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목서 향기가 세상에 가득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모과향 비슷한 꽃향기로 대기를 가득채우는 꽃나무가 금목서인데,
금목서 향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걸 보면,
사람의 향기도 저렇게 넓게넓게 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은 금목서 향기가 흩날리는 풍경을 틈타,
치자꽃 향기를 음미해 보자.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를 우선 읽어 보렴.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박규리, 치자꽃 설화) 

설화는 구비전승되는 이야기야.
치자꽃에는 왠지 이런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다는 시를 쓰고 있지.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서 보내고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스님이 울고 있는 걸, 화자는 보고 말았어. 

캬, 요것만 가지고도 짠한 순애보(순수한 사랑의 기록)가 한편 떠오르는구나. 

 

스님은 고요한 법당 안에 들어가시고,
문 한 쪽만 열어 두고는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
빗물에 우는 소리처럼... 

사랑하던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그 밀어내던 자신이 스스로 <못>이 되어
스스로의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처럼 여겨진대.
그렇게 목탁소리만 은은하게 이어짐으로써 스님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지. 

화자는 스님의 슬픈 순애보에 가슴이 짠해서 계속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
여자는 돌아가지 않고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더래.
그러다 일어나더니
산길을 휘청이며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듯 휘청거리며 내려갔대.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도 듣고(떨어지고)
그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소리만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하필이면, 짝을 잃은 그 순간에 짝을 찾는 소리라니... 

화자는 내려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생각해.
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구나.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구나. 

그러고 있는데,
방 안의 스님은
잿빛 승복만 입은 채
날이 저물도록 경을 읽는 소리로만 남았어. 

떠난 사람보다
더 서럽게 보이는 스님의 잿빛 등과 독경소리. 

아, 화자는 그만, 독경소리가 너무 싫어 졌나봐.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여자가 된 듯,
스님의 버리려는 독경소리가,
오히려 더 깊어가는 사랑인 것처럼 들려서
화자 역시 하염없이 산길에 앉아 있대. 

독경소리는 이렇게 중의적으로 쓰였지.
스님은 여인을 보내고 잊으려고 독경을 시작했지만,
그 독경소리 <저물도록 그치지 않는> 걸 보면, 마음 속에서 잊히지 않는 거야. 

그게 마지막 부분의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이란 표현과 딱 맞아 떨어지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보내며 겪는 이별의 정한을
마치 멜로 드라마 한 편 보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시란다. 

치자꽃이 나온 김에, 이해인 님의 시도 한 편 읽어 보렴.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수녀님은 치자꽃을 보면서,
사람을 만날 때 설레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였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기를 맡는다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그런다면 삶이 곧 꽃밭이 될 것을... 

이렇게 생각한단다. 

치자꽃 향기를 맡으면서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고
향기로운 날들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거란다. 

오늘은 작년 모의고사에 난 시조 중에 아이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던 시조를 한 편 읽어 보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 박인로,「입암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 
*왕기순인 : 자기 몸을 굽혀 남을 좇음. 
**소허 : 소부(巢父)와 허유(許由). 상고 시대의 대표적인 은자(隱者).
***엄 처사 : 엄자릉(嚴子陵). 한나라 광무제 때의 은자(隱者).

이 시조는 박인로가 '입암(선바위)'을 대상으로 쓴 시조 29수의 5~8수가 되겠다. 

제5수, 7수는 화자의 말이고,
제6수, 8수는 바위의 말이라고 한다.
한 수씩 뜻을 살펴 보자꾸나.

제5수 [화자의 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화자가 입암(우뚝 선 바위)을 보고 "너는 우뚝 곧게 서서 본받을 게 많다."고 했어.
그런데 도회지에 있지 않고 구름 깊은 골짜기에 있어 아는 이가 찾아오겠느냐고 한다.
이제라도 넓은 광야로 옮겨 모두들 보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어.

<영월의 입암> 

화자가 바위를 보고 캬, 너 멋지군.
근데 이렇게 촌구석에 있음 누가 알아나 주겠냐?
야, 너 슈스케 한번 나가 볼래? 이런 거지. 

그랬더니 바위가 제6수에서 이렇게 대답했어.

[바위의 대답]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바위]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바위]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세상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어지럽다 보니) 나를 봐도 별로 반기지도 않을 거 같아.
내 몸을 굽히고 남을 쫓아서 어디로 가란 말이야?
그러니 산좋고 물좋은 골짜기에 생긴대로 늙고 싶다. 

