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보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가을날이다.

오늘은 김명인의 <그 나무>란 시를 읽어 보자.
삶이란 게 꼭 남들보다 '일찍' 뭘 많이 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난 늘 한다마는,
너는 어떤 생각인지 시를 읽으면서 느껴 보렴.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 구석으로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드는 꽃불 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 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저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저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김명인, 그 나무)


*소신공양 : 자기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침.
**소지 :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태워서 공중에 올리는 종이

화자는 '벚꽃 가로' 를 따라 걷고 있었대.
벚꽃은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우는 것이 특징이지.
그런데, 어떤 나무 한 그루는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듯,
늦되게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단 거지. 

그걸 보고 화자는 깨달음을 얻게 돼. 

"아, 우리는 너무 기다릴 줄 모르는 거 아닐까?
남들이 꽃필 때 꼭 따라서 꽃피는 것만이 최선일까?
나무에 따라서 늦된 것도 있듯,
사람도 조금 이를 수도 조금 늦될 수도 있는 것을,
사람들은 제 기준에 따라 늦된 것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구나." 뭐, 이런 느낌. 

그 나무는 왠지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진 것처럼,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대. 

그렇지만, 그 나무 역시,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멍울들을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것이었어. 

늦된 나무도
조금만 기다려 주면
비로소 환하게 꽃불 성화를 밝혀 들고
환하게 타오를 것임을 생각하고
화자는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서 반성해 보았단다. 

봄이 된 지 두 달 넘도록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보이는 늦된 나무.
그 나무도 꽃이 지면, 푸릇한 잎새 매달겠지?
청록으로 여름이 지나는 시절이 되면,
불타듯 몸사르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이 되듯,
그 나무 역시 몸바쳐 낙엽을 떨구일 수 있겠지? 
그렇게 되길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나도 아들이 남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길 바라지 않는단다.
다만 부모의 마음은 남들보다 아들이 활짝 꽃피울 날이 언젠가 오길
늦되지만 자신의 속에 담긴 꽃망울이 화사하게 피어난 모습을 자랑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일 거야. 

나무가 꽃망울을 맺히게 하고, 꽃을 피우고,
녹색 잎사귀로 치열하게 광합성을 하듯,
이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런 치열한 삶이 담겨있다면,
늦된 나무라 하더라도 완성된 나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엔 '작은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이건청의 '하류'란 시를 읽어 보자.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 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건청, 하류) 

이 시는 '거기 나무가 있었네'를 반복하는 사이사이에 생각을 밀어넣고 있어.
그래서 한 연으로 된 시인데도,
마치 연 구분이 된 것처럼 느껴지지. 

'거기 나무가 있었네'의 반복으로 아쉬운 마음이 반복되어 강조되기도 해.  

기러기 날아가던 노을. 
금빛 붉은 노을이 찬란하게 퍼지던 저녁
집으로 돌아와 은하수를 바라보던 시절.
유년 시절의 추억 속에 가장 인상적인 소재는 '나무'지. 

그 나무는
희미한 강물 소리 자장가 삼아 잠들던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가슴을 다독여 주는 어머니나 할머니처럼
위안을 받던 존재였지. 

여름이면 수만 마리 매미 울음과 함께 그늘을 지어 주고,
그 고향, 그 나무 아래서 '모든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해.
결국, 지금은 어디서도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아쉬움을,
그 시절과 대비하여 나타내고 있어 보인단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나무가 무너져 흩어지고 말았대.
나무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되어버렸대. 

사라져버린 유년 시절의 추억을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이라고 해서 공감각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시각적 노을을 청각적으로 울림처럼 표현한 거지.
예전에 있었던 기러기 역시 그리움의 대상이야. 

귀 기울이고 다가서서
까마득한 옛날,
그 하류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 화자가 상상되니? 

너는 어린 시절이라면 어떤 추억이 남아있을까?
이 시의 주제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란다.
사람은 누구나 유년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여기기 쉽지.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면 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야.  

이제 '하류'처럼 고요하게 물소리 들리지 않던 시절을 지나서,
콸콸거리는 상류 지역을 통과해야 할 삶의 고비를 맞게 될지도 몰라.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도 선택해야 하는 '청춘'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시기란다.
식물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이듯,
인간에게도 청춘은 잔인한 계절이야. 

부지런히 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생명력을 쭉쭉 퍼뜨리는 식물의 봄처럼,
인간의 청춘 역시 삶의 생명력으로 가득차 넘쳐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엘리엇은 <황무지>란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쓰기도 했단다.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황무지에 비유한 시였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엘리엇, 황무지)

겨울이 오히려 안정적이었고,
봄에는 뿌리가 활동적이어야 하듯 봄은 힘든 시기이기도 한 거야. 

