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초라 몹시 피곤하구나.
민우도 마찬가지겠지?
아빠가 3학년을 여러 번 하다 보니까,
올해 3학년에도 친한 선생님들이 많아서,
부담스럽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아는 체 하는 선생님이 많을수록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기 바란다.
오늘은 인간들이 서로 모여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노래를 몇 편 골라 볼게.
우선 연탄재의 시인 안도현의 <간격>을 읽어 보자.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鬱鬱蒼蒼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안도현, 간격>



한자로 나무가 모이면 ‘수풀 림 林’이 되고,
나무가 더 모이면 ‘빽빽한 삼 森’이 되지.
이 한자들이 모이면 ‘삼림 森林’이 되는 거란다.

그런데, 우리는 머~얼리서, 피상적으로 관찰할 때는 몰랐어.
그저 나무가 여럿 빽빽하게 모여 있으면 그게 숲이 되는 줄 알았지.
나무들은 숲에서 딱 달라 붙어있는 것인 줄 알았지.

그런데,
산불이 휩쓸고간 숲엘 들어가 보고서야,
나무와 나무 사이엔
넓든 좁든 간격이 필요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야.

나무들이 꼭 붙어 있으면
서로 햇빛도 가리고
서로 영양분도 나눠먹지 못하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거리감, 곧 간격이 필요했던 거지.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고,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 사이의 간격.
그 간격이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룬대.

산불이 난 숲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관조’라고 보면 되겠지?
그런데 화자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관조란 자연을 보면서 ‘인간사’를 깨닫는 거잖아.
간격이 있는 것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인데,
과연 인간간의 간격이란 어떤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공동체의 인간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이나 애정은 맹목적으로 붙어있는 것만은 아님을 강조한 것이겠지.
거 왜, 남녀 관계에서도 둘이 짝 달라붙었다가 평생 이별한 애들도 있었잖아.
견우와 직녀라고. ㅋ

부모와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맨날 짝 달라 붙어 사는 건 어찌 보면 ‘히키코모리’나 ‘오타쿠’같지 않니?
적당히 어른이 되면 떨어져 살아도 봐야겠지.
대학생이 되면 기숙사에서도 살아 보고,
결혼하면 부부가 둘이서 고생도 하며 살아 보고,
그러다 애기 낳으면 방학에 놀러도 오고, 그렇게 말이야.

다음엔 ‘그릇’의 시인 ‘오세영’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오세영, 겨울 들녘에 서서>

오세영은 ‘그릇’에서 ‘인간은 죽는 존재’임을,
 ‘등산’에서 ‘인생은 조금씩 밀고 나가는 것’임을,
그리고 이 시 ‘겨울 들녘에 서서’에서 ‘위안’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각 연은 간단하게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

~~로 아픈 사람은 겨울 들녘에 가 봐라~
거기엔 ~~가 있다.
~~를 보면 알 수 있는.

이런 똑 같이 생긴 문장 구조.

문제에선 이런 것들을 ‘같은 통사 구조가 반복’된다고 한단다.
잘 알아 두렴. ‘같은 통사 구조의 반복’!

1연에선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겨울 들녘’에 가 보라고,
2연에선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에게 거기 가 보라고 하고,
3연에선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에게 가 보라고 한다.
모두 마음 속에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겨울 들녘’은 ‘텅 비어 보이는 공간’이잖아.
괴롭고, 슬프고, 아픈 사람에게 왜 ‘텅 빈 공간’엘 가라고 했을까?
거기서 무엇을 ‘보고 깨달으라고?’

1연에선 ‘빈 공간의 충만’을 배우래.
역설이지? 빈 공간이 가득차 있음을 배우라니.
비록 ‘텅 빈 들판’이지만,
그는 이미 아낌없이 주어버린 자의 자부심으로 거기 있대.
가을걷이(추수)가 끝난 들판에
낟알 몇 개만 남은 겨울 들녘.

그렇지만 잃어버린 곡식을 아쉬워하지 않는 겨울 들녘.
이런 걸 발견하고 나면,
네가 가진 괴로움, 슬픔, 아픔이 좀 치유될 거라는 말이야.



2연도 마찬가지지.
이별에 슬픈 사람.
땅에서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있대.
현실에서의 이별은 사랑의 끝으로 느껴지지만,
이별은 하늘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안식일 수도 있다는구나.

