카락과 달아오른 볼에 눈송이가 닿아 녹아내렷다. 아,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햇따. 그 광휘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니구하고 싸워 얻어야 했다. ㄱ그 속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온 마음을 바쳐 천상에 있는 그를 바라본다면, 분명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루시가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이제 루시는 그 진정한 뜻을 알았다.
루시는 창문으로 다가가 눈보라를 향해, 그 뒤에 있는 미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다가오기를! 전부 돌아오기를! 루시를 배신하고 조롱하고 마음까지 부숴놓기를, 그가 바라는 바이니까!
p196
해버퍼드에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해리 고든이었다. 그런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깊이 자연에 감응했다. 루시는 해리와 오리 사냥을 하러 갔을 때 그가 두 사람 옆을 스친 나무와 덤불과 식물을 모조리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리는 자신의 그런 특성을 잘 숨겼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기에 자기가 느낀느 것을 내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루시의 반대편이 아닌 등 뒤에 있었다면! 해링의 힘은 신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씁쓸한 결말까지 버텨낼 수 있는 힘, 꼭 붙잡은 것을 절대 놓지 않는 힘이었다. 루시는 그런 힘이 하나도 없었기에 상상만으로도 조금 용기가 생겼다. 언젠가 두 사람은 다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해리는 자신만만하고 좀처럼 배우려 하지 않았지마, 루시는 그가 삶에 관해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주변 사람보다 속이 깊고, 절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반대였다. 평범한 사람인 척 연기햇으나 평범하지 않았다. 조용하되 항상 움직이는 에너지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런 에너지가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취향이 좋더라도 그런 에너지가 없다면, 루시의 아버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p205
이런 무례라니, 이런 모욕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루시는 젊고 튼튼했으며, 세상이 자신을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이렇게 잔인하고 멍청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터였다. 다들 길에 얼어붙은 진흙만큼 멍청했다. 여기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울음이 터지고 말 것이다. 굴복해서는 안됐다. 어서 갈 길을 가야 했다.
p214
...체격이 다부지고 키가 훌쩍한 사내. 찬찬한 발걸음,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꼿꼿한 고개, 반듯한 어깨. 낯선 사람이 보았다면 외롭고 강한 남자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숙련되고 믿음직한 힘이 있는 남자. 그에게는 그런 힘이 필요했다. 견뎌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p236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 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가벼운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p238
루시와 사랑에 빠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경하는 이의 희소식을 듣고 들뜬 귀갓길에 제비꽃을 사 안고 오는 사랑스러움, 음악을 통해 사랑이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바그너의 오페라 앞에서 고독을 구할 줄 아는 감수성, 교수의 애제자이자 국제적인 성악가의 신뢰를 받는 연주자이지만 성취를 과시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겸허함, 화려한 경력을 꿈꾸지는 않아도 자신의 미래를 '착한 여자'의 삶으로 한정하려는 시선에 굽히지 않는 꿋꿋함, 사랑을 잃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도 짓밟히기를 거부하고 생을 다짐하는 불굴의 성정. 결국 루시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건네는 인물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건만 그마저도 끝까지 버티지 못한 그가 얼마나 안타깝던지, 루시의 생이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다워서 끄끅 울며 문장을 만지던 날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을 써낸 것일까, 캐더의 필력에 경탄하는 동시에 그가 조금만 더 분발해서 덜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해낼 수는 없었을까 야속하기도 했더랬다.
...명랑하고 명석한 시골 여자아이가 도시로 나아가 새로운 세상과 예술을 알아가는 이야기, 환멸에 젖은 연상의 예술가가 그 풋풋한 기운에 생의 의지를 갱신하는 이야기는 과연 시대를 고려해도 새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 소설에는 사뭇 특이한 빛이 있다 "낡고 실었는 가사를 근사하게 표현해 신선함을 부여"함으로써 사랑과 전망을 잃고 낙향한 루시에게 다시 생의 의지를 불어넣은 <보헤미안 걸>의 소프라노처럼, 이 소설 속에도 무언가 색다른 것이 반짝이고 있다. 소설 초입에서 루시를 아프게 하던 밤하늘의 별, "지금 이곳에 속하지 않은 다른 생과 감정을 암시"하던 영원의 상징 같은 것이.
p241
..."사실은 모든 것의 근간"이라던 해리, 루시에게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돼?"냐는 질책을 들었던 실리적인 은행가 해리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는 자신과 달리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일 뿐이었던 루시를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루시 게이하트>를 정의할 수도 잇을 것이다. 자신은 루시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무지를 통과하는 사이 평생의 사랑은 달아나버렸고, 남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자기 청춘의 편린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 상실이라는 "종신형"의 기록인 것이다.
실제로 캐더는 이 소설을 두고 결말 부분인 제 3부가 가장 훌륭하다고 했다. 루시와 서배스천의 이야기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절절하게 읽었던 독자로서 조금 멋쩍기도 하지만 사랑했으나 이해하지 못햇던 사람, 이제는 없는 사람을 기억하며 그 아픔까지 오롯이 받아들이는 해리의 현재를 귀히 품지 않을 수 없다."동경하기를 그만두고 기억하기를 시작하자 삶이 시작되었다"라는 캐더의 유명한 문장을 상기할 시점이 지금일까. 그에게 미래란 과거, 즉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다짐이었다. 루시 역시 절절한 마음으로 동경하기를 그만두고 기억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루시의 동경과 기억의 대상이었던 서배스천 역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거듭 복기하고 있었다. 당신은 왜 그랫을까.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됏을까. 불가해한 인연의 엇갈림에 눈물을 흘린 이는 이야기 밖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을 감상주의라 해야 할지 사랑이라 해야 할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생의 겨울에서 잇따른 상실 끝에 써낸 캐더의 기이하고 꿋꿋한 이야기, 그 안에서 무엇보다 기억의 숭고함을 감각한다. 다가오는 봄 앞에서 자꾸만 주저하는 것은 그 시린 아름다움을 붙잡고 싶은 까닭일까. 임슬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