무엇이든 꽃피우고 열매맺는 일은 편안하지만은 않은 거란다.
고단한 삽질에서
수고로운 땀방울에서
인생이든 꽃나무든 꽃도 피우고 열매도 열리는 게 삶의 섭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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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여름이 가을로 넘어갔다.
마치 달력 한 장 넘어가면 한 달이 넘어가듯. 

이제 수능도 50일 남았구나.
50일이면 공부를 하자면 짧은 기간이지만,
또 준비 없이 보내기엔 긴 기간이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면 좋겠다. 

오늘은 '추운 겨울의 친구'를 생각해 보고 싶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갔던 시절,
2차례에 12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 외롭고 쓸쓸하던 시절에,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으로 유명한 <세한도>. 

 

요즘 제주도의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놓는다고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훼손이 많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풍자의 그림도 올라 있더구나.
 
 

한적하고 쓸쓸하던 제주도를 포크레인이 파헤치고,
전쟁의 공포를 심어주는 기지를 만들겠다 하니,
인간의 가공할 힘이란... 징그럽다.  

우선 곽재구의 '세한도'를 한번 읽어 보렴.             

조합신문에 내 시가 실린 날
작업반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친구들은
매듭 굵은 손으로 석쇠 위의
고깃점들을 그슬러주었지만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줄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눈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을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곽재구, 세한도)

우선 '세한도'라는 제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읽기 힘든 시다.
춥고 배고픈 고난의 시절,
함께 위안이 되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훨씬 용기를 낼 수 있겠지. 

이 시의 화자에게 그것은 '아내'란다.
화자의 시가 '조합신문'에 실리고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 한다.
화자는 노동자인 모양이다.
화자가 쓴 시의 소재는 아마도,
함께 고생해온 아내의 이야기인 모양이야. 

경신년은 1980년이겠다. 따져보면...
경-으로 시작하는 해는 항상 뒷자리가 0이 되는 해야.
1980년이면 광주에서 슬픈 학살의 소식이 들렸던 두려웠던 해다.
그 해엔 여름 내내 한 번도 더웠던 적이 없었구나.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 듯... 

그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화자는 혹한으로 기억하고 있다.
눈이 내리고 화로에 칡차를 끓이는데,
아내는 뜨개질을 하고 있어. 

옷을 뜨고 있겠지만,
왠지 그 옷을 뜨는 광경이 가족을 위한 다사로운 풍경으로 비추이기보다는
슬픔을 뜨개질한다는 구절에서 보이듯,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뜨개질을 하고 있다고 그래.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시의 특징이지.
그러나,
예식조차 못 올린 이 땅의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내는 밤늦게 뜨개질을 한대.
그 뜨개질에서 들사슴이나 고사리 새순처럼 소박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창작물이 탄생하는 거지. 

아마 시인은 아내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어느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르지.
시인 자신이 그런 처지였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 가난하고 힘겹던 시절,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기대던 위안으로 남은 시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옹기 다로에서 끓고 있을 '칡차' 내음과,
밤늦게 등불 켜고 뜨개질하고 있던 아내의 은은한 정경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 지는 것 같다.

세한도는 이렇게 힘들 때의 친구를 생각나게 하는 모티프로 작용한단다.
다음은 최두석의 세한도를 읽어 보자.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 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가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나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최두석, 세한도)

이 시에서 역시 고난의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자. 

절벽에 겨울이 와서 고드름 기둥이 층층이 얼어 붙었어.
그런데, 거기 소나무 한 그루 눈을 가득 이고 섰대.
수십 년을 좌절하며 살았을 소나무 한 그루.
힘겨웠던지 뿌리가 뒤틀리고 줄기가 비틀려 뻗어있는데,
그 뿌리 곁에
녹두콩처럼 작고 작은 어린 진달래 꽃눈이
보이지도 않을 것처럼 작은 봄의 꽃눈이
시리게 부는 바람소리 타고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 들으며
나는 봄이 오면 진달래 필 곳을 바라본다...는 이런 시야. 

정말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시지?
곽재구의 시를 한 편 더 읽어 보자.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곽재구, 땅끝에 와서) 

이 시의 땅끝은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토말(土末)'인 땅끝이기도 하고,
또는 삶의 극한인 땅끝이 될 수도 있고 그렇다.
중의적으로 쓰인 표현이지. 

