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토론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 구경을 갔던 날.
원래는 도서관 앞산을 산책하며 중간고사 스트레스를 좀 날리려 했는데,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면서 도서관 구경만 했다. 

우연히 맞닥뜨린 이덕무의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너무 가난해서 한서로 이불처럼 덮었다는 둥, 논어로 병풍처럼 막았다는 이야기인데,
가난 속에서도 책만 읽는 바보의 사고는 끝없이 펼쳐진다. 

신선이란 마음이 담백하여 때에 얽매임이 없으면 도가 원숙해지고 금단이 거의 이루어진다. 

이렇게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한 모양이다.
마음을 담백하게 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집착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리라.
때에 얽매임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일을 꼭 마쳐야 할 것처럼 열을 내고,
이 나이때는 꼭 이런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처럼 골몰하느라,
현재의 자신이 가진 가치를 잊고 사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뜻이리라. 

마음을 담백하게,
때에 얽매임이 없이 사는 삶.
아, 말은 간단하지만,
반야심경의 그 숱하게 많은 '빌 공 空'자 하며, '없을 무 無'자가 가리키는 바가
인간이란 참으로 많은 '색'과 '신체의 망상'에 끄달리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세모시 가는 실이 호박 구슬을 자르고, 얇은 판잣조각이 쇠뿔을 자른다.
군자가 근심을 예방함은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을 삼가야 한다. 

작은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방치하면 굵은 금으로 발전하듯,
장차의 근심거리를 예방하려면,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을 미리 삼가야 한다.
그래서 홀로 있을 때조차도 <경건>하게 여기라는 '위기지학'으로서의 퇴계의 말씀이 오래 남는 것이다.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지은이의 정경을 살펴야 하고
서화를 평할 때는
도리어 저자신의 마음가짐과 됨됨이로 돌아가야 한다. 

시를 읽을 때, 글을 읽을 때는, 지은이가 처한 상황을 살피면서 읽어야 한다.
그저 제 멋에 겨워 칭찬하거나 폄하해선 안된다는 이야기겠다.
글씨와 그림을 평가하는 자리에선,
제 자신의 마음가짐과 인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곧,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하고 비평하지 말라는 말이렷다.
마치 얄팍한 재주로 남의 글을 비평하는 글을 써두고는 재치있는 표현을 한 것인 양 우쭐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경고하는 글이다. 

어린 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두워지는지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인류의 원죄는 '선과 악'을 구별하려는 순간부터라고 성경에 씌어있다.
그 원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이덕무도 하고 있는 것이다.
밝아지고 어두워짐에
구애됨이 없는, 분별력을 발휘하지 않는 순수함의 스승이란...  

남의 문장에 대해 망령되이 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극히 미세한 일이지만 큰 재앙이 이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음이 없다. 

자기의 생각으로 자신의 글을 엄격히 적을 뿐이지,
남의 문장에 대하여 함부로 논하는 일의 엄중함을 재삼 강조하는 글이다. 

조선의 학자들의 글읽는 자세를 본받을 만 하다.
그들은 글을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수백, 수천 번 곱씹으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자기의 것이 된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반복하여 읽는 일은,
자신이 선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고,
자신이 하는 일을 늘 반성하는 일이다.
그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말을 빌리고 글을 훔치는 자들과는 근본이 다르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왕도는 아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가득한 길이고,
옳음을 알기에 가지 아니할 수 없는 통곡의 길이기도 하다.

글의 겉멋만 만나고 흥얼거릴 노릇이 아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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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5-09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학생들도 학교가는 토요일에 도서관에 와서 독서토론 해요. 방 빌려주지요~~~
어린이를 스승으로 삼을수도 있다는 자세. 음 좋은데요.
이번 한주 모토로 삼아야 겠습니다.

저두 요즘 잠이 없어졌어요. 하루에 5시간 자네요.
몽땅내사랑에서 전이사가 하루에 10분만 자도 괜찮다고는 하더만 저는 7시간은 자야 개운한데
아 피곤해.........

글샘 2011-05-09 08:56   좋아요 0 | URL
헐~ 하루 5시간...
연속극에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ㅎㅎ

갈수록 잠 못 잘 일만 가득 생기네요. 날씨도 흐리멍텅하고... ^^

석란1 2011-05-2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때가 있다고 하지요. 정말 그 말이 가슴에 팍 와 닿는 기분입니다. 요 몇년 저는 한문학에 푹 빠졌습니다. 옛날엔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던 것들이 끌리는 걸 보면 살만큼 살아서 고전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잘 계시죠?

