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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과식이라 하고, 무섭게 먹으면 폭식이라 한다.

책도 적당히 읽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읽으면 과독이 될 것이고, 겁나게 읽으면 폭독이 될 것이다.

요즘 책읽는 습관을 보면 과독을 너머 폭독으로 넘어가는 듯하다.

2학기 들어 3학년 녀석들이 아무 할 일 없이 앉아 있어 독서를 시킨다. 대부분 책을 읽지 않고 만화를 보거나 휴대폰으로 장난을 치거나 하지만, 아직 중간 고사가 먼 지금 시점에서 수업을 열심히 할 수가 없다. 그 시간에 책을 보는 양도 무시할 수 없다.

집에 가서도 지난 주까지는 가족과 외식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중간고사 준비한다고 같이 책을 잡고 앉아 있어야 하니 책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왔는데, 내가 신청한 책이 수십 권 들어와서 읽어 달라고 대기중이어서 도서관에만 가면 묵직하게 책을 빌려 오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권'과 '이덕무의 사소절'이다.

오주석 선생님의 글을 여섯 편 중 두 편 읽었는데, 미치겠다. 오주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미술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래서 오주석 선생님의 빈 자리가 그만큼 더 크다. 이덕무의 사소절은 조성기씨의 설명으로 따라가는데, 단아한 선비의 모습과 칼날선 꼿꼿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오주석 선생님을 읽다가, 오전까지 읽은 책 세 권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려 왔다. 오주석 선생님을 훌쩍 다 읽어 버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다.

오늘은 큰 맘먹고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빌렸다. 지난 번에 시립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서문만 읽고 반납한 책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좀 여유있게 봐도 되니 좋다. 이사하는 통에 다 못 읽은 것이 아쉽던 차에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다.

한스 크루퍼의 '마음의 여행자'와 틱낫한 스님의 '기도'는 마음 공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깨어있는 마음을 재우치기 위해 보약삼아 빌렸다.

밀드레드 테일러의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와 나카지마 야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깨어있는 올바른 정신을 위해 빌렸다. 혹시 교과서에 실을 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책꽂이에 새로 읽을 책을 가득 빌려다 놓고 차를 한 잔 하고 있으면, 추수를 마친 농부의 심정이 되어 흐뭇하다. 정말 맛있는 책을 야금야금 조각내 아껴가며 꼭꼭 씹어 읽는 일은 어떤 즐거움보다도 내겐 큰 행복이다.

이사를 하고 책장 짜는 아저씨가 구석에 징그럽게 쌓인 책들을 보더니, "책만 저렇게 보는 신랑은 재미 하나도 없겠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쿡 찔렸던 적이 있다. 아내가 놀자고 하면 놀면서도 간혹은 책보고 싶은 생각이 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난 아내가 놀자고 하면 두말 않고 논다. 하던 일이 정말 시급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이혼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아들 녀석 시험 기간이라 근신하며 지내야 하므로 아내는 답답할는지 몰라도, 나는 책 속에 푹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기간이다. 쉿! 아내에겐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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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9-2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쉿!, 세상엔 빔일은 엄따!!(고자질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해콩 2006-09-2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저렇게나 많은 책들을 한 번에 읽으신단 말예욤? 나같으면 벌써 -,,- 이렇게 쌍코피 터졌겠다. 나카지마 야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좋아요~ 읽은 게 이것 밖에 음네요.. ^^;

글샘 2006-09-2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고자질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래요. 세상에 비밀로 해야할 것은 정말 얼마 안 되지요.
해콩샘. 한번에 읽는단 말이 아니고, 빌려다 놓았단 겁니다. 오늘은 그럼 나카지마를 한번 읽어 볼까요?

해콩 2006-09-3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며칠만에 저 많은 책 모두, 결국 독파하실 거잖아요.. ^^;

글샘 2006-09-3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파라고 하시니... 좀 전쟁같은 분위기가^^
어제 도서관 가서 시집 네 권 더 빌려왔습니다.^^ 추석때 봐야지...
 

혹자는 나더러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고도 하고,
혹자는 나보고 책을 참 빨리 읽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책을 빨리 읽지는 못한다. 속독의 기술을 배운 적도 없을 뿐더러, 속독을 배울 생각도 없다.

내가 책에 몰두하게 된 것은,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까지 갔지만,
결국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나누어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소화된 지식만이 아이들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는 깨닫고 있었더라도, 그리 고민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적어 두고, 혹은 복사해 나눠주고, 더러는 수업 시간에 이야기로 들려 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큰 도움이 된다.

아이들에게 그냥 공부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하나라도 들려 주면서 곁들여 이야기하는 쪽이 낫다.

그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어느덧 책벌레 대열에 끼게 된 것 같다.
선생님들이 갑자기 시간이 비어서 책이 읽고 싶을 때, 내 자리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누구는 내가 책벌레라서 술자리 같은 데는 아예 끼지도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던 말처럼, 책을 읽지 않으면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책 속에 <내가 살 길>이 들어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업할 길>이 들어있단 것은 이제 알고 있다.