땅끝마을, 또는 삶이 너무 힘든 가장자리에 섰을 때,
화자는 꽃을 바치고 싶더래.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왠지 부끄러웠는지도 몰라. 

'반편'은 '온전한' 인간의 반쪽이니 '병신'이란 말이지.
온전하지 못한 사람, 어딘가 많이 부족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왠지 반쪽에서 분단의 이미지가 묻어 있구나.
병신같은 내가 병신같은 너에게
그러니깐 삶이 힘겨운 사람들끼리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약한 존재끼리
마주보며 힘을 주는 관계임을 확인하는 거야. 

눈물을 글썽이듯 힘겨운 삶이지만
서로 상처를 주는 존재지만
또 히죽 웃을만큼 재미도 있는 거니까는... 

세상은 모래바람 쏟아지듯 냉랭하고 쓸쓸한 곳일지라도,
그리고 너는 말도 없고
입을 다물어버린 바위같은 침묵 속에서
북쪽 땅끝도 보여주고 싶다고...

남과 북이 지금은 반쪽으로 나뉘어 침묵하는 현실,
서로 차가운 눈길 나누는 지금,
바닷가 따라
아우성소리 들리듯 무서운 현실. 

바윗돌에 엉겨붙은 돌따개비들의 주검처럼
분단은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사랑이라든가,
한 사람의 존재가 가지는 무게감이라든가 하는 관념보다도,
뜨겁게 껴안는 경험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는 화자. 

화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껴안고 노래하고 참된 이야기를 나누고,
뒹굴다가 진달래 피어나는 환한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구나.

곽재구의 '세한도'와 최두석의 '세한도'는 모두 힘겨운 세월,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시였구나.
곽재구의 '땅끝에 와서'는 국토의 최남단에 가서
분단의 아픔을 느끼며 쓴 시일테고 말이야. 

요즘 제주도의 가장 아름다운 해안 구럼비 해안을
깨부수는 작업이 한창이란다.
아마도 미군이 주둔할 해군 기지가 필요한 모양이지.
중국이 앞으로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그때를 미리 대비하는 것 같기도 해.
미국 공군기지는 제주도 밑의 일본 섬 오키나와에 이미 있거든.
해군기지가 필요하겠지.
그래서 제주도 강정마을을 멋대로 해군기지로 만들겠다는 거야.
참 아름다운 곳인데 말이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는 참 팍팍한 곳으로 변했다.
조금만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어.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선 왼손잡이를 바른손잡이로 고치려고 애쓰곤 한단다. 

김광규의 '왼손잡이'란 시를 한번 보렴.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김광규, 왼손잡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고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획일적 사고와 고정관념을 비판하는 시야.

오른손잡이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왼손과 오른손은 인간에게 똑같이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임을 들려주면서
시각을 바꾸어 세상의 다른 것들에게 이해와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들려주는 시지.
이 시에서 '거울'은 우리의 시선의 각도를 돌리게 해주는 소재고 말이지. 

세계화는 강대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고 하고 있구나.
필요하면 약소국에 군사 기지를 만들면서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국민들이 알면 시끄러워지니깐, 그런 사실 자체를 알리려 하지도 않고 말이야. 

세상은 늘 자기 중심으로 바라보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 아들도 태어난 지 만 18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주어진 것들만 하면 되는 시기가 끝난다는 거라고 생각해.
어른은 뭔가를 자신이 만들어 가야하는 존재거든.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원숙한 가을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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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소슬하게 분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이렇게 한 순간 바뀌어버리는 걸 보면
삶도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름 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보니 오래 쉰 것 같다.
삶도 관성이란 게 있어서,
한번 안하기 시작하면 다시 돌리기가 어려운 거야.
뭐든지 할 때 잘하는 게 필요할 게다.
공부도 그렇고, 매사가 다 그런 거야. 

아빠도 이제 인생이 90이라면 절반 가량 산 셈인데
사는 게 물질 세계나 사회 돌아가는 것과 별다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등산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
인생도 부침이 있고, 
즐거운 날이 있으면 괴롭고 힘든 날도 따르는 순환처럼,
고진감래 흥진비래의 날들도 항존하는 법이지. 

그래서 비유(빗대어 쓰기)도 쓰고, 유추(유사한 상황 추리)도 하고,
문학도 성립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지난 9월 모의고사에 났던 시를 두어 수 읽어 보자.
우선 김종삼의 '술래잡기'다.

심청일 웃겨 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 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 하던 애들은 안 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김종삼, 술래잡기)

이 시는 1학년 시험에 났던 문제야. 

