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올해도 5월이 다 가고 있다.
곧 유월이 오는데 날이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구나.
하복을 입어야 할 날이 다 됐는데, 감기 조심하렴.
아이들이 두통약 찾으러 교무실에 많이 오더라 

오늘부터는 조선 시대의 대표 장르인 시조를 좀 살펴 보자.
시조는 짧은 속에서 다양한 주제와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험에도 내기 좋은 분야이니만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에 가사 작품으로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살펴 보았고,
시조로는 이황의 <도산 십이곡>을 읽은 적이 있지. 
오늘은 시조하면 생각나는 시조의 달인, 윤선도의 '만흥'이란 시를 읽어 보자.
'만흥(漫興)'이란 말은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란 뜻이란다.
'만'자가 '넘쳐흐를 만'이니 자연을 감상하는 넘쳐흐르는 흥겨운 기분이란 뜻으로 보면 되겠다. 
(게으를 만 慢자가 아닙니다. ^^)

소학 언해 같은 데서도 잘 드러나듯,
조선 양반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보다 <입신 양명>이었단다. 
몸을 상하오지 아니함이 효도의 <비롯함>이요,
입신하고 양명함이 효도의 <마침>이라는 글이 소학에 들어 있지. 

출세하고 이름을 떨쳐 이로써 부모의 이름을 현저하게 함이 효도라고 가르치지만,
그제나 이제나 정치란 것은 권력을 밀고 당기는 일이라,
한번 성하면 한번 쇠하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임금의 사랑을 가득 받을 때도 있으면,
임금에게서 멀어져 모함을 당하는 때도 있는 법. 

임금에게서 가까이 있을 때는 충성을 다하면 되지만,
귀양이라도 갔을 때는 <충신 연주지사>를 부르며 임금에 대한 사랑을 읊어대야 하는 것이었지.
그렇다고 귀양지에서 맨날 서울로 목을 빼고 학수고대하며 임금의 총애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
폼을 잡으려면,
<안빈낙도 : 비록 가난해도 즐기는 도>
<안분지족 :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자세>
<강호한정 : 자연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태도>
<자연친화 :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즐기는 모습>
<물아일체 :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상태> 
이런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양반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겼단다. 

이런 측면에서 보길도로 귀양갔던 윤선도의 마음이 담긴 시들을 한번 살펴 보자꾸나. 
이 시는 작가가 보길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할 때 지은 총 6수의 연시조이다.
이 시 역시 자연에 묻혀 살면서 분수에 맞는 즐거움을 누리는 유유자적한 경지를 노래한 것이지.
우선 한 수 한 수 살펴보자꾸나.

[가]

산슈간 바회아래 띠집을 짓노라하니
그 몰론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해석] 자연 속에서 바위 아래 띠집을 짓고자 하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비웃기도 한다마는 
          어리석고 시골뜨기인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바로 나의 분수인가 생각하노라

山水는 자연이지. 그 바위 아래 초가집도 아닌 띠집을 지었어.
초가지붕은 볏짚을 쓰는데, 띠지붕은 강가의 갈대같은 걸 쓰니 더 낮은 품질의 평민 주택이겠다.
양반이 시골 궁벽한 곳에 초가를 짓고 사니 남들은 비웃겠지마는
어리석은 촌놈인 내 뜻에는 내 분수에 맞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야.
한자로 나타내면 '안분지족'이 되겠지. 계속 보자. 

 

[나]

보리밥 풋나믈을 알마초 머근 後에
바횟긋 믈가의 슬카지 노니노라
그나믄 녀나믄일이야 부럴줄이 이시랴

[해석] 보리밥과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가서 실컷 노닌다. 
          그 밖의 다른 일은 부러울 줄이 있으랴.

이제 가난한 생활이 드러난단다. 안빈낙도지.
보리밥에 풋나물일망정 알맞게 먹고,
바위 끝 물가에 나앉아 실컷 노닌다.
그러면 '그 남은 여 남은 일'은 부러워할 것이 더이상 없다는 이야기지.
'그 남은 여 남은 일'은 '그 밖의 다른 일들'을 가리키는 말로 '출세' 같은 속세의 미련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그치만, 정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조차 할 필요 없을 텐데...
쬐끔은 관심이 있어 보이지? 

바위 끝에 앉아서 무얼 할까?
옛날 선비들의 그림 중, '고사관수도'란 그림이 있단다.
'고사', 곧 뛰어난 선비가, '관수'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지.
<노자>라는 책에 <상선약수 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는 말.

물은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굳이 애쓰지 않고,
낮은 곳에 편편하게 고여있기 좋아하지.
평등하게 있지만, 앞을 가로막는 넘이 있으면 과감하게 뛰어넘고,
그래도 심하게 가로막으면 둑을 확 무너뜨려 버린단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 선비는 그 물의 성정을 배우려 했는지도 몰라. 

아래 그림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란다.
          



[다]

잔들고 혼자안자 먼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삼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하노라

[해석] 술잔을 채워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임이 온다 한들 반가움이 이보다 더하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지만, 산을 즐기는 것을 마냥 좋아하노라.  

혼자서 술잔 들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어.
자연 친화지.
근데,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고 해도 이렇게 반가울까? 이랬지.
누가 더 좋은 거야?
그렇지. 자연이 더 좋은 거지.
근데, 여기서 <그리던 님>은 결코 <임금>이 아니란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온대도 자연이 더 좋다... 이런 거지, 임금보다 낫다... 헐~
왕조 시대엔 결코 등장할 수 없는 표현이겠지?  