그러니깐, 야, 슈스케 같은 데 나가봤자, 별거 있겠어?
세상은 노래 잘한다고 가수 만들어 주는 거 아니란말야.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 지 잘 알면서?
사람들이 나 본다고 좋아할지 어떨지도 모르잖아.
피디한테 수구리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야 하고... 하이고...
차라리 산좋고 물좋은 여기서 숨어 사는 게 내 팔자에 딱 맞아.  

그러니깐, 다시 화자가 한 마디 거들지.

[화자의 말]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바위]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아냐, 넌 정말 훌륭해.
네가 처음부터 이 산속에 혼자 있어서 그래.
너보고 멋지다고, 네 숨은 재주를 알아주고 반기던 사람이 몇이나 만났겠어?
하고 많은 영웅들의 이름을 들어서 너랑 비교해 보고 싶다.
화자는 정말 바위가 멋진 존재임을,
그래서 세상 누구라도 바위한테 홀딱 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지. 

다시 바위가 대답하고 있어.

[바위의 대답]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화자]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소부와 허유, 소허는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은자들이지.
소부, 허유랑 지내다가 다시 엄처사를 만났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서 지냈단 거지. 

이제 소허와 엄처사를 아쉽게 이별하고
알아주는 이 없이 버려져 있은 지 오래였는데,
오늘에서야 또 나를 알아주는 너(화자)를 만나니,
시절 인연이 운이 맞는 것 같다.
우리 한 번 잘해보자. 

이런 거지.  

박인로가 '입암'더러 '은자'라고 추켜세우면서
너, 세상에 나가면 인기 좋을 거야.
왜 세상 사람들이 너를 몰라보는지 몰라...하고 아쉬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난 박인로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보이거든. ^^ 

왜 세상은 재주 많은 나를 알아보지 않은 거삼? 이러고 말이지. 

사람이 일단 뭐든 무기가 있어야 해.
나들보다 이것은 잘할 자신 있다... 이런 것.
그걸 갖고 있으면, 박인로처럼, 시절 인연을 기다리면 되겠지. 

만리 밖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만리향, 금목서를 다른 이름으로 그렇게도 부르더구나.
향기가 듬뿍 담긴 사람이라면,
어디 숨어 있더라도,
누군가 알아볼 때가 있겠지?  

우리 아들이 금목서처럼,
만리향처럼
은은한 향기로 가득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아빠가 몇 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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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엔 여름같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환절기다.
요즘 계절과 계절 사이 '간절기'란 말도 있을 정도로
일교차가 크니 건강에 유의해야겠다.
(환절기라면 계절이 쉽게 바뀐다는 느낌인데, 간절기라 하니 제법 사이가 긴 느낌이지?) 

오늘은 정현종 시인의 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제목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이야.

그래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 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제목에서 주제가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지.
'공'이란 소재의 특징은 여러 거지야.
둥글고, 놀이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시인은 공의 회복탄력성에 주목하고 있다. 

떨어지는 일은 좌절스러운 일이지.
살다 보면,
성적이 떨어지기도 하고,
시험에 떨어지기도 하고,
기분이 떨어지기도(다운된다고 하지) 하고, 
주가가 떨어지면 옥상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럴 때, 둥근 공은
위 아래가 없으므로
쓰러진다는 개념도 없이
다시 회복하는 속성에 의미를 부여한 거야. 

첫 행,
<그래 살아 봐야지>가 화자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시 제목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과 첫 행 '그래 살아 봐야지'만 가지고도 주제가 확 살아나지?

공을 '쓰러지는 법이 없는 탄력의 나라의 왕자'라고 표현했구나.
왕자는 고귀한 존재잖아.
살면서 지쳐 쓰러지려할 때,
쓰러지는 법이 없는 탄력 100% 왕자가 되자는 멋진 표현을 오늘 만난다. 

둥근 공의 꼴은
언제나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찰력이 가장 작은 모습이지.
그리고 탄성이 강해서 가볍게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야. 

삶은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무엇에 비유하면 가장 적합할지를 생각해 보니,
떨어져도 쓰러지는 법 없이 튀어오르는 공,
딱, 그것 같더라는 발견이 신선한 시란다.

그래 살아봐야지...하는 말에서
살기 힘겹다는 심상이 숨어 있어.
그렇지만, "떨어져도 튀는", "쓰러지는 법이 없는",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공의 속성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생에 대한 의지와 자세를 가다듬어 보자는 의도의 시겠다. 

실존주의 작가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어.
시지프스는 신의 미움을 사서 산 정상에 바위를 올려 놓으라는 형벌을 받아.
정상에 올려 놓으면 다시 밑으로 굴러가는 바위 때문에
시지프스는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그러나 시지프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대로 바위를 굴려 정상에 올리려는 행위를 반복하게 돼. 

