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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십만 톤 하는 배의 진수식...
배의 진수식 광경은 장엄하다.
그 큰 배가 바다로 풍덩 빠지면서 금세 넘어갈 듯 기우뚱 하는 순간은
88열차의 수직낙하구간보다 더 아찔하다.
그렇지만 금세 부력을 얻어 중심을 잡아 제대로 서는 배를 보면 저절로 박수가 쏟아진다.
그런데 배가 쓰러지고, 누웠다.
하필이면... 이겠지만 2014년 이후 누운 배는 쓰러진 나라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필이면... 누운 배는, 이 소설에서도, 무너진 세상의 이치였다.
일을 일로 하지 않는 회사는
야합과 담합으로, 협잡과 인습으로,
사람에게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에 사람을 끼워 맞춰가며 시키는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326)
만화 '미생'이 회사원의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한 작품이라면,
'누운 배'는 회사의 부정적인 면을 극대화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혁신이 무엇인가? 이노베이션.
이노베이션은 무엇인가? 혁신.
이런 식으로 두 외국어 사이를 오갈 뿐
실상 무엇을 의미하고 의미해야 하는지...(190)
결국 혁신은 이노베이션이었다.
부자들을 위핸 개발에 불과했고,
그럴듯해보일 뿐, 바뀐 것은 없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른채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썩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306)
썩은 배는 결국 사회에 대한 은유만도 아니었다.
우리 삶이 일회성이고,
길들어버리면 누웠다 일으켜도 썩어버린 결과만 남을 수도...
회사는 여전히 이런 회사고
현실도 계속 이런 현실일 것이다.
어느 곳에나 바담풍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았다.
도망쳐도 되돌아오고 그만둬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곳.(295)
벗어나 수도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세상을 욕해선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게으르지 마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남는다.
쓸데없는 의전으로 시간을 보내고,
밀려나고 뿌리뽑히고 버려지면 실패,
잠시 승리해도 무한정 지킬 수 없는 실패.
심판도 규칙도 없는, 오로지 요행의 세상.
악순환의 바퀴,
이런 회사 생활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미생'에서는 인물이 살아 숨쉬는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화자가 평면적이고,
반동적 인물들도 생생하게 살아 튀어나오지 못하는 한계가 아쉽다.
모든 주체가 책임은 회피하고 이익과 자기 보전만 좇았다.
얻어야 할 것을 얻기만 한다면 사실 따위 아무 상관 없었다.
누운 배라는, 자명하고 육중한 사실조차 그랬다.(65)
지금 나라라는 것이 그렇다.
나라 꼴이 밑창으로 처박혀 누더기를 입은 형국이어도
제 보전만 좇는 인간들이 천지로 널려있다.
이 나라가 그저 누운 배다.
사람들은 원인에 관해 말했지만
사실 책임에 관해 말했다.(20)
원인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이치를 따져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지만,
책임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면책에만 목표가 있다.
이 소설이 훌륭한 것이 그런 점이다.
나라의 상징이며, 체제의 상징이고, 삶의 상징인 것.
다소 아쉬운 형상화의 문제에 천착하여
기억에 남는 인물을 한둘 남겨주었더라면,
첫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될 수도 있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