이 시조의 종장에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가 등장한단다.
<말씀도 웃음도 않>기 때문에 못내(어쩔 수 없이) 좋아한다는구나.
인간은 왜 <아부의 말>과 <아부의 표정>을 짓곤 하잖아.
그것은 곳 같은 편인 척 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적이 되곤 하는 인간사를 비판하는 뜻도 담겼겠다.
자연은 친한 체 하지 않아도, 언제나 변치않고 그곳에 있으니 사랑할 만 하다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인간은 얼마나 얄팍하게 변하는 존재인가... 이런 반성도 들었고.  

 

[라]

누고셔 三公도곤 낫다하더니 萬乘(만승)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巢父許由(소부허유)ㅣ 냑돗더라
아마도 林泉閑興(임천한흥)을 비길곳이 업세라

[해석] 누가 말하길 전원 생활이 정승 노릇 하는 것보다 낫다 하더니 만승을 지닌 천자인들 이만하랴
         이제 헤아려 보니 소부와 허유가 약았더라. 
         아마도 자연 속에서 노니는 한가로움은 비할 곳이 없어라. 

누군가가 삼정승보다 낫다고 했어.
무엇을?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 하는 생활이지. 

간혹 <귀거래 歸去來>라는 말도 있는데,
벼슬을 사양하고 시골에 낙향하여 평안한 삶을 사는 태도를 뜻해.
그런 내용을 글로 쓴 것을 <귀거래사>라고 하지.
버드 나무를 다섯 그루 심었다는 오류(五柳) 선생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유명하단다. 

화자는 좀더 뻥쳐서 황제보다 안빈낙도가 좋대.
이제 생각해 보니 중국의 고사 속의 은사(隱士)들로 유명한 인물 '소부, 허유'가 약았던 인물들 같대.
아마도 자연을 즐기는 강호한정보다 나은 것은 세상에 없을 거라네. 

자연을 즐기는 마음이야 참으로 행복했겠지만,
왠지 씁쓸한 맛이 담긴 것 같기도 하구나.
버림받은 자가 스스로 위로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

내셩이 게으르더니 하날히 아라실샤
人間萬事(인간만사) 한 일도 아니맛뎌
다만당 다토리업슨 江山을 딕회라 하시도다

[해석] 내 본성이 본래 게으름을 하늘이 아셨던지 
        인간 세상 수많은 일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맡기지 않고 
        다만 서로 차지하려 다투지 않는 강산을 지켜라 하시었구나. 

여기 와서는 자신에게 어떻게 이런 복이 떨어졌나, 행복해하는 거지.
나는 게으른데, 하느님이 그걸 아시고, 세상의 아무 일도 맡기지 않으신 거야.
다만 다툴 사람이 없는 자연을 지키라 하셨으니, 화자는 그저 자연을 즐길 뿐이지.
캬, 안빈낙도, 안분지족, 자연친화의 감정이 확 밀려오지? 

그렇지만...
사대부는 100% 안분지족을 꿈꿀 수 없단다.
자연에 묻혀있을 때는 선비(士)지만,
입신 출세하여 임금을 보필하면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 '사대부'니 말이지.
언제든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할 준비가 되어있단 말을 덧붙여야 안분지족이 완성된단다.

[바]

江山이 됴타한들 내分으로 누얻나냐
님군 恩惠 이제더옥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하야도 해올일이 업세라.

[해석] 자연을 즐기는 생활이 좋다 하나 보잘 것 없는 나의 분수로 그게 가능하겠느냐? 
          임금의 은혜를 이제야 더욱 알겠도다.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갚을 길이 없구나.

이렇듯 자연이 아무리 좋다 한들, 자신의 분수로 어찌 얻겠느냐.
임금의 은혜는 이제 더욱 알겠구나.
아무리 갚으려 하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캬, 이 정도면,
안빈낙도, 자연친화에서 <충신연주지사>까지 쫙 잘도 달렸지?  

이 시의 배경인 금쇄동 일대는 해남 윤씨 고택(古宅)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있어 아무도 그 위치를 몰랐대.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윤선도가 여기 은거하기 시작한 때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직후였어.
그는 가문의 일마저 아들에게 맡기고 산속에서 십여 년간 혼자 지냈다는구나.
살 집은 물론 정자와 정원까지 조성해 놓고 날마다 거닐며 놀았다고 해. 
자연 속에서 유배 체험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봐야겠지. 
‘다툴 이 없는 강산’ 같은 말은 정쟁이 벌어지는 현실과 대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자연을 노래한 한시 중 '최치원'의 시가 있는데 한번 읽어 보렴.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가야산의 독서당을 노래함'이란 한시야.
이 시는 '만흥'과는 분위기가 다르지?
'만흥'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중시된 노래,
곧 자연친화적인 노래라면,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은
인간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가 싫어서,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려서 세상과 단절을 기하고 있는 노래지.
곧, 자연과 인간은 상반된 속성을 가지고 있어 보인단다. 

이렇게 사대부의 삶은,
비록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자연 속에 머물고 있지만,
좋은 시절만 만나면,
다시 임금님 곁으로 가서 훌륭한 정치를 펼치려는 야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봐야겠지. 

힘들 때라고 해서 한숨만 쉬기보다는,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즐기는 자세도 바람직한 태도의 하나일 것 같구나.
그런 말이 있잖아.
<과거에 후회하지도 말고, 미래를 불안해하지도 말고, 현재를 잡아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런 말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에 나왔던 말들인데,
삶의 힘든 순간에 기억해둘 법한 이야기기도 한 것 같아 적어 둔다.


댓글(4) 먼댓글(1)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고양이 2011-05-3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퀴즈 하나, 수업 한타임 듣고
헉헉 대다가 이 글을 읽었답니다. 그런데....... 머리 속에서 쏴아하고 외치네요.
한글로 풀어진 글도 좋지만, 원문이 참 좋군요. 호젓하고 숨을 터주고.