삶이란 이렇게 형벌과도 같이,
무의미한 삶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야. 

그럴 때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본 '의지의 시'를 읽어볼 만 한 일 아닐까?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시를 한 편 더 볼까?
서정주의 시를 한 수 읽어 보자.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 꽃밭의 독백-사소 단장-) 

[원주(原註)] 사소(娑蘇) : 사소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

이 시는 간혹 시험에 나오면 왕창 틀려 주시는 어려운 시 중의 하나 되시겠다. 

제목이 사소 단장이야. 사소 부인의 짧은 노래.
사소 부인이 산으로 신선수행 가기 전에 집 꽃밭에서 독백을 한 거래.

경주 선도산에 신모가 있는데 그 이름을 사소라 했다.
일찍이 신선술을 터득하여 멀리 바다 건너 서쪽 나라로부터 해동으로 들어왔다.
솔개가 날아가 내리는 곳에 집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고서 선도산에 정착하여 신선이 되었다.
사소가 처음 삼한 땅에 이르러 자식을 낳으니, 그가 동국의 첫 왕이 되엇다.
무릇 혁거세와 알영의 유래를 말하는 것이리라.

서정주는 왜 이런 전설 속 이야기를 끄집어 냈을까?
도대체 설화 속의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연결해 보려 했던 걸까? 

이 시를 읽을 때, '꽃아'를 어떻게 소리내어 읽을까도 문제야. ^^
[꼬차] [꼬사] [꼬다] 등 다양하게 읽기도 하지만,
'-아'는 무엇을 부르는 '호격 조사'로 실질적 의미가 없으니 이어지는 대로 소리내는 게 맞아.
첫번째 [꼬차] 이렇게 읽는 거지.  

화자가 추구하는 바는 첫 행에 바로 등장한다.
<노래>가 그 중 가장 낫대.
무엇 중에서 가장 나을까? 비교 대상은? 뒤에서 생각해 보자.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바닷가까지 네 발굽을 치며 달려간 말 이야기를 보면,
화자는 말타기를 즐기는 신선 같다. 
말타기를 해도,
바닷가에 가서 '멎어버리고 말'았대.
이제 <노래>와 비교된 게 하나 나왔지. <말타기>
그 중에 노래가 가장 좋단다. 

계속 볼까? 

산돼지를 사냥하고, 매사냥도 했어.
그런 들짐승 고기에도 이미 입맛을 잃어버린 것.
또 하나의 취미가 나왔지? <사냥>
노래, 말타기, 사냥, 이런 것 중에 노래가 가장 낫대.
왜냐면... 화자는 사소 부인이지만, 시인인 서정주의 분신이니깐. 

그리곤, 뜬금없이 '꽃'을 찾는다.
아침마다 피어나는 꽃.
좋기는 꽃이 제일 좋대.
꽃이 피는 일은 한 세상이 열리는 <개벽>과도 같은 창조의 힘이 느껴지겠지. 

그런데, 화자는 꽃이 제일 좋은데,
헤엄을 자유로이 칠 줄 모르고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출 뿐인 어린애처럼,
꽃의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래. 

꽃이 피는 섭리를,
그 아름다운 향기와 그 찬란한 빛깔의 아름다운 창조를 꿈꾸는 화자에게
꽃은 문을 열고 그를 받아주지 않는 모양이야. 

그래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렇게 불러 보지만,
당근, 꽃은 열릴 리가 없지. 

아마도, 꽃을 여는 길은
자연의 섭리, 위대한 벼락이나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화자는 애처롭게 불러본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하면서... 

서정주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정말 최고의 경지란다.
그렇지만, 그도 추천사에서 그네에 매달린 존재처럼 한계 의식을 느꼈던 거야.
이 시에서도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뻔히 한계 의식에 직면하는 시인을 발견하게 된다.

주제는 우주의 비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 또는 그렇게 시를 잘 쓰고자 하는 열망.
가장 멋진 '노래'를 짓고 싶으나 좌절하게 되는 한계 의식,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야. 

시를 잘 쓰고 싶은 화자.
노래가 가장 나은데,
그 노래는 마치 문 열리지 않는 꽃처럼, 화자에게는 막막한 대상이라는 좌절감. 

그래도 화자는 <벼락과 해일>만이 길이라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한계의식을 느끼지만,
제우스 신처럼 벼락을 쳐서 완전한 세계에 도달할 수는 없는 존재임을 명백히 알지만,
그래도 간절히 빌어 보는 마음이 애절하게 느껴지지. 