글샘 2011-05-23 10: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때가 있죠.
한문학... 석란님께 잘 어울리는 분야입니다. ^^
고전은 살만큼 살아야 다가오는 게 맞아요.
아이들에게 괜히 고전고전 할 필요 없다니깐요.
님도 잘 계시죠?
 
인문학의 싹 -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
김기승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서울 중앙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 박물관을 만들었단다.
인문학 박물관... 한편 씁쓸하다.
박물관이라면, 사라져가는 것들을 모아놓는 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싹을 피워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곳이 박물관이든 시궁창이든 이름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맹이요 싹에서 피어나는 결실일 터이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해방 공간에서 피어나지도 못하고 져버려야 했던 슬픈 인문학의 싹에 대한 회고담을 주로 다룬다. 

왜 이토록 한국의 인문학적 토양은 척박한가를 따져가노라면,
또 한국에서 진정 인문학적 연구를 치열하게 논의했던 시대와 사람들을 살펴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방공간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해방 공간의 논의는 상당히 정치적인 관점과 맞물릴 수밖에 없기때문에 충분한 논의가 못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깜놀하게 되는 것은,
그 치열한 정치공방의 와중에서도 민중을 위한, 미래를 위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적 논의의 틀을 모색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한국 인문학의 싹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토양은 결국 분단의 역사에서 이북으로 쏠리는 지식인들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많은 학자들은 남한에서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서야 해금의 기회를 맞는다.
그러는 동안 남한의 인문학은 어쩔 수 없이 동화 속에 등장하는 '반쪽이' 같은 형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빨갱이로 몰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시오.
빨갱이로 찍히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서적을 읽으시오.
빨갱이들이 다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대화를 전개하시오.
빨갱이들의 침방울이 한 점도 튀지 않은 방향으로만 인문학적 연구를 계속하시오... 

이런 반쪽이가 두 팔, 두 다리, 두 눈을 제대로 가지게 될 일은 요원하기만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적 인문학의 토양의 밑거름이 되었어야 할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격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비롯한 지리학의 자주성.
안확의 조선문명사, 이만규의 조선교육사 등이 단절된 연구였던 아쉬움.
박열, 신남철, 김동석, 백남운 등의 시대적 풍운.
배성룡의 농민 독본, 김태오의 미학개론, 홍기문의 조선신화 연구, 이여성 등의 숫자조선연구 등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움.
이종하의 우리 민중의 노동사까지...
전문적으로 그런 책들을 읽기 어려운 독자(청중)을 위하여 맛뵈기라 보여준 그 강의들은 한국에서 열릴 뻔했던 인문학 연구의 르네상스가 분단, 전쟁, 반목의 과정에서 쑥대밭이 되었던 역사의 쓰라림을 되살려주는 아픔을 넘어,
미래의 인문학에서 반드시 계승하여야 할 전통이 있다면 이 싹이 자라고 결실을 맺을 때 쯤에야 이 연구의 가치가,
그리고 인문학 박물관의 존재 이유가 확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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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펭귄클래식 코리아가 100권 출간을 기념하여 선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겨울 방학과 봄방학을 이용해 읽었다. 

이번 책은 프랑스의 뒤퐁록과 랄로가 주해를 붙인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시학을 세 번째 읽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내가 국어교육과엘 간다니깐,
쪽집게 국어선생님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야쥐~ 이런 말을 한 마디 날리셨다.
그리고 책을 사 봤는데, 도무지 그 선생님이 이 책을 읽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시절, 무슨 강의에선지 기억도 가물거리는데, 암튼 시학을 읽었다.
우울하던 시절에 그냥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의문으로 남았던 것은,
<시학>에서 왜 <서사시와 비극>만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시>는 언제 나오는 건지...
하다가 결국 <시학>에는 <서정시>가 없다는 사실만을 기억했던 추억이 있다. 

이번엔 제법 두껍고 주해가 빡빡하게 달린 책을 읽으면서,
<시학>엔 시가 없고,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가래떡>엔 가래가 없고(우엑..),
<칼국수>엔 칼이 없고, <곰탕>엔 곰이 없고, <국화빵>엔 국화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알았다. 