그런데 옛분들의 글귀는 매우 훌륭한데도 여전히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신기해요.
(음, 사회 교육의 효과랄까... 이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는 제 모습이 또다시 보이네요.)

글샘 2011-05-31 08:26   좋아요 0 | URL
원문을 읽는 맛이 나죠.
평시조는 원래 창으로 부르던 노래였대요. 시조창이라 하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연시조가 등장하는데, 이런 것들은 문학적인 가치가 높아요.
노래로 부르던 거라 입으로 읽는 맛이 특별하거든요.

왕조시대의 글을 우리 기준으로 읽으면 안되겠죠? 철저해요. 그 사람들은. ㅋ
우리도 거기 입각해서 읽어야죠.

pjy 2011-05-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들쑥날쑥한 날씨에 감기조짐이 보여서 찬물말고 따뜻한 녹차 먹고 있습니다^^;
게으를'만'이라니 "만흥" 땡깁니다ㅋ 맘에 쏙드는 제목입니다~
근데 시를 보니 한가롭고 좋고 세상에 이렇게 편할수가 없는데, 그걸 왜 임금님한테 감사해야하는지는 @ㅅ@; 내쳐줘서 덕분이라는 뜻인가요ㅋㅋ

글샘 2011-05-31 12:12   좋아요 0 | URL
그래요. 따뜻한 녹차로 드세요. ^^
게으를 만... 좋아하면 살쪄요. ㅋㅋ

왕조 시대의 패러다임이죠. 무조건 복종. ㅎㅎ
오늘 쓴 페이퍼 보시면,
임금도 임금이지만, 당파간의 대결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군, 연주...는 필수였던 것 같네요.
 

곧 6월이구나.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추운데,
금세 여름이 될 모양이다.
건강한 여름 맞기 바란다. 

오늘은 김지하의 시를 몇 편 읽어 볼까 해.
중학교때 김지하의 '새봄'으로 국어 교과서를 시작했던 너희라,
김지하 이름은 들어 봤을 거다. 

우선 아빠가 대학시절 참 좋아했던 노래, '새'를 한번 읽어 보자.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 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새>


다섯 연으로 된 시인데,
각 행이 아주 짧고,
전달하려는 내용도 복잡하지 않아. 

1연의 '새'는 자유롭지.
청청한(푸르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부신 산맥,
그 위를 날으는(시적 자유, '나는'이 맞지) 새.
그 새가 화자를 울려.
화자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야. 
<묶인 이 가슴>이기 때문에 새가 부럽단다.

밤새
자신을 물어 뜯는대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
이건 좀 정신이 나간 사람의 행동 같지.
정신질환자들이 자해를 잘 한대.
스스로가 가치있게 여겨지지 않을 때,
스스로를 해칠 때,
살이 아프고,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는 슬픈 역설을 쓰는 것 같구나. 

피만 흐르는 감옥 안.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는 세상.
감옥에 갇힌 자신은 과연 '존재'감이 느껴지는 걸까? 

김지하는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 시 <오적>을 썼다고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단다. 

3연에선 고문을 받고 처절하게 비참함을 겪는 신체의 슬픔을 적고 있다.
발랄하게 걷지 못하는 육신,
땅을 기는 육신이,
너, 곧 자유인 너 - 새를 우러러보면서
낮이면 낮마다 그예 한번은 눈이 뻘겋게 부르트도록 울어대는
그래서 몸부림치게 되는,
함께,
함께 답새라(뜻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새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 같아.). 

육신은 정신을 놓아 버렸지만,
끝없이 어디서 새하얀 사슬 소리가 귓전에 올리는데,
새여,
죽어서 너 되어,
자유를 얻는 날까지를 기다리는 이 나약한 육신의 멀고 먼 기다림이여...

그러나,
화자가 지금 있는 곳은,
낮이 밝아가면 밝아갈수록 침침하게 어두워가는
감옥.
밖의 세상이 밝을수록
이곳은 어둠이 짙어지는
감옥의 역설. 

낮이 밝아질수록
화자의 넋은 침침해지고,
저 짧은 볕발
저 짧은 햇살의 토막난 사각형,
철창 사이로 내려앉은 네모난 햇살 위로
여위어가는 창살의 네모를 스쳐 떠나가는 새. 

푸른 하늘 끝,
푸르른 산맥 너머
덧없이 흐르는
끝도 없이 흐르는 저 구름을 보면
화자는 묶인 이 가슴이 원통하고 한스러워
눈물이
원통한 분노의 눈물이 흐른다. 

이 시는 80년대 어두운 사회에서 불리웠던 슬픈 노래였단다.
이 시는 1연과 5연이 마주보는 수미상관의 형식을 띠고 있고,
파란 하늘과 침울한 감옥 안의 분위기가 대조적인 시구나. 

초기 김지하의 시는 이렇게 억압적 현실에 저항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의 노래가 많단다.
마찬가지 저항시 중 '녹두꽃'을 읽어 보자.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녹두꽃>

<녹두>는 콩보다 작다고 해서 키가 작았던 전봉준을 일컫던 말이지.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시인은,
감옥 안에서
왕조 국가, 양반과 상놈 국가의 질서에 반대하다 죽어간 녹두 장군 전봉준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노래를 떠올렸을지도 몰라. 

앞서 이야기했든,
녹두 장군과 시인은 모두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그들의 '의지'는 죽지 않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
그것을 이 시에서눈 <살아>라는 말로 계속 반복하게 돼. 

빈손 가득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이렇게 말이지.
화자는 감옥의 쇠창살 틈으로 비집고 내려 앉은 햇살을 보고 있어.
거기서 살아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지.
그 햇살은 따스했을까? 눈부시게 따가웠을까?
감옥 안에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빈 손>이었지만,
햇살을 가득 움켜쥔 화자.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이 붉게 비치는 저녁에도 화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화자의 열정은 불타고 있지.
깊은 밤 고문당한 깊은 상처를 이기고,
강한 넋으로 살아 있어.  

