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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다락방 -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
이지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꿈은 이루어진다.
2002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가 카드섹션으로 보여준 멋진 문구였다.
과연 월드컵 1승의 꿈은 이루어졌고, 무시무시하게 4강까지 올라가는 기세를 보여주었다.
장미란 선수도 운동하기 전에 마인드 콘트롤을 위하여 성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매일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미래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과거에 성공한 몇 사람을 거명하면서, 그들이 성공한 것은 모두 '생생하게 꿈꾸었기 때문'이라는 귀납적 결론을 내리는 일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넘어, 오히려 반례가 더 많은데도 억지로 일반화하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래 사회는 불확정성의 사회이고,
다원화되는 것이 극도로 당연시될 사회이다.
그런 이들에게 꿈꾸라는 것은 당연히 다양한 꿈을 꾸고,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을 그려 보라는 말과 이어져야 할 것인데,
내 치즈를 가져간 쥐들을 찾으려 노력하기 전에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고,
겅호에서처럼 '함께 변화해야 하'는 것이 미래 사회의 미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저자는 인문학을 리딩하면 리더가 된다고... 강변했지만,
리더가 되는 일이 과연 중요한지,
리더의 리더십이 올바른 철학에 기초하지 못했을 때, 삽질로 끝나지 않고 다시 제2의 4.19를 부를 수 있는 시대로 퇴보할 수도 있음을 공부하지 못한 책으로 읽혔던 것처럼,
이 책의 긍정적 심리학도 그 거명된 사례들이 과연 적절한가를 살펴본다면... 내 생각은 글쎄요... 이다.
그의 철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피카소'와 '반 고흐'의 대조다.
화가 아버지의 빈틈없는 교육과 후원 아래 네 살부터 그림을 그린 피카소.
그리고 27살부터 그림을 스승이나 인도자 없이 그린 고흐.
고흐가 더 천재지만(?), 피카소는 생생한 꿈꾸기를 했다고?
그래서 고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울질이었고, 꿈꾸는 피카소는 돈도 많이 벌었다고?
저자가 스스로 피카소의 환경을 꿈꾸기 좋다는 것을 적었으면서,
그리고 고흐의 환경이 얼마나 화가되기 힘들었는지를 적었으면서도,
고흐가 더 천재인데 피카소가 돈을 벌었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공해야 제대로 산 삶이라 볼 수 있다.
돈을 벌어야 성공한 삶이라 볼 수 있다.
우울증 걸리고 자살한 인간은 실패한 인간이다.
돈도 없고 우울한 인간은 실패한 인간이다.
이런 철학에 기초한 이야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도 아이들에게 의욕을 북돋우려고 긍정적 심리학을 많이 쓰는 편이다.
네스멧 소령처럼 감옥에서도 정신적 승리를 거둔 이들 이야기도 단골이다.
그러나 "사람의 성공은 돈이나 학벌, 능력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꿈꾸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도,
그가 거명한 이들은 모두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 또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다.
꿈꾸는 능력은 물질적 성공이 아니더라도 성공한 삶을 살게 하여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좋다.
그러나, 자신까지 거명하면서 성공의 부류로 잡는 것은 좀 오버액션이다.
사고라는 것은 하나의 물체다. 사람의 사고가 부를 부른다.
이렇게 카네기처럼 '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든가,
성공과 부를 동격으로 놓는다면... 이 좁은 나라에서 부를 움켜쥔다는 것은, 글쎄,
견리사의 견위수명이라고 일갈했던 안중근 의사도 꿈이 적었던 인간으로 격하당하는 걸까?
노력하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 는 말도 있다.
그것은 돈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돈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부자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돈만으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집착은 파멸을 낳는다고 하였다.
생생하게 꿈꾸기가 <권력>과 <물질>을 향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집착에서 모든 <고통>과 <파멸>이 인과지어진다.
생생하게 꿈꾸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미래>여야 한다.
그 미래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삶 자체>여야 하는 것이지, <소유의 정도와 가치>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레 꺼내기도 쑥스럽다.
저자는 마치 어떻게든 네 잎 클로버를 움켜잡으려 생생하게 꿈꾸고 몸부림치라고 외치는 전도사 같다.
주변에 널린 세 잎 클로버를 소중히 여기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근래의 카이스트나 설대 졸업생 자살 사건을 보면서,
네 잎 클로버만 추구하는 철학없음의 경쟁적 공부가 어떤 결말을 보여주는지,
정말 필요한 것은 세 잎 클로버의 소중함과 철학 속의 인간적 가치를 공부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겹쳐 하게 된다.
다락방에서 꿈꾸는 일은 일생의 보배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꿈꾸는 자가 이현세의 '마동탁'처럼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달려갈 때 그의 출세에 그저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딴지거는 글을 끄적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