아빠도 무슨 일이든 이렇게 간절히 바라면 이뤄지는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해.
어떤 베스트셀러 작가가 '생생하게 꿈꾸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시크릿>이란 유명한 책에서도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고 말이야.
막연한 소망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간절히 바라고, 절절히 노력하면, 나머지 부분은 운명이 채워줄 수도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하는 시야. 

되튀는 공처럼 탄력성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힘을 내서 사는 자세.
오늘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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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9-2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오랜만에 문학수업을 들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전 쓰러지는 적이 없는 탄력의 나라의 공주가 될래요! ㅎ

글샘 2011-09-28 09: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공주님 ^^
 

하늘을 보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가을날이다.

오늘은 김명인의 <그 나무>란 시를 읽어 보자.
삶이란 게 꼭 남들보다 '일찍' 뭘 많이 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난 늘 한다마는,
너는 어떤 생각인지 시를 읽으면서 느껴 보렴.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 구석으로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드는 꽃불 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 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저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저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김명인, 그 나무)


*소신공양 : 자기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침.
**소지 :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태워서 공중에 올리는 종이

화자는 '벚꽃 가로' 를 따라 걷고 있었대.
벚꽃은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우는 것이 특징이지.
그런데, 어떤 나무 한 그루는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듯,
늦되게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단 거지. 

그걸 보고 화자는 깨달음을 얻게 돼. 

"아, 우리는 너무 기다릴 줄 모르는 거 아닐까?
남들이 꽃필 때 꼭 따라서 꽃피는 것만이 최선일까?
나무에 따라서 늦된 것도 있듯,
사람도 조금 이를 수도 조금 늦될 수도 있는 것을,
사람들은 제 기준에 따라 늦된 것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구나." 뭐, 이런 느낌. 

그 나무는 왠지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진 것처럼,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대. 

그렇지만, 그 나무 역시,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멍울들을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것이었어. 

늦된 나무도
조금만 기다려 주면
비로소 환하게 꽃불 성화를 밝혀 들고
환하게 타오를 것임을 생각하고
화자는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서 반성해 보았단다. 

봄이 된 지 두 달 넘도록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보이는 늦된 나무.
그 나무도 꽃이 지면, 푸릇한 잎새 매달겠지?
청록으로 여름이 지나는 시절이 되면,
불타듯 몸사르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이 되듯,
그 나무 역시 몸바쳐 낙엽을 떨구일 수 있겠지? 
그렇게 되길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나도 아들이 남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길 바라지 않는단다.
다만 부모의 마음은 남들보다 아들이 활짝 꽃피울 날이 언젠가 오길
늦되지만 자신의 속에 담긴 꽃망울이 화사하게 피어난 모습을 자랑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일 거야. 

나무가 꽃망울을 맺히게 하고, 꽃을 피우고,
녹색 잎사귀로 치열하게 광합성을 하듯,
이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런 치열한 삶이 담겨있다면,
늦된 나무라 하더라도 완성된 나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엔 '작은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이건청의 '하류'란 시를 읽어 보자.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 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건청, 하류) 

이 시는 '거기 나무가 있었네'를 반복하는 사이사이에 생각을 밀어넣고 있어.
그래서 한 연으로 된 시인데도,
마치 연 구분이 된 것처럼 느껴지지. 

'거기 나무가 있었네'의 반복으로 아쉬운 마음이 반복되어 강조되기도 해.  

기러기 날아가던 노을. 
금빛 붉은 노을이 찬란하게 퍼지던 저녁
집으로 돌아와 은하수를 바라보던 시절.
유년 시절의 추억 속에 가장 인상적인 소재는 '나무'지. 

그 나무는
희미한 강물 소리 자장가 삼아 잠들던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가슴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나 할머니처럼
위안을 받던 존재였지. 

여름이면 수만 마리 매미 울음과 함께 그늘을 지어 주고,
그 고향, 그 나무 아래서 '모든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해.
결국, 지금은 어디서도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아쉬움을,
그 시절과 대비하여 나타내고 있어 보인단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나무가 무너져 흩어지고 말았대.
나무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되어버렸대. 

사라져버린 유년 시절의 추억을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이라고 해서 공감각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시각적 노을을 청각적으로 울림처럼 표현한 거지.
예전에 있었던 기러기 역시 그리움의 대상이야. 

귀 기울이고 다가서서
까마득한 옛날,
그 하류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 화자가 상상되니? 

너는 어린 시절이라면 어떤 추억이 남아있을까?
이 시의 주제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란다.
사람은 누구나 유년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여기기 쉽지.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면 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야.  