모티프는 간단하단다.
심청이는 원래 아버지를 돌보느라 친구들과 노는 일처럼 사치스런 행동을 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아이들이 심청이를 웃겨 보자고 술래잡기를 시작했대.
늘 외롭고 심심했던 심청이도 오랜만에 즐겁게 놀았지. 

근데,
2연에서 먹먹한 슬픔이 느껴지는 게 이 시를 읽는 묘미란다.
심청이가 술래가 돼.
다른 아이들은 술래가 되면,
어떻게 하면 친구들을 잡을지에 골몰하게 되잖아.
그런데...
심청이는 눈가리개 헝겊을 매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던 거야.  

앞이 캄캄해진 심청이는,
비로소
아버지가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살아 오셨구나.
아, 이런 아버지가 자기를 빌어 먹이려고 그 험한 산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돌아다니셨구나.
그러다 다리에서 떨어져 낙상까지 하게 된 아버지가 불현듯 떠올라,
아니, 아버지의 그 막막하였을 인생이 한 순간 이해가 되면서
꼼짝도 못하고 서있었던 거야. 

이런 거.
삶이란 건 이렇게 한 순간에 감정에 포획되는 것 같아.
도무지 남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도,
한 순간, 그 사람이 이해되고
너무나 그 사람의 상황에 공감이 가서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줄줄 흐를 수도 있는 겉 같아. 

한자로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잖아.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말.
엊그제 슈스케 3을 보는데,
신나게 노래하던 밴드의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더라고.
그런데도 당당해서 멋있었어.
아, 암이라니. 그것도 심한 상태던데... 

병원에서 '당신은 암입니다. 이 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본 사람만이 같은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 아닐까? 
또 그런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살 만 한 것이고 말이야.

이 시는 '심청전'이라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음으로써,
동병상련의 심사를 한 순간에 독자의 가슴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하고 있는 시야. 
말이 많이 필요없어 여백의 미를 잘 살리고 있지.

다음엔 춘향가의 춘향이 마음을 생각해 보는 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그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수정가, 박재삼)

이 시는 춘향이 마음을 노래한 거야.
춘향이 마음을 맑고 투명한 '크리스털(수정)'에 비유한 거지. 

춘향이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 사랑으로 가득했던지를...
집으로 치자면,
날마다 소원을 비는 정화수의 신선한 물방울 같은 거였거나,
윤이 반들거리는 마루 끝 평상과 차분한 뜨락 같은,
어디선가 시원한 물냄새라도 금세 날 듯한 그런 춘향이 마음이었을까? 

춘향이 마음은 그렇게 찬찬하고 신선한 집처럼 여기 그대로 있는데,
서방님 마음은 바람 같대.
그것도 어려운 바람.
마주치기도 어렵고 만나보기도 어려운 바람. 

2연에서는 춘향이 마음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지.
이도령을 기다리며 얼마나 산 언덕을 바라보았을까.
그러면, 또 그때마다 그리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도 했으리라 

아, 이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가득한, 수정같은 마음이
춘향이 이도령을 바라던 맑디맑은 마음이었단다.  

그 그리움이 어찌나 깊은지,
푸른 바다처럼 '푸른 그리움'이 되었구나.

이도령이 출세해서 돌아오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하나도 없었겠나마는,
정말 호의호식하길 바랐다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 시에서도
이도령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춘향의 기다림의 간절함을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춘향전'에 기대어 표현했다.  

 

이 시의 특징은 '감정의 절제'에 있어.

갈까 부다, 갈까 부다, 임 따라서 갈까 부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 부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 부다.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 동풍 제비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 정회를 허고 지고,
뉘 년의 꼬임 듣고 영영 이별이 되려는가?
어쩔거나 어쩔거나. 아이고, 이를 어쩔거나.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이런 판소리 구절에 비하자면,
감정이 아주 조심조심 표현되고 있는 거지. 

다음은 너희 3학년 시험에 났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정일근은 중학교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란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던 시인이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화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하여 '삶의 비의(숨은 뜻)'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 시인이 어머니의 '언어 생활'을 통하여 '비의'를 발견한다.
역시 시인의 눈은 날카로운 관찰의 눈이다. 

표준어 '그릇'에 담긴 가지런함과 정련됨 대신
어머니는 사투리 '그륵'을 쓰신다.
어머니의 그륵,에는 
어머니의 삶은 <표준>처럼 살아지지는 아니하였으나,
그 속에는 교과서나 법령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다사로운 <사람의 체온>이 담겨있던 것이었음을 시인은 발견하고 있어.  

