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법

                        강은교(姜恩喬)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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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쌀쌀해 지고, 해도 짧다. 따스한 화톳불 가에 앉아 호호 불어가며 고구마라도 까 먹으면 안성맞춤일 계절. 날씨 따라 맘씨도 쌀랑하다. 사랑이 아름다운 건 집착하지 않음에 있다던가. 그립던 시 두 편 입 속에서 곱씹는 맛도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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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마주침의 차이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 법정의《오두막 편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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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魂
           李玉峯

近來安否問如何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  달빛 어린 창가에서 첩의 한은 깊어만 갑니다.
若使夢魂行有跡  만약 꿈길에도 오간 흔적이 있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 앞의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목마름 - 옥봉에게

그대가 밤마다
이곳 문전까지 왔다가 가는
그 엷은 발자국 소리를
내 어찌 모를 수 있으리

술취하여
그대 무릎 베개 삼아
잠들고 싶은 날

꿈길 어디메쯤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너무 눈부신 달빛 만리에 내려 쌓여
눈먼 그리움
저 혼자서 떠돌다가
돌아올 뿐

그동안
돌길은 반쯤이나 모래가 되고
또 작은 모래가 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이젠 내 간절한 목마름
땅에 묻고
다시 목마름에 싹 돋아
꽃필 날 기다려야 하라.

이가림 시집 <순간의 거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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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공존의 이유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정지용의 그의 반 

내 무엇이라고 이름하리 그를 ?
나의 영혼 안의 고흔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구비구비 돌아간 시름의 황혼(黃昏)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히 지니고 걷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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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머언 이 앞에 오로지 수그릴 뿐인 가슴에 두 손 여민 '나'는 그의 반이다.

우리 살림살이는 구비구비 돌아간 강물처럼, 시름의 황혼 길이었던가. 그리하여 나의 가지에 흰 꽃을 달고 살아가던 나의 나라의 주민들은 이제 떠나가는가. 그래서 만날 때 떠날 것을 미리 예정하고 있듯이, 깊이 사귀지 말자는 말을 곱씹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대 손 마지막 잡을 날을 기다리며, 깊이 사귀지 말자고 하는가. 작별의 날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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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주인)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른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을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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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배고픈 타지에서 질옹배기에 화로삼아 추위를 녹이는 팍팍한 정신에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백석의 시.

나는 춥고 외로운 정신일 때, 이 시를 읽으며 그보다 나은 나의 상황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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