왜 그런 말 있거든.
이쁜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 옆에 두시려고 일찍 데려 간다는 말.
둠벙은 ‘웅덩이’ 같은 거야. 방언이지.
둠벙에 비친 별빛을 보노라면,
먼 하늘에 욕심없이 비치는 별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사랑하는 이의 안식을 배울 수 있다는구나.

3연에서 ‘그리움’은 ‘임과 함께 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마음이잖아.
‘너를 지킴’은 ‘나를 지킴’이래.
‘네가 있으면 나는 없고, 내가 있으면 너는 없’는 관계가 아니라,
‘너도 지키고, 나도 지켜야 하는 관계’란다.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은
역시 역설적 표현이지.
‘홀로’ 있음을 통해서
‘함께 있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안도현의 ‘간격’과도 상통하는 의미인지도 모르겠구나.
논둑의 허수아비를 보면,
허수아비는 혼자 쓸쓸히 서 있지만,
그는 외롭기보다는
가을 들녘에서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볏단을 수확하게 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마치 결혼식장에서 시집가는 딸의 손을 잡은 아버지가
아쉬움과 자랑스러움에 흘리는 눈물같은 쓸쓸함과도 유사할지 모르겠다.

역설적 진리를 통해 삶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시.
그리고 사랑과 이별로 괴로워하는 이에게 ‘관조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시.
이런 것이 오세영 시를 읽는 멋이란다.

다음엔 섬의 시인 정현종의 시를 읽어 보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다도해가 생각나지 않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대.
그런 걸로 보면, 사람도 섬처럼 느껴지는구나.
그런데, 화자는 그 섬에 가고 싶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섬에.

이 시는 극도로 짧은 시지?
사람들의 ‘사이’, 곧 ‘단절된 인간 관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시 같다.
그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표현은 그 ‘단절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겠지

그 단절감 사이에서
인간과 인간을 이어줄 수 있는,
의사 소통이 가능한 영역을 ‘섬’으로 표현했단다.
‘섬’에서는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현대인의 대인관계가 조금 무너지고,
비교적 자유로운 의사 소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영역 같기도 해.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
어부가 잡아 둔 그물 안에 물고기가 가득했대.
그 물고기들은 숨쉬기도 힘들어 헐떡이고 축 늘어져 있었다는구나.
그런데, 어찌 그 물고기들이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지 신기해 들여다 보니,
물고기 사이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비집고 다니더래.
미끄럽다고 미꾸라진데,
마치 인간관계의 윤활유처럼 매끄러운 역할로 물고기들을 살려주었다는구나.

인간의 삶에는 이렇게 ‘~과 ~의 사이’가 꼭 필요해.
그 사이엔 ‘섬’도 필요하고 ‘미꾸라지’도 필요하겠지.
민우와 아빠 사이가 그닥 멀지도 않지만,
이 강의도 하나의 ‘섬’이고 ‘미꾸라지’가 될 수 있겠구나.

오늘은 연탄재의 시인 안도현의 <간격>,
그릇의 시인 오세영의 <겨울 들녘>, 그리고
섬의 시인 정현종의 <섬>을 통해서,
현대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들의 거리감과 간격, 친밀감에 대한
인간의 목마름에 대하여 좀 읽어봤다.
몇 번 이야기했지만,
설명을 읽고 나면 시를 다시 한두 번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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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탄재 시인 안도현, 화성시를 찾다-문인특강 안도현 시인
    from 화성시 공식블로그 화사함 2011-03-18 11:51 
    뜨거운 연탄재 시인, 안도현 화성시를 찾다.감성을 잔잔하게 노래하는 시인, 낮은것을 뜨겁게 사랑하는 시인, 안도현님이 화성시 노작홍사용문학관을 찾습니다. 홍사용문학관에서는 매년 유명 문인을 초청해 작가와의 시간을 마련하고 있는데요. 오는 19일 열릴 유명문인 특강엔 안도현시인을 초청하였습니다. 3월 중순임에도 꽃샘추위가 기승이지만 안도현님의 아름다운 시들로 인해 봄이 성큼 다가 올것같은 설렘이 느껴지네요. 모든 시인들이 봄을 노래 하였지만 특히나...
 
 
낮에나온반달 2011-03-0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글샘님의 타자속도가 궁금해집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듯.