 

어머니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의 눈.
화자가 책을 읽고 학문을 통한 간접 체험으로 얻은 <지식>의 눈에 비하면,
<무지, 비표준>인 '그륵'의 힘은 훨씬 인간적이지.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말을 빛나게 쓰고 살아남도록 하는 일>인데,
그 시는 <삶과 언어가 하나가 되는 인생>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인데,
시인은 그저 머릿속에서 시를 지어내고 있었음을 반성하고 있어. 

어머니의 삶을 통해 살아남은 '그륵' 하나에도
어머니의 삶이,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음을 느끼면서 말이야.
그 그륵, 속에서라야,
그륵 가득 맑은 물 정한수 떠놓고 비시던 어머니의 마음도 느껴지고,
제 혼자 먹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도 느껴지는 거지. 

화자는 자신이 시인이라고,
시인은 일반인이 하찮은 것들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세세한 마음으로 뜨겁게 바라보고
거기서 새로운 인생의 비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인데
시인의 시어는 '국어 사전' 속의 표준어처럼 인생에서 '저만치' 떨어진 것이 아니었나 싶은 반성. 

시인이 발견한 것은
삶은 이렇게 '한 가지 기준'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거야.
'표준어'라는 것이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폭력임을,
'사투리'라고 치부되는 것들 속에 담긴 사람들의 낮은 삶의 풍부한 의미를 소거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삶은,
인간들은 다채로운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사는 것임을 잊게 되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어머니의 그륵을 활용하고 있지. 

이런 짧은 시가 있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신 나태주 시인은
해맑은 초등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시를 쓰셨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렇잖아.
얼핏봐서는 별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친해지고 오래 만나노라면
익숙해지고 친해지고,
급기야는 못생긴 얼굴조차 사랑스러워지곤 하지. 

정일근 시인의 시 중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담은 시가 있단다.
한번 읽어 보렴.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라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정일근, 쑥부쟁이 사랑) 

우리가 들국화라고 알고 있는 풀들이 있어.
그런데 쑥부쟁이란 풀이 있단다.   
쑥부쟁이란 들꽃을 알고서 그를 바라보니
그게 그냥 '들국화'가 아니었음을, 쑥부쟁이란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주게 된 것을 기뻐하는 시야.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들꽃.
그러나 알고 바라보고 나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대. 

삶이 이런 거지.
들풀 하나를 보면서도,
인생과 유사한 비의를 찾아내며 사는 삶. 

어때?
시를 읽으면서
삶의 은유를 찾아다니며 사는 삶도 멋진 삶 같지 않니?  

네 삶을 사랑하면,
네 삶 속에서 꽃피어날 씨앗이 네 눈에 비추일 거 같지 않아?
비록 지금은 대학의 무슨 과를 가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겠지만,
맑은 물그릇을 바라보듯,
네가 살아온 시간들을 관조하노라면,
언젠가는 꼭꼭 숨어 피어있을 그 꽃들이 환히 빛날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이제 수능 며칠 안 남았다.
최선을 다하는 경험을 남은 날들동안 얻어보기 바란다.
날이 차다.
감기 조심하고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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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9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샘님의 문학수업을 읽으니, 너무 좋네요...

춘향가의 글귀가 참 이뻤군요. 푸른 그리움이라니. 가끔 저런 아름다운 문구를 보면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냥 놔두었으면 좋겠다 싶어져요. 춘향이 진짜 있었는가, 방자전 머 이런거 말구.

그런데 그 밑에 있는 판소리는 무슨 판소리예요, 저는 애절하니 참 좋은데 말이죠.

글샘 2011-09-19 16:47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죠. ^^

저 소리는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갈까부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인터넷에서 갈까부다 동영상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춘향가는 상놈들이 양반들에게 핍박받고 천대받던 시절에,
민중의 꿈이 담긴 노래가 아니었을까,
비록 춘향의 사랑이 '열녀'라고 유교적 색칠을 입을지언정,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선택'이기도 했으니 민중들은 그 노래를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었겠죠.

이제 시대적 상황이 다른 만큼,
박재삼의 시처럼 필요한 부분을 차용해서 형상화하는 모티프로도 훌륭하게 작용하지 싶네요.
고전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춘향이가~ 허며는, 별 말 없이도 애절한 사랑이 가슴에 콱 떠오르는 그런 거 말이죠.
푸른 그리움도 그런 맥락이겠죠.
 

장마철이라 하늘이 낮게 다가선 듯 보이는구나. 

