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 -전반전
김호식 지음 / 시와사회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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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이 영화를 계속 안 보고 있었다. 아니 볼 기회가 없었다. 유치해 보이고, 또 그런 류의 영화가 다 너무 가벼우니깐... 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시나리오라면 시나리오고, 통신에 오른 가십이라면 가벼운 유머인 이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상큼한 유쾌가 돋보이는 문체였고, 재미있었다. 다소 필연성이 떨어지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전지현이란 모델이 갖는 상큼함과 엽기적인 소재들의 연속성에 이야기의 탄력성은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의 인위적인 결말이 시시하지만, 지하철 속의 그녀와 달려오는 견우, 기차를 탄 그녀와 굴러떨어진 견우, 그리고 결국 운명적인 만남의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꾼의 재치있는 이야기였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죽음과 대척점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과정이 곧 죽음에의 과정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가 잊지 못하는 죽음은 그녀가 삶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강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새로운 나무를 심어 줄만큼 애정이 강한 견우의 설정도 죽음에 이은 삶과 죽음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운명적인 만남을 위하여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을 택할 수 있으리라.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들이 얽힌 이야기는 언제나 슬프다. 오늘 우연히 ocn의 영화를 보았다. 마지막에 괜시리 눈물이 났지만,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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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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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강아지를 사랑한다. 자기 새끼로 여기고...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애완견을 출입시킬 수 없는 곳에도, 자기 새끼는 출입시킬 수 있는 당당함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는 세상으로. 그녀가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살아온 시대가 겹쳐지므로 우리 386세대가 가진 정서의 상처와 감정적 세련되지 못함과 이념적 과격성과 논리적 만족을 위한 탐구가 상당 부분 공감 가는 작가였다. 그러나, 그 위대한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하부 구조는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고...

우리의 하부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 식민지 경제에서 원조 경제에로, 자본주의 신식민지 시대에서, 자본주의 신경제주의로, 공산-자본주의의 대립의 시대에서, 화해의 마스크를 둘러쓴 페레스트로이카와 노스트글라스(개혁, 개방)을 빙자한 공산주의 몰락의 시대로 경제적 하부 구조가 변하면서, 우리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던 상부구조로서의 문학의 가치는 신경제정책(자본주의적 패권주의의 다른 이름)을 외치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저주스런 군홧발 아래서,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당랑(사마귀)이 되지 않으려고 착각하면서, 병신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각각의 인간은 파편화된 채고. 남들이야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건, 노숙자 몇 쯤 굶어 죽건 말건... 나는 개 한 마리 안고, 중국으로 가기도 하고, 먼 길 떠나서 정신적 자위를 하며(혹자는 이런 걸 플라토닉 러브라고 했던가? 플라스틱 러브라 했던가.) 헛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땅에 살아간들, 그 나라가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된들, 정신적인 왕따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우리 나라를 정말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멀고 먼 길을 떠나서도 애증에 한스런 푸념으로만, 유리창 밖 어슴프레 떠오르는 새벽 불빛에 떠오르는 마네킹 대가리들 보면서나 월하에 공동묘지 얽힌 전설을 떠올리며 살거나.

참 슬프게 하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처절하게 슬퍼보이지 않는데, 나 혼자 슬퍼서 가슴 젖은 오후... 이십년 전 농활 가서 쫒겨나면서 흘리던 눈물이 아직도 가슴에 젖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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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유혹 1
귀여니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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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역시 재주가 지나치게 승해서 쉬어야 할 때로 보인다. 그놈... 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과천이란 동네를 소재로 삼아, 깡패녀석들의 시시껍질한 사랑얘기였지만, 나름대로 소설의 작법을 아는 듯이, 반전을 시키기도 하고(김한성이 예원이네 집에서 출근하는 장면), 승표와 예원 친구를 엮는 데서는 제법 인생에 대해서 많이 아네?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영... 아니다. 그놈... 에 비해서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 그냥, 정태성이란 놈이 계속 얼렁거리는데, 피씨방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도 썰렁하고, 마지막에 눈까지 기증하는 대목에선 너무 작위적인 멜로물의 시시함에 눈물이 난다.(하품) 인기라는 것의 유혹을 이겨내야 될텐데...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게 늑대의 유혹에 넘어가기 보다 훨씬 쉽다. 속물적이고.

썰렁하기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고3이란 녀석이 전학 가는데 며칠씩 집에서 노는 데도 있나? 그리고 태성이네 오피스텔인가 뭔가엔 전기가 끊어졌다면서 한경이는 땅바닥에 분필로 쓴 글씨를 잘도 읽더만, 그러다가 경비 아저씨가 전기세를 내 준다고? 그런 훌륭한 경비가 대한민국에 있단 말이져? 그리고, 귀여운 애야. 넌 안양에서 과천 가 봤니? 안양에서 과천 걸어도 두 시간이면 갈 거린데, 지하철로 10분 거리고, 버스타도 10분이면 가는데, 수원까지 전철로 가서 버스를 타는 건 도대체 무슨 생고생이래?