시학이 쓰여지던 시대, 기원전 4세기 경에는 <서사시>와 <비극>만이 서양문학의 전부였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탄생한 문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그리스의 고전 <비극>이 다였던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동양에선 한자로 시를 남겼고,
각 지역에서 종교적인 금언들과 영웅 서사시가 풍미했지만,
<클래식>이란 것이 '전쟁이 나면 배 한 척 정도 희사할 수 있는 계급'에서 나온 말이라 하니,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서사시와 비극>이 곧 문학이란 개념의 대체였다 볼 것이다. 

그러니깐, 이제 읽고 보니, 이 책은 '제목이 시학일 뿐', 내용은 '그리스 로마 문명 중심의 문학 개론'인 것이다.
'시학'이란 제목에 홀려서 계속 '시'를 탐했던 독자가 어리석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과 <서사시>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내가 생각하는 <서정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된 것이다. 참 큰 공부 했다. ^^ 

이문세 노래 중, '시를 위한 시'란 노래가 있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이게 노래의 전부다.
화자는 곧 눈감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천상병의 노래처럼 '노을진 구름 언덕'으로 곧 돌아갈 소풍객이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면 화자는 눈감고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띄우겠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시>가 있다는 건지... 시를 위한...이 무슨 의미인지...
병마와 싸우다 숨진 작곡가 이영훈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쓴 노랫말 같기도 한데...
저 '시'는 혹시 영문 'C'가 아닐지... 마치 뜨거운 감자의 김C처럼...
<C를 위한 시>라면, 이영훈의 이니셜에도 C가 없으니, 작곡가의 composer의 이니셜인가 싶은 곳까지 상상이 미쳤다.
나는 아직도 <시를 위한 시>를 <Composer 작곡가 자신을 위한 시>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듣는 이 노래는 눈물을 꼭 동반한다. 특히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이런 구절을 이문세 목소리로 들으면,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이 노래는 작곡가 이영훈이 병석에서 쓴 노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제가 생각하기로 말이죠.)
<시를 위한 시>의 후자는 우리가 보통 쓰는 <노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만, 앞의 것이 좀 복잡해요.
저는 때 시 時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時를 위한 詩>라구요.

이제 곧 저는 <눈 감고 바람>이 될 거래요.
그 때가 되면, 당신은 마음 아파할 거 아녜요? 그러지 말래요. 마음아파하지 말래요.
꽃이 떨어져도, 나의 별들이 가을로 사라져도, 이 생명 이제 저물어도... 날 위해 울지 말래요.

그 때 時 가 되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는 갈 거거든요.
천사들이 나를 데려갈 거거든요.
그 때가 되면, 내가 눈 감고 바람이 되면요... 그대의 꽃잎도, 별들도 다 띄울게요.
나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강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갈 거거든요.

그 때를 위한 노래, 그 때를 위한 시,가 이 노래의 의미가 아닐까 해요. ^^(어딘가 내가 썼던 글)

다시 시학으로 돌아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기원전 4세기 경의 <문학 개론서>이다.
다만, 문학 literature이란 용어 자체가 구술성 orality 과 대비된 문자성 literacy에 기반을 둔 용어로 훨씬 나중에 개발된 용어임을 고려하면 함부로 <문학 개론>이란 말을 쓰기도 어렵다.

서양의  literature를 일본인들이 문학으로 번역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이라는 통상적 정의나,
<문학>의 갈래로는 서정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 있다는 장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이야기하던 시대와는 개념 자체가 천양지차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한 번은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문만 읽었고,
다음 번엔 주해까지 밑줄치면서 읽었다. 
물론 읽으면서 지나치게 전문적인 부분을 따질 때엔 휘리릭 넘어가는 방법을 쓰곤 했다. 

시학을 읽으면서 <그리스 대표 희곡선>을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쉬운 점은 아직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읽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작품들은 워낙 유명해서 줄거리를 많이 읽었고,
다이제스트로 많이 접해서 마치 <고전 홍길동전>을 한번도 읽지 않은 아이들도 홍길동 이야기를 꿰고 있는 것처럼 친숙했기때문에 읽는 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정도는 함께 읽어야겠다는 야망은 남아 있다. 