이제 '하류'처럼 고요하게 물소리 들리지 않던 시절을 지나서,
콸콸거리는 상류 지역을 통과해야 할 삶의 고비를 맞게 될지도 몰라.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도 선택해야 하는 '청춘'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시기란다.
식물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이듯,
인간에게도 청춘은 잔인한 계절이야. 

부지런히 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생명력을 쭉쭉 퍼뜨리는 식물의 봄처럼,
인간의 청춘 역시 삶의 생명력으로 가득차 넘쳐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엘리엇은 <황무지>란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쓰기도 했단다.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황무지에 비유한 시였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엘리엇, 황무지)

겨울이 오히려 안정적이었고,
봄에는 뿌리가 활동적이어야 하듯 봄은 힘든 시기이기도 한 거야. 

무엇이든 꽃피우고 열매맺는 일은 편안하지만은 않은 거란다.
고단한 삽질에서
수고로운 땀방울에서
인생이든 꽃나무든 꽃도 피우고 열매도 열리는 게 삶의 섭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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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여름이 가을로 넘어갔다.
마치 달력 한 장 넘어가면 한 달이 넘어가듯. 

이제 수능도 50일 남았구나.
50일이면 공부를 하자면 짧은 기간이지만,
또 준비 없이 보내기엔 긴 기간이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면 좋겠다. 

오늘은 '추운 겨울의 친구'를 생각해 보고 싶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갔던 시절,
2차례에 12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 외롭고 쓸쓸하던 시절에,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으로 유명한 <세한도>. 

 

요즘 제주도의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놓는다고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훼손이 많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풍자의 그림도 올라 있더구나.
 
 

한적하고 쓸쓸하던 제주도를 포크레인이 파헤치고,
전쟁의 공포를 심어주는 기지를 만들겠다 하니,
인간의 가공할 힘이란... 징그럽다.  

우선 곽재구의 '세한도'를 한번 읽어 보렴.             

조합신문에 내 시가 실린 날
작업반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친구들은
매듭 굵은 손으로 석쇠 위의
고깃점들을 그슬러주었지만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줄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눈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을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곽재구, 세한도)

우선 '세한도'라는 제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읽기 힘든 시다.
춥고 배고픈 고난의 시절,
함께 위안이 되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훨씬 용기를 낼 수 있겠지. 

이 시의 화자에게 그것은 '아내'란다.
화자의 시가 '조합신문'에 실리고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 한다.
화자는 노동자인 모양이다.
화자가 쓴 시의 소재는 아마도,
함께 고생해온 아내의 이야기인 모양이야. 

경신년은 1980년이겠다. 따져보면...
경-으로 시작하는 해는 항상 뒷자리가 0이 되는 해야.
1980년이면 광주에서 슬픈 학살의 소식이 들렸던 두려웠던 해다.
그 해엔 여름 내내 한 번도 더웠던 적이 없었구나.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 듯... 

그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화자는 혹한으로 기억하고 있다.
눈이 내리고 화로에 칡차를 끓이는데,
아내는 뜨개질을 하고 있어. 

옷을 뜨고 있겠지만,
왠지 그 옷을 뜨는 광경이 가족을 위한 다사로운 풍경으로 비추이기보다는
슬픔을 뜨개질한다는 구절에서 보이듯,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뜨개질을 하고 있다고 그래.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시의 특징이지.
그러나,
예식조차 못 올린 이 땅의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내는 밤늦게 뜨개질을 한대.
그 뜨개질에서 들사슴이나 고사리 새순처럼 소박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창작물이 탄생하는 거지. 

아마 시인은 아내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어느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르지.
시인 자신이 그런 처지였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 가난하고 힘겹던 시절,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기대던 위안으로 남은 시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옹기 다로에서 끓고 있을 '칡차' 내음과,
밤늦게 등불 켜고 뜨개질하고 있던 아내의 은은한 정경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 지는 것 같다.

세한도는 이렇게 힘들 때의 친구를 생각나게 하는 모티프로 작용한단다.
다음은 최두석의 세한도를 읽어 보자.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 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가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나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최두석, 세한도)

이 시에서 역시 고난의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자. 

절벽에 겨울이 와서 고드름 기둥이 층층이 얼어 붙었어.
그런데, 거기 소나무 한 그루 눈을 가득 이고 섰대.
수십 년을 좌절하며 살았을 소나무 한 그루.
힘겨웠던지 뿌리가 뒤틀리고 줄기가 비틀려 뻗어있는데,
그 뿌리 곁에
녹두콩처럼 작고 작은 어린 진달래 꽃눈이
보이지도 않을 것처럼 작은 봄의 꽃눈이
시리게 부는 바람소리 타고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 들으며
나는 봄이 오면 진달래 필 곳을 바라본다...는 이런 시야. 

