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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예찬 - 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 ㅣ 예찬 시리즈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평점 :
애도... mourning.... 죽음이나 상실을 아파하고 슬퍼하는 일을 애도라고 한다.
개인적인 애도의 경험은 누구나 다를 것이다.
어린 시절 겪게 되는 가까운 존재의 상실은 '성공적인 애도'에 실패하여 평생 트라우마에 가까운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사회적인 애도도 있을 수 있다 .
재임중 욕도 많이 먹었지만, 급작스런 서거로 국민적인 애도를 받은 전 노 대통령의 경우,
아직도 애도가 진행중인 분일 수 있다.
2002년 6월13일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여름, 아스팔트에 깔린 두 여중생의 넋에 대한 애도도 끊이지 않고,
일본군 성노예로 존재를 부정당한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애도도 진행형이다.
이 책은 2010년~11년까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애도'란 꼭지로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주로 서양 문학 작품을 소재로,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과 관련지어 애도의 의미를 짚어보는 책이다.
그 사이에 천안함 사태(2010), 일본 3.11 쓰나미(2011)가 일어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프로이트와 데리다가 자주 등장하는데,
결론적으로 프로이트는 '죽은 사람'은 이미 간 거,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동네 어르신같은 이야길 한다.
반면 데리다는 '애도는 끝이 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성공한 애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둘 다 맞다.
죽음이나 상실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가버린 사람과, 남은 사람. 그 어느 하나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버린 사람에게는 종지부(마침표 .)가 찍힌 하나의 완료형 사건이 되겠지만,
산 사람에게는 그 사건은 하나의 느낌표(!)이자 물음표(?)일 수도 있고, 쉽게 잊히지 않고, 데리다의 말대로 끝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말줄임표, 말없음표, 말이음표(......)로 진행형인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젊은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야, 처음하는 거니깐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 ㅋ' 이런 말을 한다.
'다음에 하면 잘 할 거니깐 ~ ㅋ' 이렇게... 말이 씨가 될라. ㅎㅎㅎ
그치만 모든 죽음은 <첫죽음>이다. 고인이나 남은 사람에게나 학습 효과가 있을 수 없다.
내 생각은 데리다 편이다.
쉽게 애도에 성공하는 죽음들도 많다. 가까운 사이라도 장례식장에서 애도가 끝나는 일도 많다.
예전이 3년상이 요즘 49재로 줄어든 것이 그 방증인데, 뭐 애도랄 것도 없는 돈놀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애도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 애도, 즉, 성공하지 못하는 - 애도에 실패한 케이스들이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슬픔에는 끝이 없어야 하며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애도일지 모른다.(18)
그의 이야기 중에서도 첫꼭지인 '폭풍의 언덕'이 가장 인상적이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나보다 더 나야."...
아,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캐서린의 이 말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들먹이기엔 너무도 큰 마음이다.
한자어에 '지음'이란 말이 있다. 남의 마음 속에 들어앉은 듯, 사람을 읽을 수 있을 때 쓰는 말이다.
'막역'한 친구. 어떤 말을 해도 마음이 거슬리지 않는 친구. 바로 캐서린이 느끼는 히스클리프다.
그런 이들에게 애도에 성공... 운운함은 사치로 여겨지지 않을까?
철학은 산 사람의 존재를 파헤치는 동네다. 죽음의 세계를 종교나 정신분석학으로 미룬다.
그래서 철학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다.
문학으로 죽음과 애도를 설명하는 데 대한 작가의 변명이다.
죽음에 대하여 안티고네처럼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애원이지만 지극한 슬픔에 논리나 이성이 있을 턱이 없다>는 편이 오히려 논리적이고 설득적이다.
몇 년 전, 국가가 국민한테 해 주는 게 뭐가 있냐?던 박성광이 나올 무렵,
4가지 없는 광고가 있었는데, 남편 죽고 10억인가 받았다고 편안해하던 아줌마의 보험 광고였다.