고전은 오래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의 '개념'을 최초로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되기 때문에,
거기서 다양한 <언어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데 가치가 있다.
<미메시스 - 모방 또는 재현>같은 용어도 거기서 출발했고,
<뮈토스 - 줄거리나 플롯>, <카타르시스> 같은 용어들이 탄생한 모태가 된 작품이어서 가치가 크다.
그의 <서사시>에 대한 이론이나 <비극>에 대한 이론들은 무성하지만, 잠시 이야기가 되다 만 <희극>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관심들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시학의 2권, 즉 '희극'에 대한 상상이 무한대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 이런 구절이 적힌 페이지에 독약을 묻힌 수사 호르헤의 이름은 <호르헤 Jorge>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모든 독서는 해석이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작업의 변명을 붙여 두며 시작한다.
이 책 역시 <시학에 대한 해석의 일단>에 불과하다는 겸손의 변명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원본과 번역이 상당히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학의 원문만 읽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하는 바가 읽히기 때문이다.
사실, 서사시와 비극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는 독자인 나로서는 주해 부분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책을 독파하려 마음먹은 이라면,
적어도 <그리스 비극 대표 컬렉션>이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정도는 함께 읽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힘이 닿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또는 <수사학>이나,
플라톤의 <국가, 정체>도 함께 읽는 것도 당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사시는 <줄거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 되어있고,
비극은 <분규와 해결>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분규와 해결 사이에는 <반전>이 놓인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강의 노트를 작성하였다.
이 노트는 출판용보다는 강의용이었기때문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분류가 일관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당시의 문학을 생각하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학의 분류와는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 옮긴이의 해제도 간결하고 깔끔하다.
리쾨르의 논문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번역의 어려움을 '낯선 것의 시련'으로 표현한 부분도 재미있고,
언어 번역에서 만나게 되는 '저항과 망설임과 거부'의 과정을 적고 있는 부분도 사족같지만 오히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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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0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를 위한 C'가 되려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그 지방 사투리여야 제대로겠는걸요.^^
님의 리뷰를 보면서 이 책이 이렇게 재밌게 읽힐 수도 있구나 싶어, 용기를 내보려구요~

글샘 2011-03-02 03:26   좋아요 0 | URL
時를 위한 詩...일는지도 모르구요.
떠나야 할 때를 위한 시인지도... 암튼 저는 저 제목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이 책은 재밌게 읽힌다...고 제가 쓰진 않았는데요. ^^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고 썼잖아요. ㅋㅋ
2500년 전의 '문학개론'이니 지금은 별로 재미가 없답니다.
다만, 워낙 저런 문학의 시원을 밝힌 책이 되어놔서 읽어둘 법은 하지요.
뭐, 용기를 낼 거까진 없구요.
저처럼 읽기를 권합니다. ^^
먼저 원문을 주루룩 읽으시고, 틈나는대로 해제를 읽으시면... 훨 쉬울 겁니다.
 
그리스 비극 걸작선 - <오이디푸스 왕> 외 3대 비극작가 대표선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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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대표작가라면 아이스퀼로스(아가멤논,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메데이아,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를 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서사시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을 최고의 예술로 여기는데,
그리스 비극은 특별한 구성을 갖고 있다.  

'프롤로고스'는 드라마의 상황을 제시하는 독백이나 대화 등이다.
'등장가'는 코러스가 부르는 노래이며,
'삽화'는 코러스의 노래 사이에 삽입된 대화 장면이다.
'정립가'는 코러스가 자리잡고 서서 또는 좌우로 움직이며 부르는 노래다.
'엑소도스'는 코러스가 오르케스트라를 떠나며 부르는 노래다.
비극에 따라 고인을 애도하는 '애탄가'가 들기도 한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은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의 첫번째 작품이다.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10년만에 귀향하던 날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욕조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아내는 함대를 이끌고 떠나는 남편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으며,
정부는 아가멤논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데 대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아이스퀼로스의 주제가 드러난 작품.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퀼로스 작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많다.
제우스를 도와 티탄 족을 이기고 올림포스 신족의 시대를 열게 해주었지만,
불을 주고 기술을 가르쳐 주는 등 인간을 편들다가 미움을 사
헤파이스토스 등에 의해 카우카소스 산의 암벽에 결박당한다.
이때 암소로 변한 이오가 지나자 그녀에게 제우스의 몰락을 예언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있는 드라마'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스핑크스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되고,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고 산다.
역병 창궐로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반드시 잡겠다고 하는 도중, 자신이 그의 아들임이 밝혀져,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제 눈을 멀게 한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골육상장 끝에 서로 죽이게 되자,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다른 나라 군대를 읶르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못하게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오라비 장례를 치러주다 크레온 앞에 끌여온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와서 천륜을 어기면 큰 낭패를 볼 것이라 하자 불안한 마음으로 석굴로 간 크레온은,
목매달아 죽은 안티고네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하이몬을 본다.
궁전으로 돌아온 크레온은 아내 에우뤼디케가 절망으로 자살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메데이아 신화 후반이다.
이아손이 메데이아 공주의 도움으로 황금 양모피를 구해 왔는데도 펠리아스가 왕위를 내주지 않자
메데이아는 속임수를 써 그를 죽인다.
추방당한 그들은 코린토스에서 행복하게 살지만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
절망한 메데이아는 복수를 다짐하고 하루 말미를 얻어 독이 묻은 드레스와 머리띠로 신부와 아버지를 죽게 한다.
그리고 메데이아는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이아손을 자식 잃은 아비로 만들고 싶었고, 이왕 죽을 것이면 어미가 하는 것이 낫다고...
메데이아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아손을 조롱하며 아테나이로 도망친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의 딸로 제물로 바쳐졌지만 마지막 순간 아르테미스가 사슴을 넣어 그녀를 구했다.,
여사제가 된 이피게네이아는 그리스인 두 명이 제물로 끌려오자,
고향에 편지를 전해주면 한 사람을 살려주기로 하고 편지를 읽어 주다 남매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인 두 사람을 세정한다면서 그리스로 탈출한다.