글샘 2011-03-09 12:36   좋아요 0 | URL
손가락은 보여요. ㅋㅋ
군대에서 행정병한 덕으로 타자는 좀 칩니다.
물론 그때는 4벌식 타자기라고 들어나 보셨을래나...
 

감나무에 감꽃이 지고 나더니
아프게도 그 자리에 열매가 맺네
열매는 한창 쑥쑥 자라고
그것이 처음에는 눈이 부신
반짝이는 광택 속
선연한 푸른 빛에서
조금씩 변하더니 어느새
붉은 홍시로까지 오게 되었더니라.

가만히 보면
한자리에 매달린 채
자기 모습만을
불과 일 년이지만 하늘 속에
열심히 비추는 것을 보고, 글쎄,
말 못하는 식물이 저런데
똑똑한 체 잘도 떠들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다가
자기 모습을 남기는가 생각해 보니
허무라는 심연밖에 없더니라.
아, 가을! <박재삼, 홍시(紅柿)를 보며>

이 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행은 마지막 행이다.
‘아, 가을!’이라는 마지막 행에는 화자의 정서가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홍시와 대비되어 성실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 화자의 심정을 잘 전해주고 있다.

감나무엔 봄이면 감꽃이 피었다 진다.

그 꽃진 자리에서 열매가 열린다.
그 열매가 자라고 자라 붉은 홍시까지 된다.

2연의 <가만히 보면>을 어려운 말로 하면,
‘관조’가 되겠지?
사물을 가만히 보면서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살포시 떠오르는 경지.
이제 이런 것은 많이 들었잖아.  



감나무가 ‘한자리에 매달린 채 자기 모습만을
일 년 동안 하늘 속에 열심히 비춰보는 것’을 보았어.
그러면서 화자는 반성하는 거야.

‘에고에고, 글쎄, 말 못하는 식물이 저런데
똑똑한 체 잘도 떠들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다가
자기 모습을 남기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거야.
그래서 생각해 보니 허무하더라는 이야기지.
심연은 ‘깊은 연못 속 같은 알 수 없는 세계’란다.

산다는 일은,
홍시만도 못한 화자가 자신을 반성하는 삶은
허무만이 깊은 그런 것임을 깨달았대.
홍시를 보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났지.

무엇을 보고 생각했다고?
그래. 제목. 홍시를 보고.
왜 이런 생각을 했다고?
<아, 가을!>
이니깐.


열매가 열릴 때 ‘아프게도’가 들어간 것은 성장통(성숙을 위한 고통)으로 볼 수 있겠지.
‘푸른 빛’의 열매가 ‘홍시’의 붉음으로 변하기까지 익어가는 과정은,
단지 식물이 익는 것만이 아니라, 화자의 성숙까지 이야기하는 것 같구나.

‘말 못하는 식물’도 저런데,
말로는 뭣이든 이루려는 인간의 자기 반성, 자아 성찰이 잘 드러나있는 시야.

다음엔 또 ‘도시락 뚜껑’을 보고 ‘관조적 태도’를 보이는 화자를 만나 보렴.

오늘 내가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눈물을 흘린 것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삽니까
올해로 그분의 나이 아흔 살
오늘은 그분의 아흔한 번째 생신날
마른 북어 몇 마리
연시 몇 개
그분이 좋아하시던 식혜 한 대접
상을 차리고
남한 여자와 북한 사내가
두루뭉수리로 된 아들딸 데리고
꿇어 엎드려
천번 만번 빌고 빌었습니다.

신의주에서 안동까지
열차를 타고 소풍 갔던 그날처럼
임진강 녹슨 철로를 닦고 닦아
붕붕 신나는 을 울리며
당신 품에 이 손주들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시라고
천만 번 빌고 빌었습니다.

당신의 생신날 아침,
아내가 싸준 찰밥덩이
무심코 도시락 뚜껑 열다가
눈물 흘린 것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송수권,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화자는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울었대.
2연에서는 <그분>이 아흔 살이며,
고향에 두고온 어머니의 생신이 오늘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어.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삽니까’란 표현에서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
화자는 남한으로 피란와서 남한 여자와 살고 있어.
그러면서 간절히 어머니를 만나기를 빌고 빈단다.
그렇지만, 꼭 만날 것으로 여기진 않아.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살겠어.
요즘에도 90살긴 힘든데 말이야.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야.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다가,
어머니 생신임을 떠올리며 목이 메이는 화자의 마음이 읽히는구나.