모진 매질 아래
날이갈수록 두 눈을 흡뜨면서(치켜뜨면서)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사는 화자와 녹두 장군. 

감옥에 갇힌 화자에게
열쇠 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달콤한 유혹인데,
그 소리마저 사라져버린 밤.
혀는 잘리고 굳고 굳고 굳어.
굳은 벽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있는 화자의 애절한 목소리. 

목이 다 쉬도록 꺼이꺼이 울 것같은 이 목소리가
어쩜 이렇게도 절창이었는지.
그래서 1970~80년대 대학생들은 이런 슬픈 시를 읽고,
이런 시를 노래로 만든 것들을 부르면서 저항의 의지를 다지곤 했단다. 

시구문은 시신이 나가는 문이야.
별이 푸르게 빛나는 밤,
시구문 아래서
횃불 아래서
목 베어진 전봉준, 녹두 장군. 

그를 생각하며
횃불로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마음 가득해.
하늘을 온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분노.
번득이는 총검으로 민중을 비웃는 독재자들.
너희는 화자와 녹두 장군을 육시(살육하는 것)하더라도
나는,
우리는 끝끝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비장감이 가득 묻어있는 시야.
김지하의 <민주주의여 만세>로 유명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으니 한번 더 소개만 할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절박한 상황이 금세라도 느껴질 것 같은 시란다. 

황토의 민중을 노래하던 김지하 시인이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이 나뉘어져있던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착취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곤 했었지만,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아.



그 이후의 시들을 아빠가 관심깊게 본 것은 아니지만,
1994년쯤 상을 받은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단다.
한번 읽어 보렴.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제목이 '중심의 괴로움'이야.
자신이 중심에 서 보니 괴롭더라... 뭐,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한다. 

봄에 꽃대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
가만히 꽃대를 바라보니
꽃대가 흔들리더래. 

흙 밑에서
꽃대를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이
꽃이 피고
꽃이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지려고 하니,
괴롭지만 흔들린대. 

이 시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 시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자신은 무얼 위하여 이적지
단 하나의 <중심>을 위하여 싸워 왔던지...
허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지. 

다들 흔들리는데,
다들 흩어지는데,
자신만 중심을 지키고 서있으려니 말이지.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서,
비우겠다는 생각을 해.
비움으로써 <꽃피움>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김지하가 이런 시를 쓰던 때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던 시절이라면 이런 시를 쓰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으니 말이지.
그렇지만,
이 시대는,
김영삼이 평생 민주화 운동하던 야당 생활을 접고,
광주 학살의 주역들이 창당한 바로 그 당으로 들어가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그런 시기란다.
대학생들은 거기 반대하는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다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죽던 그런 시기.
그 불안한 시기에 자기는 중심을 버리고,
흔들리겠다,
다 비우고,
꽃을 피우겠다. 
이런 이외수같이 도사같은 투의 시를 쓰고 있으니 이전의 시들과는 상당히 달라 보이지. 

내가 보기에 그가 쓴 시 중 가장 이상한 시가 바로 중딩 1년 국어책에 실렸던 그 시야.
기억나지? 

한번 읽어 보렴.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새봄>

푸른 솔은 전통적으로 절개를 상징하는 자연물이었단다.
'매화, 난초, 국화, 대'처럼 추운 계절에도 변치 않는 사물들을 사군자니 어쩌니 하면서 칭송하고 했지. 

그렇지만 일본의 국화인 벚꽃은 화사해서 아름답긴 해도,
시에서 칭송하기엔 조금 주제가 애매한 자연물이지. 

너무 빨리 변하는 바람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지조 없는 정치가를 일컬어서 '철새'라거나 '사쿠라(벚꽃)'라고 풍자하거든. 

벚꽃(쉽게 변함) 지는 걸 보니 푸른 솔(불변함)이 좋았던 화자는,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진대. 

물론, 그저 자연물로서야 벚꽃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것도 찾기 드물지.
1994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로,
서로 경쟁하듯 도로변에 심는 나무가 벚꽃나무인 걸 보면,
벚꽃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할 순 없을 거야.
그렇지만,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
그가 이런 시를 쓰는 일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지.
차라리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든가 했더라면 더 멋진 사람 대접을 받았을 것 같단다. 

세상은 늘 변하는 거지만,
우리는 어떻게 변해갈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세상은 점점 경쟁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어.
경쟁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자기 것을 굳세게 지켜가는 사람도 멋진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단다. 

너의 앞에 놓인 인생길에,
어떤 중심이 놓일지,
어떤 변화가 놓일지,
너는 어떤 시간과 어떤 일에 흔들릴지, 모두 미지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적응하길 바라고,
굳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길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int236 2011-05-3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는 목마름으로...제 고등학교 시절에 저를 잡고 놔주지 않던 시였습니다. 나중에 학생회장을 하면서 학회에 김지하씨를 초청하려 갔었는데 무작정 찾아간지라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초청은 못하고 몇마디 대화만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아마 출소하신 후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그것을 포기한 것 같아서...뭐 사상의 전환같은 거라고 오해를 했던 거죠...^^아직도 김지하하면 타는 목마름입니다. 그 시로 만들어진 민중가요도 정말 좋아합니다. 어두운 써클실에서 땡삼이 아저씨의 답답한 짓을 보면서 많이 불렀던 기억이....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글샘님 항상 감사합니다.