남편의 빈 자리에 아파하는 동안, 경제적 궁핍까지 겹친다면 더 큰 고통일 수 있으나,
아픔은 충분히 아파하는 것만이 살아남은 자의 몫일 수 있는 <삶과 사랑>의 편에서는 그 광고가 불편했다.
애도란 결국 <몸에 의한 몸을 위한 몸의 애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몸에 집착하는 존재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밥이 넘어가면 먹으면 된다. 그러나, 몸이 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애도다.
친구가 죽었는데 묻고와서 살아지면 살면 된다. 그러나, 밤마다 생각나서 술을 찾게 된다면, 그것이 애도다.
죽음 앞에서 일상으로 복귀해서 억지로 살아야 하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러나, 삶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계속 눈물이 나고 마음이 허방다리를 짚는 듯하여,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꿈속에서 계속 만나는 고통을 겪으며 울어야 한다면, 그것이 애도다.
밥을 못 먹고, 술에 의존하고, 우울증과 울음에 매몰되는 애도를 '애도 작업의 실패'라고 말하는 프로이트는 애도에 대해서는 아마추어다. 아니면 인간에 대한 애정따윈 비과학적인 소재라고 무시하는 냉혈한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그사람을 고통스럽게 애도하다가,
돌이되고 싶고 돌이 되어서도 그에 대한 애도를 계속하고 싶은,
살아남은 사람의 심리적 진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도다.
성경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건 '욥'이다.
자식의 죽음과 온몸을 둘러싼 질병, 그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욥기>가 제기하는 수많은 질문들은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물음표로 찍힌 채 그대로 두는 것이 불만스럽더라도 정직하고 현명한 것이라고 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욥기>를 통해, 침묵도 애도의 한 방식이며, 저항이나 절규, 절망도 애도의 한 방식일 수 있음을 보여주다.
인간의 삶은 죽음의 자리에서 증명된다고 한다.
"어쩌면 존재가 사라진 후에 다른 존재에 남긴 공동의 크기가 살다 갔다는 존재 증명의 전부"일지 모른다는 박완서의 말.
나란 존재를 다른 사람들은 얼마만한 자리에 갈무리해 둔 걸까?
그건 죽어 보면 안다. 그 존재를 가슴에 담아 두었던 것인지...
그 존재의 쓸모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
그래서 정승집 개가 죽으면 찾아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던가...
'나보다 더 나'인 존재를 잃었다면, 그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런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프로이트라는 사랑에 대한 아마추어의 이론에 둘러싸인 정신과 의사가,
"슬픔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고, 피상적이고 일률적인 처방을 되풀이하여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울프가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239)
구제역 걸린 가축들을 생매장하던 비극적 동영상을 잊을 수 없다.
홀로코스트란 것이 신에게 바치는 번제였다면,
구제역 홀로코스트는 악마에게 바치는 악마의 피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잔인하고 불필요한 짓"이라고 한 무명의 여성이나,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은 꼭 인간을 대상으로 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 소설 중에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은 <죽은 이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누가 그에게 감사했는지>만을 조사한다. 긍정적인 것만을 기억함으로써 죽은이의 특수성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자세는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한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애도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문제고,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그리고 마침표가 쉽게 찍히지 않는 것이,
아니 마침표를 쉽게 찍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애도의 본질이다.
애도는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일지 모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의 싸움일지 모른다.(307)
삶은 행복할 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노예로서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 때, 질병으로 삶의 하루하루를 저주할 때,
없어졌으면...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폭력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 죽음 후엔 애도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할 따름이다.
공동체가 사라졌다.
공동체가 사라진 자리에, 공동체의 애도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개인의 사회가 아직 건설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개인의 삶,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인지 정립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의 삶과 개인적 삶의 소중함을 마친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형식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애도를 완성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뜨겁게 사랑하였던 사람만이 애도할 수 있고, 애도에 실패할 수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말에 '애도'를 붙이는 것은 애도에 대한 모욕이므로...