그래서 알라딘 서재는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다.
내가 수시로 메모를 남겨 두고, 밑줄 그은 부분들을 남겨 둔 것이,
수시로 든 생각을 적어둔 것이 두고두고 나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김치나 된장이 발효되어 우리 몸을 지켜 주듯이,
아직 설익은 생각들도 남겨두다 보면, 두서너 해가 지나서 농밀한 생각으로 돌아올는지 모를 일이잖은가.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섯 권 빌려다 놓고, 도서관에는 없는 책을 대여섯 권 사서 꽂아 두고나면 부자가 된 느낌이다. 그 책들을 야금야금 갉아대는 재미도 일품이다.
다 읽고 도서관에 돌려주러 갈 때, 정말 좋은 책을 만났었다는 뿌듯함을 안고 가기도 하고,
새로운 책을 만날 기대로 설레기도 한다.

오늘 내 책장엔 열두 권의 책이 꽂혀 있다.

내 책.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이 놈은 두고두고 조금씩 갉으며 읽으리라.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이 책은 뜨거우니 비오는 날 읽을 거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이 놈은 글쎄... 천천히 보고,
쾌도난마 한국 경제, 난 이런 책을 꽂아 두면 읽고 싶어 온 몸이 근질거린다. 그래도 그 쾌감을 즐기며 그냥 꽂아 두기로 한다. 발산의 오르가즘이 아닌, 기다림의 미학.
내 마음을 살찌우는 소중한 비타민, 가끔 막간을 이용해 펼쳐볼 책, 석이의 선물.

빌린 책.
무비 스님의 금강경 강의, 지난 번에 빌려서 아직 안 가져다준 책. 하루 몇 장씩. 주로 화장실에서 비우며 읽는 책.
오늘 빌린 책.
방외지사 2, 자기를 비운 사람들, 그 두번 째 이야기.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 부담스런 남자 박노자의 이야기.
노자를 벗하며, 장석주의 느림과 비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려고 빌린 책. 노자는 재밌는데, 풀이가 넘 어려워...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빌려본 책, 키라키라 히카루...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 좁쌀 한 알. 좁쌀 한 알 속에 든 우주와, 좁쌀같은 내 소가지를 대 보려고 빌린 책.
소파 방정환 수필집, 없는 이의 행복. 방정환 선생 글은 간소해서 좋다.

학교 도서관에서 오래된 먼지 내음을 맡고 있으면, 많으니 적으니 해도 국가에서 월급받으며 아이들 가르치는 업에 종사하는 일은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누구는 남자가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 하는 일이니 뭐라 할 것도 없다.
구제 금융기 이전엔 학부모들이 그런 질문도 많이 했더랬지...

가르치기 위해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그렇다고 읽는 일에 빠져 가르치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되겠고...

아, 오늘은 남구 도서관이 휴관일이다. 내일까지 반납할 책 세 권, 차에 실어 두었으니, 내일은 또 무슨 책을 빌릴까나... 기다려라,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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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3-1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은 정말 좋은 선생님이셔요. "가르치기 위해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그렇다고 읽는 일에 빠져 가르치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되겠고..." 저도 우리 아이들을 이런 마음 가짐으로 대해야 하는데...

글샘 2006-03-1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선생님...은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좋은 선생님이란... 불가능이 아닐까 합니다. 제 능력 부족 탓도 있지만, 교사에게 바라는 건 엄청 많지만, 사실 교사에게 이렇게 하라고 정해진 것은 너무 허술하거든요.

비자림 2006-03-1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도 뵌 적 없지만 참 존경스럽네요. 글샘님의 글을 읽으며 가끔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준비하는 선생님, 가르침에 정성을 다하는 선생님...

글샘 2006-03-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ㅎㅎ 글을 보고 존경스럽다는 말씀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희망 사항을 주로 글로 적고 있다고 봐야죠. ㅋㅋ
 

한 해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으랴... 하는 생각을 한 지 오래 되었다.

그렇지만, 한 해가 시작되고 마무리될 때, 새로운 감회를 갖는 것이 꼭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학교는 3월이 새 학년도의 시작이다.

올해는 어떤 책들을 읽어 볼까...

상담 심리 책도 읽고 싶고,
아이들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는 문학 작품과, 교육 관련 도서도 읽어야 겠고,
틈틈이 가벼운 글들도 읽고, 무거운 글들도 읽고 싶다.
박노자, 홍세화 류의 시대를 읽는 글들도 읽어야 하겠고...

알라딘 서재에 읽은 책의 리뷰를 모두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써 보려고 노력한다.

00년 1권
01년 9권
02년 34권
03년 161권
04년 119권
05년 374권
06년 31권으로 지금까지 729권의 리뷰를 올린 셈이다.

올해도 앞으로 270권 정도 읽을 수 있을까?

하루 한 권 정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올해의 목표. 연말까지 1000권 넘기기로 삼아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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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5년에는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리뷰만 374니까.....안 올리신 것도 있다니...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신가 봐요..

글샘 2006-02-1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속도는 책읽는 양에 비례해서 느는 것 같습니다.
속도가 느리면 꼼꼼하게 읽을 책도, 속도를 내면 건성건성 읽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올해는 천천히 좀 읽으려고 합니다.

프레이야 2006-02-1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읽고 싶네요. ^^

해콩 2006-02-1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저는 일주일에 한 권 정도? 그나마 리뷰도 안(못)쓰고.. 참으로 대단하셔요. 그러니 이 시간까지 깨어있으신...

글샘 2006-02-1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네. 꼭꼭 씹어서 읽는 것이 필요한 책도 있잖아요.
해콩님... 전혀 대단할 게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읽는 것 같아요. ㅎㅎ

글샘 2006-11-0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현재까지 342권을 리뷰를 올렸다. 아직 60일 정도 올해가 남았으니, 400권 가까이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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