정말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시지?
곽재구의 시를 한 편 더 읽어 보자.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곽재구, 땅끝에 와서) 

이 시의 땅끝은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토말(土末)'인 땅끝이기도 하고,
또는 삶의 극한인 땅끝이 될 수도 있고 그렇다.
중의적으로 쓰인 표현이지. 

땅끝마을, 또는 삶이 너무 힘든 가장자리에 섰을 때,
화자는 꽃을 바치고 싶더래.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왠지 부끄러웠는지도 몰라. 

'반편'은 '온전한' 인간의 반쪽이니 '병신'이란 말이지.
온전하지 못한 사람, 어딘가 많이 부족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왠지 반쪽에서 분단의 이미지가 묻어 있구나.
병신같은 내가 병신같은 너에게
그러니깐 삶이 힘겨운 사람들끼리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약한 존재끼리
마주보며 힘을 주는 관계임을 확인하는 거야. 

눈물을 글썽이듯 힘겨운 삶이지만
서로 상처를 주는 존재지만
또 히죽 웃을만큼 재미도 있는 거니까는... 

세상은 모래바람 쏟아지듯 냉랭하고 쓸쓸한 곳일지라도,
그리고 너는 말도 없고
입을 다물어버린 바위같은 침묵 속에서
북쪽 땅끝도 보여주고 싶다고...

남과 북이 지금은 반쪽으로 나뉘어 침묵하는 현실,
서로 차가운 눈길 나누는 지금,
바닷가 따라
아우성소리 들리듯 무서운 현실. 

바윗돌에 엉겨붙은 돌따개비들의 주검처럼
분단은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사랑이라든가,
한 사람의 존재가 가지는 무게감이라든가 하는 관념보다도,
뜨겁게 껴안는 경험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는 화자. 

화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껴안고 노래하고 참된 이야기를 나누고,
뒹굴다가 진달래 피어나는 환한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구나.

곽재구의 '세한도'와 최두석의 '세한도'는 모두 힘겨운 세월,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시였구나.
곽재구의 '땅끝에 와서'는 국토의 최남단에 가서
분단의 아픔을 느끼며 쓴 시일테고 말이야. 

요즘 제주도의 가장 아름다운 해안 구럼비 해안을
깨부수는 작업이 한창이란다.
아마도 미군이 주둔할 해군 기지가 필요한 모양이지.
중국이 앞으로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그때를 미리 대비하는 것 같기도 해.
미국 공군기지는 제주도 밑의 일본 섬 오키나와에 이미 있거든.
해군기지가 필요하겠지.
그래서 제주도 강정마을을 멋대로 해군기지로 만들겠다는 거야.
참 아름다운 곳인데 말이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는 참 팍팍한 곳으로 변했다.
조금만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어.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선 왼손잡이를 바른손잡이로 고치려고 애쓰곤 한단다. 

김광규의 '왼손잡이'란 시를 한번 보렴.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김광규, 왼손잡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고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획일적 사고와 고정관념을 비판하는 시야.

오른손잡이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왼손과 오른손은 인간에게 똑같이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임을 들려주면서
시각을 바꾸어 세상의 다른 것들에게 이해와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들려주는 시지.
이 시에서 '거울'은 우리의 시선의 각도를 돌리게 해주는 소재고 말이지. 

세계화는 강대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고 하고 있구나.
필요하면 약소국에 군사 기지를 만들면서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국민들이 알면 시끄러워지니깐, 그런 사실 자체를 알리려 하지도 않고 말이야. 

세상은 늘 자기 중심으로 바라보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 아들도 태어난 지 만 18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주어진 것들만 하면 되는 시기가 끝난다는 거라고 생각해.
어른은 뭔가를 자신이 만들어 가야하는 존재거든.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원숙한 가을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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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소슬하게 분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이렇게 한 순간 바뀌어버리는 걸 보면
삶도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름 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보니 오래 쉰 것 같다.
삶도 관성이란 게 있어서,
한번 안하기 시작하면 다시 돌리기가 어려운 거야.
뭐든지 할 때 잘하는 게 필요할 게다.
공부도 그렇고, 매사가 다 그런 거야. 

아빠도 이제 인생이 90이라면 절반 가량 산 셈인데
사는 게 물질 세계나 사회 돌아가는 것과 별다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등산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
인생도 부침이 있고, 
즐거운 날이 있으면 괴롭고 힘든 날도 따르는 순환처럼,
고진감래 흥진비래의 날들도 항존하는 법이지. 