요런 시험문제가 났다면, 틀린 말을 한 사람은 누굴까?

☆선생님: 화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 동현: '나'입니다. 아마 북한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친척을 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선생님: 화자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요?

 - 선준: 오랫동안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도시락을 열다가 북한에 계신 그분 생각과 옛 추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화자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바가 무엇이겠어요?

 - 병록: 이산 가족을 둔 한 가정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확장하면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슬픔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이 작품의 시상 전개 방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까?

 - 창욱: '~ 모릅니다', '~ 빌었습니다'를 기본 구조로 하여 그 문장의 앞 내용을 조금씩 변화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 작품에서 화자는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형상화했습니까?

 - 현웅: 화자의 일상 체험에서 문제 의식을 찾아 이를 풍자하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근, 현웅이가 바보지. ㅋ
이 시에서 ‘문제의식과 풍자, 비판’은 나오지 않으니 말이야.

이 시는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분단된 조국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야.
화자는 생사조차 분명하지 않은 이북의 혈육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생일날 생일상을 차려 놓고 빨리 만나 뵐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만날 수도 없고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지.
한 가족이 겪는 슬픔과 고통의 <특수한 경험>을 통해
민족의 아픔까지 되새겨 볼 수 있게 <일반화한 시>라고 볼 수 있어. 



이 시에서 화자와 ‘그분’을 이어주는 매개물이 무엇이었지?
그래. 바로 ‘도시락’이었단다.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찰밥을 보는 순간,
예전 어머니께서 생일날이면 차리던 찰밥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야.
자, 이번에도 ‘매개물’이 되는 시어를 하나 찾아 보자.

다음 박재삼의 시 ‘매미 소리에’란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시어는 무엇일까, 한번 찾아 보렴.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한낮은 뒤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 어린 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 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뻐 기뻐 그려 낼 수 있는
명명한 명명한 매미가 우네. <박재삼, 매미 울음에>

찾았어?
그리운 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매미 울음’이지.

'매미 울음'은 그리워하는 대상의 행위까지도 떠오르게 하는 매개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무심코 들었던 매미 소리가
임의 모습과 행위를 연상하게 하여 그리움의 대상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에 ‘명명한’이란 시어는 중의적으로 쓰이고 있어.
매미의 ‘맴맴’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로 볼 수도 있고,
‘밝을 명’자로 보면 또렷한 매미 소리로 볼 수도 있겠다.

오늘은 박재삼의 <홍시를 보며>에서
인간인 화자보다 나아 보이는 홍시의 자아 성찰을 화제로
가을을 맞아 ‘정신적 성숙’을 추구하는 시를 만났고,

또 박재삼의 <매미 울음에>에서는
매미 소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임의 모습, 임의 행동을 그려 보게 되었고,

송수권의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는
남북 분단으로 이산 가족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슬픔을
어머니 생신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찰밥을 보며
그 도시락 뚜껑을 열며 오열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단다.

이런 시들을 읽으면,
오늘 우리가 행복하게 함께 살고 있음에,
우리가 누리는 이 아무 것도 아닌 지금의 순간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함에까지 생각이 번진다.
사랑해, 아들~.
우리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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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3-07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의적' 이란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보아요. 국어 시간에 참 잘 나왔던 말인데 ^^
어느 새 70회가 되었네요?
오늘 올려주신 시는,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군요. 잘 잠재워야겠어요.

글샘 2011-03-08 21:50   좋아요 2 | URL
시는 사람을 울렁이게 해요.
울렁일 수 있는 눈,
울렁일 수 있는 마음...
좋지 않나요?
울렁임도, 시도...

주인공 2011-10-12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명명한 명명한 을 중의적이라고 쓸 수 있나요?
다른 곳에는 그렇다고 안 되어있어서..;;

글샘 2011-10-12 16:02   좋아요 1 | URL
매미 소리가 '귀를 띄우는' 의미가 있는데, 맴맴 우는 소리를 흉내낸 것이기도 하니 중의적으로 볼 수 있지요. ^^
 

주말은 참 빨리 간다. ^^
시간은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인지,
즐거운 시간은 늘 금세 지나가고,
지겨운 시간은 죽으라고 안 가지. 