안티고네에서 하이몬 :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죄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런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니..."
이런 대사가 비극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메데이아 :
"우리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일에는 서투르지만
온갖 악한 일에는 가장 영리한 장인들이 아니던가." 

비극 속에 담긴 인생의 축도를 읽는 일은
비단 재미뿐 아니라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하는 일이며,
인간을 만남에서 비극은 탄생할 수 있다는 교훈도 준다. 

영웅의 이야기가 <서사시>라면,
운명에 의하여 고통받는 인간의 이야기가 <비극>이다.
요즘 읽고 있는 신곡처럼 구원의 이야기가 <희극>일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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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2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학>을 읽을 때 고대 그리스 비극과 같이 읽어보면 좋을거 같아요.
오히려 <시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고 비극 역시 비극 읽기 특유의
재미도 느끼게 되는 시너지효과가 있을거 같습니다 ^^

글샘 2011-02-21 17:13   좋아요 0 | URL
시학을 읽는 순서는요...
당연히 <서사시>를 먼저 읽고,
다음에 <비극>을 읽고,
그리고 <시학>을 읽어야 되겠지요.
<시학>에서 언급되다 만 <희극>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읽어도... ^^

양철나무꾼 2011-02-2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겨울 이 동네에서 '시학'이 유행해서 저도 장만은 해 놨는데...
범접할 수 없는 대상 마냥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메데이아'만 읽었어요.

이쯤되면, 독서 취향에 교집합이 없다는 말이 설득력 있는걸요~

글샘 2011-02-21 17:14   좋아요 0 | URL
저도 서평단 도서로 받아 읽고는 있는데, 워낙 띄엄띄엄이 되네요.
우리 업종이 2월은 정말 바쁜 달이거든요. 백조의 발놀림처럼... ㅋㅋ

제가 교집합이 없단 말은... ^^
양철나무꾼님의 장르문학 독서 취향에서 제가 워낙 멀어 드린 말씀인데
그게 가시처럼 콕 옆구리에 박혔나보네요. ㅎㅎ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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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일은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지리산 종주'의 경험과 같다.
삼박 사일 정도 코스를 꼬박 걷고 난 흐뭇함이랄까.
그렇지만 등산을 마치고 소감을 남기거나 사진을 제대로 찍은 것은 없다.
사진도 찍고 글도 쓰는 것은 가벼운 하이킹을 한 뒤에 여유롭게 즐기는 여기다. 
그래서 리뷰 제목도 저 따위로 적을 수밖에 없음을 핑계댄다.

플라톤의 <국가, 정체>를 마치 어린 아기가 발가락 힘으로 몸을 밀며 나가듯 읽었지만,
종주했다는 느낌 외에 어떤 감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정치학 개론>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가 민망한 뭐, 그런 기분이랄까. 