글샘 2011-05-30 23:32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생명이라...
뭐, 생명이 소중한 거 누가 모릅니까?
그러면, 4대강 반대라도 제대로 하든가... 사쿠라도 나는 좋아... 이건 아니거든요. ㅎㅎ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나희덕이 '사랑', 그 영원히 풀지 못할 과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몰라요.
사랑이 뭔지... 
인간의 언어가 가진 속성을 학자들은 삼각형으로 표현하곤 하죠.
세상의 숱하게 많은 '현실'들을,
인간의 두뇌 속에선 '개념화', '범주화'하여,
특정한 '언어'로 활용하는 것. 

사람들이 '사랑해.'하고 쉽게 내뱉는 그 말 속에는,
사실 수많은 머릿속 카테고리에 담겨야 할 것들이 구별되지 않고 쓰인다는 것.
그래서 화자의 '사랑해'가 나온 카테고리가
청자가 받아들인 카테고리의 '사랑해'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칸이었을 때,
소통의 불발이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것. 

인간의 언어란 원래 태생적으로 그런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  

 

1연. 

(어둠 속의 남녀.)
남 : 영이야. 잠시만... 나와 잠시만 함께 있어 줘.
여 : (방백) 철아, 너... 너, 날 사랑하는 거 맞아?
      정말 날 사랑해서 나와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 아니면, 젊은 네 몸의 본능이 절제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남 : 영이야, 잠시만... 잠시면 돼. 

(영이, 손을 뻗어 철이의 어깨를 짚는다.)
여 : 철아, 괜찮아?
남 : (고개를 끄덕이며, 푸~푸~ 거칠게 한숨을 내쉰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여 :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남 : (갑자기 영이를 꽉 껴안으며) 몰라. 모르겠어.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남녀.
그들은 사실 그들 머릿속의 다양한 카테고리 속의 상황을 모두 하나의 도가니에 넣어,
<사랑>이라는 상황의 용광로에서 녹여버리죠. 

사랑하는 이들이 두려운 것은,
자신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인지 모른다느
자신의 사랑이 오락가락하는 욕정과,
연애 감정과,
소유욕과,
결혼을 전제한 교제와,
영원히 당신의 편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과,
나를 버려도 좋을 투명한 마음의,
그 다양한 칸들을 유영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느 칸에 있으면 올바른 사랑이고,
어느 칸에 있으면 부정한 사랑인지,
배운 적도 없고,
그래서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힘겨운 것일 수밖에 없지요.
한 사람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만 해도 숱하게 많은데,
그 중 어느 한 칸의 감정에서 길어올려진 '사랑'이란 단어가,
상대방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에 든 개념과 충돌하는 순간,
에효 =3=3 그 부딪힘의 에너지란... 

어쩌면 '물질'과 '반물질'이 부딪히면 질량이 '0'이 되면서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하듯,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부딪히면서 뜨거운 사랑의 열기만 느껴질 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는지도 모를 일이랍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몹시 추운 날, 시린 손을 비비적대던 것처럼,
미봉책으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의 물고기마냥
헐떡거리는 너에게
그저 너를 적셔주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그것이 그저 나의 최선이므로,
자꾸만,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잠시, 네 비늘은 어둠 속에서 빛날 순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정말 두려웠답니다.
당신이 그걸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겠지요.
내 행위가 당신에게 영원히 전달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지금은 어둔 밤.
그래서 헐떡대는 당신 위로 내가 뱉는 침 정도의 위로로도
당신의 비늘은 잠시 빛날 수 있지만,
잠시 후 해가 뜨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면,
그 환한 세상에서는
아마,
아마 우리의 착각이 환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나는 그게 두려운 거예요.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나의 행위는 결코 사랑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면...
두려움에 잠긴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습니다.
당신의 시든 비늘 위로...

아, 이 소통하지 못함.
소통의 불가능함.
여기에 답답해하는 것은,
인간만이 스스로 가로지른 빗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짐승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사랑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고귀한 아름다움의 간격이 좁혀질 때,
그 칸지름에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또 그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때,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그 간극이 멀고 깊다고 느껴질 때,
인간은 사고의 불빛을 꺼버려야 할는지요. 

나희덕은 결국 사랑의 의미 나눔에 성공하고 있지 못해 보입니다. 

이전의 젖은 물고기들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장자의 학철지부(涸轍之鮒)는
가장 필요할 때 물 한 바가지가 필요한 것이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더 잔인한 것일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밥상 위의 마른 생선을 만납니다.
그 황어는 바로 너였지요. 

네가 물 한 바가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내가 물 한 바가지 부어주지 못했던 네가,
바싹 마른 황어가 되어 내 앞에 놓였을 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없었음을,
나 역시 네 옆에서 침이나 뱉어줄 따름이었지,
너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길어다 부어줄 능력이 못되었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의 꺾인 지느러미,
너의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 앞에서,
화자는 할 말이 없죠. 

그때,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어야 했던지를 아직도 모른고,
그리고, 너의 꺾인 지느러미와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나를 원망할는지,
아니면 무연히 잊었는지도 나는 모르죠. 

장자의 가르침은 이 대목에서 유효합니다. 

서로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 적셔주는 행위,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해요. 

진실한 사랑은 가슴 떨린 사랑도 아니고,
잊지 못해 가슴 태우는 사랑도 아닙니다.
정말 사랑이란 것은,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이에요.
가족 같은 사랑.
산소 같은 사랑.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을 <떨어져 살아 서로 잊>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헤어질까 바들바들 떠는 사랑이 아니라,
물과 물고기처럼
헤어짐을 상상할 필요도 없이 안정적으로 사는 삶.
수어지교라고 했던가요.
물 만난 고기라 했던가요. 

살아갈수록 손바닥이 까슬해지고,
손가락에 습한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어,
자주 핸드 로션을 바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물기마저 말라버린다면,
슬프겠지요. 

서로의 대뇌 속,
다른 카테고리 속에 담겨진 낱말밭에 연연하기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잊고,
당신이 거기 존재함 자체를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기를... 