밥먹을 때 줄 서있는 시간은 지겹도록 안 가고,
맛있는 점심 먹는 시간은 금세 가듯 말이야.
좋아하는 선생님 시간은 왜 그리도 짧은지...
그리고 웬수같은 선생님 시간은 왜 빠지지도 않는지... ㅋ
삶이 즐거운 사람에겐 인생이 참 빨리 지나갔단 생각이 들 거고,
삶이 힘겨운 사람에겐 그 시간이 참 길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거.
이렇게 순간순간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오늘은 그 삶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김광규의 <나뭇잎 하나> 읽어 보렴.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김광규, 나뭇잎 하나>

네 연이 비슷한 길이로 구성되어있다. 이쁘지.
산 이름이 '크낙산'이다. 큰 산.
그 산이 온통 연록색으로 부푼 봄이겠지.
그 봄에 나는 미처 몰랐대.
봄은 인생의 젊은 시절이기도 하겠구나.  

그러다 그 길이 온통 단풍들고 낙엽지던 계절,
그 때도 나는 느끼지 못했단다.
가을은 인생의 중년이 되겠고 말이야.
그럼 언제나 알게 될까? 궁금하지?
시를 절반을 읽도록 아직도 모른다니 말이다. 

한 해 다 가고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이제 인생이 다 지나 낙이라곤 거의 없는 노년의 어느 순간.
대추나무 가지 끝의 나뭇잎 하나
문득 떨어지는 걸 보았어.
그걸 보면서,
그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생의 <관조>를 얻게 된다. 

인생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어나
여럿이 모여서 한 평생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사람식 죽고
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나뭇잎 하나>의 관조의 힘.  

 

그 작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 사색하고 성찰하는 화자의 눈이 날카롭다.
이 시의 주제는 <존재의 소멸을 통하여 바라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이 될 거야.
사라짐은 왠지 사람을 조금 겸손하게 만드니 말이야.

봄에는, 여름에는 <몰랐었다>라는 회고가 조금 가슴 쓰라리게 하는구나.
다음엔 재미있는 시를 한 편 보자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산 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이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의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 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고층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김혜순>

화자는 길거리를 가다가 고층빌딩 유리창닦이를 봤겠지.
고층빌딩의 유리창닦이는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란다.
창문 안에서는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창밖에 매달려 유리를 닦는 사람들을 거기 있다는 인식도 하지 않으니 말이야.  

첫부분부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저녁에 해가 뜨고 아침에 진대. 말도 안 되지?
이렇게 모순되는, 말도 안 되는 걸 <역설법>이라고 한단 건 이제 알겠지?
반대되는 게 <반어>.
에이 뭐, 그건 말도 안돼. 이게 <역설>  

아침에 출근하려고 <유리산>을 올라가노라면,
사람이 올라가는 만큼 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상대적인 거니깐.
반대로 퇴근무렵 <유리산>을 내려오다보면,
사람이 내려오는 만큼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질거야.
역시 상대적이지. 

유리창닦이가 오르내리면
마을에 햇살도 퍼지고, 소녀가 석양을 받으며 올려다 보기도 하겠지만,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부터가 조금 문제란다. 

이 '두 개의 밤'은 뭘 뜻하는 걸까?
뒤의 이야기를 따져 보면,
빌딩 안과 빌딩 밖의 두 세상의 밤인 것 같다. 

유리창닦이인 화자는 <풍뎅이>가 된대.
풍뎅이가 유리창 밖에서 아무리 잉잉거리고 울어도,
유리창 안에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지.
그렇게 소외당한 화자는 자신을 유리창닦이에 비유한 거란다. 

풍뎅이는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만
반복적으로 창문만을 만날 뿐이야.
끊임없이 소통을 원하는 화자에게 세상은
늘 유리창이란 방해물이자 장애물로만 맞선단다. 

유리창닦이가 밤새 창문을 여닫아도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 뿐.
<방 한 칸>이란 자신의 공간.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서로 쓰다듬는 소통의 공간은 없고,
그저 서로는 <창 밖의 존재>일 뿐인 냉혹한 세상. 

세상은 그런 이들로 가득하다는구나. 