오늘은 신경림의 <산에 대하여>란 시를 한편 읽어 주고 싶어서 몇 자 적는다.
요즘 기말고사 준비에 나더 바빠서 글을 쓸 틈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이 시는 꼭 너에게 읽어 주고 싶은 시란다.
한번 읽어 보렴.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짓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어렵지 않은 시지? 

여기서 '산'은 '삶, 인생'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봐도 좋을 거야.
그러니깐,
'크고 높은, 험하고 가파른 산'은 '유명하고 위대한, 훌륭하고 똑똑한 인물'의 삶일 수 있겠지. 
그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린' 산은 '유명하지도 않고 잘난 것도 없는 인물'의 삶일 거고. 

아들아.
네 삶은 엄마아빠에게 보여주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이나 세상에 자랑하려고 사는 것도 아니란다.
소중한 네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게으르지 말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면 좋겠다는 게 아빠의 바람이야. 

굳이 높은 산이 되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임을 이런 시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도 좋은 일 아닐까 싶다.

낮은 산은,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따뜻한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늘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충실히 살지. 

이 시에서 '때에 절고, 지린내가 배인' 삶.
그런 보잘것 없는 삶이라도 정겨운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함을 적고 있다.
삶이란 그런 거야.
친구들이랑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면서 삼겹살 구울 수 있는 여유 정도면 충분한, 그런 것. 

그렇지만 또 사람들은
조금 독특한 성격이거나
자기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
여러 사람과 어울려서 시끄럽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의 공간을 배려하지 않는 무지함도 보인단다. 

특히 한국 사회는 자기들 모둠에 안 끼면 왠지 소외시킬 것 같은 분위기,
남들 다 하는대로 따라가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온 사람들로서는,
자기만 소외되어 다른 줄에 서는 것이
어쩌면 죽음의 길인지도 모르기때문에,
종교를 가져도 <우리>의 종교를 믿고,
모임에 가서도 '우리는 하나'를 외치곤 하지. 

그렇지만,
배려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조용한 사람들
낮은 산처럼 사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개인>의 소중함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해서 쓰는 것도,
저런 <집단주의의 광기>에서 붙인 딱지가 아닌가 싶다. 

이기주의는 극복해야겠지만, 
개인주의야말로 한국사회가 배워야할 덕목의 하나일 거야. 

낮은 산으로 사는 것도
산의 여러 나무들, 잡풀들 사이에 덮여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을 얻는 일임을,
이 시는 보여준다. 

낮은 산들이 조용히 있다고
높은 산들만의 세상은 아닌 거지.

오히려 이 시에서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고 강조하고 있어.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이 <높은 산>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어떠한 산이든 자기 자식은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란다. 

네 나이에 깨달아야 할 것은,
과연 너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면 가장 잘 할 것 같은지,
글을 쓰는 일,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 사람들과 밤새 모여 회의하는 일,
이런 것들을 곰곰 생각해 보는 일인 것 같아.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
또 살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
어떤 일을 하면서 먹고 살 것인지도 고민해 보고 이런 시절이 고교 시절 아닌가 싶다. 

굳이 높은산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따위는 버리기 바란다.
삶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야.

다만, 어떤 산이든,
자신의 존재가 소중함을 깨닫고,
그 소중한 자신이 지금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는 산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산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을 셋 꼽는다면,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이라는... 

지금(현재 present)을 다른 말로 선물(present)이라고도 하잖아.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없단다.
지금 공부하는 사람은 즐겁게 공부하고,
지금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일해야, 그게 진짜지.  

 

황금의 헛됨을 보여주는 그림 하나.
지갑에 들어오는 돈은 거북이처럼...
나가는 돈은 토끼처럼... 거기 매달리면 사람은 썩게 될 거야.

나중의 행복을 위하여 지금 고통스럽게 '머시멜로'를 참는 일은,
진정한 행복에 반하는 일일지도 몰라.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치고 한번 읽어봐.

■ 문제 이 시의 작가와 인터뷰를 하였다고 할 때, <보기>의 빈 칸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 문 : ‘산에 대하여’라는 시를 통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삶은 어떤 것인가요?
             답 : 네, 그것은 한 마디로 [                   ]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탈속적 삶
② 조화로운 삶
③ 배려의 삶
④ 화해의 삶
⑤ 소박한 삶

답은 1번, 탈속적 삶이지.
탈속은 '속세의 세속적 이미지를 벗어난' 것이니, 화자처럼 '사람 가까이에서 사람 사는 재미를 함게 느끼는 존재의 소중함'을 강조한 시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지. 