마른 물고기처럼 변해버린 당신의 존재를 만났을 때,
미안해하거나 후회하는 일도 애시당초 만들지 않으며 살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로 100회가 되었구나.
숫자가 별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100번이나 민우에게 강의를 했다는 걸 기념해 보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어려운 시들을 두어 편 읽어 보자. 

송찬호의 '구두'는 가끔 문제집에 나기도 하지만,
워낙 환상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시라서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어 보자꾸나. 

우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하나 보자. 

 

이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란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
그림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다.
분명히 이 그림은 파이프 그림이지. ㅋ
그런데 글씨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음으로써,
<그림>과 <의미>의 관계, 그리고 <언어>의 관계를 한번 생각하게 한단다. 

물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지.
파이프 그림일 뿐.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게 뭐야? 이러고 물으면,
어, 그거 파이프네. 이렇게 대답하겠지.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려 쓰는 언어들도 사실은
자기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단 걸 알 수 있지. 
아빠가 민우에게 '사랑해~'하는 말을 하는 거랑, 엄마에게 하는 건 전혀 다르단다.
민우에게는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아, 잘 자라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 이런 의미고,
엄마에게는 '당신은 나와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남은 일생을 즐겁게 살 나의 짝입니다.' 이런 의미겠지.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고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 보면, 그러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웅변이 아닐까 해. 

그럼 송찬호의 구두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는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송찬호, 구두> 

자, 이 시의 제목이 '구두'임을 생각해 본다면,
중심 생각을 '구두'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자. 

그런데, 바로 '새장'이란 단어가 나오잖아.
'감옥'이라고도 하고.
화자는 구두와 새장, 감옥의 속성에 주목하고 있는 거야.
왜, 구두를 오래 신고 있으면 갑갑하잖아.
우리 삶은 오래 신고 있는 구두처럼, 구속되고 갑갑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를 전개하는 건가 보다. 

1연에서 '날뛰는 발'은 자유롭고 싶은 자신의 영혼을 뜻한다고 봐야겠지.
누구나 세상에 얽매여 살지만 내심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
세심한 아저씨는 구두 하나를 신으면서도 새장 속의 새처럼, 답답함을 느꼈나봐.
아마도 화자는 어린 시절 들판에서, 논밭에서 맨발로 자유롭게 뛰어다닌 추억을 가지고 있겠지. 

2연에서 처음엔 구두가 너무 커서 덜그럭거렸대.
'구두', '새장', '감옥'은 모두 부자유, 구속의 환경이잖아.
발에 너무 커서 덜그덕거리는 구두.
자신은 왠지 세상 속에서 꼭맞춤하게 살지 못하고 덜거덕거리는 느낌이 있다.
감옥이 작아지고, 그래서 구두가 발에 꼭 맞았으면... 하는 희망과,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는 새가 오버랩되면서 시를 쓰고 있어.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이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이란 작품이다.
바다 위로 넓은 하늘이 펼쳐졌는데,
그 위에 공중에 뜬 땅이 있고, 그 위에 성이 있지.
물론, 이것은 '바다'도 '하늘'도 '바위'도 '성'도 아닌 그저 한 장의 그림일 뿐이지만. ㅋ
파이프가 아니라는 그림처럼 말이지. 

그러나, 화가는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가득 날고 있는 구름.
또 산 위의 성을 그렸어.
어찌 생각하면, 저 바위는 둥근 지구를 축소해 놓은 것일지도 몰라.
이런 환상적인 그림을 통해서 우린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러하다는 생각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고 바뀌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새장', '구두', '감옥' 그 부자유스러운 구속 속으로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 본대.
모자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것이지만,
왠지 조금 멋스럽게 폼을 잡으려는 도구기도 하지.
야구선수 모자보다는 영국 신사 모자풍이 어울리겠다.  
르네 마그리트가 쓴 것 같은 이런 모자.
역시 이 포스터에도 파이프가 등장하는구만.



새장이라는 구속된 공간 안에서 답답해하는 새.
새장에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어서, 그나마 새는 숨통이 트이듯,
새장 속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려 애써 보는 화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새장 속의 새들은 이미 자유롭게 활강하던 넓다란 언덕을 잊었고,
숱한 이랑들을 세며 날던 시절을 잊어버린 듯,
현실 속의 하루하루는 답답하고 지루하지.  

현대인의 삶은 이렇게 꽉막힌 것이란다.
자유를 잃어버린,
그 푸르른 자유의 추억을 다 놓쳐버린 구속된 삶.

그러나,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듯,
작은 시도로도 현실의 구속감, 답답함은 조금 완화될지도 몰라.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비록 현실적으로 새장은 구속의 의미를 갖지만,
거기 작은 구멍과 먹이통을 통해서나마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할지도 모르지. 

4연에서 화자는 오늘 산 새 구두를 보고 있어.
아직 신지 않은 새 구두.
그 구두는 구름 위에 올려져 있는 듯 땅을 밟지 않았고,
물에 뜨기 전인 듯 물에 젖지 않은 새 구두야. 

원래 새 구두는 발에 조금 맞지 않잖아.
어떤 쪽은 넓고,
어떤 쪽은 찡기게 마련이지.
새 구두를 사 두고 바라보면서,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자유를 바라고 있는 건지... 

속박에 묶인 직장에서 일하기도 했던 화자,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화자.
그는 새 구두를 하나 사서 쳐다보면서,
자기 인생을 회고한다. 

늙었고 고집세어서 새구두와는 좀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발.
구두와 화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덜그덕거리고 꽉 쪼여 답답하던 화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갑갑한 속박의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자유를 상상하고 싶은 것인지도... 