밤새 닦아도 닦이지 않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은
소통이 불가능하고 단절이 심화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 같지?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큰골은 '대뇌'야.
대뇌는 인간은 온갖 감각기관이 받아들인(수용한) 것들을
합쳐서(연합) 판단하는 기관이지.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되려면
인간의 대뇌 피질에서 활발하게 전기 신호가 지직거려야 하는 거겠지.
근데, 큰골은 잠을 자고 있단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대뇌의 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인 대뇌가 두껍게 되고 잠들게 되는
무감각한 세상. 

화자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살아.
그것은 곧 소통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단 소리겠지. 

사람들과 유리된 공간,
그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공간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소망하는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란다.

오늘은 시간의 상대성과 공간의 상대성을 다룬 시 두편을 읽었다.
시간은 20대때는 시속 2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50대때는 5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느껴진대.
초등학교보다 중학교가 빨리 가고, 고등학교는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도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지만,
서로 나뉘어져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외감을 느낀다면,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지. 

다시 1주일이 시작된다.
새 아침을 맞는 기분이,
유리창닦이처럼 좌절스럽지만은 않길...
그리고 울상으로 새 한 주를 맞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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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힘든 1주일이 지났다.
다음 주도 바쁘겠지만, 그래도 개학 후 첫 주는 언제나 마음도 몸도 몹시 춥다. 
선생님들도 새로 오셔서 낯설고, 자리도 바꾸면 환경이 달라져서 마음도 설다. 

오늘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볼까?
도대체 인간이란 건 뭘까? 

어린 아이를 교육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가르침이 <도리도리>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중추 신경이 지나는 '목 운동'을 시키는 거래.
그 다음 교육과정은 <짝짜꿍>이야.
목을 움직일 줄 아는 아이에겐, 팔을 미세하게 맞출 줄 아는 운동을 시키는 거지.
발은 눈 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쭉쭉 늘여주는 마사지 정도면 된단다.
그런 다음엔 <죔죔>을 가르쳐. 너도 이 교육과정은 다 마스터 했단다. ㅎㅎ
주먹을 쥐게 함으로써 더 미세한 손가락 근육을 훈련하는 거래.
마지막 훈련이 <곤지곤지>래.
왼손바닥에 오른손 검지를 맞출 줄 아는 신경 운동. 

이렇게 가르쳐도 15년이 되어야 다 자라는 인간.
그렇지만 그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
그러나 또 생태계 속에서 온갖 파괴를 생성시키는 지구 공공의 적. 

조지훈의 <풀잎 단장>을 읽어보며 인간과 자연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보자.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조지훈, 풀잎 단장>

시인이 오래된 성터를 거닐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렴.
그 성터에는 오랜 세월 거치는 동안 무너져버린 축대에 오래된 바위가 널브러져 있겠지. 
좀 높다란 곳에 있는 성터에 올라 하늘을 보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보게 되었어. 

그러다가 풀잎과 자신의 <공통점,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자연이나 사물을 바라보다가 깨달음을 얻는 일, 바로 관조의 순간을 맛보게 되지.  

풀잎이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듯,
나의 존재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약하고 작은 존재구나. 아~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잰체하는 바보였구나~ 이런 생각을. 

그래서 풀잎을 보고 화자는 마음 속으로 외쳤단다.

   
  아, 너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분신>이구나.  
   

그래서 인생사에 찌들린 화자는 고달픈 얼굴로 풀잎에게 이야기한다.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그렇지만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를 땐 인간은 자연의 법칙, 섭리를 생각할 틈도 없어.
그렇지만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때'가 되면,
한 줄기 풀잎을 만나도 <그윽히 피어오르는 풀잎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화자는 발견하고 있어.

'무너진 성터' 같은 시어에서는 <인생 무상>이 느껴진다.
불교에서 <무상 無常>이란 말뜻은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이 변함'이란다.
금강경에서도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다>고 한 것도 그런 거야.
한계가 있어서 유한하고, 변하고 사라지고 죽는다는 것. 

<풀잎 단장>이란 제목은 풀잎을 보고 느낀 짧은 생각(단상) 또는 풀잎을 보고 지은 짧은 글(단장)이 되겠지.

풀잎에 화자가 <동화>되면서 풀잎의 생명력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시였다. 
다음엔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를 읽어 보자.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제목이 벌써 좀 신비롭지 않냐? ㅋ
알 수 없어요. 