자꾸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본질이 한 눈에 확 꿰이는 그런 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고,
한 번 읽었다고 플라톤의 생각을 한 쾌에 꿰인 북어마냥 나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말을 하면 내 생각을 놓치거나 엉뚱한 생각을 적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국가>는 '나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정도. ^^
그래서 관습에 따라 제목은 <국가>로 적었지만, 본문에서는 이해에 도움을 주도록 <나라>라는 용어를 쓴다.
아무래도 <국가>라는 용어에는 <근대 국가>의 폭력적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이런 책을 남긴 시절만 하더라도 철학과 역사와 문학의 구별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분절적으로 '문, 사, 철'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가 폭력적으로 범주를 나눈 개념이고,
플라톤이 저술하던 시기, 제대로 된 역사는 남지 않았고, 신화를 기록한 서사시라는 문학이 책의 개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플라톤이 주로 인용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그리스 신화라든가, 호메로스 등의 작품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면서도, 이 글 전체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주로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희곡을 읽는 듯한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읽는 맛은 편안한 쪽이다.
다만 700쪽이 넘는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난코스는 별로 없는 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청소년 클래식으로 장영란의 책을 읽은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리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중간중간 어떤 휴게소가 있는지를 알고 걷는 일과,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걷는 일은 초행길에선 큰 차이가 있다.
물론 해마다 지리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무념무상의 행군이 더 큰 의미를 전수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 책을 읽었다는 데 의미를 둔다.
국가, 정체는 총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시적으로 <나라>의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것 정도 트레일의 개략을 남기면 되겠다. 

그리고 왜 시를 가르치지 말자고 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이해가 간다.
전체는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이렇게 하나라도 기억에 남는 것이 초심자에겐 심리적 위안이다. ㅋㅋ 
168쪽의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등의 신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엽기적 행각을 읽어 보면 음... 그런 것들은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나도 든다. 막장 드라마에 <15세 미만 관람 불가> 딱지가 붙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되겠다.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가 계층에게 구현되어야 나라가 <올바름>을 이룰 수 있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올바르게 사는 일> <잘 사는 일>의 거시적 버전의 비유라고 했으니,
개인도 관리자로서의 지혜, 지킴이로서의 용기,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절제, 그리고 정의에 대한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정도는 읽었다. 

그의 '철인 통치'는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사색>과 연관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지혜로운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반드시 <사색>의 파이프오르간이 저음으로 깔리는 <나라 polis>를 만들 수 있고, 그런 <정체 politeia>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을 '좋음'의 유비라고 하였고,
인식을 <상상, 짐작 - 믿음, 확신 - 추론적 사고 - 지성에 의한 앎, 인식>의 선분에 비유하였으며,
동굴의 비유로서 실재계와 인식의 오류를 표현하는 등 다양한 비유를 활용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다. 

잘못된 정체의 하나로 민주제를 들고 있는 점도 재미있다.
민주주의를 만병통치약으로 삼고 팔아먹는 약장수를 믿는 넘이 어리석다.
절대선과 다수결 사이의 부조리를 플라톤은 예견했던 것이다.
숫자가 많은 우중에 의하여 헝클어진 정치는 참주 정체를 낳기도 하는 법.
철인 정치에 대한 그의 순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수학과 천문학 등에 대한 관심을 결코 철학적 관심과 별개로 떼어 생각하지 않는 통합적 관점이 현대처럼 분파적인 학문의 '통섭'의 노력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올바르게 사는 삶>은 <인간들에게 받는 상> 뿐만 아니라 <신들에게서 받는 상>까지 이야기한다. 

영리하며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출발점에서는 잘 달리나 반환점부터는 그러지 못하는 달리기 선수들이 하는 바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이들은 처음에는 날쌔게 출발하나,
결국엔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데,
어깨 위로 귀가 처진 짐승 꼴을 하고서 화관도 두르지 못한 채 경주로를 빠져 나가네.
반면에 진짜로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은 끝까지 달리게 되어 상도 받고 화관도 두르게 되네.
올바른 사람들의 겨우에도 대개는 이렇게 되지 않는가.
그들은 모든 행위나 교제 그리고 생애의 끝에 이르러, 좋은 평판도 얻게 되며 인간들한테서도 상을 받게 되겠지.(650)

그 뒤엔 마치 불교 설화 속의 '극락과 지옥'이나 단테가 이야기한 '천국과 지옥'처럼 인과응보의 결과를 받는 에르의 이야기가 덧붙어 있는데, 어찌 보면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어수선해 보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낳은 치밀한 논거에 따른 증명이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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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02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학 개론 읽고 독후감 쓰기 민망한....ㅋㅋ 그런 느낌 알아요.
지리산 종주 축하드립니다. 근데 종주 해보신거죠? 안해 봤으면 말을 하지마~~~~
편안한 설 명절 되세요^*^

글샘 2011-02-07 01:08   좋아요 0 | URL
이제 플라톤 다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있습니다.
플라톤보단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 전공과 관련이 있으니 훨씬 재미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