새 구두 한켤레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통찰력.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상상력.
이런 것들을 마음껏 펼친 시가 아닐까 싶다.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상의 틀을 깨고 자유로이 비상하려는 꿈을 가진 존재인지도 몰라.
그러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많은 속박으로 짜여진 공간이고 말이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렴.
몇 가지 낱말들에 걸려서 의미가 들어오지 않던 시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로 읽히기를 바라며 아빠가 쓴 글이니깐,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는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보는 것이다 

다음엔 수능에 나왔던 시 중 김춘수의 <내가 만난 이중섭>을 읽어 보자.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화가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어.
그렇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 아내는 일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 살지.
이중섭은 가난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림으로 남기곤 했단다. 

어느 날, 화가 이중섭을 시인 김춘수가 만났지.
그런데 이중섭은 김춘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을 먼 곳,
바다에만 두고 있었나봐. 
아내가 건너간 곳.
그리고 온다면 거기서 아내가 올 바로 그 바다로 말이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는 표현은,
머릿 속에 온통 바다 생각 뿐이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중섭이 서있는 배경으로 바다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는 형상화일 수도 있어.
암튼 이중섭의 이미지에는 바다가 가득한 거지. 

도쿄(東京)로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다,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이 빛깔은 어둠인지, 마음의 어두움인지 모르지만,
그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대. 

아무리 화자가 이중섭을 찾으려 해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더래.
이중섭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그만큼 철저하게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거겠지.
그 어둠 속으로... 

그러다 한참 뒤에
화자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만나게 돼. 

이중섭은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유행가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는데,
'눈 멀도록 바다만 바라보다...'하는 구절이 있단다.
아마도 이중섭이 그런 심정이었겠지.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보면서,
바다를 한 뼘 한 뼘 지워나가고 있었대.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면서... 

화자는 이중섭을 두 번 만났지.
그런데 이중섭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내 뿐이야.
그 넓은 현해탄을 한 뼘씩 지워나가봤댔자 거리는 줄어들지 않을 건 뻔한 노릇. 

이 그리움엔 절망만이 가득 남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평양이 고향이며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이중섭을 간첩, 공산당 내지는 정신 이상자로 몰았대.
단지 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그래서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화상을 그렸어. 
정신이상자는 자화상을 이렇게 정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한 달이나 수용되어야 했다는구나.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담뱃갑 은박지에다가 송곳으로 그림을 그려 넣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지. 

 

그의 <가족>이란 작품이야. 

 

우리의 감각과 대뇌는 세상 모든 것을 늘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힘든 일을 겪으면,
감각과 대뇌가 세상의 빛을 굴절시켜 어둡게 보이도록 만든단다. 

이번에 어떤 여자 아나운서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결국 목숨까지 버리게 됐대.
안타까운 일이지.
우리 감각을 너무 믿는 것도 늘 경계해야 할 일이란다. 

세상은 힘들게 보여도,
즐겁게 보여도,
늘 힘들지만은 않고 즐겁지만도 않은 곳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단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잖아.
인간이 옳다, 그르다고 부르는 것들은 늘 그르고 옳은 것으로 바뀔 수 있고,
아름답고 추하다고 나누는 것도 금세 더럽고 이쁜 것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란다. 

오늘 읽은 환상 속의 시들을 감상하면서,
너무 한 가지 생각에만 매몰되어서,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경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우리 마음에 주는 것이니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1-05-25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모르는 시인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시와 그림이 절묘하게 어울리네요. 그러니 이 페이퍼 한편 쓰시기 위한 시간과 노력,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정도 할 뿐 입니다.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글샘 2011-05-26 00:58   좋아요 2 | URL
시와 그림이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요. ^^
페이퍼 하나 쓰는데 시간은 많이 안 걸립니다. 뭐, 맨날 하는 수업이니깐 말이죠.

비로그인 2011-05-26 0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100회로군요. 편집자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을 텐데 내년쯤에는 책으로 묶여 나오는 건가요?^^

글샘 2011-05-26 09:23   좋아요 2 | URL
글쎄요. 아이들에게 도움은 되겠다 싶으면서도, 책으로 만드는 일은 영 찜찜하거든요.
그리고 제멋대로 설명이 튀어 다녀서, 출판하기엔 편집자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듯 하기도 해요.^^

smdan 2011-08-30 1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좋은 서재를 발견했습니다. 음. 잘보고/잘읽고/많이 느끼고 갑니다. 구들장(시공부모임)에서 작년에 이어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공부하는 날이 오늘인데, 노다지를 발견했습니다.

글샘 2011-08-31 08:58   좋아요 1 | URL
시공부 모임이란 것도 하시는군요. ^^
저는 혼자서 되는대로 쓰던 글이라... 송찬호... 재미있는 작가지요.

저도 저녁을 좋아합니다.
 

하늘이 파랗다.
봄바람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콧등을 살랑거리고,
햇살도 피부에 따끔거리도록 와 닿는다. 

봄이 문득,
칸을 옮겨 여름으로 이사가는 느낌인 요즘.
이제 다시 평가원 모의고사를 앞두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겠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한용운 스님의 시를 두어 편 보자.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한용운, 찬송(讚頌)>

척봐도 이 시는 제목 그대로 '님'에 대한 찬송이지.
예찬적 태도로 님을 극찬하는 시야. 

각 연의 처음엔 '님이여,'로 시작하고, 마지막행은 '님이여, 사랑이여, ~~~이여.'로 마치지. 
그 사이에 '님은 ~~~이다.'라는 은유법이 하나씩 들어가 있고 말이야.
수능에 쓰이는 용어로 이렇게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른단다.
잘 외워두렴. <통사 구조의 반복>
우선 1연부터 읽어 보자.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이래.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동안 천국의 사랑을 받기에 마땅한 존재가 '님, 당신'이지.
금은 순수한 금속인데, 백 번이나 단련하였단 건,
불순물 제거를 위하여 그만큼 여러 번 수고를 거친 <금결>이니 대단한 찬송이지.
아침 햇살은 참 환하고 밝아 반가운데, 그 아침 볕의 첫걸음처럼 그대는 환한 존재란 이야그지. 