이 시에서는 총 여섯 번의 의문이 던져진다.
그 의문의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질문의 답은 한결같다는 거야. <알 수 없어요>
인간 존재의 모든 의문은 <인간의 지식 한계> 너머 있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질문할 수 있을 뿐.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를 뿐>이란 대답이었다는구나.
참 겸손한 표현이지 않니?

가을이 되어 오동잎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어.
왜 지구는 오동잎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런 것이 바로 뉴턴이 궁금해 했던 거야. 

장마철에 바람이 부는 검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대. 
아무리 비바람이 강해도, 그 위엔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이 그대로 있는 거지.
참 신비로운 자연의 현상 아닐까? 

비가 내린 뒤, 수천 년 해묵은 나무와 이끼, 그 옆의 탑이나 부도(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돌무덤) 사이를
걷노라면 어디선가 흙냄새와 나무의 향, 축축한 풍만함이 가득한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온다.
아, 이런 고마운 향을 느끼는 우리는 어찌하여 여기를 걷고 있는 걸까?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도 어디선가부터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
비가 오면 조금 커지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쉬이 메마르지 않는 시냇물도 참 신비로운 자연의 노래다. 

바다부터 하늘까지 가득한 저녁놀을 의인화하고 있어.
연꽃(불교적 완성의 의미) 같은 발꿈치로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지고,
떨어지는 해를 단장하는 저녁놀~ 아, 이런 아름다운 장면은 한 편의 시 같잖아.
도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니? 

마지막 부분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란다. 

나뭇가지가 타고 남은 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오래 묵혀진 것이 바로 <석유>거든.
기름이 다시 타오르고 <무 無>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돈단다. 그것이 윤회의 섭리야.  

반야심경이란 <불경>에 짱구네 집 가훈이 나온단다.
짱구네 집 벽엔 <색즉시공> 넉 자가 붙어 있어.
색 色은 곧 존재하는 것, 있는 것 이런 말이야.
공 空은  없는 것, 사라지는 것 이런 말이지.
오나전 역설 아니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다.(한자로 是는 영어의 Be 동사야. ~이다는 뜻이지) 

아무리 뭐가 있어 보여도 다 없어지게 마련이고,
아무 것도 없어 보여도 가득 차게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다. 

축구할 때면 부르짖는 '대~한 민국'도 사실 얼마 뒤면 사라질 거야.
남북이 통일되면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통일 조선>이 되든, <통일 한국>이 되든, <유나이티드 코리아>가 되든 새 이름이 붙을 거 아니니?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고, 또 전혀 아닌 것도 없단다.
세상은 돌고 돌지. 변하고 변한다. 바뀌고 바뀌고...
이게 <인생 무상>이고 <색즉시공>의 의미야.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화자의 구도 정신일 거야.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곳인지... 일제 강점기의 시. 

부처는 4성제라는 것을 이야기했잖아.
고,집,멸,도...의 네 가지.
세상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인데, 이건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소멸시키고 싶은 자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달아 '도'를 이루라. 이런 거지. 

이렇게 말로 듣는다고 깨달아지면 그건 진리가 아니란다.
언어의 경지를 뛰어넘는 가르침이 있어야 되지.
혼자서 마음으로 곱씹고 곱씹어야 진리의 한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화자가 마지막 행에서 외치고 있어.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정진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 되겠습니까?
'밤'은 시련의 시대, 일제 강점기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등불이 되고 싶대.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지.  

만해 시에서 '임'의 의미는 참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대.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사랑한, 그립고 애틋한)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 있어서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은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는 <신비한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구도 정신을 드러내고 있단다.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 가득한 곳인가?
어쩌면 풀잎 단장과 유사한 신비로움이 느껴지기도 하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로 <관심>을 꼽는단다.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똑바로 볼 수 있고,
기회도 잡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도 얻을 수 있고,
인기도 생길 수 있고,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약장사의 만병 통치약이 바로 <관심>이라고 말이야.
늘 생각하는 것이 관심이지. 그런 걸 좀 수준높은 말로 하면 '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스님, 기독교적 수도자 들은 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소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존재야.
삐뚤어진 세상과 올바른 인간의 삶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고 말이지.
그러니 이런 종교적인 이야기도 가끔 들어 봐야 할 게다. 