또 전학온 정한경이가 왜 3학년 3반 13번이지? 생긴 꼴로 보면 남녀공학인 모양인데, 12명밖에 없었나? 어떻게 그런 환상적인 번호를 따낼 수 있을까. 학교를 안 다녀 봤던지, 아님, 학교에 관심이 없는 거 아닐까. 이 대한민국에서 돈도 안 받고 수술 해 줄 착한 병원도 있나요? 보호자도 없는데, 입원도 잘 되고, 수술도 잘 해주고, 심장병 환자가 쌈박질도 잘 하고... 나중에 보면, 이보정이 보낸 메시지를 지워놓고, 다시 해원이한테 확인시키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쓰는 데 지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귀여니. 좀 쉬었다 쓸 생각은 없니? 아까워서 하는 소리야. 재주가 승한데 비해, 아직 생의 경험은 조금밖에 없는데, 인기의 유혹을 조금만 접어 둔다면, 큰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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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2003년 제2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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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바다를 건너다니... 세상에는 저런 거짓말도 있구나. 그러자,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리고 내 아이의 아빠라는 남자가, 내게 기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별것 아닌 것처럼도 여겨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거짓말들 중에, 내가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짓쯤은 별것도 아닌 것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김인숙이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살아온 시대는 대부분 겹쳐지는 삶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상징성들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한 구체성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그의 나비는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러나 그 나비는 공주처럼 저려서 새파란 초생달이 시린 김기림의 나비보다도 훨씬 처절하다. 이 시대가 낭만적 '서거푼'(서글픈) 나비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 생각이 맞을거다. 이 시대는 소줏집 포장마차에서 술을 기울이며 '인숙아'하고 부를 뿐인 선배 문인들처럼, 더 이상 말을 잇는다면--- 그건 몸통만 남은 나비 내지는 몸통은 녹아내리고 날개만 녹아 뚝뚝 흘러 내리는 나비에 불과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모더니즘 작가 김기림과 같은 제목의 '바다와 나비'를 읽는 것은 삶의 진실은 이런 것인가, 서글프고 그 한에 묻혀 살아갈 따름인가... 하고 생각한다. 포스트 모던한 김인숙이나 모던한 김기림이나, 시대의 아픔을 상징으로 드러내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나비를 설정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수십년의 연도를 건너뛴 원형적 상징일까. 전상국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기쁨이었지만, 소감은 역시 포스트 모던의 시대구나. 싶어 씁쓸하다.

이번 이상 문학상의 절창은 김인숙과 복거일의 동거에 있다. 복거일은 쇼우와 64년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로봇의 시대로 상상력을 넘치는 거 같지만, 김인숙의 소설 속엔 진실이 넘실대는 반면, 복거일의 소설엔 진실성은 부족하다. 복거일씨, 당신은 그 영어공용어의 공룡같은 이상을 왜 진실성 풍부한 소설에 담아내지 못하는가. 어설픈 조선일보식 파시즘의 전파에 가장 적절한 양식이 소설임을 당신은 모르는가?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에 드러난, 어슴프레하게 나타난, 영어의 시대가 가고 중국어의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 자식을 중국에 유학 보내는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얼어죽을 공룡어론'으로 오버램 되는 건, 내 상식의 무지함의 소치다. 플라나리아 보담은 김인숙의, 아니 그 신랑의 외침이, 술에 취해 술주정 속에서나 담아낼 수 있는 포스트 모던의 절규가, 모더니즘의 낭만보다 비극적임은, 내 삶의 적당한 낭만적 절규보담은 삶의 진실성에 앞선다고 읽는다. \김인숙씨의 착실한 진보에 박수를 보내며, 복거일의 몰락에 탄성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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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마음
조향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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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생님은 호박같이 생기지 않았다. 호박처럼 펑퍼짐하면서도 넓적한 호박잎 사이로 떡벌어진 엉덩짝을 푸짐하게 깔고 앉은 노점상 아줌마같이 생기지 않았고, 뾰족한 뾰중새 닮았다. 난 그 선생님과 10년 전에 한 번 수능 시험 감독을 같이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선생님은 전혀 모르겠지만... 조선생님의 시에는 투명한 따사로움이 묻어있다. 파스텔 톤의 봄 햇살이 나뭇가지와 재재대는 참새 소리 사이로 아스라히 비추이는 교정이 있고, 그 옆에 참새보다 더 재재거리는 지지배들이 있고, 낡은 교실과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며 그 모습을 저만치서 바라보는 태극기가 있다.

님의 침묵을 가르치면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정수박이로 슬픔을 쏟아 붓던 그의 희망론을 읽어 내기도 하고, 봄비에 새싹 돋는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섬세한 귀가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에는 상실의 아픔이 담담히 잠겨 있다. 돌출되지 않았을 뿐, 잠겨있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아픔의 빛. 아픔의 내음새. 그리고 선생님의 글에서는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길가에 피어있는 잡초와 풀꽃데미와 함께, 논과 밭 사이로 넌출지게 흐드러진 호박넝쿨처럼 헝클어져 열려 있다. 헝클어졌지만 어지럽지 않고 오히려 정겨운 길이다.

그 밭두둑엔 넓적한 호박이 툭 소리 내며 날 좀 보란 듯이 버티고 앉았다. 변명따윈 필요 없었다. 호박이 익어 있는 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저절로 그러한 것이었으니까. 길을 돌이켜 보면,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저 머얼리 학교 그림자 비추이고, 하늘엔 멀리서 초저녁 부지런한 별 한 녀석 반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하늘은 하늘색이었다가,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며 저녁놀을 맘껏 풀어 놓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지치면 남보랏빛으로 붉은 자줏빛으로 검보랏빛으로 바뀌는 하늘을 지붕삼아 펑퍼짐한 엉덩이로 대지를 깔고 앉아 하늘을 맘껏 누리는 새와도 같이, 가슴 활짝 열어 놓고 누운 호박같이 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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