공부란 결국 '어휘'를 잘 부려쓸 줄 아는 것 같아.
새로운 어휘를 만나면 관심을 가지고 곰곰 생각하는 습관을 좀 들이면 좋겠구나. 

장마철엔 기압이 낮기가 쉽단다.
이럴 때일수록 스트레스 관리도 잘 하고, 감기도 조심해야지.
특히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 관리 잘 하렴. 

하늘이 낮은 날.
기압도 낮은 아침,
낮은 산을 보면서, 마음 편하게 행복을 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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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6-2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덕분에 좋은 시 한편 담아요

글샘 2011-06-23 00:4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시 참 좋아합니다. ^^

2011-06-22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3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은 유명한 한국 한시를 몇 편 읽어 보자. 
한자가 들어온 것이 1~2세기 정도라면 이제 2천년 가까이 한자가 쓰였는데,
훈민정음을 만든 15세기부터 한글이 쓰이지 않은 걸로 보면,
이 땅의 문화는 한문으로 전승되던 것이 많았겠지.
그렇지만 한문으로 된 것을 모두 내팽개치려는 풍조는 아쉽단다.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사는 고조선까지 우리거라고 우기고,
공부하기 귀찮은 한문글줄은 다 내버리려는 얄팍한 생각은 결국 문화를 멸종시킬지도 모르겠다.

많이 읽었겠지만, 한국 한시의 대표작은 역시 정지상의 '송인'(임을 보내며)이다.

송인(送人)
                            정지상(鄭知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연년첨록파)

(기)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승)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전)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결)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파한집(破閑集)>

7언 절구로 이뤄진 한시다.
비가 갠 언덕에 풀빛이 짙어오는데,
그대를 남포(대동강 하류의 큰 도시)에서 이별하니 슬픈노래를 부른대.
'기'구와 '승'구에서는 <선경>이라고 해서 앞부분에서 경치를 내세우는 구절이야.
화자의 심사를 돋우는 배경을 묘사하게 되지. 

봄언덕에 풀빛이 짙어오는데, 이별하는 상황이 된단다.
'전'구와 '결'구는 <도치>되어 있어.
그래서 '결'구를 먼저 읽으면 되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니,
대동강 물은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을 거란다. 

좀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노래지.
화자는 아마도 봄빛 짙어오는 강언덕을 보면 눈물이 핑~ 하고 돌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지은 정지상은 고려 말기의 문인이야.
고려 말기 혼란기에 <서경 천도>파에 가담했다가,
묘청의 난에 휘말려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그래.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쓰는 재주를 질투했다고도 하는구나.

지금은 분단되어 가볼 수 없는 대동강.
옛 이야기 속의 대동강 가는 정말 아름다운 유원지처럼 느껴진단다.
부벽루와 연광정, 을밀대 등의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멋지더구나.
언젠가 통일이 되거나, 좀더 긴장이 풀리면 대동강 유람도 멋질 거란 생각이 든다.
거기 가면 이런 노래 한 수 착~ 읊을 수 있어야 멋지겠지. 

 

<대동강 연광정> 

 

<을밀대>

이 시는 <푸른 언덕>와 <푸른 물결>의 색상과 함께,
비, 강물, 눈물의 이미지가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시다.

예전 수능에서 이 시를 이렇게 물은 적 있어.

63. (가)의 결구(結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기구(起句)의 '풀빛'과 시각적으로 어울린다.
② 과장된 표현으로 이별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다.
③ 전구(轉句)의 '언제나 다할런가'와 의미가 호응한다.
④ 이별의 정한(情恨)이 깊은 강물의 흐름과 어우러진다.
⑤ 해마다 더해 가는 현실에 대한 무상감이 푸른 물결과 대응한다.

일단 '결구'가 마지막 행이란 걸 알아야 하겠지?
풀빛의 '푸른색'과 강물의 '푸른색'이 시각적으로 어울린단 이야기고,
눈물로 대동강이 안 마른다는 과장으로 이별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고,
전구의 '언제나 다하겠는가'와 호응하고,
이별의 한과 깊은 강은 잘 어울리지. 

마지막 답안의 <무상함>은 세상이 모두 변해서 허무함을 뜻하는 말이니 좀 어색하지? 답은 5번! 

다음은 허균, 허난설헌의 스승이라는 '이달'의 한시를 한편 보자.