오늘 첫 토요일 자습을 하고 왔구나.
고3때는 역시 대학 입시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주 목요일에 치를 모의고사에 관심을 가지고,
네 성적과 실력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겠다. 

삶은 늘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의 연속이야.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지혜롭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인생의 묘미란다.
이제껏 편하게 살아온 민우야.
올해 더 지혜로워지는 한 해를 보내길 바랄게.
주말 즐겁고 힘차게 보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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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날이 차다.
오늘은 아빠도 바쁘고 하니 시 한 편만 읽고 자자~.
오규원의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란 시다.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오규원,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시에서 '죽음'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다의 어간 '살-'에 명사형 전성어미 '암'이 붙어 '사람'이 된 거지.
그러니깐 살아있지 않은 것은 '시체'거나 '미라'지 사람이 아닌 거란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모순되게,
이런 것을 <역설>이라고 했지?
<미스터 죽음>이 살아가는 하루를 상상하고 있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으로서 한 사람의 이름을 <Mr. Dead>로 쓴 거지.

이 시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사나이 혹은 그녀는
참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구나.
정말 재미 하나도 없고 무기력한 사람. 

버스를 타려다가 귀찮아서 택시를 타고,
자신은 할 일이 많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그 또는 그녀는 일보다 우선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대.
생각할 일도 많지만
우선 한잔 하고 취하면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자신은 충신도 아니니 회사에 충성을 다할 필요 없다고 합리화 했다.
자신이 오늘 일하지 않고 내일로 미룬 것을... 

한 잔 하다가 내일 생각하려던 것도 작파하고 만다.
미스터 데드는 술이 조금 취해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내일은 주말 여행을 꿈꾼다. 

속되게 '건강'이나 챙기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고?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어...
이러고 또 자기 합리화를 한다. 

이 시는 <이 시대의 삶>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주제로 쓴 시야.
그런데 <이 시대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역설법으로 봐야 한단다.
삶의 무기력함, 현대인의 자기합리화의 부조리함을
<미스터 죽음>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우화처럼 빗대서 이야기를 지어내 풍자하는 시>가 된 거란다. 

현대인은 늘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해야할 일을 미루면서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세상 탓이고, 그들의 탓이고, 너희들 탓이라고,
합리화하는 부조리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세상은 참 불합리하단다.
그런 것을 부조리라고 그래.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잖아?
올바로 산 사람이 잘 살아야 하잖아?
정의는 항상 승리해야 하잖아?
그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고 조리있는 이야기지.
근데, 실상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니,
비합리적이고, 이치에 어긋나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한단다. 

이런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가 되지 않지.
어긋나게,
역설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죽음 씨>라고 붙인 다음,
그 사람이 합리화하는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나열한단다. 

텔레비전과 신문의 의견을
마치 자기의 의견인 것처럼 내세우고 아는 체 하지.
이런 비주체적인 사람은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야.
미스터 죽음.

오규원의 시집들 이름을 보면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희망 만들며 살기>,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하늘 아래의 생> 뭐, 이렇다.
수필집은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잠시만 머문다> 이런 제목이었대.  

작품집의 제목들만 훑어보더라도,
큰 것, 위대한 것, 유명하고 소문난 것, 남들이 알아주는 것보담은,
작고 남들이 안 알아주는 구석진 곳에 있고 좀 후져보이는 그런 것에 애착을 보인단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인간적이고 사람냄새 나는 거잖아.
오늘의 시도 인간은 그렇고 그런 존재잖냐?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좀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죽음 씨>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인생이란 부조리한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어쩌면, 인생은 원래 부조리한 것이니,
네 인생이 보잘것 없고, 낮고, 작고, 초라해 보여 쪽팔려 보이더라도,
너무 자신감잃고 비실거릴 것 없어.
이 죽음 씨야!
세상 뭐 있어?
인간은 뭐, 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존재고, 누구나 다 죽음씨라구!!!
그러니 비실거리는 네 인생을 비관하지만 말고,
세상을 향해 <높고 힘차게> 하이킥 한 판 날리는 건 어떻냐고!!!
이런 외침을 속에서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죽음 씨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멋지지 않니?
내가 너무 멋지게만 이야기했나? ㅋ
그렇지만 이런 모순 속의 진실,
역설법을 통해 삶의 숨은 속살을 읽는 것도 시의 재미란다.
내일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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