다음 연에서 당신은 <의리가 중요하고 재물은 가벼움을 잘 아는> 존재래.
그래서 거지의 거친 밭, 가진 것 없고 소외되는 자들에게
복된 씨를 뿌리는 존재로 그리고 있지.
오동 나무는 전설 속의 봉황이 깃든다는 신비로운 나무인데,
오동의 숨은 소리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시어구나. 

마지막 연에서 님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한대.
이 시가 씌어진 일제 강점기는 <겨울>이고 <암흑>이고 <폭력의 시대>였지.
그러니 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찬송가는 바로 독립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아니겠니? 

관세음 보살 이야기는 전에 한 적 있을 거야.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보고 觀>, <듣는 音> 자비로운 관세음보살.
눈물로 이어가는 우리 민족에게 자비의 눈물을 뿌려달라고,
그래서 얼음 바다에 봄바람처럼 우리에게 오시라고 간절히 비는 시란다.

이 시에서 우리 민족을 비유한 시어는 무엇무엇이 있을까?
바로 거지와 약자란다. 

이 거지와 약자를 <지고지순한 님, 의로운 님, 자비의 님>이 보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만해 시에서의 '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그리워하는, 사랑하는)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게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대.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지.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야.
그래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으니 조금 어려워 보이기도 한단다. 

다음엔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읽어 보자.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을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도 '님, 당신'이 나와.
총 4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앞부분에서 <좌절>하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희망>을 보게 되는 구조란다. 자세히 한번 볼까? 

1연에서 나는 당신과 이별한 후 당신을 잊지 못한대.
그런데, 그것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함, 좀 이기적인 거라고 한다.
뭐,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모든 사랑도 다 이기적인 것이겠지. 

2연에서 나는 <땅이 없어 추수가 없는> 존재야.
<찬송>에서 '거지, 약자'로 대변되던 조선의 민중이겠지.
저녁거리가 없어서 좁쌀이나 감자라도 좀 빌리러 이웃집에 갔더니
이웃집 주인이 '거지는 인격이 없다. 생명도 없다. 너를 도와주는 건 죄다.' 이렇게 말해.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 가장 좌절스러울 때
화자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만난대. 

정말 쪽팔리는 상황이고 절망적인 상황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좌절스런 상황에서 <님의 존재>를 확인한대.
비록 님은 나와 이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님은 침묵한 존재지만,
님이 거기 계심을 의심하지 않게 된단다. 

2연과 3연은 비슷한 구조야.
집도 없고 그래서 민적(호적)도 당연히 없지.
'민적이 없으니 인권이 없다. 정도를 지킬 것도 없다.'
이렇게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단다.
2연에서 이웃집 주인과 같은 존재지.
그에게 항거한 뒤에
격한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고 슬픈 마음이 솟구칠 때,
다시 당신을 만나게 돼. 

가장 억울하고 가장 분노하고 가장 슬픈 시점에서,
만나게 되는 당신.
그 당신은 <찬송>에서와 같이,
우리의 슬픔을 모두 보시고,
우리의 아픔 소리를 모두 들으시는, 그분이 아닐까?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일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라면 관세음보살일 것인 당신 말이야. 

마지막 연에 '아아'가 나온다.
님의 침묵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아'가 나오지.
아아~ 하는 비탄과 함게 주제의식이 드러나겠구나...하고 추측해 보자. 

화자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가진 자,
곧 권력자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대.
우리가 보통 윤리, 도덕, 법률은 약자를 지켜주는 거라고 착각하잖아.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있는 체 하는 것들은 모두 <칼과 황금>을 향하여 있다는 거지.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연기를 내서 대상을 숭배하듯,
모든 <윤리, 도덕, 법률>은 <권력자의 힘>을 향한 숭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거. 

영원한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화자는 다시 당신을 만난대.
영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어쩌면 죽음이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역사가 이만큼 흘러왔는데,
그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해서 다 뭉개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들어있지.
술을 마시는 것은 자포자기와 좌절의 이미지겠고.  

님과 이별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화가가 바라본 님.
그것은 화자를 포근히 감싸안아주는 그런 님이겠지.
님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것.
힘든 절망적 삶을 극복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시라고 보면 되겠다. 

일제 강점기의 시들이 <한>이 맺힌 시들이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시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의심으로 가득한 시들이라면,
한용운의 시들은
역설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는 힘있는 시들이란다. 

한용운의 시들은 대부분
여리고 여성적인 화자들을 차용하고 있지만,
결코 소극적으로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헝클어진 세상을 똑바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끈질긴 저항의 마음과,
희망의 줄기를 찾아내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연애편지를 쓰려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될 정도야.
그렇지만, 그의 시가 가진 힘은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는단다.
늘 이별에서 시작하지만, 극복 의지와 희망을 끌어들이거든. 

이런 것이 불교적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란 말이 있잖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금세 사라질 것들임을 잊지 말라는 거야.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음을 힘주어 쓰는 시.
이런 시가 삶의 힘이 되기도 할 거다.
박카스 한 병 마시듯, 시를 통해 한 모금의 힘을 얻어 보자꾸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jy 2011-05-2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을땐 잘 모르다가 없으니 더 절실하고 반드시 계시는,
힘든 상황속에서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한다....
희망이란게 그런거죠~ 절망속에서 더 빛나는 존재감 말입니다^^;

글샘 2011-05-25 16:44   좋아요 0 | URL
원래 희망이란 놈은,
어두운 데서 빛나는 속성을 가진 모양입니다.
어두운데... 희망의 상자가 꽉 닫혀있다면...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