불일암 인운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이 달(李達)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 보니,

온 산의 송화꽃 하마 쇠었네.   <손곡집(蓀谷集), 이병주 옮김> 


이 시 역시 4행으로 이뤄진 <정형시>로 5언 절구라고 하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가득한 시란다.
구름 속의 절집,
스님이 쓸 수 없을만치 구름에 늘 싸여있는데,
손님이 온 어느 날, 문을 열어 보니,
온 산의 송화(소나무 꽃)는 하마 늙어버렸대.

구름으로 인하여 속세와 단절된 느낌이 강한 절집에 사는 인운 스님,
구름을 쓸지 않는 것은 곧 길도 쓸지 않는단 소리야.
속세와 떨어진 절에서 사는 스님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스님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에도 관심이 없어.
손이 찾아와서야 비로소 송화가 이미 시들어버린 걸 알게 된다는 거지. 

시간, 세월에 초탈한 마음이 와락, 다가오는 시란다. 

이달은 조선의 학자로, 허균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어.
허균은 천민이 아니지만, 스승 이달이 '서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이지.
강원도 원주의 <손곡리>에 살아서 호가 '손곡'이라 불렀대. 

이 시는 마치 세상과 담 쌓고 살 수밖에 없는 스님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이달의 마음이 구름 속에 가득 담겨있단다.
분위기가 나른하지만, 쓸쓸하면서 씁쓸한 느낌을 어쩔 수 없다.
허균이 스승 이달의 모습을 보고 '홍길동전'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신분의 제약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대는 참 슬픈 시대였을 것 같구나.
다음엔 지난 번 황진이의 시조에서 <임제>의 시조를 다뤘는데, 그이의 한시를 한편 보자.

무어별(無語別)

                               임제(林悌)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현대어번역

십오세 꽃다운 아가씨
남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이별하네.
돌아와 중문을 닫아 걸고
배꽃처럼 하얀 달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네.

* 월계녀(越溪女) : 아름다운 미인.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히는 서시(西施)는 중국 월(越)나라 약야계(若耶溪) 출신이다. 또한 미인을 지칭하는 성어로 월녀오희(越女吳姬)가 있다. 월나라와 오나라는 대대로 미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 시는 아빠가 참 아끼는 한시란다.
내용은 뾰족한 것도 없지만,
화자는 열다섯 살 어여쁜 아가씨를 관찰하고 있어.
부끄러워 말못하고 헤어진 아가씨.
돌아와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을 닫아걸고는,
배꽃같은 달을 보며 눈물을 흘린대. 

조선 시대의 남녀간 사랑이란 '부부유별'같은 수직적 질서에 눌려 가치없는 것이었단다.
결혼이란 가문간의 결합이고. 

그래서 조선 후기로 가면 '자유연애'같은 가치를 소설 속에서라도 실현시키곤 하지. 춘향이처럼...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이생규장전'이란 소설에서는,
남녀가 사랑하다 헤어졌는데 여자애(최랑)가 상사병이 들거든.
그러면 아빠가 그걸 알고 '네 이년, 나가 죽어라!'하는 게 일상적 법도일 터인데,
그 아빠는 최랑을 이생과 결합시키려 여러 번 노력을 해.
그게 바로 신화(新話)겠지, new-story. 

작년에 시험에 났던 '운영전'처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애절함은 고전적인 주제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유명한 시 한 수만 더 읽어 보자.
매천 황현 선생은 한일합방(1910. 8. 29)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시를 쓰고
음독 자살하였다고 한다. 네 수를 지었는데, 그 중 세번 째 시가 유명하다.

절명시(絶命詩)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구나.

가을의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되새기니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구나. 


1910년을 경술년이라고 하는데,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상황에서,
절의(節義)를 지켜 자결하는 심결을 그려 낸 작품으로,
망국에 대한 선비의 통분과 절망을 토로하고 있는 거야.

나머지 세 작품을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볕이 옮겨지니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이 더디 드네.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적시네.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일에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더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중(忠)을 이루진 못했어라.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진동(陳東)을 넘지 못했음이 부끄럽기만 하더라.

자결하는 것이 뭐 지식인의 할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일제의 벼슬을 한 놈들도 있고, 
부끄러움을 느껴 자결한 사람도 몇 안 되는 걸 보면,
이런 지조 높은 선비들의 죽음은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한문이라고 하면 이젠 완전히 잊혀진 선사시대 유물처럼 생각하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한문 속에 담긴 내용을 곰곰 따져보면,
저것들이 한자로 쓰였다 뿐이지,
한국 문학으로 손색이 없음을 알게 되지. 

이제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
하복을 입어도 될 여름이야.
요즘 공기가 나빠 그런지 폐렴도 심하다고 하니 늘 건강 잘 챙기기 바란다.
잘 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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