그래서 비유(빗대어 쓰기)도 쓰고, 유추(유사한 상황 추리)도 하고,
문학도 성립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지난 9월 모의고사에 났던 시를 두어 수 읽어 보자.
우선 김종삼의 '술래잡기'다.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 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 하던 애들은 안 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김종삼, 술래잡기)

이 시는 1학년 시험에 났던 문제야. 

모티프는 간단하단다.
심청이는 원래 아버지를 돌보느라 친구들과 노는 일처럼 사치스런 행동을 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아이들이 심청이를 웃겨 보자고 술래잡기를 시작했대.
늘 외롭고 심심했던 심청이도 오랜만에 즐겁게 놀았지. 

근데,
2연에서 먹먹한 슬픔이 느껴지는 게 이 시를 읽는 묘미란다.
심청이가 술래가 돼.
다른 아이들은 술래가 되면,
어떻게 하면 친구들을 잡을지에 골몰하게 되잖아.
그런데...
심청이는 눈가리개 헝겊을 매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던 거야.  

앞이 캄캄해진 심청이는,
비로소
아버지가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살아 오셨구나.
아, 이런 아버지가 자기를 빌어 먹이려고 그 험한 산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돌아다니셨구나.
그러다 다리에서 떨어져 낙상까지 하게 된 아버지가 불현듯 떠올라,
아니, 아버지의 그 막막하였을 인생이 한 순간 이해가 되면서
꼼짝도 못하고 서있었던 거야. 

이런 거.
삶이란 건 이렇게 한 순간에 감정에 포획되는 것 같아.
도무지 남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도,
한 순간, 그 사람이 이해되고
너무나 그 사람의 상황에 공감이 가서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줄줄 흐를 수도 있는 겉 같아. 

한자로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잖아.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말.
엊그제 슈스케 3을 보는데,
신나게 노래하던 밴드의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더라고.
그런데도 당당해서 멋있었어.
아, 암이라니. 그것도 심한 상태던데... 

병원에서 '당신은 암입니다. 이 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본 사람만이 같은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 아닐까? 
또 그런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살 만 한 것이고 말이야.

이 시는 '심청전'이라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음으로써,
동병상련의 심사를 한 순간에 독자의 가슴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하고 있는 시야. 
말이 많이 필요없어 여백의 미를 잘 살리고 있지.

다음엔 춘향가의 춘향이 마음을 생각해 보는 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그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수정가, 박재삼)

이 시는 춘향이 마음을 노래한 거야.
춘향이 마음을 맑고 투명한 '크리스털(수정)'에 비유한 거지. 

춘향이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 사랑으로 가득했던지를...
집으로 치자면,
날마다 소원을 비는 정화수의 신선한 물방울 같은 거였거나,
윤이 반들거리는 마루 끝 평상과 차분한 뜨락 같은,
어디선가 시원한 물냄새라도 금세 날 듯한 그런 춘향이 마음이었을까? 

춘향이 마음은 그렇게 찬찬하고 신선한 집처럼 여기 그대로 있는데,
서방님 마음은 바람 같대.
그것도 어려운 바람.
마주치기도 어렵고 만나보기도 어려운 바람. 

2연에서는 춘향이 마음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지.
이도령을 기다리며 얼마나 산 언덕을 바라보았을까.
그러면, 또 그때마다 그리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도 했으리라 

아, 이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가득한, 수정같은 마음이
춘향이 이도령을 바라던 맑디맑은 마음이었단다.  

그 그리움이 어찌나 깊은지,
푸른 바다처럼 '푸른 그리움'이 되었구나.

이도령이 출세해서 돌아오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하나도 없었겠나마는,
정말 호의호식하길 바랐다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 시에서도
이도령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춘향의 기다림의 간절함을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춘향전'에 기대어 표현했다.  

 

이 시의 특징은 '감정의 절제'에 있어.

갈까 부다, 갈까 부다, 임 따라서 갈까 부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 부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 부다.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 동풍 제비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 정회를 허고 지고,
뉘 년의 꼬임 듣고 영영 이별이 되려는가?
어쩔거나 어쩔거나. 아이고, 이를 어쩔거나.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이런 판소리 구절에 비하자면,
감정이 아주 조심조심 표현되고 있는 거지. 

다음은 너희 3학년 시험에 났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정일근은 중학교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란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던 시인이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화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하여 '삶의 비의(숨은 뜻)'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 시인이 어머니의 '언어 생활'을 통하여 '비의'를 발견한다.
역시 시인의 눈은 날카로운 관찰의 눈이다. 

