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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제논의 역설이란 게 있다.
거북이가 훨씬 앞에서 출발한다면 사람이 그자리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는 다시 앞설 것이고,
그 양만큼 따라가면 또 앞서서,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다.
다만, 거북이와 사람의 달린 거리가 같아지는 순간까지는 옳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북이는 사람보다 뒤처지게 마련인 것.
호모데우스는 인간의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지난 수십 년 간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2배로 늘어났으니,
앞으로 인간의 지력은 무지 발전할 것이고, 인간은 신이 될 것이라는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는 거시적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어떤 지점에서는 한 개인의 특성일 수 있는 것을 들먹이면서 근거로 활용한다.
결국 인간의 지력이 아주 발전하게 될 백년, 이백년 뒤를 상상한다면,
그의 논거가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그래프를 좌악~~~ 늘여서
우주의 역사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의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그의 논거는 티끌도 아닐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사 책도 아니고, 지식 정보사회의 빅데이터를 활용한
가까운 미래상을 상상하는 책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재미난 가정하에 펼치는 과학공상소설도 아니다.
잡학다식을 집적한다고 힘이 되지는 않는다.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쟁 역시
800만 이스라엘 국민과 3억5천만 아랍연맹 국민의 선거로 해결할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연히 승복하지 않을 것.(345)
이스라엘은 1948년 팔레스타인을 치고들어가 빼앗은 땅에 세운 나라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군산복합체가 자리잡고 있다.
끊임없이 '홀로코스트'를 상품화하여 영화로, 전시로 활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불편한 나라의 존립 근거로 작용한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박학다식을 자랑하고자 하는 책은 아니겠지만,
자기의 국가가 정당하다는 고집은 내세운다.
그것이 호모사피엔스의 수준이다.
국가라는 것은 폭력으로 다가온 오지의 부족민들에게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국가라는 것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던 세상에서,
노예를 사고 파는 일이 횡행하던 세상에서,
컴퓨터가 조금 발전했다고 인간은 신에 가까워졌다고 발언하는 것은 오만방자이며 시건방이다.
역사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92)
이런 의견도 한편 옳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궤변이다.
매일 전쟁 무기를 팔기 위해 혈안이 된 미국이란 나라에서
약소국이 핵을 개발하면 그것을 저지하려 온갖 난동을 부리는 곳이 인간 세상인데,
아프리카 들판의 자연적인 약육강식만도 못한 온갖 추태를 만든 것이 인간인데,
역사로 미래를 지향하겠다는 것은, 오만이다.
그가 바라본 역사는 최첨단 과학의 장밋빛 미래라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역사일 따름이다.
식민지가 되어 학살된 어메리칸 원주민이나 노예로 부려지던 흑인들,
지금도 지옥도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 오지의 사람들에게
컴퓨터와 빅데이터는 '남아도는 식량' 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이다.
그의 역사가 걸어갈 길에 대한 근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이다.
근거치고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그들은 위대한 마법사가 실은 사기꾼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과 지혜와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신과 같은 마법사는 필요없다.
그저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걸으며
도중에 겪는 경험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334)
여행이 끝날 무렵을 몇십 년 후라 생각하면 스스로 제논의 거북이에 갇히는 꼴이다.
인류는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 미래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더 오염이 될 것이고, 교통사고도 많아질 것이고, 밝혀진 많은 질병으로 죽어갈 것이다.
중독이 심해질 것이고, 글로벌하게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 큰 나라는 은밀하게 위대한 나라가 되어갈 것이고,
가끔은 대놓고 폭격을 가하기도 하면서 추하게 살 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추악함이 크다.
계속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욕해야 한다.
99%가 1%만의 세상을 뒤집으려 <점거하라!>는 구호를 외쳐야 할 것이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379)
비약이 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덩치가 더 큰 이전 인류를 학살하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수십만년 전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 뒤에는
호모 데우스가 아니라, 멸망의 버섯구름만이 뭉글거릴지 모른다.
이 책의 3부에서는
인본주의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본주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 주장한다.
덕분에 우리는 근대 계약의 열매를 어떤 대가도 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383)
그건 이스라엘 너희들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아마 구토 유발자에 불과하리라.
근대 계약의 열매를 먹은 누군가는 헐크가 되어 이웃을 짓밟았다.
그 열매를 보지도 못한 이웃들은 학살당하고 노예가 되고 추방당했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조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기억을 끄집어 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405)
그야말로 독단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역사관을 담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복적 전시 효과를 노리는 자들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과잉이다.
물론 홀로코스트는 비극이지만, 아프리카의 질병, 전쟁, 내전으로 인한 자아들의 경험은 이야기되지 못한다.
아니, 미래 세계는 '이야기하는 자아'들에게서 '경험하는 자아'들의 목소리가
다종다양하게 구성되는 현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미래다.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기독교가 사라지지 않았듯,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419)
'종의 기원'과 '기독교'를 등가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종의 기원'은 하나의 이론이고 '기독교'는 생활 문화 전반이다.
과학자들의 의견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지'조차도 물질의 소산이며 작용이라는 의미에 가깝지
사회사상의 하나인 자유주의와는 등가물이 아니다.
이 두꺼운 책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지금처럼 미국의 실리콘밸리 주도로 더욱 발전할 것이므로,
그 질서의 흐름을 당연시하도록 어두운 이면을 도배지로 덮어버리는
호도가 정작 그가 하려는 말이 아닌가 싶다.
<표기>
Homo sapiens처럼
'종명'을 표기할 때는 '속명'과 '종소명'을 쓰는데
속명은 대문자로 종소명은 소문자로 표기한다.
그렇게 보면 Homo deus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