표준어 '그릇'에 담긴 가지런함과 정련됨 대신
어머니는 사투리 '그륵'을 쓰신다.
어머니의 그륵,에는 
어머니의 삶은 <표준>처럼 살아지지는 아니하였으나,
그 속에는 교과서나 법령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다사로운 <사람의 체온>이 담겨있던 것이었음을 시인은 발견하고 있어.  

 

어머니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의 눈.
화자가 책을 읽고 학문을 통한 간접 체험으로 얻은 <지식>의 눈에 비하면,
<무지, 비표준>인 '그륵'의 힘은 훨씬 인간적이지.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말을 빛나게 쓰고 살아남도록 하는 일>인데,
그 시는 <삶과 언어가 하나가 되는 인생>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인데,
시인은 그저 머릿속에서 시를 지어내고 있었음을 반성하고 있어. 

어머니의 삶을 통해 살아남은 '그륵' 하나에도
어머니의 삶이,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음을 느끼면서 말이야.
그 그륵, 속에서라야,
그륵 가득 맑은 물 정한수 떠놓고 비시던 어머니의 마음도 느껴지고,
제 혼자 먹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도 느껴지는 거지. 

화자는 자신이 시인이라고,
시인은 일반인이 하찮은 것들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세세한 마음으로 뜨겁게 바라보고
거기서 새로운 인생의 비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인데
시인의 시어는 '국어 사전' 속의 표준어처럼 인생에서 '저만치' 떨어진 것이 아니었나 싶은 반성. 

시인이 발견한 것은
삶은 이렇게 '한 가지 기준'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거야.
'표준어'라는 것이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폭력임을,
'사투리'라고 치부되는 것들 속에 담긴 사람들의 낮은 삶의 풍부한 의미를 소거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삶은,
인간들은 다채로운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사는 것임을 잊게 되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어머니의 그륵을 활용하고 있지. 

이런 짧은 시가 있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신 나태주 시인은
해맑은 초등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시를 쓰셨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렇잖아.
얼핏봐서는 별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친해지고 오래 만나노라면
익숙해지고 친해지고,
급기야는 못생긴 얼굴조차 사랑스러워지곤 하지. 

정일근 시인의 시 중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담은 시가 있단다.
한번 읽어 보렴.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라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정일근, 쑥부쟁이 사랑) 

우리가 들국화라고 알고 있는 풀들이 있어.
그런데 쑥부쟁이란 풀이 있단다.   
쑥부쟁이란 들꽃을 알고서 그를 바라보니
그게 그냥 '들국화'가 아니었음을, 쑥부쟁이란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주게 된 것을 기뻐하는 시야.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들꽃.
그러나 알고 바라보고 나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대. 

삶이 이런 거지.
들풀 하나를 보면서도,
인생과 유사한 비의를 찾아내며 사는 삶. 

어때?
시를 읽으면서
삶의 은유를 찾아다니며 사는 삶도 멋진 삶 같지 않니?  

네 삶을 사랑하면,
네 삶 속에서 꽃피어날 씨앗이 네 눈에 비추일 거 같지 않아?
비록 지금은 대학의 무슨 과를 가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겠지만,
맑은 물그릇을 바라보듯,
네가 살아온 시간들을 관조하노라면,
언젠가는 꼭꼭 숨어 피어있을 그 꽃들이 환히 빛날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이제 수능 며칠 안 남았다.
최선을 다하는 경험을 남은 날들동안 얻어보기 바란다.
날이 차다.
감기 조심하고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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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9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샘님의 문학수업을 읽으니, 너무 좋네요...

춘향가의 글귀가 참 이뻤군요. 푸른 그리움이라니. 가끔 저런 아름다운 문구를 보면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냥 놔두었으면 좋겠다 싶어져요. 춘향이 진짜 있었는가, 방자전 머 이런거 말구.

그런데 그 밑에 있는 판소리는 무슨 판소리예요, 저는 애절하니 참 좋은데 말이죠.

글샘 2011-09-19 16:47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죠. ^^

저 소리는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갈까부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인터넷에서 갈까부다 동영상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춘향가는 상놈들이 양반들에게 핍박받고 천대받던 시절에,
민중의 꿈이 담긴 노래가 아니었을까,
비록 춘향의 사랑이 '열녀'라고 유교적 색칠을 입을지언정,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선택'이기도 했으니 민중들은 그 노래를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었겠죠.

이제 시대적 상황이 다른 만큼,
박재삼의 시처럼 필요한 부분을 차용해서 형상화하는 모티프로도 훌륭하게 작용하지 싶네요.
고전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춘향이가~ 허며는, 별 말 없이도 애절한 사랑이 가슴에 콱 떠오르는 그런 거 말이죠.
푸른 그리움도 그런 맥락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